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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이 남긴 위대한 유산

‘한국판 됭케르크’ 흥남철수작전은 미군(美軍)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수작전

글 : 네드 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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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둡고 차가웠던 1950년 12월, 흥남에서 보여준 선한 사람들의 용감한 행동
⊙ 10만 피란민의 삶은 인간 회복력과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
⊙ 피란민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보며 ‘인간의 선함’ 알게 돼
⊙ “선한 사람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악(惡)의 승리만 있을 뿐”

[편집자 주]
필자 네드 포니(Ned Forney)는 흥남철수작전의 주역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손자다. 현재 가족과 함께 한국에 머물며 6·25전쟁과 흥남철수작전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30여 명의 흥남철수 피란민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흥남철수작전의 의미와 피란민들을 만난 느낌을 담고 있다. 번역은 김경철씨가 맡았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자유를 향한 배’에 승선하는 피란민들.
  나는 18개월 전부터 통역 담당자인 이유리씨와 함께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당시 피란민들을 만나왔다. 나는 그분들이 얼마나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됐다. 또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사실적이면서도 격정적인 그들의 슬픈 이야기는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90세 넘는 어르신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 친구들과 헤어지는 그 순간과 그날들을 회상하면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할머니는 당시 자신의 어머니께서 했던 말을 들려줬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한국에서조차 잊혀가는 비극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의 삶은 인간의 생명력과 회복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내가 인터뷰한 30여 명의 피란민 중 그 누구도 비통해하거나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실의에 빠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분들의 모습은 긍정적이며 용서하고 감사해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 세상에 감사해 했던 것이다.
 
 
  미군과 한국군에 감사
 
  피란민들은 미군과 한국군이 그들을 마침내 살렸고 또 그들 덕분에 자신들이 자유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 감사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종종 현봉학 박사와 에드워드 포니 대령, 레너드 라루 선장, 제임스 도일 제독,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언급했다. 이 사람들은 대규모의 민간인 해상탈출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인물들이었다.
 
  피란민들은 또 장진에서 흥남으로 가기 위해 ‘다른 방향에서 피란민들을 위해 싸웠던’ 미 해병대, 국군 장병들, 영국 왕실 특공대를 회상하며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개마고원의 눈 덮인 산에서 수천 명의 주민이 비로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의 용맹함이 없었더라면 탈출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열띠게 설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다. 가족들의 이타적인 행동 덕분에 그들이 살아남게 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뒤에 남은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고모와 삼촌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걱정은 지금껏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가족들이 총살형이나 구금, 가혹한 노동 조건이나 기근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공포의 북한 체제에서 수십 년을 살아야만 했을 것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다.
 
  몇몇 피란민을 만나고 나서 나는 그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1950년 흥남의 겨울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에 대해서도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피란민들과 100만명에 이르는 그들의 자손들을 보면서 ‘인간의 선함’을 알게 됐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취임연설에서 했던 여섯 마디(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는 사람들을 고결하고 용감한 결정으로 이끄는 본능과 믿음, 가르침에 대한 언급이라 생각한다.
 
 
  자유에 대한 대가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 그의 아들과 손자 네드 포니(필자)도 미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3대 해병대 장교’를 기록했다.
  피란민들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전달하려 했다. 그들이 남한에 정착해서 성공하기 위해 직업을 갖고, 학교에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 잡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들려줬다.
 
  그들은 남한으로 온 후 몇 달 혹은 몇 년간 지속됐던 격동의 시기에 거제도와 부산, 그리고 남해안의 다른 중소도시에서 어떻게 피란 생활을 보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발을 디딘 사람으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자유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북한의 독재와 박해, 공포로부터 탈출한 사실을 기억했다.
 
  흥남철수작전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손자인 나는 이 이야기에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포니 대령은 이 작전을 맡아 그의 팀원과 함께 10만여 명의 군인과 35만 톤의 무기, 탄약과 보급품, 1만7500개의 차량과 10만명의 피란민을 미 해군 전함과 상선에 함께 수용하는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미국 군사(軍史) 전문가로 유명한 로이 애플먼(Roy Appleman)은 이 작전에 대해 “미국 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수작전”이었다고 설명했다.
 
 
  현봉학 박사와의 만남
 
네드 포니는 1998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소재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후원으로 한국을 3주 동안 여행하며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는데 그에게 기회를 줬던 사람이 바로 현봉학 박사다.
  1998년 나는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한국 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고교 역사교사였던 나는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해, 더 나아가 흥남에서 나의 할아버지가 했던 일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나는 그 무렵 현봉학 박사를 만났다. 미국에 살던 현봉학 박사는 영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전쟁 중 나의 할아버지와 함께 흥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함흥 출신으로 흥남에서 16km가량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고, 1950년 미 제10군단 사령관이었던 알몬드 장군에 의해 발탁, 미군 통역과 민사 업무를 담당했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나의 할아버지와 함께 일했다고 했다. 그 이후 두 분의 우정은 계속됐고, 그 우정은 가족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나의 할아버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포니는 전쟁 당시 같이 일했던 한국 사람들에게 강한 동료심을 보여주었다”며 “내가 이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포니도 이 나라를 사랑했다”고 했다.
 
‘한국판 됭케르크’ 흥남철수작전은 미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수작전이었다. 피란민 10만명의 삶은 인간 회복력과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이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이 본격화되면서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은 당시 북한 피란민들을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현봉학 박사의 동향인이기도 한 수만 명의 북한 주민들은 살기 위해 흥남으로 달려왔다. 대부분의 미군 관계자는 그렇게 대규모의 시민을 군함에 태워 탈출할 수는 없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고 한다. 수많은 논의 끝에 현봉학 박사의 설득으로 미군은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현봉학 박사의 집념이 빛을 발한 것이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 그날은 철수작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미 10만명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구출된 상태였다. 화물선과 기타 수많은 작은 배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 남한으로 떠났다. ‘한국판 케르크(Dunkirk)’는 이렇게 성공한 것이다.
 
 
  1950년 12월, 선한 사람들의 용감한 행동
 
네드 포니(왼쪽에서 두 번째)와 현봉학 박사의 딸 ‘헬렌 현’과 ‘에스더 현’은 흥남철수 당시 배에서 태어난 ‘김치5’이경필(맨 왼쪽)씨로부터 2014년 12월 감사패를 받았다.
  현봉학 박사를 알게 된 후 10년 동안, 나는 나의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포니 대령은 1965년 내가 두 살이었을 때 돌아가셨다. 현봉학 박사가 흥남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나의 할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현봉학 박사는 내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고맙게도 내 제자들과 동료들은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해 많은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특히 한승경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그는 내 가족과 나를 도와주고 있으며 그의 도움과 우정에 매우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현재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은 전쟁 당시 흥남에서 보여준 용감한 행동에 대해 찬사를 받고 있다. 2005년 거제도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세워졌고, 2010년에는 한국군 해병대가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포니 대령의 업적을 기리고자 포항 해병대 사단 안에 ‘포니 길(Forney Road)’이라는 도로를 만들었다.
 
  현봉학 박사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 그의 동상이 들어섰다.
 
  나는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흥남철수작전의 진짜 ‘주연’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통해 수많은 영웅이 탄생하지만 엄청난 무력 충돌에 의해 얼마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수많은 피란민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 영웅은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때의 군인들과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백 년 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선한 사람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악(惡)의 승리만 있을 뿐이다”고 했다. 어둡고 차가웠던 1950년의 12월, 선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악의 승리를 막는 결정적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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