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 소설가 한강의 6·25 인식은 이승만·트루먼의 6·25 인식과 정반대
⊙ 문재인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나온 ‘한국전은 내전(內戰)이었다’는 말은 결코 실언(失言)이 아니다
⊙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아…. 이런 가치관을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될 것
⊙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
⊙ 문재인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나온 ‘한국전은 내전(內戰)이었다’는 말은 결코 실언(失言)이 아니다
⊙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아…. 이런 가치관을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될 것
⊙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미국 뉴욕 UN총회에서 연설하면서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사진=뉴시스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전쟁은 내전(內戰)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친북(親北) 세력이나 수정주의 학자들 입을 통하여서도 요사이는 듣기 힘든 용어이다. 냉전(冷戰)이 끝난 이후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폐기된 말이다. 그런데 지난 9월 그 말을 한 사람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장소는 유엔총회장이었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압도적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지휘하는 국군과 국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돌멩이와 막대기까지 들고나와’ 총력전으로 저항하는 사이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이 원군(援軍)으로 도착, 전세(戰勢)를 역전시켰다. 패망 직전에 몰렸던 김일성은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살아났다. 유엔은 북한군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그 유엔총회장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과 국제전으로 규정한 것이다. 내전과 국제전을 연결시키는 논리는 한국전을 한반도 내의 좌우 대결이 확대된 것으로 해석, 국내 문제에 개입, 국제전으로 만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된 김일성의 남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입에 면죄부(免罪符)를 주려는 억지이다. 냉전이 서방 세계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 문서가 공개되면서 내전설은 사라졌는데 한국 대통령에 의하여 유엔총회장에서 부활한 것이다.
공산주의 팽창 저지한 한국전쟁
미국 조지아 대학의 윌리엄 스톡 교수가 쓴 《한국전쟁-국제사》는 이 전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리한 명작(名作)이다.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은 한국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국제정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격에 서방 진영의 반격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큰 규모의 비극이 일어났을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과감하게 대응, 자유세계를 깨어나게 만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펴도록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과 미군 등 자유진영이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 최초의 군사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면서 미국 편에 서고 독일도 재무장하여 NATO에 편입되어 유럽을 방어하는 데 중심이 된다. 미국은 일시 포기하였던 대만을 지켜주게 되고, 국방비를 세 배로 증액,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경쟁에 나서서 그 40년 뒤 소련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스탈린은 독자 노선을 선언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침공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한국전에 미국이 파병하는 것을 보고는 취소하였다. 대만·유고는 한국인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셈이다.
냉전의 승리는 한국전에서 예약된 것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들이 클린턴·오바마 등 미국 지도부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공치사를 받아야 할 한국 대통령이 세계를 구한 한국인의 위대한 성전(聖戰)을 내전으로 폄하한 것이다. 그것도 유엔군을 보내준 유엔총회장에서.
공산 측, 전쟁을 내전으로 위장하려 해
스톡 교수는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이 한국전의 성격을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한 계급투쟁적 내전’으로 설정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잘 먹혀든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북한군이 기습하면 남한에서 좌익들이 봉기, 이승만 정부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한편,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에 탱크·야포·전투기 등을 지원하고 작전계획까지 짜주었다. 마오쩌둥은 중공군에 소속되었던 수만 명의 조선인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3개 사단을 만들게 하였다. 소련군 대위 출신이고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본 끝에 지도자로 간택된 김일성은 철저하게 소련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였다.
최근 한강이란 소설가는 《뉴욕타임스》에 쓴 글에서 한국전을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했는데, 이는 반만 맞는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지만 이승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전쟁 발발 1년 전 5만의 미군을 철수시켰을 뿐 아니라 6·25 남침 직전까지도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거부, 전투기도 탱크도 없는 군대로 만들어 놓았다.
스탈린과 김일성과 모택동은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이 남침 허가를 받으려 하자 이승만이 북침(北侵)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남파(南派) 게릴라전의 강화를 권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그해 약 1300명의 무장 게릴라들을 남파시켜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게릴라들과 합동작전을 펴게 하였지만 한국군의 진압 작전에 눌려 버렸다.
스탈린은 소련군 장교들을 시켜 북한군의 남침 작전계획을 짜주고는 장교들을 전선에서 철수시켰다. 김일성은 북침에 대한 반격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자원자들이 북한을 도우러 간 것으로 위장하였다.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이런 술책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트루먼과 이승만, 넘어간 사람은 문재인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67년이 흘러. 북핵(北核) 위기에 당면한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가 있다면 두 대통령의 한국전 지도 방침일 것이다.
미국은 속지 않았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국 현지 시각으로 1950년 6월 24일 밤에 고향인 미주리주(州) 인디펜던스의 자택에서 딘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남침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애치슨은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 위험한 야간 비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권하였다. 다음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트루먼은 생각에 잠겼다.
〈자유세계의 저항을 받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으로 밀고 들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작은 나라들은 이웃한 더 강한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공격에 맞설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에 저항하지 않고 이 침략행위를 내버려 둔다면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슷한 경우가 제2차 대전으로 연결되었듯이.〉
워싱턴 내셔널공항에서 내려 영빈관으로 가는 차중에서 트루먼은 “하느님께 맹세코 그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트루먼은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 내부의 분쟁, 즉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끄는 국제공산주의 진영의 침략전으로 본 것이다. 트루먼이 주재한 6월 26일 밤 대책회의에서 국무부, 국방부, 합참의 최고위 간부들은 소련이 사주(使嗾)한 전쟁이므로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어느 누구도 남북 간의 내전이므로 개입을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은 남침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지만 미국은 속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2017년의 세계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그것도 침략전의 피해국 대통령이, 그것도 유엔에서 국제적 침략 전쟁을 내전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승만, 김일성 아니라 스탈린 상대
그렇다면 이승만은 남침을 어떻게 보았나?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논문의 저자(著者)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보고를 받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駐韓) 미국대사 무초를 불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정옥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통령이 한 말은 한국의 대응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승만은 한국군에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한데, 그중에서 소총이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또 총력전 의지를 피력했다. 즉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전쟁기간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은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
이승만은 이어서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침략당한 나라의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지 김일성이 단독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침공하였다는 내전적 시각을 찾을 수 없다. 내전설이나 대리전설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동격(同格)에 놓음으로써 도덕적 판단을 고의로 기피하거나 침략자를 비호하기 위하여 구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남침을 당한 이승만이 보지 못하였던 그 무엇을 보고 67년이 지나서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은 연설에서 김일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스탈린을 주로 공격하였다. 김일성이 스탈린의 앞잡이라는 인식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김일성 대 한민족’ 구도
1950년 7월 19일 이승만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는,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라고 위로했다.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이라면서 〈소련의 후원을 받은 북한 정권이 6월 25일 새벽, 한국군을 일제히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38선을 자유 대한과 노예 북한 사이의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습니다〉고 썼다. 이어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악성(惡性) 암세포들을 이번 기회에 영원히 도려내야 합니다〉면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고 못 박았다.
두 전쟁 지도자, 트루먼과 이승만은 이 한국전을, 공산제국주의자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도전이고 이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이라고 정의(定義)하였다.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김일성 집단의 한민족에 대한 반란으로 단정하였다. ‘폭압세력 대(對) 자유세력’ ‘소수의 반역세력 대 한민족 전체’의 구도로 설정한 것이다.
한미동맹이 없었던 시기에 이승만 정권이 소련-북한-중공이 합세한 압도적 기습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한국인의 결사(決死)항전 의지 덕분이다. 국군은 후퇴는 할망정 소부대 단위조차 항복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돌멩이와 막대기로도 싸우겠다’면서 총력전의 의지를 확실히 한 뒤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지도자, 국군, 국민의 단결이 가능하였던 데는 이승만의 카리스마와 자유를 맛본 한국인의 반공(反共)정신, 공산주의를 체험한 월남자들, 특히 군 장교단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 미국이 참전할 것이란 기대, 숙군(肅軍)으로 군내의 남로당 세력이 제거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미군이 오산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하는 7월 5일까지의 10일간 한국인은 소련, 중국, 북한 등 유라시아 대륙의 공산제국과 홀로 맞서 싸웠다.
“마셜 플랜 이상의 성공”
젊었을 때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서 월남전을 비판하는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데이비드 핼버스탐 기자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죽기 전 《가장 추운 겨울》이란 책의 원고를 끝냈다. 사후(死後) 출판된 이 책에서 그는 한국전에서 자유세계가 공산 침략에 맞선 것은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을 구한 것 이상의 성공이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한국전으로 성장한 한국군 장교단이 정권을 잡은 뒤 경제발전까지 성공시킨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자유세계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을 선택한 것은 내전(civil war)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미국과 서구의 다른 나라에 있어서 이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침략전쟁이었다. 이는 서구가 히틀러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2차 대전으로 이어진 점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중국·소련·북한에는 이게 놀라운 관점이었다. 그들은 남침이 한국인들 사이의 결판이 나지 않은 내전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국군이 무너지고, 이승만이 해외 망명이라도 했다면 김일성은 내전 종식과 민족해방을 선언하고 응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초전에서 버티어냄으로써 내전으로 위장한 침략전쟁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유엔군의 파병이 가능해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탈취하였다면 유엔군이 개입할 명분은 사라지고 김일성은 신라의 문무왕, 고려의 왕건을 잇는 통일의 지도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피력한, ‘내전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간 것이 한국전이라는 시각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개혁하려던 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들어 있다.
계급사관으로 써진 이들 교과서는 6·25 직전 38도선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고 강조, 전쟁 책임을 희석시킨 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고 썼다(천재교육). 한 교과서는 중공군의 불법 개입을 ‘중국군 참전’이라 적었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고 썼다. ‘감행’은 용감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생명줄인 한미동맹을 만든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휴전 회담 자체가 결렬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비방하였다. 미래엔 교과서는 “남북의 두 지도자 이승만과 김일성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고 썼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 정권에 불리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기계적 양비론(兩非論)으로 물타기를 한다. 학생들에게 생길 정의감과 선악(善惡) 및 피아(彼我) 분별력과 애국심을 애초에 말살하기 위한 교과서로 보인다. 내전설을 믿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교과서를 바로잡는 데 반대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내전론’은 대한민국 부정과 연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국전을 설명하면서 피해만 강조하였을 뿐 전쟁범죄자에 대한 비판은 물론 거명(擧名)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란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이 흥남에서 미군 철수선을 탄 이유가 ‘잠시 피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이산가족을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이산가족이 생긴 것이니 간단하게 ‘남침 전쟁의 피해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과 북한을 책임자로 특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복잡한 설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을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또한 전쟁책임자들을 비호하는 간접 화법이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지 냉전 구조가 전쟁을 일으킬 순 없다. 그것은 조건의 하나이지 책임자가 아니다. 교통사고가 나는 것은 운전자의 책임이지 ‘자동차 문화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북한의 전쟁 책임을 비호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대한민국의 헌법 및 정체성(正體性)과 맞지 않다는 의심을 정당화한다.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대하여 내전적 시각을 가지면 선악 및 피아 분별력이 마비되어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 미국에 대한 감사, 조국에 대한 사랑이 무디어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에서 이런 감정이 느껴진다. 이념은 감정이라고도 한다.
문재인 역사인식의 논리적 귀결
대한민국의 존립을 보장하는 두 가지 이념적 기초는,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정통국가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민족사적 정통성과 반공자유민주적 정체성이다. 이 정통성과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피, 땀, 눈물로 형성된 불가침(不可侵)의 성역(聖域)이다. 물론 헌법 개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국체(國體)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는 것과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행위는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의 근거는 정부 수립 과정이 총선-국회구성-헌법제정-정부수립의 과정을 거쳐 민주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수립되었으므로 유엔총회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공인(公認)한 것이다. 북한 정권은 찬반 투표가 불가능한 공산당식의 원천적 부정선거를 통하여 세워졌기에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민주투사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러한 민주적 정통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말하는 ‘민주’가 과연 헌법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인지, 통진당식의 ‘진보적 민주주의’인지 헷갈린다.
문 대통령은, 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이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한 국민 참여 없이 세워진 임시정부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선거를 하지 않은 그런 정부는 형식적 선거라도 치른, 그리고 주권, 영토, 국민의 형식적 조건을 갖춘 북한 정권보다도 낮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존립 근거를 흔든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인가, 아니면 임시 국가의 임시 대통령인가?
유일 합법성·정통성 포기하려나?
1950년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 정권의 침략 행위는 문재인식 역사관으로는 어차피 정리되어야 할 임시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임시 정권의 공격이므로 굳이 선악 구분을 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남침보다는 ‘내전’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이는 남북 대결에서 이념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민족사적 정통성의 대결에서 북한에 굽히고 들어가는 자세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챔피언 국가는 누구인가를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원수(元首)가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성과 유일 정통성을 포기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 정권을 민족사의 정통국가로 올려주고,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가연합 혹은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방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국가연합은 대한민국 헌법이 국가임을 부정하는 북한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헌법 위반이고 낮은 단계 연방제는 높은 단계 연방제, 즉 북한 노동당의 규약이 선언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로 가는 첫 단계이다. 이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한다’는 6·15선언 제2항(이것도 헌법 위반)의 범위도 넘는 위헌적 발상이다.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을 양심의 자유 영역에 묶어두지 않고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된다. 그러한 경향이 이미 보인다. 이 정부의 정책 노선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헌법체계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들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 1948년 건국 부정
2. 국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한 국군의 날 변경 움직임
3.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국제전이다’는 유엔 연설
4. 국가반역자 윤이상 흠모(독일 묘소에 부인이 참례 등)
5.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만이 민주정부라는 시각
6. 반(反)체제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강제
7. 결론이 나 있는 광주사태 발포명령자 및 헬기 사격 의혹 재수사 지시
8.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자고 하고, 한미동맹 해체를 거론한 특보 방치
9. 전술핵 재배치, 핵무장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
10.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위험하다고 단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짓고 있는 신고리 5, 6호기까지 공사중단 시키는 과정에서 관련 법규 위반. 원전(原電)이 폐기되면 자위적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사라진다.
11. 좌파 인사로 하여금 국정원 개혁을 주도하게 만들어 안보기구로서 사실상 폐기 처분
12. 박근혜 정부의 좌편향 국사 교과서 개혁을 중단시키고 개혁을 ‘친일 행위’에 비유하여 적폐라고 규정
13.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전대협, 주사파, 친북 성향’이라 공격해도 논리적 해명을 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사실이라면?
14.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연설에서 자신이 선거로 당선된 점을 무시하고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것처럼 설명
15. 북한 정권과 종북(從北) 세력에 엄정한 태도를 취해온 김관진 전 안보실장을 댓글 사건 연루 혐의로 출국금지
16.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과 핵방어 훈련에는 무관심하면서,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허가 사항으로 지정
17. 북한을 흡수통일하거나 인위적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공언(公言)
대한민국과 문재인의 충돌
이렇게 적어 나가 보면 이념적 일관성이 느껴진다.
첫째, 대한민국엔 불리하고, 북한 정권엔 유리하다.
둘째, 대한민국 수호 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대한민국 반대 세력에 대한 동정심 혹은 우호감
셋째, 국법, 국군, 국정원, 국가, 애국 세력에 대한 적대감 혹은 경멸
넷째, 중국엔 위축, 미국에는 비판적
이렇게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아, 계급사관(민중사관)으로 써진 좌편향 교과서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視覺)과 맥락을 같이하는구나”라는 느낌이 온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문재인 정부는 충돌 코스에 진입하였다고 봐야 한다. 1950년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열흘간 소련, 중국, 북한의 3대 공산집단을 상대로 홀로 맞서 세계를 구한 한국의 위업을 무효로 돌리는 ‘내전’이란 말은 실언(失言)이 아니라 그의 사고체계와 가치관 및 역사관을 알게 하는 키워드, 즉 진담(眞談)임을 알 수 있다.
유엔총회에서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압도적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지휘하는 국군과 국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돌멩이와 막대기까지 들고나와’ 총력전으로 저항하는 사이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이 원군(援軍)으로 도착, 전세(戰勢)를 역전시켰다. 패망 직전에 몰렸던 김일성은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살아났다. 유엔은 북한군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그 유엔총회장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과 국제전으로 규정한 것이다. 내전과 국제전을 연결시키는 논리는 한국전을 한반도 내의 좌우 대결이 확대된 것으로 해석, 국내 문제에 개입, 국제전으로 만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된 김일성의 남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입에 면죄부(免罪符)를 주려는 억지이다. 냉전이 서방 세계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 문서가 공개되면서 내전설은 사라졌는데 한국 대통령에 의하여 유엔총회장에서 부활한 것이다.
공산주의 팽창 저지한 한국전쟁
미국 조지아 대학의 윌리엄 스톡 교수가 쓴 《한국전쟁-국제사》는 이 전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리한 명작(名作)이다.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은 한국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국제정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격에 서방 진영의 반격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큰 규모의 비극이 일어났을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과감하게 대응, 자유세계를 깨어나게 만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펴도록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과 미군 등 자유진영이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 최초의 군사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면서 미국 편에 서고 독일도 재무장하여 NATO에 편입되어 유럽을 방어하는 데 중심이 된다. 미국은 일시 포기하였던 대만을 지켜주게 되고, 국방비를 세 배로 증액,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경쟁에 나서서 그 40년 뒤 소련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스탈린은 독자 노선을 선언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침공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한국전에 미국이 파병하는 것을 보고는 취소하였다. 대만·유고는 한국인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셈이다.
냉전의 승리는 한국전에서 예약된 것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들이 클린턴·오바마 등 미국 지도부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공치사를 받아야 할 한국 대통령이 세계를 구한 한국인의 위대한 성전(聖戰)을 내전으로 폄하한 것이다. 그것도 유엔군을 보내준 유엔총회장에서.
공산 측, 전쟁을 내전으로 위장하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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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 스탈린에게 남침전쟁을 승인해 달라고 졸랐다. |
스탈린은 북한군에 탱크·야포·전투기 등을 지원하고 작전계획까지 짜주었다. 마오쩌둥은 중공군에 소속되었던 수만 명의 조선인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3개 사단을 만들게 하였다. 소련군 대위 출신이고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본 끝에 지도자로 간택된 김일성은 철저하게 소련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였다.
최근 한강이란 소설가는 《뉴욕타임스》에 쓴 글에서 한국전을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했는데, 이는 반만 맞는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지만 이승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전쟁 발발 1년 전 5만의 미군을 철수시켰을 뿐 아니라 6·25 남침 직전까지도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거부, 전투기도 탱크도 없는 군대로 만들어 놓았다.
스탈린과 김일성과 모택동은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이 남침 허가를 받으려 하자 이승만이 북침(北侵)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남파(南派) 게릴라전의 강화를 권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그해 약 1300명의 무장 게릴라들을 남파시켜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게릴라들과 합동작전을 펴게 하였지만 한국군의 진압 작전에 눌려 버렸다.
스탈린은 소련군 장교들을 시켜 북한군의 남침 작전계획을 짜주고는 장교들을 전선에서 철수시켰다. 김일성은 북침에 대한 반격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자원자들이 북한을 도우러 간 것으로 위장하였다.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이런 술책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트루먼과 이승만, 넘어간 사람은 문재인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67년이 흘러. 북핵(北核) 위기에 당면한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가 있다면 두 대통령의 한국전 지도 방침일 것이다.
미국은 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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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미국 대통령. |
〈자유세계의 저항을 받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으로 밀고 들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작은 나라들은 이웃한 더 강한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공격에 맞설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에 저항하지 않고 이 침략행위를 내버려 둔다면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슷한 경우가 제2차 대전으로 연결되었듯이.〉
워싱턴 내셔널공항에서 내려 영빈관으로 가는 차중에서 트루먼은 “하느님께 맹세코 그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트루먼은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 내부의 분쟁, 즉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끄는 국제공산주의 진영의 침략전으로 본 것이다. 트루먼이 주재한 6월 26일 밤 대책회의에서 국무부, 국방부, 합참의 최고위 간부들은 소련이 사주(使嗾)한 전쟁이므로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어느 누구도 남북 간의 내전이므로 개입을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은 남침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지만 미국은 속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2017년의 세계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그것도 침략전의 피해국 대통령이, 그것도 유엔에서 국제적 침략 전쟁을 내전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남침을 어떻게 보았나?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논문의 저자(著者)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보고를 받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駐韓) 미국대사 무초를 불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정옥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통령이 한 말은 한국의 대응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승만은 한국군에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한데, 그중에서 소총이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또 총력전 의지를 피력했다. 즉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전쟁기간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은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
이승만은 이어서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침략당한 나라의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지 김일성이 단독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침공하였다는 내전적 시각을 찾을 수 없다. 내전설이나 대리전설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동격(同格)에 놓음으로써 도덕적 판단을 고의로 기피하거나 침략자를 비호하기 위하여 구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남침을 당한 이승만이 보지 못하였던 그 무엇을 보고 67년이 지나서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은 연설에서 김일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스탈린을 주로 공격하였다. 김일성이 스탈린의 앞잡이라는 인식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김일성 대 한민족’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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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일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스미스부대는 패했지만, 미국은 결국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했다. |
그는,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라고 위로했다.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이라면서 〈소련의 후원을 받은 북한 정권이 6월 25일 새벽, 한국군을 일제히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38선을 자유 대한과 노예 북한 사이의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습니다〉고 썼다. 이어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악성(惡性) 암세포들을 이번 기회에 영원히 도려내야 합니다〉면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고 못 박았다.
두 전쟁 지도자, 트루먼과 이승만은 이 한국전을, 공산제국주의자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도전이고 이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이라고 정의(定義)하였다.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김일성 집단의 한민족에 대한 반란으로 단정하였다. ‘폭압세력 대(對) 자유세력’ ‘소수의 반역세력 대 한민족 전체’의 구도로 설정한 것이다.
한미동맹이 없었던 시기에 이승만 정권이 소련-북한-중공이 합세한 압도적 기습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한국인의 결사(決死)항전 의지 덕분이다. 국군은 후퇴는 할망정 소부대 단위조차 항복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돌멩이와 막대기로도 싸우겠다’면서 총력전의 의지를 확실히 한 뒤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지도자, 국군, 국민의 단결이 가능하였던 데는 이승만의 카리스마와 자유를 맛본 한국인의 반공(反共)정신, 공산주의를 체험한 월남자들, 특히 군 장교단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 미국이 참전할 것이란 기대, 숙군(肅軍)으로 군내의 남로당 세력이 제거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미군이 오산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하는 7월 5일까지의 10일간 한국인은 소련, 중국, 북한 등 유라시아 대륙의 공산제국과 홀로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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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운 겨울》의 저자 핼버스탐 기자. |
〈미국과 서구의 다른 나라에 있어서 이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침략전쟁이었다. 이는 서구가 히틀러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2차 대전으로 이어진 점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중국·소련·북한에는 이게 놀라운 관점이었다. 그들은 남침이 한국인들 사이의 결판이 나지 않은 내전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국군이 무너지고, 이승만이 해외 망명이라도 했다면 김일성은 내전 종식과 민족해방을 선언하고 응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초전에서 버티어냄으로써 내전으로 위장한 침략전쟁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유엔군의 파병이 가능해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탈취하였다면 유엔군이 개입할 명분은 사라지고 김일성은 신라의 문무왕, 고려의 왕건을 잇는 통일의 지도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피력한, ‘내전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간 것이 한국전이라는 시각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개혁하려던 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들어 있다.
계급사관으로 써진 이들 교과서는 6·25 직전 38도선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고 강조, 전쟁 책임을 희석시킨 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고 썼다(천재교육). 한 교과서는 중공군의 불법 개입을 ‘중국군 참전’이라 적었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고 썼다. ‘감행’은 용감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생명줄인 한미동맹을 만든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휴전 회담 자체가 결렬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비방하였다. 미래엔 교과서는 “남북의 두 지도자 이승만과 김일성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고 썼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 정권에 불리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기계적 양비론(兩非論)으로 물타기를 한다. 학생들에게 생길 정의감과 선악(善惡) 및 피아(彼我) 분별력과 애국심을 애초에 말살하기 위한 교과서로 보인다. 내전설을 믿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교과서를 바로잡는 데 반대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내전론’은 대한민국 부정과 연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국전을 설명하면서 피해만 강조하였을 뿐 전쟁범죄자에 대한 비판은 물론 거명(擧名)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란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이 흥남에서 미군 철수선을 탄 이유가 ‘잠시 피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이산가족을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이산가족이 생긴 것이니 간단하게 ‘남침 전쟁의 피해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과 북한을 책임자로 특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복잡한 설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을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또한 전쟁책임자들을 비호하는 간접 화법이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지 냉전 구조가 전쟁을 일으킬 순 없다. 그것은 조건의 하나이지 책임자가 아니다. 교통사고가 나는 것은 운전자의 책임이지 ‘자동차 문화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북한의 전쟁 책임을 비호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대한민국의 헌법 및 정체성(正體性)과 맞지 않다는 의심을 정당화한다.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대하여 내전적 시각을 가지면 선악 및 피아 분별력이 마비되어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 미국에 대한 감사, 조국에 대한 사랑이 무디어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에서 이런 감정이 느껴진다. 이념은 감정이라고도 한다.
문재인 역사인식의 논리적 귀결
대한민국의 존립을 보장하는 두 가지 이념적 기초는,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정통국가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민족사적 정통성과 반공자유민주적 정체성이다. 이 정통성과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피, 땀, 눈물로 형성된 불가침(不可侵)의 성역(聖域)이다. 물론 헌법 개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국체(國體)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는 것과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행위는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의 근거는 정부 수립 과정이 총선-국회구성-헌법제정-정부수립의 과정을 거쳐 민주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수립되었으므로 유엔총회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공인(公認)한 것이다. 북한 정권은 찬반 투표가 불가능한 공산당식의 원천적 부정선거를 통하여 세워졌기에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민주투사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러한 민주적 정통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말하는 ‘민주’가 과연 헌법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인지, 통진당식의 ‘진보적 민주주의’인지 헷갈린다.
문 대통령은, 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이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한 국민 참여 없이 세워진 임시정부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선거를 하지 않은 그런 정부는 형식적 선거라도 치른, 그리고 주권, 영토, 국민의 형식적 조건을 갖춘 북한 정권보다도 낮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존립 근거를 흔든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인가, 아니면 임시 국가의 임시 대통령인가?
유일 합법성·정통성 포기하려나?
1950년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 정권의 침략 행위는 문재인식 역사관으로는 어차피 정리되어야 할 임시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임시 정권의 공격이므로 굳이 선악 구분을 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남침보다는 ‘내전’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이는 남북 대결에서 이념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민족사적 정통성의 대결에서 북한에 굽히고 들어가는 자세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챔피언 국가는 누구인가를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원수(元首)가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성과 유일 정통성을 포기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 정권을 민족사의 정통국가로 올려주고,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가연합 혹은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방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국가연합은 대한민국 헌법이 국가임을 부정하는 북한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헌법 위반이고 낮은 단계 연방제는 높은 단계 연방제, 즉 북한 노동당의 규약이 선언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로 가는 첫 단계이다. 이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한다’는 6·15선언 제2항(이것도 헌법 위반)의 범위도 넘는 위헌적 발상이다.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을 양심의 자유 영역에 묶어두지 않고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된다. 그러한 경향이 이미 보인다. 이 정부의 정책 노선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헌법체계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들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 1948년 건국 부정
2. 국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한 국군의 날 변경 움직임
3.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국제전이다’는 유엔 연설
4. 국가반역자 윤이상 흠모(독일 묘소에 부인이 참례 등)
5.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만이 민주정부라는 시각
6. 반(反)체제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강제
7. 결론이 나 있는 광주사태 발포명령자 및 헬기 사격 의혹 재수사 지시
8.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자고 하고, 한미동맹 해체를 거론한 특보 방치
9. 전술핵 재배치, 핵무장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
10.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위험하다고 단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짓고 있는 신고리 5, 6호기까지 공사중단 시키는 과정에서 관련 법규 위반. 원전(原電)이 폐기되면 자위적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사라진다.
11. 좌파 인사로 하여금 국정원 개혁을 주도하게 만들어 안보기구로서 사실상 폐기 처분
12. 박근혜 정부의 좌편향 국사 교과서 개혁을 중단시키고 개혁을 ‘친일 행위’에 비유하여 적폐라고 규정
13.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전대협, 주사파, 친북 성향’이라 공격해도 논리적 해명을 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사실이라면?
14.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연설에서 자신이 선거로 당선된 점을 무시하고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것처럼 설명
15. 북한 정권과 종북(從北) 세력에 엄정한 태도를 취해온 김관진 전 안보실장을 댓글 사건 연루 혐의로 출국금지
16.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과 핵방어 훈련에는 무관심하면서,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허가 사항으로 지정
17. 북한을 흡수통일하거나 인위적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공언(公言)
대한민국과 문재인의 충돌
이렇게 적어 나가 보면 이념적 일관성이 느껴진다.
첫째, 대한민국엔 불리하고, 북한 정권엔 유리하다.
둘째, 대한민국 수호 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대한민국 반대 세력에 대한 동정심 혹은 우호감
셋째, 국법, 국군, 국정원, 국가, 애국 세력에 대한 적대감 혹은 경멸
넷째, 중국엔 위축, 미국에는 비판적
이렇게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아, 계급사관(민중사관)으로 써진 좌편향 교과서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視覺)과 맥락을 같이하는구나”라는 느낌이 온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문재인 정부는 충돌 코스에 진입하였다고 봐야 한다. 1950년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열흘간 소련, 중국, 북한의 3대 공산집단을 상대로 홀로 맞서 세계를 구한 한국의 위업을 무효로 돌리는 ‘내전’이란 말은 실언(失言)이 아니라 그의 사고체계와 가치관 및 역사관을 알게 하는 키워드, 즉 진담(眞談)임을 알 수 있다.
유엔총회에서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