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구]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월간조선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신라의 삼국(三國)통일을 꼽을 것이다. 한민족이 하나의 민족 집단을 이루어 민족국가로 나아간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중국 중심의 역사에서 ‘동이(東夷)’에 속하는 ‘지역’의 여러 국가 중 일부로서 서로 ‘인근국’으로 관계를 가져오던 삼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것이다. 그동안 무의식적·가변적 상태에 있던 ‘한민족적 성격’이 이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안정된 영토’를 갖게 되었으며 그 거주민들이 일체감을 가지는 민족적 ‘정체성(正體性)’을 구체화해 나가면서 한민족의 유일한 단일국가라는 ‘정통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통일 후 신라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치, 사회제도와 문화,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었던 삼국의 말(언어)들이 이제는 우리 ‘말’로 확립됨으로써 군사력에 의한 물리적 통합이 화학적 융합으로 발전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단일 ‘민족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고려·조선으로 계승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른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단재 신채호(丹齋申采浩, 1880~1936년)로 대변되는 민족사관(民族史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丹齋史觀을 넘어서

신채호는 일제(日帝)강점기에 살면서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았던 독립운동가이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죽어가는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되살리는 수단이었다. 그는 한국사의 모든 사건을 ‘민족/독립 대(對) 사대/굴종’이라는 스펙트럼에서 평가했다. 그는 20세기 들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원인(遠因)도 신라의 삼국통일로 만주가 한민족의 영역에서 영원히 사라지면서 약소국(弱小國)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에 북진(北進)과 팽창을 도모한 묘청(妙淸)의 반란은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신채호에게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金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점철된 역사서일 뿐이다.

단재의 역사관을 탓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식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에 필요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부활이었다. 단재 사학은 바로 이 같은 사회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더 이상 단재의 역사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다. 인간은 보통 과거를 회고적으로 이해하고 오늘날의 필요성에 따라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아, 과거 이 같은 사건의 결과로 오늘날 이 일이 일어난 것이구나’라는 식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냉전(冷戰)이라는 틀을 통해 해석하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범(汎)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가 한반도의 분단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중 한국문제를 처리한 미국은 먼 지평선 넘어 형성되려는 냉전을 예측하고 한반도를 분단한 것이 아니라 전후(戰後) 동(東)아시아의 신(新)질서라는 관점에서 한국문제에 접근했다. 이것이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적 환경에서 분단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우리는 신라의 삼국통일도 통일신라 이후 형성된 고려-조선, 그리고 광복과 분단의 시대에 살아온 단일민족인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려 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 어떤 국제환경에서 살아갔으며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제 사회현상과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삼국통일의 역사를 재(再)정립해 보자.

국가, 민족, 국제정치

우리는 일제(日帝)의 질곡(桎梏)에서 해방된 이후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국 민족주의는 완성되지 못했다고 믿으며 그 달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그러나 민족이나 국가, 통일, 그리고 국제정치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는 사회현상이다. 이를 하나로 묶어 서로 순(順)기능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시도이다.

인간은 보통 집단의식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을 인식한다. ‘나의 조상은 고려시대 무슨 벼슬을 한 ‘김 아무개’이다’라는 식으로 개인적 정체성을 찾으며 이것이 집단의식으로 전개되면 ‘우리 국가/민족의 조상은 00이며,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족에 속한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뭉쳐야 한다는 사회·정치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왕실에서 나왔다는 의식이 존재했다.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는 지역 패권(覇權)을 두고 경쟁했으며,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침공하며 적으로 간주했다. 신라와 백제 간의 싸움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戰死)했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 간의 전쟁에서도 고구려 고국원왕과 백제 개로왕이 죽었다.

인간, 특히 인간집단인 국가는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의리나 자기희생 등 윤리적 가치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국가는 생존을 위해 ‘민족적 단합’이라는 가치를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고대(古代) 그리스 시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대 갈리아 지역(오늘날 프랑스)의 여러 부족 간의 전쟁, 중세(中世)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분쟁 등에서 보듯 민족이나 동일한 종교적 가치보다는 생존, 즉 승리를 위해 이민족(페르시아, 로마, 이슬람국가)과의 동맹을 모색한 사례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역사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구려와 부여는 지역 패권을 위해 중국과 연합하려 했으며, 백제 역시 중국의 수(隋)와 당(唐)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한다. 이것은 고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6·25전쟁 중 북한이 중국과, 남한이 미국과 손잡고 서로 싸웠다.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국제관계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국제정치는 ‘진보적’ 가치와 거리가 멀다

국제정치는 또 국내정치에 비해 자유, 독립이나 인권 등 ‘진보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이나 오늘날에 사는 인간들이 국제정치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유사하다는 말이다.

물론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노예해방이나 식민지 독립 등 국제정치에서도 진보적 가치가 실현되지만 국내정치적 조건의 향상에 비해서는 극히 저조하다고 할 것이다. 국내정치에서는 사회적 응집력이나 국가권력의 행사에서 보여주는 유연성, 부(富)의 성장과 분배 등 진보적 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지만 국제정치에서는 여전히 동맹과 반(反)동맹, 평화와 공동이익이라는 허황한 구호, 그리고 약소국의 독립과 강대국의 권리·간섭 등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딜레마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즉 국제정치적 행위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실패 원인

요하를 건너는 광개토대왕. 하지만 최전성기에도 고구려는 중국의 압력에 대응하느라 민족통일을 도모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강성했던 고구려나 백제는 삼국통일에 실패한 반면 신라가 성공한 배경은 무엇인가?

백제는 한성백제에서 공주-부여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을 차지, 고구려, 신라는 물론, 중국, 왜(倭)와도 교류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바로 백제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에 대항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약체(弱體)인 신라는 백제의 먹잇감이었다. 황해는 중국의 침략을 막아주는 안보의 장벽이자 인적·문화적 교류에 편리한 교통로였다.

바로 이 같은 여건 때문에 백제는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하면 ‘안보불감증’에 빠졌다. 필요할 때 중국에 접근해서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다가, 중국이 백제의 말을 듣지 않으면 스스로 관계를 단절하는 등 자의적(恣意的)으로 행동한 것이다. 백제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관계를 끊은 행위는 국제정치에서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이는 후일 백제의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절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하고 장수왕 시절 백제의 도성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등 강대한 군사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이 시기 고구려는 여전히 중국의 군사적 압박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남방으로의 원정은 중국과의 관계가 잠시 조용해졌을 때를 이용한 것이었다. 더구나 5세기 이전 삼국 간에 민족적 일체감이나 통일의 당위성 등의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의 위협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던 고구려는 애써 통일을 추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백제에 항복받고 신라를 신복(臣僕)시켜 ‘패자(覇者)’로 군림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통일은 理想의 소산이 아니다

독일통일을 이룩한 비스마르크(왼쪽)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한 카부르(오른쪽)는 모두 철저한 현실정치가였다.

‘민족통일’과 같은 거대한 이상주의적(理想主義的) 목표를 설정하고 통일을 이룩한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이 분열되었던 전국(戰國)시대 각 왕국은 민족통일이란 목표보다는 ‘패권/패자의 지위’를 추구했을 뿐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전쟁으로 얼룩진 전국시대 국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서 ‘폭란(暴亂)을 토벌’하고 나니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말한다. 천하통일의 성취감은 통일을 이룩한 후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 시대’로 알려진 19세기 유럽에서도 프로이센의 독일통일과 사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은 이상주의적 통일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양국 통일의 주역이었던 비스마르크와 카부르는 모두 철저한 현실주의 정치인으로 이들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국제무대에서 양국의 안보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자국(自國)의 위상을 높이고 이에 합당한 발언권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노력이 결과적으로 통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은 통일을 내세우는 이상주의자들의 ‘웃기는 소리’를 비웃었으며 또 통일이 가져올 이념적 혼란을 우려했다. 물론 수세기에 걸쳐 독일연방과 이탈리아 반도에서 형성된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통일을 위한 이상주의자들의 노력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반대로 20세기 후반 아랍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단행된 이집트와 시리아, 이집트와 리비아, 리비아와 시리아, 남북 예멘 등의 통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남북 예멘은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내전과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통일 이후 정치 엘리트 간의 권력분배나 지역 갈등 등 통합의 기초를 이루는 주요한 문제들을 무시한 채 통일이라는 이상을 위해 매진한 결과가 낳은 후유증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분단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발표하는 ‘3단계 통일안’,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등의 통일방안이나 북한의 ‘고려연방제’ 등은 모두 허황된 구호에 불과하다.

남북한이 제시하는 통일 방안의 첫 단계는 남북교류이다. 남북 간에 교류가 시작되고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순간 마치 1860년 이탈리아 통일이나 1990년 독일 통일과 같은 상황이 순식간에 전개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이 경우 어떤 정치권력이 이를 저지할 것인가?

통일의 주역이 된 변방국가들

그러면 신라의 통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무열왕 김춘추(金春秋)나 문무왕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차적으로 당과 연합하고, 그다음 삼국을 병합한다는 거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통일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라의 통일은 일차적으로 진흥왕 이후 진행된 체계적인 국력신장, 중국과의 교류를 통한 선진문물의 도입, 안보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동맹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국제정치의 ‘우연적’인 요소 등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 시대를 읽어보면 마치 국가건설을 위한 대계획(그랜드 디자인)을 추진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또 한강유역을 탈취한 이후 ‘늦게 배운 노름으로 밤새는 줄 모르는 것’같이 중국의 문물에 심취한다.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는 마치 ‘아, 신라인들이 사마천의 《사기》첫 부분을 인용하고 있구나’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국제정치의 우연적인 요소’란 신라가 삼국 중 가장 후진적(後進的)이었으며 중국이라는 문명지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반도 동남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통일은 중원에서 가장 먼 서북 귀퉁이에서 발흥한 후진국 진(秦)이, 독일은 동북에 위치한 프로이센이, 고대 그리스의 통일은 북쪽 야만지역인 마케도니아가 달성했다. 이들은 모두 아테네나 스파르타,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나 루이 14세-나폴레옹의 프랑스, 그리고 춘추전국의 패자들이 한 번씩 전성기를 구가할 때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으며 이들 패권국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전성기를 맞은 국가들이다. 이것은 역사의 우연성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신라 통일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안보위기였다. 통일은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 멸망 다음 해 문무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詔書)를 발표한다.

<신라는 두 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북쪽을 치고 서쪽을 침공하느라 잠시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군사들은 뼈를 드러낸 채 들에 쌓이고 몸뚱이와 머리가 서로 멀리 나뉘어 뒹굴었다.…두 나라를 평정해 길이 싸움을 없이 하고, 여러 대 동안 깊이 맺힌 원한을 씻으며 백성들의 가련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다.…이제 두 적국은 평정되고 사방이 잠잠하고 태평해졌다.>

안보위기 극복 노력이 통일로 이어져

신라의 김춘추는 당(唐)과의 동맹외교를 성공시켜 삼국통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신라는 서쪽에서 백제가 공격해 오면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고 북쪽 고구려 변경이 위급하면 북으로 나가 마치 밤길을 허둥지둥 헤쳐나가듯이 정신없이 돌파하면서 동시에 당과 손잡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보니 통일을 이룬 것이다. 마치 바이런이 1812년 시집을 발간한 후 잠에서 깨어나 그의 아파트 아래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유명해져 있더라’고 술회한 것과 같이 신라도 통일을 이룩한 후 ‘엄청난 일을 해내었구나’라고 느낀 것이다. 이후 신라는 단일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신라는 642년 백제를 방어하는 최전선 요새인 대야성(오늘날 합천)이 백제에 함락되고 또 당과 교류하는 데 필수적인 당항성을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공격한다는 풍문이 나돌면서 극도로 안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를 방문하여 백제에 대한 공동전선을 모색하는데, 고구려가 과거 자기들 영토였던 죽령(竹嶺)이북의 땅을 요구함에 따라 고구려와의 연합은 결렬된다. 이에 김춘추는 당을 방문,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는 동맹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동맹은 자국의 힘·군사력을 증강시키지 않으면서 국력을 강화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 것’과 같이 국제무대에서 ‘내가 조용히 살려고 하니 너희는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자세는 용인되지 않는다. 요즘 북한식으로 ‘우리끼리’ 하겠다는 것도 일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삼국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국가들이 한반도나 고구려가 지배하던 요동 등 동북아 지역의 정세변화에 모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 역시 이 점을 이해하고 중국을 상대로 조공(朝貢)을 통한 외교적 협력을 추구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조공이라는 관점에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더 열성적이었다는 근거는 없다. 조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대외(對外) 관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주로 꼽히는 장수왕이나 세종대왕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이것은 곧 조공이라는 형식으로 중국이라는 거대세력을 안심시켜 안보적 불안감을 제거하면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구려와 백제가 당의 협력을 얻는 데 실패한 반면 신라의 외교가 성공한 배경은 무엇인가?

당은 왜 신라를 선택했나?

국제정치는 강대국이 주도한다. 주권평등이 인정된 오늘날에도 유엔 안보이사회에 거부권을 가진 5대 상임이사국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확립한 1815년 빈회의를 두고 ‘회의는 (진전하지 않고) 춤춘다’고 한 말도 주요 사항은 강대국 간의 비밀회의에서 논의되고 참여국은 할 일이 없어 저녁마다 연회를 즐긴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동맹관계라고 해도 강대국이 지역정세를 자국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고 주변정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다는 말이다.

중국은 자국의 국내외 정세를 평가하면서 주요 목표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백제가 북위(北魏)나 수에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표문(表文)을 올려도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고구려가 이제 반성하고 있으니 백제 너희가 참아라’는 식으로 달랠 뿐 백제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즉 백제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고구려가 아무리 조공을 열심히 해도 중국이 고구려를 안보위협으로 간주하면 어떤 명분을 붙여서라도 공격한다. 이것이 고구려와 수·당 간 전쟁의 배경인 것이다.

그다음, 국가는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외교정책을 추진하지만 이것을 담당하는 군주나 관리들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평가할 때는 현재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과거의 행위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국가정책도 군주 간에 형성된 ‘신뢰’나 ‘배신’의 경험이 상대방을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수나 당이 고구려를 변경의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파트너를 고른다면 백제와 신라 중 어느 쪽을 택할까? 지리적으로는 백제가 신라보다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말’로만 서비스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는 길잡이가 될 것을 자청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두 마음을 가지고 고구려와도 몰래 통하면서’, 즉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양다리 걸치기’ 외교로 대응했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때는 황금색으로 옻칠한 쇠 갑옷을 당태종에게 바쳐 체면치레만 했을 뿐이다.

이보다 앞서 장수왕 시절에는 개로왕이 북위에 표문을 보내 고구려 침공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어버렸다’. 3년 뒤인 475년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개로왕을 살해한 것은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

반대로 신라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군사 3만 혹은 5만’을 고구려의 남쪽 국경으로 보내 황해도 신계 부근의 전략적 요충인 수구성(수곡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백제는 ‘신라가 당을 도운 틈을 타서’ 신라의 7개 성을 습격하여 빼앗는다. 신라의 이 같은 실질적 지원은 당이 중국의 국경안보를 대외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평가하고 동맹국을 선택할 때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당과 신라의 이해관계 일치

당에 대한 신라의 접근이 당의 대외정책과 여러 측면에서 일치했다는 점도 들어야 할 것이다. 640년대 들어 당태종이 국내적으로 왕위계승 문제를 정리하고 서북방의 안보를 원정과 왕실 간의 혼인 등으로 정리한 다음 동북면, 즉 고구려 문제를 해결하려 나선 것이 곧 645년 고구려 침공이다.

신라가 642년 대야성 함락 등 안보위기를 맞으면서 동맹국을 찾는 데 혈안이 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612년 수의 고구려 침공 바로 전해에 신라가 표문을 보내 고구려 침공을 요청한다.

이같이 양측은 시기적으로 서로 협조할 수 있는 여건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혹은 수·당의 수도에 유학, 숙위(宿衛) 등의 명목으로 파견된 신라인들이 중국의 정세변화를 파악하고 본국에 건의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신라는 당에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핍박을 당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우니 당에 ‘나라를 맡긴다’면서,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당과의 동맹에 ‘올인’하며 당의 요구사항들을 충실히 이행한다.

수·당이 고구려를 상대로 구체적으로 군사행동에 들어갈 때 백제와 신라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이로써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다음은 당의 정책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이다. 한강 유역은 원래 ‘한성백제’로 알려진 백제 땅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이 지역을 빼앗았으며, 이에 백제는 공주와 부여로 남하하여 천도한다. 백제는 나제동맹에 힘입어 550년 이 땅을 수복했으나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쳐서 이 지역을 빼앗고 이로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본격화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다.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했을 때 고구려가 신라가 점령한 이 땅을 돌려주면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는 아닐지라도 신라를 침공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은 초기에는 ‘정직한·공평한 중재자’라는 입장을 견지한 것 같이 보였다. 삼국의 사신들에게 ‘가까운 이웃끼리 왜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라’는 식으로 화해를 종용한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정직한’ 혹은 ‘중립적’인 중재자란 있을 수 없다. 중립 그 자체가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당 역시 중재를 하면서도 삼국 간에 싸운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는 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당이 삼국 간의 평화를 원했다면 신라에 한강유역이 원래 백제 땅이니 돌려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물론 신라가 한강유역을 백제에 돌려주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당이 보유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당은 고종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659년 내부적으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대외문제로 관심을 돌리기까지 삼국 간의 현상유지가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660년 고구려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백제를 침공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신라를 끌어들인 것이다.

한국사 최대위기, 對唐전쟁

마지막으로 언급할 부분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신라의 대당(對唐)항쟁이다. 이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폄하된 오늘날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통일전쟁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것이다.

신라와 당의 갈등은 백제 멸망과 함께 시작되어 고구려 멸망 이후 군사적 대결로 본격화되어 676년까지 16년 동안 지속된다. 만약 이 전쟁에서 신라가 패했다면 한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에서 가장 위기적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무왕 등 신라의 지도부는 국가안보라는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그 이상을 얻기 위해 매진한다. 동시에 당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몰리는 것은 피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그 과정은 오늘날의 국제정치에서 고도의 전술적 판단이 필요한 위기관리의 한 전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당과의 동맹을 통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은 오늘날 한반도 상황에서 주요한 시사점과 교훈을 준다.

중국은 현 시점에서 대외정책의 일차적 목표를 근대화에 필요한 ‘평화적 주변 환경’ 유지에 두고 있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사건 때 중국은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어느 쪽이 피해자인지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했다. 645년 이후 당의 태도와 너무나 유사하다.

삼국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연평도 포격 사태 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남북 간 대화를 강조한 다이빙궈 중국 국무위원(오른쪽)의 행태는 1300년 전 당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연평도 사건 이후 서울을 방문하고 이후 평양도 찾은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국무위원은 한국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서로 평화롭게 잘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방문 전날 한국 측에 ‘중국 국무위원이 서울에 가서 한국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을 고려한다면 삼국을 상대로 공평한 중재를 한다고 했던 당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 같은 태도는 중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러시아도 중국과 같이 북한의 소행을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대신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서 그들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6자회담의 소집을 촉구했다. 이것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중국과 러시아 간의 ‘협조와 견제’는 한반도 문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며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미국 역시 한국정부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대북(對北)정책이 미국의 국익(國益)과 합치하는 범위 내에서다. 한국이 북한에 대해 계속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이것이 북한의 반발을 초래해 한반도 정세가 미국이 관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할 경우, 미국은 결코 이 같은 상황전개를 허용치 않을 것이다.

물론 1300여 년 전과 오늘날의 국제상황은 다르다. 일차적으로 중국이 과거와 같이 한반도 문제를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는 높지만 북한도 지나친 의존이 독립성 상실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의 불신이 강하다.

그다음, 중국과 삼국관계라는 과거의 역학구조가 미국과 러시아, 일본까지 참여하여 상당히 복잡해졌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조금 깊게 살펴보면, 범세계적 차원에서 미국-러시아 간의 협력과 갈등, 미국-중국 간 범세계적 차원의 경제적 협력관계와 (타이완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차원의 안보상 갈등, 중국-일본 간의 지역 차원 갈등, 그리고 미국과 일본 간 경제-안보 협력체제의 문제점 등 여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고도의 방정식을 푸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즉 한국의 대북정책과 통일은 이상과 같은 모든 요소가 타협되고 조정되면서 진척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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