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착한 면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먼저 한국인의 순정을 모아야 했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사마란치 네 분이 그 일을 해냈다. 이들이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다.”
⊙ 세계인의 순정을 모아 최고의 순간들을 만들어낸 군인 출신 경영자의 놀라운 국제감각
⊙ “폐회식을 마치고 잠에 들면서 나는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 세계인의 순정을 모아 최고의 순간들을 만들어낸 군인 출신 경영자의 놀라운 국제감각
⊙ “폐회식을 마치고 잠에 들면서 나는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회사를 하는 박세직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그 옆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 사진=조선DB
가장 많은 외국 기자들이 한국에 온 것은 한국전쟁 때와 그 38년 뒤 서울올림픽 때였다. 두 사건은 다른 모습으로 세계사를 바꿨다. 김일성의 불법 남침에 “우리는 남녀노소가 다 나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사생결단 의지에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을 마적단 습격 사건으로 규정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내겠다”면서 유엔군과 미군 파병을 결단했다. 한미동맹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이 1대(對) 3으로 소련·중공·북한을 상대하는 사이 미국은 한국 파병과 동시에 대만해협에 미7함대를 보내 대만 수호를 결단한다. 일본은 한국전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서독이 재무장하며 느슨하던 NATO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고 미국은 군사비를 네 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 경쟁을 시작, 1980년대 후반 드디어 소련이 붕괴 조짐을 보인다.
바로 이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이 주최한 서울올림픽이 “화합과 전진” “벽을 넘어서”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 한국과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켜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한국인은 6·25 항전으로 자유세계를 지켜내고 서울올림픽으로 국제 공산체제를 허물었다. 이보다 더한 드라마, 이보다 통쾌한 복수가 또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숨기려 한다는 점이다.
국내적으론 올림픽 준비 과정이 사회의 선진화(화장실 문화 개선 등), 정치 민주화, 대북(對北) 우위의 촉매제가 된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이념의 벽을 넘어 온전한 올림픽이 이뤄지고 그 분위기는 이듬해 동구 민주화, 3년 뒤 소련 붕괴에 영향을 주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이런 전환기를 북방 정책으로 돌파, 동구·소련·중국·베트남 등 공산권과 수교,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킨다. 6·25 항전이 죽음을 극복한 드라마였다면 서울올림픽은 생명의 약동(躍動)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물리친 달콤한 복수였다. 6·25 항전-서울올림픽 성공이 자유통일로 결실을 맺을 때 한국인의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는 완성될 것이지만 파리올림픽을 계기로 36년 전을 돌아보니 더욱 커지기만 하는 서울올림픽이다. 큰 인물과 사건은 시간적 거리를 두고 봐야 전체상을 그릴 수 있듯이 서울올림픽도 그러하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조선조를 지배한 위선적 명분론이 좌파의 계급투쟁론과 결탁, 삼국통일과 대한민국 건국 같은 민족사의 영광을 자학적으로 회칠하는 광풍(狂風) 속에서 서울올림픽도 잊혀 왔다.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에 대한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의 기술(記述)은 거의 무시 수준이고 당연히 교과서에 실려야 할 이름이지만 흔적조차 나오지 않는다.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즐겨 부르고 세계 5대 조각공원으로 불리는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면서도 이 두 개의 문화유산이 순전히 박세직 위원장의 지도력과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무도 몰라준다. 한국인이 몰라주니 외국인도 알아줄 리 없다.
다행히 나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선 별로 한 일이 없지만 기록을 남기는 데는 약간의 역할을 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박세직 위원장은 안기부장과 서울시장, 그리고 여당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여 취재·편집 분야에서 힘을 보탠 적이 있다(1990년에 나온 박세직 지음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한 세대가 지나서 그 기록을 다시 읽어보니 “아, 이제 역사가 되었구나”라는 감회가 밀려왔다. 이병주(李炳注) 식으로 이야기하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데 올림픽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日常) 속에 살아 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국전쟁, 서울올림픽, 중화학공업 건설, 중동 건설 시장 진출, 새마을운동, 건강보험과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 건설 같은 이야기들은 대한민국 세력이 기록을 정리하여 영원한 기억의 유산으로 가꾸고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3세대에 걸쳐 이룩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국민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자존심은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연결될 때 풍성한 에너지를 지니게 될 터이다.
세상을 바로 세울 사람 朴世直
수도경비사령관 출신인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배우처럼 미남이고 스포츠맨처럼 당당하며 늘 웃는 얼굴에 늘 공부하는 사람이며 겸손한 기독교도였다. 절대적 마감시간을 두고 크고 복잡한 국제적 조직을 효율적으로 지휘해야 하는 자리에 그를 발탁한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사람 보는 안목에 새삼 감탄한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잘 지었네요. 이 세상(世)을 바로잡는(直) 일을 할 사람이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울올림픽이란 ‘착한 바이러스’를 만들어 세상에 퍼뜨렸으니, 작명(作名)은 기도(祈禱)란 게 나의 평소 소신이다.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 지휘관일 때 한 말 “지시는 5%, 확인이 95%다”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올림픽 개막 하루 전인 1988년 9월 16일 늦은 밤 개·폐회식 상임위원들과 함께 주경기장 시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느라 바빴다. 성화 점화(點火)를 위해 땅에서 솟아오르는 승강기의 안전 상태, 개회식 때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함께 쓰게 될 회전연단의 회전속도와 귀빈실 텔레비전을 직접 점검했다.
놀랍게도 이들 두 곳에서 결함을 발견했다. 회전연단이 2분 동안에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2분30초 걸렸고, 귀빈실 TV 수상기에선 영상만 나올 뿐 음향이 들리지 않았다. 부랴부랴 이를 시정하고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는 2009년 여름 급성 폐렴으로 76세에 작고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입원하기 직전이었다. 재향군인회장이던 그는 일부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하여 나에게 물었다. 기침을 자꾸 했는데 그런 몸으로 계단 오르기를 한다고 자랑했다.
둘도 없는 홍보 기회
서울올림픽은 취재기자 수와 텔레비전 방영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언론사상 최대 규모의 보도 행사였다. 선수보다 더 많은 1만5740명의 기자들이 서울올림픽을 취재하였고, 85개국의 160개 방송사가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시간은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의 3배가 넘는 9200시간이었다. 한국이 이런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세계인들 앞에 노출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야말로 둘도 없는 국가 홍보의 기회였다.
박세직은 86아시아경기대회 두 달 전에 미리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13명)을 구성, 아시아경기대회의 개·폐회식을 관찰하여 아이디어를 얻도록 했다. 이렇게 일찍 개·폐회식 준비에 착수했던 것은 개·폐회식, 그중에서도 개회식이야말로 올림픽과 국가 홍보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행사임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주최국이 자기 나라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개·폐회식 행사 때뿐인 것이다.
서울올림픽에서는 1030게임이 펼쳐졌다. 경기의 경우, 한두 경기의 운영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경기로써 충분히 실점(失點)을 만회할 수가 있다. 하지만 개·폐회식은 다르다. 한 번뿐이어서 실패하면 회복할 방법이 없다. 개·폐회식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최다(最多)의 출연 인력과 관중이 등장한다. 그만큼 실수나 사고의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개회식이 승부처
박세직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성공은 개·폐회식, 이 중에서도 개회식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은 주제가(主題歌) ‘손에 손잡고’와 함께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이 개회식의 생동하는 메시지와 상징성이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내고 세계인들, 특히 공산권 사람들을 자극하여 역사적 변혁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공연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실증했다.
1986년 7월에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이 구성되면서, 이어령, 최정호 등이 주제 발표를 하였고 박용구, 오태석 등이 시나리오 초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과 새로운 안들이 등장하여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도 좀처럼 확정된 시나리오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박세직 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7년 3월 7일부터 8일 동안 시내 호텔에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상회의를 열게 되었다.
저녁에는 도시락을 먹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거의 합숙과 다름없는 강행군 회의였지만 속출하는 아이디어와 뜨거운 토론들은 결정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산실(産室)이 되어주었다. 박세직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몰래 졸음을 참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때 체험한 열기와 토론 등이 개·폐회식을 성공으로 이끌어간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회의의 토의를 주도했던 변종하, 김문환, 이강숙, 이상수, 이어령, 한양순 등은 그 뒤에도 상임위원으로 남아 실무에 관여하였다.
상임위원들의 추천에 의하여 문화방송의 제작이사 표재순이 제작단장을 맡게 되었다. 개·폐회식에 한국 예술계의 최고급 인력을 집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박세직은, 정상급 학자, 예술가, 문인이 머리를 짜내고 학생, 체육인, 관료, 그리고 군인들이 이 아이디어를 받아 박력 있게 실천한 지덕체(知德體)의 통합이 개·폐회식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정리했다. 문무(文武) 합작이기도 했다.
이어령 “뜬구름 잡는 생각도 존중하는 분위기”
개회식의 개념을 만든 이어령 교수는 올림픽이 끝난 뒤 필자에게 이런 토로를 하였다.
“단군 이래로 춤추는 사람, 철학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 음악인 등등이 이렇게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인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은 서로의 능력을 보태준 것이 아니라 서로 깎아내렸기 때문이지요.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논리는 질서 정연한데, 된다는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사람이 지식인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안 된다는 쪽보다는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지요.”
올림픽이 끝나고 1년 3개월 뒤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개·폐회식 관계자들은 그를 위한 축하연을 마련했는데, 강원룡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올림픽 문화예술행사 추진협의회 위원장이라고 하나 사실은 하나도 일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툭하면 그만두겠다고 하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올림픽에 꽁꽁 묶어둔 일밖에는 한 게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올림픽이 끝나고서야 알았습니다.”
현실론보다는 이상론을 편들다
박세직은 조직위 실무진의 현실론보다는 상임위원들의 이상론을 편들었다. 실무 제작진과 상임위원들끼리는 토론이 너무 진지하다 보니 격론이 되어 인간관계가 서먹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풀어주는 것도 역시 그의 임무였다. 화합의 올림픽을 위해서는 내부의 화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조직위는 이 추상적 개념을 “벽을 넘어서”라는 개·폐회식의 기본 철학으로 좀 더 구체화시켰다. 인종, 문화, 이념, 종교의 벽을 넘어서 모여든 인류가 평화의 축제를 펼치는 그곳에 잠실 주경기장이 있어야 하며, 그 개·폐회식은 “세계에서 올림픽이 이루어지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여겨졌던 서울의 일대 역전 드라마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수특전사 장병들 1000여 명과 미동초등학교 학생 500여 명이 펼친 5분간의 태권도 시범은 평화의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파괴적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평화로의 전진을 가로막는 갖가지 장벽을 허무는 창조적 파괴 행위로 설정되었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개·폐회식 공연 공간을 강과 하늘로 확장한 것이나 성화 점화자를 세 사람으로 한 것, 어린이가 화합의 원(굴렁쇠)을 굴리는 장면 등등, 개·폐회식의 모든 장면은 ‘벽을 넘어서’의 상징성으로 수렴되었다. 박 위원장은 “철학과 미학이 중요한 것은 잡다한 것들에 계통을 세워 질서와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실감하였다”고 썼다.
개·폐회식의 출연진은 거의가 10대와 20대였다. 외국인들은 이들 젊은이의 발랄함과 아름다움과 당당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개회식에는 1만3000여 명이 출연하였다. 53%는 고교생, 20%는 군인들이었다. 고교생은 거의가 실업고교 재학생이었다. 개·폐회식을 합치면 약 2만 명이 등장했고, 소도구는 약 18만 점이나 되었다. 물량과 규모 면에서도 사상 최대였다. 개·폐회식을 운영한 조직위 인력은 1523명이었다. 이 가운데 356명은 자원봉사자였다.
스무 가지 새로운 것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것은 흰 비둘기, 8개 국어 해설 방송과 이어폰 사용, 24개국 합동 고공낙하, 성화 점화 및 소화(消火) 때 전자음악 사용, 개회식 행사가 강에서 시작된 점 등등 스무 가지였다.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조직위에서는 세 가지 첨단과학 분야의 공연을 추진하였었다. 개회식 때 코리아나가 UFO를 닮은 원반형 비행물체를 타고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는 방안, 초전도체를 이용하여 회전연단을 1m쯤 자기(磁氣) 부상시켜 허공에 띄우는 아이디어, 그리고 폐회식 때 하늘을 캔버스 삼아 레이저 광선으로 세계 역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발상 등이 그것이었다.
박세직 위원장은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레이저 관계 회사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미국의 지인(知人)을 통해 초전도체 기술의 도입을 시도하는 등 막판에 열을 올렸으나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무리다”는 결론을 내리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도전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기술의 벽을 확인한 조직위는 이미 확정된 계획을 더욱 완벽하게 추진하는 쪽으로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개·폐회식을 더 충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 산 5번지 세양금속은 영세 주물 공장으로 회사 간판도 없었다. 쓰러지는 기둥을 억지로 세운 듯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늘어서 있고 가까스로 한 사람 지날 수 있는 골목을 들어서면 여기저기 놋쇠 용기를 만드는 공장이 나타나는데 그중의 하나가 세양금속이었다. 1987년 가을, 세양금속 김상도(金相道 당시·50) 사장은 동삼공업주식회사의 이인모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한국화약으로 갔더니 성화봉 견본을 보여주었다. 김 사장은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충분히 제작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1988년 1월이 되어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그는 성화봉 제작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이 되자 동삼공업에서 성화봉을 가지고 와서 만들 수 있겠느냐고 했고 김 사장은 자신 있다고 하자 샘플을 만들라고 했다. 53개 업체에서 샘플을 납품했는데 그중에는 국내 유수 기업도 꽤 들어 있었다.
성화봉을 만든 사람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그가 만든 샘플이 합격되었다. 이때 얼마나 기뻤는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16세부터 청동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동안 숱한 상품을 만들었지만 한 번도 작품으로 평가된 적은 없었다. 학벌이 없다 보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세양에 하청을 준 동삼공업에서는 절대 비밀을 지키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12명의 직원과 함께 오직 성화봉 제작에만 매달렸다. 평소의 제품 생산과는 달리 정성을 담기 위해 모두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목욕재계를 한 후 일을 시작했다.
이때의 심정은 뭐랄까, 옛날 자식이 과거시험 보러 떠나고 나면 그 어머니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잘되기를 기원하였듯이 그러한 심정으로 한 개의 불량품도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제작했다고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비밀리에 작업을 하자니 더워서 숨이 턱턱 막혔다. 납품 기일에 맞추기 위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작업을 하였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생애 처음으로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영광스럽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화 봉송에 쓰일 3100개의 성화봉을 제작하였고 추후로 대통령 요청에 의해 200개, 한국화약 사장 요청에 의해 200개를 별도로 생산했다.
김 사장은 성화가 자기 회사 앞을 지나간다기에 전 직원과 함께 일손을 놓은 채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밖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성화가 흰 연기를 뿜으며 지나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룩 흘렸다. 그 많은 사람 중 주자(走者)가 들고 뛰는 찬란한 금빛 성화봉이 땟물이 줄줄 흐르는 옷차림의 초라한 행색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 속으로 외쳤다.
“내가 만든 것이다. 저 찬란한 성화봉은 내가 만든 것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성화대
1988년 1월 30일 토요일 오후, 박세직 위원장은 예고 없이 성화대 제작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문화식전본부장과 비서관만 데리고 갔다. 성화대를 만드는 곳은 깨끗하고 깔끔한 작업장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찾아간 곳은 전혀 의외였다. 서울 구로구 고척동의 공장지대로 차가 진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착한 곳은 공장이라기보다는 철공소 같은 곳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려 길바닥은 질척질척하였다.
근로자들은 공장 마당에 철 구조물을 내다 놓고 성화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페인트칠을 하기 전이라 불그스름하게 녹슨 쇠파이프를 한데 내어놓고 뚱땅뚱땅 망치질을 해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서관은 당황한 듯했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에게 큰일 났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체하였다.
더 놀란 것은 망치질을 하고 있던 근로자들이었다. 박세직은 미처 위문품을 준비하지 않았었다. 함께 간 직원에게 당신 뭐 가진 것 있느냐고 했더니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 한 갑이 나왔다. 근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한 개비씩 돌린 뒤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울올림픽 하면 굉장한 사람들이 치르는 호화판 행사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이런 자그마한 일들이 뭉쳐져서 올림픽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진흙 바닥에서 올림픽 시설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성화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일입니다. 정성 들여서 만들어주십시오.”
‘공사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그는 조직위의 촬영팀을 불러 성화대 제작 광경을 비디오로 기록해두도록 했다. 성화대 제작을 맡은 회사는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의 삼성공업사였다. 이종월(李鍾月·당시 35) 사장은 1987년 11월 작업에 착수하던 날 직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가 비록 쇠붙이를 만지며 막일을 하지만 우리 생애에서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로서도 영광이지만 개인으로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제작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오로지 성화대 제작에 열중해주기 바란다. 회사에서도 다른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이 일에만 매달릴 생각이다.”
이 회사의 용접공 이영근(李永根·당시 34)씨는 “공기(工期)도 촉박했거니와 겨울철에 야외 작업을 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작업장이 진흙 마당이어서 얼면 넘어지기 쉽고 녹으면 질퍽질퍽하여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근로자들은 2교대제로 밤낮없이 일했다. 아파서 못 나오는 사람이 생기면 이를 보충하느라고 실제로는 하루 평균 14~18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이영근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신통하게도 추위를 참느라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신이 솜처럼 피로함에도 연장 근무를 자청하는 동료들이 속출했습니다. 교회 집사인 집사람은 성화대 제작 기간 내내 새벽 기도와 하루 한 끼 금식을 거의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성화대를 그곳에서 만드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박 위원장이 다녀간 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이웃 사람들은 근로자들에게 과일을 갖다 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성화대를 완성하고 주경기장으로 옮기려고 세워보는 날 이웃 주민들이 몰려나와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근로자의 순정 어린 손때가 묻은 성화대가 대회 기간 중 잠실벌의 밤하늘을 밝혔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뒤에는 이들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은 수많은 보통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무턱대고 만든 龍鼓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장엄하게 다잡은 것은 그해 9월 17일 오전 10시45분에 시작된 용고(龍鼓) 행렬이었다. 옛 군관(軍官) 복장을 한 이가 엄청난 북채로 용고를 치면서 긴 행렬을 선도하여 들어오자 장내는 우선 그 스케일에 압도당하였다. 북소리가 전장이나 큰 행사장의 사람들 마음을 고동치게 만든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이 용고는 북통 지름이 2m10cm, 길이 2m30cm, 무게가 630kg이나 돼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었을 것이다. 이 북이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데는 한 장인(匠人)의 순정이 있었다.
대전시 서구 원천동 대한민속국악사는 2대(代)에 걸쳐 북 만드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1대인 김창호씨의 네 형제 가운데 3남인 김관식(金寬植·당시 35)씨는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하고 박수를 쳤다. 그날부터 김씨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멀리 들리는 북”을 만들어 서울올림픽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일방적으로 했다. 형제들이 말렸으나 그는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만들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소를 찾아야 했다. 북 면(面)을 소의 등가죽 하나로 붙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소는 상처가 없어야 했다. 바늘구멍만 한 흠이라도 있으면 북소리가 이상해진다.
김씨는 여섯 달의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1200kg짜리 소 두 마리를 구해 쇠가죽을 얻긴 했으나 크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해외에서 큰 소를 찾다가 1년 뒤 미국에서 1550kg짜리 종자 소 다섯 마리(예비분 세 마리 포함)를 찾아 수입하였다. 북통으로 쓸 나무도 국내의 원목(原木)이 너무 작아 미국 로키산맥에서 자라는 나이테가 198개인 미송(美松)을 사들였다.
‘미국의 소리’가 날까 걱정
김씨는 재료를 구해놓고는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한국의 소리’가 아니라 ‘미국의 소리’가 날까 봐서였다. 그는 그래서 쇠가죽과 나무의 처리 과정에 한국 북의 제작 공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한국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쇠가죽은 털을 뽑고 적당한 습도와 온도 아래서 2년간 건조시켰고, 미송도 2년간 자연 건조시켰다. 약품 처리 과정에서도 한국 북 제조의 전통 방식을 더욱 철저히 지켰다. 통나무를 46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못과 철사로 촘촘히 잇고, 전체를 창호지와 흰 천으로 감쌌다. 맑고 유현(幽玄)한 북소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북대를 만들고 북통 둘레의 단청 작업에 들어갔다. 단청 기능 보유자인 최성현씨에게 부탁하여 먹당기, 매화무늬, 꽃구름에 둘러싸인 채 청룡, 황룡 두 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10여 일 만에 완성하였다.
문제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짝사랑하듯 무턱대고 만든 것이란 점이었다. 1987년 4월에 완성해 조직위에 기증하려 하니 실무자는 “서면으로 신청하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 만들어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비로소 조직위에서 관심을 보이더니 1987년 11월 드디어 “기증을 받겠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 형제는 운송마저도 자기 돈을 들여 타이탄 트럭에 실어 딸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북을 서울로 보냈다. 그때까지도 이 북이 서울올림픽에 어떻게 등장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북을 완성한 뒤 기증하기까지의 여덟 달 동안이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북을 만들어놓으니 1억5000만원에 팔라는 제의가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개회식 날 김씨는 텔레비전을 통해 자랑스러운 용고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도 울고 형제들도 울었으며 동네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올림픽 전에 김씨는 좀 곤란한 입장에 처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했으니 개·폐회식 입장권을 많이 받았을 것 아닌가, 좀 나눠 주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개·폐회식 입장권은커녕 시연회 초대장도 받지 못했고, 감사장 수상 대상에서도 빠져 있었다.
박세직 위원장도 올림픽이 끝난 뒤 책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1989년 초에 김씨를 초빙해 위로를 해주었다. 김씨는 오히려 “북 만드는 사람이 평생의 꿈을 이루었으니 한도 원도 없다”면서 “요즘 명함을 내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주제가
잔치가 잘되려면 소문이 나야 한다. 잔치 소문을 내는 데는 노래만 한 것이 없다. 특히 올림픽에서 노래가 중요한 것은 개막 전의 홍보, 대회 기간 중의 분위기 조성, 대회 후의 추억을 위해서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박세직은, 좋은 영화 주제가는 영화 자체보다도 더 유명해지듯 좋은 올림픽 주제가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된다고 생각했다. 1986년 봄에 조직위원장이 되고 나서 올림픽 주제가의 추진 상황을 점검해보았더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86아시아경기대회가 주제가 없이 치러져 좀 메마른 느낌을 주었기에 서울올림픽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히트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국내 작곡가에게 너무 의존하다가는 돈은 돈대로 들고, 유행에는 실패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다.
1987년 3월에는 조직위에 이봉조, 김강섭, 김희갑, 이백천, 길옥윤, 최창권씨를 초청했다. 먼저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상대로 주제가를 공모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한국인 음악가도 물론 참여할 수 있고, 같은 조건이라면 한국인 작사, 작곡가의 노래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나, 개·폐회식 상임전문위원회에서는 거센 반대가 있었다. 외국인이 작사, 작곡한 영어 노래가 나오면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고 한국 음악인들을 소외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인만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다. 축제에서는 손님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손님이 즐겨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 레코드 회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세 회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당시 서독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의 레코드 판매 다국적 회사인 폴리그램 레코드, 미국의 광고대행사인 B/M사, 일본의 덴쓰(電通) 가운데서 폴리그램을 택했다. 한국의 보컬그룹 코리아나가 이 회사에 전속돼 있었다. 폴리그램에서는 작곡에 LA올림픽 주제가 ‘리치 아웃’의 작곡가 조르조 모로데, 작사가로는 토머스 R 휘트록을 추천하였다.
세계적 작곡, 작사가를 모시다
모로데는 영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플래시 댄스〉 〈탑건〉의 주제가로 세 차례나 오스카 영화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상 수상 경력도 있는 세계적 작곡가였다. 휘트록은 〈탑건〉의 주제곡 작사가였다. 조직위는 모로데 작곡, 휘트록 작사에 동의했는데 가사에 한국적인 이미지를 많이 넣도록 요구하였다. 1987년 10월에 데모곡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직위 개·폐회식 상임위원과 국내 음악가들의 검토 및 수정 요구를 폴리그램사가 수용하도록 하였다. 한국어 가사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개·폐회식 상임위원인 서울대 김문환 교수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창작성을 살려 깔끔하게 다듬었다. 박 위원장은 폴리그램사의 오시 드레히슬러 사장에게 올림픽 주제곡으로는 템포가 늦은 감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유행이 오래가려면 느린 노래여야 한다”고 했다. 빨리 유행시켜 올림픽 홍보에도 이용하자고 했으나, 유행의 절정기를 올림픽 기간과 일치시키려면 두 달 전에 발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확실한 흥행 감각을 갖고 있었다.
조직위는 1988년 6월 21일에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를 초청, ‘손에 손잡고’ 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조용필이 부른 ‘서울 서울 서울’과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유행하고 있었다. ‘손에 손잡고’가 퍼져 나가자 국내 가수들을 개·폐회식에 참석시키라는 청탁이 박 위원장에게 들어왔다. 세 번에 걸친 개·폐회식 시연회에 패티 김, 김연자, 조용필을 참여시켜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토록 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손에 손잡고’ 쪽이었다. 이 노래는 스웨덴, 서독, 일본 등 17개국에서 인기 1위를 기록했고, 30여 개국에서는 10위권 내로 진출하는 등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되었다.
동구권의 데모 송이 된 ‘손에 손잡고’
필자는 1989년 12월에 일시 귀국한 보컬그룹 코리아나를 만난 적이 있다. 코리아나(단장 김영일, 단원 이승규·이용규·이애숙·홍화자)는 1989년 12월 11~13일 동베를린에서 무너진 장벽을 배경으로 ‘손에 손잡고’를 열창한 뒤 국내 공연을 위해 일시 귀국한 터였다. 동구 공산권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이 노래가 공산권 민주화 현장의 주제가로 변해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베를린 장벽 현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마이클 잭슨, 믹 재거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동독에 신청서를 냈으나 코리아나가 동독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맨 먼저 초청돼 두 번 공연을 했다.
1989년 12월 12일 오후, 비 내리는 베를린 장벽에서의 공연 때는 수백 명의 동독인이 구경을 하다가 말고 합세, 감동적인 합창을 했고 마침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를 한동안 배회하여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었다. 분단국가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념을 초월하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개방화 시대의 도래를 극적으로 상징하였다. ‘손에 손잡고’는 그런 분위기를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동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결코 견강부회(牽強附會)가 아닌 것이다. 수년 전에 한국에 온 쿠웨이트 북한 대리대사를 만났더니 ‘손에 손잡고’는 올림픽 직후 북한에도 알려져 몰래 불렀다고 했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또 다른 주제가
여기서 필자가 최근에 발굴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서울올림픽 주제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목소리만으로 치면 역대 최고로 꼽히는 불멸의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부른 ‘원 모멘트 인 타임(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는 서울올림픽 주제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올림픽 중계회사 NBC가 이 노래를 주제가로 틀었고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4분44초. 휴스턴이 전성기에 부른 노래답게 가사와 리듬은 힘이 넘치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구글을 검색하면 역대 올림픽 주제가 랭킹이 여기저기 나오는데 부동의 1위는 One Moment in Time이고 3등은 Hand in Hand이다.
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 대히트하였고 유튜브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년에 불우했던 휴스턴이기에 이 씩씩한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One Moment in Time은 앨버트 L. 해먼드와 존 베티스가 작사, 작곡했다. 1991년 슈퍼볼 게임 때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 국가를 불렀다. 많은 유명 가수가 국가를 불렀지만 휴스턴의 이 열창을 최고로 꼽는다. 그 이후로 흑인들도 미국 국가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92년 휴스턴은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보디가드〉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해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번 작품이었고 휴스턴이 부른 주제가 ‘I will always love you’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런 전성기 때 휴스턴이 선물한 서울올림픽 주제가 ‘One Moment in Time’을 정작 한국인들이 너무 소홀히 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침마다 이 노래를 틀어놓는데 좋은 기를 받는 느낌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최고를 지향하여 나아가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는 투지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쉬운 영어 문장이라 시(詩)처럼 외울 수도 있다.
이 노래는 불가능에 도전하여 결국 성공하고만 한국인들, 특히 올림픽 주최 세력의 분투를 절정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 같다.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이다.
Give me one moment in time/ When I’m racing with destiny
나에게 한순간의 시간만 줘/ 내가 운명과 경주할 때를
Then in that one moment of time/ I will be/ I will be
그러다가 그 한순간에/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이룰 것이다
I will be free/ I will be/ I will be free
나는 자유다/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자유다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
군 장교단은 속성상 이공계(理工系)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기와 인력을 가장 능률적으로 다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승리의 비결은 속도이니 이공계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박세직 위원장의 지도력은 그런 군사문화의 원리를 깔고 문민문화의 창의성을 보탠 것이다. 그는 조직위를 이끌면서 공식을 즐겨 만들었다. 개념보다 더 구체성이 있는 것이 공식이고 이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요령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은 S.O.(Seoul Olympic)=(ACTS)5X(P+F)² S/N였다. (ACTS)5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꼭 해야 할 20가지의 업무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5A는 공항 영접(Airport Reception), 등록 운영(Accreditation), 숙박(Accomodation), 문화행사(Art Programs), 수익관리(Accounting).
5C는 국제회의(Conferences), 식전행사(Ceremony and Protocol), 경기 운영(Competition), 언어 지원(Communication), 보도 지원(Coverage Media).
5T는 성화 봉송(Torch Relay), 수송 관리(Transportation and Traffic), 통신대책(Telecommunication), 기술 지원(Technology), 관광 지원(Tourism).
5S는 안전대책(Security), 관객관리(Seating), 소년캠프(Scouts), 봉사활동(Service), 학술회의(Scholastics)였다.
(P+F)²은 서울올림픽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인력(Person)과 계획(Plan)을 2P로 표시했고,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시설 및 환경(Facility)과 자금(Fund)을 2F로 표시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여기에 남북 관계의 긴장도가 가산된다. 그것을 S/N으로 표시하였다. S는 남한(South Korea)의 안정(Stability)이며 N은 북한(North Korea)의 부정적 영향력(Negative)을 가리킨다. N, 즉 북한의 위협이 남한의 안정 S를 압도하면 분모가 커져 성공 확률은 떨어지게 된다.
“실패한다면”이란 악몽
그는 이 방정식과 함께 조직위 운영방침도 EQUIPT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E는 Expertise(전문성), 즉 직무정통(職務精通)을 뜻하며 Q는 Quest(for knowledge & ideas)로서 중지결집(衆智結集), U는 Unity(단결)로서, 겸언화합(謙言和合)을 의미하였다. IP는 ‘Integrity and Implementation of Plans’의 약자로서, 공명역행(公明力行)한다는 것을 뜻했다. 계획은 공정하고 현명하게 채택하되 일단 채택된 계획은 반드시 추진해나간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T는 시간관리(時間管理·Time control)를 가리켰다. 아무리 다른 노력이 만족스러워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박세직은 또 서울올림픽의 5대 목표를 PHASE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최다의 참가(Participation), 최상의 화합(Harmony), 최고의 성과(Achievement), 최적의 안전 및 봉사(Security and Service), 최대의 흑자(Economy)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 5대 목표는 모두 최(最)자가 5개나 붙은 것이었다.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를 맡으면서 그 목표를 “잘된 올림픽 정도가 아니라 근대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개발연대의 군인 출신 경영자들은 목표를 터무니없게 높게 잡아놓고는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으로 밀어붙여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수출 100억 달러’ ‘중화학공업 건설’ ‘서울올림픽 개최 신청’ 같은 게 불가능에 도전한 사례일 것이다. 이런 군인 출신들이 이병철·정주영 같은 불세출의 기업인들을 뒷받침했고 이들이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니 현대-기아차 그룹은 세계 제3위의 자동차 회사가 되고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3~4위의 제조업체가 된 것이다. 산업화가 가장 늦었던 나라가!
박세직 위원장은 “그때는 ‘만약 올림픽이 실패한다면…’ 하는 걱정이 문득문득 악몽처럼 나를 괴롭히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런 망상을 잊으려고 더욱 정신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성공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조직위가 사상 최고란 목표를 정한 것을 그는 ‘대역전의 발상’이라고 표현했다. “서울올림픽이 실패한다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영원히 올림픽이 개최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서 나온 오기(傲氣)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은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몸부림치는 수십 억 개도국 사람들의 꿈이 걸린 행사였다.
조각공원 발상
서울올림픽공원의 정문 ‘평화의 문’은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는 상징 조형물로 불렸다. 높이 24m, 두께 37m, 너비 62m인 ‘평화의 문’은 서울시가 주관하여 만들었는데 박세직 위원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조형물이 원래 계획보다 축소 조정됨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장대한 드라마와 역사성을 기념하는 건축물로서는 빈약한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중업씨의 애초 뜻과는 달리 끝내 축소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자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50여만 평이나 되는 올림픽공원 활용 방안을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예술인은 식물원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한 미국인은 어린이 조각 콘테스트를 해서 입상 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여기서 그는 조각공원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혼을 불어넣어 만든 예술품 사이로 산책하며 명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런 상상만 했지 그런 꿈을 추진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국제적인 친분을 가진 예술인이 없었던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국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6년 10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IOC 총회가 열렸다. 박세직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조각공원 조성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는 만찬장에서 스포츠 미술계의 대가(大家)인 스위스 화가 한스 에르니 옹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에게 조각공원 계획을 설명했더니 한국에 한 번 가서 직접 부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즉석에서 방한 초청을 했다. 오는 길에 일본 하코네의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오도록 부탁했다.
기막힌 발상
에르니 옹 부부는 칠순이 훨씬 넘었는데 건강도 의욕도 왕성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 와서 단숨에 경주 관광을 마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감을 잡은 뒤 조각공원의 부지가 될 올림픽공원을 구경하고는 “현대와 고대가 같이 숨 쉬는 장소에 인류 화합의 축제인 올림픽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조각품을 모아 설치하는 것은 금세기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고 격려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1986년 12월 ROTC 장교 출신이며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 한창조씨와 문장철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박 위원장에게 인사차 들렀다. 박세직은, 지나가는 말로 조각공원 추진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였다. 그 이듬해 1월 말, 이 두 사람은 상세한 추진 계획서를 만들어 찾아왔다.
이들이 뜻밖에도 지나간 이야기를 잊지 않고 준비를 해준 게 고마웠고, 그들의 추진 계획이 비로소 현실성 있는 내용으로 판단돼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계획은 다섯 예술가를 동원, 세계의 유명 조각가들을 서울로 초빙, 조각공원 현장에서 예술품을 즉석 제작, 전시한 뒤 기증토록 하자는 요지였다.
한씨가 추천한 다섯 명은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문화부 고문 제라르 슈리게라, 피에르 레스타니(서유럽 및 아프리카 담당), 미국의 미술평론가 토머스 메서(미주지역 담당), 일본의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아시아 담당), 유고 태생의 미술평론가 안테 리보타(동유럽 담당) 씨였다. 이 다섯 사람은 세계적인 전시회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고 조각가들과 친면이 넓어 현대의 거장(巨匠)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직위는 이들을 국제 운영위원으로 위촉하는 동시에 18명의 저명한 국내 예술가 및 교수를 국내 운영위원으로 위촉하여 세계 현대미술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90억원의 성금
조각공원 조성은 예산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 박 위원장이 모금에 나서야 했다. 평소 예술 활동과 관계가 있는 여섯 기업의 총수를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한 기업에서 15억원씩 모두 90억원의 예산이 확보되었다. 삼성(회장 이건희), 현대(회장 정주영), 럭키금성(회장 구자경), 대우(회장 김우중), 선경(회장 최종현), 쌍용(회장 김석원)이 성금을 낸 기업체였다. 이와는 별도로 포항제철(회장 박태준)은 조각공원 내 음악분수 제작을 위해 15억원을 냈다. 세계 조각계의 거장들도 자신들의 작품이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는 기념 공간에 영원히 전시된다는 명분에 공감, 금전적 이해타산을 떠나 적극 호응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을 비롯하여 세계 야외조각 초대전, 국제 현대회화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전을 아우른 세계 현대미술제가 추진되었다.
1987년 7월 1일부터 50일간 올림픽공원에서 치러진 제1차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에는 한국 조각가 2명, 동구권 조각가 8명을 포함한 15개국의 조각가 15명이 참가하였는데, 현장에서 작품을 제작, 기증하였다. 1988년 3월 11일에는 17개국 19명이 참가한 제2차 야외조각 심포지엄이 열렸고, 그해 9월에는 국제 야외조각 초대전을 가졌다. 66개국 155명의 조각가들이 155점을 출품하여 그대로 조각공원에 기증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화합과 전진이란 정신으로 제작한 200여 점의 국내외 예술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들어간 경비는 조각품 1점당 평균 4000만원이었다. 여비, 숙식비, 소재 값이 대부분이었다. 조각가들은 순전히 인류의 유산을 만든다는 열정으로 자원봉사를 한 셈이었다. 국제 현대회화전에는 62개국에서 156점이 출품되었는데 그중 62점이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 기증되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몇 년 전 좌파 매체 오마이 뉴스에 〈뉴욕 센트럴 파크 부럽지 않은 ‘서울의 이곳’〉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부제(副題)는 〈봄 내음 가득한 올림픽공원과 세계 5대 조각공원인 올림픽 조각공원〉이다. 고인(故人)이 된 박세직 위원장에 대한 언급은 없이 시민들의 교양 있는 휴식처가 된 이곳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찬 글이었다. 이 공원은 전적으로 박세직의 꿈과 모금과 지휘하에 이뤄진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민주화 열병으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등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인 1986~88년 한구석에선 세상을 멀리, 넓게, 그리고 따뜻하게 보는 이들이 “제2의 베를린올림픽”이란 저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을 우리는 공짜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올림픽이란 이름의 위대한 힘이었다”고 했다. 조직위가 약 7000억원의 사업 수익을 올린 것이나, 약 5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동원한 것, 또는 세계 유수의 조각가와 예술가들을 서울로 오게 한 것, 세계 석학들이 참가한 국제 학술대회를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것, 그리고 160개국의 팀이 이념의 벽을 넘어서 서울로 모여든 것들은 모두 올림픽이 내건 세계 평화라는 명분 덕분이었다.
그는 “인류가 지향하는 최고 선(善)의 상징인 올림픽의 성공은 세계 사람들의 양심이 힘차게 약동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고 썼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김운용, 이어령, 정주영, 박종규, 이연택, 김종하, 사마란치, 레이건, 고르바초프 등 유명인사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한국인, 세계인이 순정을 바쳐 만든 것이 서울올림픽이었고 우리는 그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고마워하는 사람들만이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1988년 10월 2일 제24회 서울올림픽 폐회식도 무사히 마치고 박세직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기에 서울올림픽이 성공했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말 그대로 하셨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성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나는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울올림픽이 왜 성공했느냐”에 대해 딱 한마디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하게 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착한 면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먼저 한국인의 순정을 모아야 했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사마란치 네 분이 그 일을 해냈다. 이들이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다.
잊을 수 없는 恩人 사마란치 IOC 위원장
박세직 위원장은 올림픽 회고록에서 세 사람에게 특히 감사를 표했다.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사마란치 위원장이었다. “이 세 분은 나와 조직위의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와 따뜻한 격려로써, 때로는 믿음직한 엄호와 자상한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인도해주었다”고 했다. 세 사람은 올림픽에 관한 한 서로 마음이 통했고, 신뢰 관계를 구축하여 조직위가 마음 턱 놓고 올림픽 준비 업무에 주력할 수 있도록 뒷감당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 대한 박세직의 인물평은 흥미롭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사람(외교관 관료 역임)이지만 독일인과 같은 정확한 관리자의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회의를 아주 요령 있게 진행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결론을 유도하고, 그것도 최단시간 안에 그렇게 했다. ‘네’ ‘아니오’가 분명하였다. 기자회견 때 한 번도 그가 코너로 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기자회견에서 “서울올림픽 경기 시간을 미국 텔레비전 방송 시간에 맞도록 무리하게 조정한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IOC의 주된 수입원은 텔레비전 중계료이며, 그것은 올림픽 운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이즈음 필자가 만난 한국의 공직자나 정치인 중에서 박세직 위원장과 김대중 총재처럼 메모를 많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박 위원장도 “사마란치 위원장같이 메모에 철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1일용, 월간용, 연간용 등 세 가지 메모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하는 습관을 지녔다. 개·폐회식의 한국어 연설을 위해 1년 전부터 녹음을 하여 연습하기도 했다.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마란치 위원장과 통화했는데 감탄한 것은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정보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정세보고를 올리는 전문가를 가까이 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대 IOC 위원장은 거의가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실무는 사무총장에게 맡겼지만 사마란치는 상근하면서 IOC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올림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안다는 실무지식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 방한
그는 휴일도, 취미도 없는 것 같았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이나 왔는데 관광은 단 하루 제주도에 다녀온 것뿐이었다. 만찬 연설이 짧기로 유명한 그는 파티도 일찍 끝내고, 담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침실에 각종 운동기구를 비치,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가벼운 운동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도로서 한국에 머물 때조차 어떤 경우에도 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사마란치는 올림픽 시작 며칠 전부터 매일 아침 8시부터 정확히 30분간 IOC와 조직위 간의 합동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는 국회 청문회를 연상케 했다. 올림픽 준비의 문제점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받아 넘겨야 할 박 위원장은 즉석 답변을 위하여 조직위 간부들과 함께 꽤나 긴장해야 했던 회의였다. 사마란치는 자신의 착상(着想)인 이 회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약 30년간 IOC 위원장을 지냈고 2010년 별세했다. 향년 89세.⊙
바로 이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이 주최한 서울올림픽이 “화합과 전진” “벽을 넘어서”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 한국과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켜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한국인은 6·25 항전으로 자유세계를 지켜내고 서울올림픽으로 국제 공산체제를 허물었다. 이보다 더한 드라마, 이보다 통쾌한 복수가 또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숨기려 한다는 점이다.
국내적으론 올림픽 준비 과정이 사회의 선진화(화장실 문화 개선 등), 정치 민주화, 대북(對北) 우위의 촉매제가 된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이념의 벽을 넘어 온전한 올림픽이 이뤄지고 그 분위기는 이듬해 동구 민주화, 3년 뒤 소련 붕괴에 영향을 주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이런 전환기를 북방 정책으로 돌파, 동구·소련·중국·베트남 등 공산권과 수교,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킨다. 6·25 항전이 죽음을 극복한 드라마였다면 서울올림픽은 생명의 약동(躍動)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물리친 달콤한 복수였다. 6·25 항전-서울올림픽 성공이 자유통일로 결실을 맺을 때 한국인의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는 완성될 것이지만 파리올림픽을 계기로 36년 전을 돌아보니 더욱 커지기만 하는 서울올림픽이다. 큰 인물과 사건은 시간적 거리를 두고 봐야 전체상을 그릴 수 있듯이 서울올림픽도 그러하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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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직 위원장이 펴낸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1990) |
다행히 나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선 별로 한 일이 없지만 기록을 남기는 데는 약간의 역할을 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박세직 위원장은 안기부장과 서울시장, 그리고 여당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여 취재·편집 분야에서 힘을 보탠 적이 있다(1990년에 나온 박세직 지음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한 세대가 지나서 그 기록을 다시 읽어보니 “아, 이제 역사가 되었구나”라는 감회가 밀려왔다. 이병주(李炳注) 식으로 이야기하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데 올림픽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日常) 속에 살아 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국전쟁, 서울올림픽, 중화학공업 건설, 중동 건설 시장 진출, 새마을운동, 건강보험과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 건설 같은 이야기들은 대한민국 세력이 기록을 정리하여 영원한 기억의 유산으로 가꾸고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3세대에 걸쳐 이룩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국민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자존심은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연결될 때 풍성한 에너지를 지니게 될 터이다.
세상을 바로 세울 사람 朴世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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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시절의 노태우 대통령과 박세직 위원장. 두 사람은 수도경비사령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직을 수행했다. 사진=조선DB |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 지휘관일 때 한 말 “지시는 5%, 확인이 95%다”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올림픽 개막 하루 전인 1988년 9월 16일 늦은 밤 개·폐회식 상임위원들과 함께 주경기장 시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느라 바빴다. 성화 점화(點火)를 위해 땅에서 솟아오르는 승강기의 안전 상태, 개회식 때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함께 쓰게 될 회전연단의 회전속도와 귀빈실 텔레비전을 직접 점검했다.
놀랍게도 이들 두 곳에서 결함을 발견했다. 회전연단이 2분 동안에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2분30초 걸렸고, 귀빈실 TV 수상기에선 영상만 나올 뿐 음향이 들리지 않았다. 부랴부랴 이를 시정하고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는 2009년 여름 급성 폐렴으로 76세에 작고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입원하기 직전이었다. 재향군인회장이던 그는 일부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하여 나에게 물었다. 기침을 자꾸 했는데 그런 몸으로 계단 오르기를 한다고 자랑했다.
둘도 없는 홍보 기회
서울올림픽은 취재기자 수와 텔레비전 방영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언론사상 최대 규모의 보도 행사였다. 선수보다 더 많은 1만5740명의 기자들이 서울올림픽을 취재하였고, 85개국의 160개 방송사가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시간은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의 3배가 넘는 9200시간이었다. 한국이 이런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세계인들 앞에 노출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야말로 둘도 없는 국가 홍보의 기회였다.
박세직은 86아시아경기대회 두 달 전에 미리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13명)을 구성, 아시아경기대회의 개·폐회식을 관찰하여 아이디어를 얻도록 했다. 이렇게 일찍 개·폐회식 준비에 착수했던 것은 개·폐회식, 그중에서도 개회식이야말로 올림픽과 국가 홍보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행사임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주최국이 자기 나라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개·폐회식 행사 때뿐인 것이다.
서울올림픽에서는 1030게임이 펼쳐졌다. 경기의 경우, 한두 경기의 운영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경기로써 충분히 실점(失點)을 만회할 수가 있다. 하지만 개·폐회식은 다르다. 한 번뿐이어서 실패하면 회복할 방법이 없다. 개·폐회식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최다(最多)의 출연 인력과 관중이 등장한다. 그만큼 실수나 사고의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개회식이 승부처
박세직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성공은 개·폐회식, 이 중에서도 개회식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은 주제가(主題歌) ‘손에 손잡고’와 함께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이 개회식의 생동하는 메시지와 상징성이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내고 세계인들, 특히 공산권 사람들을 자극하여 역사적 변혁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공연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실증했다.
1986년 7월에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이 구성되면서, 이어령, 최정호 등이 주제 발표를 하였고 박용구, 오태석 등이 시나리오 초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과 새로운 안들이 등장하여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도 좀처럼 확정된 시나리오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박세직 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7년 3월 7일부터 8일 동안 시내 호텔에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상회의를 열게 되었다.
저녁에는 도시락을 먹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거의 합숙과 다름없는 강행군 회의였지만 속출하는 아이디어와 뜨거운 토론들은 결정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산실(産室)이 되어주었다. 박세직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몰래 졸음을 참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때 체험한 열기와 토론 등이 개·폐회식을 성공으로 이끌어간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회의의 토의를 주도했던 변종하, 김문환, 이강숙, 이상수, 이어령, 한양순 등은 그 뒤에도 상임위원으로 남아 실무에 관여하였다.
상임위원들의 추천에 의하여 문화방송의 제작이사 표재순이 제작단장을 맡게 되었다. 개·폐회식에 한국 예술계의 최고급 인력을 집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박세직은, 정상급 학자, 예술가, 문인이 머리를 짜내고 학생, 체육인, 관료, 그리고 군인들이 이 아이디어를 받아 박력 있게 실천한 지덕체(知德體)의 통합이 개·폐회식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정리했다. 문무(文武) 합작이기도 했다.
이어령 “뜬구름 잡는 생각도 존중하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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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와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사진=조선DB |
“단군 이래로 춤추는 사람, 철학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 음악인 등등이 이렇게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인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은 서로의 능력을 보태준 것이 아니라 서로 깎아내렸기 때문이지요.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논리는 질서 정연한데, 된다는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사람이 지식인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안 된다는 쪽보다는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지요.”
올림픽이 끝나고 1년 3개월 뒤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개·폐회식 관계자들은 그를 위한 축하연을 마련했는데, 강원룡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올림픽 문화예술행사 추진협의회 위원장이라고 하나 사실은 하나도 일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툭하면 그만두겠다고 하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올림픽에 꽁꽁 묶어둔 일밖에는 한 게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올림픽이 끝나고서야 알았습니다.”
현실론보다는 이상론을 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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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들어온 윤태웅 군은 화합의 정신을 상징했다. 사진=조선DB |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조직위는 이 추상적 개념을 “벽을 넘어서”라는 개·폐회식의 기본 철학으로 좀 더 구체화시켰다. 인종, 문화, 이념, 종교의 벽을 넘어서 모여든 인류가 평화의 축제를 펼치는 그곳에 잠실 주경기장이 있어야 하며, 그 개·폐회식은 “세계에서 올림픽이 이루어지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여겨졌던 서울의 일대 역전 드라마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수특전사 장병들 1000여 명과 미동초등학교 학생 500여 명이 펼친 5분간의 태권도 시범은 평화의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파괴적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평화로의 전진을 가로막는 갖가지 장벽을 허무는 창조적 파괴 행위로 설정되었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개·폐회식 공연 공간을 강과 하늘로 확장한 것이나 성화 점화자를 세 사람으로 한 것, 어린이가 화합의 원(굴렁쇠)을 굴리는 장면 등등, 개·폐회식의 모든 장면은 ‘벽을 넘어서’의 상징성으로 수렴되었다. 박 위원장은 “철학과 미학이 중요한 것은 잡다한 것들에 계통을 세워 질서와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실감하였다”고 썼다.
개·폐회식의 출연진은 거의가 10대와 20대였다. 외국인들은 이들 젊은이의 발랄함과 아름다움과 당당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개회식에는 1만3000여 명이 출연하였다. 53%는 고교생, 20%는 군인들이었다. 고교생은 거의가 실업고교 재학생이었다. 개·폐회식을 합치면 약 2만 명이 등장했고, 소도구는 약 18만 점이나 되었다. 물량과 규모 면에서도 사상 최대였다. 개·폐회식을 운영한 조직위 인력은 1523명이었다. 이 가운데 356명은 자원봉사자였다.
스무 가지 새로운 것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것은 흰 비둘기, 8개 국어 해설 방송과 이어폰 사용, 24개국 합동 고공낙하, 성화 점화 및 소화(消火) 때 전자음악 사용, 개회식 행사가 강에서 시작된 점 등등 스무 가지였다.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조직위에서는 세 가지 첨단과학 분야의 공연을 추진하였었다. 개회식 때 코리아나가 UFO를 닮은 원반형 비행물체를 타고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는 방안, 초전도체를 이용하여 회전연단을 1m쯤 자기(磁氣) 부상시켜 허공에 띄우는 아이디어, 그리고 폐회식 때 하늘을 캔버스 삼아 레이저 광선으로 세계 역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발상 등이 그것이었다.
박세직 위원장은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레이저 관계 회사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미국의 지인(知人)을 통해 초전도체 기술의 도입을 시도하는 등 막판에 열을 올렸으나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무리다”는 결론을 내리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도전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기술의 벽을 확인한 조직위는 이미 확정된 계획을 더욱 완벽하게 추진하는 쪽으로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개·폐회식을 더 충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 산 5번지 세양금속은 영세 주물 공장으로 회사 간판도 없었다. 쓰러지는 기둥을 억지로 세운 듯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늘어서 있고 가까스로 한 사람 지날 수 있는 골목을 들어서면 여기저기 놋쇠 용기를 만드는 공장이 나타나는데 그중의 하나가 세양금속이었다. 1987년 가을, 세양금속 김상도(金相道 당시·50) 사장은 동삼공업주식회사의 이인모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한국화약으로 갔더니 성화봉 견본을 보여주었다. 김 사장은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충분히 제작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1988년 1월이 되어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그는 성화봉 제작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이 되자 동삼공업에서 성화봉을 가지고 와서 만들 수 있겠느냐고 했고 김 사장은 자신 있다고 하자 샘플을 만들라고 했다. 53개 업체에서 샘플을 납품했는데 그중에는 국내 유수 기업도 꽤 들어 있었다.
성화봉을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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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점화식 전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이 성화봉을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이 성화봉은 세양금속이 제작했다. 사진=조선DB |
이때의 심정은 뭐랄까, 옛날 자식이 과거시험 보러 떠나고 나면 그 어머니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잘되기를 기원하였듯이 그러한 심정으로 한 개의 불량품도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제작했다고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비밀리에 작업을 하자니 더워서 숨이 턱턱 막혔다. 납품 기일에 맞추기 위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작업을 하였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생애 처음으로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영광스럽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화 봉송에 쓰일 3100개의 성화봉을 제작하였고 추후로 대통령 요청에 의해 200개, 한국화약 사장 요청에 의해 200개를 별도로 생산했다.
김 사장은 성화가 자기 회사 앞을 지나간다기에 전 직원과 함께 일손을 놓은 채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밖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성화가 흰 연기를 뿜으며 지나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룩 흘렸다. 그 많은 사람 중 주자(走者)가 들고 뛰는 찬란한 금빛 성화봉이 땟물이 줄줄 흐르는 옷차림의 초라한 행색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 속으로 외쳤다.
“내가 만든 것이다. 저 찬란한 성화봉은 내가 만든 것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성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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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성화대는 서울 구로구 고척동의 삼성공업사에서 만들었다. 사진=조선DB |
근로자들은 공장 마당에 철 구조물을 내다 놓고 성화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페인트칠을 하기 전이라 불그스름하게 녹슨 쇠파이프를 한데 내어놓고 뚱땅뚱땅 망치질을 해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서관은 당황한 듯했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에게 큰일 났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체하였다.
더 놀란 것은 망치질을 하고 있던 근로자들이었다. 박세직은 미처 위문품을 준비하지 않았었다. 함께 간 직원에게 당신 뭐 가진 것 있느냐고 했더니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 한 갑이 나왔다. 근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한 개비씩 돌린 뒤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울올림픽 하면 굉장한 사람들이 치르는 호화판 행사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이런 자그마한 일들이 뭉쳐져서 올림픽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진흙 바닥에서 올림픽 시설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성화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일입니다. 정성 들여서 만들어주십시오.”
‘공사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그는 조직위의 촬영팀을 불러 성화대 제작 광경을 비디오로 기록해두도록 했다. 성화대 제작을 맡은 회사는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의 삼성공업사였다. 이종월(李鍾月·당시 35) 사장은 1987년 11월 작업에 착수하던 날 직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가 비록 쇠붙이를 만지며 막일을 하지만 우리 생애에서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로서도 영광이지만 개인으로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제작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오로지 성화대 제작에 열중해주기 바란다. 회사에서도 다른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이 일에만 매달릴 생각이다.”
이 회사의 용접공 이영근(李永根·당시 34)씨는 “공기(工期)도 촉박했거니와 겨울철에 야외 작업을 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작업장이 진흙 마당이어서 얼면 넘어지기 쉽고 녹으면 질퍽질퍽하여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근로자들은 2교대제로 밤낮없이 일했다. 아파서 못 나오는 사람이 생기면 이를 보충하느라고 실제로는 하루 평균 14~18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이영근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신통하게도 추위를 참느라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신이 솜처럼 피로함에도 연장 근무를 자청하는 동료들이 속출했습니다. 교회 집사인 집사람은 성화대 제작 기간 내내 새벽 기도와 하루 한 끼 금식을 거의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성화대를 그곳에서 만드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박 위원장이 다녀간 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이웃 사람들은 근로자들에게 과일을 갖다 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성화대를 완성하고 주경기장으로 옮기려고 세워보는 날 이웃 주민들이 몰려나와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근로자의 순정 어린 손때가 묻은 성화대가 대회 기간 중 잠실벌의 밤하늘을 밝혔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뒤에는 이들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은 수많은 보통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무턱대고 만든 龍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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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 한강을 거슬러 온 용고가 행렬과 함께 주경기장에 도착, 땅과 하늘을 울렸다. 사진=조선DB |
이 용고는 북통 지름이 2m10cm, 길이 2m30cm, 무게가 630kg이나 돼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었을 것이다. 이 북이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데는 한 장인(匠人)의 순정이 있었다.
대전시 서구 원천동 대한민속국악사는 2대(代)에 걸쳐 북 만드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1대인 김창호씨의 네 형제 가운데 3남인 김관식(金寬植·당시 35)씨는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하고 박수를 쳤다. 그날부터 김씨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멀리 들리는 북”을 만들어 서울올림픽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일방적으로 했다. 형제들이 말렸으나 그는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만들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소를 찾아야 했다. 북 면(面)을 소의 등가죽 하나로 붙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소는 상처가 없어야 했다. 바늘구멍만 한 흠이라도 있으면 북소리가 이상해진다.
김씨는 여섯 달의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1200kg짜리 소 두 마리를 구해 쇠가죽을 얻긴 했으나 크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해외에서 큰 소를 찾다가 1년 뒤 미국에서 1550kg짜리 종자 소 다섯 마리(예비분 세 마리 포함)를 찾아 수입하였다. 북통으로 쓸 나무도 국내의 원목(原木)이 너무 작아 미국 로키산맥에서 자라는 나이테가 198개인 미송(美松)을 사들였다.
‘미국의 소리’가 날까 걱정
김씨는 재료를 구해놓고는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한국의 소리’가 아니라 ‘미국의 소리’가 날까 봐서였다. 그는 그래서 쇠가죽과 나무의 처리 과정에 한국 북의 제작 공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한국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쇠가죽은 털을 뽑고 적당한 습도와 온도 아래서 2년간 건조시켰고, 미송도 2년간 자연 건조시켰다. 약품 처리 과정에서도 한국 북 제조의 전통 방식을 더욱 철저히 지켰다. 통나무를 46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못과 철사로 촘촘히 잇고, 전체를 창호지와 흰 천으로 감쌌다. 맑고 유현(幽玄)한 북소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북대를 만들고 북통 둘레의 단청 작업에 들어갔다. 단청 기능 보유자인 최성현씨에게 부탁하여 먹당기, 매화무늬, 꽃구름에 둘러싸인 채 청룡, 황룡 두 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10여 일 만에 완성하였다.
문제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짝사랑하듯 무턱대고 만든 것이란 점이었다. 1987년 4월에 완성해 조직위에 기증하려 하니 실무자는 “서면으로 신청하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 만들어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비로소 조직위에서 관심을 보이더니 1987년 11월 드디어 “기증을 받겠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 형제는 운송마저도 자기 돈을 들여 타이탄 트럭에 실어 딸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북을 서울로 보냈다. 그때까지도 이 북이 서울올림픽에 어떻게 등장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북을 완성한 뒤 기증하기까지의 여덟 달 동안이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북을 만들어놓으니 1억5000만원에 팔라는 제의가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개회식 날 김씨는 텔레비전을 통해 자랑스러운 용고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도 울고 형제들도 울었으며 동네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올림픽 전에 김씨는 좀 곤란한 입장에 처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했으니 개·폐회식 입장권을 많이 받았을 것 아닌가, 좀 나눠 주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개·폐회식 입장권은커녕 시연회 초대장도 받지 못했고, 감사장 수상 대상에서도 빠져 있었다.
박세직 위원장도 올림픽이 끝난 뒤 책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1989년 초에 김씨를 초빙해 위로를 해주었다. 김씨는 오히려 “북 만드는 사람이 평생의 꿈을 이루었으니 한도 원도 없다”면서 “요즘 명함을 내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주제가
잔치가 잘되려면 소문이 나야 한다. 잔치 소문을 내는 데는 노래만 한 것이 없다. 특히 올림픽에서 노래가 중요한 것은 개막 전의 홍보, 대회 기간 중의 분위기 조성, 대회 후의 추억을 위해서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박세직은, 좋은 영화 주제가는 영화 자체보다도 더 유명해지듯 좋은 올림픽 주제가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된다고 생각했다. 1986년 봄에 조직위원장이 되고 나서 올림픽 주제가의 추진 상황을 점검해보았더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86아시아경기대회가 주제가 없이 치러져 좀 메마른 느낌을 주었기에 서울올림픽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히트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국내 작곡가에게 너무 의존하다가는 돈은 돈대로 들고, 유행에는 실패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다.
1987년 3월에는 조직위에 이봉조, 김강섭, 김희갑, 이백천, 길옥윤, 최창권씨를 초청했다. 먼저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상대로 주제가를 공모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한국인 음악가도 물론 참여할 수 있고, 같은 조건이라면 한국인 작사, 작곡가의 노래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나, 개·폐회식 상임전문위원회에서는 거센 반대가 있었다. 외국인이 작사, 작곡한 영어 노래가 나오면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고 한국 음악인들을 소외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인만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다. 축제에서는 손님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손님이 즐겨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 레코드 회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세 회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당시 서독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의 레코드 판매 다국적 회사인 폴리그램 레코드, 미국의 광고대행사인 B/M사, 일본의 덴쓰(電通) 가운데서 폴리그램을 택했다. 한국의 보컬그룹 코리아나가 이 회사에 전속돼 있었다. 폴리그램에서는 작곡에 LA올림픽 주제가 ‘리치 아웃’의 작곡가 조르조 모로데, 작사가로는 토머스 R 휘트록을 추천하였다.
세계적 작곡, 작사가를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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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서울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는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됐다. 사진=조선DB |
조직위는 1988년 6월 21일에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를 초청, ‘손에 손잡고’ 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조용필이 부른 ‘서울 서울 서울’과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유행하고 있었다. ‘손에 손잡고’가 퍼져 나가자 국내 가수들을 개·폐회식에 참석시키라는 청탁이 박 위원장에게 들어왔다. 세 번에 걸친 개·폐회식 시연회에 패티 김, 김연자, 조용필을 참여시켜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토록 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손에 손잡고’ 쪽이었다. 이 노래는 스웨덴, 서독, 일본 등 17개국에서 인기 1위를 기록했고, 30여 개국에서는 10위권 내로 진출하는 등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되었다.
동구권의 데모 송이 된 ‘손에 손잡고’
필자는 1989년 12월에 일시 귀국한 보컬그룹 코리아나를 만난 적이 있다. 코리아나(단장 김영일, 단원 이승규·이용규·이애숙·홍화자)는 1989년 12월 11~13일 동베를린에서 무너진 장벽을 배경으로 ‘손에 손잡고’를 열창한 뒤 국내 공연을 위해 일시 귀국한 터였다. 동구 공산권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이 노래가 공산권 민주화 현장의 주제가로 변해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베를린 장벽 현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마이클 잭슨, 믹 재거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동독에 신청서를 냈으나 코리아나가 동독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맨 먼저 초청돼 두 번 공연을 했다.
1989년 12월 12일 오후, 비 내리는 베를린 장벽에서의 공연 때는 수백 명의 동독인이 구경을 하다가 말고 합세, 감동적인 합창을 했고 마침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를 한동안 배회하여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었다. 분단국가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념을 초월하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개방화 시대의 도래를 극적으로 상징하였다. ‘손에 손잡고’는 그런 분위기를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동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결코 견강부회(牽強附會)가 아닌 것이다. 수년 전에 한국에 온 쿠웨이트 북한 대리대사를 만났더니 ‘손에 손잡고’는 올림픽 직후 북한에도 알려져 몰래 불렀다고 했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또 다른 주제가
여기서 필자가 최근에 발굴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서울올림픽 주제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목소리만으로 치면 역대 최고로 꼽히는 불멸의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부른 ‘원 모멘트 인 타임(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는 서울올림픽 주제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올림픽 중계회사 NBC가 이 노래를 주제가로 틀었고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4분44초. 휴스턴이 전성기에 부른 노래답게 가사와 리듬은 힘이 넘치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구글을 검색하면 역대 올림픽 주제가 랭킹이 여기저기 나오는데 부동의 1위는 One Moment in Time이고 3등은 Hand in Hand이다.
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 대히트하였고 유튜브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년에 불우했던 휴스턴이기에 이 씩씩한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One Moment in Time은 앨버트 L. 해먼드와 존 베티스가 작사, 작곡했다. 1991년 슈퍼볼 게임 때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 국가를 불렀다. 많은 유명 가수가 국가를 불렀지만 휴스턴의 이 열창을 최고로 꼽는다. 그 이후로 흑인들도 미국 국가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92년 휴스턴은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보디가드〉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해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번 작품이었고 휴스턴이 부른 주제가 ‘I will always love you’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런 전성기 때 휴스턴이 선물한 서울올림픽 주제가 ‘One Moment in Time’을 정작 한국인들이 너무 소홀히 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침마다 이 노래를 틀어놓는데 좋은 기를 받는 느낌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최고를 지향하여 나아가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는 투지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쉬운 영어 문장이라 시(詩)처럼 외울 수도 있다.
이 노래는 불가능에 도전하여 결국 성공하고만 한국인들, 특히 올림픽 주최 세력의 분투를 절정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 같다.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이다.
Give me one moment in time/ When I’m racing with destiny
나에게 한순간의 시간만 줘/ 내가 운명과 경주할 때를
Then in that one moment of time/ I will be/ I will be
그러다가 그 한순간에/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이룰 것이다
I will be free/ I will be/ I will be free
나는 자유다/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자유다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
군 장교단은 속성상 이공계(理工系)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기와 인력을 가장 능률적으로 다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승리의 비결은 속도이니 이공계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박세직 위원장의 지도력은 그런 군사문화의 원리를 깔고 문민문화의 창의성을 보탠 것이다. 그는 조직위를 이끌면서 공식을 즐겨 만들었다. 개념보다 더 구체성이 있는 것이 공식이고 이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요령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은 S.O.(Seoul Olympic)=(ACTS)5X(P+F)² S/N였다. (ACTS)5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꼭 해야 할 20가지의 업무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5A는 공항 영접(Airport Reception), 등록 운영(Accreditation), 숙박(Accomodation), 문화행사(Art Programs), 수익관리(Accounting).
5C는 국제회의(Conferences), 식전행사(Ceremony and Protocol), 경기 운영(Competition), 언어 지원(Communication), 보도 지원(Coverage Media).
5T는 성화 봉송(Torch Relay), 수송 관리(Transportation and Traffic), 통신대책(Telecommunication), 기술 지원(Technology), 관광 지원(Tourism).
5S는 안전대책(Security), 관객관리(Seating), 소년캠프(Scouts), 봉사활동(Service), 학술회의(Scholastics)였다.
(P+F)²은 서울올림픽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인력(Person)과 계획(Plan)을 2P로 표시했고,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시설 및 환경(Facility)과 자금(Fund)을 2F로 표시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여기에 남북 관계의 긴장도가 가산된다. 그것을 S/N으로 표시하였다. S는 남한(South Korea)의 안정(Stability)이며 N은 북한(North Korea)의 부정적 영향력(Negative)을 가리킨다. N, 즉 북한의 위협이 남한의 안정 S를 압도하면 분모가 커져 성공 확률은 떨어지게 된다.
“실패한다면”이란 악몽
그는 이 방정식과 함께 조직위 운영방침도 EQUIPT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E는 Expertise(전문성), 즉 직무정통(職務精通)을 뜻하며 Q는 Quest(for knowledge & ideas)로서 중지결집(衆智結集), U는 Unity(단결)로서, 겸언화합(謙言和合)을 의미하였다. IP는 ‘Integrity and Implementation of Plans’의 약자로서, 공명역행(公明力行)한다는 것을 뜻했다. 계획은 공정하고 현명하게 채택하되 일단 채택된 계획은 반드시 추진해나간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T는 시간관리(時間管理·Time control)를 가리켰다. 아무리 다른 노력이 만족스러워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박세직은 또 서울올림픽의 5대 목표를 PHASE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최다의 참가(Participation), 최상의 화합(Harmony), 최고의 성과(Achievement), 최적의 안전 및 봉사(Security and Service), 최대의 흑자(Economy)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 5대 목표는 모두 최(最)자가 5개나 붙은 것이었다.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를 맡으면서 그 목표를 “잘된 올림픽 정도가 아니라 근대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개발연대의 군인 출신 경영자들은 목표를 터무니없게 높게 잡아놓고는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으로 밀어붙여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수출 100억 달러’ ‘중화학공업 건설’ ‘서울올림픽 개최 신청’ 같은 게 불가능에 도전한 사례일 것이다. 이런 군인 출신들이 이병철·정주영 같은 불세출의 기업인들을 뒷받침했고 이들이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니 현대-기아차 그룹은 세계 제3위의 자동차 회사가 되고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3~4위의 제조업체가 된 것이다. 산업화가 가장 늦었던 나라가!
박세직 위원장은 “그때는 ‘만약 올림픽이 실패한다면…’ 하는 걱정이 문득문득 악몽처럼 나를 괴롭히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런 망상을 잊으려고 더욱 정신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성공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조직위가 사상 최고란 목표를 정한 것을 그는 ‘대역전의 발상’이라고 표현했다. “서울올림픽이 실패한다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영원히 올림픽이 개최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서 나온 오기(傲氣)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은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몸부림치는 수십 억 개도국 사람들의 꿈이 걸린 행사였다.
조각공원 발상
서울올림픽공원의 정문 ‘평화의 문’은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는 상징 조형물로 불렸다. 높이 24m, 두께 37m, 너비 62m인 ‘평화의 문’은 서울시가 주관하여 만들었는데 박세직 위원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조형물이 원래 계획보다 축소 조정됨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장대한 드라마와 역사성을 기념하는 건축물로서는 빈약한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중업씨의 애초 뜻과는 달리 끝내 축소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자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50여만 평이나 되는 올림픽공원 활용 방안을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예술인은 식물원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한 미국인은 어린이 조각 콘테스트를 해서 입상 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여기서 그는 조각공원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혼을 불어넣어 만든 예술품 사이로 산책하며 명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런 상상만 했지 그런 꿈을 추진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국제적인 친분을 가진 예술인이 없었던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국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6년 10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IOC 총회가 열렸다. 박세직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조각공원 조성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는 만찬장에서 스포츠 미술계의 대가(大家)인 스위스 화가 한스 에르니 옹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에게 조각공원 계획을 설명했더니 한국에 한 번 가서 직접 부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즉석에서 방한 초청을 했다. 오는 길에 일본 하코네의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오도록 부탁했다.
기막힌 발상
에르니 옹 부부는 칠순이 훨씬 넘었는데 건강도 의욕도 왕성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 와서 단숨에 경주 관광을 마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감을 잡은 뒤 조각공원의 부지가 될 올림픽공원을 구경하고는 “현대와 고대가 같이 숨 쉬는 장소에 인류 화합의 축제인 올림픽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조각품을 모아 설치하는 것은 금세기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고 격려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1986년 12월 ROTC 장교 출신이며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 한창조씨와 문장철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박 위원장에게 인사차 들렀다. 박세직은, 지나가는 말로 조각공원 추진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였다. 그 이듬해 1월 말, 이 두 사람은 상세한 추진 계획서를 만들어 찾아왔다.
이들이 뜻밖에도 지나간 이야기를 잊지 않고 준비를 해준 게 고마웠고, 그들의 추진 계획이 비로소 현실성 있는 내용으로 판단돼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계획은 다섯 예술가를 동원, 세계의 유명 조각가들을 서울로 초빙, 조각공원 현장에서 예술품을 즉석 제작, 전시한 뒤 기증토록 하자는 요지였다.
한씨가 추천한 다섯 명은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문화부 고문 제라르 슈리게라, 피에르 레스타니(서유럽 및 아프리카 담당), 미국의 미술평론가 토머스 메서(미주지역 담당), 일본의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아시아 담당), 유고 태생의 미술평론가 안테 리보타(동유럽 담당) 씨였다. 이 다섯 사람은 세계적인 전시회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고 조각가들과 친면이 넓어 현대의 거장(巨匠)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직위는 이들을 국제 운영위원으로 위촉하는 동시에 18명의 저명한 국내 예술가 및 교수를 국내 운영위원으로 위촉하여 세계 현대미술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90억원의 성금
조각공원 조성은 예산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 박 위원장이 모금에 나서야 했다. 평소 예술 활동과 관계가 있는 여섯 기업의 총수를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한 기업에서 15억원씩 모두 90억원의 예산이 확보되었다. 삼성(회장 이건희), 현대(회장 정주영), 럭키금성(회장 구자경), 대우(회장 김우중), 선경(회장 최종현), 쌍용(회장 김석원)이 성금을 낸 기업체였다. 이와는 별도로 포항제철(회장 박태준)은 조각공원 내 음악분수 제작을 위해 15억원을 냈다. 세계 조각계의 거장들도 자신들의 작품이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는 기념 공간에 영원히 전시된다는 명분에 공감, 금전적 이해타산을 떠나 적극 호응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을 비롯하여 세계 야외조각 초대전, 국제 현대회화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전을 아우른 세계 현대미술제가 추진되었다.
1987년 7월 1일부터 50일간 올림픽공원에서 치러진 제1차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에는 한국 조각가 2명, 동구권 조각가 8명을 포함한 15개국의 조각가 15명이 참가하였는데, 현장에서 작품을 제작, 기증하였다. 1988년 3월 11일에는 17개국 19명이 참가한 제2차 야외조각 심포지엄이 열렸고, 그해 9월에는 국제 야외조각 초대전을 가졌다. 66개국 155명의 조각가들이 155점을 출품하여 그대로 조각공원에 기증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화합과 전진이란 정신으로 제작한 200여 점의 국내외 예술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들어간 경비는 조각품 1점당 평균 4000만원이었다. 여비, 숙식비, 소재 값이 대부분이었다. 조각가들은 순전히 인류의 유산을 만든다는 열정으로 자원봉사를 한 셈이었다. 국제 현대회화전에는 62개국에서 156점이 출품되었는데 그중 62점이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 기증되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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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조각공원은 세계 5대 조각공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사진=조선DB |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올림픽이란 이름의 위대한 힘이었다”고 했다. 조직위가 약 7000억원의 사업 수익을 올린 것이나, 약 5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동원한 것, 또는 세계 유수의 조각가와 예술가들을 서울로 오게 한 것, 세계 석학들이 참가한 국제 학술대회를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것, 그리고 160개국의 팀이 이념의 벽을 넘어서 서울로 모여든 것들은 모두 올림픽이 내건 세계 평화라는 명분 덕분이었다.
그는 “인류가 지향하는 최고 선(善)의 상징인 올림픽의 성공은 세계 사람들의 양심이 힘차게 약동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고 썼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김운용, 이어령, 정주영, 박종규, 이연택, 김종하, 사마란치, 레이건, 고르바초프 등 유명인사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한국인, 세계인이 순정을 바쳐 만든 것이 서울올림픽이었고 우리는 그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고마워하는 사람들만이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1988년 10월 2일 제24회 서울올림픽 폐회식도 무사히 마치고 박세직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기에 서울올림픽이 성공했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말 그대로 하셨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성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나는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울올림픽이 왜 성공했느냐”에 대해 딱 한마디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하게 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착한 면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먼저 한국인의 순정을 모아야 했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사마란치 네 분이 그 일을 해냈다. 이들이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다.
잊을 수 없는 恩人 사마란치 IOC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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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접견하는 전두환 대통령.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사진=조선DB |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 대한 박세직의 인물평은 흥미롭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사람(외교관 관료 역임)이지만 독일인과 같은 정확한 관리자의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회의를 아주 요령 있게 진행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결론을 유도하고, 그것도 최단시간 안에 그렇게 했다. ‘네’ ‘아니오’가 분명하였다. 기자회견 때 한 번도 그가 코너로 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기자회견에서 “서울올림픽 경기 시간을 미국 텔레비전 방송 시간에 맞도록 무리하게 조정한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IOC의 주된 수입원은 텔레비전 중계료이며, 그것은 올림픽 운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이즈음 필자가 만난 한국의 공직자나 정치인 중에서 박세직 위원장과 김대중 총재처럼 메모를 많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박 위원장도 “사마란치 위원장같이 메모에 철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1일용, 월간용, 연간용 등 세 가지 메모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하는 습관을 지녔다. 개·폐회식의 한국어 연설을 위해 1년 전부터 녹음을 하여 연습하기도 했다.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마란치 위원장과 통화했는데 감탄한 것은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정보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정세보고를 올리는 전문가를 가까이 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대 IOC 위원장은 거의가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실무는 사무총장에게 맡겼지만 사마란치는 상근하면서 IOC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올림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안다는 실무지식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 방한
그는 휴일도, 취미도 없는 것 같았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이나 왔는데 관광은 단 하루 제주도에 다녀온 것뿐이었다. 만찬 연설이 짧기로 유명한 그는 파티도 일찍 끝내고, 담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침실에 각종 운동기구를 비치,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가벼운 운동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도로서 한국에 머물 때조차 어떤 경우에도 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사마란치는 올림픽 시작 며칠 전부터 매일 아침 8시부터 정확히 30분간 IOC와 조직위 간의 합동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는 국회 청문회를 연상케 했다. 올림픽 준비의 문제점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받아 넘겨야 할 박 위원장은 즉석 답변을 위하여 조직위 간부들과 함께 꽤나 긴장해야 했던 회의였다. 사마란치는 자신의 착상(着想)인 이 회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약 30년간 IOC 위원장을 지냈고 2010년 별세했다. 향년 8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