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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유럽 종횡무진 45일간 여행기 - 네덜란드·스위스

傭兵들의 피로 세계 최고의 국가를 일군 스위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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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반 고흐는 문학가이기도 했다!
⊙ “인생도 그림 그리기와 같다. 때로는 신속하게 결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의지력으로 돌파해야 한다”(고흐)
⊙ 사인도 생각해서 하는 히딩크의 知性
⊙ 마크 트웨인을 감격시킨 루체른 ‘瀕死의 사자상’
⊙ 자동차·휴대폰·TV·냉장고·BTS는 한국인의 5종 神器
⊙ 알프스 최고의 秘境은 ‘폭포의 계곡’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戰歿한 스위스 傭兵들을 기리는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
  지난여름 45일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여러 번 한국 여권에 대한 호감(好感)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딱한 표정을 가진 공항 출입국 관리자들에게 여권을 내밀면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순간 긴장이 풀어지고 간혹 인사까지 건넨다. 테러·마약·돈세탁과 한국인은 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일상(日常) 속에서 만나는 한국제 휴대폰·자동차·TV·냉장고, 그리고 BTS가 평소에 좋은 인상을 준 덕분일 것이다.
 
  실시간으로 검색되는 ‘세계여권파워랭킹 2021(Global Passport Power Ranking 2021)’ 사이트에 따르면 입국 가능 국가 수 기준으로 1등 여권은 UAE(무비자, 도착 즉시 발급, 사전비자 필요를 합쳐 152개국)이고 2등은 뉴질랜드(146), 3등은 독일·핀란드·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스페인·이탈리아·스위스·한국·호주(144)이다. 4등은 스웨덴·네덜란드·덴마크·벨기에·포르투갈·아일랜드(143), 5등은 프랑스·몰타·체코·그리스·폴란드·헝가리·영국·캐나다·미국(142), 6등은 싱가포르·노르웨이·슬로바키아·일본(141).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일본·싱가포르를 제치고 1위이다. 북한은, 꼴찌인 아프가니스탄(93등)부터 쳐서 뒤로 여덟 번째인 85등이다. 입국 가능국가 44개국.
 

  최근에 발표된 유에스 앤드 월드리포트의 ‘연례 세계 최고 국가 종합랭킹(2021년)’에 따르면 한국은 78개 주요 국가 중 15등이었다. 20대 국가 중 13개국은 게르만족(族)이 압도적인 북(北)유럽 및 그 계통, 4개국은 동아시아의 유교한자문화권, 3개국은 라틴 계열이었다. 12개국은 개신교, 3개국은 천주교, 3개국은 유교권.
 
  1. 캐나다
  2. 일본
  3. 독일
  4. 스위스
  5. 호주
  6. 미국
  7. 뉴질랜드
  8. 영국
  9. 스웨덴
  10. 네덜란드
  11. 프랑스
  12. 덴마크
  13. 노르웨이
  14. 싱가포르
  15. 한국
  16. 이탈리아
  17. 중국
  18. 핀란드
  19. 스페인
  20. 벨기에
 
 
  한국인의 5종 神器: 자동차·휴대폰·TV·냉장고·BTS
 
  자동차·휴대폰·TV·냉장고·BTS는 한국인의 국제적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5종 신기(神器)인 셈인데 삼성전자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최근 발표된 2021년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랭킹에서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15위, 제조업으론 세계 4위였다. 작년보다 4등이 올랐다. 이재용(李在鎔) 부회장이 재판을 받고 수감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이룬 업적이다.
 
  1. 월마트 5591억 달러
  2. State Grid 3866억 달러
  3. 아마존 3860억 달러(37.6% 증가)
  4. 중국국영석유 2839억 달러
  5. Sinopec 그룹 2837억 달러
  6. 애플 2745억 달러(5.5% 증가)
  7. CVS Health 2687억 달러
  8. United Health 그룹 2571억 달러
  9. 토요타 2567억 달러
  10. 폴크스바겐 2540억 달러
  11. 버크셔 헤서웨이 2455억 달러
  12. McKesson 2382억 달러
  13. 중국국영건설회사 2344억 달러
  14. 사우디 아람코 2298억 달러
  15. 삼성전자 2007억 달러(1.5% 증가)
  16. Ping An 보험 1915억 달러
  17. AmerisourceBergen 1898억 달러
  18. BP 1835억 달러
  19. 로열더치셀 1832억 달러
  20. 중국공상은행 1828억 달러
 
  삼성전자가 따돌린 기업들의 이름이 더 거창하다.
 
  23. 엑슨
  24. 다임러
  26. AT&T
  33. 마이크로소프트
  47. 포드
  48. 혼다
  49. GM
  83. 현대자동차
  88. 소니
  95. 히타치
  104. GE
  116. 닛산
  129. SK
  154. 파나소닉
  173. 보잉
  179. 에어버스
  192. LG
  215. 기아
  226. 포스코
  281. 화이자
 
  삼성 창업자 이병철(李秉喆) 선생이 1950년대에 남긴 기업이념은 딱 세 마디였다.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경영.’ 삼성의 기적적 발전, 그 원천(源泉)은 창업주의 인문적(人文的) 교양과 어휘력이 아닐까?
 
 
  고흐를 자주 만난다
 
고흐의 그림 앞에 선 필자.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 자연스럽게 빈센트 반 고흐와 자주 만난다. 그가 입원했던 프랑스 아비뇽 근방의 상레미 정신병원,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 걸작들이 많은 숲속의 크뢸르 묄러 미술관. 로스앤젤레스의 산꼭대기 폴 게티 센터엔 상레미에서 그린 1억 달러짜리 붓꽃 그림이 있다.
 
  지난 8월 암스테르담에서 고흐 미술관을 다시 구경했다. 고흐는 그림만큼 글도 잘 쓴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800통이 남아 있는데 문학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고, 고흐도 전도사로 활동한 적이 있어서인지 언어감각이 뛰어났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로 쓴 그의 편지는 주제가 매우 넓다. 고흐의 인문학적 바탕을 짐작게 한다. 그림 감상 시 편지를 함께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이 펴낸 명언집은 편지에서 뽑은 것인데 11개 주제로 분류되어 있었다. 예술, 색, 자연, 야망, 성격, 질병, 슬픔과 위로, 인생, 영혼, 사랑과 우애(友愛), 미래.
 
  그의 편지는 사려 깊고 격정적이며 무엇보다 솔직하다. 고흐의 글은 영혼을 흔든다. 문학가를 넘어 철학가, 성인(聖人) 같다.
 
  고흐는 “선(線)과 색(色)의 예술이 있듯이 말에도 예술이 있는데 둘 다 영속(永續)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했다.
 
  영국 미술사학자 마틴 게이포드는 이렇게 평했다.
 
  “이 편지들은 예술에 대한 역사적 정보원(情報源)일 뿐 아니라 문학적 걸작이다.”
 
  W.H.오든은 “놀랍지 않은 편지가 한 통도 없다”고 했다. 작가 존 업다이크는 “그는 말로써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극찬했다.
 
 
  자연이 고흐의 친구
 
화가 고흐는 문학가이기도 했다. 사진=조선DB
  고흐는 평생 동지 테오를 빼면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친구는 자연(自然)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대부분의 사람은 아름다움을 너무나 적게 접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한다면, 모든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문명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의 삶, 즉 야성(野性)을 잊어선 안 된다.”
 
  “요사이처럼 자연이 아름다울 때는 정신이 그렇게 맑을 수 없다. 그때는 나를 잊고 그림이 마치 꿈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낀다.
 
  “길가의 풀이 밟힌 것을 보면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처럼 지쳐 있고 먼지투성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는 브뤼셀 공원을 산책할 때 길가의 짓밟힌 풀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고흐는 반골(反骨)이었다. 아버지와 불화(不和)하고, 돈과 명성(名聲)에 영혼을 팔지 않았다. 그는 천재(天才)의 광기(狂氣)를 높게 평가했다.
 
  “위대한 천재는 미친놈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을 믿고 무한한 존경을 보내려면 당신도 미친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타인(他人)의 지혜보다는 나의 광기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무관심과 맞서 일하라!”
 
  고흐는 어마어마한 독서가(讀書家)였다. 찰스 디킨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의 글을 자주 인용했다.
 
  “나는 매일 훌륭한 디킨스 선생이 자살 방지용으로 처방한 약을 먹는다. 그것은 포도주 한 잔, 한 조각의 빵, 그리고 치즈와 파이프 담배이다.”
 
  “나에겐 책과 현실과 예술이 하나다.”
 
  “인생도 그림 그리기와 같다. 때로는 신속하게 결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의지력으로 돌파해야 한다. 윤곽선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머뭇거리거나 의심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밖에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상(理想)을 위하여 사랑과 마음을 희생시키는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고 성(聖)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든지 문제를 야기한다. 그건 사실이지만 대신 사람들을 활기차게 한다.”
 

  고흐는 삶의 순간순간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그 순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그 순간을 놓지 않으려는 자세, 나는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믿는다.”
 
  고흐는 천재를 알아주지 않은 시대를 비타협적으로 견뎌냈다.
 
  “내가 다시 강조하지만, 무관심과 맞서 일하라!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쉬운 것은 가치가 없다.”
 
 
  히딩크의 知性
 
히딩크 감독. 사진=조선DB
  2004년 3월 나는 상미회(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에인트호번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이던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필립스는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電球)를 유럽에서 맨 처음 대량 생산한 회사이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 일행을 축구팀의 홈 스타디움 식당으로 초대했다.
 
  일행 중 20여 명이 갖고 온 축구공과 티셔츠 등에 히딩크의 사인을 받았다. 일행 중 한 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나의 맞은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책을 펴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대인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밀고(密告)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반성(反省)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주는 히딩크 감독의 인격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히딩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표현이 절제되고 정확하다. 문득 실용적(實用的)인 네덜란드 사람처럼 속이기 어려운 민족도 없을 것이고, 명분론(名分論)이 강한 한국 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민족도 드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단을 맡아보니 한국인들의 본성(本性)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격차가 매우 커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히딩크는 우리 여행단을 다음 날 경기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내일 게임엔 여러분을 위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팀과 한 경기였는데 두 한국 선수가 맹활약한 덕분에 에인트호번이 3대0으로 이겼다.
 
 
 
루체른 ‘瀕死의 사자상’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카펠교. 700년 된 목조다리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독한 국민은 네덜란드와 스위스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한 나라는 저(低)지대이고 다른 나라는 고(高)지대인데, 자연의 한계를 불굴의 의지력으로 극복, 해양제국과 정밀공업국가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바다와 산악을 부(富)의 원천으로 변모시키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제도와 법치(法治)와 기술과 자유를 확립했다. 두 나라는 삶의 질(質) 랭킹 등에서 보통 10등 안에 든다. 자주(自主)와 자유(自由)를 지켜낸 베니스나 신라와 같은 세계사의 금자탑이다.
 
  처음 스위스 루체른에 간 것은 1985년이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14세기의 목조다리(카펠교)는 길이가 200m인데 지금도 사용 중이다. 필라투스 바위산이 드리워진 호수도 좋지만 전사(戰史)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엔 갈 곳이 따로 있었다. 프랑스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어간 스위스 용병(傭兵)들을 기리는 ‘빈사(瀕死)의 사자상(獅子像)’.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구경 오는 명소(名所)이다. 베르텔 토르발센이 디자인하고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 1824년에 완성. 140년 전, 나보다 먼저 여기를 다녀간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정밀한 관찰기를 남겼다. 1880년에 나온 《해외 유랑기(A Tramp Abroad)》에 이런 명문(名文)이 있다.
 
  〈사자는 낮은 절벽의 수직면에 파진 구덩이 안에 누워 있다. 몸집은 거대하고 고귀하게 보인다. 사자의 머리는 축 처져 있고 부러진 창이 어깨에 꽂혀 있으며, 발은 프랑스의 백합(百合)을 감싸듯 움켜쥐고 있다. 덩굴이 절벽을 흘러내려 바람에 흔들리고 물줄기가 위로부터 흘러내려 바닥의 연못에 떨어지는 가운데 사자상은 안온한 수련(睡蓮) 덮인 수면(水面)에 반사된다. 주변은 초록의 나무와 풀. 죽어가는 사자가, 근사한 쇠 난간이 둘러쳐진 공공장소의 화강암 받침대 위가 아니라, 편안한 숲으로 가려져 소음과 소란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이 참 잘 어울린다. 루체른의 사자상은 어디서든 강렬한 인상을 주겠지만 여기만큼 강렬한 곳은 달리 없을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 피를 흘린 스위스 傭兵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폭도(暴徒)들이 튈르리 궁전에 있던 루이 16세를 습격할 때 근위대(近衛隊)에 배속된 약 786명의 스위스 용병은 최후까지 항전(抗戰)하다가 몰살했다. 루이 16세는 포위된 스위스 용병들에게 후퇴하여 병영(兵營)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서를 보냈으나 용병대장이 그것을 받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총탄도 바닥이 나고 수적으로 압도되었다. 용병대장 칼 요셉 폰 바하만은 붙잡혔다가 재판을 받고 단두대(斷頭臺)에서 참수(斬首)되었다. 붉은 용병 복장을 한 채였다.
 
  ‘빈사의 사자상’을 만든 사람은 당시 루체른에 휴가 나와 목숨을 건진 한 용병장교였다. 모금을 시작했고 유럽의 왕가(王家)들이 후원했다. 외국 왕을 위하여 죽은 용병들을 왜 추모하느냐는 비판도 많았고 사자상의 다리를 자르려는 과격분자도 있었다. 사자상은 길이가 10m, 높이가 6m로서 대작(大作)이다. 죽은 장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사다를 찾듯이, 프랑스 군인들이 스당을 찾듯이, 스위스 군인들도 이곳을 찾아 군인정신을 다진다고 한다.
 
  1527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지휘하는 제국 군대가 로마를 점령, 수개월간 약탈을 했다. 교황(敎皇) 클레멘스 7세는 지하 비밀통로를 이용, 성베드로 사원 건너편에 있는 산탄젤로 요새로 도피한다. 189명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교황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성베드로 사원을 사수(死守)하다가 40여 명만 살고 다 피살(被殺)된다. 바티칸은 지금도 이날 5월 6일을 기념한다. 루이 16세와 클레멘스 7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용병으로서 계약의 의무를 다한 셈이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야 가난한 스위스 사람들이 유럽의 부자나라 용병으로 계속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傭兵의 피로 발전시킨 세계 최고 국가

 
  남자가 몸을 파는 일이 용병인데, 그렇게 지켜낸 스위스는 지금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국가로 꼽힌다. 특히 자주국방 하는 나라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6만8000달러로 세계 8~9위권, 삶의 질 세계 2위, 1인당 무역흑자 세계 1위, 수출품 구성은 고부가 가치 중심으로서 화학제품이 34%, 기계·전자·정밀기계·제품 등 17%. 세율은 낮고 실업률도 낮아 2%. 네슬레, 노바티스, 롤렉스, 스위스에어 등 글로벌 기업이 많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이기보다는 제조업과 금융으로 돈을 더 많이 번다.
 
  정부의 청렴도 순위에서도 세계 1위, 국가경쟁력 1위, 1인당 부(富)의 축적 1위, 고급 기술자 유치력 1위이다. 1972년에야 여성 참정권(參政權)을 인정했다. 한국보다 늦은 2002년에 유엔에 가입했고 EU엔 미가입.
 
  1525년 이후 나폴레옹 시절을 제외하면 500년간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무장(武裝) 평화를 유지, 알차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예비군 포함 20만 병력 보유(12만이 현역), 남성은 의무복무, 약 1만 명이 직업적 기간(基幹)장병이다. 50세까지 예비군 훈련을 받고, 무기도 가정에서 보관해왔는데, 최근에 총탄은 제외했다. 민간인이 약 300만 자루의 총기를 갖고 있다. 핵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인데도 전 국민의 120%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핵(核)방공호가 집집마다 마을마다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2020년 현재 세계 7위. 아인슈타인 등 11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스위스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고, 아홉 수상자는 스위스에 있는 국제기구다. 국적자별 노벨상 수상자 수는 1위 미국 385명, 2위 영국 133명, 독일 108명, 프랑스 70명, 스웨덴 32명, 러시아 31명, 스위스 및 일본 각 28명, 캐나다 27명, 오스트리아 22명. 국민 수당 노벨상 수상자 수는 스위스가 세계 1위.
 
  이 나라의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루체른 ‘빈사의 사자상’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피로 발전시킨 나라이다.
 
 
  폭포의 계곡
 
라우터브루넨 폭포의 계곡.
  2019년 알프스 3봉(峰) 마터호른·몽블랑·융프라우를 구경하고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지역인 할슈타트, 잘츠부르크, 그리고 독일 알프스 지역에 있는 히틀러 산장 등을 20여 일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돌아와서 자꾸 머리에 남는 장면은 제대로 보지 못한 아이거 북벽과 라우터브루넨 역 근방의 폭포였다.
 
  나는 지난 7월 말에 다시 라우터브루넨(인터라켄 근처)을 찾아 5일간의 기차 이용권을 끊고 1600m 산중(山中)마을 뱅엔에 숙소를 잡았다. 라우터브루넨 ‘폭포의 계곡’이 앞으로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융프라우, 정면 멀리로는 브라이트호른 등 연봉(連峰)이 펼쳐진다. 이튿날 비가 내려 나는 중학교 3학년생인 외손자를 데리고 폭포의 계곡 산책에 나섰다. 배낭은 외손자에게 지우고 한가하게 협곡(峽谷) 사이 평지를 걸었다. 이 계곡은 길이가 약 9km인데 양쪽이 수직 절벽이다.
 
라우터브루넨 폭포.
  최대 1000m의 석회암 절벽 양쪽에 70여 개의 폭포가 걸쳐져 있다. 융프라우·아이거·묀히 3형제봉이 만든 계곡이고 폭포이다. 양쪽 수직 절벽을 쳐다보면서 융프라우를 향해서 난 평탄한 길을 걷는 기분은 샹그릴라의 환상(幻想), 그 자체였다(외손자 녀석은 경치엔 별로 관심이 없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고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처럼 웅장하고 그랜드 캐니언과 달리 깔끔한 자연미(自然美)이다. 가장 유명한 폭포는 라우터브루넨 역 앞에 있어 사진에 잘 찍히는 스타우바흐 폭포로서 297m의 물줄기가 마을 가운데로 쏟아진다. 417m의 뮈렌바흐 폭포, 930m의 계단식 마텐바흐 폭포는 계곡 안쪽에 있어 덜 유명하다.
 
  걷다가 주차장을 겸한 음식점을 찾았더니 이곳이 명당(明堂)이었다. 양쪽 절벽에 걸린 폭포를 한눈에 다섯 개나 볼 수 있었다. 외손자는 휴대전화로 내 딸에게 ‘맛있는 것 사준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운운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정면 울타리에 ‘Tru¨mmelbach Falls’라는 표시가 보였다.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이게 굉장한 곳이었다. 서둘러 점심 식사를 끝내고 외손자를 끌다시피 하며 입구로 갔다. 아이거(3967m)·묀히(4099m)·융프라우(4158m)의 빙하에서 녹아내리는 물줄기가 석회암 절벽의 내부를 녹여 바위 속에 폭포를 만든 것이었다. 수백 미터 낙차에 140m가 노출된 암중(岩中)폭포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나선형 길을 따라 바위 속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희한한 폭포를 구경했다. 그제야 외손자가 좋아했다.
 
 
  절벽열차, 뮈렌마을
 
뮈렌에서 본 융프라우 직벽.
  4박 5일의 알프스 여행은 이 폭포의 계곡을 입체적으로 구경하는 여정이었다. 라우터브루넨 역에서 뱅엔 역으로 올라가는 기차 창밖으로 잡히는 폭포의 계곡 단면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도일 것이다. 융프라우를 구경한 다음 날 라우터브루넨 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약 800m를 올라 절벽 위에 당도했다. 여기서 협궤 기차로 갈아타 절벽 가장자리를 한 20분 달렸다. 왼쪽으로 알프스의 대표적 장관이 펼쳐졌다. 아이거·묀히·융프라우 3형제봉이 협곡 바로 건너편이었다. 세 봉우리의 높이를 더하면 1만2000m이다. 육중한 아이거, 꼭대기에 주름이 잡혀 귀엽게 생긴 묀히, 장대한 융프라우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최상의 열차 드라이브. 날씨도 좋았고 시커먼 협곡으론 패러글라이더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종착역은 뮈렌(Mu¨rren) 마을. 기차에서 내리니 눈앞에 직벽(直壁)! 융프라우가 폭포의 계곡으로 잘리면서 생긴 엄청난 바위얼굴이 시야를 가린다. 뮈렌은 자동차론 접근할 수 없다. 주민은 450명인데 여러 호텔의 객실은 2000실이다. 절벽 위 식당에서 그렇게 비싸지 않은 점심밥을 먹고 산책로를 따라 300m 아래 동네인 짐멜발트로 내려갔다. 알프스의 대표적 연봉을 마주하면서 걷는 산책로는 비탈을 따라 난 길인데 아이거 북벽은 햇볕을 받아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뮈렌은 007 영화 〈여왕폐하 대작전〉의 무대로 더 유명해졌다. 1969년에 개봉했는데 제임스 본드 역의 숀 코너리가, 뮈렌의 뒷산 실트호른(2970m) 정상의 회전식당(Piz Gloria)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다. 짐멜발트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폭포가 걸린 약 600m 직벽을 수직으로 낙하하듯이 내려온다. 이곳에서 정기버스를 타고 폭포의 계곡 바닥을 달려 출발지 라우터브루넨으로 돌아왔다. 양쪽 절벽은 폭포의 장막이었다.
 
  몽블랑의 샤모니, 마터호른의 체어마트, 융프라우의 인터라켄에 대응하는, 아이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마을은 그린델발트. 이 마을을 기점으로 나 있는 몇 가닥의 케이블카 노선은 아이거 북벽 아래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공중열차이다.
 
 
  알프스는 스위스의 독점물이 아니다!
 
아이거·묀히·융프라우 삼형제봉.
  유럽 여행은 파리에서 시작, 알프스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여 년간, 알프스가 지나는 여덟 나라 중 리히텐슈타인을 뺀 일곱 나라(프랑스, 스위스, 모나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슬로베니아)를 돌아다녔다. 알프스는 동서로 활처럼 뻗어 있는데 프랑스 니스 부근에서 슬로베니아까지 약 1200km, 남북의 너비는 약 250km,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다. 알프스 산맥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스위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로서 28.7%이다. 이어서 이탈리아(27.2%), 프랑스(21.4%), 네 번째가 스위스(13.2%)이다. 스위스에는 알프스의 서쪽 고봉(高峰)들이 많아 경치가 좋다.
 
  서쪽(몽블랑, 마터호른, 몬테로사 등)이 높고 동쪽(돌로미티 등)이 낮다. 최고봉 몽블랑(4809m)은 유럽에서 일곱 번째이다(유럽 최고봉은 러시아 캅카스 산맥의 엘브루스 산으로 5642m). 알프스는 4000m급 이상 되는 봉우리가 100개가 넘는다. 그 가운데 약 30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마터호른을 품은 체어마트에서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곳, 해발 3089m에 있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이다. 정면은 몬테로사(4634m, 알프스에서 두 번째)~마터호른(4478m, 6위) 능선이다. 여기서 카메라를 360도 돌리면 수십 개의 4000m급 설산(雪山)이 파노라마로 찍힌다.
 
  마터호른은 그랑졸라스 및 아이거와 함께 알프스 3대 북면(北面)을 자랑한다. 히말라야의 마차푸차레(6993m)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로 꼽히는데 등반 사고로 500명 이상이 죽었다. 치명적 아름다움이라 할까.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인터라켄은 융플라우 산 관광의 출발지이다. 이 근방의 산악 마을들은 개성 있는 전망으로 독립된 도시처럼 인기가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3454m)이 있는 융프라우 전망대 식당엔 신라면이 인기인데 지난 7월 말에 갔더니 보이지 않았다(동이 난 것인지?).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산악열차는 아이거 북벽 밑으로 해서 고도를 높이다가 북벽을 관통하는 9km 터널을 지나 남쪽으로 나온다. 아이거 북벽은 절벽의 낙차가 1800m로서 유럽 최대이다. 마터호른처럼 날카로운 아름다움이 아니라 압도적 중량감을 보여준다. 아이거·묀히·융플라우 3형제봉을 전체 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앞서 소개한 협곡 건너편에 있는 뮈렌이다.
 
 
  江이 문명을, 山이 강을 만든다!
 
아이거 북벽.
  나폴레옹과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進軍)한 것은 유명하다. 나폴레옹은 몽블랑 기슭에 해당하는 성버나드 고개(2469m)를 지났다. 알프스 동쪽 산맥엔 이보다 낮은 브렌너 고개(인스부르크 근방 1370m)가 있어 중세(中世) 때는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주로 이 고개를 통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한니발은 코끼리를 끌고 성버나드 근방 고개를 넘어 로마를 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알프스가 없었더라면 유럽 문명은 발전할 수 없었다. 강이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지만 그 강을 만드는 것은 산의 숲과 빙하, 그리고 호수(레만·코모·마조레 등)이다. 라인, 도나우, 론 강 등이 알프스에서 발원(發源)한다. 알프스 덕분에 약 500개의 수력발전소가 만들어졌다. 알프스는 면적에서 유럽의 11%이지만 90%의 담수를 공급한다. 밀라노의 경우 먹는 물의 80%는 알프스에서 나온다. 알프스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억2000만 명 정도이다.
 
  알프스 산맥에서 일곱 차례 동계(冬季)올림픽이 열렸다. 스위스의 생모리츠(2회), 이탈리아 돌로미티 지역의 코르티나 담페초, 토리노,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프랑스의 그르노블과 알베르빌이다. 알프스는 매우 생산성이 높은 산맥이란 이야기이다.
 
  히말라야 빙하도 엄청난 수량(水量)의 창고이다. 여기서 발원하는 인더스·갠지스·브라마푸트라·양쯔강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중국을 거치면서 인도양과 서해로 들어간다. 이들 강이 만든 유역(流域) 평야가 20억 이상의 인구를 부양한다. 알프스와 히말라야가 유럽과 아시아 문명의 산파인 셈이다. 네팔 사람들은 그래서인지 히말라야를 신(神)처럼 받든다. 문명을 만든 것은 위대한 산신(山神)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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