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NARA, 인천상륙작전 관련 문서만 1200만장 보관… 연구원 10명이 평생 열람할 분량
⊙ 켈로부대의 전투사실과 소속부대원 3만명 중 일부 명단 확보 쾌거
⊙ 발굴문서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역습 대비 계획
⊙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일본, NARA에서 자료 모두 찾아가
[편집자]
남보람 소령(40·학군 35기)은 2012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파견연구원, 2013년 워싱턴 DC 미 육군군사(軍史)연구소 교환연구원으로 한·미 관련 연방정부 기록물의 비밀해제 협상 및 국내 입수를 담당했다. 남 소령은 미 합동참모대학(JFSC) 합동작전 과정에서 1950년대 미국 정치사를 공부했고, 육군본부 군사연구소에서 1년간 6·25전쟁을 연구했다. 국방대학교 군사전략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자료 연구분석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 켈로부대의 전투사실과 소속부대원 3만명 중 일부 명단 확보 쾌거
⊙ 발굴문서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역습 대비 계획
⊙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일본, NARA에서 자료 모두 찾아가
[편집자]
남보람 소령(40·학군 35기)은 2012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파견연구원, 2013년 워싱턴 DC 미 육군군사(軍史)연구소 교환연구원으로 한·미 관련 연방정부 기록물의 비밀해제 협상 및 국내 입수를 담당했다. 남 소령은 미 합동참모대학(JFSC) 합동작전 과정에서 1950년대 미국 정치사를 공부했고, 육군본부 군사연구소에서 1년간 6·25전쟁을 연구했다. 국방대학교 군사전략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자료 연구분석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 문서기록청 제2관 건물.
국방부 6·25사업단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 Administration·문기청)에 소장된 한국 관련 비밀해제 문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요원으로 필자를 선발해 2012년 9월 워싱턴에 파견했다. 그후 필자는 5년 동안 6개월 단위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군 자료뿐만 아니라 전시(戰時)에 노획한 북한·중국·러시아 자료를 살펴보는 것도 임무에 포함돼 있다.
미 연방정부 산하의 기록물을 보관하는 NARA는 워싱턴 중심가에 본청이 있고, 전국 각지에 17개의 분청이 있다. 분청 중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문기청 제2관은 규모 면에서나 소장하고 있는 원본 기록물의 분량과 가치 측면에서나 차별적인 위상을 갖는다.
본청이 상징적으로 미국의 3대 국보(독립선언서, 미합중국헌법, 권리장전)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면, 미국의 유사 이래 정부 비밀로 지정된 중요 기록물들은 대부분 이곳 미 문기청 제2관에 있다.
1770년대 노예 선박의 송장(送狀), 로키산맥에서 찍은 인디언 부족 사진, 나폴레옹 서명이 들어간 서류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록물과 일본 항복 문서까지 미국이 모은 모든 자료가 보관돼 있다. 문서 100억장, 지도·도면 1200만장, 항공사진 2400만장, 영상필름 30만개, 화상 및 녹음기록 40만개, 전자 데이터 133테라바이트(종이 문서로 565억장) 분량이다. 전 세계 근·현대 자료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비밀지정 연한이 지나 국민들에게 공개되는 장소도 바로 이곳 문기청이다. 비밀이 해제된 기록물의 열람이 시작되는 날의 미 문기청 제2관은 전 세계 학자, 기자, 정부 관계자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이곳에 있는 비밀해제 기록물 중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은 ‘RG(Record Group) 242’ 혹은 ‘제242 문서군’으로 부르는 적국 노획문서(seized and captured documents of the Enemy) 컬렉션이다. 미국은 전쟁을 치른 적대국의 영토로 진주해 들어갈 때, 종전 후의 군정(Military Government)을 위해 적국의 주요 행정기관 및 군 사령부가 생산하고 보유한 모든 기록물을 노획한다.
선별해 분석한 기록물은 원본 그대로 이관하며 중요한 것은 번역해 활용한다. 적국 노획문서로 통칭되는 패전국의 기록물은 미 본토로 옮기며, 보존·복원·비밀해제 및 대외공개의 책임은 미 문기청이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컬렉션은 역시나 2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것이다.
‘RG 242’라 불리는 북한 노획문서
여기에 하나 더 흥미로운 기록물이 있는데 바로 ‘RG 242 북한 노획문서(RG 242, Records Seized by US Military Forces in Korea·노획문서)’이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점으로 북진을 개시한 이래, 회복한 남한 지역은 물론 38도선 이북의 북한으로 진주해 가면서 미군이 노획한 기록물들을 모은 것이다.
이 임무는 주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기록물 노획을 위해 특임부대로 조직한 일명 ‘TF 인디언헤드’에 의해 집중적으로 수행됐다. 미 제2사단의 장병을 모체부대로 조직해 해당 부대의 별칭을 따 이름 붙였다.
전체 추정분량 192만여 쪽 가운데 160만여 쪽이 이들에 의해 수집됐다고 알려졌다. 군사(軍史)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책임연구원에 의하면, 북한 노획문서 수집은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폴 니체(Paul H. Nitze)의 지시에 따라 기획됐다.
그는 미군이 북으로 진주하면서 북한 내부의 기록물들을 입수한다면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사주하에 성립한 공산국가의 의사결정 과정과 지배양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특임부대를 편성해 북한 내부의 기록물들을 노획할 것을 극동군사령부에 지시했다.
TF인디언헤드의 활동에 대해서는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의 수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도 관련 일화가 등장한다.
<(1950년) 10월 20일 아침, 미2사단 ‘인디언헤드’ 마크를 부착한 한 미군 중령이 약 1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자기들은 GHQ(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수집반인데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허락하자 그들은 즉각 평양 시내 공공건물들을 수색해 수많은 문서를 노획, 도쿄 GHQ로 실어 갔다. 그들은 문서수집만을 목적으로 GHQ가 급히 편성해 파견한 부대였다.>
이 기록물의 범주는 단순 문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전계획 및 명령, 군의 교육훈련용 책자 및 걸개(교안), 공문, 포스터, 사진, 설계도, 지폐, 신분증, 개인의 수첩 및 편지 등 그야말로 다양하고 방대하다. 총 6893종 192만여 쪽에 달한다는 것이 조사 결과다.
김학준(金學俊) 동아일보 고문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은 독립된 문서관 또는 도서관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 기록물은 160만8000여 쪽이고, 일본어 30만 쪽, 러시아어 1만여 쪽, 중국어 3000여 쪽이 있는데 일본어로 된 것은 주로 일제 강점기의 지도, 설계도면 등이다. 연구원 10명이 평생을 바쳐야 정리할 수 있는 분량이다.
러시아어로 된 것은 송수신한 외교관계 문서에서부터 러시아 군관이 북한군에 작전·전술을 지도하고 교육훈련용으로 들여온 걸개식 교안, 북한의 남침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공격 및 방어계획 등이 포함돼 있다. 중국어로 된 것은 무기나 장비류의 사용법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북한 연구의 寶庫’
6·25 당시 전장(戰場) 상황을 고려했을 때, 북한은 연합군의 북진에 따라 중요 문건 등은 최대한 후송하거나 파기했을 것이다. 북한 노획문서의 막대한 분량 중에 정권이나 사령부 차원의 고급 비밀문건이 많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중앙 및 지방의 공문서와 행정서류부터 주민 정치사상 교육을 위한 소조단위 유인물에 이르는 다양한 기록물은 당대 북한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유일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학계에서는 이 노획문서군(群)을 ‘북한연구의 보고’라고 인정하고 있다.
반면, 군사분야의 자료는 상당히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군사사상 교육자료에서부터 러시아 군관이 북한을 지도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작전 및 전술노트는 물론, 남침을 획책하고 선전선동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적색선전물들(포스터, 유인물, 삐라 등 포함) 등 희귀하고 유일한 자료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노획문서군의 존재는 1980년대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재미 사학자 방선주(方善柱·79·워싱턴 거주) 박사의 자료수집과 김학준 교수의 연구로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를 필두로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학교 아시아연구소가 적극적으로 해당 기록물을 마이크로필름, 복사본의 형태로 수집해 왔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이 노획문서군의 정확한 전체 분량, 목록 등은 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상당한 인력과 예산을 들여 목록을 만들고 영인본을 내놓았으나, 완벽한 컬렉션은 아니다.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군사편찬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한림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등 민관 연구기관들이 오랫동안 수집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관 간 자료목록 교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화 노력은 이제 막 태동하는 중이다.
당장 전체 분량이 다 수집돼 국내에 들어왔는지도 파악되지 않는다. 발견 초기에는 노획문서군의 전량 수집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유의미한 것부터 선별적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중간의 어느 부분이 빠졌는지 알 수 없다.
전체 분량 수집을 목표로 박스 단위로 국내에 입수하고 있는 지금도 초기 수집분의 불완전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분량이 너무 많아 이제부터 시작하더라도 연구·분석에 오랜 시간과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美軍의 ‘노획문서’ 입수 과정
미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래 북진을 시작, 남한을 수복하면서부터 북한이 수거 혹은 파기하지 못하고 남겨 놓은 기록물들을 노획했다. 남한에서는 서울, 대전, 합천, 왜관, 고성, 안동 등지에서, 38선을 넘어서는 주로 평양, 함흥, 원산 등에서 문서를 입수했다.
노획한 기록물들은 군사작전 등에 즉각 활용하기 위해 일본에 있는 극동군사령부 예하의 제8236부대 정보통신대대 통번역과로 전달했다. 이들은 수신한 노획문서를 세부 분류하고 필요한 것은 번역했다. 이 기록물의 원본과 영어로 번역해 놓은 내용들이 당대의 군사작전이나 그 밖의 다른 의사결정 과정에 참조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추가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일본으로 일단 보낸 노획문서군이 다시 한반도로 넘어온 흔적은 없다. 실제로 1951년 11월 6일을 기점으로 노획문서군이 도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인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록물들은 곧장 미 버지니아의 연방문서원(Federal Records Center)에 이관됐으며, 몇 차례의 검토를 거친 끝에 현재의 미 문기청으로 자리를 옮겨 1977년 비밀해제를 검토한 후 일반에 공개돼 열람되고 있다.
2011년 6·25전쟁 관련 기록물 수집 요원으로 선발돼 미국으로 간 필자는 미 문기청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미 육군군사연구소, 해군군사연구소, 펜실베이니아의 미 칼라일군사연구소, 버지니아의 버지니아군사학교 부설 마셜기념관, 노퍽의 맥아더기념관 등에서 각종 전쟁사와 6·25전쟁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
미 육군군사연구소에서는 6·25전쟁 시 연대급에 한 명씩 배치돼 전장에서 사관(史官)의 역할을 한 군사파견대(MHD·Military History Detachment)의 현장보고서 시리즈 30편 정도를 수집할 수 있었다.
해군군사연구소에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와 관련된 지도, 사진, 노획품 등과 함께 무엇보다 당대 전투상황 일지로 추정되는 고색창연한 노트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촬영허가를 얻기 위해 부단히 협상했으나, 연말에 해당 기지(Navy Yard) 내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출입이 제한됐고,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칼라일군사연구소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처(G-2) 보고서 전 분량이 일목요연하게, 그것도 사본이 아닌 원본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후 수집하는 데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마셜기념관에서는 밴플리트와 워커 장군 컬렉션을 찾아 미공개된 사진 다수와 밴플리트 장군의 개인 친필 수첩, 롬멜 장군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워커 장군 중장 진급 축하 선물, 워커 장군의 사망확인서 등을 촬영해 귀국했다. 그 밖에도 워싱턴의 싱크탱크 윌슨센터에서 현대 북한 관련 자료들이 수집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 2014년 이후부터 자료분석 작업을 공동으로 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켈로부대원 명단 확보 보람도
무엇보다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것은 미 문기청 제2관에 있던 6·25전쟁 관련 자료들이었다. NARA에 있는 모든 자료는 미국 중심으로 정리돼 있기 때문에 필자는 사전 연구를 통해 보물지도를 그리듯 한국 자료 중심으로 목록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사서에게 전달하면 보통 이튿날 박스째로 필자에게 자료가 전달된다. 모두 원본 자료인데, 밀봉(密封) 후 한 번도 안 열어 본 것들이 대다수다. 자료를 받을 때마다 수십 년간 땅속에 묻혔던 보물상자를 매일 열어 보는 기분이다.
필자는 2012년과 2013년 두 해 동안 이곳 현장에서 노획문서군을 직접 열람하고 필요한 내용은 촬영해 국내로 들여왔다. 특히 기존에 공개하지 않았던 특수 기록물을 중점적으로 디지털 촬영과 스캔을 해 국내로 반입했다.
지금도 미 문기청에는 수많은 연구자들과 팀이 열람실에서 사료를 분석, 수집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정부기관 차원에서 선발된 인원을 보내 전문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기 위한 협상을 담당하고 국내로 들여와 분석하는 나라는 없다. 미 측에서는 이 부분을 주목해 규정과 방침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 노력했다. 특히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장교 신분이라는 점이 업무를 진행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우여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의식주 문제는 임무를 받아 파견을 나간 것이기 때문에 하찮은 어려움을 거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전장(戰場)에 나서는 대신, 이국의 사료실에 들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지정석도 없는 미 문기청의 이 책상, 저 책상으로 ‘메뚜기’처럼 옮겨다니면서 기록물을 열람했지만, 새로운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대부분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겁고 익숙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수천 장의 사진을 찍어 대다가 첫해인 2012년에는 인대를 상했다. 의사는 “피로성이니 가능한 한 어깨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도리어 거꾸로 근력운동을 해서 어깨근육을 만들었다. 그렇게 했더니 다시는 아픈 일이 없었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보람 있는 일도 있었다. 2013년 봄, 비밀첩보부대인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 일명 켈로부대의 전투사실을 입증하는 작전지시 문서와 그 부대에 소속됐던 약 3만명의 한국인 명단 중 일부를 확보한 것이다. 문서를 열람하던 중 ‘독립대대장 최희화를 부산으로 보내니 편의를 제공하라’는 유엔사령관의 문서를 발견했던 것이다.
필자는 수소문 끝에 최희화 대대장이 ‘밥퍼’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의 부친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설레는 마음으로 최일도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친의 사진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최 목사는 부친의 유품을 뒤져 사진을 찾아내 필자에게 보내 왔고, 확인 결과 동일 인물이었다! 평생을 무명용사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아버지가 ‘진짜 군인’임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192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 대대장은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한국연락사무소(켈로부대) 산하 8240부대 대대장으로 북한 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백호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 켈로부대는 1948년 창설한 첩보부대로 특전사의 모체다.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팔미도 등대 탈환작전에도 참전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던 켈로부대는 휴전 이후 해체됐고, 3만명에 달했던 부대원들은 공식 계급과 군번이 없었기 때문에 보상은커녕 참전 사실도 인정받지 못했다. 최 대대장은 197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13년 1월 9일 최희화 8240부대 대대장(중령)은 정전 60주년을 맞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최 목사는 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했다.
최근에는 브라우넬위원회 보고서(1952년)도 발굴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의 6·25 남침 가능성을 사전에 알았지만 정보판단과 의사결정이 효과적이지 못해 이를 막지 못했다.
소실되고 있는 문서들
자료수집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현안들이 문제로 남아 있다. 첫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화, 마멸 등으로 인한 영구소실이 우려된다. 지질(紙質) 자체가 조악한 것이 많은 데다가 접힌 곳, 눌린 곳이 많아 이곳저곳이 바스러졌고, 지금도 소실은 진행 중이다. 항온항습 장치가 돼 있다고 하더라도 6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누렇게 말라 앞으로 얼마나 더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둘째, 손망실(損亡失)된 것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엄격한 출입 관리 및 소지품 휴대 제한이 있기 전의 일인데, 귀한 사료적 가치가 있거나 군관(軍官) 수첩처럼 작은 형태의 기록물을 누군가 외부로, 그것도 빈번히 반출한 것으로 보인다. 미 문기청에서 열람이 허용된 일련의 기록물 중 국가안보상의 이유가 있거나 개인의 신상이 노출될 만한 내용이 발견되면, 일단 공개된 뒤라도 다시 수거해 대외에 공개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30쪽 짜리 공문서의 15에서 16쪽에 개인의 신상명세가 담겨 있다면, 해당 쪽을 수거해 간 후 쪽을 빼낸 자리에 노란 종이나 빨간 테두리가 있는 흰색 마분지를 끼워 놓는다. 이것을 ‘slip note(제거 공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어떠어떠한 이유에 의해 수거해 갔는지, 이 부분을 보고 싶으면 어떤 절차(정보공개 청구 등)를 거쳐야 하는지 등이 적혀 있다. 그런데 노획문서군의 중간중간에는 국가안보나 개인신상 등의 사유가 아니라 분실돼 현재 없다는 공지가 많이 보인다.
셋째, 한글, 러시아어, 중국어로 돼 있었기 때문에 미 측이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체계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가운데 국내로 입수됐으며, 국내에 입수된 뒤에도 재분류나 세부 내용확인 작업은 일부의 기록물에 대해서만 이뤄졌다. 이전의 수집 분량이 미처 분류되지 않고, 세부 하위정보나 키워드가 지정되지 않은 채로 매년 수천 장에서 수만 장의 노획문서군이 계속 수집돼 왔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디지털 촬영 및 스캔으로 원본의 컬러와 질감을 그대로 살려 수집하고 별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대안이다. 가능하다면 6·25전쟁의 1차 사료(primary materials)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아카이브의 구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내에 입수된 노획문서군의 양이 상당한데 새삼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현재 국내에 들여온 노획문서군의 상당수는 흑백 복사기로 복사해 온 것들이다. 마이크로필름의 형태로 있는 것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두 번째 문제는 한시바삐 전체 기록물을 재(再)범주화하고 전체적으로 어떤 종류, 어떤 내용의 기록물들이 있는지 일련의 리스트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추가적인 손망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현재 노획문서군의 소장처가 미국의 정부기관이라는 점, 노획문서군을 재범주화하는 노력의 어려움은 둘째치고라도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보관과 관리를 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예산의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한 개인이나 집단이 나서서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는 역시나 인력, 제도, 예산의 복합적인 대비책이 강구돼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노획문서군은 분량이 방대한 것은 둘째치고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기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에 걸친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이를 제대로 정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한시 기구나 기존 기구 내에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중장기 사업으로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세 번째 문제 해결법에 희망이 있고 노력을 집중하면 성과가 나올 수 있다. 기왕에 수집돼 우리가 갖고 있는 노획문서군의 전체적 현황과 세부 내용부터 알아야 이를 토대로 첫째와 둘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릴 것이다.
자료수집에 열중하는 日本팀
미 문기청 제2관에는 항상 사료를 연구하고 촬영하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이 가운데 일본 사료수집 전담팀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테이블 4개를 고정석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다. 문기청 제2관에는 원칙적으로 지정석이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정식으로 미 문기청과 계약을 맺어 일정한 예산을 제공하고, 6~8명이 한 팀을 이루어 체계적으로 사료를 촬영 및 스캔해 가고 있다.
인원의 구성은 현지 의사소통 및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코디네이터와 사료탐색, 촬영, 스캔이 각 1명씩 있고, 이들이 수집한 사료를 현장에서 분석해 간단한 설명과 색인을 하고 종합하는 인원이 2명 있었다.
스캐너나 복사기는 사용료를 지급하고 미 문기청의 것을 써야 하는데, 일본 전담팀은 지정석 옆에 컴퓨터, 스캐너, 촬영장비, 복사기 등을 놓고 자유롭게 쓰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의 인원과 정부 각 기관의 인물들이 현지에 거주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지정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곳에서 지난 30년 동안 사료수집, 특히 한·미 관계 및 6·25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해서 한국에 보내 온 재미교포 방선주 박사의 자리이다. 그는 미 문기청 제2관에서는 ‘미스터 아카이브’로 불리고 있다. 지정석은 없지만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 등도 현지의 교포를 운용해 가며 사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다.
2013년에 필자가 수집한 노획문서군은 평균 크기 60cm×60cm 이상의 대형 지도, 작전계획, 걸개식 교안, 선전선동을 위한 사상교육 자료 등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공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이즈가 크다 보니 한시적으로 찾아가 많은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연구자들은 이것을 보기만 하고 수집하지 않았다.
미 문기청 측으로서도 대형의 사료(史料)들을 출납하는 과정에서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으면 단순열람을 위해서는 이를 제공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대형의 사료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과장급 인사들을 만나 사료열람을 신청하고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군사편찬연구소 이양구 소장(육사 35기)이 직접 이곳을 방문하고 국가기록원의 이선옥 선생(현지 사료수집원)이 함께 노력해 노획문서군의 그 어떤 것이라도 열람 및 촬영(스캔)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형 지도 및 걸개식 교안을 어떻게 촬영하거나 스캔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대형 스캐너가 있긴 했으나 그것보다도 큰 사료가 많았고, 재질의 특성상 접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낸 의견이 사다리를 갖고 들어와 사다리 위에서 해상도가 높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다는 것이었다.
2013년 새로 수집한 노획문서群 단독 공개
미 문기청의 실무자들은 무릎을 치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고, 2주 정도의 내부 검토를 거쳐 촬영이 허락됐다. 마치 서커스 곡예 같은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입수하지 못한 각종 사료 약 700여 점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여기에 수집한 자료 일부를 공개한다.
가. 영흥만 전투대형 배치략도
1950년 9월 15일 제588부대에 의해 작성된 영흥만(원산만) 지역 방어작전 계획이다. 1 : 20만 지도에 작성된 이 계획은 영흥만에 연합군이 상륙을 시도할 것에 대비해 급히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총 4부 중 3번째의 것이다.
1950년 11월 29일 원산지역에 미군이 진주했을 때 노획됐다. 부대장은 김춘택으로 돼 있으며, 부대장 날인 도장이 찍혀 있다. 부대대장 박용준과 작전참모 리주욱의 날인 도장과 서명도 확인할 수 있다.
위로부터 주요 지형지물 및 지역명으로는 흥남, 서호진, 호도반도, 송전반도, 영흥만, 갈마반도, 원산 등이 있으며, 주요 도서로는 웅도, 무도, 능도, 려도 등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해안돌출부 위주로 중대관측소 및 주요화기를 배치하고, 전방의 섬에는 비반충포(非反衝砲) 등의 화기를 추진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부산 다음으로 개항된 원산항이고, 내륙으로 이어진 각종 철도·도로가 이곳에서 뻗어나가니만큼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의 입장에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전략요충인 영흥만에 대해 북한의 방어작전 계획은 허술함이 드러난다. 방어를 위한 부대 규모가 2개 대대로 방어정면이 부여됐다. 뒤에 예비대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에는 증강된 연대규모가 해안선에 배치되는 것이 적합하다. 또한 대략의 작전계획을 담은 배치략도라고 할지라도 작전계획에 들어가야 할 장애물, 화력지원 요소는 물론, 군수·물자·통신·의무 등의 전투지원 요소는 포함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25일 미 제10군단이 영흥만 해안에 상륙했을 때, 북한 지상군의 대응은 지리멸렬한 것이었다. 영흥만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의 작전이 바로 ‘원산상륙작전’인데 작전기간 동안 미군을 괴롭힌 것은 해안의 방어부대가 아니라 소련 군관의 계획과 준비에 의해 동원된 웅도 주민들이 설치한 각종 기뢰였다.
이 배치략도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북한군에게는 후방지역의 방어에 투입할 만한 충분한 규모의 전력이 없었다. 둘째, 계획이 작성된(혹은 보완된) 날짜(1950년 9월 15일)를 볼 때,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사전에 되지 않았다.
셋째, 6·25전쟁 남침계획은 애초 소련 군사고문관에 의해 주도돼 작성된 것으로 개전과 함께 소련 군사고문관이 전장에서 이탈하자, 이후에는 북한 스스로 작전계획을 작성하거나 우발사태에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이 한 장의 노획문서가 주는 메시지는 노획문서군이 가진 잠재력과 가치를 잘 말해 준다.
소련의 역습 대비 훈련계획 처음 발견
나.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1950년 11월 5일 평양에서 노획된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다. 러시아어로 작성돼 있으며, 해안선 전방에 도서(島嶼)가 없을 때(A)와 있을 때(B)로 구분해 진지, 교통호, 이동로, 화기 및 장애물 배치 등의 전술적 요소와 각각의 제원을 나타냈다.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은 1949년 한 해 동안 북한군을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당시 대부대 기동연습은 물론 각종 전장상황하에서의 형태별 작전을 구분한 교육훈련도 실시했다. 이 전술노트도 교육훈련을 위해 작성된 교안(敎案)일 것이다. 실제의 크기는 60cm×90cm가량 된다.
그동안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은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과 이를 위한 교육훈련에만 초점을 맞춘 것으로 연구됐었다. 하지만 이 전술노트를 통해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유엔군의 역습에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사연구의 분야가 북한군의 방어계획 분야로 넓혀지는 출발점인 것이다.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외에도 2013년 수집을 통해 사격술, 포술, 진지구축술, 대전차호 구축요령, 통신선로 구축술 등에 관련된 다수의 전술노트를 입수했다. 해당 기록물의 연구·분석은 군사적 차원에서도 당장 시급히 진행돼야 할 것이다.
다. 소총 분해도(1891년식 보병총도)
1891년식 모신-나간 소총의 분해도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은 주로 소련이 제공한 소총을 사용했다. 1891년식 소총도 그중 하나다. 북한군은 소련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식소총으로 사용했던 다양한 총기류를 지원받았다. 1891년식 소총처럼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것은 물론, 일본 제국군이 사용하던 일명 ‘아리사카’ 소총도 사용했다.
이 분해도는 북한군이 교육훈련을 위해 사용한 걸개식 교안으로 실제의 크기는 60cm×90cm가량 된다. 1950년 11월 16일 평양 근처에서 노획해 11월 20일에 즉각 번역했다. 적 무기와 장비의 제원 파악은 승패의 중요한 요소였기에 당연한 조치였다. 이외에도 1943년식 기관단총, 1937년식 82mm 박격포, 1927년식 76mm 연대포, 각종 지뢰와 수류탄 등의 분해도 및 조작요령을 담은 교안도 입수해 분석 중이다.
각 무기류에 관한 교안의 작성수준과 정확도를 보면, 당시의 수준으로서는 매우 높은 것이다. 실전적인 교육을 하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전쟁발발 전 얼마나 치밀하게 전술·전기 측면에서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군 개개인은 잘 준비된 교육훈련에 의해 6·25전쟁 개시 전까지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획문서군의 연구·분석은 북한군이 개전과 함께 물밀 듯이 연전연승하면서 남하할 수 있었던 숨겨진 이유를 말해 준다. 지금까지 6·25전쟁의 초전(初戰) 연구는 소련이 지원한 전차나 포병, 전투기와 신무기에 의한 북한군의 압도적 우세, 물리적 기습효과, 아군의 심리적 충격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러나 이번에 입수한 북한군 교육훈련 관련 기록물을 바탕으로 북한군 개개인의 숙련된 전투기술이 그 근본적인 전투력 우세의 바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군이 최첨단 무기체계와 장비의 구비뿐만 아니라 소부대 훈련과 대부대 기동훈련에도 매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戰犯國 독일도 NARA에서 東獨 문서 가져가
노획문서군은 학자들에 의해 충실히 연구·분석된 편이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중요한 역사적 사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노획문서군 속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내용들이 분석되지 않은 채 전문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이 노획문서군의 환수 문제다. 이 기록물들은 한반도에서 전시에 미군이 노획해 가져간 것이고, 언젠가는 이 땅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미군이 북진(北進)하면서 38선 이남의 영토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노획한, 즉 남한 지역에서 노획한 기록물들이라도 먼저 환수돼야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북한 지역에서 노획했던 기록물들도 적절한 시기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우리가 환수할 때가 오리라고 본다.
RG 242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기록물을 한데 모아 ‘적국 노획문서군’으로 명명해 미국으로 가져가면서 형성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국을 미군이 수복하는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수많은 문서들을 노획했다. 여기에 6·25전쟁 당시 북한 노획문서가 추가돼 오늘날까지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1983년 그레나다 침공 시 획득한 기록물도 포함돼 있다.
필자가 RG 242 문서의 환수추진을 꺼내는 이유가 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노획문서군은 해당 국가가 그것을 이미 환수했기 때문이다. 기록물의 분량과 종류가 어마어마했던 만큼,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이 들어갔다. 그래도 그들은 한 장의 문서도 빠뜨리지 않고 깔끔하게 환수해 갔다. 미 문기청에 같은 형태의 사본(마이크로필름, 사진, 동영상, 복사한 기록물 등)을 만들어서 인계하고, 해당 기간 동안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상당한 인력과 예산을 대는 조건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RG 242’는 선구적 노력을 한 헌신적인 학자들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십 년간 수집해 온 각 기관들이 있어서 대다수가 국내에 입수됐다. 국내에 수집된 분량과 분류된 수준도 다른 컬렉션에 크게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북방한계선(NLL) 포격 등 북한의 도발에 직면한 우리의 안보상황에서 전쟁 문서의 수집은 한가롭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 E. H 카(Carr)가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것처럼, 과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챙기는 민족만이 미래가 있다는 것을 미국 땅에서 확인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 산하의 기록물을 보관하는 NARA는 워싱턴 중심가에 본청이 있고, 전국 각지에 17개의 분청이 있다. 분청 중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문기청 제2관은 규모 면에서나 소장하고 있는 원본 기록물의 분량과 가치 측면에서나 차별적인 위상을 갖는다.
본청이 상징적으로 미국의 3대 국보(독립선언서, 미합중국헌법, 권리장전)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면, 미국의 유사 이래 정부 비밀로 지정된 중요 기록물들은 대부분 이곳 미 문기청 제2관에 있다.
1770년대 노예 선박의 송장(送狀), 로키산맥에서 찍은 인디언 부족 사진, 나폴레옹 서명이 들어간 서류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록물과 일본 항복 문서까지 미국이 모은 모든 자료가 보관돼 있다. 문서 100억장, 지도·도면 1200만장, 항공사진 2400만장, 영상필름 30만개, 화상 및 녹음기록 40만개, 전자 데이터 133테라바이트(종이 문서로 565억장) 분량이다. 전 세계 근·현대 자료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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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기록청 내부 모습. |
이곳에 있는 비밀해제 기록물 중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필자가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은 ‘RG(Record Group) 242’ 혹은 ‘제242 문서군’으로 부르는 적국 노획문서(seized and captured documents of the Enemy) 컬렉션이다. 미국은 전쟁을 치른 적대국의 영토로 진주해 들어갈 때, 종전 후의 군정(Military Government)을 위해 적국의 주요 행정기관 및 군 사령부가 생산하고 보유한 모든 기록물을 노획한다.
선별해 분석한 기록물은 원본 그대로 이관하며 중요한 것은 번역해 활용한다. 적국 노획문서로 통칭되는 패전국의 기록물은 미 본토로 옮기며, 보존·복원·비밀해제 및 대외공개의 책임은 미 문기청이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컬렉션은 역시나 2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것이다.
‘RG 242’라 불리는 북한 노획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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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보람 소령이 메릴랜드주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6·25전쟁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
이 임무는 주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기록물 노획을 위해 특임부대로 조직한 일명 ‘TF 인디언헤드’에 의해 집중적으로 수행됐다. 미 제2사단의 장병을 모체부대로 조직해 해당 부대의 별칭을 따 이름 붙였다.
전체 추정분량 192만여 쪽 가운데 160만여 쪽이 이들에 의해 수집됐다고 알려졌다. 군사(軍史)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책임연구원에 의하면, 북한 노획문서 수집은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폴 니체(Paul H. Nitze)의 지시에 따라 기획됐다.
그는 미군이 북으로 진주하면서 북한 내부의 기록물들을 입수한다면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사주하에 성립한 공산국가의 의사결정 과정과 지배양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특임부대를 편성해 북한 내부의 기록물들을 노획할 것을 극동군사령부에 지시했다.
TF인디언헤드의 활동에 대해서는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의 수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도 관련 일화가 등장한다.
<(1950년) 10월 20일 아침, 미2사단 ‘인디언헤드’ 마크를 부착한 한 미군 중령이 약 1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자기들은 GHQ(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수집반인데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허락하자 그들은 즉각 평양 시내 공공건물들을 수색해 수많은 문서를 노획, 도쿄 GHQ로 실어 갔다. 그들은 문서수집만을 목적으로 GHQ가 급히 편성해 파견한 부대였다.>
이 기록물의 범주는 단순 문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전계획 및 명령, 군의 교육훈련용 책자 및 걸개(교안), 공문, 포스터, 사진, 설계도, 지폐, 신분증, 개인의 수첩 및 편지 등 그야말로 다양하고 방대하다. 총 6893종 192만여 쪽에 달한다는 것이 조사 결과다.
김학준(金學俊) 동아일보 고문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은 독립된 문서관 또는 도서관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 기록물은 160만8000여 쪽이고, 일본어 30만 쪽, 러시아어 1만여 쪽, 중국어 3000여 쪽이 있는데 일본어로 된 것은 주로 일제 강점기의 지도, 설계도면 등이다. 연구원 10명이 평생을 바쳐야 정리할 수 있는 분량이다.
러시아어로 된 것은 송수신한 외교관계 문서에서부터 러시아 군관이 북한군에 작전·전술을 지도하고 교육훈련용으로 들여온 걸개식 교안, 북한의 남침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공격 및 방어계획 등이 포함돼 있다. 중국어로 된 것은 무기나 장비류의 사용법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북한 연구의 寶庫’
6·25 당시 전장(戰場) 상황을 고려했을 때, 북한은 연합군의 북진에 따라 중요 문건 등은 최대한 후송하거나 파기했을 것이다. 북한 노획문서의 막대한 분량 중에 정권이나 사령부 차원의 고급 비밀문건이 많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중앙 및 지방의 공문서와 행정서류부터 주민 정치사상 교육을 위한 소조단위 유인물에 이르는 다양한 기록물은 당대 북한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유일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학계에서는 이 노획문서군(群)을 ‘북한연구의 보고’라고 인정하고 있다.
반면, 군사분야의 자료는 상당히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군사사상 교육자료에서부터 러시아 군관이 북한을 지도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작전 및 전술노트는 물론, 남침을 획책하고 선전선동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적색선전물들(포스터, 유인물, 삐라 등 포함) 등 희귀하고 유일한 자료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노획문서군의 존재는 1980년대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재미 사학자 방선주(方善柱·79·워싱턴 거주) 박사의 자료수집과 김학준 교수의 연구로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를 필두로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학교 아시아연구소가 적극적으로 해당 기록물을 마이크로필름, 복사본의 형태로 수집해 왔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이 노획문서군의 정확한 전체 분량, 목록 등은 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상당한 인력과 예산을 들여 목록을 만들고 영인본을 내놓았으나, 완벽한 컬렉션은 아니다.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군사편찬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한림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등 민관 연구기관들이 오랫동안 수집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관 간 자료목록 교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화 노력은 이제 막 태동하는 중이다.
당장 전체 분량이 다 수집돼 국내에 들어왔는지도 파악되지 않는다. 발견 초기에는 노획문서군의 전량 수집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유의미한 것부터 선별적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중간의 어느 부분이 빠졌는지 알 수 없다.
전체 분량 수집을 목표로 박스 단위로 국내에 입수하고 있는 지금도 초기 수집분의 불완전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분량이 너무 많아 이제부터 시작하더라도 연구·분석에 오랜 시간과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美軍의 ‘노획문서’ 입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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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람실에서 선별한 사료를 촬영하는 장면. 사진 상단 스탠드의 종이(원안)는 촬영허가를 받았다는 표시다. |
노획한 기록물들은 군사작전 등에 즉각 활용하기 위해 일본에 있는 극동군사령부 예하의 제8236부대 정보통신대대 통번역과로 전달했다. 이들은 수신한 노획문서를 세부 분류하고 필요한 것은 번역했다. 이 기록물의 원본과 영어로 번역해 놓은 내용들이 당대의 군사작전이나 그 밖의 다른 의사결정 과정에 참조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추가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일본으로 일단 보낸 노획문서군이 다시 한반도로 넘어온 흔적은 없다. 실제로 1951년 11월 6일을 기점으로 노획문서군이 도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인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록물들은 곧장 미 버지니아의 연방문서원(Federal Records Center)에 이관됐으며, 몇 차례의 검토를 거친 끝에 현재의 미 문기청으로 자리를 옮겨 1977년 비밀해제를 검토한 후 일반에 공개돼 열람되고 있다.
2011년 6·25전쟁 관련 기록물 수집 요원으로 선발돼 미국으로 간 필자는 미 문기청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미 육군군사연구소, 해군군사연구소, 펜실베이니아의 미 칼라일군사연구소, 버지니아의 버지니아군사학교 부설 마셜기념관, 노퍽의 맥아더기념관 등에서 각종 전쟁사와 6·25전쟁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
미 육군군사연구소에서는 6·25전쟁 시 연대급에 한 명씩 배치돼 전장에서 사관(史官)의 역할을 한 군사파견대(MHD·Military History Detachment)의 현장보고서 시리즈 30편 정도를 수집할 수 있었다.
해군군사연구소에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와 관련된 지도, 사진, 노획품 등과 함께 무엇보다 당대 전투상황 일지로 추정되는 고색창연한 노트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촬영허가를 얻기 위해 부단히 협상했으나, 연말에 해당 기지(Navy Yard) 내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출입이 제한됐고,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칼라일군사연구소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처(G-2) 보고서 전 분량이 일목요연하게, 그것도 사본이 아닌 원본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후 수집하는 데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마셜기념관에서는 밴플리트와 워커 장군 컬렉션을 찾아 미공개된 사진 다수와 밴플리트 장군의 개인 친필 수첩, 롬멜 장군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워커 장군 중장 진급 축하 선물, 워커 장군의 사망확인서 등을 촬영해 귀국했다. 그 밖에도 워싱턴의 싱크탱크 윌슨센터에서 현대 북한 관련 자료들이 수집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 2014년 이후부터 자료분석 작업을 공동으로 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켈로부대원 명단 확보 보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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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일도 목사의 부친 최희화(뒷줄 맨 오른쪽) 8240부대 대대장이 6·25 당시 부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상). 최일도 목사가 지난 4월 1일 부친 최희화씨의 화랑무공훈장을 특전사령부에 기증했다(하). |
이를 사서에게 전달하면 보통 이튿날 박스째로 필자에게 자료가 전달된다. 모두 원본 자료인데, 밀봉(密封) 후 한 번도 안 열어 본 것들이 대다수다. 자료를 받을 때마다 수십 년간 땅속에 묻혔던 보물상자를 매일 열어 보는 기분이다.
필자는 2012년과 2013년 두 해 동안 이곳 현장에서 노획문서군을 직접 열람하고 필요한 내용은 촬영해 국내로 들여왔다. 특히 기존에 공개하지 않았던 특수 기록물을 중점적으로 디지털 촬영과 스캔을 해 국내로 반입했다.
지금도 미 문기청에는 수많은 연구자들과 팀이 열람실에서 사료를 분석, 수집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정부기관 차원에서 선발된 인원을 보내 전문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기 위한 협상을 담당하고 국내로 들여와 분석하는 나라는 없다. 미 측에서는 이 부분을 주목해 규정과 방침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 노력했다. 특히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장교 신분이라는 점이 업무를 진행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우여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의식주 문제는 임무를 받아 파견을 나간 것이기 때문에 하찮은 어려움을 거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전장(戰場)에 나서는 대신, 이국의 사료실에 들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지정석도 없는 미 문기청의 이 책상, 저 책상으로 ‘메뚜기’처럼 옮겨다니면서 기록물을 열람했지만, 새로운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대부분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겁고 익숙하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수천 장의 사진을 찍어 대다가 첫해인 2012년에는 인대를 상했다. 의사는 “피로성이니 가능한 한 어깨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도리어 거꾸로 근력운동을 해서 어깨근육을 만들었다. 그렇게 했더니 다시는 아픈 일이 없었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보람 있는 일도 있었다. 2013년 봄, 비밀첩보부대인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 일명 켈로부대의 전투사실을 입증하는 작전지시 문서와 그 부대에 소속됐던 약 3만명의 한국인 명단 중 일부를 확보한 것이다. 문서를 열람하던 중 ‘독립대대장 최희화를 부산으로 보내니 편의를 제공하라’는 유엔사령관의 문서를 발견했던 것이다.
필자는 수소문 끝에 최희화 대대장이 ‘밥퍼’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의 부친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설레는 마음으로 최일도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친의 사진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최 목사는 부친의 유품을 뒤져 사진을 찾아내 필자에게 보내 왔고, 확인 결과 동일 인물이었다! 평생을 무명용사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아버지가 ‘진짜 군인’임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192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 대대장은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한국연락사무소(켈로부대) 산하 8240부대 대대장으로 북한 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백호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 켈로부대는 1948년 창설한 첩보부대로 특전사의 모체다.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팔미도 등대 탈환작전에도 참전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던 켈로부대는 휴전 이후 해체됐고, 3만명에 달했던 부대원들은 공식 계급과 군번이 없었기 때문에 보상은커녕 참전 사실도 인정받지 못했다. 최 대대장은 197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13년 1월 9일 최희화 8240부대 대대장(중령)은 정전 60주년을 맞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최 목사는 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했다.
최근에는 브라우넬위원회 보고서(1952년)도 발굴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의 6·25 남침 가능성을 사전에 알았지만 정보판단과 의사결정이 효과적이지 못해 이를 막지 못했다.
소실되고 있는 문서들
자료수집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현안들이 문제로 남아 있다. 첫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화, 마멸 등으로 인한 영구소실이 우려된다. 지질(紙質) 자체가 조악한 것이 많은 데다가 접힌 곳, 눌린 곳이 많아 이곳저곳이 바스러졌고, 지금도 소실은 진행 중이다. 항온항습 장치가 돼 있다고 하더라도 6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누렇게 말라 앞으로 얼마나 더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둘째, 손망실(損亡失)된 것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엄격한 출입 관리 및 소지품 휴대 제한이 있기 전의 일인데, 귀한 사료적 가치가 있거나 군관(軍官) 수첩처럼 작은 형태의 기록물을 누군가 외부로, 그것도 빈번히 반출한 것으로 보인다. 미 문기청에서 열람이 허용된 일련의 기록물 중 국가안보상의 이유가 있거나 개인의 신상이 노출될 만한 내용이 발견되면, 일단 공개된 뒤라도 다시 수거해 대외에 공개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30쪽 짜리 공문서의 15에서 16쪽에 개인의 신상명세가 담겨 있다면, 해당 쪽을 수거해 간 후 쪽을 빼낸 자리에 노란 종이나 빨간 테두리가 있는 흰색 마분지를 끼워 놓는다. 이것을 ‘slip note(제거 공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어떠어떠한 이유에 의해 수거해 갔는지, 이 부분을 보고 싶으면 어떤 절차(정보공개 청구 등)를 거쳐야 하는지 등이 적혀 있다. 그런데 노획문서군의 중간중간에는 국가안보나 개인신상 등의 사유가 아니라 분실돼 현재 없다는 공지가 많이 보인다.
셋째, 한글, 러시아어, 중국어로 돼 있었기 때문에 미 측이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체계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가운데 국내로 입수됐으며, 국내에 입수된 뒤에도 재분류나 세부 내용확인 작업은 일부의 기록물에 대해서만 이뤄졌다. 이전의 수집 분량이 미처 분류되지 않고, 세부 하위정보나 키워드가 지정되지 않은 채로 매년 수천 장에서 수만 장의 노획문서군이 계속 수집돼 왔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디지털 촬영 및 스캔으로 원본의 컬러와 질감을 그대로 살려 수집하고 별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대안이다. 가능하다면 6·25전쟁의 1차 사료(primary materials)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아카이브의 구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내에 입수된 노획문서군의 양이 상당한데 새삼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현재 국내에 들여온 노획문서군의 상당수는 흑백 복사기로 복사해 온 것들이다. 마이크로필름의 형태로 있는 것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두 번째 문제는 한시바삐 전체 기록물을 재(再)범주화하고 전체적으로 어떤 종류, 어떤 내용의 기록물들이 있는지 일련의 리스트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추가적인 손망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현재 노획문서군의 소장처가 미국의 정부기관이라는 점, 노획문서군을 재범주화하는 노력의 어려움은 둘째치고라도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보관과 관리를 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예산의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한 개인이나 집단이 나서서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는 역시나 인력, 제도, 예산의 복합적인 대비책이 강구돼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노획문서군은 분량이 방대한 것은 둘째치고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기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에 걸친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이를 제대로 정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한시 기구나 기존 기구 내에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중장기 사업으로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세 번째 문제 해결법에 희망이 있고 노력을 집중하면 성과가 나올 수 있다. 기왕에 수집돼 우리가 갖고 있는 노획문서군의 전체적 현황과 세부 내용부터 알아야 이를 토대로 첫째와 둘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릴 것이다.
자료수집에 열중하는 日本팀
미 문기청 제2관에는 항상 사료를 연구하고 촬영하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이 가운데 일본 사료수집 전담팀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테이블 4개를 고정석으로 붙여 사용하고 있다. 문기청 제2관에는 원칙적으로 지정석이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정식으로 미 문기청과 계약을 맺어 일정한 예산을 제공하고, 6~8명이 한 팀을 이루어 체계적으로 사료를 촬영 및 스캔해 가고 있다.
인원의 구성은 현지 의사소통 및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코디네이터와 사료탐색, 촬영, 스캔이 각 1명씩 있고, 이들이 수집한 사료를 현장에서 분석해 간단한 설명과 색인을 하고 종합하는 인원이 2명 있었다.
스캐너나 복사기는 사용료를 지급하고 미 문기청의 것을 써야 하는데, 일본 전담팀은 지정석 옆에 컴퓨터, 스캐너, 촬영장비, 복사기 등을 놓고 자유롭게 쓰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의 인원과 정부 각 기관의 인물들이 현지에 거주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지정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곳에서 지난 30년 동안 사료수집, 특히 한·미 관계 및 6·25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해서 한국에 보내 온 재미교포 방선주 박사의 자리이다. 그는 미 문기청 제2관에서는 ‘미스터 아카이브’로 불리고 있다. 지정석은 없지만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 등도 현지의 교포를 운용해 가며 사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다.
2013년에 필자가 수집한 노획문서군은 평균 크기 60cm×60cm 이상의 대형 지도, 작전계획, 걸개식 교안, 선전선동을 위한 사상교육 자료 등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공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이즈가 크다 보니 한시적으로 찾아가 많은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연구자들은 이것을 보기만 하고 수집하지 않았다.
미 문기청 측으로서도 대형의 사료(史料)들을 출납하는 과정에서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으면 단순열람을 위해서는 이를 제공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대형의 사료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과장급 인사들을 만나 사료열람을 신청하고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군사편찬연구소 이양구 소장(육사 35기)이 직접 이곳을 방문하고 국가기록원의 이선옥 선생(현지 사료수집원)이 함께 노력해 노획문서군의 그 어떤 것이라도 열람 및 촬영(스캔)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형 지도 및 걸개식 교안을 어떻게 촬영하거나 스캔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대형 스캐너가 있긴 했으나 그것보다도 큰 사료가 많았고, 재질의 특성상 접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낸 의견이 사다리를 갖고 들어와 사다리 위에서 해상도가 높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다는 것이었다.
2013년 새로 수집한 노획문서群 단독 공개
미 문기청의 실무자들은 무릎을 치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고, 2주 정도의 내부 검토를 거쳐 촬영이 허락됐다. 마치 서커스 곡예 같은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입수하지 못한 각종 사료 약 700여 점을 촬영할 수 있었다. 여기에 수집한 자료 일부를 공개한다.
가. 영흥만 전투대형 배치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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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29일 미군이 원산에 진주했을 때 노획한 ‘영흥만 전투대형 배치략도’. 미 제10군단이 영흥만에 상륙했을 때 북한 지상군의 대응이 지리멸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다. |
1950년 11월 29일 원산지역에 미군이 진주했을 때 노획됐다. 부대장은 김춘택으로 돼 있으며, 부대장 날인 도장이 찍혀 있다. 부대대장 박용준과 작전참모 리주욱의 날인 도장과 서명도 확인할 수 있다.
위로부터 주요 지형지물 및 지역명으로는 흥남, 서호진, 호도반도, 송전반도, 영흥만, 갈마반도, 원산 등이 있으며, 주요 도서로는 웅도, 무도, 능도, 려도 등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해안돌출부 위주로 중대관측소 및 주요화기를 배치하고, 전방의 섬에는 비반충포(非反衝砲) 등의 화기를 추진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부산 다음으로 개항된 원산항이고, 내륙으로 이어진 각종 철도·도로가 이곳에서 뻗어나가니만큼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의 입장에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전략요충인 영흥만에 대해 북한의 방어작전 계획은 허술함이 드러난다. 방어를 위한 부대 규모가 2개 대대로 방어정면이 부여됐다. 뒤에 예비대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에는 증강된 연대규모가 해안선에 배치되는 것이 적합하다. 또한 대략의 작전계획을 담은 배치략도라고 할지라도 작전계획에 들어가야 할 장애물, 화력지원 요소는 물론, 군수·물자·통신·의무 등의 전투지원 요소는 포함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25일 미 제10군단이 영흥만 해안에 상륙했을 때, 북한 지상군의 대응은 지리멸렬한 것이었다. 영흥만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의 작전이 바로 ‘원산상륙작전’인데 작전기간 동안 미군을 괴롭힌 것은 해안의 방어부대가 아니라 소련 군관의 계획과 준비에 의해 동원된 웅도 주민들이 설치한 각종 기뢰였다.
이 배치략도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북한군에게는 후방지역의 방어에 투입할 만한 충분한 규모의 전력이 없었다. 둘째, 계획이 작성된(혹은 보완된) 날짜(1950년 9월 15일)를 볼 때,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사전에 되지 않았다.
셋째, 6·25전쟁 남침계획은 애초 소련 군사고문관에 의해 주도돼 작성된 것으로 개전과 함께 소련 군사고문관이 전장에서 이탈하자, 이후에는 북한 스스로 작전계획을 작성하거나 우발사태에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이 한 장의 노획문서가 주는 메시지는 노획문서군이 가진 잠재력과 가치를 잘 말해 준다.
소련의 역습 대비 훈련계획 처음 발견
나.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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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1950년 11월 5일 미군이 평양에서 입수한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다. 소련 군사고문관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것을 극동군사령부 통번역과가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진지·교통호·이동로·화기 및 장애물 배치 등의 전술 요소와 제원을 표시했다. |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은 1949년 한 해 동안 북한군을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당시 대부대 기동연습은 물론 각종 전장상황하에서의 형태별 작전을 구분한 교육훈련도 실시했다. 이 전술노트도 교육훈련을 위해 작성된 교안(敎案)일 것이다. 실제의 크기는 60cm×90cm가량 된다.
그동안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은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과 이를 위한 교육훈련에만 초점을 맞춘 것으로 연구됐었다. 하지만 이 전술노트를 통해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유엔군의 역습에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사연구의 분야가 북한군의 방어계획 분야로 넓혀지는 출발점인 것이다.
‘해안방어계획 전술노트’ 외에도 2013년 수집을 통해 사격술, 포술, 진지구축술, 대전차호 구축요령, 통신선로 구축술 등에 관련된 다수의 전술노트를 입수했다. 해당 기록물의 연구·분석은 군사적 차원에서도 당장 시급히 진행돼야 할 것이다.
다. 소총 분해도(1891년식 보병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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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년식 소련제 모신-나간 소총의 분해도. 6·25전쟁 당시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다양한 총기류를 제공받았다. |
이 분해도는 북한군이 교육훈련을 위해 사용한 걸개식 교안으로 실제의 크기는 60cm×90cm가량 된다. 1950년 11월 16일 평양 근처에서 노획해 11월 20일에 즉각 번역했다. 적 무기와 장비의 제원 파악은 승패의 중요한 요소였기에 당연한 조치였다. 이외에도 1943년식 기관단총, 1937년식 82mm 박격포, 1927년식 76mm 연대포, 각종 지뢰와 수류탄 등의 분해도 및 조작요령을 담은 교안도 입수해 분석 중이다.
각 무기류에 관한 교안의 작성수준과 정확도를 보면, 당시의 수준으로서는 매우 높은 것이다. 실전적인 교육을 하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전쟁발발 전 얼마나 치밀하게 전술·전기 측면에서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군 개개인은 잘 준비된 교육훈련에 의해 6·25전쟁 개시 전까지 전투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획문서군의 연구·분석은 북한군이 개전과 함께 물밀 듯이 연전연승하면서 남하할 수 있었던 숨겨진 이유를 말해 준다. 지금까지 6·25전쟁의 초전(初戰) 연구는 소련이 지원한 전차나 포병, 전투기와 신무기에 의한 북한군의 압도적 우세, 물리적 기습효과, 아군의 심리적 충격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러나 이번에 입수한 북한군 교육훈련 관련 기록물을 바탕으로 북한군 개개인의 숙련된 전투기술이 그 근본적인 전투력 우세의 바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군이 최첨단 무기체계와 장비의 구비뿐만 아니라 소부대 훈련과 대부대 기동훈련에도 매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戰犯國 독일도 NARA에서 東獨 문서 가져가
노획문서군은 학자들에 의해 충실히 연구·분석된 편이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중요한 역사적 사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노획문서군 속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내용들이 분석되지 않은 채 전문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이 노획문서군의 환수 문제다. 이 기록물들은 한반도에서 전시에 미군이 노획해 가져간 것이고, 언젠가는 이 땅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미군이 북진(北進)하면서 38선 이남의 영토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노획한, 즉 남한 지역에서 노획한 기록물들이라도 먼저 환수돼야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북한 지역에서 노획했던 기록물들도 적절한 시기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우리가 환수할 때가 오리라고 본다.
RG 242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기록물을 한데 모아 ‘적국 노획문서군’으로 명명해 미국으로 가져가면서 형성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국을 미군이 수복하는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수많은 문서들을 노획했다. 여기에 6·25전쟁 당시 북한 노획문서가 추가돼 오늘날까지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1983년 그레나다 침공 시 획득한 기록물도 포함돼 있다.
필자가 RG 242 문서의 환수추진을 꺼내는 이유가 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노획문서군은 해당 국가가 그것을 이미 환수했기 때문이다. 기록물의 분량과 종류가 어마어마했던 만큼,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이 들어갔다. 그래도 그들은 한 장의 문서도 빠뜨리지 않고 깔끔하게 환수해 갔다. 미 문기청에 같은 형태의 사본(마이크로필름, 사진, 동영상, 복사한 기록물 등)을 만들어서 인계하고, 해당 기간 동안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상당한 인력과 예산을 대는 조건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RG 242’는 선구적 노력을 한 헌신적인 학자들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십 년간 수집해 온 각 기관들이 있어서 대다수가 국내에 입수됐다. 국내에 수집된 분량과 분류된 수준도 다른 컬렉션에 크게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북방한계선(NLL) 포격 등 북한의 도발에 직면한 우리의 안보상황에서 전쟁 문서의 수집은 한가롭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 E. H 카(Carr)가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것처럼, 과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챙기는 민족만이 미래가 있다는 것을 미국 땅에서 확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