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과 3國 가스관 연결 사업에 대한 러시아 시각 : 월간조선

지난 8월 김정일(金正日)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해 현지 분위기는 예상 외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9년 만에 양국(兩國) 정상이 만나는 것이었고, 러-북-남 가스관 연결사업이라는 외교ㆍ경제적 비중이 큰 상징적 이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치권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 언론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러ㆍ북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공급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자 여기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러시아 언론은 북한이 구(舊) 소련에 빌렸던 100억 달러 상당의 채무 지불 문제, 북한이 공수한 김정일 수행차량(1995년산 방탄 벤츠 차량) 그리고 북한 경호팀 요청으로 기차역 주변 아파트 단지와 거리에 대한 통행 제한 소식 등을 주요 뉴스로 보도했을 뿐이다.

러시아의 ‘김정일 트라우마’

2000년 7월 러시아와 북한의 평양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은 푸틴 대통령에게 ‘조건부 미사일 포기’를 제안했다. 그해 G8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러·북 정상회담의 성과로 관련 이슈를 전(全) 세계에 알리며 동북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한 달 후 김정일은 남한 언론과의 회견에서 “그 얘기는 농담에 불과했다”며 조건부 미사일 포기를 뒤집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1997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으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바꾸겠다는 젊은 대통령 ‘푸틴’의 첫 번째 외교 성과는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듬해 김정일은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시 양국 정상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계획은 평화적인 목적을 띠고 있으며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국가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모스크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당시 러시아 언론은 은둔의 독재자 김정일을 1만km 떨어진 모스크바까지 데려온 푸틴의 외교전술과 남한-북한-러시아를 잇는 철도 연결사업 구축 합의 등을 강조하며 푸틴의 외교 성과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당시 푸틴 대통령도 선언문을 통해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가 긍정적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건설적이고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반도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푸틴의 집요한 실리 외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푸틴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traumaㆍ심리적 외상 또는 스트레스성 장애)를 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 선언을 통해 핵프로그램을 재개했고 동해와 일본영공으로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했다. 모스크바 선언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러시아를 곤혹스럽게 한 것이다. 러ㆍ북 간 철도 연결사업 또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번 김정일의 방러를 두고 러시아 주요 일간지 《카메르산트》는 “김정일의 농담이 또 반복될 수 있다”는 기사를 통해 러·북 회담 및 경협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과거 김정일의 농담 사건을 거론했다. 특히 ‘농담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며 김정일 같은 독재자와의 합의ㆍ체결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강조했다.

러시아 언론은 이번 김정일과 푸틴 총리 간 회담이 결렬된 것은 과거 김정일의 농담 사건에 대한 푸틴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것이라 전했다. 또 러시아 최대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Gazprom)의 회장 알렉세이 밀러가 회담 직후 북한의 실무 협상자를 정하지 못한 데 대한 난처한 상황을 전하며 북한의 불확실성을 제기했다.

러시아 천연가스 현황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의 ‘가스관 트라우마’

이번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해 양국의 최대 관심사는 가스관 연결 사업이다. 그렇다면 이 사업은 과연 잘될까.

지난 2006년 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공급 협상이 결렬되자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유럽행(行) 파이프 라인의 밸브를 잠가버렸다. 이 분쟁으로 러시아산(産) 가스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 국가를 비롯해 세계 각국은 에너지 독립을 위한 공급선 다변화, 대체 에너지 개발 등을 서둘렀다. 러시아는 경유국(우크라이나)이 가스 통과를 무기화해 공급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필요시 공급자와 수급자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겪었다. 러시아 가스의 수급자(유럽)는 공급자와 경유국(우크라이나)의 의견 충돌(공급 및 통과 가격)로 국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불행하게도 가스 공급 중단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카자흐스탄-벨라루스 3국 관세동맹 가입과 가스가격 인하를 협상카드로 내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양국 정부의 새로운 가스 대전(大戰)이 장기화 및 악화될 경우 제2의 가스 공급 중단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수급자(유럽)는 다시 한 번 공급자와 경유국의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수송로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는 경우 공급자의 지배권은 약화되고, 수급자는 안정적 에너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공급자와 수급자를 잇는 경로국가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러·북 정상회담 이후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3국(러시아ㆍ북ㆍ남) 가스관 연결사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러시아의 한 기자는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가스의 가격 인하 문제와 관세동맹 가입 연기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청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가스가격 재(再)협상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현재(우크라이나)와 미래(북한)의 가스관 사업의 실체가 러·북 회담 기자회견장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현실성 없는 高위험 사업

현실은 냉혹하다. 가스 통과료와 사용료를 놓고 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동맹국이자 같은 슬라브 민족이며, 상당수 러시아인이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와 수년째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량국가로 낙인 찍힌 북한과의 가스관 연결 사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러시아 언론은 “(러-북-남 가스관 연결사업은) 정치적ㆍ외교적ㆍ인도적 차원의 상징적 선언일 뿐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제안”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러시아 언론은 오래전 김정일이 제안한 3국 철도 연결사업이 시작도 못 한 점을 밝히며, 3국 가스관 사업도 현실성이 없는 하이 리스크(high risk) 사업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관점에서 3국을 연결하는 가스관 사업은 남북통일과 동북아 평화를 앞당기고 러시아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사업이 시행될 경우 러시아 정부는 이익 확보와 위험성 제거를 위해 한국과 주변국(미국ㆍ중국ㆍ일본)을 최대한 끌어들여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길 것이다. 러시아는 이해득실을 계산한 후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김정일과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잘 기억하고 있는 한 그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