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 박정희 제거 시 남한서 박수칠 사람들 이용하려 했다”
⊙ “강한 군대 만들라고 조언… 훈련 강화에 진지·철책선 재구축”
⊙ “개인의 영웅심이나 이름 날리려는 남북 협상 안 돼”
⊙ “나 하나 살아 식구가 10명… 자유민주주의 위해 한 길로 걸어왔다”
⊙ “강한 군대 만들라고 조언… 훈련 강화에 진지·철책선 재구축”
⊙ “개인의 영웅심이나 이름 날리려는 남북 협상 안 돼”
⊙ “나 하나 살아 식구가 10명… 자유민주주의 위해 한 길로 걸어왔다”
- 김신조 목사는 “이 (인터뷰) 기회가 감사하다”며 “나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안보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고 말했다. 사진=월간조선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북한 무장공비들이 내려왔다. 북한 민족보위성 무력부 정찰국(현 정찰총국) 소속 ‘124부대’ 특수요원들의 게릴라 작전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비들은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고 서울 세검정 고갯길까지 쳐들어 왔다. 20kg의 군장을 진 채 야간에도 시속 10km의 급속 행군으로 북한산을 넘었다. 남한 경찰·군인과 총격전을 벌인 공비들 중 28명이 사살됐고 2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당시 인민군 소위 김신조만이 저항 끝에 귀순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북한군 김신조는 어느덧 온화한 인상의 ‘할아버지 목사’가 돼 있었다. 1982년 이후 국내외 3200여 곳의 교회에서 간증·전도 집회를 열었고 1997년 1월 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성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지금은 은퇴해 가끔 안보 강연에 나가는 것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 목사는 1969년부터 현재까지 2800회 이상의 안보 강연에 나갔다. 그는 인터뷰 당일 오전에도 경찰 모임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1·21 사태 당시 순경으로 재직했던 경찰들이 50년을 맞이해 김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서도 “근래는 50년이 됐는데도 예전보다 활동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김 목사는 “이 (인터뷰) 기회가 감사하다. 이번에 50년을 맞아 모든 것을 정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나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안보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른들의 노력을 잊고 과거를 잊는 개인의 나라가 돼선 안 된다”며 “더 이상 사상 갈등으로 안보가 논쟁거리가 돼서도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 목사는 자녀들 얘기를 할 때 화색을 보였고 자신이 겪은 고난을 회상할 때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대북 문제를 언급할 때는 책상을 치는 등 단호한 군인 정신을 드러냈다.
“맷돌로 갈아 죽이겠다”
— 1·21 사태 50년을 맞아 당시를 회고해 본다면.
“오늘이 50년이니까 내 인생도 이제 다 정리를 했습니다. 지금 일흔여섯 살, 당시는 스물여섯 살 때죠. 124 특수 게릴라 부대를 왜 갔느냐. 목적이 있었어요. 나는 반드시 내 세대에 남한을 공산화한다. 그때는 핵이 아니라 정찰총국만 가지고도 남한을 능히 공산화할 수 있었어요. 100%입니다. 왜 그러느냐. 1968년의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어요. 무기나 기술을 개발할 돈이 없었어요. 자원, 학자, 관광지, 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들보다 배고픈 걸 몰랐죠.”
— 박정희 대통령 제거, 진짜 자신 있었습니까.
“그렇죠. 그때 한국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 그래도 어떻게 31명 정도로 습격을 하려고 했나요.
“100% 희생이죠. 살아 온다는 보장도 없었고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때 보세요. 사람(경계 병력)이 많아도 실수가 있거든. 구멍이 있어. 그리고 김일성이가 판단했을 때 ‘대한민국이 앞으로 더 성장하기 전에 빨리 이걸 제거해야 되겠다’ 한 거죠. 그리고 그때는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 한 명 죽였다고 해서 미국·중국·일본이 크게 항의하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4·19, 5·16으로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혼란이었어요. 오히려 죽여 놓아 보세요. 대한민국 안에서 박수칠 사람 있었을 걸요. 그걸 이용한 겁니다.”
— 이용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청년 대학생들 막 봉기할 때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왔잖아요. 북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남조선 청년 동무들이 미국의 앞잡이 박정희 괴뢰정부를 반대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래 가지고 방송 때리고 《로동신문》 때렸잖아요. 그때 남한 사회 흐름이 그랬다는 거죠. 이북이 박정희 정권의 과도기를 역이용했다는 뜻이지.”
— 청와대 습격에 실패한 뒤 북한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에는 내가 비록 투항했어도 ‘박정희 목 따러 왔다’고 강경하게 나가니까 ‘아, 이북의 영웅’ 이렇게 띄웠대요. 그런데 나중에는 없어지더래. 내가 완전 전향하고 남한에서 일을 하니까 이북이 ‘김신조, 맷돌로 갈아 죽인다’고 했다는 거야. 왜 그러냐. 나 때문에 대한민국에 북한이 다 폭로된 것 아니냐. 6·25 이후 최대 사건이었으니까. 내가 사로잡힘으로써 대한민국에 엄청난 변화가 왔으니까.”
“공비들, 국군보다 예비군이 더 무섭다더라”
1·21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태세는 견고해졌다. 군복무 기간이 연장되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21 사건은 경제개발에 집중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 전면적인 대응책을 불렀다”며 “자주국방력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 예비군 창설, 새마을운동이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추진된 정책이고 모두 대성공했다”고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 “1968년 1월 21일 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김일성의 결정적 패착(敗着)이었다”고 평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한민국에 변화가 왔다는 것인가요.
“북한의 목적은 남한 공산화니까 제가 고민하고 얘기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사람이 중요하니까 군대를 뜯어고쳐라. 강한 군대를 만들어라. 훈련이 강해야 된다. 그때 유격이라는 용어가 나왔어. 또 북한 군대는 당시에 18세부터 28세까지 10년이야. 근데 여기는 30개월이네. 아니 이래 가지고 무슨 나라를 지키느냐 이랬어. 6개월 연장됐지. 탱크 만들고 철책선 만들고 진지 구축하고 말도 못했어요. 제 말 한마디에 막 밀어붙이는 거야. 국민들이 누구 믿고 삽니까. 대통령·정부·군대 믿고 살지요. 근데 31명이 청와대 마당까지 왔다면 국민들이 어떻겠어요? 한국에 살겠어요? 안보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다 끝나는 거죠.”
— 당시 복무하던 군인들이 항의한 적도 있다던데요.
“배는 고픈데 훈련은 세지. 그러니까 강의하는데 뒤통수에 화살이랑 돌멩이 다 날아오는 거죠. 군대 ‘개고생’하고 나오니까 예비군도 만들어 놨네? ‘이 자식아’ 하면서 강단으로 그냥 돌팔매질이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나는 한다’ 이거였어요. 돌멩이 다 맞아도 강의한 겁니다. ‘내가 욕먹어도 좋다’ ‘나중에 김신조를 평가하라’ 이거야. 이 나라를 빨리 건강하게 만들어 놓고 국민들 안보정신 강하게 만들어 놔야 북한이랑 남한 친북(親北) 세력들이 함부로 못한다고 구상했거든. 북한 정찰총국을 좌절시켜야겠다고 했죠.”
— 당시 국가안보의 강화로 북한도 영향을 받았나요.
“그해 울진·삼척에 120명(1968년 11월 북한 무장공비 120명이 강원도 울진·삼척 지구에 침투한 사건)이 나타났잖아요? 그때 서빙고로 7명이 붙잡혀 왔는데 내 후배들인 거야. 내가 그래서 ‘너희 어떻게 된 거야’ 물으니까 ‘선배님, 남조선 국군 아무것도 아닌데 예비군이 더 무서워요’ 이러더라고. 우리 부대는 특수 게릴라전인데 얘네들도 딱 들어와서 강원도 장악했어. 그런데 이 부락 가도 군대가 있고 저 부락 가도 군대가 있다 이 말이야. 그게 향토예비군이야. 무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는 데마다 있으니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거지. 군대는 사기(士氣)거든. 예비군은 지도(地圖)가 필요 없잖아.”
“북, 부모님 총살에 집안 호적도 없애”
김 목사는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이력서 한 장을 건넸다. 자신의 인적사항은 물론 목회생활과 사회활동 이력이 연도별로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력서상의 성명은 김신조가 아닌 김재현이었다. 그는 “그동안 주변에서 위협과 냉대를 받아 이사도 여러 번 했고 전화번호도 자주 바꿨다. 개명까지 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50년간 나쁜 소리, 힘든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나라”라며 “내가 이북에 김일성을 죽이러 갔으면 지금 살아 있겠는가. 자유민주국가니까 오늘날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현재 그는 자신의 각종 활동 영상들도 압축해 CD 형태로 보관 중이었다. 두 번의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당시 “내가 세상을 떠나면 각 언론사 사회부에 전달하라”고 자녀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1·21 사태를 다룬 영화 제작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의 저작권 등록도 마친 상태였다. 자신의 귀순 50년을 역사에 기록하고 싶은 듯했다.
— 귀순한 뒤 북한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나요.
“있기야 있었죠. 근데 내가 그걸 한 사람인데 걔들한테 죽겠어요? (웃음) 목소리만 들어도 감 잡을 수 있지. ‘바른 대로 대 봐!’ 이러면 쑥 도망가. 주로 전화가 와요. 그래서 전화를 자주 바꾼 거요. 예전에도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포라면서 사람들이 왔어요. 내가 목사니까 반갑다고 막 그러는데 대화해 보면 이상해. 뭐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하고 막 띄워. 알고 보니 이북 놈이야. 그래서 내가 기관에다 딱 얘기하려니까 비행기 타고 이미 도망가 버렸어.”
— 남과 북에 있는 가족들의 피해도 있었을 텐데요.
“나는 이북에선 역적이고 남한에선 공비였어요. 내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인데 이북 놈들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인민재판하고 총살시켰어. 2년 전에 다시 확인해 보니까 우리 집안 자체를 조회할 수 없다는 거야. 호적 자체를 없애 버렸다는 거야. 그때 내가 ‘이렇게 (귀순) 하지 않았으면 내 부모형제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걸’ 하고 가슴이 엄청 아팠어요. 남한에서도 우리 애들이 교과서에서 내가 묶인 사진을 보고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겠어요. 동네마다 ‘김신조 공비 집이다’라고 해서 이사도 여러 번 다니고, 할 수 없이 이름도 김재현으로 바꿨죠. ‘어떻게 산 것인데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의 증인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내 개인의 문제니까 이 아픈 거는 내 가슴에 품고 떠나는 거죠.”
“핵 있으니 트럼프가 막대기라는 것”
김 목사는 “시간이 지나도 북한의 남한 공산화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며 “지금도 북한은 (대남 전략) 첫 번째가 도발, 두 번째가 대화 유도, 세 번째가 돈 끌어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 점에서 “안보정신이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이 된다”며 “(남북) 협상 대표들이 ‘우리 국민이 죽어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협상에 나서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촉구했다.
— 1·21 사태 같은 북의 도발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보나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폭력과 비폭력 전술을 씁니다. 비폭력은 조직망을 통해 남한 내부를 교란시키고, 폭력은 도발인데 예전부터 하고도 안 했다고 하잖아요. 이제는 도발이 아니라 핵이에요. 핵을 만들기 위해서 각종 도발을 해 왔던 거요.”
— 미국의 선제타격으로 북핵을 제거한다는 말들도 있던데요.
“미국은 국회 중심이란 걸 이북이 압니다. 북한의 정권이라는 거는 백성이 다 죽어도 안 바뀐다 이거야. 독재니까 자기 고모부도 죽이고 백성이 풀 먹고 죽어도 이때까지 온 거요. 그런데 미국은 합법주의 민주국가 아닙니까. 여론사회란 말이요. 그래서 자꾸 이북 마음대로 되는 거요. 모든 건 초기에 딱 잡아 버렸어야 됐거든. 북한은 대화가 안 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양보를 해야 합니다.”
— 지금의 남북대화 국면이 잘못됐다고 보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잘된 거죠. 잘된 건데, 방법상의 문제죠. 지금 보세요. 우리가 하라는 대로 다 하잖아요. 왜 그럴까. 자기네 생각한 게 그대로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 자기네가 많은 시간 들였잖아요. 이제 전략의 완성단계로 들어간 거요. 목적은 남한이야. 핵은 결정적인 거거든. 핵 있으니까 트럼프가 막대기라는 거라. 그러니까 ‘훈련하지 말라’ ‘안 하는 조건부로 한국에서 말하는 대로 듣겠다’ 그 뜻이 뭡니까. 자기네들이 그동안 해 온 것이 그대로 이뤄졌다는 거요. 걔들 전술에 말려들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 이제부터라도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까요.
“6·25 때부터 오늘까지 북한은 스스로 (도발)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계속 희생을 당했고, 사람이 죽었지 않습니까. ‘내 자식이 죽었다’ 생각하고 협상하라는 겁니다. 협상 대표들이 국민의 어느 목숨이라도 자기 자식의 목숨으로 알고 남북협상하라 이겁니다. 개인의 영웅심이나 이름을 날리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협상에 나서야 온전하고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보정신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
— 우리나라에 간첩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모르죠. 줄어드는 게 아니고 계속 커지니까. 점점 늘어나는 게 당연하죠.”
— 북한 대응의 원칙은 뭐라고 보나요.
“국민소득은 늘어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누려야 하는지 아직도 정신이 안 돼 있어. 정신이 문제예요. 안보정신이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 됩니다. 그래서 지금 50년 됐는데도 계속 (북에) 끌려다니는 거요. 너무 철이 없어. 어른들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놨으면 사수해야죠.”
— 김 목사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나 하나 살아가지고 식구가 10명이 됐어요. 내 외손자가 대학교 3학년이고 벌써 다 컸어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이 나라, 자유민주국가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어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 죽이려고 왔다고 해서 딱 나쁜 놈이 됐지만, 그 이후에 50년 동안 내게 지저분한 뭔가가 있었습니까. 대한민국 위해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지켜야 되겠다, 나는 그거 하나로 한길로 걸어왔어요. 나는 지금 죽어도 부끄럽지 않아요. 떳떳하게 죽습니다. 김정은이의 핵이 무서운 게 아니고 친북 빨갱이가 무서운 게 아니오. 그들에게 공격받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더 일하고 싶고 우리나라 더 잘되는 거 보고 싶다 이겁니다. 어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데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안보를 가지고 논쟁을 하거나 이용해선 안 됩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북한군 김신조는 어느덧 온화한 인상의 ‘할아버지 목사’가 돼 있었다. 1982년 이후 국내외 3200여 곳의 교회에서 간증·전도 집회를 열었고 1997년 1월 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성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지금은 은퇴해 가끔 안보 강연에 나가는 것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 목사는 1969년부터 현재까지 2800회 이상의 안보 강연에 나갔다. 그는 인터뷰 당일 오전에도 경찰 모임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1·21 사태 당시 순경으로 재직했던 경찰들이 50년을 맞이해 김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서도 “근래는 50년이 됐는데도 예전보다 활동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김 목사는 “이 (인터뷰) 기회가 감사하다. 이번에 50년을 맞아 모든 것을 정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나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안보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른들의 노력을 잊고 과거를 잊는 개인의 나라가 돼선 안 된다”며 “더 이상 사상 갈등으로 안보가 논쟁거리가 돼서도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 목사는 자녀들 얘기를 할 때 화색을 보였고 자신이 겪은 고난을 회상할 때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대북 문제를 언급할 때는 책상을 치는 등 단호한 군인 정신을 드러냈다.
“맷돌로 갈아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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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1일 김신조 목사가 남방한계선 철책을 넘었던 현장에서 육군 비룡부대 장병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 목사는 1·21 사태 남파가 “100% 희생이었다”며 “살아 온다는 보장도 없었고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사진=조선DB |
“오늘이 50년이니까 내 인생도 이제 다 정리를 했습니다. 지금 일흔여섯 살, 당시는 스물여섯 살 때죠. 124 특수 게릴라 부대를 왜 갔느냐. 목적이 있었어요. 나는 반드시 내 세대에 남한을 공산화한다. 그때는 핵이 아니라 정찰총국만 가지고도 남한을 능히 공산화할 수 있었어요. 100%입니다. 왜 그러느냐. 1968년의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어요. 무기나 기술을 개발할 돈이 없었어요. 자원, 학자, 관광지, 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들보다 배고픈 걸 몰랐죠.”
— 박정희 대통령 제거, 진짜 자신 있었습니까.
“그렇죠. 그때 한국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 그래도 어떻게 31명 정도로 습격을 하려고 했나요.
“100% 희생이죠. 살아 온다는 보장도 없었고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때 보세요. 사람(경계 병력)이 많아도 실수가 있거든. 구멍이 있어. 그리고 김일성이가 판단했을 때 ‘대한민국이 앞으로 더 성장하기 전에 빨리 이걸 제거해야 되겠다’ 한 거죠. 그리고 그때는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 한 명 죽였다고 해서 미국·중국·일본이 크게 항의하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4·19, 5·16으로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혼란이었어요. 오히려 죽여 놓아 보세요. 대한민국 안에서 박수칠 사람 있었을 걸요. 그걸 이용한 겁니다.”
— 이용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청년 대학생들 막 봉기할 때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왔잖아요. 북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남조선 청년 동무들이 미국의 앞잡이 박정희 괴뢰정부를 반대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래 가지고 방송 때리고 《로동신문》 때렸잖아요. 그때 남한 사회 흐름이 그랬다는 거죠. 이북이 박정희 정권의 과도기를 역이용했다는 뜻이지.”
— 청와대 습격에 실패한 뒤 북한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에는 내가 비록 투항했어도 ‘박정희 목 따러 왔다’고 강경하게 나가니까 ‘아, 이북의 영웅’ 이렇게 띄웠대요. 그런데 나중에는 없어지더래. 내가 완전 전향하고 남한에서 일을 하니까 이북이 ‘김신조, 맷돌로 갈아 죽인다’고 했다는 거야. 왜 그러냐. 나 때문에 대한민국에 북한이 다 폭로된 것 아니냐. 6·25 이후 최대 사건이었으니까. 내가 사로잡힘으로써 대한민국에 엄청난 변화가 왔으니까.”
“공비들, 국군보다 예비군이 더 무섭다더라”
1·21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태세는 견고해졌다. 군복무 기간이 연장되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21 사건은 경제개발에 집중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 전면적인 대응책을 불렀다”며 “자주국방력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 예비군 창설, 새마을운동이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추진된 정책이고 모두 대성공했다”고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 “1968년 1월 21일 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김일성의 결정적 패착(敗着)이었다”고 평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한민국에 변화가 왔다는 것인가요.
“북한의 목적은 남한 공산화니까 제가 고민하고 얘기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사람이 중요하니까 군대를 뜯어고쳐라. 강한 군대를 만들어라. 훈련이 강해야 된다. 그때 유격이라는 용어가 나왔어. 또 북한 군대는 당시에 18세부터 28세까지 10년이야. 근데 여기는 30개월이네. 아니 이래 가지고 무슨 나라를 지키느냐 이랬어. 6개월 연장됐지. 탱크 만들고 철책선 만들고 진지 구축하고 말도 못했어요. 제 말 한마디에 막 밀어붙이는 거야. 국민들이 누구 믿고 삽니까. 대통령·정부·군대 믿고 살지요. 근데 31명이 청와대 마당까지 왔다면 국민들이 어떻겠어요? 한국에 살겠어요? 안보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다 끝나는 거죠.”
— 당시 복무하던 군인들이 항의한 적도 있다던데요.
“배는 고픈데 훈련은 세지. 그러니까 강의하는데 뒤통수에 화살이랑 돌멩이 다 날아오는 거죠. 군대 ‘개고생’하고 나오니까 예비군도 만들어 놨네? ‘이 자식아’ 하면서 강단으로 그냥 돌팔매질이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나는 한다’ 이거였어요. 돌멩이 다 맞아도 강의한 겁니다. ‘내가 욕먹어도 좋다’ ‘나중에 김신조를 평가하라’ 이거야. 이 나라를 빨리 건강하게 만들어 놓고 국민들 안보정신 강하게 만들어 놔야 북한이랑 남한 친북(親北) 세력들이 함부로 못한다고 구상했거든. 북한 정찰총국을 좌절시켜야겠다고 했죠.”
— 당시 국가안보의 강화로 북한도 영향을 받았나요.
“그해 울진·삼척에 120명(1968년 11월 북한 무장공비 120명이 강원도 울진·삼척 지구에 침투한 사건)이 나타났잖아요? 그때 서빙고로 7명이 붙잡혀 왔는데 내 후배들인 거야. 내가 그래서 ‘너희 어떻게 된 거야’ 물으니까 ‘선배님, 남조선 국군 아무것도 아닌데 예비군이 더 무서워요’ 이러더라고. 우리 부대는 특수 게릴라전인데 얘네들도 딱 들어와서 강원도 장악했어. 그런데 이 부락 가도 군대가 있고 저 부락 가도 군대가 있다 이 말이야. 그게 향토예비군이야. 무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는 데마다 있으니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거지. 군대는 사기(士氣)거든. 예비군은 지도(地圖)가 필요 없잖아.”
“북, 부모님 총살에 집안 호적도 없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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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 당시 투항 후 군경(軍警)에게 수색을 받고 있는 김신조씨. 김 목사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폭력과 비폭력 전술을 써 왔다”며 “이제 문제는 폭력 도발이 아니라 핵이 됐다. 핵을 만들기 위해서 각종 도발을 해 왔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진=조선DB |
김 목사는 “50년간 나쁜 소리, 힘든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나라”라며 “내가 이북에 김일성을 죽이러 갔으면 지금 살아 있겠는가. 자유민주국가니까 오늘날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현재 그는 자신의 각종 활동 영상들도 압축해 CD 형태로 보관 중이었다. 두 번의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당시 “내가 세상을 떠나면 각 언론사 사회부에 전달하라”고 자녀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1·21 사태를 다룬 영화 제작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의 저작권 등록도 마친 상태였다. 자신의 귀순 50년을 역사에 기록하고 싶은 듯했다.
— 귀순한 뒤 북한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나요.
“있기야 있었죠. 근데 내가 그걸 한 사람인데 걔들한테 죽겠어요? (웃음) 목소리만 들어도 감 잡을 수 있지. ‘바른 대로 대 봐!’ 이러면 쑥 도망가. 주로 전화가 와요. 그래서 전화를 자주 바꾼 거요. 예전에도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포라면서 사람들이 왔어요. 내가 목사니까 반갑다고 막 그러는데 대화해 보면 이상해. 뭐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하고 막 띄워. 알고 보니 이북 놈이야. 그래서 내가 기관에다 딱 얘기하려니까 비행기 타고 이미 도망가 버렸어.”
— 남과 북에 있는 가족들의 피해도 있었을 텐데요.
“나는 이북에선 역적이고 남한에선 공비였어요. 내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인데 이북 놈들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인민재판하고 총살시켰어. 2년 전에 다시 확인해 보니까 우리 집안 자체를 조회할 수 없다는 거야. 호적 자체를 없애 버렸다는 거야. 그때 내가 ‘이렇게 (귀순) 하지 않았으면 내 부모형제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걸’ 하고 가슴이 엄청 아팠어요. 남한에서도 우리 애들이 교과서에서 내가 묶인 사진을 보고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겠어요. 동네마다 ‘김신조 공비 집이다’라고 해서 이사도 여러 번 다니고, 할 수 없이 이름도 김재현으로 바꿨죠. ‘어떻게 산 것인데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의 증인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내 개인의 문제니까 이 아픈 거는 내 가슴에 품고 떠나는 거죠.”
김 목사는 “시간이 지나도 북한의 남한 공산화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며 “지금도 북한은 (대남 전략) 첫 번째가 도발, 두 번째가 대화 유도, 세 번째가 돈 끌어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 점에서 “안보정신이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이 된다”며 “(남북) 협상 대표들이 ‘우리 국민이 죽어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협상에 나서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촉구했다.
— 1·21 사태 같은 북의 도발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보나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폭력과 비폭력 전술을 씁니다. 비폭력은 조직망을 통해 남한 내부를 교란시키고, 폭력은 도발인데 예전부터 하고도 안 했다고 하잖아요. 이제는 도발이 아니라 핵이에요. 핵을 만들기 위해서 각종 도발을 해 왔던 거요.”
— 미국의 선제타격으로 북핵을 제거한다는 말들도 있던데요.
“미국은 국회 중심이란 걸 이북이 압니다. 북한의 정권이라는 거는 백성이 다 죽어도 안 바뀐다 이거야. 독재니까 자기 고모부도 죽이고 백성이 풀 먹고 죽어도 이때까지 온 거요. 그런데 미국은 합법주의 민주국가 아닙니까. 여론사회란 말이요. 그래서 자꾸 이북 마음대로 되는 거요. 모든 건 초기에 딱 잡아 버렸어야 됐거든. 북한은 대화가 안 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양보를 해야 합니다.”
— 지금의 남북대화 국면이 잘못됐다고 보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잘된 거죠. 잘된 건데, 방법상의 문제죠. 지금 보세요. 우리가 하라는 대로 다 하잖아요. 왜 그럴까. 자기네 생각한 게 그대로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 자기네가 많은 시간 들였잖아요. 이제 전략의 완성단계로 들어간 거요. 목적은 남한이야. 핵은 결정적인 거거든. 핵 있으니까 트럼프가 막대기라는 거라. 그러니까 ‘훈련하지 말라’ ‘안 하는 조건부로 한국에서 말하는 대로 듣겠다’ 그 뜻이 뭡니까. 자기네들이 그동안 해 온 것이 그대로 이뤄졌다는 거요. 걔들 전술에 말려들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 이제부터라도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까요.
“6·25 때부터 오늘까지 북한은 스스로 (도발)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계속 희생을 당했고, 사람이 죽었지 않습니까. ‘내 자식이 죽었다’ 생각하고 협상하라는 겁니다. 협상 대표들이 국민의 어느 목숨이라도 자기 자식의 목숨으로 알고 남북협상하라 이겁니다. 개인의 영웅심이나 이름을 날리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협상에 나서야 온전하고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보정신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
— 우리나라에 간첩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모르죠. 줄어드는 게 아니고 계속 커지니까. 점점 늘어나는 게 당연하죠.”
— 북한 대응의 원칙은 뭐라고 보나요.
“국민소득은 늘어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누려야 하는지 아직도 정신이 안 돼 있어. 정신이 문제예요. 안보정신이 없으면 좋은 장비도 고철 됩니다. 그래서 지금 50년 됐는데도 계속 (북에) 끌려다니는 거요. 너무 철이 없어. 어른들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놨으면 사수해야죠.”
— 김 목사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나 하나 살아가지고 식구가 10명이 됐어요. 내 외손자가 대학교 3학년이고 벌써 다 컸어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이 나라, 자유민주국가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어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 죽이려고 왔다고 해서 딱 나쁜 놈이 됐지만, 그 이후에 50년 동안 내게 지저분한 뭔가가 있었습니까. 대한민국 위해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지켜야 되겠다, 나는 그거 하나로 한길로 걸어왔어요. 나는 지금 죽어도 부끄럽지 않아요. 떳떳하게 죽습니다. 김정은이의 핵이 무서운 게 아니고 친북 빨갱이가 무서운 게 아니오. 그들에게 공격받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더 일하고 싶고 우리나라 더 잘되는 거 보고 싶다 이겁니다. 어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데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안보를 가지고 논쟁을 하거나 이용해선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