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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10〉

‘파쇼의 똥강아지’란 모욕 들은 정보요원들의 남모를 고충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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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직 부장, 엘리트 요원들 차출해 안기부 개혁 위한 태스크포스팀 만들어
⊙ 부원들, “박정희 정권의 전위대로 경제발전 기여했지만, 시대 바뀌었다”
⊙ 정보맨의 토로 “인간적으로 이 일에 모순과 괴로움 느꼈다”
⊙ 중앙정보부는 왜 ‘빈민가의 代父’ 김진홍 목사에게 주목했나?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시절 部訓.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만들었다. 사진=조선DB
  1980년대 후반 노태우(盧泰愚) 정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남산 중턱의 숲속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곳 5층이 안기부장실이었다. 부장실 옆에 딸린 접견실의 원형 탁자 중앙에 박세직(朴世直) 부장이 앉아 있었다.
 
  군(軍) 출신인 그는 키 크고 각진 턱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둥그런 탁자에는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안기부 각 부서에서 차출한 엘리트 요원들이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앞에는 흰색 도기(陶器)의 밥그릇과 국그릇이 그리고 작은 반찬 그릇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자, 여러분 식사부터 하면서 편하게 얘기합시다.”
 

  박세직 부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식사가 끝난 후 커피와 후식이 나왔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안기부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안기부장으로 와서 벌써 한 달이 됐어요. 수시로 결재(決裁)가 올라오는데 도대체 내가 제대로 결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아랫사람에게 속아서 하는 건지 의심이 들 때가 많아요. 며칠 전 수사국에서 결재가 올라왔는데 보고자의 말만 들으면 당연히 들어주어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재했지. 그런데 오늘 다른 사람한테 들어보니까 결재를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사기당한 거지. 부장으로서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해봤어요.”
 
  그의 표정엔 뭔가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박세직 부장의 결단
 
軍 시절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세직 전 안기부장(오른쪽). 사진=조선DB
  “내가 밖에 있을 때 이 조직을 많이 욕했어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관으로 월권(越權)을 하기도 하고 인권유린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나는 부장으로 있는 동안 과감히 이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려고 합니다. 정보기관을 밖에 있는 일반 사람들은 모릅니다. 또 정보기관의 상부에 잠시 왔다 가는 사람도 몰라요. 내부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만 알아요. 그래서 이 조직 안에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고 있고 엘리트라고 평가된 여러분을 차출한 겁니다.
 
  이 조직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권한도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보기관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철저히 연구해서 나에게 보고해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을 직접 다녀보세요. 그들에게 물어보면서 배워 오세요.”
 
  부장 특명(特命)의 특수조직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박세직 부장이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죠. 어느 조직이나 거기서 일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기관의 품격이 정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경제기획원을 보세요.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나라의 경제를 기획하는 최고의 엘리트 조직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수십 년 전에 들어온 하사관 출신이나 특무대 출신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해요. 어떻게 직원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만들지 연구해보세요.”
 
  부장 직속의 태스크포스팀(TF)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 팀의 위원으로 명령이 났다. 나는 몇몇 위원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서울대·고려대 등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국내 정보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지방조직의 책임자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 해외 정보요원으로 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사람도 있었다. 대공수사관 출신도 있었고 과학기술국에서 온 요원도 있었다. 그들은 몇십 년을 근무했는데도 서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인간관계는 물론 업무도 차단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위원 중 선임자가 팀의 대표가 됐다. 소통을 위해 자유토론 시간을 가졌다. 사회를 맡은 대표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입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과 감찰실의 감시 때문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정보부로 와서 20년 이상을 근무해도 다른 부서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른 요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또 정보조직의 차단 원칙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옆 사람은 어떤 업무를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직의 작은 톱니바퀴 하나로 살아왔죠. 이제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알 권리가 생겼고, 말해도 되는 자유가 생겼습니다. 말해도 감찰실의 조사 대상이 아닙니다. 힘들겠지만 우리 위원끼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얘기합시다. 누구부터 얘기하실까요?”
 
  “저부터 하겠습니다.”
 
 
  정보요원이 느낀 ‘양심의 가책’
 
  국내정보국 출신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정규과정에 선발되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지고 국가 발전 과정에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제 처지를 보면 이게 뭔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조직과 계급 그리고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는 신분노출 금지 원칙 때문에 투명인간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 학교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대라고 하면 전전긍긍하면서 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좁아빠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적당히 다른 직업을 댔다가는 바로 확인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되어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 자신이 누군지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가 말을 잠시 쉬었다가 계속했다.
 
  “저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세상이 말하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정부조직법에 근거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간부급이 됐습니다. 조상이나 친척들에게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공직자라면 명예를 먹고 사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주위에 아무것도 얘기하지 못해요. 그렇게 하면 보안위반이 되니까요. 그러니 벼슬이 있으면 뭐 합니까? 안기부가 정보기관으로서 정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공무원하고 똑같이… 이런 체계는 철폐해야 합니다.”
 
 
  자아비판과 자부심
 
  그 다음 다른 위원이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오랫동안 여러 대학을 담당해왔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나온 모교(母校)도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저를 안기부 담당관이라고 하면서 경계합니다. 대학의 후배나 학생들에게 저는 ‘파쇼의 똥강아지’라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내가 왜 그런 똥개가 되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다 알게 모르게 그런 죄의식 비슷한 이중적인 감정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말이죠, 대학가의 정보를 파악해 사무실로 돌아올 때마다 씁쓸한 심정이었습니다. 친한 후배들의 얘기를 듣고 와서 첩보를 쓴다는 자체가 그들에 대한 배신행위고 이중적인 행동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 첩보가 정말 국가를 위하고 북한과 싸우기 위한 정보라면 사명감과 긍지를 느낄 겁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 아닙니까?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학가를 감시하고 누르기 위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는 격앙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체제의 당위성을 피력하면서 자아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이 일에 대해 모순과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후락(李厚洛) 부장이 있을 때 어땠습니까? 우리들에게 모두 ‘박정희교(敎)의 신도(信徒)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교주(敎主)인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교리를 위해 우리는 피가 끓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가난에 젖어왔던 이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독재도 필요하다고 공감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야당 지도자 김영삼·김대중은 고속도로 위에 누워 건설을 방해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경상도만 위하고 전라도 사람들을 홀대한다는 비난이 터져 나오지 않았습니까? 누가 대통령이 됐어도 경부고속도로를 지금같이 놓고 부산에서 수출하도록 했을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발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경제성장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조직이 박정희 대통령의 전위대(前衛隊)가 아니었다면 중화학공업을 한다는 간판으로 무기를 만드는 게 가능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광화문의 코리아나호텔 옥상에 올라가 체육관 대통령선거를 바꾸자고 개헌을 주장하는 시위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위대의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의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권이 6·29라는 항복선언을 한 겁니다. 이제 우리 조직도 대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안기부 요원의 고충
 
서울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남산’이라고 하면 無所不爲 권력의 상징이었다. 사진=조선DB
  정보기관의 개혁을 위해 모인 위원들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내부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은 대공수사국에서 나온 위원의 차례였다.
 
  “우리는 법을 초월해 움직인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조직에서 그렇게 세뇌가 되기도 했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꿈꾸는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의 전위대가 되어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이나 야당 지도자들이 언제 산업발전에서 삽 한 번 들었습니까? 부정적이고 반대하는 얘기들만 했죠.
 
  우리가 그동안 사실상 의식하지 못하고 불법을 행한 것도 많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남산의 지하실 하면 악마 같은 존재들이 고문을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수사국은 항상 악역(惡役)만 담당하고 사회에서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사관으로 지하실에서 조사하다 보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보람도 느끼지 못합니다. 권력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하는 걸 우린들 왜 모릅니까? 상부에서 어떤 정치인을 미행하라고 하면 허구한 날 남의 뒤나 따라다니는 한심한 처지입니다. 그 인물이 간첩이 아닌 이상 우리 활동은 법에도 어긋나는 걸 압니다. 언론에라도 노출되면 더욱 곤욕을 치릅니다. 수사관들은 ‘같은 조직 내에서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직 내에서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현상이 심한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보면 각 재벌그룹, 정부 부처, 각 지역을 담당하는 정보관들은 힘이 있고 잘나가는 걸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관장이나 업체 사장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이권(利權)에 관여하기도 하고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또 그 지역 정치인과 관련을 맺으면서 특혜를 받고 정치에 입문하기도 하죠. 그늘에서 사는 수사관들과는 달라요.”
 
  그 말에 기술국에서 나온 위원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 과학기술국 요원은 어떤지 아십니까? 외떨어진 무인도(無人島)에서 적의 무선(無線)을 감청하는 요원들에 대해 한 번 제대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따뜻한 위문품이나 격려의 말 한 번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새로 들어오는 요원들은 외딴 섬이나 높은 산 꼭대기의 레이더 기지에 배치하려고 하면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곳에 오랫동안 있는 요원들은 정신건강도 우려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임무를 맡은 요원들은 평생 귀양을 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조직의 책임자나 간부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DJ 납치사건 말단 요원의 토로
 
  이번에는 대북공작국에서 나온 위원이 말했다.
 
  “그래도 그건 죽음의 위험은 없는 안전한 곳 아니겠습니까? 공작원으로 북(北)에 간 사람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목숨을 걸고 공작 업무를 합니다. 많은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권이 바뀌고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바뀌면 그들은 잊힙니다. 조직의 고급 간부들은 정치권과 관련된 자신의 입지에만 관심 있지 대한민국을 위해 북한에 침투한 공작원들을 살리기 위한 관심과 애정이 진짜 있나 의심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일들이었다. 그다음은 오랫동안 국내정보 파트에서 일한 위원이 발언했다.
 
  “지금 국내정보관만 좋은 걸 다 차지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국제정보관이 더 부럽습니다. 그 사람들은 외교관 신분을 가지고 각 대사관에 파견되어 국제 신사 노릇을 합니다. 외제 승용차를 타고 외국의 저택에서 마음껏 즐깁니다. 외교 특권을 이용해서 생활도 자유롭습니다. 그에 비하면 국내정보관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그 말에 해외공작국에서 나온 위원이 발끈하면서 말을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한 적이 있어요. 그 공작을 담당했던 요원 중 졸병이었어요. 그저 일을 시키니까 했을 뿐인데 평생 그 멍에를 지고 사는 운명이 됐습니다. 정권이 바뀌니까 거기에 관여됐다고 승진도 되지 않아요. 다행히 저는 말단 조직원이었으니까 이렇게 밥줄은 끊기지 않고 삽니다.
 
  그렇지만 김대중 납치 공작을 주도했던 요원은 지금 미국에 망명해 살고 있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여기저기서 손을 뻗쳐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 내막을 폭로해주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제의를 합니다. 그 요원은 저 보고 자기도 정보요원으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해외담당부서는 그 부서대로 얼마나 시집살이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또 지역은 미국이나 유럽만 좋은 편이지 그 외 제3세계로 파견돼 가 보세요, 그건 지옥이죠.”
 
 
  “모사드 같은 조직이 되어야”
 
  “자, 이쯤 하시고 제가 말을 좀 하겠습니다.”
 
  가장 고참인 사회자가 논쟁을 중단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부적인 것은 너무 좁은 시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정보조직을 어떻게 제대로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보기관은 독재 권력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을 겁주는 기관이었습니다. 정보기관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정치조직으로 여당보다 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서는 정치 개입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의 모사드같이 되어야 합니다.
 
  남산 위에 이렇게 노출되어 있을 게 아니라 요소요소에 위장 사무실을 설치하고 은밀하게 활동해야 합니다. 요원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는 조직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호적(戶籍)이나 주민등록증을 바꾸어 전혀 다른 인물을 탄생시켜야 하는 거죠. 우리 조직은 국민 모두에게 신뢰를 얻는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테러가 있을 때 안기부가 공개적으로 각 기관을 체계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하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북한 정세 분석이나 국제적 문제 분석에서 실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적 지지와 사랑입니다. 우리 안전기획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요원들의 희망이 뭡니까? 자식한테 아버지의 직장을 자랑하고 싶은 꿈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직장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 방향으로 한번 만들어봅시다.”
 
  자유토론이 매일 이어지고 각 위원마다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자유롭게 연구하도록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먼저 정보기관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그동안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維新 탄생의 배경
 
1970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 창설 9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역대 중앙정보부장들. 왼쪽부터 김재춘(제3대), 김용순(제2대), 김종필(초대), 김형욱(제4대), 김계원(제5대). 사진=조선DB
  5·16혁명 직후 군정(軍政)의 주체들은 혁명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할 조직이 필요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수집과 함께 직접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목적으로 중앙정보부법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정보부장은 경찰과 검찰, 군 정보수사기관을 지휘·감독하고 전 국가기관을 장악하도록 했다. 정보부는 우선 군특무대나 경찰에서 난다 긴다 하는 베테랑들을 뽑았다.
 
  전두환(全斗煥) 소령과 김복동(金復東) 소령, 권익현(權翊鉉) 대위 등 육사 11기 핵심이 정보부에서 활동했다. 정보부는 대통령의 친위대가 되어 박정희 대통령 앞에 놓인 정치적 장애물을 제거해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이 안정되자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어젠다를 내놓았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국가발전의 중심체로 삼았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는 정보기관이 아니라 손과 발이 되어 채찍과 몽둥이를 들게 하기도 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보부 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교주로 하고 경제발전을 교리(敎理)로 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에는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각하를 위한 충성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이후 중정은 대통령의 권력을 직접 행사하고 정보를 장악하면서 국가를 통제했다. 정보조직이 한층 강하게 국민을 통제하게 된 것은 남북대화와 유신(維新)을 전후해서였다.
 
  1972년 5월 4일 김일성(金日成)은 그를 찾아온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린 통일 문제에 외세(外勢) 의존에는 반대입니다. 미국이 무엇 때문에 군사분계선을 만들어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국주의는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분단돼 있어 서로 오해가 많습니다.”
 
  그에 대해 이후락이 이렇게 대답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우리 민족 문제는 제3국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8선은 열강들이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열강의 힘을 빌려 38선을 깨려 한다면 얼마 안 가 또 다른 장벽이 생깁니다. 제가 평양으로 온 것은 남과 북이 싸움을 하지 않기 위해서 온 겁니다.”
 
  “옳습니다. 싸움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에게도 전하십시오. 싸움하지 말고 비방도 하지 말자고. 조국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남조선에서는 우리가 남침한다고 하고 6·25 같은 동란(動亂)을 염려하는데 우리는 절대 남침하지 않습니다. 서로 군대축소, 군비축소를 해야 합니다.”
 
  이날 회담에서는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고 무력 불사용과 경제·문화 교류를 하자는 내용이 토의됐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金鍾泌) 총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1970년대는 순탄치 않은 시기일 것 같아. 국력(國力)을 키우고 대응해나가기 위해서는 체제 정비가 불가피하겠어. 그렇게 하면 반대도 많고 도전도 있겠지만 나중에 가면 그런 용단으로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거야.”
 
  권력 측에서 본 유신의 배경이었다. 정보부에서는 프랑스·스페인·대만의 헌법을 참조하며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제도를 연구했다.
 
 
  김진홍 목사에게 주목한 중앙정보부
 
  그 무렵 정보부는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김진홍 목사를 주목했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를 삶아 빈민들과 나누어 먹는 목사였다. 정보부는 김진홍 목사를 보면서 성장과 개발만 보던 시각에서 사회 빈민층의 생존과 복지를 체크했다.
 
  정보부는 전태일의 분신자살 후 점점 더 벌어지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보면서 성장의 그늘에서 허덕이는 빈민들에 대한 복지정책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국가 체제를 개혁하려면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내걸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됐다. 미국 CIA지부장 리처드슨은 “유신 이전으로 환원하라”고 하면서 “그게 안 될 경우 주한미군의 철수와 군사원조의 중단”을 통보했다.
 
  박 대통령은 “월남처럼 먹히지 않기 위해 체제를 강화한다고 하면서 일보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그 무렵 《워싱턴포스트》는 박정희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쓰고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23분 장충동의 국립극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쓴 호소문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절대 빈곤을 퇴치하고 나라 기반이 설 때까진 욕을 먹더라도 내가 끌고 가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는 반대였습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 노릇도 해야 할 게 아니냐고. 내가 가장으로 아내에게 해준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내 대신에 흉탄에 갔습니다.”
 
  권력 측에서 본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관계였다. 그건 정보기관이 아니었다. 박정희의 두뇌가 되고 눈과 귀, 손과 발이 된 분신이고 국가의 중심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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