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문제에서 전국문제로, 경제(생존)문제에서 정치투쟁으로, 反정부에서 反美로
⊙ 첫 남파에서 거물공작원 이선실,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등 대동 월북
⊙ 두 번째 남파에서 재야인사들 포섭 위해 접촉하다 부여에서 총격전 끝 체포
⊙ 북한, 1987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혁명 거점 마련 위해 공작팀 집중 남파
⊙ 1991~92년 남파된 간첩들 진보정당 접촉하며 총선 관여하다 총선 직전 입북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기자 thegood@chosun.com
⊙ 첫 남파에서 거물공작원 이선실,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등 대동 월북
⊙ 두 번째 남파에서 재야인사들 포섭 위해 접촉하다 부여에서 총격전 끝 체포
⊙ 북한, 1987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혁명 거점 마련 위해 공작팀 집중 남파
⊙ 1991~92년 남파된 간첩들 진보정당 접촉하며 총선 관여하다 총선 직전 입북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기자 thegood@chosun.com
그와 만나기 전, 해안침투, 무장간첩, 군경(軍警)과의 총격전 등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머리 속에 입력시켜 놓고 있던 기자는 눈앞에 나타난 그가 그 사람이 아니려니 했다. 약속장소로 들어오는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이 갔지만 그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그였다.
김동식씨. 1995년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된 전직 무장공작원의 흔적을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악수를 하면서 일부러 마주잡은 손을 강하게 흔들어 봤지만 악력(握力)을 느낄 수도 없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이른바 ‘범생이’. 그의 첫인상은 그랬다.
1995년 그가 우리 군경에 체포됐을 때 그에게는 ‘신세대 공작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대남(對南) 공작을 월북자(越北者) 중심으로 펴 오던 북한이 이들의 고령화에 따라 남한의 학생-노동운동권 출신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상 좋고 성분 좋은 젊은 공작원들을 교육시켜 남파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김동식씨이기 때문이었다. 젊은 공작원들은 20세 전후 고교 졸업자나 대학 재학생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학업성적과 용모도 고려돼 선발되었다고 한다.
‘신세대 공작원’ 김동식은 1990년 5월과 1995년 8월, 두 번 남파됐다. 처음 남파됐을 때 그는 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이었던 황인오와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던 남파공작원 이선실을 대동해 월북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도 받았다. 남한에 지하당조직(고첩망)을 구축해 혁명기지를 만드는 것은 당시의 또 다른 남파 목적이었다.
이선실은 북한 권력서열 22위로 1990년 10월 월북할 때까지 10년 이상을 서울, 전주, 안양 등지에서 암약하며 대남공작을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선실은 북한에 돌아간 뒤 김일성을 접견하고 공화국 영웅 칭호와 김일성훈장 등을 받았다. 남한에서 암약하며 정계, 재야, 학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 인사 30여 명을 접촉하면서 지하망 구축에 성공한 공로다. 이선실은 2000년에 사망했다. 김씨는 1차 남파 때 이선실과 4개월 반 동안 함께 남한에서 생활했다.
두 번째 남파 목적은 10여 년 전 남파된 공작원 대동 월북과 고정간첩망 점검, 국내 운동권 인사 접촉 등을 통한 지하망 구축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실제 김동식씨가 2차 남파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 등 재야인사 여러 명을 접촉했던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 파장이 일기도 했다. 당시 그가 접촉했던 인사들은 지금도 정계(政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동식씨는 조원 박광남과 함께 2차 남파됐다. 김씨가 조장이었다. 남파 후 이들은 충남 부여 정각사 부근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기로 돼 있었다. 그를 데리고 월북하기 위해서였다. 1995년 10월 하순이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정보당국과 군경은 정각사 주변의 검문을 강화했다. 그해 10월 24일 김동식씨와 박광남은 정각사 부근에서 펼쳐진 불심검문에 걸렸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동식씨가 먼저 체포됐고 달아나던 박광남도 부상을 입은 후 체포됐지만 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
김동식씨는 자신이 두 번째로 남파됐을 때 접촉했던 인사들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려고 했다. 눈앞에 닥친 총선을 의식해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두 번에 걸친 침투가 제주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며 제주 강정마을에 건설 중인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먼저 운을 뗐다.
공작원 지금도 남파
―침투한 곳이 강화도로 알고 있었는데 제주도였습니까.
“네, 두 번 다 제주도로 침투했습니다. 처음에는 KAL호텔 옆 서귀포시 보목동으로 들어와서 일주일 정도 있었습니다. 나흘 동안 서귀포를 관광하고, 제주시에도 사흘 정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다 배우고 오지만, 적응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두 번째는 성산읍 온평리 해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제주도랑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죠.”
―두 번이나 제주도로 침투한 까닭이 있나요.
“제주도는 4·3사태를 비롯해 좌익 사건이 많았습니다.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불만, 분노,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좋은 침투 지점으로 본 거죠. 그리고 침투하기도 수월합니다. 3박4일 동안 배를 타고 내려오는 건 힘들지만, 상륙하는 건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주도는 침투하는 데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주도에 해경(海警)도 있고, 해안경계부대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제주방어사령부가 있긴 한데,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해안도 경계근무를 서지만 그 지점만 피하면 됩니다. 특히 야간에 탐조등을 비추는데, 그건 경계하는 군인 스스로 자기 위치를 노출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오히려 공작원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꼴입니다. 실제로 제 두 번째 침투는 탐색등 바로 옆으로 들어온 겁니다.”
―요즘에는 침투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공작원에게 침투는 존재이유입니다. 걔들이 안 들어오고 뭐 하겠습니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해서,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굳이 침투하지 않아도 공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국내 정계나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남녀 간에도 메일 몇 번 주고받고, 채팅 좀 했다고 연애할 수 있는 게 아니듯, 포섭도 직접 대면하고 얘기하는 게 효과가 가장 큽니다. 그러려면 침투해야죠. 물론 제3국에서 만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언제 나갈지 알고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또 우회침투도 있습니다만,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까 직접침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는 북한이 대남공작을 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큰 곳입니다.”
1992년 총선·대선 때도 北에서 선거개입차 남파한 적 있어
―북한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극력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겠군요.
“북한 입장에서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평시에 대남 요원들을 침투시킬 주요 루트를 잃는다는 겁니다. 침투하더라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와야 합니다. 기지가 있으면 병력도 많아지고, 경계도 강화될 테니까요. 두 번째는 제주도가 전시에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입니다. 개전(開戰) 후 제주도를 기습점령해서 전진기지를 건설한 다음 우리 뒤통수를 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북한이 저렇게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겁니다. 지금 국내 반대투쟁 양상을 보면 북한의 의도대로 가고 있습니다.”
―근거는 뭔가요.
“투쟁 전개과정을 보면 북한이 요구하는 전술·전략으로 가고 있습니다. 북한 전술의 원칙은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반(反)정부투쟁에서 반미투쟁으로 옮겨 가도록 요구합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도 처음에는 제주도라는 일개 지역 주민의 생존권 문제에서 전국 규모의 반정부투쟁으로 변했습니다. 또 ‘제주해군기지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흘리면서 반미투쟁으로 가려고 합니다. 양상을 보면 교과서대로 투쟁이 전개되는데, 저는 북한의 조종을 받는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자 중 북한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말을 못할 뿐입니다. 2005년 인천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 주도자도 결국 왕재산사건 관련자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북한이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정치인들이야 ‘표’를 노리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이적행위인 거죠.”
―김 선생처럼 직접 침투해서 가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요.
“제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데, 이런 예를 들 수는 있겠네요. 1992년에도 지금처럼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다 있었거든요. 1991년 가을에 한 팀이 들어와서 모 진보정당 선거운동을 배후에서 코치하다가 총선 며칠 앞두고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근거가 있습니까.
“제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침투했던 공작원이 같은 소속 부서에 있던 팀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1차 침투시 2개의 고첩망 구축
―황장엽 선생이 남한 내 고정간첩이 5만명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말 5만명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티기 힘들 거라고 봅니다. 또 북한이 아무리 활발한 공작을 벌여도 5만명을 침투시킬 수는 없거든요. 제가 실제로 해 봤지만, 공작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포섭해서 조직 만들고 확대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질 않아요. 장기간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요.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근거는 뭡니까.
“제가 1차 남파 때 2개 고정간첩망을 만들었는데, 규모가 100명 정도 됩니다. 많다면 많은 숫자인데, 그 정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아요. 한 조직이 평균 열댓 명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사회구성체 논쟁 등 운동권 내부의 논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북에서 왔다 간 10개 팀이 고첩망 두 곳씩을 구축한다고 해도 300명인데, 5만명이라면 한 조직에 100명이라고 해도 500개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번 남파돼서 고첩망 두 개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요. 제가 두 번째 남파됐을 때 보니까 제가 구축해 놓았던 그 두 개의 고첩망 조직도 와해돼 있더군요.”
―황 선생도 북한에서 들은 얘기일 텐데요.
“1980년대 말에 비슷한 얘기는 있었습니다. 통전부장이나 부부장이 고위급 간부들을 모아 놓고 남한정세 강연을 하는데, 저는 스피커로만 들었습니다. 임동욱 통전부장의 강연내용 중 ‘최근 남조선 괴뢰수사 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우리의 자주노선을 따르는 운동권학생들이 5만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듣다 보면 ‘고정간첩’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죠.”
―남한침투 공작원이 해외담당 공작원보다 더 우수한 인력입니까.
“국내침투가 우수하다고 하면 제 자랑이 될 수 있는데, 위험부담이 가장 크기 때문에 정신적·육체적으로 훈련이 잘돼 있어야죠. 만약 제주도에 직접 침투할 경우 3박4일 동안 배를 타니까 힘들고, 정신적 부담도 큽니다. 처음 선발할 때부터 능력과 외모 등 여러 측면을 감안해 국내와 해외로 나눕니다. 어쨌든 해외보다는 국내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 인사를 포섭하려면 일정 수준의 지식이나 교양도 갖추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북한에서 4년제 대학 과정을 포함해 최소 10년 정도 여러 훈련을 받아야 공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념 문제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운동권을 상대해야 하니까 공작원양성소 안에 2년제 특별 대학원 과정을 신설해서 학습을 시켰습니다.”
―어떤 이론을 배웠습니까.
“남한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 북한의 후계체제의 정당성, 주체사상 등의 문제에 대해 이쪽에서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학습했습니다.”
―당시 공부했던 게 실제 남한 재야인사들을 만날 때 크게 도움이 됐습니까.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됐던 건 아니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해도 대응할 수 있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남한 재야운동권 중 접촉했던 이들의 논리적 무장은 잘돼 있던가요.
“없었습니다. 《강철서신》의 저자인 김영환씨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논쟁을 벌였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그쪽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북한에서 남한 운동권 중 NL계열인 주사파에게 힘을 싣고, PD계열을 깔아뭉개기 위한 이론으로 중무장했거든요. 여기 와 보니까 북한에서 만든 제목까지 똑같은 책을 가지고 ‘언더’에서 공부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 성격논의의 재조명》 같은 책이죠.”
―내용도 같았습니까.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론서를 작성하면 문체나 용어가 다르니까, 월북 학자들을 시켜서 남한식으로 바꿉니다. 여기 사람들은 제목이랑 내용이 한국식이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거죠. 운동권에서 읽히던, 필자가 알려지지 않은 책 중 99%는 북한에서 찍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이선실 대동 월북 루트 통혁당도 이용
―북한의 남한 현지공작 총책으로 알려진 이선실의 북한에서의 실질적인 위상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흔히 공작원들을 놓고 장관급, 차관급 얘기를 하는데 그건 남한에서 붙인 거고요. 북한은 시스템이 묘해서 권력서열이 22위이고, 정치후보위원이라도 공작원은 중앙당 간부들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이선실은 어떤 역할을 한 겁니까.
“이선실은 황인오를 포섭하는 데 중간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에 갈 때 황인오와 같은 배를 타고 갔고요. 물론 다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선실이 북한으로 돌아간 뒤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여기서 하던 습관이 남아서 북한에 가서도 매사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담당관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왜 네가 나를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는 식으로 하니까 차관(부부장)이 박살을 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간 뒤의 이선실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네요.
“이선실이 남한에 10년 있었고, 그 전에 일본에서 몇 년 살았으니까 조직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겁니다. 처음에 가서 1~2년 정도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래도 편하게 살다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인오, 이선실을 대동하고 월북한 해주 루트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이 월북 당시 이용한 루트로 알려졌는데요.
“제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당시에 20년 전 통혁당 때 썼던 루트라고만 들었습니다. 남로당 간부들이 어느 곳으로 넘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그쪽 루트는 뻔하죠.”
―남한에 와서 4개월 반을 함께 지냈는데 옆에서 지켜본 이선실은 배포가 컸나요.
“업무를 같이 해 보지 않아 개인적인 건 자세히 모릅니다. 같이 생활하면서 본 이선실은 그냥 그 연령에 비해 세상을 먼저 깨우친 여성 정도지, 여걸은 아니었어요. 결혼 여부는 모르지만, 여자 혼자 살다 보니 사고가 협소하고 아량이 없고 자기주장이 강했습니다.”
―이선실이 자랑 삼아서 ‘내가 남한에서 뭘 했다’ 하는 얘기는 안 했습니까.
“언젠가 이선실 얘기를 들었는데, 재야인사로 유명 종교인이었던 사람을 여러 번 만났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방북을 배후에서 조종했죠.”
북한의 공작원 교육은
―남한에 두 번이나 침투했는데, 북한 공작원 사회에서는 흔한 일입니까.
“두 번씩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0개 팀이 갔다 왔는데, 남한에 두 번 침투한 사람은 저를 포함해 4명입니다.”
―첫 침투 때의 두려움 때문에 두 번째는 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는 모르지 않습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한 번 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목숨 걸고 오는 거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두 번씩이나 침투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만들어 놓은 지하당조직(고첩망)이 2년 사이에 깨졌습니다. 북한에 돌아가서 영웅 칭호도 받고 주목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뤄 놓은 것이 없었던 거예요. 개인적으로 허망하기도 했고, 주변에서 시샘을 많이 했습니다. 20대에 그렇게 한 경우가 별로 없었거든요. ‘저 녀석 사상이 변질됐다’, ‘출세하려고 한다’는 악담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 간부들을 만나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그럼 내가 다시 갔다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갔다 와야겠다” 하길래 단박에 “그러겠다”고 답했습니다. 그쪽에서 “농담이 아니다”라고 했고, 저도 보내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기간이 한 달밖에 안돼서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준비기간은 최소 몇 달이 걸립니까.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필요합니다. 한 달이면 죽었다 깨나도 못하는 시간인데, 부부장이 ‘시간이 많지 않지만, 당신이 좀 고생을 해 줘야겠다’고 해서 결국 설득을 당한 거죠.”
―침투준비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에 하는 건 신분위장입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의 신원정보를 주면 이름,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호주, 병역 여부 등을 봅니다. 그걸로 가짜 경력을 구상하는 거지요. 호적 주소를 보면서 어디서 자랐는지, 학교는 어느 초·중·고등학교에 다녔는지, 군대는 어딜 갔는지 떠올립니다. 보통 두 사람의 가짜 경력을 구상하는데, 이것만 한 달이 더 걸립니다.”
―다음 단계는요.
“침투 경로, 방법 등을 모색합니다. 안내원들이 해안을 통해 상륙까지 시켜 주지만, 상륙한 다음에는 독자 행동을 해야 하니까 모든 걸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이동, 숙식 해결, 임무 수행, 통신, 포섭, 비상상황, 복귀 등에 대한 가정을 철저히 하고 작전을 짭니다. 작전을 짠 후 담당관과 얘기해 수정 보완하는 등 부부장까지 올라가는 데 3~4개월이 걸립니다. 그 후 서로 오가며 수정하고, 이의제기를 하는 등의 과정이 깁니다. 그래서 최소 6개월이 필요한 겁니다.”
―체력훈련도 해야 할 텐데요.
“그건 항상 하는 거니까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지만, 임무에 따라서는 준비를 할 때도 있습니다. 남한 현지화교육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해야지 1년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현지화교육 때 1970년대 납북 고교생들에게 교육을 받았다면서요.
“현지화교육 강사들은 여기서 월북한 사람도 있고, 또 고등학생 때 납북된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얘기를 안 하니까 납북자란 것을 몰랐어요. 여기 와서 사진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그들에게 아픔이 있는 줄 알게 된 건 얼마 안됩니다.”
―남한 말씨나 생활을 체득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생활합니까.
“1년 365일을 같이 삽니다. 한집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함께하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말을 배우는데, 외국어 배우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돼요. 남한말의 발음, 억양을 가르쳐 주면 따라하고, 문장도 읽고, 녹음한 걸 들으면서 잘못된 부분 보완하고, 거의 어린애가 말 배우듯이 합니다. 배우는 한 번 틀리면 다시 하면 되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큰일 나잖아요.”
―충분히 배웠다고 해도 막상 접하는 현실은 어색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배워도 처음에는 다 알아들을 수는 없잖아요.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여기 와서 시장에 가니까 아줌마들이 떠드는데 한국말인데도 잘 안 들리더라고요. 유심히 몇 번 들어 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사전준비 과정에서 남한에 와서 접촉할 인사들에 대한 정보는 제공됩니까.
“인물 자료를 다 받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공작부서에서 가진 자료는 다 가지고 오죠. 작가는 작품까지 있으니까 자료가 꽤 많고, 운동권 인사 중 노출이 안된 사람은 서류 1장뿐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접촉해 보니 북한에서 본 자료가 정확하던가요.
“분석 자료가 아니라 스크랩입니다. 평가는 윗사람들이 하지만, 굉장히 단편적인 내용입니다.”
배신, 증오, 원망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발각 위기는 없었습니까.
“1차 때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으로 들어오는데, 해경 경비정과 맞닥뜨렸습니다. ‘이거 교전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옆에 숲섬이 있으니까 경비정 진행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그 섬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상륙했습니다.”
―부여에서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을 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당시 제가 조원(박광남)하고 같이 왔는데, 그 조원에게 북한에 6개월 된 딸이 있었어요. 저는 선배이면서 조장이니까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아라’라고 얘기했어요. 항상 어떤 상황이 생기면 빨리 가라고 그 친구를 앞세우고 제가 뒤에 섰는데, 이게 반대로 되더라고요. 총 맞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영화나 소설에서 그런 상황이 되면 과거 일들이 화면처럼 쫙 나오는데 그게 정말 맞는 말이에요.”
―어떤 일들이 떠오르던가요.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배신, 증오, 원망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공작지도부와 다른 공작원의 잘못으로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화가 많이 났죠.”
―자살용 무기는 없었습니까.
“자기 머리에 대고 쏘면 죽으니까 총이 자살용이죠. 그런데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아직 30대니까. 피값이라도 하려고 했죠. 그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박광남이 처자가 있다고 했지만, 김 선생도 마찬가지 입장 아니었습니까.
“내가 선배고, 조장이니까 책임감이 있죠. ‘쟤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제가 붙잡혀서도 조원이 돌아갈 시간을 벌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초반에 이동경로 등 허위진술을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소식은 들었습니까.
“모두 숙청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했으면 북한에서 진짜 영웅으로 살고 있을 텐데요.
“소설이지만, 아마 그때 돌아갔으면 2중 영웅이 됐을 겁니다. 2중 영웅이 많지 않아요. 제 또래들이 지금 다 부부장이나 과장급을 하고 있습니다.”
―첫 공작 때 본 남한과 두 번째 접한 모습은 차이가 있습니까.
“민주화가 많이 진행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경제도 발전했고요. 처음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모르는 것 같았는데, 두 번째는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었어요. 변화가 굉장히 빠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또 운동권 분위기도 달라졌어요. 처음에 제가 왔을 때 본 한국사회는 당장 무너질 것 같았거든요. 그때는 서로 ‘같이 해 보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동구권이 망하고 독일도 통일되니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도 안정을 찾았고요. 상대적으로 북한은 김일성이 죽고, 식량난으로 어려울 때여서 언제 망할지 모르니까 95년 당시 저를 대하는 일부 남한 인사들 태도는 귀찮다는 투였습니다.”
북한 다녀온 사람들이 내 증언 더 안 믿어
―남한으로 귀순해 버릴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때 생각은 얼른 임무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가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길을 가게 돼 있으니까요. 남한이 발전한 것은 알지만, 여기는 생소한 자본주의 체제에 한 치 앞을 모르는 곳 아닙니까. 북한은 내가 돌아가면 명예도 얻고 출세도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남한의 실상을 접하면 혼란스럽지 않았습니까.
“현지화 기간에 남한 방송, 신문, 잡지를 보고 라디오를 들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공부합니다. 그걸 마치면 마카오, 싱가포르, 홍콩 등으로 실습을 갑니다. 남한과 환경이 비슷한 곳에 가서 자본주의 체험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 와서 충격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차이라면 스크린과 현실의 차이 정도라고 할까요.”
―귀순 후 남한에 있으면서 북한의 진실을 말하는데 믿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직접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일부 있었습니다. ‘북한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단기간 북한에 가서 본 걸 북한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정부 관료든, 민간단체 회원이든, 심지어 김영환 같은 사람이든 남한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절대 실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제가 안내를 해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누구 안내를 했습니까.
“황인오를 데려갔을 때 일주일 동안 안내를 했는데, 그에게도 실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에 다녀온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만 믿고, 아무리 진실을 말해 줘도 들으려 하질 않아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갑갑합니다.”
―공작원 교육을 하면서 김현희씨 얘기는 들어 봤습니까.
“그건 공인된 비밀입니다. 그 일 때문에 여자 공작원들이 많이 제대했고, 준비하던 테러를 중단한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 와서 김현희씨를 직접 만나 보고 그가 쓴 책도 봤는데, 그의 말은 틀림없는 평양말투였고 그가 책에 적은 내용 역시 북한 공작원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왜 프로들끼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알아보는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테러를 준비하다 그만뒀는지 사례를 들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국 내에 들어와서 어떤 대상을 폭파하는 연습을 했어요. 어느 건물이라고 제가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고. 테러 목적에 따라서 대상이 선정돼요. 올림픽이라면 그걸 파탄시키는 게 목적이 되잖아요. 보안이 허술하다는 것을 최대한 노출해서 불안감을 조성하려면 김포공항, 서울역 같은 곳이 될 수 있겠죠.”
그에게 최근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는가를 마지막으로 물었다.
“고향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체제는 다른 곳에 살았어도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인 것 같다.⊙
김동식씨. 1995년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된 전직 무장공작원의 흔적을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악수를 하면서 일부러 마주잡은 손을 강하게 흔들어 봤지만 악력(握力)을 느낄 수도 없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이른바 ‘범생이’. 그의 첫인상은 그랬다.
1995년 그가 우리 군경에 체포됐을 때 그에게는 ‘신세대 공작원’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대남(對南) 공작을 월북자(越北者) 중심으로 펴 오던 북한이 이들의 고령화에 따라 남한의 학생-노동운동권 출신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상 좋고 성분 좋은 젊은 공작원들을 교육시켜 남파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김동식씨이기 때문이었다. 젊은 공작원들은 20세 전후 고교 졸업자나 대학 재학생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학업성적과 용모도 고려돼 선발되었다고 한다.
‘신세대 공작원’ 김동식은 1990년 5월과 1995년 8월, 두 번 남파됐다. 처음 남파됐을 때 그는 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이었던 황인오와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던 남파공작원 이선실을 대동해 월북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도 받았다. 남한에 지하당조직(고첩망)을 구축해 혁명기지를 만드는 것은 당시의 또 다른 남파 목적이었다.
이선실은 북한 권력서열 22위로 1990년 10월 월북할 때까지 10년 이상을 서울, 전주, 안양 등지에서 암약하며 대남공작을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선실은 북한에 돌아간 뒤 김일성을 접견하고 공화국 영웅 칭호와 김일성훈장 등을 받았다. 남한에서 암약하며 정계, 재야, 학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 인사 30여 명을 접촉하면서 지하망 구축에 성공한 공로다. 이선실은 2000년에 사망했다. 김씨는 1차 남파 때 이선실과 4개월 반 동안 함께 남한에서 생활했다.
두 번째 남파 목적은 10여 년 전 남파된 공작원 대동 월북과 고정간첩망 점검, 국내 운동권 인사 접촉 등을 통한 지하망 구축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실제 김동식씨가 2차 남파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 등 재야인사 여러 명을 접촉했던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 파장이 일기도 했다. 당시 그가 접촉했던 인사들은 지금도 정계(政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동식씨는 조원 박광남과 함께 2차 남파됐다. 김씨가 조장이었다. 남파 후 이들은 충남 부여 정각사 부근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기로 돼 있었다. 그를 데리고 월북하기 위해서였다. 1995년 10월 하순이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정보당국과 군경은 정각사 주변의 검문을 강화했다. 그해 10월 24일 김동식씨와 박광남은 정각사 부근에서 펼쳐진 불심검문에 걸렸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동식씨가 먼저 체포됐고 달아나던 박광남도 부상을 입은 후 체포됐지만 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
김동식씨는 자신이 두 번째로 남파됐을 때 접촉했던 인사들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려고 했다. 눈앞에 닥친 총선을 의식해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두 번에 걸친 침투가 제주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며 제주 강정마을에 건설 중인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먼저 운을 뗐다.
공작원 지금도 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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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남파시 김동식씨가 사용했던 권총, 난수표 등의 소지품. |
“네, 두 번 다 제주도로 침투했습니다. 처음에는 KAL호텔 옆 서귀포시 보목동으로 들어와서 일주일 정도 있었습니다. 나흘 동안 서귀포를 관광하고, 제주시에도 사흘 정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다 배우고 오지만, 적응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두 번째는 성산읍 온평리 해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제주도랑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죠.”
―두 번이나 제주도로 침투한 까닭이 있나요.
“제주도는 4·3사태를 비롯해 좌익 사건이 많았습니다.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불만, 분노,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좋은 침투 지점으로 본 거죠. 그리고 침투하기도 수월합니다. 3박4일 동안 배를 타고 내려오는 건 힘들지만, 상륙하는 건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주도는 침투하는 데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주도에 해경(海警)도 있고, 해안경계부대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제주방어사령부가 있긴 한데,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해안도 경계근무를 서지만 그 지점만 피하면 됩니다. 특히 야간에 탐조등을 비추는데, 그건 경계하는 군인 스스로 자기 위치를 노출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오히려 공작원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꼴입니다. 실제로 제 두 번째 침투는 탐색등 바로 옆으로 들어온 겁니다.”
―요즘에는 침투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공작원에게 침투는 존재이유입니다. 걔들이 안 들어오고 뭐 하겠습니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해서,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굳이 침투하지 않아도 공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국내 정계나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남녀 간에도 메일 몇 번 주고받고, 채팅 좀 했다고 연애할 수 있는 게 아니듯, 포섭도 직접 대면하고 얘기하는 게 효과가 가장 큽니다. 그러려면 침투해야죠. 물론 제3국에서 만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언제 나갈지 알고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또 우회침투도 있습니다만,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까 직접침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는 북한이 대남공작을 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큰 곳입니다.”
1992년 총선·대선 때도 北에서 선거개입차 남파한 적 있어
―북한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극력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겠군요.
“북한 입장에서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평시에 대남 요원들을 침투시킬 주요 루트를 잃는다는 겁니다. 침투하더라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와야 합니다. 기지가 있으면 병력도 많아지고, 경계도 강화될 테니까요. 두 번째는 제주도가 전시에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입니다. 개전(開戰) 후 제주도를 기습점령해서 전진기지를 건설한 다음 우리 뒤통수를 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북한이 저렇게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겁니다. 지금 국내 반대투쟁 양상을 보면 북한의 의도대로 가고 있습니다.”
―근거는 뭔가요.
“투쟁 전개과정을 보면 북한이 요구하는 전술·전략으로 가고 있습니다. 북한 전술의 원칙은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반(反)정부투쟁에서 반미투쟁으로 옮겨 가도록 요구합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도 처음에는 제주도라는 일개 지역 주민의 생존권 문제에서 전국 규모의 반정부투쟁으로 변했습니다. 또 ‘제주해군기지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흘리면서 반미투쟁으로 가려고 합니다. 양상을 보면 교과서대로 투쟁이 전개되는데, 저는 북한의 조종을 받는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자 중 북한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말을 못할 뿐입니다. 2005년 인천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 주도자도 결국 왕재산사건 관련자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북한이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정치인들이야 ‘표’를 노리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이적행위인 거죠.”
―김 선생처럼 직접 침투해서 가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요.
“제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데, 이런 예를 들 수는 있겠네요. 1992년에도 지금처럼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다 있었거든요. 1991년 가을에 한 팀이 들어와서 모 진보정당 선거운동을 배후에서 코치하다가 총선 며칠 앞두고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근거가 있습니까.
“제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침투했던 공작원이 같은 소속 부서에 있던 팀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1차 침투시 2개의 고첩망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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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씨가 숨겨 놓은 난수표 등을 찾기 위해 성남시 분당구 중앙공원 주위를 수색하고 있는 군과 경찰. |
“정말 5만명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티기 힘들 거라고 봅니다. 또 북한이 아무리 활발한 공작을 벌여도 5만명을 침투시킬 수는 없거든요. 제가 실제로 해 봤지만, 공작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포섭해서 조직 만들고 확대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질 않아요. 장기간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요.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근거는 뭡니까.
“제가 1차 남파 때 2개 고정간첩망을 만들었는데, 규모가 100명 정도 됩니다. 많다면 많은 숫자인데, 그 정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아요. 한 조직이 평균 열댓 명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사회구성체 논쟁 등 운동권 내부의 논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북에서 왔다 간 10개 팀이 고첩망 두 곳씩을 구축한다고 해도 300명인데, 5만명이라면 한 조직에 100명이라고 해도 500개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번 남파돼서 고첩망 두 개를 만드는 것도 어렵고요. 제가 두 번째 남파됐을 때 보니까 제가 구축해 놓았던 그 두 개의 고첩망 조직도 와해돼 있더군요.”
―황 선생도 북한에서 들은 얘기일 텐데요.
“1980년대 말에 비슷한 얘기는 있었습니다. 통전부장이나 부부장이 고위급 간부들을 모아 놓고 남한정세 강연을 하는데, 저는 스피커로만 들었습니다. 임동욱 통전부장의 강연내용 중 ‘최근 남조선 괴뢰수사 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우리의 자주노선을 따르는 운동권학생들이 5만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듣다 보면 ‘고정간첩’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죠.”
―남한침투 공작원이 해외담당 공작원보다 더 우수한 인력입니까.
“국내침투가 우수하다고 하면 제 자랑이 될 수 있는데, 위험부담이 가장 크기 때문에 정신적·육체적으로 훈련이 잘돼 있어야죠. 만약 제주도에 직접 침투할 경우 3박4일 동안 배를 타니까 힘들고, 정신적 부담도 큽니다. 처음 선발할 때부터 능력과 외모 등 여러 측면을 감안해 국내와 해외로 나눕니다. 어쨌든 해외보다는 국내 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 인사를 포섭하려면 일정 수준의 지식이나 교양도 갖추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북한에서 4년제 대학 과정을 포함해 최소 10년 정도 여러 훈련을 받아야 공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념 문제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운동권을 상대해야 하니까 공작원양성소 안에 2년제 특별 대학원 과정을 신설해서 학습을 시켰습니다.”
―어떤 이론을 배웠습니까.
“남한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 북한의 후계체제의 정당성, 주체사상 등의 문제에 대해 이쪽에서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학습했습니다.”
―당시 공부했던 게 실제 남한 재야인사들을 만날 때 크게 도움이 됐습니까.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됐던 건 아니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해도 대응할 수 있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남한 재야운동권 중 접촉했던 이들의 논리적 무장은 잘돼 있던가요.
“없었습니다. 《강철서신》의 저자인 김영환씨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논쟁을 벌였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그쪽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북한에서 남한 운동권 중 NL계열인 주사파에게 힘을 싣고, PD계열을 깔아뭉개기 위한 이론으로 중무장했거든요. 여기 와 보니까 북한에서 만든 제목까지 똑같은 책을 가지고 ‘언더’에서 공부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 성격논의의 재조명》 같은 책이죠.”
―내용도 같았습니까.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론서를 작성하면 문체나 용어가 다르니까, 월북 학자들을 시켜서 남한식으로 바꿉니다. 여기 사람들은 제목이랑 내용이 한국식이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거죠. 운동권에서 읽히던, 필자가 알려지지 않은 책 중 99%는 북한에서 찍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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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관계자들이 1995년 10월 25일 오후 김동식씨가 숨겨 놓았던 무전기와 난수표 등을 성남시 분당구 중앙공원 내 묘지 망부석 옆에서 찾아 꺼내고 있다. |
“우리가 흔히 공작원들을 놓고 장관급, 차관급 얘기를 하는데 그건 남한에서 붙인 거고요. 북한은 시스템이 묘해서 권력서열이 22위이고, 정치후보위원이라도 공작원은 중앙당 간부들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이선실은 어떤 역할을 한 겁니까.
“이선실은 황인오를 포섭하는 데 중간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에 갈 때 황인오와 같은 배를 타고 갔고요. 물론 다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선실이 북한으로 돌아간 뒤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여기서 하던 습관이 남아서 북한에 가서도 매사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담당관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왜 네가 나를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는 식으로 하니까 차관(부부장)이 박살을 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간 뒤의 이선실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네요.
“이선실이 남한에 10년 있었고, 그 전에 일본에서 몇 년 살았으니까 조직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겁니다. 처음에 가서 1~2년 정도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래도 편하게 살다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인오, 이선실을 대동하고 월북한 해주 루트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이 월북 당시 이용한 루트로 알려졌는데요.
“제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당시에 20년 전 통혁당 때 썼던 루트라고만 들었습니다. 남로당 간부들이 어느 곳으로 넘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그쪽 루트는 뻔하죠.”
―남한에 와서 4개월 반을 함께 지냈는데 옆에서 지켜본 이선실은 배포가 컸나요.
“업무를 같이 해 보지 않아 개인적인 건 자세히 모릅니다. 같이 생활하면서 본 이선실은 그냥 그 연령에 비해 세상을 먼저 깨우친 여성 정도지, 여걸은 아니었어요. 결혼 여부는 모르지만, 여자 혼자 살다 보니 사고가 협소하고 아량이 없고 자기주장이 강했습니다.”
―이선실이 자랑 삼아서 ‘내가 남한에서 뭘 했다’ 하는 얘기는 안 했습니까.
“언젠가 이선실 얘기를 들었는데, 재야인사로 유명 종교인이었던 사람을 여러 번 만났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방북을 배후에서 조종했죠.”
북한의 공작원 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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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당시 경찰청 차장이 생포된 남파공작원 김동식씨에 대한 중간수사발표를 하고 있다. |
“두 번씩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0개 팀이 갔다 왔는데, 남한에 두 번 침투한 사람은 저를 포함해 4명입니다.”
―첫 침투 때의 두려움 때문에 두 번째는 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는 모르지 않습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한 번 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목숨 걸고 오는 거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두 번씩이나 침투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만들어 놓은 지하당조직(고첩망)이 2년 사이에 깨졌습니다. 북한에 돌아가서 영웅 칭호도 받고 주목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뤄 놓은 것이 없었던 거예요. 개인적으로 허망하기도 했고, 주변에서 시샘을 많이 했습니다. 20대에 그렇게 한 경우가 별로 없었거든요. ‘저 녀석 사상이 변질됐다’, ‘출세하려고 한다’는 악담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 간부들을 만나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그럼 내가 다시 갔다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갔다 와야겠다” 하길래 단박에 “그러겠다”고 답했습니다. 그쪽에서 “농담이 아니다”라고 했고, 저도 보내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기간이 한 달밖에 안돼서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준비기간은 최소 몇 달이 걸립니까.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필요합니다. 한 달이면 죽었다 깨나도 못하는 시간인데, 부부장이 ‘시간이 많지 않지만, 당신이 좀 고생을 해 줘야겠다’고 해서 결국 설득을 당한 거죠.”
―침투준비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처음에 하는 건 신분위장입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의 신원정보를 주면 이름,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호주, 병역 여부 등을 봅니다. 그걸로 가짜 경력을 구상하는 거지요. 호적 주소를 보면서 어디서 자랐는지, 학교는 어느 초·중·고등학교에 다녔는지, 군대는 어딜 갔는지 떠올립니다. 보통 두 사람의 가짜 경력을 구상하는데, 이것만 한 달이 더 걸립니다.”
―다음 단계는요.
“침투 경로, 방법 등을 모색합니다. 안내원들이 해안을 통해 상륙까지 시켜 주지만, 상륙한 다음에는 독자 행동을 해야 하니까 모든 걸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이동, 숙식 해결, 임무 수행, 통신, 포섭, 비상상황, 복귀 등에 대한 가정을 철저히 하고 작전을 짭니다. 작전을 짠 후 담당관과 얘기해 수정 보완하는 등 부부장까지 올라가는 데 3~4개월이 걸립니다. 그 후 서로 오가며 수정하고, 이의제기를 하는 등의 과정이 깁니다. 그래서 최소 6개월이 필요한 겁니다.”
―체력훈련도 해야 할 텐데요.
“그건 항상 하는 거니까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지만, 임무에 따라서는 준비를 할 때도 있습니다. 남한 현지화교육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해야지 1년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현지화교육 때 1970년대 납북 고교생들에게 교육을 받았다면서요.
“현지화교육 강사들은 여기서 월북한 사람도 있고, 또 고등학생 때 납북된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얘기를 안 하니까 납북자란 것을 몰랐어요. 여기 와서 사진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그들에게 아픔이 있는 줄 알게 된 건 얼마 안됩니다.”
―남한 말씨나 생활을 체득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생활합니까.
“1년 365일을 같이 삽니다. 한집에서 같이 먹고 자고 함께하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말을 배우는데, 외국어 배우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돼요. 남한말의 발음, 억양을 가르쳐 주면 따라하고, 문장도 읽고, 녹음한 걸 들으면서 잘못된 부분 보완하고, 거의 어린애가 말 배우듯이 합니다. 배우는 한 번 틀리면 다시 하면 되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큰일 나잖아요.”
―충분히 배웠다고 해도 막상 접하는 현실은 어색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배워도 처음에는 다 알아들을 수는 없잖아요.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여기 와서 시장에 가니까 아줌마들이 떠드는데 한국말인데도 잘 안 들리더라고요. 유심히 몇 번 들어 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사전준비 과정에서 남한에 와서 접촉할 인사들에 대한 정보는 제공됩니까.
“인물 자료를 다 받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공작부서에서 가진 자료는 다 가지고 오죠. 작가는 작품까지 있으니까 자료가 꽤 많고, 운동권 인사 중 노출이 안된 사람은 서류 1장뿐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접촉해 보니 북한에서 본 자료가 정확하던가요.
“분석 자료가 아니라 스크랩입니다. 평가는 윗사람들이 하지만, 굉장히 단편적인 내용입니다.”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발각 위기는 없었습니까.
“1차 때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으로 들어오는데, 해경 경비정과 맞닥뜨렸습니다. ‘이거 교전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옆에 숲섬이 있으니까 경비정 진행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그 섬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상륙했습니다.”
―부여에서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을 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당시 제가 조원(박광남)하고 같이 왔는데, 그 조원에게 북한에 6개월 된 딸이 있었어요. 저는 선배이면서 조장이니까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아라’라고 얘기했어요. 항상 어떤 상황이 생기면 빨리 가라고 그 친구를 앞세우고 제가 뒤에 섰는데, 이게 반대로 되더라고요. 총 맞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영화나 소설에서 그런 상황이 되면 과거 일들이 화면처럼 쫙 나오는데 그게 정말 맞는 말이에요.”
―어떤 일들이 떠오르던가요.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배신, 증오, 원망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공작지도부와 다른 공작원의 잘못으로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까 화가 많이 났죠.”
―자살용 무기는 없었습니까.
“자기 머리에 대고 쏘면 죽으니까 총이 자살용이죠. 그런데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아직 30대니까. 피값이라도 하려고 했죠. 그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박광남이 처자가 있다고 했지만, 김 선생도 마찬가지 입장 아니었습니까.
“내가 선배고, 조장이니까 책임감이 있죠. ‘쟤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제가 붙잡혀서도 조원이 돌아갈 시간을 벌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초반에 이동경로 등 허위진술을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소식은 들었습니까.
“모두 숙청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했으면 북한에서 진짜 영웅으로 살고 있을 텐데요.
“소설이지만, 아마 그때 돌아갔으면 2중 영웅이 됐을 겁니다. 2중 영웅이 많지 않아요. 제 또래들이 지금 다 부부장이나 과장급을 하고 있습니다.”
―첫 공작 때 본 남한과 두 번째 접한 모습은 차이가 있습니까.
“민주화가 많이 진행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경제도 발전했고요. 처음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모르는 것 같았는데, 두 번째는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었어요. 변화가 굉장히 빠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또 운동권 분위기도 달라졌어요. 처음에 제가 왔을 때 본 한국사회는 당장 무너질 것 같았거든요. 그때는 서로 ‘같이 해 보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동구권이 망하고 독일도 통일되니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도 안정을 찾았고요. 상대적으로 북한은 김일성이 죽고, 식량난으로 어려울 때여서 언제 망할지 모르니까 95년 당시 저를 대하는 일부 남한 인사들 태도는 귀찮다는 투였습니다.”
북한 다녀온 사람들이 내 증언 더 안 믿어
―남한으로 귀순해 버릴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때 생각은 얼른 임무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가야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길을 가게 돼 있으니까요. 남한이 발전한 것은 알지만, 여기는 생소한 자본주의 체제에 한 치 앞을 모르는 곳 아닙니까. 북한은 내가 돌아가면 명예도 얻고 출세도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남한의 실상을 접하면 혼란스럽지 않았습니까.
“현지화 기간에 남한 방송, 신문, 잡지를 보고 라디오를 들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공부합니다. 그걸 마치면 마카오, 싱가포르, 홍콩 등으로 실습을 갑니다. 남한과 환경이 비슷한 곳에 가서 자본주의 체험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 와서 충격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차이라면 스크린과 현실의 차이 정도라고 할까요.”
―귀순 후 남한에 있으면서 북한의 진실을 말하는데 믿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직접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일부 있었습니다. ‘북한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단기간 북한에 가서 본 걸 북한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정부 관료든, 민간단체 회원이든, 심지어 김영환 같은 사람이든 남한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절대 실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제가 안내를 해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누구 안내를 했습니까.
“황인오를 데려갔을 때 일주일 동안 안내를 했는데, 그에게도 실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에 다녀온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만 믿고, 아무리 진실을 말해 줘도 들으려 하질 않아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갑갑합니다.”
―공작원 교육을 하면서 김현희씨 얘기는 들어 봤습니까.
“그건 공인된 비밀입니다. 그 일 때문에 여자 공작원들이 많이 제대했고, 준비하던 테러를 중단한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 와서 김현희씨를 직접 만나 보고 그가 쓴 책도 봤는데, 그의 말은 틀림없는 평양말투였고 그가 책에 적은 내용 역시 북한 공작원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왜 프로들끼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알아보는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테러를 준비하다 그만뒀는지 사례를 들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국 내에 들어와서 어떤 대상을 폭파하는 연습을 했어요. 어느 건물이라고 제가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고. 테러 목적에 따라서 대상이 선정돼요. 올림픽이라면 그걸 파탄시키는 게 목적이 되잖아요. 보안이 허술하다는 것을 최대한 노출해서 불안감을 조성하려면 김포공항, 서울역 같은 곳이 될 수 있겠죠.”
그에게 최근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는가를 마지막으로 물었다.
“고향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체제는 다른 곳에 살았어도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