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고위간부 접촉한 對北사업가 “김정일, 訪中 과정에서 ‘김정은 세자책봉’과 개혁·개방에 대한
중국의 지지 받아냈다”
⊙ 現 폐쇄경제 장악한 北 기득권층, 김정은 세습은 ‘OK’, 개혁·개방은 ‘NO’
⊙ 김정은, 국가보위부로부터 10만 부원의 ‘충성맹세문’ 포함된 사업보고 받아… 김정일로부터
부장직 승계
중국의 지지 받아냈다”
⊙ 現 폐쇄경제 장악한 北 기득권층, 김정은 세습은 ‘OK’, 개혁·개방은 ‘NO’
⊙ 김정은, 국가보위부로부터 10만 부원의 ‘충성맹세문’ 포함된 사업보고 받아… 김정일로부터
부장직 승계
- 김정일은 자신은 역사에 폭군, 독재자로 남을지언정 자신의 아들은 덩샤오핑(鄧小平)처럼 개혁의 ‘영웅’으로 만들어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사진은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시에 설치된 대형 덩샤오핑 사진 간판.
지난 9월 28일 북한의 이번 3차 당대표자회를 앞두고 국내외에서는 북한 노동당의 새로운 정책이나 전략이 나올 것이라 예측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큰 산이 울리더니 겨우 쥐새끼 한 마리가 나왔다’는 식으로 급조된 당 인사만 발표하고 뚱뚱한 김정은의 모습만 공개했을 뿐 경제정책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북한이 김정은의 등장만을 목적으로 6차 당대회(1980년) 이후 30년 만에 당 대회를 열었을까.
기자는 지난 10월말 중국 옌볜(延邊)의 북·중(北中) 접경지역에 다녀왔다. 다수의 조선족 대북(對北)사업가와 중국 정부 관계자 등 소식통으로부터 북한 내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북사업가 A씨는 자신이 당대표자회 직후 평양에 갔을 때 북한 고위간부들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자세히 전해줬다. 15년 동안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노동당, 내각은 물론 국방위원회에까지 고급 인맥을 가진 그는 올해만 두 차례 추진된 김정일(金正日) 방중(訪中)의 목적과 당대표자회가 연기된 이유를 분석했다.
A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자신의 3남 김정은에게 안정적으로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2009년부터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해 측근과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논의의 결과는 결국 두 차례의 방중과 당대표자회의 지연(遲延)으로 나타났다.
김정일은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인민’은 무지(無知)해야 통치하기 쉽다”는 것을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철저히 배운 사람이다. 독재자는 ‘고난의 행군’ 시기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냉정했다.
황장엽(黃長燁) 전(前) 노동당 비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에서) 1995년 당원 5만명을 포함해서 5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증언했다. 수십만, 수백만의 북한 주민이 굶어 죽어 가는데 김정일은 1996년 초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마라”고 선언했고, 1997년 9월에는 간부들에게 “우리는 절대로 개혁 바람에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개혁·개방을 했다면 벌써 망한 지도 오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1997년 일명 ‘심화조사건’을 통해 김일성 계열의 간부들과 개혁주의자들을 ‘간첩’ 누명을 씌워 대거 숙청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직감과 경험으로 무자비한 폭정과 쇄국만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지키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2004년에 좌천됐던 장성택(張成澤)도 김정일에게 ‘개혁·개방만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가 김정일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었다는 설(說)이 있다.
하지만 2008년 8월 뇌졸중을 겪은 김정일은 이후부터 개혁·개방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A씨는 전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어린 아들에게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닦아 주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은 것이다.
북한에서 모든 고급 정보와 여론이 집중되는 곳은 다름 아닌 김정일의 집무실이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뻗은 노동당, 보안부(경찰), 보위부(정보기관)의 하부조직들을 통해 매일 정보보고가 올라오고, 중앙당 ‘1호 신소과’를 통해 북한 내 여론이 수집된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이 가장 원하는 것이 개혁·개방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민 통제력을 믿고 폐쇄정치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핵실험을 아무리 해도 북한 주민들은 ‘배고픈 자존심’을 원치 않았고, “남조선을 윽박질러 쌀과 비료를 받아 오겠다”고 장담해도 외부 소식에 민감한 주민들까지 속일 수 없었다.
‘전과’ 없는 김정은을 ‘조선의 덩샤오핑’으로
결국 김정일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역사에 폭군, 독재자로 남을지언정 자신의 아들은 덩샤오핑(鄧小平)처럼 개혁의 ‘영웅’으로 만들어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다. 한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는 “비록 김정은이 독재자 김정일의 아들이지만, 주민을 굶겨 죽인 ‘전과’가 없기 때문에 그가 주민들이 원하는 개혁·개방을 주도하게 되면 오히려 주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은 김정은을 ‘조선의 덩샤오핑’으로 만들면 북한의 개혁·개방을 원하는 중국이 정은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했을 수 있다. 자신은 체제유지를 위해 개혁·개방을 결사반대했지만, 아들의 안정적인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혁·개방이 필수라는 결론을 내린 김정일은 북한의 개혁을 위한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지난해 8월 김기남(金基南) 노동당 비서를 보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을 만나게 하는 등 남북 경색국면을 풀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한국 정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3개월 후인 11월에는 서민들을 위한다면서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오히려 서민들만 죽이고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9년 12월 김정일은 이미 20년 전에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됐던 나선시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 행보 역시 개혁·개방을 위한 시도였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은 나선시를 둘러보고 간부들에게 “나선시가 개방된 지 20년이나 됐는데 도시가 왜 이 모양이냐.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않으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에게 나선시 개발에 관한 전권을 주고 나선시로 보냈다. 2009년 12월 26일 나선시에 간 장성택은 6일 정도 머무르면서 나선시 간부들로부터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나선시 간부들은 장성택에게 “군부대, 내각 등 특권기관 산하의 외화벌이들이 나선시를 제치고 돈을 다 벌어 갔다”며 “그들 때문에 나선시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들은 또 “그나마 돈을 좀 벌면 함경북도에서 ‘도내 인민생활 향상에 쓰겠다’고 다 뺏어간다”며 “중국 투자자들은 중앙이나 도의 권한에 위축된 나선시와는 합영(合營·합작)을 안 하려고 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아들을 위해 ‘개혁’으로 방향을 잡은 김정일의 심중을 잘 알고 있는 장성택은 그 자리에서 나선시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줬다. 2010년 1월 나선시는 함경북도보다 급이 더 높은 ‘나선특별시’로 지정이 되면서 도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또 올해 초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특권기업’들은 나선시에서 모두 철수하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는 나선시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조치로, 국방위원회 산하 선경회사를 비롯한 군부대 외화벌이 회사들과 내각 산하 회사 등 ‘특권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나선시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해 10월 중순쯤에는 모두 철수했다. 그들이 남겨 놓은 인원과 건물 등은 모두 나선시가 접수했다.
“北 간부들, 천안함이 자기네 소행인 것 안다”
하지만 나선시에 대한 새로운 조치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특권기관 산하의 회사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자금을 다 뽑아 가는 바람에 나선시는 빈껍데기 기업만 끌어안게 됐고 기존 ‘특권기업’의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또 이 조치로 인해 기존에 특권기관 외화벌이 회사들과 합영하던 중국인 기업가들이 손해를 보고 더 이상 나선시에 투자를 안 하려 한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나선시 인민위원회도 권한을 한 번에 넘겨받으면서 부담을 느끼는 데다 중국인 사업가들을 다룰 수 있는 경험도 부족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나선시의 앞날이 불투명하지만, 김정일이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감지할 수 있다.
한편 김정일은 김정은의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남한의 지원이 필수적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現) 정부의 ‘주고받기(give and take)’식 대북지원은 지난 10년간의 ‘융숭한’ 지원에 익숙했던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 ‘한번 본때를 보인다’고 저지른 것이 천안함 사건이다.
지난 10월 평양을 방문한 A씨는 “북한 간부들도 ‘천안함’ 사건이 자기네 소행이란 걸 안다”며 “그들은 ‘남한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지원물자나 챙기려 했던 노릇이 이상하게 불거졌다’며 당혹해했다”고 전했다. 그가 전한 북한 간부들의 입장은 “과거 경험으로 봤을 때 손 좀 봐주면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요구에 굴복해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쌀·비료도 지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국 정부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와 우리(북한)도 당황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정일의 지난 5월 방중은 유엔의 대북제재 조치에 당황한 김정일이 ‘믿을 건 중국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급히 떠난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일은 5월 방중 때 중국 정부에 쌀 200만t, 50억 달러 무상지원, 대규모 투자를 요구했다고 한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며 이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우리가 60년 동안 당신네 국경을 지켜주지 않았나. 우리가 없었으면 1300km에 달하는 북·중 국경을 지키기 위해 당신들이 수많은 군대를 보냈을 것이고 그 유지비용은 천문학적 액수가 됐을 것이다. 그 비용에 비하면 우리의 요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또 “당신들이 정 안 도와주면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 대만에 지원을 요청하면 된다”고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김정일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중국은 북한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자책봉과 개혁·개방 중 세습 카드 선택
기자가 만난 다수의 중국인 사업가는 “중국 정부가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한 조건에서 직접적인 대북 쌀 지원을 하지는 못하고 중국인 대북 사업가들에게 쌀을 나눠 주어 ‘무역’ 형식으로 쌀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인 사업가 B씨는 “최근에 북한에 가 보니 평양, 원산 등 대도시에서 유통되는 쌀은 대부분 중국 쌀”이라고 전했다. 또 중국 정부가 북한과 인접한 동북지역의 지방정부들에 돈을 나눠 주고 그 지방정부는 북한에 투자하는 중국인 사업가들에게 돈을 ‘장기 대부’하는 형식으로 북한에 자금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 관계자도 “중앙정부가 올해 지린(吉林)성에 250억 위안(약 4조1800억원), 랴오닝(遼寧)성에 150억 위안(약 2조5000억원)을 지급했다”면서 “이 돈은 대부분 북한에 투자하거나 무상지원할 돈”이라고 전했다. 중국은 대북 자금 지원을 위해 중국인 개인기업을 통해 북한에 ‘투자’하는 방식을 선택, 개인기업이 대북 투자금의 30%를 준비하면 중국 정부가 70%를 대 주는 식으로 북한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고 했다. ‘무이자·무기한 대부금’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냥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 중국 대북사업가들의 주장이다.
김정일이 5월 방중에서 중국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온 후 북한 당국은 6월 “당대표자회를 9월에 소집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후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화려하게’ 등장시키려는 생각을 가졌던 김정일은 8월말 두 가지 카드를 가지고 김정은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하나는 ‘김정은 세자책봉’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받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우선 4개 도시(평양, 나선, 신의주, 개성)를 개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평양의 경우에는 중심지구를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 근교에 공업단지를 만들어 중국사람들이 투자하도록 계획을 세웠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중국 지도자들을 만난 김정일은 “앞으로 김정은이 ‘개혁·개방’ 깃발을 들 테니 당신들은 김정은을 인정하고 지지하라”는 식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이라는 업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중국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중국도 평소 “김정일의 아들이 집권하든 말든 북한이 개방하면 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3대 세습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은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에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위대한 지도자”라는 감투를 씌워 전격 등장시키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북한 고위 간부들, 특히 원로 간부들을 비롯한 기득권층들은 김정은 세습과 개혁개방을 모두 반대했다. 물론 ‘장군님(김정일)의 아들’을 거부하면 정치범수용소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김정은 등장은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지만, 김정은의 등장과 함께 당의 노선이 개혁·개방으로 선회하는 것에는 결사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은式 개혁 앞서 반대세력 숙청 시작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 기득권층이 김정은 세습을 인정하는 대가로 개혁·개방으로의 정책 변경을 포기하도록 김정일을 압박했다고 전했다. 결국 이러한 ‘노선 투쟁’이 길어지면서 9월 상순에 열린다던 당대표자회가 9월 말로 연기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북한 당대표자회에서 ‘당의 노선이나 전략’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김정은만 달랑 등장한 이유라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물론 김정일도 당장 개혁·개방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개방을 안 할 것이라고 대북 소식통들은 주장했다. 단지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가 되면 덩샤오핑처럼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것이다. 그러니 김정은을 믿고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목적일 뿐이며 그런 이유로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개혁’ 냄새를 좀 풍기려고 했을 뿐이다.
이번 당대표자회 지연, 간부들의 반발 등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김정일은 측근들과 간부들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충실했던’ 간부들까지도 김정은의 등장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분위기를 김정일도 피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27세 김정은의 앞길에 드리운 검은 구름을 김정일도 볼 수 있었다. ‘김정은식(式) 개혁·개방’, ‘조선의 덩샤오핑’은 아직 먼 훗날의 문제였다. 김정일은 김정은식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김정은 반대세력들을 먼저 숙청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현재 평양에서도 김정은 세습 반대 구호나 삐라가 등장하는 등 일반 주민들과 간부들 속에 김정은 반대 분위기가 거세지는 상황이다. 3~5년 정도 내부 숙청을 통해 김정은 지지기반을 만든 다음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선포함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게 하려는 것이 ‘늙은 아비’의 계획이자 소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김정은 지지기반 마련을 위해 무자비한 폭정이 우선이다.
북한을 다녀온 중국 사업가들은 한결같이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공포 분위기”라고 전했다. 북한 당국은 국경에 대한 단속을 수십 배 강화하고 주민들의 불만 섞인 발언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공식 등장한 이후 북한 전 지역에서는 삐라 살포를 비롯한 반체제 움직임들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가보위부장직 정은에게 넘겨줬다
북한 내부의 한 소식통은 “얼마 전 함경북도 청진시 남향동 청진의학대학병원 앞길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머저리’, ‘돼지 같은 놈’이라는 낙서를 한 유인물과 50여 장의 삐라들이 뿌려져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식량·피복 등 보급물자 부족으로 인해 군인들이 탈영하고 장교들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군부 내에서도 동요와 무질서가 심각하다고 한다.
현재의 혼란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김정일은 당대표자회 직후 아들에게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정원에 해당) 부장직을 넘겨줬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뻗은 조직망과 막대한 권한을 가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직은 대외적으로는 공석(空席)이었다. 하지만 국가보위부 출신 탈북자는 “보위부 내부 문건에는 부장이 김정일로 표기돼 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의 지시로 지난 2007년부터 국가보위부의 업무에 관계했던 김정은은 당대표자회 직후인 10월 9일 국가보위부 제1부부장 우동측, 반탐정국 부부장 유경 등으로부터 1차 사업보고를 받으며 보위부 부장직을 정식으로 넘겨받았다. 이날 사업보고에는 국가안전보위부(기관명·대성산) 10만 보위부원들의 ‘충성 맹세문’도 포함돼 있었다고 북한 내부 소식통은 전했다.
이번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김정은은 군대와 국가보위부, 보위사령부(기무사에 해당), 인민보안부(경찰) 등을 틀어쥔 명실상부 북한의 2인자로 일약 발돋움했다. 김정은이 11월 6일 사망한 조명록을 대신해 국방위원회 1부위원장과 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무리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과연 20대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북한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처음 몇 년간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반대세력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이후 덩샤오핑처럼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포하게 하려는 김정일의 ‘계산’대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북한 내부 민심이 따라줄지도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김정일 자신도 김씨 일가의 ‘영광’을 3대까지 ‘순탄하게’ 물려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는 지난 10월말 중국 옌볜(延邊)의 북·중(北中) 접경지역에 다녀왔다. 다수의 조선족 대북(對北)사업가와 중국 정부 관계자 등 소식통으로부터 북한 내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북사업가 A씨는 자신이 당대표자회 직후 평양에 갔을 때 북한 고위간부들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자세히 전해줬다. 15년 동안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노동당, 내각은 물론 국방위원회에까지 고급 인맥을 가진 그는 올해만 두 차례 추진된 김정일(金正日) 방중(訪中)의 목적과 당대표자회가 연기된 이유를 분석했다.
A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자신의 3남 김정은에게 안정적으로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2009년부터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해 측근과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논의의 결과는 결국 두 차례의 방중과 당대표자회의 지연(遲延)으로 나타났다.김정일은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인민’은 무지(無知)해야 통치하기 쉽다”는 것을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철저히 배운 사람이다. 독재자는 ‘고난의 행군’ 시기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냉정했다.
황장엽(黃長燁) 전(前) 노동당 비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에서) 1995년 당원 5만명을 포함해서 5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증언했다. 수십만, 수백만의 북한 주민이 굶어 죽어 가는데 김정일은 1996년 초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마라”고 선언했고, 1997년 9월에는 간부들에게 “우리는 절대로 개혁 바람에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개혁·개방을 했다면 벌써 망한 지도 오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1997년 일명 ‘심화조사건’을 통해 김일성 계열의 간부들과 개혁주의자들을 ‘간첩’ 누명을 씌워 대거 숙청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직감과 경험으로 무자비한 폭정과 쇄국만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지키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2004년에 좌천됐던 장성택(張成澤)도 김정일에게 ‘개혁·개방만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가 김정일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었다는 설(說)이 있다.
하지만 2008년 8월 뇌졸중을 겪은 김정일은 이후부터 개혁·개방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A씨는 전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어린 아들에게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닦아 주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은 것이다.
북한에서 모든 고급 정보와 여론이 집중되는 곳은 다름 아닌 김정일의 집무실이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뻗은 노동당, 보안부(경찰), 보위부(정보기관)의 하부조직들을 통해 매일 정보보고가 올라오고, 중앙당 ‘1호 신소과’를 통해 북한 내 여론이 수집된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이 가장 원하는 것이 개혁·개방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민 통제력을 믿고 폐쇄정치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핵실험을 아무리 해도 북한 주민들은 ‘배고픈 자존심’을 원치 않았고, “남조선을 윽박질러 쌀과 비료를 받아 오겠다”고 장담해도 외부 소식에 민감한 주민들까지 속일 수 없었다.
‘전과’ 없는 김정은을 ‘조선의 덩샤오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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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2월 김정일은 이미 20년 전에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됐던 나선시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 행보 역시 개혁·개방을 위한 시도였다. 사진은 지난 6월 나선시를 6개 구역으로 나눠 개발하겠다며 제작한 청사진 3D 동영상 캡처. |
김정일은 김정은을 ‘조선의 덩샤오핑’으로 만들면 북한의 개혁·개방을 원하는 중국이 정은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했을 수 있다. 자신은 체제유지를 위해 개혁·개방을 결사반대했지만, 아들의 안정적인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혁·개방이 필수라는 결론을 내린 김정일은 북한의 개혁을 위한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지난해 8월 김기남(金基南) 노동당 비서를 보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을 만나게 하는 등 남북 경색국면을 풀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한국 정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3개월 후인 11월에는 서민들을 위한다면서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오히려 서민들만 죽이고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9년 12월 김정일은 이미 20년 전에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됐던 나선시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 행보 역시 개혁·개방을 위한 시도였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은 나선시를 둘러보고 간부들에게 “나선시가 개방된 지 20년이나 됐는데 도시가 왜 이 모양이냐.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않으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에게 나선시 개발에 관한 전권을 주고 나선시로 보냈다. 2009년 12월 26일 나선시에 간 장성택은 6일 정도 머무르면서 나선시 간부들로부터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나선시 간부들은 장성택에게 “군부대, 내각 등 특권기관 산하의 외화벌이들이 나선시를 제치고 돈을 다 벌어 갔다”며 “그들 때문에 나선시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들은 또 “그나마 돈을 좀 벌면 함경북도에서 ‘도내 인민생활 향상에 쓰겠다’고 다 뺏어간다”며 “중국 투자자들은 중앙이나 도의 권한에 위축된 나선시와는 합영(合營·합작)을 안 하려고 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아들을 위해 ‘개혁’으로 방향을 잡은 김정일의 심중을 잘 알고 있는 장성택은 그 자리에서 나선시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줬다. 2010년 1월 나선시는 함경북도보다 급이 더 높은 ‘나선특별시’로 지정이 되면서 도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또 올해 초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특권기업’들은 나선시에서 모두 철수하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는 나선시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조치로, 국방위원회 산하 선경회사를 비롯한 군부대 외화벌이 회사들과 내각 산하 회사 등 ‘특권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나선시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해 10월 중순쯤에는 모두 철수했다. 그들이 남겨 놓은 인원과 건물 등은 모두 나선시가 접수했다.
“北 간부들, 천안함이 자기네 소행인 것 안다”
하지만 나선시에 대한 새로운 조치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특권기관 산하의 회사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자금을 다 뽑아 가는 바람에 나선시는 빈껍데기 기업만 끌어안게 됐고 기존 ‘특권기업’의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또 이 조치로 인해 기존에 특권기관 외화벌이 회사들과 합영하던 중국인 기업가들이 손해를 보고 더 이상 나선시에 투자를 안 하려 한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나선시 인민위원회도 권한을 한 번에 넘겨받으면서 부담을 느끼는 데다 중국인 사업가들을 다룰 수 있는 경험도 부족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나선시의 앞날이 불투명하지만, 김정일이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감지할 수 있다.
한편 김정일은 김정은의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남한의 지원이 필수적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現) 정부의 ‘주고받기(give and take)’식 대북지원은 지난 10년간의 ‘융숭한’ 지원에 익숙했던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 ‘한번 본때를 보인다’고 저지른 것이 천안함 사건이다.
지난 10월 평양을 방문한 A씨는 “북한 간부들도 ‘천안함’ 사건이 자기네 소행이란 걸 안다”며 “그들은 ‘남한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지원물자나 챙기려 했던 노릇이 이상하게 불거졌다’며 당혹해했다”고 전했다. 그가 전한 북한 간부들의 입장은 “과거 경험으로 봤을 때 손 좀 봐주면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요구에 굴복해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쌀·비료도 지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국 정부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와 우리(북한)도 당황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정일의 지난 5월 방중은 유엔의 대북제재 조치에 당황한 김정일이 ‘믿을 건 중국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급히 떠난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일은 5월 방중 때 중국 정부에 쌀 200만t, 50억 달러 무상지원, 대규모 투자를 요구했다고 한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며 이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우리가 60년 동안 당신네 국경을 지켜주지 않았나. 우리가 없었으면 1300km에 달하는 북·중 국경을 지키기 위해 당신들이 수많은 군대를 보냈을 것이고 그 유지비용은 천문학적 액수가 됐을 것이다. 그 비용에 비하면 우리의 요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또 “당신들이 정 안 도와주면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 대만에 지원을 요청하면 된다”고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김정일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중국은 북한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자책봉과 개혁·개방 중 세습 카드 선택
기자가 만난 다수의 중국인 사업가는 “중국 정부가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한 조건에서 직접적인 대북 쌀 지원을 하지는 못하고 중국인 대북 사업가들에게 쌀을 나눠 주어 ‘무역’ 형식으로 쌀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인 사업가 B씨는 “최근에 북한에 가 보니 평양, 원산 등 대도시에서 유통되는 쌀은 대부분 중국 쌀”이라고 전했다. 또 중국 정부가 북한과 인접한 동북지역의 지방정부들에 돈을 나눠 주고 그 지방정부는 북한에 투자하는 중국인 사업가들에게 돈을 ‘장기 대부’하는 형식으로 북한에 자금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 관계자도 “중앙정부가 올해 지린(吉林)성에 250억 위안(약 4조1800억원), 랴오닝(遼寧)성에 150억 위안(약 2조5000억원)을 지급했다”면서 “이 돈은 대부분 북한에 투자하거나 무상지원할 돈”이라고 전했다. 중국은 대북 자금 지원을 위해 중국인 개인기업을 통해 북한에 ‘투자’하는 방식을 선택, 개인기업이 대북 투자금의 30%를 준비하면 중국 정부가 70%를 대 주는 식으로 북한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고 했다. ‘무이자·무기한 대부금’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냥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 중국 대북사업가들의 주장이다.
김정일이 5월 방중에서 중국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온 후 북한 당국은 6월 “당대표자회를 9월에 소집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후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화려하게’ 등장시키려는 생각을 가졌던 김정일은 8월말 두 가지 카드를 가지고 김정은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하나는 ‘김정은 세자책봉’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받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우선 4개 도시(평양, 나선, 신의주, 개성)를 개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평양의 경우에는 중심지구를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 근교에 공업단지를 만들어 중국사람들이 투자하도록 계획을 세웠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중국 지도자들을 만난 김정일은 “앞으로 김정은이 ‘개혁·개방’ 깃발을 들 테니 당신들은 김정은을 인정하고 지지하라”는 식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이라는 업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중국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중국도 평소 “김정일의 아들이 집권하든 말든 북한이 개방하면 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3대 세습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은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에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위대한 지도자”라는 감투를 씌워 전격 등장시키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북한 고위 간부들, 특히 원로 간부들을 비롯한 기득권층들은 김정은 세습과 개혁개방을 모두 반대했다. 물론 ‘장군님(김정일)의 아들’을 거부하면 정치범수용소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김정은 등장은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지만, 김정은의 등장과 함께 당의 노선이 개혁·개방으로 선회하는 것에는 결사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은式 개혁 앞서 반대세력 숙청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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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과 부자(父子)가 지난 10월 25일 북한을 방문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궈보슝(郭伯雄) 단장 등 일행을 접견하고 있다. |
물론 김정일도 당장 개혁·개방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개방을 안 할 것이라고 대북 소식통들은 주장했다. 단지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가 되면 덩샤오핑처럼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것이다. 그러니 김정은을 믿고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목적일 뿐이며 그런 이유로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개혁’ 냄새를 좀 풍기려고 했을 뿐이다.
이번 당대표자회 지연, 간부들의 반발 등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김정일은 측근들과 간부들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충실했던’ 간부들까지도 김정은의 등장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분위기를 김정일도 피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27세 김정은의 앞길에 드리운 검은 구름을 김정일도 볼 수 있었다. ‘김정은식(式) 개혁·개방’, ‘조선의 덩샤오핑’은 아직 먼 훗날의 문제였다. 김정일은 김정은식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김정은 반대세력들을 먼저 숙청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현재 평양에서도 김정은 세습 반대 구호나 삐라가 등장하는 등 일반 주민들과 간부들 속에 김정은 반대 분위기가 거세지는 상황이다. 3~5년 정도 내부 숙청을 통해 김정은 지지기반을 만든 다음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선포함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게 하려는 것이 ‘늙은 아비’의 계획이자 소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김정은 지지기반 마련을 위해 무자비한 폭정이 우선이다.
북한을 다녀온 중국 사업가들은 한결같이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공포 분위기”라고 전했다. 북한 당국은 국경에 대한 단속을 수십 배 강화하고 주민들의 불만 섞인 발언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공식 등장한 이후 북한 전 지역에서는 삐라 살포를 비롯한 반체제 움직임들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가보위부장직 정은에게 넘겨줬다
북한 내부의 한 소식통은 “얼마 전 함경북도 청진시 남향동 청진의학대학병원 앞길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머저리’, ‘돼지 같은 놈’이라는 낙서를 한 유인물과 50여 장의 삐라들이 뿌려져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식량·피복 등 보급물자 부족으로 인해 군인들이 탈영하고 장교들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군부 내에서도 동요와 무질서가 심각하다고 한다.
현재의 혼란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김정일은 당대표자회 직후 아들에게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정원에 해당) 부장직을 넘겨줬다. 전국에 거미줄처럼 뻗은 조직망과 막대한 권한을 가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직은 대외적으로는 공석(空席)이었다. 하지만 국가보위부 출신 탈북자는 “보위부 내부 문건에는 부장이 김정일로 표기돼 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의 지시로 지난 2007년부터 국가보위부의 업무에 관계했던 김정은은 당대표자회 직후인 10월 9일 국가보위부 제1부부장 우동측, 반탐정국 부부장 유경 등으로부터 1차 사업보고를 받으며 보위부 부장직을 정식으로 넘겨받았다. 이날 사업보고에는 국가안전보위부(기관명·대성산) 10만 보위부원들의 ‘충성 맹세문’도 포함돼 있었다고 북한 내부 소식통은 전했다.
이번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김정은은 군대와 국가보위부, 보위사령부(기무사에 해당), 인민보안부(경찰) 등을 틀어쥔 명실상부 북한의 2인자로 일약 발돋움했다. 김정은이 11월 6일 사망한 조명록을 대신해 국방위원회 1부위원장과 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무리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과연 20대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북한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처음 몇 년간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반대세력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이후 덩샤오핑처럼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포하게 하려는 김정일의 ‘계산’대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북한 내부 민심이 따라줄지도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김정일 자신도 김씨 일가의 ‘영광’을 3대까지 ‘순탄하게’ 물려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