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도 小隊에서 교동도 中隊에 다녀오는 데 3박 4일”
⊙ “소대장님! 자세를 낮추십시오” “왜 그래?” “북한군 무장선박이 접근합니다”
⊙ “적진에 조명탄이 뜨거나 경비견이 짖어대고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 “교동도 ‘마로니에 별장’, 볼음도 ‘에덴동산’, 말도 ‘황혼의 별장’이라 불려”
⊙ “소대장님! 자세를 낮추십시오” “왜 그래?” “북한군 무장선박이 접근합니다”
⊙ “적진에 조명탄이 뜨거나 경비견이 짖어대고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 “교동도 ‘마로니에 별장’, 볼음도 ‘에덴동산’, 말도 ‘황혼의 별장’이라 불려”
- 지난 1월 30일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말도 근무 예비역 해병대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무일(해병간부 35기), 김종환(해간 34기), 김성덕(해병 180기). 뒷줄 왼쪽부터 김돈하(해간 75기), 이강민(해병 263기), 김흥석(해병 262기), 정남균(해병 507기)씨.
절해고도(絶海孤島) 말도. 행정구역은 인천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함박도가 북한 땅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말도는 전국적인 섬이 되었다. 한때 “이 세상 끝섬에 가면 인생도 끝장”이라 스스로 비하했던 말도는, 마치 체증처럼 가슴 한쪽에 무언가 뭉쳐져 있을 것 같은 우리 땅이 되었다. 크기는 작으나 북녘땅을 노려보는 호랑이 눈깔 같은 섬이 된 것이다.
기자는 《월간조선》 2019년 12월호 기사 〈해병대 말도 소대장의 통혁당 사건과 함박도〉를 통해 해병 예비역 대위 김무일(金武一)씨를 만났다.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한 그는 해병에 대한 애정이 단단한 분이다. 김 전 부회장이 격주로 발행되는 《무적해병신문》에다 이런 광고를 냈다.
〈말도 소대 근무 경력자를 찾습니다.
요즘 우리 고유의 영토 함박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해병 제2사단 예하 강화부대 말도 소대 근무 경력자들을 찾습니다. 외로운 끝섬 말도의 추억을 나누고자 하오니, 근무 경력자나 혹은 이를 아시는 분께서는 연락 주셔서 반가운 해후 있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예비역 ‘빨간 명찰’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지 몰라도 기꺼이 40~50년 전의 추억을 반추했다. 어느덧 ‘다’나 ‘까’로만 끝나는 군대 말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날갯죽지 힘이 예전만 못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귀신 잡던’ 해병들이 해후한 것은 지난 1월 30일 저녁. 서울 신사동의 어느 근사한 식당에서 날 선 거수경례가 한동안 오갔다.
해병 263기 이강민(李康敏·67)씨는 1973년 12월부터 75년 초까지 말도 소대에서 근무했다. 현재 그는 인천 부평에서 화물용 승강기 사업을 하고 있다. 직접 제작·설치까지 한다.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에 엘리베이터 20여 대를 설치한 일도 있다”고 김무일 전 부회장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등단 작가이기도 한 이강민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 DMZ 군사분계선.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며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말도입니다. 옛날 황해도 개성과 연백, 서울을 오가는 서해 최고의 항구였으며 ‘말도 기생’이 있었을 만큼 꽤 흥청대던 곳인데 6·25전쟁 이후 어부들이 납치되고 그래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빈집만 유령처럼 남은 곳….
해병대에선 보통 그곳을 ‘인생 말도’라 칭하고 사고뭉치 부대원들이 모인 ‘쇼생크 감옥’ 같은 곳이었죠. 군에서 밀리고 밀려 끝까지 온 군인들의 마지막 집합소라고 할까요.
그 시절, 보통 ‘빽’(배경)이 있으면 사령부나 사단 같은 데에서 편한 보직으로 지냈을 텐데 전기도 없는 무인도 같은 곳에서 호롱불을 켜고 눈만 껌뻑이며 컴컴한 지하 벙커 통로를 더듬거리며 기어 다니던… 그런 군대에서 우리는 조국을 지켰습니다.”
호롱불 켜던 軍 시절
그는 말도 소대(小隊)에서 나와 교동도 중대(中隊)에 한 번 다녀오는 데 3박 4일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중대에 가려면 말도에서 앞섬 볼음도까지 물 시간에 맞추어 뗏목을 저어 가야 하고, 그곳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하룻밤을 자야 합니다. 이튿날 하루에 한 번 오는 민간인 여객선에 몸을 싣고 교동도에 가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하지요. 암튼 소대에서 중대 다녀오는 것이 아프리카 소말리아 다녀오는 것만큼 복잡하고 힘들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당시 해병대원의 월급은 얼마였습니까.
“우리는 월급날이 언제인지도 몰랐어요. 월급을 받은 적도 구경한 적도 없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선임하사가 중대 다녀오면 건빵 한 봉지씩 선심 쓰듯 주던데 그날이 월급날인 것 같습니다. 군인의 생일이라는 ‘국군의 날’도 미역국은커녕 꽁보리밥에다 오래된 된장이나 비벼 먹던, 그런 대한민국 최전방 OP(관측소)에서 살았습니다.”
― 말도에서 보직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루의 일과는….
“밥 먹고 하는 일이란 해 뜨면 (축구)공 차고, 해지면 기합이 빠졌다고 ‘빠따(방망이)’ 맞고, 컴컴한 밤에는 성능이 안 좋아 지글거리는 무전기 잡고 ‘개나리-남포-도시락 오버’ 하며, 그렇게 그렇게 우습고 슬프고 이상하게 보내는 곳이 말도였습니다.”
― 말도에 얽힌 추억이랄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을까요.
“많지요. 해 질 녘 OP에서 바라보는 서해는 그야말로 한잔 술에 취한 삼류화가가 흰 도화지에다 노란 페인트 한 사발을 확 뿌려놓고 그 위에 새빨갛게 익은 연시를 팍 터트린 듯한 황혼이 이글거리는 바다였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놀라운 풍광에 취하여 삭막한 해병들도 얌전한 시인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말도를 거쳐 간 해병 선배들이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는지 모릅니다.
만약 시인 박재삼(朴在森)이 서해를 봤다면 그의 대표작 ‘울음이 타는 강에서’처럼 ‘해 질 녘 저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하며 황혼에 넋을 잃었을 겁니다.”
― 인근 함박도에는 가보셨어요.
“가보지는 않았으나 우리 땅이라 생각했어요. 늘 곁에 있는 섬이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함박도가 ‘저쪽 땅’이라니 놀랍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말도 옆에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함박도가 말도와 비슷한 각도로 놓여 있고 그 앞에 북한 땅 연백평야가 있으며 평야 끝 작은 야산에서는 그 유명한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헛 둘 셋’ 하며 이어지는 북녘의 앙칼진 여자 아나운서의 아침 체조 방송에 일어나면 ‘그쪽’ 동무들은 힘들지 않은지 온종일 ‘이쪽’ 나라 욕만 하고, ‘이쪽’의 우리는 그 욕을 너무 많이 먹어 오히려 욕이 칭찬처럼 들렸던 말도였어요.”
말도에서 만난 실미도 대원들
김종환(金宗煥·79)씨는 해병간부 34기다. 말도 소대장으로 196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6개월간 근무했다. 꽃다운 나이, 27세 무렵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말도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어요. 다 잊어버렸어요. 당시 하루하루가 재미없었다고 할까요? 제가 나서서 가혹행위나 얼차려를 지시한 적은 없습니다. 또 우리(말도) 소대에서 행한 특별한 훈련이나 작전도 없었고요. 지금과 달리 그때는 해안 주변이 열악해서 진지를 구축하거나 고지대 OP를 오가며 순찰 도는 일이 전부였죠.
당시 바람은 말도에서 3년간 무탈하게 복무해 제대하는 것이었는데 67년 7월 ‘90미리 포(砲)반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습니다. 월남전이 가장 치열할 때였는데 연대급 상륙 훈련을 하다 동료 대원 5명을 잃었고, 청룡부대 분대장인 친구 동생이 끔찍한 총상을 입어 제가 대신 작전을 수행한 일도 있었죠. 저 역시 머리에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우리나라로 돌아온 날짜는 68년 8월 13일, 예편은 70년 2월 28일입니다. 해병대 장교로 딱 5년 복무한 셈이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10년 전부터 보훈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두 달에 한 번씩 통원치료를 받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요즘 좀 고전하고 있어요.”
김종환씨는 숭실대 교육학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뒤 서울대 학생지도연구소에서 카운슬링을 전공했다. 30년간 세종대 대학본부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했는데 정년퇴임 당시 보직은 ‘대학 방송·신문 주간’이었다. 상담심리를 전공한 그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안타까웠다.
― 말도와 함박도 추억이 있을까요. 젊은 시절, 섬광처럼 지나간 세월이었겠지만….
“함박도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요. (무인도라) 존재감이 없었다고 할까요? 그러나 말도가 서해 북단 제일의 요충지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함박도가) 북한 땅이라고 생각한 적은 그때도 지금도 없어요.
당시 말도에 공군 첩보부대, 실미도 부대원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그들과 수인사 정도는 해도 깊이 사귀지는 못했죠.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도 작전계획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을 거예요. 고무보트를 타고 북파 훈련을 하고….”
실미도 부대는 일명 ‘김일성 목 따는 부대’로 알려진, 북파 공작을 담당하던 공군 첩보부대를 말한다.
― 당시 말도에서 훈련하던 실미도 대원은 몇 명쯤 됐을까요.
“10~20명 사이였을 거예요. 그들이 훈련이나 작전을 하면 우리는 모르는 척하고 벙커 막사 내에 있었어요. 눈치껏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봤지 구체적인 작전은 모르지…. 비밀이니까.”
― 실미도 대원들이 북한으로 넘어갔을까요.
“(공군) 첩보부대니까 (육지로) 침투해 임무를 했을 거예요. 제 기억으로 총소리가 나거나 (침투가 발각돼) 교전을 벌인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살피곤 했는데 북한 주민들은 대개 농사를 짓거나 염전을 하며 생계를 이었어요. 우리 군도 열악한데 북한군은 오죽했겠습니까.”
― 우리 군 첩보대원들이 함박도에서 북한군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소문 들으신 적이 있나요.
“못 들었어요. 소문을 들으려면 말도 주민들과 자주 만나야 하는데 접촉이 거의 없었어요. 저는 마을 이장하고만 대화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썰물 때 굴 캐러 간다고 하면 허락하는 정도….”
― 굴 캐는 것도 해병대 허락을 받아야 했나요.
“당연하죠. 잘못하다가 잡혀갈 수도 있잖아요.”
“북한군 무장 선박이 접근합니다”
해병간부 35기인 김무일 전 현대제철 부회장은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던 1967년 3월부터 6개월간 말도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새파란 24세였다. 김종환씨와 다르게 김 전 부회장은 말도와 함박도에 대해 강렬한 기억을 갖고 있다. 《월간조선》 2019년 12월호를 통해 놀라운 경험을 털어놓았는데 당시, 못다 한 이야기를 기자에게 전했다.
“생소했던 말도를 향해 부임하던 첫날, 쾌속정을 타고 망망대해를 나서 석모도를 비켜 교동도를 지나던 그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갑자기 승조원들이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며 저에게 손짓을 하는 겁니다. ‘소대장님! 자세를 낮추십시오.’ ‘왜 그래?’ ‘북한군 무장선박이 접근합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기관포를 장착한 북한 초계정이 인공기를 펄럭이며 우리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죠. ‘나에게도 소총을 다오’라고 하니 박 중사가 태연하게 대답했죠. ‘통상 있는 일이니 염려 마십시오. 우리 배가 뜨면 으레 저렇게 따라붙곤 합니다. 우리도 그렇고요’라고 하더군요. 소문대로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목이 잘릴 만큼 살벌하다는 전방 소문이 괜한 뜬소문은 아니구나 싶었죠.”
― 말도와 함박도 주변의 풍경을 회상한다면….
“북한 땅이 지척인 그곳(말도)에 땅거미가 질 때면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죠. 전깃불이나 수돗물은 감히 구경도 못 할 때였어요. 달도 없는 썰물 때면 개펄이 육지로 변하는 지근거리에 북녘땅 연백평야가 말도의 끝자락과 맞물렸죠. 그리고 지루한 밤은 왜 그리 길까요? 철책선 잠복초소에 배치된 소대원들의 철모 위로 길 잃은 유성(流星) 하나가 꼬리를 불태우며 선을 긋습니다. 청명한 밤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입니다. 손바닥만 한 섬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 들리는 것은 오직 철썩대는 파도 소리였어요.”
“반복되는 매복과 잠복근무는 신물이 날 정도였고 혈기 왕성한 장정들의 하루하루는 감옥살이와 진배없었다”고 한다. 성장 과정과 교육 수준이 제각각인, 전국 팔도에서 소집된 해병대원들의 심리상태와 욕구불만, 이탈(탈영)의 염려, 잡다한 반목의 조율과 예방, 이 모두가 병아리 소대장의 몫이었다.
“간혹 사소한 일로 충돌이라도 생길라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 소대장인 저 자신도 과민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어요. 더욱이 불안한 것은 이들이 주야장천 실탄과 무기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 심지어 수류탄과 폭약까지 말이죠.
말도 대원들은 당시만 해도 거칠고 말썽꾸러기 사병들로 편성됐으니… 그때 소대장과 대원들 간의 나이 차이는 불과 서너 살 정도로 같은 또래나 다름없었어요.”
― 일과는 어땠나요.
“밤새 철책선 잠복근무가 끝나면 섬마을과 섬 주변을 순찰하는 일과가 다시 시작되었죠. 한편으로는 부식 거리인 망둥이나 해삼, 소라 등을 잡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하루해가 저물면 야간 경계근무가 시작됩니다.”
― 실미도 대원들의 작전을 기억하세요.
“그믐밤을 택해, 은밀히 소형보트에 실어 북측으로 보내고, 그들이 북한 땅에 도착하는 예상시각까지 OP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곤 했죠.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작전을 전개하면 비상조치에 들어가고, 모든 화력을 전방에 배치해 돌발사고에 대비하곤 했습니다.
통상 그런 날이면 침투 작전이 마무리되는 새벽녘까지 온 섬이 긴장감에 휩싸입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들리는 적막 속에, 침투했던 무동력 소형보트가 무사히 돌아오면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반대로 적진에 조명탄이 뜨거나 경비견이 짖어대고 이어서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해병대원들은 모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빌곤 했습니다.”
“총각 대장님, 총각 대장님!”
― 함박도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 땅으로 알고 계시는 거죠.
“함박도는 관측보고, 일일보고에 포함돼 있었죠. 일전에 기자 양반에게 ‘전방 이상 없었음. (북한) 경비정이 멀리 지나갔음. 인근 함박도도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했다고 말한 적이 있잖아요. 당시의 저나 소대원, 어민들도 당연히 우리 영토라고 생각했죠.”
김무일 소대장은 6개월 후 말도를 떠나 치열했던 월남전에 참전했다.
“육지로 복귀하라는 명령은 곧바로 베트남 전선의 참전을 의미했어요. 정들었던 소대원들과 마을 유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어요. 평소 얼마 안 되는 부대 부식을 나눠 먹던 연로하신 촌로(村老)들과 이웃 볼음도 이장, 반장, 그리고 의용소방대원의 작별 표정은 한결같이 ‘살아서 돌아오라’는 간절한 소망이 절절한 얼굴들이었죠.”
그중에서도 “말도의 초등학교 행사 때마다 참석을 졸라대던 섬마을 선생님들과의 작별은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또는 운동회 날이나 도민(島民) 친목행사에 초청받으면 맨 앞줄 귀빈석으로 안내받았다. 식순에 따라 이장, 반장, 통장, 교장 선생님, 지서 주임과 보건소장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사회자가 목소리를 한층 높여 ‘다음은 소대장님의 격려사가 있겠습니다’라고 멘트를 했죠. 이때 박수가 제일 많이 터졌어요. 시쳇말로 인기 ‘짱’이었죠. 한쪽 구석에선 연호와 휘파람도 들렸으니까요. 연호는 ‘총각 선생님’ 대신 ‘총각 대장님!’이었습니다.”
― 말도 분교의 학생 수는 얼마나 됐을까요.
“통상 몇 명이나 됐을까요? 한 100명? 아닙니다. 한 학급에 너덧 명씩 1학년에서 6학년까지 합쳐봐야 30명을 넘지 못했죠.”
“우리나라 땅인 줄 알았다니까”
해병 180기 김성덕(金成德·79)씨는 1968년 5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2개월간 말도 소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25세. 고압선 철탑처럼 종아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던 청년기였다. 두 번 입대를 미룬 뒤 해병대에 자원했다.
기자에게 건넨 명함 상단에는 ‘익산시 해병대 전우회’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봉사는 행복이다’는 글귀가 있었다. 33년간 공직에 있었고 전북 익산시 오산면장과 평화동장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익산지방행정동우회 회장, 부회장직을 거쳐 지금은 동우회 고문으로 있다고 소개했다.
“말도 대원들이 모인다기에 달려왔죠. 어디든 못 가겠습니까. 만주 봉천이라도 해병대 일이라면 달려가야죠.”
그는 땅개 보병이 아닌 공병이었다. 해상 레이더실을 짓고 북한 황해도 연백 앞바다를 지나는 배를 감시하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레이더실 발전병이었어요. 수색대원들은 호롱불을 켜고 생활할 때 우린 자체 발전기가 있어서 전깃불 아래 지낼 수 있었죠. 레이더실에는 반장인 하사와 병사 4명이 함께 근무했습니다.
밤에는 서치라이트를 비춰서 인근 해상을 감시했어요. 낮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밤에는 안 보이니까 서치라이트를 켜는 거예요. 사실 어선들이 그곳에 투망을 못 해요. 어로 금지구역이니까. 주로 황해도 연백평야 쪽을 좌우로 비춥니다.”
― 함박도에 대한 기억은 있나요.
“함박도는 말도 서쪽에 있어서 레이더실에선 육안으로 안 보였어요. 물론 고사포가 있던 OP에 올라가면 주변 바다가, 함박도가 훤히 보였죠. 맑은 날이면 마치 50m 지척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였어요.”
― 함박도 앞바다에서 어민들이 조업했나요.
“없었고, 북한도 함박도 쪽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어요. 어쨌든 우리나라 땅인 줄 알았다니까. 지리적으로도 우리 쪽에 지척이니까. 우리가 관리하는 무인도로, 대한민국 영토로 알았지요.”
― 당시엔 이북 땅인지 모르셨지요.
“우리 땅인지 알았지요. 예전에는 왔다 갔다 했으니까. 지금 보니까 이북 땅이라 하대요?”
― 함박도라는 명칭을 말도에 근무하면서 들으신 거죠.
“그렇죠. 보통 사람은 몰라요. 웬만한 지도에는 함박도는 물론 말도라는 지명조차 안 나오니까.”
― 말도의 추억이라면?
“소라 따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말도 주민들이 땅콩을 재배했는데 땅콩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곤 했어요. 1968년 무렵, 주민 수는… 한 50~60호가 살았을까요? 농토도 꽤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부들이 납북되고 얼마 안 된 때여서 배를 못 타니 살기가 궁핍했습니다.”
― 말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황혼의 별장’이 생각납니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어요.”
곁에 있던 이강민씨가 말을 보탰다.
“그땐 교동도를 ‘마로니에 별장’, 주문도를 ‘소라별장’, 볼음도를 ‘에덴동산’,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습니다. 그 외에 더 있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때는 군사 우편이 없었고 그냥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황혼의 별장 아무개’ 하면 편지가 다 들어왔습니다. 펜팔이 극성을 부리던, 낭만이 있던 시절입니다. ‘미지의 소녀여! 여기는 서부전선 황혼의 별장 어쩌고’ 하며 편지를 쓰면 말도가 그런 삭막한 섬인 줄도 모르고 무슨 기막힌 별장에 사는 줄 알고 편지가 수십 통씩 들어왔었죠.”
벙어리 딸의 임신과 주게병
해병 262기인 김흥석(金興錫·67)씨는 1973년부터 1년7개월가량 말도 소대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22세, 세상을 향해 크게 포효할 만큼 건장한 나이였다. 지금도 몸이 좋지만 20대의 그는 붕붕 날아다닐 정도였단다. 제대 후 1974년 경찰에 입문, 2014년 인천중부서 시도(矢島) 파출소장으로 퇴직했다. 형사반장, 형사계장으로 수십 년간 일했다.
그는 말도와 관련된 살가운 추억을 털어놨다.
“말도에 근무할 때 저는 ‘주게병’이었어요.”
― 주게병?
“육군에선 취사병이라 하는데 해병대에선 그런 이름을 붙였어요.”
주게는 ‘주걱’의 황해도 사투리다. 계속된 그의 이야기.
“취사 담당을 하니까 끼니마다 민가에 내려가 소대장 부식을 타왔습니다. 부식비가 좀 나와서 벙어리 처녀의 엄마에게 얼마씩 주고 부식을 가져왔죠. 이를테면, 계란 프라이 같은…. 그땐 기름(식용유)도 없던 시절이어서…. 한번은 그 엄마가 저를 붙잡고 우는 겁니다. ‘벙어리 딸이 임신했다’면서 ‘애 아빠를 찾아달라’고 말이죠.
제가 제대 후 평생 형사로 살았으니 지금이라면 대번에 잡겠지만, 당시만 해도 군대 졸병이 뭘 압니까. 안타까워서 소대장에게 이야기해 벙어리 처녀를 위해 미역을 갖다준 기억이 납니다. 그 벙어리 처녀의 엄마가 저를 그렇게 예뻐하셨어요.”
― 매 끼니, 식사 준비하는 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주게병이 저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는데 매일 세끼를 마련하는 일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어요. 밥만 먹으면 돌아서서 식기 닦고, 지게 지고 나무하러 산에 가야 했어요. 늘 반찬 준비하는 일이 고되었죠.”
― 요리는 잘하셨어요.
“하하하. 하도 오래돼 요리를 어떻게 했나 기억이 없어요. 주게병 후배가 서울 명동의 한식당에서 오래 근무해서 요리를 기가 막히게 했죠. 가끔 그 후배가 그리워집니다. 만나고 싶어요.”
― 말도 소대로 가게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해병대 제2사단 대대본부에 가니 ‘수색 3중대는 인간 도살장’이라고 누가 말하더군요. 그만큼 군기가 드셌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수색 3중대 중에서 말도에 갈 줄이야…. 말도는 가장 골치 아픈 사고뭉치가 가는 곳이더군요. 저는 진짜 억울하게 하사관이 사고 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른 채 말도로 전출된 케이스였어요. 그렇게 수색 3중대에서 흘러 흘러 말도까지 오게 됐죠.”
― 잊히지 않는 추억이라면?
“아무래도 벙어리 처녀의 엄마가 떠올라요. 제가 말도 근무를 마치고 육지로 떠난다니까 부두까지 나와서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 혹시 사위 삼고 싶어한 것 아닌가요.
“하하하.”
― 함박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군에 있을 땐 함박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냥 무인도라고만 알고 있었어요.
지난해 국회에서 있은 이승대 해병대 사령관의 함박도 초토화 발언에 알게 되었고 이후 일련의 함박도 관련 보도를 자세히 살펴보았죠. 당시 국방장관이 함박도가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니까 굉장히 부아가 끓더군요.”
서울 신림동에서 CCTV와 IC카드 단말기 관련 사업을 하는 정남균(鄭南均·55)씨는 고교를 마치자마자 해병에 자원했다. 까까머리 애송이 시절인 1985년 6월부터 10월까지 말도에서 근무했다. 그러니까 만 18세 때다. 보직은 포병. 81미리 박격포 담당이었다.
― 포는 쏴 봤습니까.
“연습은 했는데 포는 안 쐈죠. 본대에 와서 쐈죠.”
기생이 많이 살던 말도
― 말도 관련한 추억이 있다면.
이 대목에서 그는 뜸 들이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물지게 지고 고지대 OP를 오르내리던 기억이 납니다. 땅굴을 파서 그 위에 봉분 덮듯이 엄폐호를 만들어 두더지 생활을 했어요. 그게 막사였던 셈이죠.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땐 벽돌 막사라는 게 없었어요.
그리고 통조림 많이 먹었던 기억…, 냉장고가 없어서 부식이 오면 하루 안에 다 먹어야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촛불로 살았으니까. 물론 발전기가 있긴 있었는데 부대 것이 아니라 마을 전기를 잠시 끌어다 쓴 것이었죠.”
그러더니 지성스럽게 말도에 대한 이야기를 보탰다.
“옛날 말도에 기생들이 많이 살았대요. 배가 남해 쪽에서 올라와서 말도에 잠시 정박한 후 북한 쪽으로 들어가는 중간 통로였다는 겁니다. 일종의 북한 개성 쪽으로 들어가는 중간 기착지라고 할까요? 과거엔 섬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만큼 돈벌이가 됐다는 뜻이겠지요. 섬 곳곳에 흩어진 깨진 사기그릇이 많았고 허물어진 집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함박도는요?
“경계를 서면서 유심히 보기는 많이 봤어요. 서해 북방 한계선이니까요. 날이 좋으면 함박도가 훤히 보였어요.”
―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때까지 우리 땅이라 생각했죠. 거기 살던 주민들도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 말도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죠.
“네.”
― 1985년 무렵에 가구 수는 얼마나 됐을까요.
“정확지 않지만, 10여 가구는 됐을 것으로 기억해요. 주민들은 12명이었는데 대개가 장(長)들이었어요. 새마을지도자님, 이장님, 부녀회장님, 선장님, 부선장님, 선생님… 죄다 장(長)급 ‘님’들이었어요. 또 경찰서 보안과에서 경찰관이 파견돼 있었고 목사 부부도 말도에 살았습니다.”
― 주민들의 생업은?
“주민들에게 국가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왜, 독도에 거주하면 정부가 보조금 같은 것을 주지 않나요? 말도에 살아도 그런 혜택이 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말도로 주소지를 옮기려는 이가 많았어요. 주민들은 꽃게를 잡고 굴을 따다 강화에 가서 팔긴 하지만, 어쩌다 하는 일이지 주업으로 물질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석양이 깊숙이 자리 잡은 고요한 마을이었죠.”
기자와 만난 ‘빨간 명찰’들은 모두 50~70대로 스무 살의 한철을 해병대에서 보낸 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거나 피똥을 싸고 또 맞았다는 이야기는 할망정 ‘귀신 잡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오랜 추억이 휘영청 달 밝은 아래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함박도가, 늘 우리 땅이라 생각하던 그 섬이 북한 땅이 된 것에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말도를 찾아 어린 후배들을 위문하자”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기자는 《월간조선》 2019년 12월호 기사 〈해병대 말도 소대장의 통혁당 사건과 함박도〉를 통해 해병 예비역 대위 김무일(金武一)씨를 만났다.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한 그는 해병에 대한 애정이 단단한 분이다. 김 전 부회장이 격주로 발행되는 《무적해병신문》에다 이런 광고를 냈다.
〈말도 소대 근무 경력자를 찾습니다.
요즘 우리 고유의 영토 함박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해병 제2사단 예하 강화부대 말도 소대 근무 경력자들을 찾습니다. 외로운 끝섬 말도의 추억을 나누고자 하오니, 근무 경력자나 혹은 이를 아시는 분께서는 연락 주셔서 반가운 해후 있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예비역 ‘빨간 명찰’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지 몰라도 기꺼이 40~50년 전의 추억을 반추했다. 어느덧 ‘다’나 ‘까’로만 끝나는 군대 말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날갯죽지 힘이 예전만 못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귀신 잡던’ 해병들이 해후한 것은 지난 1월 30일 저녁. 서울 신사동의 어느 근사한 식당에서 날 선 거수경례가 한동안 오갔다.
해병 263기 이강민(李康敏·67)씨는 1973년 12월부터 75년 초까지 말도 소대에서 근무했다. 현재 그는 인천 부평에서 화물용 승강기 사업을 하고 있다. 직접 제작·설치까지 한다.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에 엘리베이터 20여 대를 설치한 일도 있다”고 김무일 전 부회장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등단 작가이기도 한 이강민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 DMZ 군사분계선.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며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말도입니다. 옛날 황해도 개성과 연백, 서울을 오가는 서해 최고의 항구였으며 ‘말도 기생’이 있었을 만큼 꽤 흥청대던 곳인데 6·25전쟁 이후 어부들이 납치되고 그래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빈집만 유령처럼 남은 곳….
해병대에선 보통 그곳을 ‘인생 말도’라 칭하고 사고뭉치 부대원들이 모인 ‘쇼생크 감옥’ 같은 곳이었죠. 군에서 밀리고 밀려 끝까지 온 군인들의 마지막 집합소라고 할까요.
그 시절, 보통 ‘빽’(배경)이 있으면 사령부나 사단 같은 데에서 편한 보직으로 지냈을 텐데 전기도 없는 무인도 같은 곳에서 호롱불을 켜고 눈만 껌뻑이며 컴컴한 지하 벙커 통로를 더듬거리며 기어 다니던… 그런 군대에서 우리는 조국을 지켰습니다.”
호롱불 켜던 軍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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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와 함박도 해상 지도다. |
“중대에 가려면 말도에서 앞섬 볼음도까지 물 시간에 맞추어 뗏목을 저어 가야 하고, 그곳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하룻밤을 자야 합니다. 이튿날 하루에 한 번 오는 민간인 여객선에 몸을 싣고 교동도에 가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하지요. 암튼 소대에서 중대 다녀오는 것이 아프리카 소말리아 다녀오는 것만큼 복잡하고 힘들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당시 해병대원의 월급은 얼마였습니까.
“우리는 월급날이 언제인지도 몰랐어요. 월급을 받은 적도 구경한 적도 없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선임하사가 중대 다녀오면 건빵 한 봉지씩 선심 쓰듯 주던데 그날이 월급날인 것 같습니다. 군인의 생일이라는 ‘국군의 날’도 미역국은커녕 꽁보리밥에다 오래된 된장이나 비벼 먹던, 그런 대한민국 최전방 OP(관측소)에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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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2월부터 75년 초까지 해병 제2사단 말도 소대에 근무한 이강민씨. |
“밥 먹고 하는 일이란 해 뜨면 (축구)공 차고, 해지면 기합이 빠졌다고 ‘빠따(방망이)’ 맞고, 컴컴한 밤에는 성능이 안 좋아 지글거리는 무전기 잡고 ‘개나리-남포-도시락 오버’ 하며, 그렇게 그렇게 우습고 슬프고 이상하게 보내는 곳이 말도였습니다.”
― 말도에 얽힌 추억이랄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을까요.
“많지요. 해 질 녘 OP에서 바라보는 서해는 그야말로 한잔 술에 취한 삼류화가가 흰 도화지에다 노란 페인트 한 사발을 확 뿌려놓고 그 위에 새빨갛게 익은 연시를 팍 터트린 듯한 황혼이 이글거리는 바다였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놀라운 풍광에 취하여 삭막한 해병들도 얌전한 시인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말도를 거쳐 간 해병 선배들이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는지 모릅니다.
만약 시인 박재삼(朴在森)이 서해를 봤다면 그의 대표작 ‘울음이 타는 강에서’처럼 ‘해 질 녘 저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하며 황혼에 넋을 잃었을 겁니다.”
― 인근 함박도에는 가보셨어요.
“가보지는 않았으나 우리 땅이라 생각했어요. 늘 곁에 있는 섬이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함박도가 ‘저쪽 땅’이라니 놀랍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말도 옆에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함박도가 말도와 비슷한 각도로 놓여 있고 그 앞에 북한 땅 연백평야가 있으며 평야 끝 작은 야산에서는 그 유명한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헛 둘 셋’ 하며 이어지는 북녘의 앙칼진 여자 아나운서의 아침 체조 방송에 일어나면 ‘그쪽’ 동무들은 힘들지 않은지 온종일 ‘이쪽’ 나라 욕만 하고, ‘이쪽’의 우리는 그 욕을 너무 많이 먹어 오히려 욕이 칭찬처럼 들렸던 말도였어요.”
말도에서 만난 실미도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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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에서 바라본 함박도 모습이다. |
“유감스럽게도 저는 말도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어요. 다 잊어버렸어요. 당시 하루하루가 재미없었다고 할까요? 제가 나서서 가혹행위나 얼차려를 지시한 적은 없습니다. 또 우리(말도) 소대에서 행한 특별한 훈련이나 작전도 없었고요. 지금과 달리 그때는 해안 주변이 열악해서 진지를 구축하거나 고지대 OP를 오가며 순찰 도는 일이 전부였죠.
당시 바람은 말도에서 3년간 무탈하게 복무해 제대하는 것이었는데 67년 7월 ‘90미리 포(砲)반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습니다. 월남전이 가장 치열할 때였는데 연대급 상륙 훈련을 하다 동료 대원 5명을 잃었고, 청룡부대 분대장인 친구 동생이 끔찍한 총상을 입어 제가 대신 작전을 수행한 일도 있었죠. 저 역시 머리에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우리나라로 돌아온 날짜는 68년 8월 13일, 예편은 70년 2월 28일입니다. 해병대 장교로 딱 5년 복무한 셈이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10년 전부터 보훈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두 달에 한 번씩 통원치료를 받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요즘 좀 고전하고 있어요.”
김종환씨는 숭실대 교육학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뒤 서울대 학생지도연구소에서 카운슬링을 전공했다. 30년간 세종대 대학본부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했는데 정년퇴임 당시 보직은 ‘대학 방송·신문 주간’이었다. 상담심리를 전공한 그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안타까웠다.
― 말도와 함박도 추억이 있을까요. 젊은 시절, 섬광처럼 지나간 세월이었겠지만….
“함박도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요. (무인도라) 존재감이 없었다고 할까요? 그러나 말도가 서해 북단 제일의 요충지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함박도가) 북한 땅이라고 생각한 적은 그때도 지금도 없어요.
당시 말도에 공군 첩보부대, 실미도 부대원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그들과 수인사 정도는 해도 깊이 사귀지는 못했죠.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도 작전계획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을 거예요. 고무보트를 타고 북파 훈련을 하고….”
실미도 부대는 일명 ‘김일성 목 따는 부대’로 알려진, 북파 공작을 담당하던 공군 첩보부대를 말한다.
― 당시 말도에서 훈련하던 실미도 대원은 몇 명쯤 됐을까요.
“10~20명 사이였을 거예요. 그들이 훈련이나 작전을 하면 우리는 모르는 척하고 벙커 막사 내에 있었어요. 눈치껏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봤지 구체적인 작전은 모르지…. 비밀이니까.”
― 실미도 대원들이 북한으로 넘어갔을까요.
“(공군) 첩보부대니까 (육지로) 침투해 임무를 했을 거예요. 제 기억으로 총소리가 나거나 (침투가 발각돼) 교전을 벌인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살피곤 했는데 북한 주민들은 대개 농사를 짓거나 염전을 하며 생계를 이었어요. 우리 군도 열악한데 북한군은 오죽했겠습니까.”
― 우리 군 첩보대원들이 함박도에서 북한군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소문 들으신 적이 있나요.
“못 들었어요. 소문을 들으려면 말도 주민들과 자주 만나야 하는데 접촉이 거의 없었어요. 저는 마을 이장하고만 대화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썰물 때 굴 캐러 간다고 하면 허락하는 정도….”
― 굴 캐는 것도 해병대 허락을 받아야 했나요.
“당연하죠. 잘못하다가 잡혀갈 수도 있잖아요.”
“북한군 무장 선박이 접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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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말도 소대장 시절의 김무일 중위의 모습이다. |
“생소했던 말도를 향해 부임하던 첫날, 쾌속정을 타고 망망대해를 나서 석모도를 비켜 교동도를 지나던 그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갑자기 승조원들이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며 저에게 손짓을 하는 겁니다. ‘소대장님! 자세를 낮추십시오.’ ‘왜 그래?’ ‘북한군 무장선박이 접근합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기관포를 장착한 북한 초계정이 인공기를 펄럭이며 우리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죠. ‘나에게도 소총을 다오’라고 하니 박 중사가 태연하게 대답했죠. ‘통상 있는 일이니 염려 마십시오. 우리 배가 뜨면 으레 저렇게 따라붙곤 합니다. 우리도 그렇고요’라고 하더군요. 소문대로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목이 잘릴 만큼 살벌하다는 전방 소문이 괜한 뜬소문은 아니구나 싶었죠.”
― 말도와 함박도 주변의 풍경을 회상한다면….
“북한 땅이 지척인 그곳(말도)에 땅거미가 질 때면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죠. 전깃불이나 수돗물은 감히 구경도 못 할 때였어요. 달도 없는 썰물 때면 개펄이 육지로 변하는 지근거리에 북녘땅 연백평야가 말도의 끝자락과 맞물렸죠. 그리고 지루한 밤은 왜 그리 길까요? 철책선 잠복초소에 배치된 소대원들의 철모 위로 길 잃은 유성(流星) 하나가 꼬리를 불태우며 선을 긋습니다. 청명한 밤별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입니다. 손바닥만 한 섬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 들리는 것은 오직 철썩대는 파도 소리였어요.”
“반복되는 매복과 잠복근무는 신물이 날 정도였고 혈기 왕성한 장정들의 하루하루는 감옥살이와 진배없었다”고 한다. 성장 과정과 교육 수준이 제각각인, 전국 팔도에서 소집된 해병대원들의 심리상태와 욕구불만, 이탈(탈영)의 염려, 잡다한 반목의 조율과 예방, 이 모두가 병아리 소대장의 몫이었다.
“간혹 사소한 일로 충돌이라도 생길라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 소대장인 저 자신도 과민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어요. 더욱이 불안한 것은 이들이 주야장천 실탄과 무기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 심지어 수류탄과 폭약까지 말이죠.
말도 대원들은 당시만 해도 거칠고 말썽꾸러기 사병들로 편성됐으니… 그때 소대장과 대원들 간의 나이 차이는 불과 서너 살 정도로 같은 또래나 다름없었어요.”
― 일과는 어땠나요.
“밤새 철책선 잠복근무가 끝나면 섬마을과 섬 주변을 순찰하는 일과가 다시 시작되었죠. 한편으로는 부식 거리인 망둥이나 해삼, 소라 등을 잡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하루해가 저물면 야간 경계근무가 시작됩니다.”
― 실미도 대원들의 작전을 기억하세요.
“그믐밤을 택해, 은밀히 소형보트에 실어 북측으로 보내고, 그들이 북한 땅에 도착하는 예상시각까지 OP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곤 했죠. 썰물과 밀물 때를 맞춰 작전을 전개하면 비상조치에 들어가고, 모든 화력을 전방에 배치해 돌발사고에 대비하곤 했습니다.
통상 그런 날이면 침투 작전이 마무리되는 새벽녘까지 온 섬이 긴장감에 휩싸입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들리는 적막 속에, 침투했던 무동력 소형보트가 무사히 돌아오면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반대로 적진에 조명탄이 뜨거나 경비견이 짖어대고 이어서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해병대원들은 모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빌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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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앞 해상에서 바라본 북한 땅 모습이다. 2019년 10월 24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말도 초소를 찾을 당시 찍었다. 사진=국회사진기자단 |
“함박도는 관측보고, 일일보고에 포함돼 있었죠. 일전에 기자 양반에게 ‘전방 이상 없었음. (북한) 경비정이 멀리 지나갔음. 인근 함박도도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했다고 말한 적이 있잖아요. 당시의 저나 소대원, 어민들도 당연히 우리 영토라고 생각했죠.”
김무일 소대장은 6개월 후 말도를 떠나 치열했던 월남전에 참전했다.
“육지로 복귀하라는 명령은 곧바로 베트남 전선의 참전을 의미했어요. 정들었던 소대원들과 마을 유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어요. 평소 얼마 안 되는 부대 부식을 나눠 먹던 연로하신 촌로(村老)들과 이웃 볼음도 이장, 반장, 그리고 의용소방대원의 작별 표정은 한결같이 ‘살아서 돌아오라’는 간절한 소망이 절절한 얼굴들이었죠.”
그중에서도 “말도의 초등학교 행사 때마다 참석을 졸라대던 섬마을 선생님들과의 작별은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또는 운동회 날이나 도민(島民) 친목행사에 초청받으면 맨 앞줄 귀빈석으로 안내받았다. 식순에 따라 이장, 반장, 통장, 교장 선생님, 지서 주임과 보건소장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사회자가 목소리를 한층 높여 ‘다음은 소대장님의 격려사가 있겠습니다’라고 멘트를 했죠. 이때 박수가 제일 많이 터졌어요. 시쳇말로 인기 ‘짱’이었죠. 한쪽 구석에선 연호와 휘파람도 들렸으니까요. 연호는 ‘총각 선생님’ 대신 ‘총각 대장님!’이었습니다.”
― 말도 분교의 학생 수는 얼마나 됐을까요.
“통상 몇 명이나 됐을까요? 한 100명? 아닙니다. 한 학급에 너덧 명씩 1학년에서 6학년까지 합쳐봐야 30명을 넘지 못했죠.”
“우리나라 땅인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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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2개월간 말도 소대에서 근무한 김성덕씨의 해병대 시절이다. |
기자에게 건넨 명함 상단에는 ‘익산시 해병대 전우회’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봉사는 행복이다’는 글귀가 있었다. 33년간 공직에 있었고 전북 익산시 오산면장과 평화동장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익산지방행정동우회 회장, 부회장직을 거쳐 지금은 동우회 고문으로 있다고 소개했다.
“말도 대원들이 모인다기에 달려왔죠. 어디든 못 가겠습니까. 만주 봉천이라도 해병대 일이라면 달려가야죠.”
그는 땅개 보병이 아닌 공병이었다. 해상 레이더실을 짓고 북한 황해도 연백 앞바다를 지나는 배를 감시하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레이더실 발전병이었어요. 수색대원들은 호롱불을 켜고 생활할 때 우린 자체 발전기가 있어서 전깃불 아래 지낼 수 있었죠. 레이더실에는 반장인 하사와 병사 4명이 함께 근무했습니다.
밤에는 서치라이트를 비춰서 인근 해상을 감시했어요. 낮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밤에는 안 보이니까 서치라이트를 켜는 거예요. 사실 어선들이 그곳에 투망을 못 해요. 어로 금지구역이니까. 주로 황해도 연백평야 쪽을 좌우로 비춥니다.”
― 함박도에 대한 기억은 있나요.
“함박도는 말도 서쪽에 있어서 레이더실에선 육안으로 안 보였어요. 물론 고사포가 있던 OP에 올라가면 주변 바다가, 함박도가 훤히 보였죠. 맑은 날이면 마치 50m 지척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였어요.”
― 함박도 앞바다에서 어민들이 조업했나요.
“없었고, 북한도 함박도 쪽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어요. 어쨌든 우리나라 땅인 줄 알았다니까. 지리적으로도 우리 쪽에 지척이니까. 우리가 관리하는 무인도로, 대한민국 영토로 알았지요.”
― 당시엔 이북 땅인지 모르셨지요.
“우리 땅인지 알았지요. 예전에는 왔다 갔다 했으니까. 지금 보니까 이북 땅이라 하대요?”
― 함박도라는 명칭을 말도에 근무하면서 들으신 거죠.
“그렇죠. 보통 사람은 몰라요. 웬만한 지도에는 함박도는 물론 말도라는 지명조차 안 나오니까.”
― 말도의 추억이라면?
“소라 따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말도 주민들이 땅콩을 재배했는데 땅콩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곤 했어요. 1968년 무렵, 주민 수는… 한 50~60호가 살았을까요? 농토도 꽤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부들이 납북되고 얼마 안 된 때여서 배를 못 타니 살기가 궁핍했습니다.”
― 말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황혼의 별장’이 생각납니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어요.”
곁에 있던 이강민씨가 말을 보탰다.
“그땐 교동도를 ‘마로니에 별장’, 주문도를 ‘소라별장’, 볼음도를 ‘에덴동산’, 말도를 ‘황혼의 별장’이라 불렀습니다. 그 외에 더 있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때는 군사 우편이 없었고 그냥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황혼의 별장 아무개’ 하면 편지가 다 들어왔습니다. 펜팔이 극성을 부리던, 낭만이 있던 시절입니다. ‘미지의 소녀여! 여기는 서부전선 황혼의 별장 어쩌고’ 하며 편지를 쓰면 말도가 그런 삭막한 섬인 줄도 모르고 무슨 기막힌 별장에 사는 줄 알고 편지가 수십 통씩 들어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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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시절 1985년 6월부터 10월까지 말도에서 근무한 정남균씨. 망원경으로 말도 앞 해상을 감시하고 있다. |
그는 말도와 관련된 살가운 추억을 털어놨다.
“말도에 근무할 때 저는 ‘주게병’이었어요.”
― 주게병?
“육군에선 취사병이라 하는데 해병대에선 그런 이름을 붙였어요.”
주게는 ‘주걱’의 황해도 사투리다. 계속된 그의 이야기.
“취사 담당을 하니까 끼니마다 민가에 내려가 소대장 부식을 타왔습니다. 부식비가 좀 나와서 벙어리 처녀의 엄마에게 얼마씩 주고 부식을 가져왔죠. 이를테면, 계란 프라이 같은…. 그땐 기름(식용유)도 없던 시절이어서…. 한번은 그 엄마가 저를 붙잡고 우는 겁니다. ‘벙어리 딸이 임신했다’면서 ‘애 아빠를 찾아달라’고 말이죠.
제가 제대 후 평생 형사로 살았으니 지금이라면 대번에 잡겠지만, 당시만 해도 군대 졸병이 뭘 압니까. 안타까워서 소대장에게 이야기해 벙어리 처녀를 위해 미역을 갖다준 기억이 납니다. 그 벙어리 처녀의 엄마가 저를 그렇게 예뻐하셨어요.”
― 매 끼니, 식사 준비하는 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주게병이 저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는데 매일 세끼를 마련하는 일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어요. 밥만 먹으면 돌아서서 식기 닦고, 지게 지고 나무하러 산에 가야 했어요. 늘 반찬 준비하는 일이 고되었죠.”
― 요리는 잘하셨어요.
“하하하. 하도 오래돼 요리를 어떻게 했나 기억이 없어요. 주게병 후배가 서울 명동의 한식당에서 오래 근무해서 요리를 기가 막히게 했죠. 가끔 그 후배가 그리워집니다. 만나고 싶어요.”
― 말도 소대로 가게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해병대 제2사단 대대본부에 가니 ‘수색 3중대는 인간 도살장’이라고 누가 말하더군요. 그만큼 군기가 드셌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수색 3중대 중에서 말도에 갈 줄이야…. 말도는 가장 골치 아픈 사고뭉치가 가는 곳이더군요. 저는 진짜 억울하게 하사관이 사고 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른 채 말도로 전출된 케이스였어요. 그렇게 수색 3중대에서 흘러 흘러 말도까지 오게 됐죠.”
― 잊히지 않는 추억이라면?
“아무래도 벙어리 처녀의 엄마가 떠올라요. 제가 말도 근무를 마치고 육지로 떠난다니까 부두까지 나와서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 혹시 사위 삼고 싶어한 것 아닌가요.
“하하하.”
― 함박도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군에 있을 땐 함박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냥 무인도라고만 알고 있었어요.
지난해 국회에서 있은 이승대 해병대 사령관의 함박도 초토화 발언에 알게 되었고 이후 일련의 함박도 관련 보도를 자세히 살펴보았죠. 당시 국방장관이 함박도가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니까 굉장히 부아가 끓더군요.”
서울 신림동에서 CCTV와 IC카드 단말기 관련 사업을 하는 정남균(鄭南均·55)씨는 고교를 마치자마자 해병에 자원했다. 까까머리 애송이 시절인 1985년 6월부터 10월까지 말도에서 근무했다. 그러니까 만 18세 때다. 보직은 포병. 81미리 박격포 담당이었다.
― 포는 쏴 봤습니까.
“연습은 했는데 포는 안 쐈죠. 본대에 와서 쐈죠.”
기생이 많이 살던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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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2사단 말도 근무자들이 수십 년 만에 자리를 함께 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말도를 찾아 어린 후배들을 위문하자”며 입을 모았다. |
이 대목에서 그는 뜸 들이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물지게 지고 고지대 OP를 오르내리던 기억이 납니다. 땅굴을 파서 그 위에 봉분 덮듯이 엄폐호를 만들어 두더지 생활을 했어요. 그게 막사였던 셈이죠.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땐 벽돌 막사라는 게 없었어요.
그리고 통조림 많이 먹었던 기억…, 냉장고가 없어서 부식이 오면 하루 안에 다 먹어야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촛불로 살았으니까. 물론 발전기가 있긴 있었는데 부대 것이 아니라 마을 전기를 잠시 끌어다 쓴 것이었죠.”
그러더니 지성스럽게 말도에 대한 이야기를 보탰다.
“옛날 말도에 기생들이 많이 살았대요. 배가 남해 쪽에서 올라와서 말도에 잠시 정박한 후 북한 쪽으로 들어가는 중간 통로였다는 겁니다. 일종의 북한 개성 쪽으로 들어가는 중간 기착지라고 할까요? 과거엔 섬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만큼 돈벌이가 됐다는 뜻이겠지요. 섬 곳곳에 흩어진 깨진 사기그릇이 많았고 허물어진 집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함박도는요?
“경계를 서면서 유심히 보기는 많이 봤어요. 서해 북방 한계선이니까요. 날이 좋으면 함박도가 훤히 보였어요.”
―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때까지 우리 땅이라 생각했죠. 거기 살던 주민들도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 말도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죠.
“네.”
― 1985년 무렵에 가구 수는 얼마나 됐을까요.
“정확지 않지만, 10여 가구는 됐을 것으로 기억해요. 주민들은 12명이었는데 대개가 장(長)들이었어요. 새마을지도자님, 이장님, 부녀회장님, 선장님, 부선장님, 선생님… 죄다 장(長)급 ‘님’들이었어요. 또 경찰서 보안과에서 경찰관이 파견돼 있었고 목사 부부도 말도에 살았습니다.”
― 주민들의 생업은?
“주민들에게 국가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왜, 독도에 거주하면 정부가 보조금 같은 것을 주지 않나요? 말도에 살아도 그런 혜택이 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말도로 주소지를 옮기려는 이가 많았어요. 주민들은 꽃게를 잡고 굴을 따다 강화에 가서 팔긴 하지만, 어쩌다 하는 일이지 주업으로 물질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석양이 깊숙이 자리 잡은 고요한 마을이었죠.”
기자와 만난 ‘빨간 명찰’들은 모두 50~70대로 스무 살의 한철을 해병대에서 보낸 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거나 피똥을 싸고 또 맞았다는 이야기는 할망정 ‘귀신 잡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오랜 추억이 휘영청 달 밝은 아래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함박도가, 늘 우리 땅이라 생각하던 그 섬이 북한 땅이 된 것에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말도를 찾아 어린 후배들을 위문하자”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