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기록보존소는 북한 인권유린자에게 심리적 압박 돼야
⊙ 민간기구 산하 인권기록보존소는 아무런 실효성 없어
⊙ 누더기 된 북한인권법, 국회 법사위 상정조차 안 돼
李在遠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소위원장
⊙ 1958년 경북 포항 출생
⊙ 경북고, 서울법대 졸업, 현 법무법인 을지 대표변호사, 대한변협 북한인권소위원장.
⊙ 민간기구 산하 인권기록보존소는 아무런 실효성 없어
⊙ 누더기 된 북한인권법, 국회 법사위 상정조차 안 돼
李在遠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소위원장
⊙ 1958년 경북 포항 출생
⊙ 경북고, 서울법대 졸업, 현 법무법인 을지 대표변호사, 대한변협 북한인권소위원장.
- 2009년 12월 북한구원운동 등 50여개 단체로 구성된 북한인권단체연합회 회원들이 세계인권선언일을 하루 앞두고 서울광장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주민 300만명을 굶어 죽게 만든 북한 지도부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들의 무능은 한층 더하다. 당장 올해만 해도 여기저기서 굶어 죽어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며 모자라는 식량이 100만 톤이 훨씬 넘는다는 보고도 잇따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는 지금도 15만4000명 정도가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거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나간 사람의 숫자는 1972년 이후에만 4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귀중한 생명이 하루 30명씩 죽어나갔다는 얘기다. 이뿐인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세계 곳곳을 떠도는 탈북자가 20만명을 훌쩍 넘는다. ‘조선돼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돈 6만원 남짓한 몸값에 두만강 너머로 팔려나가 성적 학대와 함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에 시달리는 북한 젊은 여성들의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권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지만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권력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권력을 비판하며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다. 압박 없는 타협과 투쟁 없는 설득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한동포의 인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궤변일 따름이다.
현재 국회에는 ‘북한인권법’이란 이름을 가진 법안이 제출돼 있다. 이 법안은 그러나 허울뿐이다. 투쟁적 요소가 모조리 제거돼 휴전선 이북에는 조금의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설치·운영을 북한인권재단의 업무로 규정해 놓고는 있다. 그러나 그 결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 잘츠기터의 중앙범죄기록보존소가 모델
통일 전 서독은 1961년 잘츠기터(Salz gitter)에 중앙범죄기록보존소(Erfassungsstelle)를 설치했다. 여기에서 독일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동독이 저지르고 있던 동독 주민에 대한 납치, 구금, 살인 등 4만1390건의 각종 인권탄압 범죄행위를 기록하고 그 증거자료를 수집·보존했다. 북한인권법이 모델로 삼은 것은 이 잘츠기터의 보존소였다.
1991년 우리 정부는 법무부 법무실 김규헌 검사를 독일에 파견, 잘츠기터 보존소를 연구하도록 한 적이 있으나 그 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앙대 제성호 교수,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윤여상 박사 등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설치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2005년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2006년부터 입법을 꾸준히 촉구했다.
정치권에서는 2005년 8월 17대 국회에서 김문수 한나라당 의원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관련 규정을 둔 북한인권법안을 처음 발의했지만,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입법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18대 국회 들어서는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 등이 발의한 북한인권법안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관련 규정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2009년 11월 국회 외통위 법안심사소위는 황우여 의원과 황진하·홍일표·윤상현 의원이 각각 제안한 4개의 북한인권법안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 통합안에선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근거 규정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국회는 지난 2월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북한인권재단이 수행할 활동 중 하나로 딱 한 줄의 근거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해놓고 국회는 현재 이마저도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야당은 동족의 인권문제를 철저히 이념적 당파적 시각으로만 보아 반대하고 있고,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조차도 입법을 하는 척 시늉만 하다가 정작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는 투쟁을 회피하거나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여당이 정말 북한 지도부의 인권 말살행위를 기록하고 규탄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법무부나 국가인권위에 설치돼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재단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설치·운영을 규정했을 뿐 그 성격이나 역할, 조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법이 시행되더라도 과연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제대로 설치될 것인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북한 인권유린자들의 인권 침해 행위 모두를 낱낱이 기록해, 통일이 되면 시효(時效)와 상관없이 반드시 처벌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경고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목적도 있다. 이 때문에 보존소가 생산하는 증거자료들에 대해서는 명확히 증거능력이 부여돼야 하고, 수사 기능이 있는 법무부나 독립적인 조사기능이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내에 설치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 북한인권법안은 민간기구인 북한인권재단에 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하도록 했을 뿐이어서 당초의 설립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증거능력도, 수사기능도 없다.
무엇보다 북한인권재단의 일로 규정된 업무가 옥상옥이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재단의 업무로 북한인권실태의 조사와 연구를 포함시켰다. 이 일은 기존 국가인권위원회나 통일연구원, 또는 다른 민간 북한인권단체들의 업무와 중복된다. 뿐만 아니다. 북한인권재단은 통일부장관의 지도·감독을 받게 되어 있고, 재단의 운영자금도 정부 출연금 또는 보조금으로 충당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통일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재단이 과연 얼마나 독자적으로 북한인권문제를 다룰 수 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두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부가 북한과 협상 분위기에 젖어 있을 경우 재단은 북한 인권문제에서 손을 놓아야 할 것이며, 반대로 통일부가 북한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할 경우 재단은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지도·감독이든 재정적인 관계든 통일부와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관계를 맺는 것은 피해야 한다.
또 북한 인권상황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남한 사회가 내부의 활동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이 어느 정도 이러한 요구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북한인권상황의 개선은 궁극적으로 인권유린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북에 있는 인권침해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거나 북한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단과 제도는 의미가 없다. 대한변협이 제대로 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까닭도 공리공론보다 서독의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보존소처럼 인권유린 범죄행위를 기록해 증거를 보존하면서 인권침해범죄가 억제시켰던 실효성에 더욱 주목했기 때문이다.
인권유린자들에게 ‘기록되고 있다’ 경고할 수 있어야
인권침해행위가 기록·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권침해 범죄자들을 위축시키는 심리적인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권기록보존소는 잠재적인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인권기록보존소에 보관되는 인권침해범들의 범죄 증거는 그들을 처단하는 형법적 청산, 피해자들을 재산상 구제하는 민법적 청산, 인권침해 범죄를 주도하거나 가담한 자들을 통일 정부의 주요공직에서 배제할 인적 청산의 자료가 된다.
서독이라고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보존소 설치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서독이 보존소를 설치했을 때 동독은 서독에 교류중단으로 위협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양독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보존소의 폐쇄를 요구하기도 했다. 동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중앙범죄기록보존소 종사자들을 형사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동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서독이라고 내부에서 왜 논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서독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내부 이견을 잠재우면서 28년간 조직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인권을 위해 일한다는 판·검사와 변호사의 숫자가 1만7000명이 넘는 나라에서 지척에 있는 인권유린자들의 범죄행위를 기록하고 증거를 수집해 보존하는 일조차 하지 못한다면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하고 유지할 용기와 의지가 있는가. 야당 시절 북한의 인권유린에 한마디 말도 못한다며 정부를 공격하던 한나라당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일에 동의해 놓고도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동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을 놓고 지지고 볶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북의 동포들은 끔찍한 학정(虐政)에 피눈물을 뿌리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이라도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문제가 최초의 설립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향에서 재론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는 지금도 15만4000명 정도가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거나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나간 사람의 숫자는 1972년 이후에만 4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귀중한 생명이 하루 30명씩 죽어나갔다는 얘기다. 이뿐인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세계 곳곳을 떠도는 탈북자가 20만명을 훌쩍 넘는다. ‘조선돼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돈 6만원 남짓한 몸값에 두만강 너머로 팔려나가 성적 학대와 함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에 시달리는 북한 젊은 여성들의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권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지만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권력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권력을 비판하며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다. 압박 없는 타협과 투쟁 없는 설득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한동포의 인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궤변일 따름이다.
현재 국회에는 ‘북한인권법’이란 이름을 가진 법안이 제출돼 있다. 이 법안은 그러나 허울뿐이다. 투쟁적 요소가 모조리 제거돼 휴전선 이북에는 조금의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설치·운영을 북한인권재단의 업무로 규정해 놓고는 있다. 그러나 그 결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 잘츠기터의 중앙범죄기록보존소가 모델
통일 전 서독은 1961년 잘츠기터(Salz gitter)에 중앙범죄기록보존소(Erfassungsstelle)를 설치했다. 여기에서 독일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동독이 저지르고 있던 동독 주민에 대한 납치, 구금, 살인 등 4만1390건의 각종 인권탄압 범죄행위를 기록하고 그 증거자료를 수집·보존했다. 북한인권법이 모델로 삼은 것은 이 잘츠기터의 보존소였다.
1991년 우리 정부는 법무부 법무실 김규헌 검사를 독일에 파견, 잘츠기터 보존소를 연구하도록 한 적이 있으나 그 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앙대 제성호 교수,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윤여상 박사 등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설치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2005년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2006년부터 입법을 꾸준히 촉구했다.
정치권에서는 2005년 8월 17대 국회에서 김문수 한나라당 의원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관련 규정을 둔 북한인권법안을 처음 발의했지만,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입법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18대 국회 들어서는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 등이 발의한 북한인권법안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관련 규정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2009년 11월 국회 외통위 법안심사소위는 황우여 의원과 황진하·홍일표·윤상현 의원이 각각 제안한 4개의 북한인권법안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 통합안에선 북한인권기록보존소 근거 규정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국회는 지난 2월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북한인권재단이 수행할 활동 중 하나로 딱 한 줄의 근거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해놓고 국회는 현재 이마저도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야당은 동족의 인권문제를 철저히 이념적 당파적 시각으로만 보아 반대하고 있고,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조차도 입법을 하는 척 시늉만 하다가 정작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는 투쟁을 회피하거나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여당이 정말 북한 지도부의 인권 말살행위를 기록하고 규탄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법무부나 국가인권위에 설치돼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재단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설치·운영을 규정했을 뿐 그 성격이나 역할, 조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법이 시행되더라도 과연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제대로 설치될 것인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북한 인권유린자들의 인권 침해 행위 모두를 낱낱이 기록해, 통일이 되면 시효(時效)와 상관없이 반드시 처벌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경고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목적도 있다. 이 때문에 보존소가 생산하는 증거자료들에 대해서는 명확히 증거능력이 부여돼야 하고, 수사 기능이 있는 법무부나 독립적인 조사기능이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내에 설치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 북한인권법안은 민간기구인 북한인권재단에 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하도록 했을 뿐이어서 당초의 설립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증거능력도, 수사기능도 없다.
무엇보다 북한인권재단의 일로 규정된 업무가 옥상옥이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재단의 업무로 북한인권실태의 조사와 연구를 포함시켰다. 이 일은 기존 국가인권위원회나 통일연구원, 또는 다른 민간 북한인권단체들의 업무와 중복된다. 뿐만 아니다. 북한인권재단은 통일부장관의 지도·감독을 받게 되어 있고, 재단의 운영자금도 정부 출연금 또는 보조금으로 충당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통일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재단이 과연 얼마나 독자적으로 북한인권문제를 다룰 수 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두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부가 북한과 협상 분위기에 젖어 있을 경우 재단은 북한 인권문제에서 손을 놓아야 할 것이며, 반대로 통일부가 북한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할 경우 재단은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지도·감독이든 재정적인 관계든 통일부와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관계를 맺는 것은 피해야 한다.
또 북한 인권상황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남한 사회가 내부의 활동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이 어느 정도 이러한 요구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북한인권상황의 개선은 궁극적으로 인권유린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북에 있는 인권침해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거나 북한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단과 제도는 의미가 없다. 대한변협이 제대로 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까닭도 공리공론보다 서독의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보존소처럼 인권유린 범죄행위를 기록해 증거를 보존하면서 인권침해범죄가 억제시켰던 실효성에 더욱 주목했기 때문이다.
인권유린자들에게 ‘기록되고 있다’ 경고할 수 있어야
인권침해행위가 기록·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권침해 범죄자들을 위축시키는 심리적인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권기록보존소는 잠재적인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인권기록보존소에 보관되는 인권침해범들의 범죄 증거는 그들을 처단하는 형법적 청산, 피해자들을 재산상 구제하는 민법적 청산, 인권침해 범죄를 주도하거나 가담한 자들을 통일 정부의 주요공직에서 배제할 인적 청산의 자료가 된다.
서독이라고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보존소 설치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서독이 보존소를 설치했을 때 동독은 서독에 교류중단으로 위협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양독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보존소의 폐쇄를 요구하기도 했다. 동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중앙범죄기록보존소 종사자들을 형사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동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서독이라고 내부에서 왜 논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서독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내부 이견을 잠재우면서 28년간 조직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인권을 위해 일한다는 판·검사와 변호사의 숫자가 1만7000명이 넘는 나라에서 지척에 있는 인권유린자들의 범죄행위를 기록하고 증거를 수집해 보존하는 일조차 하지 못한다면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하고 유지할 용기와 의지가 있는가. 야당 시절 북한의 인권유린에 한마디 말도 못한다며 정부를 공격하던 한나라당이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일에 동의해 놓고도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동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을 놓고 지지고 볶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북의 동포들은 끔찍한 학정(虐政)에 피눈물을 뿌리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이라도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문제가 최초의 설립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향에서 재론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