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국 하루 전 “감 안 좋다”며 교통·숙박 계획 전면 수정
⊙ “入北 직전 北 친척의 존재는 절대 공개하지 말라 했다” (趙聖來 팍스코리아나 대표)
⊙ “북한은 바보가 아니다. 로버트 박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었을 것” (對北선교사 L씨)
⊙ “두만강변에서 그를 끌어안자 사람 앓는 냄새가 났다” (두만강까지 동행한 탈북자 A씨)
⊙ “그의 도전적 몸짓은 한국통일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 (黃祐呂 의원)
⊙ “入北 직전 北 친척의 존재는 절대 공개하지 말라 했다” (趙聖來 팍스코리아나 대표)
⊙ “북한은 바보가 아니다. 로버트 박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었을 것” (對北선교사 L씨)
⊙ “두만강변에서 그를 끌어안자 사람 앓는 냄새가 났다” (두만강까지 동행한 탈북자 A씨)
⊙ “그의 도전적 몸짓은 한국통일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 (黃祐呂 의원)
- 지난해 12월 22일, 입북 전 로이터통신과 인터뷰 중인 로버트 박씨. 북한의 인권탄압 실상에 대해 토로했다.
2009년 12월 25일 오후 5시(현지시각), 재미교포 인권운동가 로버트 박(28·한국명 박동훈)씨가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며 두만강을 건너 입북(入北)했다. 손에 든 것은 작은 성경책과 기독교 노래 가사가 적힌 종이쪽지가 전부였다. 북한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자진 입북한 최초의 사례다.
42일 후인 2월 5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사 결과 미국 공민(로버트 박)은 조선(북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들어오게 됐다”며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심심하게 뉘우친 점을 고려해 해당 기관에서 관대하게 용서하고 석방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박씨는 이튿날인 2월 6일 오전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외 취재진은 공항에서 박씨에게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가 북한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말이 없었고, 곧바로 미국행(行) 여객기에 올랐다.
북한 인권단체와 대북(對北) 전문가들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에 대해 신뢰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 정권이 박씨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입북 전 박씨와 함께 대북인권운동을 전개해 온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는 2월 10일 성명을 내고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외용 선전 매체로서 그 진실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순교(죽음)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두만강을 건넜던 그는 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돌아왔을까. 그의 석연찮은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박씨의 그간 행적에 대해 다양한 추측과 예측이 오갔지만, 당사자인 그와 가족은 현재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다. 그가 두만강을 건넌 이유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상황을 추적했다.
수용소 존재 알고 북한에 관심 가져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난 박씨는 어린 시절을 애리조나주(州) 투손(Tucson)에서 보냈다. 박씨의 부모인 박평길·조혜련씨는 4년 전 투손에서 샌디에이고 북쪽 엔시니타스로 이주했다. 북한 평안북도 선천 출신 친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됐지만, 박씨가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세 때부터다. 그는 스스로 지인들에게 “20세 전까진 기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해 왔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변의 노숙자와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했다. 멕시코 접경지를 오가며 빈민들을 대상으로 봉사했고, 직접 노숙을 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박씨의 한 지인은 “로버트가 ‘당시 노숙자·빈민 봉사는 모두 지금의 북한 선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란 말을 했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神)이 그의 길을 예비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8년 6월이다. 미국의 한 기독교 단체가 주최한 북한 선교 콘퍼런스에 참가한 후, 계속 한국에 남아 탈북자와 북한 주민을 위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해 12월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같은 정치범 수용소가 북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박씨가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박씨의 대북 선교 활동 동기를 밝혔다. 박씨는 탈북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두 번 다시 히틀러의 만행과 같은 수용소를 용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왜, 북한의 수용소를 용납하고 있느냐”며 흥분했다고 한다. 또 “미국산 쇠고기를 안 먹겠다고 수십만이 광화문 광장에 나오면서도, 수용소에서 쥐 고기도 못 먹어 죽어 가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선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계속했다. 박씨는 2008년 8월 사단법인 ‘함께걷는길벗회’가 운영하는 인천의 한 섬김의 집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중증장애인 16명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그들과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박형규 목사 아들과 姻戚
박씨의 장애인 봉사활동을 주선한 이는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인 박종열(朴鍾烈) 목사다. 박 목사는 로버트 박에 대해 ‘외5촌뻘’이라고 했다. 박종열 목사의 외숙모와 로버트 박 할머니가 형제간이라고 한다. 박종열 목사는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재야(在野)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박형규(朴炯圭)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의 아들로, 로버트 박이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 왔다.
박종열 목사는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하루 한 끼만 먹고 계속 장애인들과 함께 기도와 찬송을 했다”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한 청년”이라고 밝혔다. 또 “로버트는 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면서 “그의 순수한 마음은 존중하지만, (자진 입북 등) 방법적인 측면에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장애인 선교를 마친 로버트 박은 미국에 2달간 머무른 후 2008년 11월쯤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북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9년 1월 14일을 ‘북한을 위한 세계 회개의 날’로 선포하고 각종 북한 선교 집회에 참석해 설교와 기도회를 진행했다.
이후 매달 27일을 ‘북녘 동포를 위한 회개의 날’로 정하고 북한에서 자행돼 온 학살, 굶주림, 고문, 처형 등에 대해 한국과 세계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2억5000만명의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글로벌데이오브프레이어(global day of prayer)’와 연합해 기도문을 13개 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북한 선교를 주장했다.
전국 각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했고 탈북자 가정을 직접 방문해 기독교를 전했다. 2009년 3월엔 과로로 쓰러져 2주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5월 23일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박씨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7월 2일. 서울에 온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첫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에서 수집한 대북선교사들의 연락망을 통해 직접 탈북자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를 전했다.
8월 14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약 1달 반 동안 그는 선양(瀋陽), 옌지(延吉), 단둥(丹東) 등 중·북(中北) 접경지대를 돌며 북한 지하교인들과 선교사를 만났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그때 두만강변에서 북한주민의 실상을 본 후 입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입북 계획 점검
당시 박씨를 안내한 탈북자 A씨는 “로버트는 그때 이미 입북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을 마친 상태였다”면서 “직접 현장에 가서 넘어갈 방법까지 세밀하게 점검했다”고 밝혔다. A씨는 4개월 후 박씨와 다시 한 번 중국에서 만났고, 그의 입북 과정을 직접 지켜본 마지막 목격자가 됐다.
중국에서 입북을 결심한 박씨는 몇몇 지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모두 “너무 위험한 행동”이라며 말렸지만, 박씨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박씨와 초기부터 함께 선교활동을 해온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의 강영숙씨는 “결국 그렇게 감행(입북)할 것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반대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놀라운 행동이 전 세계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씨는 본격적인 대북인권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결단을 감행하기에 앞서, “남한에서 먼저 통일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였다. 청계천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강제북송되는 탈북자들을 위한 퍼포먼스 집회를 열었다. 조성래(趙聖來) 팍스코리아나 대표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조씨의 증언이다.
“2009년 8월에 로버트를 처음 만났습니다. 기독교를 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저에게 끊임없이 북한 동포를 돕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로버트가 탈북자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더군요. 지체장애인과 함께 그들의 행동을 직접 묘사했는데, 이를 지켜본 몇몇 분들이 ‘또라이’라며 돌아서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의 진심 어린 눈빛과 몸짓을 봤어요. 어느새 눈물이 나더군요.”
로버트 박이 퍼포먼스를 마쳤을 때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은 조성래씨 혼자였다. 조씨는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돕겠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박씨는 11월 7일부터 3일간 진행될 집회를 도와 달라고 했다. 조 대표는 흔쾌히 승낙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후 열릴 청계천 1인 촛불시위까지 돕겠다고 했다.
단둥으로 가려다 ‘예감 안 좋다’며 선양으로 바꿔
하지만 청계천 시위는 경찰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로버트 박은 대신 12월 9일부터 이틀간 종각에서 열린 인권문화제에 참석해 북(北)정치범 수용소 해체를 위한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집회를 마치자 비가 내렸고, 빗속에서 박씨는 조씨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선생님, 저 가야 해요. 북한에 꼭 들어가야 해요.”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입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씨는 먼저 취재진을 물색했다. 로이터통신과 연락이 닿은 그는 곧바로 박씨와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원래 두만강까지 박씨와 동행하며 취재하기로 했던 로이터통신 측이 “비자가 안 나온다”는 이유로 인터뷰만 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22일 광화문에 위치한 로이터통신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로버트 박은 여름에 중국에서 동행했던 탈북자 A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A씨는 흔쾌히 허락했고, 조씨는 구체적인 일정을 짠 후 여비를 마련해 두 사람에게 전달했다. 조씨의 증언이다.
“출국 전 로버트에게 줄 100만원의 여비를 셋으로 나눴습니다. 오른쪽 신발 안에 30만원, 왼쪽 신발 안에 30만원을 직접 넣어 줬어요. 로버트는 돈 개념이 없습니다. 길가다가 노숙자를 보면 입고 있던 옷 다 벗어 주고, 가진 돈 다 건네주는 사람이에요. 몇 차례 신신당부를 했죠. 돈을 제대로 써야 한다고요.”
첫 계획은 12월 22일 배편을 통해 단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출항 시각과 표 구입 과정까지 모두 계획했지만, 하루 전인 21일 조씨는 돌연 일정을 바꿨다. 조씨의 말이다.
“뭔가 예감이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추진해도, 정보는 새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일정을 23일 오전 선양으로 입국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23일 오전 7시, 박씨와 함께 인천항공으로 출발한 조씨는 제3자 명의로 된 휴대전화를 전해 주며 마지막 일정을 전달했다. 도착 후엔 전화를 하되, 보안을 위해 가급적 전화기를 꺼 둘 것과 옌지에서 묵을 호텔까지 찾아가는 방법 등이었다.
“入北 전 내내 금식하고 기도만 했다”
10시30분 비행기로 출발한 박씨는 선양 도착 후 조씨에게 전화해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고, “예감이 좋지 않다”며 예약된 호텔을 바꾸겠다고 알렸다. 조씨는 급히 인근의 다른 호텔을 잡아 줬고, 박씨는 곧바로 옌지행 열차에 올랐다. 탈북자 A씨는 다음날인 24일 오전 ○○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A씨가 옌지에 도착한 것은 24일 밤 11시경이었다. 변경된 호텔로 찾아간 그는 박씨를 다시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함께 1시간 동안 기도부터 했다. A씨의 증언이다.
“로버트는 계속 기도만 했어요. 그날 밤에도 같이 기도했고, 다음날인 25일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계속 기도했죠. 금식을 한다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습니다.”
A씨는 막상 사진을 촬영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옌지에 있는 한 탈북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호텔 바로 옆 모텔에 묵고 있던 황모씨를 만났다. 황씨는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25일 오전 8시30분, 탈북자 A씨는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싼허(三合)로 향했다. 그 후 두만강변을 따라 룽징(龍井)시 카이산툰(開山屯) 지역까지 돌며 적절한 입북 장소를 물색했다. A씨는 최종 입북 장소로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회령시 방원리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야산을 선택했다. A씨의 말이다.
“12월의 두만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춥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 봐야 북한군에 발각되기 전에 얼어 죽을 수도 있죠. 그러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잖아요. 중국 쪽엔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곳, 북한 쪽엔 마을이 있는 곳을 택했습니다.”
답사를 마친 A씨는 다시 옌지의 호텔로 돌아왔다. 11시50분 박씨와 함께 체크아웃을 한 후, 황씨가 머무는 모텔로 이동했다. 모텔에서도 로버트 박씨의 기도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2시30분경, A씨가 빌린 승용차가 모텔 앞에 도착했고, 세 명은 조선족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옌지를 떠났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2시간여 동안 로버트 박씨와 탈북자 A씨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기도했다. 앞좌석에 앉은 황씨는 이 장면을 계속 촬영했다.
오후 4시50분경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마지막 기도를 마친 후 차에서 내려 강변으로 향했다. 100m가 넘는 강폭에 함박눈까지 내려 멀리 북한 쪽은 희미하게 보였다. 아무 말 없이 A씨를 꼭 끌어안은 박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와 선교사 파송증(派送證)을 A씨에게 넘겼다. 외투를 이미 벗어 놓고 온 박씨는 그야말로 홑겹의 빈털터리였다. A씨의 설명이다.
“로버트는 이미 며칠 동안 금식을 해 밥을 굶었어요. 얼마나 못 먹었으면 마지막에 끌어안았는데 사람 앓는 냄새(쉰내)가 나더라고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얼음 위 비틀거리며 큰 소리로 노래해”
박씨는 망설임 없이 강으로 향했다. 한 손엔 성경책을, 다른 한 손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가사를 적은 쪽지가 전부였다. 그의 주머니엔 미국 시민증이 들어 있었다. A씨에 따르면, 지금까지 갖고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金正日)에게 보내는 편지’는 없었다고 한다. 박씨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명료했다.
“북한 형제들이여! 나는 미국에서 온 미국 시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세 마디 외침 후 박씨는 준비한 가사쪽지를 들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얼음 위를 비틀거리면서도 그의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강 다른 편에 숨어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A씨는 혹여 총소리가 날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출발 5분 뒤, 강 건너편에서 군인으로 보이는 2명이 내려와 박씨의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적어도 강변에선 구타 등의 행위는 없었다는 증언이다.
박씨가 무사히 강을 넘어간 것에 안도한 A씨 일행은 서둘러 카이산툰을 지나 옌지로 돌아왔다. 탈북 과정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 호된 경험을 했던 A씨는 ‘그래도 미국 시민은 심하게 못할 것’이란 생각과 ‘예상할 수 없는 북한의 행태’에 대한 걱정으로 혼란스러웠다고 전했다.
옌지로 돌아온 후에도 A씨는 온통 박씨에 대한 걱정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저녁식사 중 황씨가 먼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을 때도, A씨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밤 9시, 모텔에 도착한 A씨는 곧바로 한국의 조성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씨는 A씨에게 “오래 머물면 위험하니 서둘러 한국으로 출발하라”고 했고, A씨는 12시 열차를 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야 입북 과정을 촬영한 캠코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과 산장에 들어가 회복 중
탈북자 황씨에게 수차례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운전기사를 찾아간 A씨는 그제야 황씨가 돈을 위해 캠코더를 훔쳐간 사실을 알게 됐다. 운전기사의 휴대전화로 황씨와 통화에 성공한 A씨는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라며 간곡하게 말했지만, 황씨는 “돈 좀 벌어봐야겠다”란 답만을 계속했다. 결국 캠코더는 찾을 수 없었고 A씨는 홀로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입북 후 곧바로 전 세계 언론에 입북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을 공개하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황씨는 현재까지 행적이 묘연한 상태다.
43일 후, 로버트 박씨는 미국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겼다. 입북 전의 주장과는 전혀 반대 내용의 인터뷰가 북한 언론을 통해 공개됐고, 박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박씨의 귀국 직후, 그의 부모가 출석하는 팔로마 한인교회 앞엔 AP, CNN, FOX, 로이터 등에서 온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박씨와 그의 부모는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 그는 가족과 함께 산장(山莊)에 들어가 모든 외부연락을 끊은 채 회복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보위부의 극심한 고문에 따른 것일까, 북한 내 친인척을 이용한 협박 때문일까. 날조와 조작이 분명한 인터뷰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선 지금도 많은 이가 의견이 분분하다. 가족을 찾기 위해 월북(越北)한 후 보위부에 체포됐다가 재(再)탈북에 성공한 유태준씨와 조선중앙TV 기자 출신 탈북자 장해성씨 등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의 고문은 공포 그 자체다.
대북선교사 L씨는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박씨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해 입을 못 열게 할 장치를 마련해 뒀을 것”이라며 “앞으로 박씨가 할 행동과 발언에 따라 북한인권문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황우여(黃祐呂) 한나라당 의원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바꾼 4·19 혁명도 김주열이란 한 학생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다”면서 “로버트 박씨의 도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몸짓은 한국통일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이라고 했다.⊙
42일 후인 2월 5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사 결과 미국 공민(로버트 박)은 조선(북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들어오게 됐다”며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심심하게 뉘우친 점을 고려해 해당 기관에서 관대하게 용서하고 석방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박씨는 이튿날인 2월 6일 오전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외 취재진은 공항에서 박씨에게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가 북한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말이 없었고, 곧바로 미국행(行) 여객기에 올랐다.
북한 인권단체와 대북(對北) 전문가들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에 대해 신뢰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 정권이 박씨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입북 전 박씨와 함께 대북인권운동을 전개해 온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는 2월 10일 성명을 내고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외용 선전 매체로서 그 진실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순교(죽음)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두만강을 건넜던 그는 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돌아왔을까. 그의 석연찮은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박씨의 그간 행적에 대해 다양한 추측과 예측이 오갔지만, 당사자인 그와 가족은 현재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다. 그가 두만강을 건넌 이유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상황을 추적했다.
수용소 존재 알고 북한에 관심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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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류 43일 만에 풀려난 로버트 박씨가 2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부모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변의 노숙자와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했다. 멕시코 접경지를 오가며 빈민들을 대상으로 봉사했고, 직접 노숙을 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박씨의 한 지인은 “로버트가 ‘당시 노숙자·빈민 봉사는 모두 지금의 북한 선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란 말을 했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神)이 그의 길을 예비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8년 6월이다. 미국의 한 기독교 단체가 주최한 북한 선교 콘퍼런스에 참가한 후, 계속 한국에 남아 탈북자와 북한 주민을 위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해 12월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같은 정치범 수용소가 북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박씨가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박씨의 대북 선교 활동 동기를 밝혔다. 박씨는 탈북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두 번 다시 히틀러의 만행과 같은 수용소를 용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왜, 북한의 수용소를 용납하고 있느냐”며 흥분했다고 한다. 또 “미국산 쇠고기를 안 먹겠다고 수십만이 광화문 광장에 나오면서도, 수용소에서 쥐 고기도 못 먹어 죽어 가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선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계속했다. 박씨는 2008년 8월 사단법인 ‘함께걷는길벗회’가 운영하는 인천의 한 섬김의 집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중증장애인 16명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그들과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박형규 목사 아들과 姻戚
박씨의 장애인 봉사활동을 주선한 이는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인 박종열(朴鍾烈) 목사다. 박 목사는 로버트 박에 대해 ‘외5촌뻘’이라고 했다. 박종열 목사의 외숙모와 로버트 박 할머니가 형제간이라고 한다. 박종열 목사는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재야(在野)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박형규(朴炯圭)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의 아들로, 로버트 박이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 왔다.
박종열 목사는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하루 한 끼만 먹고 계속 장애인들과 함께 기도와 찬송을 했다”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한 청년”이라고 밝혔다. 또 “로버트는 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면서 “그의 순수한 마음은 존중하지만, (자진 입북 등) 방법적인 측면에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장애인 선교를 마친 로버트 박은 미국에 2달간 머무른 후 2008년 11월쯤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북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9년 1월 14일을 ‘북한을 위한 세계 회개의 날’로 선포하고 각종 북한 선교 집회에 참석해 설교와 기도회를 진행했다.
이후 매달 27일을 ‘북녘 동포를 위한 회개의 날’로 정하고 북한에서 자행돼 온 학살, 굶주림, 고문, 처형 등에 대해 한국과 세계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2억5000만명의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글로벌데이오브프레이어(global day of prayer)’와 연합해 기도문을 13개 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북한 선교를 주장했다.
전국 각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했고 탈북자 가정을 직접 방문해 기독교를 전했다. 2009년 3월엔 과로로 쓰러져 2주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5월 23일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박씨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7월 2일. 서울에 온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첫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에서 수집한 대북선교사들의 연락망을 통해 직접 탈북자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를 전했다.
8월 14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약 1달 반 동안 그는 선양(瀋陽), 옌지(延吉), 단둥(丹東) 등 중·북(中北) 접경지대를 돌며 북한 지하교인들과 선교사를 만났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그때 두만강변에서 북한주민의 실상을 본 후 입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입북 계획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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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2월 31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열린 로버트 박을 위한 기도회에서 팍스코리아나 조성래 대표(맨 왼쪽)가 박씨가 입북 전 입었다는 옷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중국에서 입북을 결심한 박씨는 몇몇 지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모두 “너무 위험한 행동”이라며 말렸지만, 박씨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박씨와 초기부터 함께 선교활동을 해온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의 강영숙씨는 “결국 그렇게 감행(입북)할 것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반대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놀라운 행동이 전 세계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씨는 본격적인 대북인권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결단을 감행하기에 앞서, “남한에서 먼저 통일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였다. 청계천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강제북송되는 탈북자들을 위한 퍼포먼스 집회를 열었다. 조성래(趙聖來) 팍스코리아나 대표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조씨의 증언이다.
“2009년 8월에 로버트를 처음 만났습니다. 기독교를 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저에게 끊임없이 북한 동포를 돕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로버트가 탈북자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더군요. 지체장애인과 함께 그들의 행동을 직접 묘사했는데, 이를 지켜본 몇몇 분들이 ‘또라이’라며 돌아서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의 진심 어린 눈빛과 몸짓을 봤어요. 어느새 눈물이 나더군요.”
로버트 박이 퍼포먼스를 마쳤을 때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은 조성래씨 혼자였다. 조씨는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돕겠으니, 원하는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박씨는 11월 7일부터 3일간 진행될 집회를 도와 달라고 했다. 조 대표는 흔쾌히 승낙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후 열릴 청계천 1인 촛불시위까지 돕겠다고 했다.
단둥으로 가려다 ‘예감 안 좋다’며 선양으로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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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의 강영숙 공동대표가 2010년 1월 20일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에서 북한민주화운동본부 회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정치범 수용소 해체 및 로버트 박 구명을 위한 통일부의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
“선생님, 저 가야 해요. 북한에 꼭 들어가야 해요.”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입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씨는 먼저 취재진을 물색했다. 로이터통신과 연락이 닿은 그는 곧바로 박씨와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원래 두만강까지 박씨와 동행하며 취재하기로 했던 로이터통신 측이 “비자가 안 나온다”는 이유로 인터뷰만 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22일 광화문에 위치한 로이터통신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로버트 박은 여름에 중국에서 동행했던 탈북자 A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A씨는 흔쾌히 허락했고, 조씨는 구체적인 일정을 짠 후 여비를 마련해 두 사람에게 전달했다. 조씨의 증언이다.
“출국 전 로버트에게 줄 100만원의 여비를 셋으로 나눴습니다. 오른쪽 신발 안에 30만원, 왼쪽 신발 안에 30만원을 직접 넣어 줬어요. 로버트는 돈 개념이 없습니다. 길가다가 노숙자를 보면 입고 있던 옷 다 벗어 주고, 가진 돈 다 건네주는 사람이에요. 몇 차례 신신당부를 했죠. 돈을 제대로 써야 한다고요.”
첫 계획은 12월 22일 배편을 통해 단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출항 시각과 표 구입 과정까지 모두 계획했지만, 하루 전인 21일 조씨는 돌연 일정을 바꿨다. 조씨의 말이다.
“뭔가 예감이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추진해도, 정보는 새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일정을 23일 오전 선양으로 입국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23일 오전 7시, 박씨와 함께 인천항공으로 출발한 조씨는 제3자 명의로 된 휴대전화를 전해 주며 마지막 일정을 전달했다. 도착 후엔 전화를 하되, 보안을 위해 가급적 전화기를 꺼 둘 것과 옌지에서 묵을 호텔까지 찾아가는 방법 등이었다.
“入北 전 내내 금식하고 기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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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팍스코리아나 조성래 대표가 공개한 로버트 박의 친필 메모 수첩. |
A씨가 옌지에 도착한 것은 24일 밤 11시경이었다. 변경된 호텔로 찾아간 그는 박씨를 다시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함께 1시간 동안 기도부터 했다. A씨의 증언이다.
“로버트는 계속 기도만 했어요. 그날 밤에도 같이 기도했고, 다음날인 25일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 계속 기도했죠. 금식을 한다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습니다.”
A씨는 막상 사진을 촬영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옌지에 있는 한 탈북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호텔 바로 옆 모텔에 묵고 있던 황모씨를 만났다. 황씨는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25일 오전 8시30분, 탈북자 A씨는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싼허(三合)로 향했다. 그 후 두만강변을 따라 룽징(龍井)시 카이산툰(開山屯) 지역까지 돌며 적절한 입북 장소를 물색했다. A씨는 최종 입북 장소로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회령시 방원리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야산을 선택했다. A씨의 말이다.
“12월의 두만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춥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 봐야 북한군에 발각되기 전에 얼어 죽을 수도 있죠. 그러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잖아요. 중국 쪽엔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곳, 북한 쪽엔 마을이 있는 곳을 택했습니다.”
답사를 마친 A씨는 다시 옌지의 호텔로 돌아왔다. 11시50분 박씨와 함께 체크아웃을 한 후, 황씨가 머무는 모텔로 이동했다. 모텔에서도 로버트 박씨의 기도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2시30분경, A씨가 빌린 승용차가 모텔 앞에 도착했고, 세 명은 조선족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옌지를 떠났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2시간여 동안 로버트 박씨와 탈북자 A씨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기도했다. 앞좌석에 앉은 황씨는 이 장면을 계속 촬영했다.
오후 4시50분경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마지막 기도를 마친 후 차에서 내려 강변으로 향했다. 100m가 넘는 강폭에 함박눈까지 내려 멀리 북한 쪽은 희미하게 보였다. 아무 말 없이 A씨를 꼭 끌어안은 박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와 선교사 파송증(派送證)을 A씨에게 넘겼다. 외투를 이미 벗어 놓고 온 박씨는 그야말로 홑겹의 빈털터리였다. A씨의 설명이다.
“로버트는 이미 며칠 동안 금식을 해 밥을 굶었어요. 얼마나 못 먹었으면 마지막에 끌어안았는데 사람 앓는 냄새(쉰내)가 나더라고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얼음 위 비틀거리며 큰 소리로 노래해”
박씨는 망설임 없이 강으로 향했다. 한 손엔 성경책을, 다른 한 손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가사를 적은 쪽지가 전부였다. 그의 주머니엔 미국 시민증이 들어 있었다. A씨에 따르면, 지금까지 갖고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金正日)에게 보내는 편지’는 없었다고 한다. 박씨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명료했다.
“북한 형제들이여! 나는 미국에서 온 미국 시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세 마디 외침 후 박씨는 준비한 가사쪽지를 들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얼음 위를 비틀거리면서도 그의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강 다른 편에 숨어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A씨는 혹여 총소리가 날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출발 5분 뒤, 강 건너편에서 군인으로 보이는 2명이 내려와 박씨의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적어도 강변에선 구타 등의 행위는 없었다는 증언이다.
박씨가 무사히 강을 넘어간 것에 안도한 A씨 일행은 서둘러 카이산툰을 지나 옌지로 돌아왔다. 탈북 과정에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 호된 경험을 했던 A씨는 ‘그래도 미국 시민은 심하게 못할 것’이란 생각과 ‘예상할 수 없는 북한의 행태’에 대한 걱정으로 혼란스러웠다고 전했다.
옌지로 돌아온 후에도 A씨는 온통 박씨에 대한 걱정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저녁식사 중 황씨가 먼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을 때도, A씨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밤 9시, 모텔에 도착한 A씨는 곧바로 한국의 조성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씨는 A씨에게 “오래 머물면 위험하니 서둘러 한국으로 출발하라”고 했고, A씨는 12시 열차를 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야 입북 과정을 촬영한 캠코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과 산장에 들어가 회복 중
탈북자 황씨에게 수차례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운전기사를 찾아간 A씨는 그제야 황씨가 돈을 위해 캠코더를 훔쳐간 사실을 알게 됐다. 운전기사의 휴대전화로 황씨와 통화에 성공한 A씨는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라며 간곡하게 말했지만, 황씨는 “돈 좀 벌어봐야겠다”란 답만을 계속했다. 결국 캠코더는 찾을 수 없었고 A씨는 홀로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입북 후 곧바로 전 세계 언론에 입북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을 공개하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황씨는 현재까지 행적이 묘연한 상태다.
43일 후, 로버트 박씨는 미국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겼다. 입북 전의 주장과는 전혀 반대 내용의 인터뷰가 북한 언론을 통해 공개됐고, 박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박씨의 귀국 직후, 그의 부모가 출석하는 팔로마 한인교회 앞엔 AP, CNN, FOX, 로이터 등에서 온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박씨와 그의 부모는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 그는 가족과 함께 산장(山莊)에 들어가 모든 외부연락을 끊은 채 회복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보위부의 극심한 고문에 따른 것일까, 북한 내 친인척을 이용한 협박 때문일까. 날조와 조작이 분명한 인터뷰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선 지금도 많은 이가 의견이 분분하다. 가족을 찾기 위해 월북(越北)한 후 보위부에 체포됐다가 재(再)탈북에 성공한 유태준씨와 조선중앙TV 기자 출신 탈북자 장해성씨 등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의 고문은 공포 그 자체다.
대북선교사 L씨는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박씨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해 입을 못 열게 할 장치를 마련해 뒀을 것”이라며 “앞으로 박씨가 할 행동과 발언에 따라 북한인권문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황우여(黃祐呂) 한나라당 의원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바꾼 4·19 혁명도 김주열이란 한 학생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다”면서 “로버트 박씨의 도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몸짓은 한국통일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