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건의 ‘내가 살던 평양’ ② 김일성大 ‘날라리’ 스타일 : 월간조선

지난 9월부터 KBS2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는 주인공 ‘서영’이 부잣집에 입주 과외교사로 들어가 방 한 칸을 얻어 살며 ‘성재’를 가르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필자는 평양의 ‘입주(入住) 가정교사’를 떠올렸다. 평양의 중·상류층 역시 한국의 ‘있는 집’ 부모들처럼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초빙한다.

특히 자녀교육에 의욕적인 부모들은 과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입주 가정교사를 두는데, 이때 과외선생은 물론 지방 출신 대학생이다. 지방 출신 대학생의 경우, 열악한 환경의 대학 기숙사를 피할 수 있고, 돈도 벌면서 동시에 숙식도 해결할 수 있어 입주 가정교사가 되는 것이 일석이조의 기회다. 하지만 아무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교사를 찾는 평양의 부모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학생은 역시 ‘평양의 서울대’인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다.

좀 ‘산다 하는’ 김일성대 학생들은 이렇게 부잣집 자녀를 가르치고 번 돈으로 다른 학교 여학생들과 연애를 하거나, 수입 일부를 대학교수에게 상납해 학점을 올리기도 하며, 때로는 자기만의 작은 사업을 하면서 방과 후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

이 글에서는 김일성대 학생들의 방과 후 생활, ‘뒷생활’에 대해 최초로 공개한다. 물론 일반적인 김일성대 학생들의 사례는 아니다. 지방 출신 중에서 ‘눈이 좀 돌아가는’ 학생과 평양의 일부 중산층 출신 학생들의 얘기다. 필자가 상류층 학생들과 조금 어울리긴 했지만, 본시 태생이 중산층 출신인데다가 외화식당만 다니며 달러를 물쓰듯하는 상류층 학생들은 아예 ‘노는 물’이 달라 그들의 방과 후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겠다.

한편, 20% 정도의 가난한 김일성대 학생들(대부분 지방 출신)에게는 사실 방과 후 생활이 거의 없다. 기숙사 식당에서 주는 잡곡밥을 곱빼기로 먹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이들에겐 평양시내 인맥도 없어 가정교사로 들어갈 차례조차 잡기 힘들다. 돈이 없는 학생에겐 방과 후 생활이 있을 수가 없는 법. 이 글의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오리지널’ 중산층 학생들이다.

‘김대 날라리들’

많은 남한 사람은 북한의 대학이 군대식의 조직체계를 갖고 병영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잘 안다. 북한 당국은 만일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대학생들은 군관(장교)으로 전선에 투입돼 전투와 대남 함화공작(심리전)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 때문에 북한의 대학에서는 군대와 같은 제식훈련이 일상화됐으며 대학생들은 ‘강철 같은 규율’ 속에서 ‘투철한 혁명의식’을 가진 민족간부로 양성된다.

김일성대 역시 군대식의 편제로 운영되는데 전체 대학생을 연대(대학 전체), 대대(학부별), 중대(학년별), 소대(학급별) 등으로 구분한다. 대학에 1명의 학생 연대장, 각 학부에 1명의 학생 대대장이 있는 식이며, 학급장은 ‘소대장’으로 불린다. 김일성대 학생들은 대학 체육관 앞마당에서 주기적으로 제대군인 출신 학생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사열식을 진행한다. 이 사열식은 대학생들에게 중요한 행사로, 불참하면 사상비판이 뒤따른다.

이 한 가지 사례만 놓고 봐도 북한 대학생과 남한 대학생의 생활은 외형적으로 엄청 다르다. 그러나 군대식 제식훈련과 같은 딱딱한 대학생활은 학교 내에서의 생활일 뿐 김일성대 학생들의 방과 후 생활은 남한 대학생들처럼 자유롭고 다양하며 나름 재미도 있다. 보통 북한 대학생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정규강의 3개(1강 90분)를 듣고,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교실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자율학습을 한다. 오후 5시가 되면 하교(下校)하는데 이때부터 방과 후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자정까지 논다고 해도 7시간, 이 시간이야말로 좀 ‘노는’ 김일성대 학생에게는 ‘골든 타임’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대를 보통 ‘김대’라고 줄여서 부른다. 어깨를 으쓱 올리고 “나 김대 다녀”라고 말하며 평양시내를 활보하는 ‘김대 날라리’들은 방과 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안다.

잘 놀기 위해서는 우선 돈이 있어야 한다. 형식상 비정규직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아르바이트란 개념이 없다. 따라서 보통 대학생은 부모가 주는 용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산층 부모가 주는 용돈은 평양에서 ‘사람답게’ 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공부, 특히 수학에 자신 있는 김대 학생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나선다.

김일성대 학생은 최고 인기 상류층 가정교사

평양의 가정교사들은 대부분 ‘수재학교’(우리의 과학영재학교)라고 불리는 1중학교 출신들이다. 북한은 2002년 ‘전민 복무제’(병역의무제)를 실시했다. 일반 중학교 졸업생은 100% 군에 입대하고 수재학교 졸업생만 대학에 곧바로 진학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만일 일반 중학교 출신이 대학에 가려면 사회현장에서 몇 년간 일을 하다가 대학추천권을 받아 ‘현직생’으로 간다거나, 군 복무 중 ‘위탁생’으로, 또는 군을 전역하고 ‘제대군인 학생’으로 대학에 가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빽’이나 돈이 뒷받침돼야 하며, 제대군인 학생이나 현직생이 공부를 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반면 수재학교 출신의 ‘직통생’(대학에 곧바로 진학한 학생을 일컫는 말)은 대체로 머리가 좋다. 수재학교를 졸업하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 부모들은 자녀를 수재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북한 과외교육의 목표는 대학 입시가 아니라 수재학교 입학(또는 편입)이다. 이 같은 이유로 수재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고 수학을 비롯해 공부를 잘하는 수재학교 학생들이 가정교사로 초빙되는 것이다. 보통 수재학교에서도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이 김일성대에 진학하기 때문에 수재학교 출신 김대 학생은 가정교사를 찾는 평양의 상류층 속에서 인기가 최고다.

북한은 1980년대에 이미 영재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정일(金正日)이 1984년 4월 평양제1고등중학교(현재 평양제1중학교)를 방문해 수재교육을 하도록 지시한 이후 북한은 평양시와 각 도(道)에 1중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워냈다. 북한은 1999년 4월부터는 북한 전역의 각 시, 군, 구역에 1중학교를 세워 영재교육 시스템을 단계별로 확대·강화했다. 북한 전역에 있는 200여 개의 1중학교 중 단연 으뜸은 평양제1중학교다. 수재교육의 모체이며 중앙급(級) 영재학교인 평양제1중학교는 북한 최고의 명문 중학교다. 지방의 시·군급 1중학교에 김일성대 입학추천권이 2~3개 할당될 때 이 학교에는 80~90개가 떨어진다. 평양시와 각 도 1중학교 3학년 재학생들 중에서 선발시험에 통과한 우수한 학생들이 평양제1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기 때문에 이 학교 학생들의 실력은 북한에서 최고로 인정받는다.

과목당 과외비 月 20~30달러

김일성대 교정 벤치에서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다.

같은 김대 학생이라 해도 평양제1중학교 출신은 다른 수재학교 출신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과외비를 받는다. 필자가 김대에 재학중이던 2000년대 초반 평양에서는 한 과목당 과외비가 매월 평균 미화 20달러였다. 그러나 평양제1중학교 출신 김대 학생은 과목당 25~30달러씩 받았다. 1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학생이나 1중학교 편입을 준비하는 중학교 2~3학년 학생은 보통 김대 학생에게서 일주일에 2~3회, 1회에 2~3시간 정도 수학과 영어 과외를 받는다. 만일 지방 출신 대학생이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경우, 과외받는 학생의 집에서는 대학생에게 과외비를 주는 외에도 추가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필자의 평양제1중학교 동기 중에 부잣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A씨가 있었는데 그는 수학과 영어 실력이 있는 지방 출신 김대 학생이었다. 잘나가는 무역업자의 부인인 B씨는 1중학교 편입을 준비하는 중학교 2학년 아들을 위해 A씨를 입주 가정교사로 고용했다. B씨는 A씨에게 방 한 칸을 내주고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대학생인 A씨에게 매일 점심 도시락까지 싸줬다. B씨는 A씨가 자신의 아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매일 1~2시간씩 가르치는 조건으로 매월 60달러를 현찰로 지불하고 A씨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비싼 옷을 선물로 사주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A씨는 남 부럽지 않은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필자도 2001년께 용돈을 좀 벌어볼 요량으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 가정교사 면접을 봤던 적이 있다. 당시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거주하는 외화벌이 회사 부사장 C씨는 1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소학교 4학년짜리 아들에게 1년간 수학을 가르치는 조건으로 필자에게 매월 30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필자가 C씨의 아들을 테스트해 보니 기초실력이 엉망이었다. C씨의 아들은 소학교 3학년 수학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필자는 기초가 약한 C씨의 아들을 1년 만에 1중학교에 입학시키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 가정교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가정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섬싱’

평양에서 대학생 가정교사를 섭외하는 일은 보통 과외받는 학생의 어머니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불상사’도 발생하곤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북한에서 과외받는 학생은 대부분 1중학교 입학 또는 편입을 준비하는 학생이어서 과외받는 학생의 나이가 만 14세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과외선생과 과외받는 학생이 연애하는 일은 평양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대학생 가정교사와 과외받는 학생의 어머니가 눈이 맞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과외받는 학생 대부분이 10세, 11세 미만의 소학교 학생인지라 학생의 어머니는 보통 3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다. 이들 30대 여성들은 가정교사를 섭외할 때 출신 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생의 인물도 본다. 20대 초반의 풋풋하고 잘생긴 김대 남학생의 존재가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세련되고’ 한가한 삶을 누리는 30대 중·상류층 여성의 심장을 뛰게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특히 대학생이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 학생의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둘이서 장 보러 함께 다니거나 할 때는 ‘사고’의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사실 대학생 가정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섬싱(Something)’이 가능했던 것은 2000년대 들어 북한에서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한 ‘리찬식(式) 사랑’의 여파도 있었다. 1996년께 북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민족과 운명: <카프> 작가편’에는 남자 주인공인 시인 리찬이 10년이나 연상인 여주인공 김경란과 열정적으로 연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남자가 10년 이상 연상의 여성과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북한 남성은 물론 북한 여성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러한 ‘리찬식 사랑’의 영향으로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이후 돈 있고 능력 있는 여성과 연하의 잘생긴 남성으로 구성된 커플이 많이 등장했던 것이다.

필자는 대학 다닐 때 “모 학부 학생이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학부모와 눈이 맞아 쫓겨났다더라”라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물론 대학생 가정교사는 쫓겨났지만, 상류층 부인은 쫓겨나지 않았다. 아직 북한의 상류층은 이혼을 흠으로 여기는데다, 어차피 많은 상류층 남성들이 일편단심 자기 부인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양의 일부 상류층 아줌마들은 얼마나 쿨한지 자기 남편에게 ‘애인’이 없으면 “창피하다”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마약과 위폐로 ‘사업’하는 학생들

일부 중산층 김대 학생이 온갖 ‘고난(?)’과 ‘유혹’을 이겨내며 가정교사로 돈을 버는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는 용돈이 방과 후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데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출신 김대 학생 중에서도 부모가 지방당 간부거나 큰 사업을 할 때에는 용돈을 풍족하게 쓴다. 말이 지방 출신일 뿐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는 유지(有志)로 통하는 집안의 자녀다.

이들은 구차하게 남의 집에 들어가 가정교사를 할 필요가 없이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평양에서 괜찮은 삶을 향유한다.

가정교사로 선택받은 대학생들보다 공부는 조금 못하고, 그렇다고 부모가 지방 유지인 것도 아닌 김대 학생들은 방과 후 시간에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도 한다. 장사의 업종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일부 김대 학생은 골동품 거간(居間)을 통해 돈을 벌기도 한다. 개성이나 평양 지역에서 골동품을 가진 사람을 ‘물주’(物主)라 부르고 북한 내에서 골동품을 사들여 중국 등지에 되파는 사람을 ‘돈주’라고 부른다. 실례로 고려청자를 가진 물주에게는 해당 물건을 5000달러에 팔아준다고 얘기하고, 고려청자를 사려는 돈주에게는 5500달러에 구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얘기해 차액을 자신이 취하는 방식이다.

어떤 국경 지역 출신의 학생은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서 평양시 근교에서 생산된 마약을 국경 지역의 마약상에게 가져다주고 운송비를 챙기는 방식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평양 시내에서 위조지폐 장사를 하는 김대 학생도 있었다. 상류층 출신 친구에게서 100달러짜리 위조달러를 1장당 10달러에 구매한 뒤 평양시 보통강구역 황금벌역 앞(지하철역, 환전상들의 주요 집결지)에서 1장당 15~20달러에 되파는 식이다.

생활이 조금 괜찮은 편인 일부 김대 학생은 부모에게서 1년치 용돈을 미리 받아 그 돈을 ‘밑돈’(자본금)으로 무역업자들과 손잡고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업 중에는 신의주 등 국경 지역에서 설탕과 일용잡화 등 중국산 물품을 가져다가 평양 시내 시장에 도매로 넘기는 사업도 있었고 한국산 중고 의류를 취급하는 사업도 있었다.

‘평양 룸살롱’

어떤 대학생은 주말마다 평양 대성담배공장에서 생산된 고급 담배를 박스째 넘겨받아 평양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평성 도매시장에 되거리(전매·轉賣의 북한말)로 넘기는 ‘사업’도 했다. 권력층 자녀를 친구로 둔 일부 김대 학생은 무역업자 등 ‘신흥자본가’와 친구의 부모(권력층)를 서로 소개해 주고 중개비를 챙기기도 했다. 이렇게 ‘사장님’들과 자주 어울리는 김대 학생은 상류층 출신 학생 못지않은 ‘호화로운(?)’ 경험도 하게 된다.

필자와 조금 면식이 있었던 D씨는 대학 강의까지 빠져가면서 ‘사업’에 열중했는데 주말이면 형님뻘 되는 비즈니스 파트너들의 초청을 받아 놀러다니느라 늘 바빴다. 어느 날 밤 D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형님들과 ‘좋은데’ 갔다 왔다. 코냑도 마시고 완전(아주) 고운 미인들의 접대도 받았다”며 자랑했다. 훗날 D씨는 자신이 사업가들과 함께 만났던 그 미인들이 평양음악무용대학(현재 평양음악대학) 학생들이었다고 전했다. 아마 D씨는 한국의 룸살롱 비슷한 곳에 갔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업인 대학 공부보다 사업에 더 열중하는 이런 사업가형 대학생은 자연스레 대학 강의에 결석하거나 오후 2~5시 자율학습 시간에 빠지는 등 ‘자유주의’를 하게 된다. 북한 대학생은 대학 당위원회나 청년동맹 등 조직의 통제와 감시에서 자유롭지 않다. 북한 대학의 학생조직에서는 툭하면 ‘자유주의자’(조직의 통제와 규율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를 사상투쟁 무대에 세워놓곤 한다. 자유주의적 행동의 원인을 사상적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비판 무대에 오르는 대학생은 대체로 단순 자유주의자일 뿐, 수완이 좋거나 돈을 좀 버는 자유주의자는 조직의 통제와 비판을 잘 피해간다. 학부 생활지도교원(대학생 생활지도 담당)이나 학부 청년동맹비서, 소대장(학급장) 등 ‘핵심인사’에게 뇌물만 잘 찔러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뇌물로 자유를 사는 법을 알았던 김대 날라리들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이런 말을 즐겨 하곤 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어떤 그물을 쳐도 큰 고기는 다 빠져나가고 송사리만 잡히는 거야.”

평양의 뿌리깊은 학벌 지상주의

김일성대 계단강의실에서 수업중인 학생들.

김대 학생들은 방과 후가 되면 금색(金色) 도금을 한 대학 배지를 즐겨 달고 평양 시내를 활보하곤 했다. 북한의 대학들은 각 대학의 이름이나 로고가 새겨진 배지를 만들어 학생들이 달도록 했는데 자기 대학 배지를 가장 자랑스럽게 달고 다닌 학생들은 김대 학생들이었다. 올해 5월 평양농업대학이 평양의학대학 등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으로 편입되긴 했지만, 이 대학 학생들은 과거 자기 대학의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농업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면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농포’(농민을 비하해 부르는 말)라고 부르며 놀렸기 때문이다.

김대 배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친필로 썼다는 ‘김일성종합대학’이란 글자가 비스듬히 올라간 모양이다. 김대 배지에는 은색(銀色) 도금을 한 것과 금색 도금을 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대학 당국은 금색 도금을 한 배지를 주로 학생 간부들에게 나눠줬다. 좀 ‘노는’ 학생들은 대학에서 일반 학생들에게 나눠준 은색 배지 외에 친구나 지인을 통해 얻는 금색 배지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교내에서는 은색 배지를 달고, 방과 후에 평양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금색 배지를 달고 다녔다. 사실 ‘김대 날라리’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금색 배지를 달고 평양 시내를 활보하는 이유는 다른 대학 여대생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한국사회에도 학벌 지상주의가 있지만, 평양에서도 학벌 지상주의가 뿌리 깊다. 평양에서 학벌 지상주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인민대학습당이다. 1982년 평양시 중구역 남산재에 건설된 인민대학습당은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격으로 수용 능력은 1일 평균 1만2000여 명, 장서는 약 3000만 권에 달한다. 평일 오후가 되면 이곳에는 평양 시내 거의 모든 대학 재학생들이 다 몰려와 공부한다. 어떤 때는 열람실에 자리가 없어 발길을 되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김일성대 배지는 확실한 ‘헌팅’ 수단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생들. 김일성대 남학생들은 ‘김대 배지’를 무기로 다른 대학 여학생들에게 ‘작업’을 건다.

서로 다른 대학과 전문학교(전문대) 학생들이 모이는 이곳 인민대학습당에서 가장 당당한 대학생은 역시 김대 학생들이었다. 김대 배지를 단 학생들이 무리 지어 도서관 내 계단과 로비를 휘젓고 다니면 전문학교 학생들이나 타 대학 학생들은 주눅이 들어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김대 배지만 달고 있으면 다른 대학 여학생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대 배지는 확실한 ‘헌팅’ 수단이었던 것이다. 외모와 언변에 자신 있는 김대 남학생은 평양의학대학이나 평양상업대학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으며, 좀 자신이 없는 김대 남학생은 전문학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작업’을 걸었다.

어떤 김대 학생들은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 대학 여학생을 꾀기 위해 인민대학습당에 매일 ‘출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살펴보면 전개는 이렇다. 한 김대 남학생이 대학습당 열람실 책상에 엎드려 열심히 공부하는 평양경공업대학 여학생에게 슬그머니 접근한다. 이 여대생이 비싼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던 것. 남학생은 여대생에게 조용히 “저 미안한데 지금 몇시야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여대생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저기 큰 시계가 있잖습니까?”라고 대꾸한다. 도서관 열람실마다 원형의 큰 시계들이 걸려 있었던 것. 하지만 여기서 기가 죽을 김대 학생이 아니다. 남학생은 “어젯밤에 너무 열심히 시험 공부했더니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기래요”라고 변명을 한다. 그제야 남학생의 왼쪽 가슴에 달려 반짝이는 금색의 김대 배지를 본 여대생은 방긋 웃으며 시간을 알려준다. 때를 놓칠세라 남학생이 “잠깐 밖에 나가서 쉬다가 공부하시디요”라고 맞받아치면 게임 끝, 일단 1단계 작전은 성공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김대에 다니지 않는 평양 날라리들이 김대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얻은 김대 배지를 달고 다니며 여대생들의 눈물을 짜내기도 했겠는가. 어떤 김대 학생은 김대 배지를 고급 담배와 바꾸기도 했다. 필자도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김대 배지를 선물로 준 것만도 5~6개는 된다.

푸시킨 詩로 작업 걸고 스칼렛 오하라에 푹 빠진 남학생들

일단 김대 배지를 무기로 마음에 드는 여대생과 말문을 튼 김대 남학생은 여대생의 호감을 사려고 자신이 배운 지식과 출처가 불분명한 온갖 상식을 총동원한다. 명색이 명문대생이라 유식함을 뽐내 기선제압을 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잘생긴 남자보다 말 잘하는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더 잘 사로잡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던데, 북한에서도 말 잘하는 남자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김대 날라리들은 대체로 언변이 뛰어나다. 모든 날라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는 축에 좀 낀다는 김대 날라리는 실로 다방면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얕고 넓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한다.

‘훌륭한(?)’ 김대 날라리는 우선 독서량이 많다. 유명한 고전 소설과 서정시 같은 것을 많이 읽는다. 밑줄까지 쳐가며 읽고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명문장이 있으면 따로 노트에 발췌하거나 외우곤 했다. 발자크, 셰익스피어, 스탕달, 푸시킨, 하이네, 바이런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거장의 작품을 섭렵한다. ‘고상함’을 추구하는 일부 북한의 여대생은 김대 남학생이 푸시킨이나 하이네의 시를 읊어주면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내린다.

분위기가 좀 무르익었다 싶으면 여대생에게 “살뜰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은 우정이나 육친애보다도 한결 미더워… 설레는 풍파 속에서도 누구나 그 사랑받을 권리를 갖고 있나니”(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중에서)라고 시를 읊어주고 나서 “내게도 당신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을까요?”라고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1999년께 북한에서 마거릿 미첼의 장편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번역출판됐는데 이 책은 평양의 대학생들 속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미국 소설이 처음 소개됐던 데다가 워낙 명작이었던 터라 한동안 김대 학생들은 레트 버틀러와 스칼렛 오하라에게 푹 빠져 있었다. 당시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하면 여대생에게 말을 거는 것이 창피할 정도였다. 이 책이 출판된 초창기 어떤 김대 남학생은 출판사에 있는 지인을 통해 구입한 이 소설책을 여대생들에게 빌려주면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음악과 스포츠는 ‘날라리’의 기본 조건

김대 날라리들은 음악에도 소질이 있다. 이들은 클래식 음악이나 팝송, 한국가요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상류층 여대생들과 소통하려면 명곡 몇 개쯤은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인민대학습당에 가면 일반인도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 등 거장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김대 날라리들은 예술적인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좀 노는 친구들은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했다. 상류층 학생들은 피아노를 배우지만 중산층 학생들은 기타를 즐겨 쳤다. 기타를 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라고 노래 부르는 김대 남학생의 로맨틱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여대생이 있을까. 미술에 소질이 있는 남학생은 여자친구에게 그녀의 모습을 그린 소묘작품을 선물하면서 마음을 얻기도 했다.

김대 날라리는 운동도 잘해야 한다. 이들은 여성은 운동하는 남자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중·상류층이 즐기는 운동은 주로 농구와 배구다. 테니스도 상류층이 즐기는 운동 종목 중 하나이긴 하지만 대부분 대학생은 대학에서 농구와 배구를 즐겨 한다. 지방에는 농구장이 별로 없는데다 농구장이 있어도 농구대가 변변치 않지만, 평양에는 근사한 농구장이 많고 웬만한 학교에도 농구장이 있다. 그래서 평양 출신 학생들이 농구를 잘했다.

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구두를 신은 채 농구시합을 하는 남학생의 모습, 여대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정상적인 남자들은 보통 “남자에게는 자신의 여자를 지켜줄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대 날라리들은 돌려차기나 엎어 메치기 같은 싸움기술을 한두 개 정도는 연마했으며 어깨가 벌어지고 근육이 울퉁불퉁한 몸매를 만들려고 철봉, 평행봉 같은 운동도 많이 했다. 북한 남성에게도 복근에 대한 로망이 있으니까.

‘선물’ 주는 남학생은 ‘선수’

김대에서 좀 노는 애들은 매너도 좋고 선물공세에도 능했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까지는 북한에 남성우월주의 같은 유교적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여성이 남성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사실 문화적 충격이었다.

요즘은 한국드라마의 영향으로, 또 ‘고난의 행군’과 시장확대 등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권위가 향상되면서 여성들이 선물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지만, 당시에는 여성을 배려하거나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남성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매너가 좋고 여성에게 선물할 줄 아는 남성은 여성들의 호감을 사기 쉬웠던 것이다.

한 김대 날라리는 연애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하기도 했다. “사과 한 알에도 감동하는 게 여자야. 선물의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그마한 선물에도 너의 진심을 담을 줄 알아야 해. 상대방 여성이 네가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지 느끼게 하려면 선물은 필수적이야. 또 선물은 적절한 기회를 봐서 줘야 효과가 있는 거야.”

경험이 많은 ‘선수’들은 첫 만남에 상대 여성의 생활수준을 파악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지금은 평양 시내 웬만한 집에 다 전화기가 있지만 필자가 대학에 다닐 당시에는 집 전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다. 당시 집 전화는 간부 집이나 돈 많은 집에만 있는 사치품이었다.

여대생을 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야망 있는 김대 날라리들(주로 중산층 출신)은 대체로 상류층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출세하려는 목적으로 연애기술을 연마한다. 이들은 상대 여학생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녀의 옷차림이나 가방, 신발 같은 것을 보고 한눈에 생활수준을 가늠한다.

첫 만남에서 확실하게 호감을 느끼게 한 뒤 여대생이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면 “다음에 내가 전화할게요. 집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요?”라고 묻는다. 여대생이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다음 만남이 성사될 확률이 높아지지만 만일 여대생이 “집에 전화기가 없는데요”라고 말하면 김대 날라리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 “정리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험 땐 커닝하고, 교수에겐 뇌물 공세

김대 날라리들이 이처럼 방과 후에 가정교사하랴, 사업하랴, 연애하랴 등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자연스레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출세욕이 강한 김대 날라리들이 졸업 후 진로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는 학점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할 리는 없는 법. 이들은 학점을 높이려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보통 김대 학생들이 시험성적을 올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험을 치를 때 커닝을 하는 방법이다. 북한 대학생들은 “실력이 없으면 시력이라도 좋아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시험공부를 못 했으면 커닝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험 때면 온갖 종류의 커닝 쪽지가 등장했다. 돈 많은 대학생은 공부 잘하는 동급생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시험답안지를 커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커닝을 하다 걸리면 바로 낙제점수로 처리되기 때문에 돈이 좀 있는 학생들은 보다 안전한 방법으로 시험성적을 올리곤 했다. 그 방법은 해당 과목 교수에게 뇌물을 상납해 성적을 올리는 방법이다. 당국에서 주는 쥐꼬리만 한 월급과 배급에만 의존해야 하는 대학교수들로서는 학생들이 성적을 올리려고 상납하는 뇌물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 이들에게는 학생들의 뇌물이 주요한 수입원이 될 수밖에 없다.

교수의 양심보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학교수들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권한(시험답안 채점)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안다. 이들은 대학교수보다는 ‘학점장사꾼’에 더 가깝다. 대학교수에게 상납하는 뇌물의 수준은 해당 교수의 생활수준에 따라 정해진다.

김일성대 교수 중에서 경제학부나 철학부 등 사회과학부 교수들은 생활수준이 괜찮은 편이지만 수학역학부나 물리학부 등 자연과학부 교수들은 대체로 생활수준이 떨어진다. 또 사회학부 학생들은 생활수준이 높지만 자연과학부 학생들은 생활수준이 낮다. 그러다 보니 학부에 따라 교수에게 상납하는 뇌물의 수준 또한 달라진다.

사회학부에서는 대체로 달러로 성적을 거래하지만, 자연과학부 학생들은 술이나 담배 등으로 성적을 산다. 고급 담배는 시장에 내다 팔면 바로 돈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교수들은 고급 담배를 받는 것을 좋아했다. 또 ‘학점거래(?)’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교수의 집에서 이뤄진다.

007 방불케 하는 교수집 방문 작전

수학역학부에 다니던 필자의 친구 E씨는 시험기간만 되면 대학교수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성적을 올리곤 했는데, 그 방법은 가히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E씨는 먼저 교수의 집 주소를 알아내려고 해당 교수를 미행했다.

교수의 퇴근시각에 맞춰 대학 정문에 있다가 몰래 해당 교수를 뒤따라 가는 식인데, 지하철이나 궤도전차에 탔을 때 교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선글라스를 끼거나 재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방법으로 변장하기도 했다. 첩보요원 같은 실력으로 교수를 미행해 해당 교수의 집 위치를 알아내면 다음 날 저녁 뇌물을 준비해 교수의 집을 방문한다.

대체로 소주 몇 병과 좋은 안줏거리(주로 돼지고기 2~3㎏), 고급 담배 몇 보루, 교수의 자녀에게 줄 사탕·과자 등을 준비했다. 저녁 시간에 학생이 대학교수의 집을 방문하면 교수들은 웬만하면 내쫓지 않고 학생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학생이 뇌물 보따리를 들고 교수의 집안에 들어서면 ‘작전’은 대부분 성공이다.

교수는 학생이 가져온 술과 안주에 만족했고, 교수의 사모는 생활비로 전환할 수 있는 담배 보루에 만족했으며 교수의 자녀는 사탕·과자를 보고 환성을 질렀다. 교수와 주거니받거니 술잔을 나누면서 E씨는 사정 얘기를 했다.

“선생님, 제가 이번에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 시험공부를 많이 못 했습니다. 저 좀 잘 봐주십시오. 신세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알았어.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최우등은 어렵고 우등 정도에 만족하게나”라고 대답했다. 북한은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최우등(5점), 우등(4점), 보통(3점), 낙제(0~2점) 등으로 구분한다. E씨는 이런 방법으로 실제 시험성적이 낙제면 우등으로 고쳤고, 실제 성적이 보통이 나오면 최우등으로 올렸다. 이처럼 김대 날라리들은 방과 후 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학점도 올리는,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방법을 알았다.

술 마시기 시합

앞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김대 학생들의 방과 후 생활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필자가 경험한 것 중에 인상에 남는 일은 학부 간 술 마시기 시합이었다. 1중학교 동기들이 각 학부에 흩어져 있어 중학교 동기들을 통해 타 학부 학생들과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또 친구들을 통해 각자의 학부에서 누가 가장 주량이 센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한 패거리의 김대 날라리들이 술자리에서 어느 학부 학생들이 술을 잘 마시는지에 대해 논쟁하던 중 한 녀석이 학부 간 술 마시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며칠 후 일요일 정오부터 네 개 학부에서 ‘선발된’ 최고의 주당들 간에 시합이 시작됐다.

각 학부에서 내로라하는 술꾼들은 마른 오징어 몇 쪼가리를 안주 삼아 40도짜리 술을 맥주컵에 부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들 주변에서는 각 학부에서 온 ‘응원단’들이 둘러앉아 자기 학부 ‘선수’를 응원했다. 원샷으로 몇 잔 마시자 첫 탈락자가 나타났다. 이후 나머지 세 선수는 60도짜리로 술을 바꿨다.

당시 북한 무역업자들은 중국에서 순도 99%의 에틸알코올(곡물 원료)을 수입했었는데, 지독한 술꾼들은 이 술에 증류수를 타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도수를 조절해 마셨다. 주정계를 사용해 알코올 원액에 끓여서 식힌 물을 적당히 타는 식이다.

이렇게 만든 60도짜리 알코올을 또 몇 잔 원샷 하니 두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남은 두 선수도 이미 떡이 돼버렸지만 최종 우승자가 나올 때까지 대결은 계속됐다. 남은 두 학생은 90도짜리 알코올로 최종 승부를 겨뤘다. 알코올 원액에 물을 아주 조금 타 90도로 맞추고 나서 맥주컵에 3분의 2 정도 부어 두 선수에게 나눠줬다. 이 ‘독주’를 마시기에 앞서 ‘심판’은 두 선수에게 주의를 줬다.

“이걸 그대로 마시면 식도가 타버려. 그러니까 한 손으로 코를 꼭 막고 숨을 멈춘 채 이 알코올을 단번에 마셔. 그리고 다 마시고 난 뒤에도 코와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가 4~5초 정도 지나서 숨을 내쉬어야 하는 거야. 아무튼, 사고 나면 누구도 책임 안 지니까 조심해.”

결국 이 90도짜리 알코올 한 잔에 시합은 끝났다. 지질학부 출신 선수는 기절해서 실려나갔다. 이렇게 죽을 각오로 술 마시기 시합에서 우승했지만, 최종 우승자에게 차려지는(씌워지는) 것은 ‘걸어다니는 술독’이란 ‘자랑스러운 명예’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식하고 미친 짓이었지만 당시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김대 날라리들은 이 시합을 ‘사나이답고 화끈한 장면’으로 기억했다.

“청춘은 미쳐야 정상이야!”

김일성대 재학 시절의 김정일. 지금도 장성택·김경희·최룡해·김영남·최영림 등 김일성대 출신들이 북한을 움직인다.

아무튼 북한 남성들의 술 사랑은 남한 남성들 못지않다. 북한 남성들은 주로 친구를 집에 초청해 술을 마신다. 중산층 학생들 역시 친구의 집에 모여 술을 즐겨 마시며 교제를 했다. 친구의 소개로 다른 대학 친구를 사귀면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우정을 쌓아갔다. 상류층 학생들처럼 외화식당에 갈 만큼 풍족하지 않은 중산층 학생들은 시장에서 술과 안줏거리를 사다가 친구의 집에서 파티하곤 했던 것이다.

여러 대학 출신 학생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기타 치면서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놈, 미친 듯이 디스코를 추는 놈,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 놈, 다른 대학 친구가 데리고 온 여대생에게 열심히 작업 거는 놈, 실로 각양각색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한 녀석이 술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건배사를 했다.

“야, 모두 집중! 청춘은 미쳐야 정상이야! 자 이제부터 제대로 마시는 거야!”

물론 이 건배사를 한 녀석은 김대 날라리였다.

북한사회도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이란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자 이 글을 썼다. ‘동토의 국가’, ‘폐쇄국가’ 등 모든 딱딱한 대명사를 가진 북한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하다. 북한을 바라볼 때 딱딱한 ‘껍데기’를 벗기고 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군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최측근 실세는 결국 ‘김대 날라리들’의 영역

현재 김정은 국방위원회 1위원장의 정책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김경희 노동당 비서도 김일성대 출신이고, ‘김정은의 남자’라고 불리는 최룡해(최룡해는 군부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총정치국장도 김일성대 출신이다.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내각의 수장인 최영림 내각총리도 김일성대 출신이다. ‘선전선동의 귀재’로 불리는 김기남 노동당 비서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도 마찬가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대 출신들이 당, 군, 국가기구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한다. 지방간부 중에서도 김일성대 출신들은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들 김일성대 출신의 원로그룹이 물러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대 날라리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 간부로 출세하려면 탄탄한 인맥과 사교성이 있어야 하며 주량도 세야 한다. 술자리에서 잘 노는 것은 필수이며 상관에게 뇌물을 상납할 줄 아는 것은 기본적인 자질이다. 따라서 출세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동기들 속에서 통솔력도 있는 김대 날라리들이 상승가도를 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 김일성대 출신들은 비록 경직된 체제 속에서 살아가지만, 사고방식까지 경직된 것은 결코 아니다. 김일성대 출신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변화의 의지도 있고, 또 북한을 변화시킬 능력도 있다. 다만, 일단 기득권층에 진입한 김일성대 출신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만일 이들에게 “당신들의 기득권은 유지하면서 경제개혁을 통해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라”라고 주문한다면, 또 그들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한국이나 주변국에서 만들어준다면 그들은 기꺼이 변화를 선택할 것이다.

중국의 명문 베이징대나 칭화대 출신 공산당 간부들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한 것처럼 김일성대 출신 정책결정자들이 북한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하려면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한마디로 “김일성대 출신은 골수 충성분자이며 체제 수호의 선봉대”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필자는 김일성대 출신 선후배와 동기들이 언젠가는 북한 주민을 위한, 북한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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