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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戰後 70年

대한민국의 성취와 다가오는 운명

대한민국, 세계 자유민주 진영의 중추국가 중 하나가 되어야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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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을 선택한 북한은 ‘기아’, ‘자유’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기적’ 이뤄
⊙ 美·英·佛 등, G7에 한국 포함시켜 G8으로 확대 표명해
⊙ 낙동강 방어선 전투 거치면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주권자다운 국민 탄생
⊙ 민주 세력,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의의에 대한 인식 허술… 좌경화 확산 가져와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정상회의에 초청받았다. 사진=뉴시스
  현재 전 세계 국가의 총수는 196개국이다. 대만 외에는 모든 나라가 유엔 가입국이다. 193개국이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며 바티칸시국, 팔레스타인은 유엔의 참관국 자격을 갖고 있다.
 
  이 중 국제적으로 선두적 지위의 나라들로는 우선 유엔 상임이사국을 들 수 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5개국이다. 하지만 각도를 좀 바꾸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질서의 차원에서 보면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들은 다르게 포착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는 경이적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의 결속과 그 결속으로 지켜낸 세계 시장경제 질서의 힘이었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은 아무런 기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한계에 봉착해 몰락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진영 해체 후 경제적으로 비로소 발전을 하게 됐다. 중국의 경제 성장도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세계 시장경제체제에 들어설 수 있게 되면서였다.
 
 
  ‘2023 G7 정상회담’에 초청받은 대한민국
 
  이 같은 성장을 선도한 나라를 대표하는 게 바로 G7(Group of Seven)이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7개국이다. G7은 ‘서방(西方) 선진 7개국’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때 ‘서방’은 지리적 방향 개념이 아니라 가치(價値)의 진영을 상징한다.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서방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진영의 확고한 일원이기에 그렇게 일컬어진다.
 
  선진국(先進國·advanced country, developed country)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부국(富國)이나 강국(强國) 차원이 아니다. 고도의 산업 발전과 함께 삶의 질과 국민적 수준을 포함한다. 그 국가의 국제적 행태도 함축한다. 즉 문명적 수준을 함축한다. G7 국가들은 세계적으로 경제만이 아니라 포괄적 차원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중국은 인구는 물론 총 GDP에서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다. 하지만 누구도 중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2023 G7 정상회담’에 한국이 초청받아 참여했다. 한국 외에도 호주, 인도, 브라질 등 7개국이 초청을 받아 참여했다. 하지만 한국의 참여는 여타의 경우와는 의미가 좀 다르게 여겨졌다. 경제부터가 그랬다. 한국의 GDP 규모는 인도(5위), 브라질(10위)에 뒤지지만, 종합적인 경제적 실력은 G7에 준하는 수준이다.
 

  2023년 한국의 총 GDP 추정 순위는 G7의 끝 순위인 캐나다(9위)보다 좀 떨어지는 12위다. 하지만 2022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에선 한국은 G7 여러 국가를 앞서는 세계 6위였다. G7 국가인 이탈리아(7위), 프랑스(9위), 캐나다(11위), 영국(14위) 4개국보다 앞섰다. G7 국가 가운데 한국보다 수출시장 점유율이 앞선 나라는 미국(1위), 독일(3위), 일본(5위) 3개국이었다.
 
  반도체의 경우에 한국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반도체는 21세기 정보화 시대 ‘산업의 쌀’로 일컬어지며 이제 석유 이상 가는 ‘전략물자’가 돼 있다. 이같이 중요한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은 세계 시장 점유율 약 20%로 미국(약 50%)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G7의 입장에서 한국과의 실질적 협력 관계 구축은 중요한 현안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 공유
 
  한편 한국이 G7 국가들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라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국제정세는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상황이다. 한국의 이번 ‘2023 G7 정상회담’ 참여의 함의는 복합적이다. 한국이 이번을 계기로 G8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국 측의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G7의 확대 구상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1997년, 러시아가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G8 체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14년 러시아가 크름(크림)반도를 강제합병하면서 퇴출되어 다시 G7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G7의 확대는 다시 제기되었다.
 
  미국의 전임 트럼프 대통령도 2020년 한국과 러시아, 인도, 호주 등도 참여시켜 G7을 G11으로 확장시키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러시아까지 포함시켜 영국과 캐나다가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국의 참여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반일(反日) 노선이었다. 일본의 동의를 구할 수 없을 것임이 자명했다.
 
  문재인 정부도 G7에 초청받아 참여한 바가 있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 시절인 2021년이었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는 G7의 확대 문제에 대해 언급을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와 함께 중국이 패권(覇權) 추구의 도발을 더욱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세계 자유민주 국가들의 결속이 긴급한 현안이 되었다. 한국의 국제 정치적 입장도 중요해졌다.
 
  윤석열 정부는 세계 자유민주 진영과 함께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 한편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절 심각한 위기로 치달았던 한미동맹과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켰다. 이런 가운데 바이든 정부의 미국에서는 G7 확대가 다시 제기되었다. 미국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은 지난 3월 “G7에 한국을 동참시켜 G8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전직 주한 미국 대사들도 한국을 포함한 G8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G7 회원국인 영국과 캐나다도 이런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이 G8으로 참여하는 게 실현될지는 두고 볼 문제다. 하지만 한국이 이미 그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10위권 경제 대국이면서 자유민주국가다. 뿐만 아니라 종합 국력 순위에서 놀라운 평가까지 나왔다.
 
  2022년 미국 《US 뉴스&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과 공동 조사해 발표한 전 세계 1만7000명 대상 ‘글로벌 국력 순위’ 인식 조사 결과 한국이 ‘국력 랭킹(Power Rankings)’에서 세계 6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G7으로 보면 미국(1위), 독일(4위), 영국(5위) 다음 순위였다. 일본은 2021년 6위에서 2단계 하락한 8위를 기록했다.
 
  물론 이 같은 국력 인식 조사를 실제의 국력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일본은 인구, 국토면적, GDP 규모 모두에서 한국의 2배 이상이며,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이런 정도로 높게 나온 자체는 의미가 각별하다.
 
 
  기적의 첫 기원,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 한국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룩하리라고 본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더욱이 한국은 건국 2년 만인 1950년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침공으로 6·25전쟁이라는 3년간의 대전란을 겪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6·25의 포성은 일단 멈추었지만 한국은 폐허 위에 있었다. 그 폐허의 나라가 국력 순위 6위로까지 평가받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은커녕 감히 망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6·25전쟁 휴전 2년 뒤인 1955년 10월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에 참여한 한 인도 의원의 말이다. 그런데 6·25전쟁 이후 70년, 한국은 장미를 피워내는 정도를 넘어서는 ‘기적’을 이룩했다.
 
  기적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역사적인 성취의 기적은 더욱이 그럴 만한 맥락이 있다. 첫출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다. 소련이 진주·점령한 북한은 일찌감치 공산전체주의 정권을 선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해방공간 시절의 갖은 진통을 넘어 자유민주체제로 건국했다. 이 시작이 남북의 운명을 갈랐다. ‘공산’을 선택한 북한은 ‘기아’로 갔고 ‘자유’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기적’을 일궈냈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때 당장은 인식되지 못했다. 공산전체주의를 택한 북한은 기세등등했지만 남쪽에선 민족 단일정부 수립을 외면했다는 비난이 건국 당시는 물론 이후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남쪽의 우익 민족 진영의 일부도 이념과 체제보다는 민족 단일이라는 명분에 집착했다. 미군정(美軍政)조차 좌우합작을 강권하기도 했던 만큼 이것은 한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산전체주의의 문제점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함께한 전승국의 일원이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적으로 지식분자들 사이에 이미 좌익사상에 대한 낭만적 호감이 유행처럼 퍼져 있기도 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도 이에 대한 경계심이 약했다. 1946년 스탈린의 소련에 의한 ‘철(鐵)의 장막’을 경고한 영국의 처칠이 그나마 예외적이었다.
 
  그런데 그 23년 전인 1923년에 〈공산당당부당〉으로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칼날같이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이승만(李承晩)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불과 6년에 레닌도 생존해 있던 때였다. 공산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본격적 비판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 만큼 이승만의 지적은 시대를 앞서간 예언적 통찰이었다. 바로 그 이승만이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다. 한국의 이후의 번영을 위한 이념적 예약이었다.
 
 
 
6·25전쟁과 한국의 두 번째 탄생

 
낙동강 전선의 학도병들.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탄생했다.
  그렇게 예약된 운명이라 해서 곧바로 실현되는 건 아니다. 자유민주체제의 힘이 발휘되려면 그 이념적 가치를 내재화하는 국민적 성숙이 이어져야 했다. 국민국가로서의 네이션빌딩(Nation Building)은 한 번의 법적 건국으로 끝을 맺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1948년 8월 15일은 그 시작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건국 불과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기습 침략으로 전쟁을 맞게 됐다. 북한군은 침공 한 달여 만인 1950년 7월 31일 낙동강 이남만을 남기고 남한 전역을 점령했다. 7월 1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이 시작되었지만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 한국은 국가 건설의 과정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국 자체가 곧 실패로 끝날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끝난 듯이 보였던 바로 그때가 대한민국의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1950년 8월 1일~9월 14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한민국은 두 번째 탄생을 했다. 45일간 치열하게 전개됐던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방어선의 필사적 사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되살리고 총반격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주권자다운 국민의 탄생과 성장이 본격화하는 극적인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의 일화들에는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가 줄을 잇는다.
 
  이렇게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38선을 돌파해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이리하여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공군의 침공으로 후퇴를 하게 되면서 통일은 무산됐다. 그리고 6·25전쟁은 현재의 휴전선을 최종 대치선으로 하여 1953년 7월 27일 일단 마감했다.
 
 
  자유민주 진영을 일깨우다
 
  전쟁 발발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6·25전쟁은 3년 1개월 2일, 날일로는 1129일에 걸친 전쟁이었다. 그런데 6·25전쟁은 한국과 북한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자유민주 진영과 공산전체주의 진영이 격돌한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쟁이었다.
 
  6·25전쟁으로 이렇게 격돌하기 전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 진영 국가들의 자세는 어느 정도 느슨했다. 1947년 조지 케넌이 ‘봉쇄전략’을 제기하고 트루먼 대통령도 그것을 채택하기도 했지만 공세적이지는 않았다. 직접적 전쟁은 없이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며 장기적으로 변화를 유도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봉쇄전략의 효과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적의 도발에 대해선 단호한 대응도 분명히 할 필요도 있음을 확인하게 했다.
 
  소련을 붕괴시키고 마침내 사회주의 진영을 해체시킨 레이건이 그랬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惡)의 제국’이라는 전례 없는 강한 의조로 비판하며 타협 없는 공세적 압박을 가했다. 이에 대해 소련이 심각히 반발한다면 대결이 뜻밖의 양상으로 번질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균형에 안주하지 않고 압박을 계속했다.
 
  경제난이 심각했던 소련은 결국 군비경쟁을 포기했다. 그러고 고르바초프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나섰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는 이런다고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회주의 자체가 사라져야 했다. 결국 소련은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권도 해체되었다. 레이건의 공세적 압박이 거둔 승리였다.
 
 
 
이승만과 한미동맹

 
  그런데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고 6·25전쟁을 이겨낸 이승만은 이미 그랬다. 이승만은 공산 세력은 타협으로 공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좌우합작에 솔깃해하던 것을 극복해낸 것도 그렇지만 휴전협정 체결 전후 시기에도 이승만의 안목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6·25전쟁의 막바지 무렵 이승만은 미국의 휴전 의사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휴전을 해버리게 되면 한국으로선 전도(前途)를 기약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한미동맹을 분명히 할 것을 미국에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으로선 매우 낯선 일이었다. 미국은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능동적으로 특정국가와 동맹을 맺는 나라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미동맹은 원천적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그럼에도 반공포로 석방까지 단행하여 미국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 결국에는 한미동맹의 약속을 받아냈다. 휴전협정 체결 전인 1953년 7월 12일 한미양국은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휴전협정은 그 보름 뒤인 7월 27일 체결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54년 4월 26일~6월 15일의 제네바 회담의 경우에도 그랬다. 안건은 한반도 문제와 베트남 문제 두 가지였는데, 한반도 문제의 핵심 주제는 한국전쟁의 공식적 종료를 위한 평화협정과 한반도의 재통일 문제였다.
 
  공산 진영은 남북한의 대등한 선거와 전 한반도 선거를 주장했다. 억지였다. 한국이 이미 유엔 감시하의 선거로 출범하고 승인된 나라라는 점에서만이 아니었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인구가 3분의 1이었다. 그 인구비례를 무시하고 남북한 대등한 수의 대표를 말하는 것은 생떼였다. 이 같은 방식은 공산 진영에는 책동의 기회를 주면서 대한민국은 해체되게 만드는 것일 뿐이었다. 공산 진영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유엔참전국 쪽은 그러지 못했다. 영국 등 일부 국가는 한국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설득을 수용하지 않았다.
 
  제네바 회담은 결렬로 끝났다. 일부 논평가들은 그 결과 ‘분단체제’가 굳어지게 됐다고 묘사하곤 했다. 어설프거나 아니면 고의적인 논법이다. 거기에는 이념과 체제에 대한 가치판단이 빠져 있다. 이런 식의 논법은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흐트러뜨리고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킬 뿐이다. 제네바 회담의 한반도 재통일 논의의 결렬은 분단체제를 굳어지게 한 실패가 아니라 반대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확정 짓게 한 성공이었다.
 
  제네바 회담 식의 정치적 논의는 무익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1953년 8월 8일 조약 가조인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예언적 통찰이었다. 이승만의 말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의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의 70년의 기적의 역사는 한미동맹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은 이후 정치적으로 수많은 진통과 굴곡이 있었다. 그러나 한미동맹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이 같은 진통은 국내적인 진통으로 멈출 수 있었다.
 
 
  5·16과 ‘한강의 기적’
 
5·16은 4·19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4·19 당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 다시 좌익이 거세게 발호했다. 북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에 대한 정치공세와 전복(顚覆)공작을 강화했다. 북한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연방제통일론을 내세워 또다시 기회의 불을 지피려 했다. 이에 현혹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가 난무했다. 위험했다. 하지만 북한과 공산권은 6·25 때와 같은 직접적인 군사적 남침은 할 수 없었다. 한미동맹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 침공은 차단되고 있다 해도 북한의 공세와 이에 현혹된 혼란은 결코 방치해선 안 될 위험이었다. 자유민주체제를 지키는 내적인 정치적 수습이 이뤄져야 했다. 다행히 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런 힘이 내적으로 형성돼 있었다. 6·25를 겪으며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은 국민적인 반공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내적인 힘도 갖추어져 있었다. 바로 군(軍)이었다. 6·25를 거치며 한국군은 자질과 정신 모두에서 강력하게 성장해 있었다.
 
  4·19 이후의 위험한 혼란을 정치권 스스로는 수습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군(軍)이 그것을 해냈다. 박정희(朴正熙)가 이끈 5·16이었다. 5·16은 반공과 한미동맹 강화를 전면에 내걸었다. 그리고 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18년간의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일컫는 경이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승만이 건국으로 세우고, 6·25를 이겨내고 지켜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가 예비한 운명은 이렇게 실현되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는 북한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에도 그리고 6·25에서 지켜낸 뒤에도 당장에는 그 존재에 대한 국제적·세계적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의 존재 의의를 세계적으로 확신하게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세계는 그것을 확인했다. 그 확인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만이 아니라 자유민주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세계사적 확인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1년 뒤인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의 와해는 그 재확인이었다.
 
  좌익에 물든 역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여긴다. 그러나 뭐라 시비하든 대한민국은 ‘기적의 나라’가 되었지만 북한은 ‘기아의 나라’가 됐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바로 북한이다.
 
  좌익사가들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고 굴레를 씌운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지 않고 북한이 공산전체주의의 길로 가지 않았으면 한반도 전체가 분단 없는 대한민국일 수 있었다.
 

  ‘태어난 존재’를 놓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운을 하는 것은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굳이 이런 논법으로 시비를 하자면 북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소련부터가 그렇다. 김일성도 스탈린도 그 이전에 레닌도 아니 거슬러올라 그 원조인 마르크스 등의 좌익 사상가들부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힐난의 원망은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역사의 진행은 늘 역설(逆說)과 함께한다. 사람에게 때로 ‘육체의 가시’가 있듯 역사에도 가시가 있다. 그런데 굳건하게 견뎌내면 그 가시는 사람에게서 그렇듯 역사에서도 섭리를 이루게 하는 역설적 촉매의 역할을 한다.
 
 
  북한이라는 가시
 
  북한과 공산권의 존재는 대한민국에 끊임없이 고통을 준 가시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 집약하고 있듯이 대한민국에 각성과 의지를 주는 촉매였다.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함이 대한민국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 했다. 방만함에 물들지 않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나아가자는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해냈다.
 
  대한민국은 시작 때부터 공산전체주의를 막아내는 “자유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갈파했듯 대한민국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피의 골짜기를 지나 땀과 눈물의 강을 건너 번영의 바다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번영의 바다에서 일어난 “자유의 파도”가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노래 불러진 대로 그 자유의 파도는 “벽을 넘어서(Breaking down the wall)” 사회주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힘의 하나가 됐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확인된 “역사의 종언(終焉)”이라 했다. 그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는 종언하지 않는다. 역사는 당연히 계속되는 것이라는 뜻에서만이 아니다. 가시를 품은 독초는 다시 또 발호한다. 이에 맞서는 역사적 싸움은 또 진행돼야 한다.
 
 
  또다시 자라난 붉은 독초
 
1987년 이후 민주화 속에서 좌경화가 진행되었다. 사진은 1991년 8월 열린 범민족대회 모습. 사진=조선DB
  박정희 시대는 이 위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내 ‘민주’의 공세에 시달렸다. 1979년 10·26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박정희 시대의 성공의 역사를 마무리한 전두환(全斗煥)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끈질긴 민주의 공세의 그늘에서 붉은 독초(毒草)가 자라났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없었던 민주주의가 실현된 게 아니었다. 경제적 성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성숙이었다. 그러나 민주 진영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한국의 소위 민주 세력이 안고 있던 뿌리 깊은 결함이었다. ‘민주’에 몰두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체제의 본질적 의의에 대한 인식은 극히 허술했다. 그 허술함이 좌경화의 확산에 기회를 더해주었다.
 
  1987년 민주화는 분명 중요한 정치적 성취였다. 그런데 87체제 30여 년 그 성취가 좌경 세력에게 탈취당해 갔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 자체에 중대한 위험이 오기 시작했다. 범죄적 타락까지 더해졌다.
 
  그런데 세계도 그랬다. 냉전 시대 종식 이후 자유세계는 긴장을 잃고 이완됐다. 방만해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다른 한편에선 패권적 야욕의 세력이 성장했다. 중공과 러시아는 서구의 기대와는 달리 결코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도발을 시작했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를 위한 싸움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러하다. 우크라이나는 직접적 전쟁으로 대만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침공에 대비하며 맞서고 있다. 한국에서는 직접 마주한 총격만 없을 뿐인 체제수호의 전쟁이 안팎에서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전후(戰後) 70년, 한국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이 다시 겹쳐 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자유민주 진영의 중추국가 중 하나가 되어야 할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그 운명적 지점에 서 있다. 피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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