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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일본 일본인 ③ 료마의 고향 시코쿠(四國)의 성과 술들

감귤로 만든 미칸술, 중국으로 진출한 니시노 긴료

글 : 모종혁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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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중요문화재인 7성 중 하나이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12천수인 마쓰야마성, 고치성, 마루가메성
⊙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 고치… 에도 시대 일본 성의 모습 간직한 고치성
⊙ 현존 일본 성 중에서 성벽이 가장 높은 마루가메성
⊙ 바다의 신을 모시고 있는 고토히라궁에서 올리는 제사주(神酒)에서 비롯된 니시노 긴료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아주 견고한 마쓰야마성의 석벽.
  일본 4대 섬 중 시코쿠(四國)가 가장 작다. 시코쿠는 10세기 헤이안(平安) 시대에 확립된 옛 행정구역에 4개의 율령국(律令國)이 있었기에 이름 지어졌다. 난카이도(南海道)라고도 불렸는데, 율령국 체제가 오늘날 4개 현(縣)과 일치한다.
 
  시코쿠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현은 에히메(愛媛)이다. 다른 큰 섬인 혼슈(本州), 규슈(九州)와 교류하기 가장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그래서 조선, 기계, 화학, 제지 등을 기반으로 경제 규모도 가장 크다. 에히메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최대 도시가 마쓰야마(松山)다.
 
  마쓰야마는 1603년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1563~1631년)가 마쓰야마성을 쌓으면서 이름 지어졌다. 왜 마쓰야마라고 명명했는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마쓰야마성이 있는 산에 소나무(松)가 많이 있었다.
 
  둘째, 요시아키가 모셨던 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의 원래 성인 마쓰다이라(松平)에서 소나무 글자를 따서 붙였다.
 
  이런 유래로 인해서 마쓰야마는 마쓰야마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필자가 2023년 7월, 8일 동안 시코쿠에서 성과 천수각(天守閣)을 주제로 테마 여행을 했던 계기이기도 하다.
 
 
  가토 요시아키와 마쓰야마성
 
가토 요시아키의 동상.
  가토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끼던 7명의 근위(近衛) 무사 중 하나였다. 따라서 도요토미가 전국(戰國) 시대를 통일하고 관백(關白)에 오른 뒤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수군으로 참전했다. 도요토미 사후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지파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자, 요시아키는 전공을 인정받아 20만 석(石)의 다이묘(大名·영주)가 되었다.
 
  당시 에히메는 이요(伊予)라는 옛 율령국 이름으로 불렸다. 이요 북부에는 다이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있었다. 다카토라는 축성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성을 잘 쌓았다. 마침 다카토라도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요시아키는 다카토라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서 다카토라와 경쟁하듯 성을 건설했다. 25년이 흘러 마쓰야마성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에도막부(江戶幕府)의 2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로부터 영지를 아이즈(會津)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다.
 
  아이즈로 옮기면 40만 석의 다이묘가 될 수 있는데도, 요시아키는 심혈을 기울여 쌓은 마쓰야마성을 두고 가기 아쉬웠다. 핑계를 대며 고사했으나 소용없었다. 요시아키는 죽을 때 “아이즈를 내놓고 옛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후대인은 이런 요시아키를 추모하여 마쓰야마성으로 올라가는 로프웨이터미널 앞에 동상을 세웠다. 로프웨이는 1955년에 완공됐고 길이 327m다. 바로 옆에 건설된 리프트와 함께 마쓰야마성의 방문객에게는 필수 운송 수단이다. 필자는 리프트를 타고 마쓰야마성으로 올라갔다.
 
 
  석벽이 산을 타는 모습
 
  마쓰야마성은 해발 132m인 산 정상에 중심 건물군(建物群)인 혼마루(本丸)를 지었다. 그리고 석벽이 산 허리를 따라 평지까지 이어져서 휘감는 구조다. 혼마루가 산 정상에 지어지다 보니 해안이나 강변과 이어지는 평지에 있는 보급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적을 평지부터 방어해야 했다. 따라서 성벽을 이어 쌓았는데, 평지에서 보면 석벽이 산을 타는 모습이라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고 불렀다. 연곽식(連郭式) 평산성(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전국 시대에 유행했다. 현재는 마쓰야마성과 히코네(彥根)성만 남았다.
 
  리프트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높고 넓은 석벽이 있다. 혼마루의 석벽으로 최고 높이가 17m에 달한다. 대부분 돌을 가공해서 쌓아 올리는 쪼갠 돌 쌓기인 우치코미하기(打込み接ぎ)를 채택했다. 일부는 돌끼리 밀착되도록 가공한 깎은 돌 쌓기인 기리코미하기(切込み接ぎ)를 채택했다. 이유는 1784년에 큰 벼락이 떨어져 천수각이 불타버린 데에 있다. 에도막부가 복원을 허가해 주었으나 재정난으로 공사가 계속 미루어졌다. 1854년에야 천수각을 재건하면서 일부 석벽을 기리코미하기로 복원했다.
 

  혼마루 안에는 여러 문이 있는데, 쓰쓰이몬(筒井門)이 가장 크고 견고하다. 혼마루 정면 공격 방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쓰쓰이몬 뒤편에는 석벽이 있어 적이 진입해도 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가토 요시아키는 마쓰야마성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요시아키의 후임으로 온 다이묘 가모 다다토모(蒲生忠知)가 니노마루(二の丸)를 완공하면서 대역사가 끝났다. 그러나 다다토모 역시 에도에 가서 일정 기간 머무는 참근교대(參勤交代)를 하다 병사(病死)했고, 게다가 후사(後嗣)마저 없어 대(代)도 끊겼다.
 
  결국 마쓰야마성을 본격 사용한 다이묘는 다다토모의 후임인 마쓰다이라 사다유키(松平定行)였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메이지(明治)유신까지 마쓰야마성에서 살았다.
 
 
  반스이소
 
프랑스 양식의 저택 반스이소.
  천수각 등 중요 건축물이 집중된 혼단(本壇)은 혼마루 광장보다 8m 높게 쌓았다. 출입구도 스지가네몬(筋鐵門)밖에 없다. 성의 마지막 방어선이기 때문이다. 본래 천수각은 5층으로 지었다. 하지만 다시 지으면서 3층의 탑형으로 바뀌었다. 재건되기 1년 전 미국 페리 제독이 함포 외교를 일으키면서 천수각은 더 이상 높게 짓지 않았다.
 
  천수각은 연립식으로 대천수, 소천수, 망루 등을 사방에 배치하고 와다리야구라(渡櫓)로 연결하는 구조다. 또한 건물에 둘러싸인 안뜰이 있다. 현재 마쓰야마성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7성 중 하나이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12천수에 속한다.
 
  필자가 마쓰야마성을 방문한 날 해프닝이 있었다. 구글 지도가 입구를 잘못 안내해 반스이소(萬翠莊)에 먼저 갔던 것이다. 따라서 그날 첫 방문객이 되어 둘러보았다. 반스이소는 1922년 히사마쓰 사다코토(久松定謨)가 마쓰야마성 아래에 지은 프랑스 양식의 저택이다.
 
  사다코토는 20세기 전반기 일본 귀족이자 육군 중장까지 지낸 지방 토호다. 군인이었을 때 프랑스 주재무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래서 은퇴한 뒤 당시로써는 시코쿠 최고의 사교 장소를 고향인 마쓰야마에 축조했다. 반스이소도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미칸술
 
마쓰야마공항 미칸짱. 마쓰야마에서는 귤로 주스는 물론 술도 만든다.
  마쓰야마에서는 2박을 했는데 저녁마다 미칸술(みきゃん酒)을 마셨다. 첫날은 돈키호테 쇼핑몰에서 우연히 샀고, 둘째 날은 마쓰야마성에서 도고(道後)온천으로 가는 도중 술 전문점에서 구입했다.
 
  에히메현은 일본의 대표적인 귤 산지다. 그렇기에 마쓰야마공항 청사에서부터 주스와 술을 판매한다. 에히메현 마스코트 또한 귤 모양의 강아지로 미칸짱이라 부른다. 미칸술은 100% 감귤에 에히메의 전통 증류주인 쇼추(燒酎)를 더하여 브렌딩한 술이다. 처음 마시면 단맛과 신맛이 균형을 이루는 데다 비타민 C가 풍부해 맛있는 주스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알코올 도수가 8%에 달해 많이 마시면 살짝 취한다. 사실 필자는 도고온천 근처에 있는 미나쿠치주조(水口酒造)를 방문해 비싼 세이슈(淸酒) 2병을 샀지만, 이상하게 입맛이 당겨 이틀 연속 미칸술을 마셨다.
 
  필자는 시코쿠를 여행할 때 JR 레일패스를 이용했다. 이 덕분에 시코쿠 전역을 종단하고 횡단할 수 있었다. 종단은 가가와(香川)현 다카마쓰(高松)에서 에히메현 우와지마(宇和島)까지, 횡단은 가가와현 마루가메(丸龜)에서 고치(高知)현 고치까지 했다. JR 레일패스는 기한 내 JR의 모든 기차를 무제한 승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쇼도시마(小豆島)를 오가는 페리에 승선할 수도 있다. 또한 고치시의 노면 전철도 승차할 수 있다. 노면 전철은 오늘날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중요한 운송 수단으로 활약하고 있다.
 
 
  료마의 고향 고치
 
  고치현은 시코쿠 4개 현 중 인구가 세 번째로, 66만 명에 불과하다. 혼슈와 멀리 떨어져 있고 운행하는 기차 또한 단선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리적 특성까지 더해 고령화(高齡化) 또한 심각하다. 그러나 고치는 전국 시대에는 시코쿠의 패자(霸者)로 군림했고 에도 시대에는 4대 번(藩) 중 하나였다. 이때 고치의 이름은 도사(土佐)였다. ‘도사견’의 그 ‘도사’다.
 
  이런 고치에서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년)다. 료마는 고치시의 한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료마는 무사가 되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함포 외교를 벌였다. 이를 목격한 료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후 그는 점차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받들며 외세를 배격하는 존황양이(尊皇攘夷)파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 동서분주했는데 에도막부의 탄압을 받았다. 료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1866년 4대 번 중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의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 삿초(薩長)동맹으로 인해서 힘을 잃어버린 에도막부는 이듬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이런 업적으로 막부 충성파의 표적이 되어, 천황이 권력을 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한 달 만에 암살당했다. 사실 20세기 전반까지 료마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소설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를 써 조명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치성
 
고치성은 에도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몇 안 되는 성 중 하나다.
  고치성은 4대 번 중 하나로 번성했던 고치의 영화와 에도 시대 일본 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에 돌담과 석축을 쌓는 기술을 처음 전파한 이는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었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건너간 기술자가 선진 축성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는 오늘날 일본 학계도 인정하는 역사다.
 
  다만 현재는 15~16세기 구조와 기술이 완전히 바뀐 전국 시대 성만 남아 있다. 이전까지는 주로 산 위나 높은 언덕, 절벽, 하천, 호수 등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방어 시설을 쌓았다. 또한 돌담도 그리 높지 않았다. 겹겹이 돌담을 쌓는 윤곽식(輪郭式)은 한국의 전통 성과 차이가 있었지만, 그 밖에는 같은 축성 방식을 유지했다. 그런데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도입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조총은 기존 무기와 달리 관통력이 아주 강했다. 따라서 총알이 뚫지 못하는 큰 돌로 성벽 외면을 쌓았고, 돌담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런 일본 성의 특징과 장점을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체험했다. 왜군이 한반도 남부 곳곳에 왜성(倭城)을 쌓았기 때문이다. 왜성은 조선의 성보다 훨씬 높은 방어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선조까지 왜성의 장점을 칭찬했다. 이후 조선에서 성을 축조할 때는 일본 성을 참고했다.
 
 
  야마우치 가즈토요와 치요
 
고치성에 있는 야마우치 가즈토요와 치요의 부조.
  고치성은 1601년부터 축조했다. 공사를 맡은 이는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內一豊·1545~1605년)였다. 가즈토요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1573년 치요(千代)와 결혼하여 내조를 받으면서 인생이 역전됐다. 치요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어느 날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개최했다. 마침 좋은 말이 있었는데, 다른 무장들은 너무 비싸 감히 사지 못했다. 치요는 열병식이 남편을 돋보이게 할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부모가 남겨준 금(金)으로 말을 사 남편이 타게 했다. 이 덕분에 가즈토요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했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됐다. 임진왜란에는 출병하지 않고 군선 제조와 성 보수 등을 담당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다가 1600년 도사의 영주로 임명됐다.
 
  가즈토요는 죽을 때까지 치요와 금실이 좋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의 큰아들인 야마우치 다다요시(山內忠義)를 양자로 삼았다. 이렇게 대를 이어 1611년 고치성은 완성되었다. 치요는 1605년 가즈토요가 죽자 비구니가 되어 남은 삶 내내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고치성은 1727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 24년간의 복원 공사를 거쳐 1753년에 재건됐다. 메이지유신 시기 폐성령(廢城令)에도 주요 건축물은 남게 됐는데, 이로 인해 오늘날 일본에서는 몇 안 되는 에도 시대의 천수각, 혼마루, 오테몬(追手門), 석벽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이 되었다. 또한 천수각 내 일본에서 유일하게 어전(御殿)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즈토요는 세력이나 영지(9만8000석 규모)가 큰 다이묘는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을 금박 등으로 호화롭게 꾸몄다. 물론 재건할 때 소박하게 바꾸었다. 이런 역사적 가치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7성 중 하나이자 12천수에 속한다. 필자의 만족도는 7성 중 마쓰야마성 다음으로 높았다.
 
 
  포장마차가 몰려 있는 히로메 시장
 
히로메 시장에는 실내 포장마차가 몰려 있다.
  고치성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단연 주변에 고치시 명소가 몰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히로메(ひろめ) 시장은 오테몬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히로메 시장은 고치의 명물로, 집합형 실내 포장마차가 몰려 있다. 현재는 54개의 점포가 있고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먹을거리를 판다. 시장 중앙에는 먹고 마시는 쉼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요리를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필자도 먹을거리와 고치의 지자케(地酒)인 스이게이주조(酔鯨酒造)의 술을 한 병 샀다.
 
  지자케는 지역 술이라는 뜻인데, 보통 현지 전통주(日本酒)를 가리킨다. 스이게이주조는 1872년 창업하여 벌써 150년의 역사를 가진 업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견학을 운영하는데, 시내에서 멀어 방문은 포기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고치는 일본에서도 음주 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고장이었다. 히로메 시장 앞에는 전통시장인 오비야마치(帶屋町)가 있었다. 다양한 상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한데, 외부 장식을 특색 있게 꾸민 식당이 적지 않았다.
 
 
  마루가메성
 
가메산 정상에 지어진 일본의 중요문화재 마루가메성.
  JR 레일패스를 이용해 시코쿠 북부를 여행하다 마루가메(丸龜)에서 3박을 했다. 첫날은 예약한 호텔에 짐을 우선 맡기고 마루가메성으로 갔다. 마루가메성은 높이 66m인 가메산(龜山) 정상에 지어진 평산성으로, 오래전부터 성채를 쌓아 이용했다. 지금의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1597년 사누키(讚岐) 영주였던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에 의해서다. 사누키는 가가와현의 옛 이름이다. 치카마사는 주 거주지였던 다카마쓰(高松)성을 먼저 쌓고 서쪽의 경영을 위해 마루가메성을 쌓았다.
 
  당시 치카마사의 나이는 이미 70대였다. 따라서 아들인 이코마 가즈마사(生駒一正)가 마루가메에 머물며 성의 축조를 책임졌다. 가즈마사는 성 구조를 노부나가의 아즈치성(安土城)과 히데요시의 오사카성(大阪城)을 참고했다. 실제 마루가메성은 동서 길이가 540m, 남북 길이가 460m로 상당히 컸었다. 또한 일본에서 한때 ‘돌의 성’이라고 불릴 만큼 웅장하고 정교한 이시가키(石垣)의 아름다움도 간직했었다. 특히 산노마루(三の丸)의 석벽은 평균 높이가 20m에 달할 만큼 현존하는 일본 성 중 가장 높다.
 
  이렇듯 공들여 축조한 마루가메성이지만, 1615년 에도막부가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발표했다. 당시 영주였던 이코마 마사토시(生駒正俊)는 어쩔 수 없이 마루가메성을 폐성시켜야 했다. 그러나 나무로 성의 건축물을 가리고 성 안으로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켜 성이 해체되는 것을 끝내 막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640년 이코마 가문에서 내분이 일어나, 다카마쓰에 새 다이묘가 임명됐다. 1641년 마루가메에도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가 다이묘로 임명되어 마루가메번을 창설했다.
 
  버려져 있던 마루가메성을 지금의 형태로 완성시킨 이도 이에하루였다. 1660년에 축조한 천수각은 높이가 15m이고 3층 구조다. 비록 다른 성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불타지 않고 원형을 지킨 가장 오래된 목조 천수각이다. 정문 격인 오테몬은 1670년에 지어졌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건축물은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 이후 해체되거나 소실되었다. 그래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천수각과 오테몬을 간직했기에, 오늘날 일본 중요문화재인 7성 중 하나로 지정됐고 12천수에 속한다.
 
 
  숨은 보석 같은 고토히라
 
곤피라 대극장 내부는 가부키 공연장답게 넓고 화려하다.
  마루가메시에는 마루가메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광명소가 없다. 하지만 옛 마루가메번 영역으로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15km 떨어져 있고 전철로 20분 거리인 나카타도군(仲多度郡) 고토히라정(琴平町)은 숨은 보석 같은 마을이다. 고토히라는 전체 면적이 8.5㎢, 인구는 790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시사철 일본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끊이질 않는다. 곤피라(金毘羅)온천을 비롯해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 구 곤피라 대극장(舊金毘羅大芝居), 긴료의 사토(金陵の鄉)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동선을 고려해 고치시로 가는 도중 고토히라를 방문했다. 작지만 아름다운 JR 기차역을 나와 100여m 걸어가면 다카토우로(高燈籠)를 볼 수 있다. 다카토우로는 세토내해(瀬戶內海)를 항해하는 배의 지표 역할을 위해 지어진 목조 등불이다. 높이가 27m나 되어, 그 앞바다는 물론 멀리 마루가메에서도 등불을 볼 수 있었다. 1865년 6년의 세월을 들여 완공했는데 내부는 3층 구조다. 역에서 나와 먼저 구 곤피라 대극장을 찾았다. 곤피라 대극장은 가부키(歌舞伎) 극장이다.
 
  가부키는 노래, 춤, 연기가 종합된 일본의 전통 연극이다. 에도 시대 중산층과 평민의 대표적인 유흥거리였다. 오늘날까지 번성하여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곤피라 대극장은 1836년에 완공되어 한때 영화관으로 쓰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부키 극장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무대와 좌석 또한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뒤편에 배우를 위한 방이 있고, 지하에 자리한 공연 중 배우와 스태프가 사용하는 공간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런 가치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본인은 고토히라를 방문하면 전통과 신앙이 살아 숨 쉬는 고토히라궁을 반드시 찾는다. 특히 고토히라궁은 벚꽃이 피거나 단풍이 물드는 시기에 인산인해를 이룬다.
 
 
  고토히라의 청주
 
  그러나 필자의 목적은 달랐다. 시코쿠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전통주 업체의 발상지인 긴료의 사토를 보고 싶었다. 니시노 긴료(西野金陵)는 1779년 니시노 가문의 7대손이 도쿠시마(德島)현에서 개업했다. 이를 8대손이 1789년에 쌀이 넉넉하고 물이 깨끗한 고토히라로 양조장을 옮겼다. 쌀과 물은 세이슈를 빚는 데 중요한 원료다.
 
  그 뒤 긴료의 술은 바다의 신을 모시고 있는 고토히라궁에 올리는 제사주(神酒)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1918년 니시노 가문의 15대손은 사업을 확장하여 현대식 주식회사로 개조했다. 이듬해에는 최신식 장비를 들여와서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긴료의 세이슈는 1930년대 들어 도쿄, 오사카 등에도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화학품사업부를 신설해 음료, 조미료, 맥주 등 종합 식품업체로 확장했으나, 주력 상품은 여전히 쇼추였다. 해외 진출도 세이슈 위주였다.
 

  긴료의 사토는 니시노 긴료가 고토히라로 이전하면서 사용했던 양조장을 1988년에 박물관과 문화관, 판매장 등으로 개조한 곳이다. 고토히라에는 본래 1616년에 문을 연 쓰루바야(鶴羽屋)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니시노 가문의 8대손이 이를 매입하여 세이슈를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 에도 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문인인 라이 산요(賴山陽)가 고토히라를 방문했을 때 마치 중국의 고도인 금릉[金陵, 지금의 난징(南京)]이 연상된다고 칭찬했다. 이에 착안해 긴료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이런 브랜드의 유래 때문에 니시노 긴료는 1997년 상하이(上海)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다른 일본 전통주보다 중국 진출에 앞서 나섰다. 중국에서도 특이한 술 이름 덕분에 인지도를 키웠다.
 
 
  사토 박물관에서 마신 스페셜 세이슈
 
긴료의 사토 박물관에서는 실제 크기의 작업장과 밀랍인형으로 세이슈의 제조 과정을 보여준다.
  긴료의 사토는 전체 면적이 2916㎡에 달할 정도로 넓다. 과거 양조장뿐만 아니라 3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개조한 박물관은 필자가 방문했던 다른 일본 전통주박물관과 비교해 전시물이 가장 풍부했다. 실제로 사용했던 다양한 제조 도구, 이를 사람 크기의 밀랍인형을 이용해 세이슈를 제조하는 모습을 연출한 장면 등이 상당히 와닿았다.
 
  문화관에서는 니시노 긴료가 오랜 세월 수집한 술병, 주전자와 잔 등도 전시하고 있었다. 일본 전통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시청각 자료와 문헌도 훌륭했다. 입장료가 무료란 점도 매력적이었지만, 필자는 판매장에서의 시음이 가장 기대되었다. 500엔을 내면, 오직 긴료의 사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스페셜 세이슈를 150ml 잔에 가뜩 따라준다. 그 술맛이 너무 좋아 일본 역대 주류대회에서 상을 탄 300ml 용량의 세이슈 2병을 구입했다. 짧은 일정이 무척 아쉽게 느껴질 만큼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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