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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맥깨비 연대장, 李範英 대령의 6·25와 베트남전쟁 <下>

尹必鏞 장군의 ‘호출’로 맹호부대 전투대대장 발탁… 월맹 18연대 섬멸로 무공훈장

정리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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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英
⊙ 80세. 평남 중화 출생.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27기, 육군대학 수석졸업.
⊙ 제11사단 9연대 3대대 9중대 1소대장으로 6·25전쟁 중 금성지구 전투 참전.
    십자성부대 1군수지원단 부단장,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베트남전 참전.
⊙ 육본 작전참모부 전쟁계획 장교, 3군단 정보·작전참모, 1군사령부 정보처 기획과장,
    2사단 17연대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력처 과장 역임. 육군 대령 예편.
⊙ 서훈: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베트남 대통령 훈장 등.
주월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 시절의 이범영 대령.
  1964년 9월 전군에서 선발된 중령 61명, 소령 39명 등 총 100명이 육군대학 1965년도 정규 과정에 입학했다. 이는 향후 승진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을 의미했고, 실제로 졸업하면 주요 보직에 배치되고 진급도 보장됐다.
 
  장모님과 아내(이봉월) 그리고 두 돌이 된 아들(태일)과 함께 열차를 타고 육군대학이 있는 경남 진해시로 갔다. 방을 하나 얻어 네 식구가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육군대학에 들어가 군 생활 중 처음으로 관사를 배정받았다. 방 두 칸에 거실과 목욕탕이 있는 집, 지금껏 전전하던 단칸방, 사글셋방과 비교하면 ‘대궐’이었다.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관사에는 지성한(池聖漢) 소령이 살았다. 지 소령은 미국에 유학 가서 우리나라 최초로 거짓말 탐지기에 대한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 후에는 육군의 헌병과 보안부대, 경찰과 검찰 수사관들에게 거짓말 탐지 기술을 가르친 우리나라 거짓말 탐지 기술의 개척자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장교였던 그는 탤런트 심은하(沈銀河)씨의 시아버지로, 현재 한성실업 회장과 서울마주협회 회장으로 있다.
 
  육군대학 교육 기간 중 생활비가 모자라 부득불 초등군사반 졸업 때 우등상 부상으로 받은 금메달을 팔아야만 했다. 그 후 금메달은 똑같은 것으로 다시 복원해 갖고 있다. 그러나 그때 팔았던 아내의 결혼반지는 다시 해주지 못했다.
 
  우리는 입교 후 핵무기학과 참모학을 먼저 배웠다. 나는 첫 핵무기 시험을 잘 치러 A학점을 받았다. 우리 정규 과정 동기생 중에는 육사 11기생 중 최초로 선발돼 입교한 소령이 17명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김복동(金復東) 전 육사교장, 이기백(李基百) 전 국방부장관,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부장관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성적은 거의 B학점 이하였고 C, D학점인 장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육사 출신 학생 주동으로 재시험을 건의했다. 꿈을 갖고 입교한 그들이기에 낮은 성적에 실망했고, 재시험을 통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고자 했다. 교수단장 백문오(白文梧) 대령(육사 특별8기·초대 1공수특전단장 역임)은 “똑같은 조건하에서 치른 결과에 대해 재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일축했다.
 
 
  車圭憲 장군, 월남에 갈 것 권유
 
1969년 4월 2일 파월 청룡부대가 베트남 쾅트리 지역에서 작전 중에 있다.
  그러나 교수단의 건의를 무시하고 육군대학 측은 전원 재시험을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는 골치 아픈 핵무기 시험을 다시 한 번 치렀다. 시험 성적은 1, 2차 시험을 합산해서 평균 점수로 결정했다. 다행히 나는 재시험에서도 A학점을 받아 핵무기학 1등의 성적을 얻었다.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야전군 전술, 군단 공격과 방어 등에서 1등을 해 육군대학 수석 졸업자로 확정됐다. 졸업식 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제71호 우등상과 부상으로 ‘대통령상’이란 글씨가 음각된 금시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앓고 있던 폐결핵이 완치되지 않아 오후 교육시간에 들면 미열이 났으나 결핵약을 먹어가며 악전고투를 한 결과였다.
 
  그 기간에 식단이란 밥 한 그릇에 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몽고 간장을 비벼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이 식단의 전부였다. 형편이 좋아지면 계란을 넣어서 먹는 것이 유일한 영양식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육에 시달려 체중이 줄어든다 야단이었지만, 나는 입교할 때 체중(53kg)보다 6kg이나 불었고 폐결핵도 완치됐다. 졸업식에서 내가 대통령상을 받았고, 김복동 소령은 5등상인 육군대학 총장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1965년 6월 19일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2년여 육군대학 교관으로 근무한 후 육본 인사담당 장교로 전속이 됐다. 모든 장교가 희망하는 자리였다. 차규헌(車圭憲) 준장(대장 예편·교통부장관 역임)은 지금껏 인사와 군수 등 이권과 관련한 업무를 취급해 보지 않은 장교 중에서 담당 장교를 선발하라고 했다.
 
  나는 인사담당 장교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개인적인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인사 장교의 자리는 육군 장교 운영 방침에 따라 전후방 장교들의 보직을 결정하는 자리다. 많은 희망자 중 한 사람만 보직을 받고, 탈락한 사람들은 인사 담당자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1968년 파월 장교를 선발했다. 그 무렵 동기생들이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고자 찾아왔다. 베트남에 파병되면 국내의 봉급과 미군(美軍)이 지급하는 급료를 이중으로 받는 혜택이 있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휴대 물건을 장만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었다.
 
1965년 6월 19일 육군대학 수석 졸업 때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한 육군대학 김익권 총장으로부터 대통령상을 받고 있다.
  내가 베트남에 파병되기 1개월쯤 전이었다. 그 무렵 맹호부대장(수도사단장)으로는 윤필용(尹必鏞, 육사8기) 장군(수경사령관 역임)이, 십자성부대장으로는 차규헌 장군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교보직처장 차규헌 장군이 나를 불러 “주월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 부단장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군수 업무 분야는 경험이 없어 곤란하다”고 말했다. 차 장군은 “인사 업무도 경험이 없이 잘했으니, 군수 업무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차 장군은 1년간 열심히 일한 나에게 보상의 성격으로 군수부대 부단장 자리를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려면 군수부대보다는 전투부대 대대장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차 장군은 내게 “대대장은 베트남을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으니 부단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나는 차규헌 장군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성부대 부단장으로 가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 중령으로 십자성부대 부단장의 직위는 경제적으로 얻을 것이 많아 요직(要職) 중의 요직으로 평가받는 보직이었다. 차 장군으로서는 모두 가고자 하는 그런 자리를 마다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8년 10월 28일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 부단장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나는 육본에 근무하는 동안 집이 없었다. 돈암동 처가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베트남으로 출국할 때는 처갓집 신세를 더 이상 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세금 20만원을 차용해 6·25 때 납북된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돈암동 소재) 집 작은방에 전세로 입주해 가족을 독립시켜 놓고 떠났다. 그 방은 안재홍 선생 댁 본채 뒤에 방을 들인 ‘곁방’이어서 낮에도 전깃불을 켜야 했다. 아내와 아들, 딸 셋이 몸을 누일 여유도 없는 좁은 단칸방이었다.
 
  항공편으로 사이공 공항에 도착했다. 퀴논에 있는 부대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에 하룻밤을 장교 숙소에서 잤다. 그곳에서 장교들에게 여비로 지급한 미화 30달러를 군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해서 1대 1로 바꾸었다. 베트남에 먼저 와 있던 약삭빠른 사람들이 새로 파월된 나 같은 숙맥(菽麥)을 이용하고 있었다. 가족이 안고 있는 부채가 걱정됐다. 그래서 1지원단 경리과장 민모 소령에게 3개월의 급료를 선지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지급 받은 돈을 경리과를 통해 아내에게 송금해 빚을 갚도록 했다.
 
  내가 남들처럼, 받은 월급으로라도 물건을 사서 보냈더라면 아내의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그런 일에 꾀라곤 낼 줄 모르는 나는 받은 돈을 그대로 현금으로 송금했다. 귀국한 후 나의 바보 같은 행동(실은 정상이지만)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맥깨비’라 했다. 맥깨비란 이북 사투리로 꽉 막혀서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사람을 비하(卑下)해서 하는 말이다. 즉 맹꽁이란 뜻이다.
 
  귀국 후 이따금 아내에게 “남들은 계급이 낮아도 돈을 벌어가지고 왔다는데 당신은 뭐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전사(戰死)해서 돌아오는 장병들도 있는데, 살아 왔으면 됐지 그 이상의 선물이 어디 있느냐”고 목청을 높이면서 이재에 무능한 나 자신을 자책했다.
 
 
  尹必鏞 장군, 운동 잘하는 내게 호감 가져
 
주월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 취임 시 지휘관 견장을 달아주고 있는 나동원 대령(연대장. 맨오른쪽), 권익현 중령(1대대장. 오른쪽 둘째), 이승수 중령(3대대장. 왼쪽).
  처음 베트남에서 3개월 동안은 제1군수지원단 부단장으로 근무했다. 나보다 고참인 대대장(공병대대, 수송대대와 청룡부대를 지원하는 제11군수지원대대)들보다 상급자 직위에 앉게 됐다. 우리 제1군수지원단은 맹호부대 사령부 근처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군수를 지원했다.
 
  주말이면 맹호부대와 우리 1지원단은 운동경기로 우의를 다졌다. 맹호부대장 윤필용 장군이 좋아하는 배구 경기를 시작으로, 야구, 탁구 등을 했다. 숫자가 월등히 많았던 맹호부대였지만, 9인조 배구 경기에서 두 차례나 우리 1지원단에 패했다. 우리는 공격력은 열세였지만, 내가 백 센터에서 웬만한 볼은 모두 전위 센터까지 올려주었다. 내가 배구, 야구, 탁구, 테니스에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것을 운동을 좋아했던 윤필용 장군이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당시 맹호부대 참모장은 소준열(蘇俊烈) 대령(1군사령관 역임)이었다. 그 외 인사참모 조진희(趙鎭禧) 중령(육본 부관감 역임), 정보참모 유재구 중령(육군 소장 예편), 작전참모 손영길(孫永吉) 중령(육군 준장 예편), 군수참모 정종태 중령 등이 자리를 맡고 있었다. 소준열 참모장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근무 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들은 윤 장군에게 나를 우호적으로 평가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윤 장군은 나를 더욱 따뜻하게 대했다.
 
  우리 1군수지원단은 대민(對民) 업무도 담당했다. 그 무렵 베트남의 30여 개 성(省·한국의 도에 해당)의 성장은 대령 또는 중령이 임명돼 있었다. 베트남은 군정(軍政)을 수행하고 있었다. 맹호부대 관할 지역에 있는 퀴논 성은 중령이 성장(省長)이었다. 1969년 1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한 퀴논 성장은 오후 7시에 미군과 한국군을 초청해 퀴논 시내에서 진급 파티를 열었다.
 
  나는 민사과장을 대동하고 진급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장 밖에서는 베트남의 유명 여자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퀴논 성장과 미 고문관, 그리고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퀴논 성장의 관사에서 파티를 즐겼다. 부화하기 직전의 병아리를 털째로 요리하는 특이한 요리도 있었다. 나는 까다로운 식성은 아니었지만, 그 음식만은 먹지 못했다. 밤 10시가 되자 파티가 끝났다. 퀴논에서 1지원단까지 지프로 30분 거리를 가야 했다. 우리는 베트콩의 저격을 피하기 위해 최고 속력으로 달려 부대에 복귀했다.
 
베트남에서 창군기념작전 중 우종림 맹호부대 29연대장에게 작전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다.
  1969년 2월 어느 날, 맹호부대 인사참모 조진희 중령이 밤중에 찾아와 “26연대 2대대장이 보직 대기 발령되었다”며 “내일 아침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해야 한다”고 했다. 조 중령은 “주월군사령부로부터 이 중령의 부대 간 ‘측방 교류’ 보직에 대해 동의를 받았다”며 “내일 아침 대대장직을 인수해 작전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다음날 사단에 가서 보직 신고와 동시에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했다. 베트남 파병 장교는 통상 1년이 임기다. 따라서 주월군 내에서 부대 간의 측방 교류에 의한 보직 변경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특별 케이스로 십자성부대에서 맹호부대로 소속이 변경됐다.
 
  대대장으로 임명된 첫날 부대 상황을 파악했다. 저녁에 26연대장 나동원(羅東元) 대령(육군 소장 전역)에게 부대의 이상 유무를 보고했다. 연대장은 나에게 “이곳은 야전이니까 이상이 있을 때 중요한 사항만 보고하라”며 “곤란한 사고 보고 등은 참모 계통으로만 보고해도 된다”고 했다. 연대장은 내게 사고에 구애받지 말고 소신껏 부대를 지휘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 대령은 통이 큰 지휘관이었다.
 
  우리 2대대는 퀴논 남쪽 송카우 근처에 배치돼 있었다. 대대의 위치는 사단사령부와 연대본부의 중간이었다. 사단사령부에서 대대로 연결되는 1번 국도변에 미군 제184병기대대의 대규모 탄약 저장소가 있었다. 그곳의 경비는 우리 대대의 8중대가 담당했다. 베트콩이 수시로 탄약고(彈藥庫)에 침투해 탄약고 폭파를 시도했다. 그런 베트콩의 침투 폭파를 예방하고 탄약창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8중대의 임무였다.
 
  어느 날 밤중에 베트콩 3명이 탄약고 외곽 철조망을 뚫고 침투를 시도했다. 우리 8중대 병사들이 철조망을 절단하고 있는 적을 사살해 탄약창의 폭파를 막고 미군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 일로 미군 제184병기대대장의 감사장과 기념 방패를 받았다.
 
 
  베트남 간호사 채용해 産婆 업무 맡겨
 
1969년 10월 2일부터 시작된 창군기념작전에서 맹호부대 윤필용 사단장에게 대대의 월맹군 포위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작전 중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한번은 연대 작전 중 적의 부비트랩(지뢰)이 매설된 고지에 대대 작전 지휘소를 정한 때였다. 베트콩은 아군의 행동반경을 예상해 미리 부비트랩을 매설해 인명을 살상하거나 헬기 폭파를 시도한다.
 
  대대 지휘소로 예정된 고지에 대대 지휘부가 탑승한 헬기가 착륙했다. 주변을 수색해 헬기 착륙 지점에서 불과 20m 떨어진 곳에서 베트콩이 매설한 부비트랩(81밀리 박격포 포탄)을 발견했다. 즉각 대대 지휘부 요원들을 대피시키고 크레모어로 부비트랩을 폭파 제거했다. 20m만 더 가까이 헬기가 착륙했더라면, 대대장인 나와 대대 지휘부 요원이 모두 희생될 수도 있었다.
 
  또 한번은 3개 대대장이 미군 UH-4 헬기에 동승해 작전지역으로 이동하다 헬기 고장으로 적 진지 속 정글에 불시착했다. 아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적 진지 속이었다. 만일 월맹군의 공격을 받았다면, 권총 외에 아무런 무기가 없는 대대장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헬기를 긴급하게 수리해 불시착한 지 30여 분 만에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2대대는 파월군 부대 중 유일하게 대대 의무대에 베트남인 간호사 1명과 보조간호사 1명을 고용해 산파(産婆) 업무까지 보도록 했다. 이런 사실이 베트남 주민들에게 알려지자 베트남인 산모들은 출산일이 되면 우리 대대 의무대에 입원해 출산했다. 퇴원할 때는 대대에서 쌀까지 전달해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대대에 처음 부임해 각 중대의 작전기지를 순찰하고 마지막으로 대대 의무대를 순찰했을 때다. 베트남인 산모 두 명이 신생아와 같이 산실(産室)에 누워 있었다. 대대장이 방문한 것을 안 그중 한 산모가 나에게 자기 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기 이름을 따이한(대한, 즉 한국이란 뜻)이라고 지었다. 한국 군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기”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작전상 우리 8중대의 기지 일부를 철수해 타지역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 지역 주민들이 “베트콩의 공격 약탈에서 마을을 계속 지켜달라”며 대대본부까지 몰려와 데모를 벌였다. 상황이 종료되면 곧 복귀하겠다고 설득하자, 촌장은 데모 군중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갔다.
 
 
 
잠자리떼처럼 하늘을 뒤덮은 UH-4 헬기들

 
1969년 11월 12일 월맹군 무기 노획 600정 돌파 공로 방패를 필자에게 수여하는 윤필용 사단장.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 2대대의 대대본부는 베트남의 3대 휴양지 중 하나인 퀴논 남쪽 송카우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엔 수만 그루가 넘는 대규모 야자수 재배 단지가 있었다. 대대본부 언덕에 있는 헬기장에 올라가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야자수 수림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 야자수 수림은 하노이와 사이공을 연결하는 1번 국도에서 먼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야자열매는 말려서 식용으로 수출하고, 잎은 지붕을 덮는 이엉으로 사용했다.
 
  1969년 7월 7일부터 7월 21일까지 보름 동안 ‘혜산진 9호 작전’이라 명명된 연대 작전을 펼쳤다. 연대의 1, 2, 3대대가 모두 동원됐다. 대대 집결지에서 작전지역으로의 이동은 통상 미군이 지원하는 헬리콥터로 했다. 분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소형 UH-4 커뮤터 헬기와 소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대형 시누크 헬기가 동원됐다.
 
  각 중대마다 시누크 헬기 한 대와 UH-4 헬기 12대, 대대 지휘소용 UH-4 헬기 3대 등이 동원됐다. 1대대와 3대대도 같은 수의 헬기가 동원돼 작전지역으로 이동했다. 100대가 넘는 헬기의 이동으로 작전지역 상공은 가을 하늘의 잠자리떼처럼 장관을 이뤘다.
 
  베트남의 지형은 우리나라처럼 높은 산과 강, 도로 등 지형이 뚜렷하지 않은 정글의 연속이다. 지휘관과 지휘자의 독도법(讀圖法)의 숙달 정도는 전투의 승리를 가늠케 한다. 헬기 조종사는 적정(敵情)을 핑계로 자신이 편한 대로 착륙지점을 임의로 변경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전지역으로 출발하기 전 각 중대장에게 계속 지도와 현지를 대조해 계획 지점에 정확히 착륙하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우리 대대의 각 중대는 계획대로 정글 속 착륙 지점에 정확히 착륙해 포위 작전에 들어갔다. 일부 병력은 헬기가 지상에 착륙한 후에 내렸지만, 대개의 전투 병력은 정글 속이라 헬기가 지상에 착륙할 수 없어 헬기가 지상 가까이 접근하면 공중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그런데 인접 3대대의 일부는 미군의 지원 헬기가 엉뚱한 곳에 내려놓고 기지로 복귀하는 바람에 정글을 뚫고 계획된 작전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적에 대한 포위망이 형성된 후 작전이 시작됐다.
 
  전방의 중대와 소대의 무전기에서는 급박한 작전 상황이 수신됐다. 저격수와 부비트랩 등 항시 위험이 도사려 경계에 집중해야 했다. 우리 대대 장병들은 베트콩의 저항에 잘 대응해 큰 희생 없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작전이 끝난 후 1969년 8월 12일 나는 대대 장병들의 용감한 전투 결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월맹군 18연대에 사단급 작전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창군기념작전 성공 격려차 맹호부대 26연대를 방문했다. 가운데가 채명신 사령관, 왼쪽 두 번째가 필자.
  1969년 10월 2일부터 10월 19일까지 맹호부대는 3개 연대 9개 대대를 총동원해 작전을 펼쳤다. 월맹군에 대한 18일간의 대규모 사단 작전을 우리는 ‘창군 기념 작전’이라고 불렀다. 작전 개시 전 연대에서 하달된 정보판단과 작전 기간 중에 수집된 첩보는 월맹군 제18연대와 빈딘성 베트공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나는 각 중대장에게 사단의 작전 계획 개요를 설명하고, 우리 대대의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1969년 10월 2일 아침 8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 대대는 미군이 지원하는 헬기에 탑승했다. 전 대대 장병이 일제히 각기 배정된 작전지역으로 이동했다. 월맹군이 언제 어디에서 저격할지 알 수 없었다.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이 바로 작전 개시 시각이었다.
 
  우리 대대의 각 중대(4개 중대)는 계획한 헬기 착륙장에 착륙했다. 대대 지휘부 요원과 5중대의 일부 병력이 탑승한 시누크 헬기는 계획 지점보다 200여 미터나 떨어진 곳에 착륙하려 했다. 나는 급히 헬기 조종사에게 “착륙 지점이 틀렸다”고 소리지르고 “계획된 착륙 지점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헬기는 다시 이륙해 원래 계획한 착륙 지점으로 이동해 대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5중대는 인접 중대와 합류했다.
 
  드디어 작전이 개시됐다. 첫날 작전은 성과 없이 사병 1명의 희생만 나왔다. 보급품을 인수하기 위해 헬기로 뛰어가다 헬기의 회전익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며칠 동안 월맹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 사단이 동원된 대규모 작전에서 적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면 완전한 작전 실패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작전지역을 변경해 지금까지 작전하던 지역의 반대 방향으로 부대를 재배치했다.
 
  나는 새로 명령받은 작전지역에서 나영호(羅永昊) 대위(육사18기·소장 전역)가 지휘하는 5중대와 이달신 대위가 지휘하는 6중대 그리고 8중대를 일선 공격 부대로 정했다. 강춘옹 대위가 지휘하는 7중대는 예비 중대로 해 비상시에 대비하도록 했다.
 
  1969년 10월 11일 드디어 새로 설정한 작전지역인 누이기아켓산(山)의 서남방 능선과 계곡을 수색하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모든 전투부대와 대대 지휘소가 정글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작전 상황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다. 대대 지휘부와 각 중대 간의 통신은 오직 무전기에만 의존해야 했다.
 
  제1선 공격 부대로 배치된 나영호 대위의 5중대와 이달신 대위가 지휘하는 6중대는 계획대로 전진해 나갔다. 그러나 박모 대위가 지휘하는 8중대는 매복한 적의 저격으로 8명이 전사하는 등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게다가 그날 밤 적의 기습으로 추가로 2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8중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장병들의 전의는 극도로 저하됐다.
 
  8중대를 예비 중대로 돌리고 강춘옹 대위의 7중대를 신속히 8중대와 교대했다. 새로 작전 임무를 받은 7중대장 강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야음(夜陰)을 이용해 8중대의 작전지역으로 이동해 월맹군 퇴로 차단 작전에 들어갔다. 월맹군의 저항에 주춤거리던 대대의 작전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7중대장 강 대위는 지나칠 정도로 용감한 장교였다. 월맹군은 퇴로가 막히자 정글 속 바위틈에 있는 동굴 속으로 숨어들었고, 강 대위도 추격을 위해 동굴로 뛰어들었다. 용감하게 전진하던 7중대장 강춘옹 대위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나는 무전기로 7중대 통신병에게 “중대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통신병은 “강 대위가 직접 적을 추격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수색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당장 동굴 속에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동굴 속 수색은 일선 사병들이 해야 하는 임무이기 때문이었다.
 
  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지휘할 수 있는 지상(地上)에 있어야 한다. 또 대대장의 명령을 수령하기 위해서도 항시 교신이 가능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대장이 정위치를 벗어나 직접 동굴 속으로 추격해 내려갔다니 큰일이었다. 중대장의 용맹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신의 지위를 망각한 행위였다.
 
  내 지시를 받은 강 대위는 즉시 동굴에서 나왔고, 중대를 정상적으로 지휘해 작전을 계속 수행했다. 적 섬멸에 결정적 공을 세웠던 7중대장 강춘옹 대위는 그 후 애석하게도 빈쿠푸 반도 수색 중 수중동굴로 진입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글 포위망에 연막 피어오르자 ‘승리 예감’

 
1969년 10월 31일 윤필용 맹호 사단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있다.
  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애를 먹던 사단 작전은 마침내 적의 거점(據點)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적의 강렬한 저항을 받으면서 우리 대대가 적의 거점을 발견한 것이다. 사단의 모든 이목이 우리 대대의 작전 결과에 집중됐다.
 
  나는 적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산 위에서 저지대로 하향 공격하던 3개 중대 중 나영호 대위가 지휘하는 5중대에 신속히 산 아래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산 아래로 도주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내 명령을 받은 나 대위는 정글 속임에도 불구하고 중대를 신속히 산 아래로 이동시켜 월맹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산 위에서는 6중대와 7중대가 압박을 가하고 산 밑에서는 5중대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완전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제 포위망 속 동굴 안에 있는 적을 발견해 소탕하면 됐다.
 
  10월 15일 11시경, 윤필용 사단장과 우종림(禹鍾淋) 연대장(종합학교 14기·육군 소장 예편)이 사단 내에서 유일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우리 대대 지휘소로 독려차 왔다. 105밀리 야전포병부대도 이동 배치했다. 베트남전에서는 야전포병부대가 직접 작전에 동원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단장은 우리 대대의 작전 결과가 사단 작전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포병 부대까지 작전에 동원했던 것이다.
 
  울창한 정글 속이라 아군의 병력 이동 상황은 물론 적을 완전하게 포위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직 일선 중대장들의 무전 보고에 의해 지도상에서만 포위망을 예상했다. 윤필용 장군은 내게 “포위망의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각 중대장에게 “소대별로 현 위치에서 연막탄을 한 발씩 터뜨리라”고 지시했다. 명령을 내린 후 잠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연막 확인 후 포위망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잠시 후 정글 속에서 피어오른 연막은 이러한 걱정을 단번에 해소시켰다. 지도상으로 보고한 위치에서 정확하게 연막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사단장과 연대장은 포위망이 완전하게 형성된 것에 만족했는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때 이미 이 전투는 승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대대의 5, 6, 7중대는 정글 속을 헤치며 포위망을 압축해 갔다. 연대장 우 대령은 선전용 확성기를 활용, 군가(軍歌)를 방송해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6·25전쟁 때 적근산(赤根山) 전투에서 경험한 것처럼, 지휘관은 수시로 부하들에게 지휘관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잠시 후 전과 보고가 무전을 통해 접수되기 시작했다. 이번 사단 작전에서 우리 대대는 적군 11명을 생포한 것은 물론, 적 사살 92명,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5문 등 각종 장비를 노획했고, 적이 비축해 놓은 식량 저장소를 발견해 많은 식량(쌀)도 확보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쌀은 정글 속에 뿌리도록 지시하고 포로와 장비만을 후송했다.
 
  사단 작전 기간 중 연대의 타 대대 작전지역에서는 적이 발견되지 않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육사 11기생 권익현(權翊鉉) 중령(한나라당 상임고문 역임)이 지휘하는 우리 연대 1대대는 적의 대규모 무기 저장소를 발견해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
 
  1969년 10월 31일, 나는 우리 대대 장병들의 전투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1969년 11월 12일에는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게서 적 무기 노획 600정 돌파 공로로 전공 표창 및 방패를 받았고, 이어 1969년 12월 13일에는 베트남 대통령의 훈장도 받았다.
 
  나는 십자성부대 제1지원단 부단장으로 3개월 근무하고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1년을 근무하는 등 총 15개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70년 3월 성공적으로 파월 임무를 마치고 귀국해 아내와 아들딸을 다시 만났다. 귀국해 아내의 얼굴을 보니 얼굴 전체에 새까맣게 검버섯 같은 것이 피어 있었다.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고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 속에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일면식도 없던 鄭昇和 장군, 3군단 정보참모로 ‘호출’
 
2사단 17연대장 취임 때 백윤기 사단장으로부터 연대기를 인수받고 있다.
  1970년 3월 베트남전 파병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육본 작전참모부 전쟁계획과에 부임, 근무했다. 국가기밀을 취급하는 전쟁계획과는 육군본부 B-2 벙커, 즉 지하 벙커에서 근무했다. B-2 벙커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난 날 김재규(金載圭, 육사2기)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鄭昇和, 육사5기) 육참총장이 최초로 도착한 곳이고, 비상시 육군 지휘본부로 사용하는 지하 기지다. 환기 장치가 불완전해 야전 점퍼 깃에 곰팡이가 날 정도였지만, 장차전에 대비해 각종 전쟁계획을 수립하는 중요한 업무를 했다.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전략정보과정 교육을 받던 중 대령으로 진급했다. 동기생 중에서 가장 먼저다. 1971년 12월 한신 대장이 지휘하는 1군사령부 정보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임 후 한신 대장에게 정보처를 대표해 업무 보고를 했다. 보고를 잘못하면 “무시기?(뭐라고 되묻는 함경도 사투리)”라며 기합이 시작된다는 풍문이 있었다.
 
  나는 기죽지 않고 자신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업무 보고를 위해 준비해 간 차트는 옆에 세워두고 사령관을 직접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고 눈싸움하듯이 설명했다. 결국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았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신 대장은 자신 없이 보고하는 장교에게는 연속적으로 질문을 하고,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다 판단되는 장교에게는 후한 점수를 준다는 것을 그 후 알게 됐다.
 
  고급 지휘관들은 측근 참모를 선임할 때 똑똑한 장교보다는 성실하고 인간성이 좋은 사람을 원한다. 대령까지 진급한 장교라면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책임 전가나 배신하지 않을 성실한 장교를 원하는 것이다.
 
  3군단 정보참모가 연대장으로 영전하며 공석(空席)이 생기자, 3군단장 정승화 장군이 정보참모로 나를 임명했다. 당시 정승화 장군과는 일면식은 물론이고 아무 인연도 없었다. 정보참모는 전시에 적, 기상, 지형 등에 대해 지휘관을 보좌하는 참모다. 휴전 이후에는 정보참모의 기본 업무에다 비무장지대(DMZ)의 작전 업무까지도 담당했다.
 
  정승화 군단장은 일과가 끝나면 나를 불러 테니스 치기를 좋아했다. 강원도 산골의 3군단에서는 테니스가 유일한 낙이요, 체력단련 수단이었다. 어느 날, 정승화 군단장과 한 조가 돼 테니스를 치다 로열박스 안에서 난로를 가운데 놓고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그때 정승화 군단장이 내 아들 태일의 서울 유학에 대해 물었다. 당시 태일은 서울에 있는 이형주(李亨柱) 장군 댁에 기거하며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정승화 군단장은 “아들을 맡긴 댁에 감사의 표시를 하라”며 “햅쌀이 나오면 한 가마 사다 드리거나, 강원도 송이버섯을 선물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형주 장군은 당시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있었고, 내가 21사단 63연대 9중대장으로 복무할 때 부연대장이었다.
 
1975년 여름, 2사단 17연대의 모든 군인 가족이 참가하는 군인 가족 사격 대회를 열었다. 연대장과 대대장, 부사관 가족까지 군복을 입고 입소해 남편들의 군 생활을 체험하도록 했다.
  이 장군은 나와 친인척 관계도 아니었는데 내가 남한에 연고가 없는 것을 알고 내가 전방부대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올 때까지 아들의 서울 유학을 3년 동안 맡아 돌봐주고 있었다. 사실 아들을 맡겨놓은 채 하숙비는커녕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내가 얼마나 답답해 보였으면 그런 충고를 할까 생각하며 부끄럽고 고맙게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지금껏 이형주 장군 내외를 양부모로 모시고 있다.
 
  3군단 정보참모 시절, 다른 장교들은 모두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가족을 서울에 두고 독신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군단장 부인은 한 달에 한 번 군단으로 와서 며칠 기거하다 서울로 올라갔다. 정승화 군단장이 부대로 출근한 후 나의 아내가 군단장 부인을 찾아 말동무라도 해주었으면 좋을 일이었다. 남들 같으면 그런 기회가 없어서 못하는 처지였다.
 
  내가 군단 정보참모로 재직하던 1년 반 동안 아내는 단 한 번도 군단장 숙소에 개인적으로 방문하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료했을 군단장 부인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군단장은 내가 부대 업무는 잘 하지만 우리 내외가 너무도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1974년 가을, 6군단 지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대규모 사격 시범 훈련이 있었다. 전후방 각 부대의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이 참석했다. 시범 훈련장으로 출발하기 직전 출발 준비를 하던 정승화 군단장이 내게 “휴전 이후에 발생한 ‘3군단 설화 사건(1955년 3군단의 3사단 지역 향로봉에서 폭설에 고립돼 장병 215명이 사망한 사건)’ 개요를 요약해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연병장에는 이미 군단장 헬기가 사격 시범장을 향해 이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지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군단장이 시범장에 대통령보다 늦게 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급히 자료를 준비해야만 했다. 정보과로 급히 달려갔다. 정보과에는 내가 정보참모로 부임한 후 내 지시에 따라 6개월여에 걸쳐 작성한 《제3군단 지역 기상 분석》이란 책자가 있었다. 그 책 부록에는 과거 3군단 지역에서 발생한 3군단 설화 사건의 개요가 상세하게 수록돼 있었다.
 
  3군단 설화 사건의 개요를 급히 복사해 헬기를 탑승하려는 군단장에게 드렸다. 정승화 장군은 그 자료를 갖고 시범장으로 떠났다. 박 대통령은 전군에서 가장 험준하고 추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정승화 3군단장을 만나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3군단 지역 내 3사단의 설화 사건을 떠올리며 당시의 강설량과 희생자에 대해 묻고는 금년도 월동 대책도 질문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은 막힘없이 설화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다. 정승화 장군은 대통령을 만날 때 어떤 질문이 있을까 미리 예상하고 정보참모인 내게 설화 사건의 자료를 요구했던 것이다. 나 또한 3군단 정보참모로 보직된 후 3군단 지역의 지형과 기상의 특수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휴전 이후 계속 보관 중이던 20여 년간의 〈정보 일지〉를 근거로 《제3군단 지역 기상 분석》이란 책자를 작성했던 것이다.
 
  그 후 정승화 장군은 대통령의 신임을 더욱 얻었고, 군단장 임기를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총장까지 진출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준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모든 기회와 행운은 준비한 사람에게만 돌아온다는 사실 말이다.
 
 
  가슴 아팠던 일들
 
1992년 미국에 이민 온 지 13년 만인 2005년 4월 3일, 아내 이봉월과 함께 워싱턴 시내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 공원을 찾았다.
  1975년 1월 7일, 강원도 인제에 있는 제17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됐다. 17연대는 ‘쌍호부대’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초대 연대장은 백인엽(白仁燁) 대령(중장 전역)으로, 수도 서울을 방위하기 위해 수도 방위 연대로 창설된 부대였다.
 
  17연대는 6·25 한국전쟁 때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표창과 한국군 전 부대 중에서 최초로 연대 전 장병을 한 계급씩 승진시킨 특별 진급의 특전을 받은 부대였다. 따라서 17연대장으로 보직되는 것은 장교들에게는 큰 영예이며 서로 보직 받기를 원했다.
 
  ‘훈련은 전투처럼 전투는 훈련처럼’이란 말이 있다. 우리 17연대의 훈련은 전투처럼 강하게 실시됐다. 따라서 크고 작은 안전사고도 발생했지만, 훈련 중 발생한 안전사고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을 연대장이 처리하고 부하 장병에게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내무반에는 ‘잠자는 부대는 사고가 없다’는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한다. 즉 아무 일도 안 하고 잠만 자는 부대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열심히 훈련을 하다 보면 사고가 수반되기도 한다. 사고 발생을 염려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고가 내포된 표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 부대 내 안전사고에 대해선 관대하게 처리했다. 단 사고를 은닉하거나 지연 또는 허위 보고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안전사고는 한두 명의 희생으로 끝난다. 그러나 전시에 허위 보고에 따른 지휘관의 오판은 패전과 수많은 희생으로 직결된다. 6·25전쟁 때 3년간 전방 부대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체험하며 체득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전시에 지휘관은 후방에서 최전방 하급 부대의 보고에 의지해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결심해 작전을 수행한다.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전방의 각 부대가 포병의 사격 지원과 항공 지원, 병력 지원 등을 더 받기 위해 적의 공격 상황을 부풀려 보고한다면 현장을 관찰할 수 없는 지휘관은 오판을 하게 돼 정작 위기에 처한 부대를 지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연대장 재직 기간 중 가슴 아팠던 일도 있었다. 연대 기동 훈련 때 1대대 사병 두 명이 하천을 도하하던 중 급류에 빠져 익사한 사건이었다. 나는 작전 중이라 부대를 계속 지휘해야 했다. 부연대장은 연대 잔류 병력으로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두 사병의 시체는 강원도 산골의 급류에 휘말려 사고 현장에서 15km나 떨어진 하류 백사장에서 6개월 후 발견됐다. 군복의 명찰로써 우리 부대 사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신은 겨울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었고, 사고 발생 6개월 후에야 가족에게 인계할 수 있었다.
 
  전 연대가 기동 훈련에 출동한 사이에 신병들이 보충돼 왔다. 그중 하나가 부대에 온 날 밤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사단에서는 인제 지역 헌병 파견대장을 연대에 보내 진상을 조사했다.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하니 헌병대장이 찾아와 “그 사병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 틀림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나는 “자살이란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할 경우 팬티에 정액이 묻는다”고 했다. 그 사병 역시 팬티에 정액이 묻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람은 죽는 순간 사정(射精)하게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사병은 전방 근무에 대한 공포심 등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3군단장 정승화 장군이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영전했다. 후임 군단장으로 김학원(金學洹, 육사5기·중장 예편) 중장이 부임했다. 신임 군단장이 우리 연대 2대대의 훈련장을 방문했다. 군단장은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훈련 강평서(講評書)’를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것을 본 일도 없고 금시초문이기에 “없다”고 말했다.
 
  군단장은 “연대장이 상부의 지시도 잘 파악 못 하고 있다”면서 노발대발했다. 군단장이 돌아간 후에 알아보니, 1년여 전 김학원 장군이 1군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할 때 6·25전쟁 발발 이전에 당시 박정희 중위가 작성한 훈련 강평서를 입수해 훈련에 참고하라며 전 사단에 배포한 일이 있었다. 3군단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김학원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위 시절에 작성한 강평서를 입수해 복사 하달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충성심’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대장이란 자가 자기의 속내를 모르고 있다고 해서 화가 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6·25 전에 작성한 그 강평서는 잘 작성된 모범 강평서였다.
 
  6·25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일부 장교들은 명령 하달도 규정된 양식에 따라서 제대로 하달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6·25전쟁 수행을 위해 장교들을 속성으로 양성해 전방 부대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중위 시절에 훌륭한 강평서를 작성할 만큼 군사 지식도 풍부했던 것이다.
 
 
  ‘유리 구두’ 없어 파티에 못 간 신데렐라
 
2000년 8월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아들(이태일씨 텍사스주립대 교수)을 아내와 함께 축하해 주고 있다. 아들은 플로리다대 뇌암치료센터로부터 정상 세포의 손상 없이 뇌암 세포만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수학적 치료 방법을 의뢰받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1년8개월간의 연대장 임기를 마치고 1976년 9월 육본 인사참모부 인력처 방위병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위병과는 전군의 방위병 인력을 담당하는 부서다. 1976년은 내가 대령으로 진급한 지 4년째 되는 해로, 처음으로 장군 진급 심사에 오르는 해이기도 했다.
 
  대령 진급 4년차에는 대개 진급이 안 되는 경향이 있는데다, 나보다 2~5년 고참 대령들이 진급을 기다리며 몇 년째 버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번에 진급을 못 하면 다음해 5년차(대령의 계급 정년은 9년)에는 반드시 장군으로 진급할 것이라는 기대와 자신감을 가졌다.
 
  장군 진급 첫해가 지나고 1977년을 맞았다. 반드시 장군 진급을 하리라고 목표를 정한 해였다. 전방 전투부대의 지휘관 및 참모와 교관 경력, 고급 사령부 근무 경력과 6·25전쟁, 베트남전 전투 경력, 각종 군사 교육과정과 육군대학 졸업 성적, 심지어 스포츠나 인간관계 면에서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령에 오르기까지 늘 1차로 진급해 왔고, 진급을 위해 한 번도 상관을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장교들은 내게 “장군으로 승진하는 데 직간접으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를 하려면 미리 준비하라”고까지 했다. 그들은 나의 장군 진급을 기정사실화했고, 그만큼 나는 장군 진급 심사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장군 진급을 눈앞에 두고 생각지 못한 문제가 돌출했다. 나에게는 모아둔 돈이 없었다. 그 무렵 근무처인 육본에서 거리가 먼 수유리의 집을 팔고 상관 부인의 조언으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단독주택을 구입해 살고 있었다.
 
  국민은행에서 200만원을 융자받은 집이었다. 수유리 집을 판 돈 430만원과 200만원의 사채(私債)를 얻어 융자금을 합해 830만원으로 집을 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만일 내가 장군으로 진급한다면 집안의 경제 사정은 적잖게 문제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장군이 돼 인사치레를 위해 집을 팔 경우, 사글셋방에 살아야 할 판이었다. 장군이 셋방에 살면 주위에서 청렴한 군인이라기보다 무능한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나는 돈을 버는 일이나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는 너무도 무능했다. 그저 없으면 없는 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았고, 돈 때문에 아등바등하며 살지 않았다. 대체 군 장교가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축재(蓄財)를 한단 말인가.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현재의 내 형편에서 장군 진급은 마치 오막살이집에 코끼리가 들어오는 것처럼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깨에 별을 다는 것이 군 장교의 최고의 소망이고 영광인데, 그 빛나는 영예를 단지 가정형편 때문에 주저하다니. 그러나 나는 내가 처하게 될 현실을 직시했다. 아무리 진급에 필요한 군사적 역량과 경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장군의 품위와 생활을 유지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장군 진급에 중요한 결격 사유라고 생각했다.
 
2004년 무렵 갑종27기 동기생들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했다. 가운데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필자.
  아내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대령 부인’이 ‘장군 부인’이 되려는 찰나에 ‘유리 구두’가 없어 파티에 못 가는 신데렐라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눈물을 머금고 군 생활에 막을 내려야 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다음날 아침 부대로 출근해 인사참모부장에게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다. 윤성민(尹誠敏) 인사참모부장(육사9기·국방부장관 역임)은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자네를 데려올 때는 다 생각이 있어서 데려왔다”며 “전역이 무슨 말이냐.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부장님의 말 속에는 나를 장군으로 진급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결국 전역 지원서의 결재를 받지 못하고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그날 밤 아내와 같이 윤성민 장군 댁으로 찾아갔다. 나는 윤 장군에게 전역시켜 줄 것을 간청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1977년 4월 30일 27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전역 후 아내와 함께 결혼 16년 만에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를 아껴주던 정승화 육사 교장을 찾아갔다. 정 장군은 뜻밖의 내 전역에 대해 “왜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느냐”면서 “내가 자네를 장군으로 진급시켜 줄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느냐”며 서운해하셨다. 나는 “아들딸이 한창 공부할 때라 서울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며 “대령까지 진급했고 연대장도 해보았으니 대한민국에 감사할 일이고 더 욕심이 없다”고 했다. 정 장군은 서운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1982년 4월 대한선박을 떠나 두 자녀의 해외 유학을 위해 집을 처분하고 미국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우리 내외는 새벽부터 청소일과 봉제공장 바느질로 자녀들 학비를 댔다. 현재 아들 태일은 텍사스 주립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딸 성희는 파리 에스모드 패션스쿨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패션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특히 태일은 수학자로서 뇌암(腦癌) 치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 유명인사록(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됐다.
 
  10여 년 전 동기생 40여 명과 함께 판문점 견학을 했다. 6·25 한국전쟁 3년간 300만명이 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되지 못한 현실이 한스러웠다. 꿈에도 그리운 고향엔 언제 가볼 것이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은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이별의 연속에 실향민의 피맺힌 한이 비수처럼 뼛속을 쑤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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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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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웅열    (2014-07-18) 찬성 : 328   반대 : 178
존경합니다.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6.25전쟁,월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신 님이 계시기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가있습니다. 어떠한 장군보다도 마음으로 존경합나다. 군을 떠나서 이민가서 가족위해 희생해서 자녀들도 모두다 훌륭하게 키워 내시어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사셨습니다.님의 여생에 영광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
  이범영    (2014-06-22) 찬성 : 83   반대 : 157
역시 참 군인 입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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