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祕錄

1987년 외교문서로 본 南과 北

북한 87년 대선 40여 일 앞두고, “노태우가 될 것 같지만 혹 김대중이 되더라도 큰 기대 안 한다”고 말해

글 : 최우석  기자

글 :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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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당선이 확실해서?… 북한은 왜 87년 대선 직전 KAL기 폭파사건 일으켰나
⊙ 제3 땅굴 건설에 조언한 일본 건설업체 대표 하야시 데쓰(林哲)는 누구?
⊙ 일본 정부가 앞장서 자국의 건설업체 대표가 방북, 땅굴 건설에 조언하게 한 이유
⊙ 현재 북한의 땅굴 기술은 전시 민간 전투지휘소까지 모두 지하에 건설했을 정도로 발달
  1987년 6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를 하자고 하면 그걸 수용하는 담화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29일 ‘독자적인 구상’인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온 노태우의 선언에 국민은 깜짝 놀랐다.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등을 대통령께 건의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것을 ‘5공 정부의 대(對)국민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전국은 일시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6·29선언은 6월 항쟁의 소중한 결과물이자 ‘87년 체제’로 알려진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됐고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여야 합의로 마련된 새 헌법은 10월 27일의 국민투표(제9차 대한민국 헌법 개정을 위해 찬반 직접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했다. 선거일은 12월 16일이었다. 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국민은 환호했다.
 
 
  87년 11월 7일 일본으로부터 날아온 대외비 문건
 
1987년 11월 7일 《요미우리》 방북 관련 주일대사 보고 문서. 1987년 대선에 대한 장웅 당시 올림픽 사무국장 등 북측 인사들의 의견이 담겨 있다.
  대선을 40여 일 앞둔 시점인 11월 7일 이규호 주일대사(제8회)는 최광수 외교부(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대외비 보고 문건을 보냈다.
 
  제목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이었다. 문건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겼다. 1987년 대선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선이었다. 1874년 창간한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최대 일간지로 하루 1300만 부 이상을 발행한다. 2015년에는 지령 5만 호를 돌파했다.
 
  다음은 문건의 내용이다.
 
  <《요미우리》 외신 면에 3회에 걸쳐 게재될 취재 내용이다. 《요미우리》(기자)의 북한 체류 중 주요 접촉인물은 장웅 올림픽 사무국장, 한득보 사회과학원 연구사 및 조선 국제여행사의 김 과장 등 3명이었다. (《요미우리》는) 한국 대통령 선거 전망에 대해 물었으나, 대답은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고, 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조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함.>
 
  당시 올림픽 사무국장이었던 장웅은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IOC 총회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야당 대표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4자회담을 갖고 있는 모습. 사진=조선DB
  북한은 1987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한다고 거의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당시 민주화 열풍 속에 국민은 야당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분열 때문에 결국 여당 대통령이 당선되고 말았다. 선거 결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36.6%로 당선됐고 김영삼(28%), 김대중(27.1%), 김종필(8.1%) 순으로 득표율을 기록했었다. 양 김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 후보보다 416만 표가 많았다.
 
  북한이 “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조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고 말은 했지만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KAL기 폭파사건이다. 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KAL858기가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 폭발, 탑승객 115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위대한 보통사람, 믿어주세요”를 외친 노태우 후보가 승리한 데에는 3김의 분열도 있었지만, 이 사건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5김(3김과 KAL기 폭파범 김승일·김현희)”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97년 김대중 후보는 4번째 도전만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 만에 이룬 꿈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김정일과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만약 1987년에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면 남북정상회담 시기는 앞당겨졌을까. 북한이 했던 행동으로 봐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소련 출신 김정일 백두혈통 만들기
 
1987년 11월 7일 《요미우리》 방북 관련 주일대사 보고 문서. 금강산댐 건설 관련, 김정일 우상화 작업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금강산댐은 계획은 끝났으나 물자 부족으로 본격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음. 요미우리 취재로는 평양시내 건설에만 시멘트 약 200만 톤, 철근 24만 톤(1개월 1만 톤)이 소요돼 물자 부족을 겪고 있음.>
 
  1986년 10월 당시 5공 정권은 “북한이 서울의 3분의 1을 삽시간에 물바다로 만들 수 있는 최대 저수능력 200억 톤 규모의 금강산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그 댐을 터뜨리면 여의도 63빌딩 허리까지 물이 차고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보일 것이다.”
 
  북한 수공(水攻)에 대응할 댐 건설을 위한 대대적인 성금 모금이 시작됐다. 총 모금액은 661억원. 평화의 댐은 1년 만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북한은 금강산댐 공사를 중단했다. 수공 위협설은 ‘정권 후반기에 시국안정과 국면전환을 위해 조작한 것’으로 결론 났다.
 
  이런 내용도 있었다.
 
  <백두산 쪽 동쪽 두만강변의 무포가 김정일의 어린 시절 낚시를 하던 곳으로 성역화되고 있음.>
 
  북한은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일성 일가를 ‘백두산 혈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신성(神聖)의 영역이다. 이를 위해 김씨 일가는 백두산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거짓 선전을 해오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 72년 5월 자신의 출생지가 백두산이라고 말하면서 자칭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간부들과 백두산 산행을 했다고 주장한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백두산은 수령님의 혁명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의 성산이며 나의 고향입니다. 나는 백두산의 아들입니다.”
 
  김정일은 지난 42년 2월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병영 브야츠크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이름도 소련식의 ‘유라’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82년부터 출생지를 백두산으로 조작, 이를 사실화하기 위해 현지를 우상 성역화해 주민들과 방북 인사들의 필수 참관 코스로까지 지정했다.
 
  북한은 그 후계자 김정은에 대해서도 “김 대장은 백두혈통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어머니는 재일교포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은 김일성과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을 정도로 ‘백두혈통’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3 땅굴 건설에 조언한 하야시 데쓰는 누구?
 
1987년 12월 4일 ‘북한방문자 특이진술내용’ 주 나고야 총영사 보고 문서. 하야시 데쓰라는 토목기술자가 1983년 7월 방북해 땅굴과 관련된 자문을 해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선 내용이 담긴 문건은 지난 3월 30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7년 비밀 해제 외교 문서(모두 1420권 23만여 쪽) 중 하나다. 정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심의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23만 쪽의 외교 문서 중 총 4권으로 구성된 ‘일본·북한 관계’ 문서에는 앞서 공개한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북한 방문 관련’ 제목의 문건이 담겼는데, 이외에도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북한이 1983년에 일본 기술자를 초청해 땅굴과 관련한 조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건설업자가 직접 땅굴을 둘러보며 자문까지 해줬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북한 관계’ 문서 내 ‘북한방문자 특이진술내용 보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1948년 11월 14일생인 하야시 데쓰(林哲)는 1983년 7월 일본 건설성의 요청으로 토목건축기술 심포지엄 참석차 북한을 방문했다. 심포지엄 후 북한 측 요청에 의해 판문점 부근에 있는 북한 측 땅굴을 시찰했다. 하야시는 “북측 땅굴 매몰 작업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 및 주변 지반 변화에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한 추가적인 자문 요청에 따른 시찰이었다”고 밝혔다.
 
  ‘북한방문자 특이진술내용 보고’에는 하야시의 2박 3일간의 북한 방문 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7월 10일(83년)
  04:00경: 일본 해상 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선박으로 일본 니이가다(니가타) 항 출발
  18:00경: 원산항 도착
 
  ◆7월 11일
  승용차로 평양 도착→토목 건축 기술 심포지엄 참석(주제: 토목적인 특수기술 및 특수기계의 소개, 참석인원: 일본 측 8명, 북한 측 25명)
 
  ◆7월 12일
  오전: 상기, 심포지엄 중 북한 측 요청에 의거, 판문점 부근에 있는 북한 측 땅굴 시찰(북측 땅굴 매몰 작업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 및 주변 지반 변화에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하여 추가로 자문요청에 따른 시찰)
  저녁: 원산항 출발
 
  ◆7월 13일
  오전: 일본 니이가다 항 도착>

 
  이 같은 사실은 1987년 12월 하야시의 한국 비자 신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하야시는 관광비자로 한국을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일본 해상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선박을 타고 방북한 이유와 북한 땅굴에 대해 어떤 자문을 했느냐는 우리 측 질문에 “일본 건설성에 문의하라”며 침묵했다.
 
  하야시가 시찰한 것으로 보이는 판문점 부근 땅굴은 ‘제3 땅굴’일 가능성이 있다. 제3 땅굴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판 땅굴이다. 1978년에 발견됐으며 폭 2m, 높이 2m에 총 길이 1635m다. 한 시간 안에 북한 병력 3만명이 이동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현재까지 발견된 북한의 대남 침투용 땅굴은 총 4개로 1974년 11월 발견된 제1 땅굴은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내에 있으며, 1시간에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다. 1975년 3월 발견된 제2 땅굴은 강원도 철원군에 있다. 1973년 11월,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 2명은 지하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나는 수상한 폭음을 듣고 상부에 보고했다. 우리 군은 ‘폭음청취반’을 편성해 폭음의 원인을 밝히는 조사에 나섰다. 이어 북한이 땅굴을 팠다는 탈북자 증언까지 나오자 1974년 11월 본격적인 지하수색을 시행해, 마침내 제2 땅굴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설치한 지뢰와 폭탄에 의해 수색대원 8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제2 땅굴은 총 길이 3.5km에 높이 2m, 폭 2.1m 규모다. 한 시간에 최대 2만4000명의 무장병력이 침투할 수 있고,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는 크기다. 제4 땅굴은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동북방 26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됐다. 이후 현재까지 땅굴 발견 사례는 없다.
 
  결론적으로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일본 해상 보안부 소속으로 보이는 배를 타고 북한에 방문한 일본인 건설자 하야시 데쓰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판 제3 땅굴을 시찰하며 자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야시가 ‘북한 땅굴에 대해 어떤 자문을 했느냐’는 우리 측 질문에 “일본 건설성에 문의하라”고 답한 것을 봤을 때 하야시의 방북은 일본 정부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당시 북·일 관계 살펴보니
 
  북·일 관계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박창건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국민대 일본학연구소 부소장)가 쓴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북·일 관계의 변화’의 일부분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북·일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핵심을 이루었던 미·중 관계에 실질적 변화에 의한 ‘데탕트’가 도래하면서부터이다. 이는 1973년 5월 4일 미국 닉슨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외교교서’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은 냉전체제로부터 공동이 책임을 부담하는 다극화 체제로 세계질서 전환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이념적 차원보다 실질적 차원에서 외교정책을 재평가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대(對)중국외교에 있어서 역사적인 제휴(association)를 통해 과단성 있는 정책적 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동시에, 세심한 주의와 신뢰를 지적했다(외교통상부(2005)). 이러한 상황적 변화를 이용하여, 1970년 8월 일본 사회당은 나리다 도모미(成田知巳) 위원장을 단장으로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노동당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요지는 미 제국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재침략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본과 북한 인민의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당 대표단은 일본 군국주의자가 미 제국주의와 공모 결탁하여 남한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침투를 강화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했다. 또 일본 정부는 한일조약을 폐기하고 북한에 대한 적시정책을 중지하며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북한 노동당은 일본 사회당이 미·일 안보조약 폐기, 미 군사기지 철거, 오키나와(沖繩)의 즉시 무조건적인 전면 반환, 일본 제국주의의 파쇼화 반대 및 평화헌법의 고수 주장 등을 통해 아시아의 평화 확립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은 당 대(對) 당의 비공식 접촉은 대일관계에서 북한 측 교섭 외교의 형태를 변화하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71년 9월 《아사히 신문》 고토모토(後藤基夫) 편집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국교를 수립하기 이전에도 가능한 범위에서 기자, 기술자 등의 왕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경제 및 문화 교류 활동을 전개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는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1972년 1월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북일 교섭의 전제조건으로 내걸던 한일기본조약 파기에 대해 북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남한과 맺은 기본조약이 자연히 소멸할 것이라며 일본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월간 《북한》 1983년 9월호에 실린 성황용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일본이 보는 북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베(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 외상은 2월 중의원에서, 그리고 3월 중의원에서의 발언을 통해 “일본은 북한과 민간급의 교류를 확대해 나갈 것이며 남북대화의 환경 조성을 위해 계속 그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중략) 이를 뒷받침하듯 5월 동경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법률자문회의에 북한 대표를 초청하였고, 리셉션장에서 아베 외상이 북한 대표를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어 주변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뒤이어 지난 6월 28일에는 일·한 우호촉진의원연맹 회장 구노 쥬지(久野忠治) 자민당 소속 의원 일행이 북한의 초청을 받아 7월 6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양 방문 중 구노 의원 일행은 현준극을 비롯한 북한 당국의 수뇌들과 만나, 일본·북한 간의 무역 촉진을 위한 무역연락소의 설치, 일본·북한 간의 복수의 기자 교환, 항공로의 설치 등으로 민간교류를 적극화시킨다는 데 합의하였다고 나카소네 수상에게 귀국보고를 하였다. 동시에 구노 의원은 북한 측이 82년 6월 말 기간 만료와 함께 자동 실효된 일본·북한 민간어업협정의 재체결 문제에도 응할 의사를 보였다고 밝혔다.>
 
 
  북한 땅굴 굴착 기술 발달
 
하야시 데쓰가 시찰했을 가능성이 있는 ‘제3땅굴’ 내부. 사진=조선DB
  북일 관계와 관련한 여러 논문 및 자료를 분석했을 때 하야시의 방북과 땅굴 자문은 일본이 북한과 민간급의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의 땅굴 기술은 전시 민간 전투지휘소까지 모두 지하에 건설했을 정도로 발달돼 있다. 북한에는 593부대, 667부대, 744부대 등 땅굴을 전문적으로 파는 군부대가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땅굴 굴착 기술을 미얀마,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 등에 수출하기도 했다. 미얀마 망명 언론들이 노르웨이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버마 민주주의소리(DVB)’ 방송은 지난 2009년 6월 24일 북한이 미얀마가 뚫는 땅굴 작업에 개입한 사실을 보여주는 미얀마 군부의 정보문서와 사진들을 확보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올 초 미국은 제2 한국전쟁에 대비해 ‘땅굴 전투(tunnel warfare)’ 훈련을 대폭 강화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2018년 1월 9일 “그동안 미 육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은 폐쇄적인 환경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1~2개 여단 규모로 땅굴 전투 훈련을 했으나, 북한 위협이 커지면서 참여 여단을 늘렸다”며 “야간 투시경 등 땅굴 작전에 필요한 특수 장비를 추가로 구매하고, 지난 몇 달간 패트리엇 미사일과 정밀 유도 폭탄을 구매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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