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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덕분에 대한민국이 살았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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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당시 미국 해병1사단은 혹한 속에서 영웅적으로 분투하여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방미(訪美)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콴티코시에 있는 해병대 국립박물관 내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67년 전 미(美)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다”면서 “10여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고, 빅토리아호에 오른 피란민 중에 제 부모님도 계셨다”고 말했다. 언론은 문 대통령의 연설이 이날 행사에 참석한 미국 측 인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에드윈 P.호이트는 미국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를 두고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하지만 ‘후퇴작전’이라는 표현에 대해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당시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고 명령했었다.
 
 
  중·동부전선에서 중공군 12만명 남하 저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1사단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 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동상(凍傷) 환자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했던 것처럼, 미 해병1사단의 감투(敢鬪) 덕분에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 그리고 10여만 명의 피란민들이 철수(흥남철수)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를 비롯해 흥남에서 철수한 피란민들만을 살린 게 아니었다. 장진호 전투는 대한민국을 살렸다. 미 해병 1사단과 싸우면서 중공군 9병단은 2만5000명의 전사자와 1만2000명의 부상자를 냈다. 병단의 전투력이 사실상 소진된 것이다. 원래 9병단은 개마고원에서 미 해병 1사단을 격파한 후 중·동부전선에서 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당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중공군 13병단에 밀려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 내주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37도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만일 중·동부전선에서까지 12만명의 중공군 9병단이 쳐 내려왔으면 유엔군은 전면적으로 패퇴(敗退)해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김씨왕조의 노예로 살고 있을 것이다. 미 해병1사단의 감투가 한반도의 운명,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영웅과 비겁자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라는 책을 보면 장진호 전투의 처절한 실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지퍼가 얼어붙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중공군의 총검에 찔려 죽은 해병대원들이 있는가 하면, 추위를 피해 참호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음덩이가 되어 미군에게 발견된 중공군도 여럿 있었다. 얼어붙은 시신들을 실은 트럭에서는 피가 흐르다가 고드름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혹독한 상황 아래서 해병대원들은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윌리엄 G.윈드리치 하사는 수류탄 파편에 머리를 다치고도 후송을 거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다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위생병이 다가오자 손을 저으며 “아직 아냐”라고 말했다. 몇 분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구호소 텐트 안에 있던 부상병들은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비틀거리면서도 총을 들고 나가 싸웠다. 그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 혹독한 전장에서 꽃핀 해병들의 전우애에 대해 역사가 린 몬트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력이 기강이나 무기의 성능보다 다른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있는데,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전투원이 자기 옆의 동료를 끝까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전쟁은 잔혹한 것이지만 사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타심만큼 멋진 것은 이 세상에 없지요. 사소한 것들이 그 순간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모든 병사가 영웅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키가 180cm나 되는 텍사스 출신의 한 병사는 이동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드러누워 버렸다. “난 할 만큼 했어요. 더 이상 안 가요”라면서…. 동료들이 그를 끌다시피 하면서 2km를 이동했다. 구호텐트에 도착한 후 위생병이 그를 점검했다. 그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는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뿐이었다. 그는 3시간 후에 죽었다.
 
 
  한국인 참전자의 회상
 
  1950년 12월 11일 고토리를 출발한 마지막 미 해병부대가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제1해병사단의 생존자들은 12월 15일 10만명의 피란민과 함께 흥남부두를 떠났다. 50여 일간의 사투가 끝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군의관 리트빈 중위는 “우리가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젊은이가 싸울 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5년 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이종연(李鍾淵) 변호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 변호사는 장진호 전투 당시 통역장교로 미 해병대에 배속되었다가 나중에는 카투사 50명을 지휘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존 리(John Lee)라는 이름으로 미 해병대 전사(戰史)에 이름을 올린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피융, 피융 하면서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입니다. 바로 앞에 팍, 팍, 팍 하면서 총알이 박힐 때는 정말이지 고개도 들 수 없어요. 도랑 속에서 나는 ‘하나님, 꼭 살아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게 해주세요.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군과 싸울 때에는 솔직히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랐어요.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생을 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그때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머나먼 이역(異域) 땅까지 와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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