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팝 소비자들, 자신이 지지하는 아티스트들이 정치에 연루되는 건 싫어하지만 국가적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은 반겨
⊙ 2017년 중국 국빈 방문 당시 엑소, 송혜교, 추자현 등 동행… BTS, 봉준호, 브레이브걸스 등 화제의 대중문화 인사들 불러
⊙ 정치적 입장 표명에 관대하던 미국도 변화… 극렬 트럼프 지지 배우 지나 카라노 퇴출
⊙ 중국에서는 대중문화 정풍운동 한창… 정부 지지 않으면 불이익 분위기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2017년 중국 국빈 방문 당시 엑소, 송혜교, 추자현 등 동행… BTS, 봉준호, 브레이브걸스 등 화제의 대중문화 인사들 불러
⊙ 정치적 입장 표명에 관대하던 미국도 변화… 극렬 트럼프 지지 배우 지나 카라노 퇴출
⊙ 중국에서는 대중문화 정풍운동 한창… 정부 지지 않으면 불이익 분위기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문재인 대통령은 BTS를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로 임명하고, 유엔 총회에 대동했다. 사진=뉴시스
세계적인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정치 뉴스 소재로 떠올랐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화제성 차원에서는 가장 컸다. 한국 대중문화산업에서는 당연히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꺼린다. 영화나 TV 드라마 등 콘텐츠 차원이라면 그를 통해 노이즈 마케팅 효과라도 얻을 수 있지만, 배우나 가수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그보다 나쁠 게 없을 정도로 얻는 건 없고 잃는 것만 많다. 무엇보다, 뜻하지 않게 수많은 적(敵)이 생산된다. 사실상 범죄 차원을 빼놓고는 가장 꺼리는 종류의 스캔들이라고 볼 만하다.
상황은 방탄소년단이 9월 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 총회 ‘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연설하면서 시작됐다. 방탄소년단의 유엔 연설은 2018년과 2020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은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 자격으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과 함께 출국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은 연설에서 “지금의 10대, 20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아닌 ‘웰컴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며 “가능성과 희망을 믿으면 예상 밖의 상황에서도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선택은 엔딩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다”면서 자신들 노래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퍼포먼스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연설 이후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미국 ABC 방송 아침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문 대통령은 “방탄소년단이 청년층으로부터 아주 널리 공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공감과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유엔 사무총장이나 제가 수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 강조했다. 방탄소년단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아 한국 공예작품을 한국실에 전달하기도 하고, 뉴욕 한국문화원을 깜짝 방문하기도 하는 등 일정을 마치고 9월 24일 귀국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의 이러한 활동이 현 정부의 보여주기 쇼에 불과하다고, 이들이 귀국하기 전부터 국내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었다.
9월 22일 국민의힘 강민국 원내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방탄소년단까지 동원한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 이제 쇼는 그만하고 진정한 국가안보를 챙겨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개최국인 미국이 코로나 변이 확산을 이유로 직접 방문 자제를 요청했지만, 문 대통령은 방탄소년단과 함께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며 “방미를 달가워하지 않은 의중을 알고도 이를 강행한 탓에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결렬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홀대에도 참석을 강행한 이유는 유엔 총회장에서 연설하는 문 대통령의 모습과 세계적 가수 방탄소년단이 채운 ‘쇼’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대중성을 이용한 쇼는 이 정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이지 않은가. 지난해 청년층 사이에 공정(公正) 이슈가 논란이 될 때도 정부는 방탄소년단을 청와대에 초청해 공정을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열정 페이’ 논란
한편, 방탄소년단 귀국 후인 9월 30일에는 이른바 ‘열정 페이’ 논란이 불거졌다. 조선닷컴 9월 30일 자 기사 “[단독]BTS 열정 페이 논란… 文 뉴욕 일정 줄곧 동행하고 여비 ‘제로’?”에 따르면, 정부가 유엔 총회 당시 방탄소년단 측에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 등 여비(旅費)를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10월 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돈을 10원짜리도 (하나도) 안 받겠다’고 얘기했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면구스럽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특사인데 정말 우리 법률과 규정이 허가하는 최소한의 비용을, 영수증 처리가 되는 비용을 정산했다. 억지로 준 것”이라 반박하며, 정산 금액에 대해 “7억원대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10월 1일에는 무대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외교부 국정감사장으로 옮겨갔다. 이날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청와대가 (방탄소년단을) 특사로 임명하지 않아도 이미 유엔 총회에 두 차례 등장했다. 대통령 특사 자격은 필요하지 않았다”면서 “대통령과 방탄소년단이 함께하는 무대가 TV로 국내에 송출되는 장면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닌가. 방탄소년단을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강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또 “대통령 해외 순방에 예술인들을 배경 삼아 데려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주의 정권의 구태(舊態) 모습이라고 본다”며 “이런 것 안 하고 세련되게 진짜 외교를 할 수 없겠나. 방탄소년단이 없으면 외교가 안 되나”라고 물었다.
이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7월 유엔 사무국에서 우리 쪽에 그런 희망을 전달해왔다”면서 “방탄소년단이 같이 감으로써 대통령의 유엔 총회 참석 성과가 더 빛난 것은 사실이다. 국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대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대중문화 인사를 ‘너무 자주’ 불러
언뜻 보기에 이 정도 일이 ‘그렇게까지’ 주목받아 열흘도 넘게 진행될 정치적 장기(長期) 이슈거리가 맞나 싶어질 듯하다. 정권 차원에서 연예인 등 주목도 높은 대중문화 인사들을 각종 정부 이벤트에 참석시키거나 청와대에 초청하는 일 등은 그간 이렇다 할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해오던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 홍보 차원에서 좋은 효과를 내놓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숟가락 얹기’ 행태라는 의중(意中)이 읽혀도 별다른 반발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이 대중문화 인사들을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이다. 한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후 8개월 동안만 해도 각종 정부 주도 행사에 연예인들을 20차례 가깝게 참석시켰다는 조사다. 특히 2017년 중국 국빈(國賓) 방문 당시 K팝 그룹 엑소와 배우 송혜교·추자현 등을 동행한 일이 많이 회자(膾炙)된다. 물론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이번 경우 외에도 봉준호 영화감독,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등 그때그때 화제에 오르는 대중문화 인사들은 빠짐없이 부른다는 인상을 남겼다.
더 중요한 부분은, 그런 대중문화 인사 초청을 통해 현 정권에 불리한 정국(政局)을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인다는 점이다. 2020년 2월 20일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한 뒤 봉준호 감독 등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가진 일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만 그치면 별문제 없었는데, 때맞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2024년까지 2조6774억원을 투입하는 문화예술 공약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4·15총선을 앞두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 선거에 불리한 이슈들을 문화계 훈풍(薰風)으로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이러니 이번 방탄소년단과 유엔 총회 동행 이슈에도 민감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과 대중예술인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불만과 불안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30년간 대중문화인들과 당대 정권 내지 정치권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차례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필자의 기억에도 강하게 남아 있는 사건은 1992년 3월 18일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인기 연예인 50여 명을 한꺼번에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일이다. 가수 김정수·강수지, 배우 이낙훈 등이 총출동해 큰 화제를 모았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한국 대중문화산업 규모에서 50여 명이라면 ‘대중이 얼굴을 아는 연예인은 모조리 다 불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굳이 ‘동원정치(動員政治)’라면 이 이상 가는 이벤트도 없었을 듯한데, 당시 분위기로는 또 그렇게 읽히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생각보다 대중문화에 상당히 관심을 보인 정권이었다. 취임 초기부터 그동안 금지돼왔던 수많은 콘텐츠를 해금(解禁)했고, 정치적 검열(檢閱)을 사실상 완전 중단하다시피 해 창작의 자유를 활짝 열어젖힌 정권이었다. 그만큼 대중도 국산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 대중문화시장이 폭발했고, 산업도 활력을 얻어 한류(韓流)의 기틀을 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50여 명 연예인 청와대 초청 행사는 당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직 연예인을 ‘딴따라’라는 멸칭(蔑稱)으로 폄하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시절, 이들을 국가의 문화예술 창달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이들로 치켜세우면서 연예인들의 사회적 지위 자체를 높이는 퍼포먼스로 받아들여졌다는 평가다.
이후 대중문화산업이 점점 팽창(膨脹)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상황도 함께 잦아졌다. 대통령 취임식에 연예인이 참석하는 상황만 봐도 흐름을 알 수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취임식에는 ‘무려’ 월드스타 마이클 잭슨이 참석해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단순 참석을 넘어 대중가수가 무대를 장식하는 첫 사례가 탄생했다. 당시 17세의 팝페라 가수 임형주와 K팝 그룹 god가 공연을 펼쳤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취임식 때는 가수 김장훈·윤하와 함께 K팝 그룹 SS501이 무대를 장식했고,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돌아온 배우 전도연이 타종(打鐘)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취임식 때는 미국 빌보드 차트 2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강남스타일’ 열풍을 일으킨 가수 싸이가 공연무대를 펼쳤다. 한국 대중문화산업이 세계적으로 성장할수록 초대되는 연예인은 점점 많아졌고, 특히 K팝의 폭발적 인기로 인해 K팝 가수 초청과 동행이 점점 더 잦아지는 추세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동영, “보아가 지지한다면 천만 표는 올라갈 것”
기묘한 분위기는 이제 막 K팝이 세계화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중반 무렵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발상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명박·정동영 대선 후보 초청 문화산업강국 만들기 정책 간담회 풍경이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문세, 박상원, 박진영,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수많은 연예인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는데, 여기서 정동영 후보가 가수 보아를 향해 던진 멘트가 특히 화제가 됐다.
“보아 씨가 이 정동영을 지지한다면 1000만 표는 올라갈 텐데….”
K팝 아티스트가 지닌 거대하고 충성도 높은 팬덤을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이어낼 수 있다는 발상, 지지 선언과 동시에 동반 지지 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가 처음 정치인 입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장면이다. 당연히 정동영 당시 후보가 유난히 특이한 발상을 한 건 아니었고, 그 당시 정계(政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K팝 아이돌에 뒤따르는 열성적 팬덤 현상을 눈여겨보며 비슷한 종류의 발상이 이런저런 언론 지면을 통해 조금씩 소개되던 때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 정치인 입에서, 그것도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대선 후보 입에서 직접 등장하면서부터, 이 같은 발상과 기대는 엄청난 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지지하는 후보, 정당, 정치 성향 등이 매번 언론 지상을 통해 대서특필되고, 그에 따르는 효과 등을 계산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정부의 공식 행사 참여나 동행에까지도 대중과 언론, 정치권 모두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로 옮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방탄소년단 숟가락 얹기’ 논란의 경위다. 실제로 그런 동반 지지 효과가 있는지 현실성 여부와 관련 없이 이런 상황 자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언뜻 보이는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너무 크게 번져버린 이번 논란 역시 이 같은 흐름하에서 점점 눈덩이를 키워나간 경우로 볼 수 있다.
탁현민, “BTS가 불려 다닐 정도의 아티스트?”
어찌 됐건 방탄소년단과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동행 논란은 무려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언론 정치면에서 숱하게 도마 위에 오르며 갖가지 파생 뉴스들을 만들어냈다. 그럼 이제 그 과정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입장을 돌아볼 때도 됐다. 바로 방탄소년단 내지 유사한 정부 행사 등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의 입장에 대해서다.
확실히 방탄소년단 측이 어떤 생각으로 이 같은 정부 이벤트에 동참해왔는지 문제는 거의 다뤄진 적이 없다. 앞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탁현민 비서관이 “사고방식이 참 한심하다. 방탄소년단이 불려 다닐 정도의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나”라고 반박한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로는 상당 부분 설득력 있는 반박이 맞다.
현시점에서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유명 K팝 아티스트들은 청와대 등 정치 권력에 끌려다니는, 꺼림칙해도 일단 협조는 해줘야 한다는 정도의 입지가 아니다. 2000년대 이전의 국내 연예인 입지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예컨대 방탄소년단 소속사 하이브는 시가총액만 10조원대를 넘어서는 회사다. 영향력 차원으로는 회사 규모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정권에 의해 ‘섭섭한 일’을 당했다는 식의 뉘앙스만 내비쳐도 국내에만 수백 만이 존재하는 열렬한 팬덤이 상황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사정은 곧바로 온 미디어를 달구게 된다. 말해두지만, 이들 팬덤은 대통령 등 정치인에 대한 팬덤보다 훨씬 거대하고,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다. 나아가 글로벌화된 K팝 현실에서 그 팬덤은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 규모까지 이른다. 세계적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섭섭한 일’은 당연히 삼가는 게 좋다.
일각에서는 방탄소년단의 활동과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는 군(軍) 병역 문제를 약점(?) 잡아 정권이 특혜(特惠)를 미끼로 이들을 휘두르고 있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사실상 K팝 산업 분위기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발상에 가깝다.
애초 K팝 소비층은 젊은 층 MZ세대가 절대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 MZ세대는 이미 ‘공정(公正)’이라는 가치로 똘똘 뭉쳐 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해외에서 잘나가는 아티스트, 소위 국위선양(國威宣揚)을 하는 아티스트더라도 기존에 없던 특혜를 새로 만들어 이득을 주려 하면 곧바로 공격받고 그만큼 인기가 크게 저하되는 분위기다. 세대 전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해당 아티스트의 열혈 팬덤마저 그런 분위기다. 단순히 자신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공격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공정’에서 벗어나는 특혜가 주어지는 상황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니 각 아티스트의 소속사에서도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대응팀 만들어야 하나?”
그럼 이런 상황인데도 수많은 K팝 아티스트는 이번 유엔 총회 상황처럼 자칫 정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데 왜 정부 차원 이벤트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존재한다.
언급했듯 정치와 연관된 스캔들은 K팝 산업에서 가장 꺼리는 일이다. 소속사 차원뿐 아니라 해당 아티스트 팬덤도 극도로 싫어한다. K팝 아이돌을 놓고 벌어지는 각 팬덤끼리의 경쟁도 정치세계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라도 시빗거리가 생기면 그를 놓고 치열한 폄훼와 방어의 전쟁이 인터넷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런 폄훼를 통해 경쟁 아티스트 이미지를 가능한 한 훼손시켜 신규 팬의 유입을 막고 기존 팬의 분열을 꾀함으로써 그 성장을 저해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니 정치 스캔들에 연루되는 상황에 대한 이들의 알레르기 반응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K팝 소비자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즐긴다. 이른바 ‘국뽕’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 즐기는 코드이고, 거기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것은 무척이나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긴다.
지금 방탄소년단이나 여타 K팝 아티스트의 행보는 이 같은 소비층 분위기에 따르는 형태다. 정치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은 철저히 차단하고 나선다. 개개인의 정치 성향을 가볍게라도 밝히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반면 국가주의적 차원에서 국가나 지자체 홍보 관련으로는 가능한 한 성실하게 참여하려 애쓴다. K팝 글로벌화와 함께 유엔 등 해외 기구 행사에 참여하는 것 역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호재(好材)로 여긴다. 그렇게 투트랙 행보로 공적개념과의 관계를 정립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번 스캔들, 즉 ‘문재인 정권의 BTS 숟가락 얹기’ 논란은 이제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 특정 정치 세력 내지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해 문제가 되는 차원을 넘어서, 그간은 별문제 없었던, ‘국가’라는 차원에서 홍보에 나서도 당시 정권이 어느 정치 세력에 있느냐에 따라 충분히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런 상황까지 벌어진 일이 없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향후 연예인들은 상황에 따라 국가나 정부 행사까지도 참여를 꺼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상이 걸린 건 사실 정치계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문화계 쪽이다. 정치 갈등이 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차원으로 심화돼갈수록 더 그렇다. 이번 논란 이후 필자가 만나본 어느 연예기획사 임원은 “이러다 회사 내에 정치대응팀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상황까지 올지도 모를 일이다.
트럼프 지지 배우의 退出
끝으로, 이번 논란은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너무 경계와 견제가 과열돼 벌어진 일이라는 식 의견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마디로 이 같은 논란과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점점 심화되는 흐름으로 가리라는 예상이다. 비단 한국만의 얘기도 아니다.
보통 대중문화계와 정치계가 얽혀 논란이 일어나면 국내 언론에서 줄곧 나오는 의견은 “왜 우리는 미국처럼 쿨(cool)하지 못하느냐”는 핀잔이다. 특히 대중문화 언론이나 관련 필자 쪽에서 그런 반응이 많다. 미국에서는 연예인 각자 정치적 성향이나 견해 등의 자유를 대중이 인정하고, 그를 강하게 내비쳐도 그들의 직업적 활동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만큼 ‘쿨’한 개인주의 분위기인데 한국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식이다.
문제는, ‘그랬던’ 미국도 지금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 올해 초 벌어진 디즈니 드라마 〈만달로리안〉 출연배우 지나 카라노 사건을 들 수 있다. 민주당 텃밭으로 불리는 할리우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충성도 높은 공화당 지지자이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이기도 했던 카라노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나치 정권하의 유대인들처럼 민주당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거나, 지난 대선은 사기(詐欺)였다는 등의 내용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래도 보통의 할리우드라면 이런 것쯤은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민주당 텃밭이라 해도 열혈 공화당 지지자인 아널드 슈워제네거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배우들은 그간 자신들 커리어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 같은 분위기도 ‘이제는’ 깨져가고 있다는 점을 카라노가 보여줬다.
〈만달로리안〉을 제작한 디즈니 계열의 루카스필름은 “카라노의 게시물은 끔찍하고 용납할 수 없다”며 그를 드라마에서 바로 하차시켰다. 카라노의 소속사 또한 그와의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정치적 의견을 내비친 탓에 연예인이 출연 중인 콘텐츠에서 하차하는 건 1950년대 매카시즘 열풍 이후 처음 아니냐는 비난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이 같은 결정들은 번복되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를 둘러싼 사회 분열이 대중문화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이미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그 수준은 가히 매카시즘 당시에 버금갈 정도라는 얘기도 된다. 결국 정치나 종교 등 예민한 사안들에 있어 서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존중하던 서구 개인주의 국가 국민들이 각종 소셜미디어(SNS)의 등장으로 서로 간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에 따른 갈등도 극심해지는 추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점점 더 다른 이들의 정치 성향에도 여유와 관용을 갖지 못하는 분위기가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대중문화 정풍운동
중국에서는 대중문화계 정풍운동(整風運動)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지난 9월 중국 국가광전총국에서 ‘예술, 연예계 및 관련 인력에 대한 추가 규제’를 발표하며 사실상 대중문화계 통제 전략을 펼치는 와중이다. 연예인 팬클럽 활동이나 앨범 구매 등까지도 규제를 가하는 중국의 정책들을 맞이하며, 한국 대중문화계도 깊은 경각심을 갖게 됐다.
중국 대중문화계도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저 각종 정부 시책 관련으로 그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을 연예인 각자가 자신들 SNS에 올리는 방식으로 대중의 국가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였다. 나름 인기 전략의 일부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상황은 점점 악화돼갔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정부 시책에 찬성하는 내용을 SNS에 올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분위기로 옮아갔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된 것이다. 그렇게 대중문화계가 점점 더 정부의 손아귀에 통제되는 흐름이 이어지다 결국 정풍운동까지 맞게 된 순서다.
물론 공산 통제 사회인 중국과 한국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이 같은 모습에 한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정치권은 물론 정부 차원마저도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는 인식이 퍼져나가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번 방탄소년단 논란도 어쩌다 한 번 벌어진 해프닝 정도로 그치지 않고, 보다 큰 흐름의 한 기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이다. ‘그쪽’과는 아예 담을 쌓고 보는 흐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년 대선이 끝나고 새롭게 들어설 정권에서는, 어느 정당의 정권인지를 막론하고, 어쩌면 대통령 취임식에 K팝 아티스트 등 각종 연예인을 섭외하는 데에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상당한 고초(苦楚)를 겪을 수 있겠다.⊙
상황은 방탄소년단이 9월 20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 총회 ‘지속가능발전목표 고위급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연설하면서 시작됐다. 방탄소년단의 유엔 연설은 2018년과 2020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은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 자격으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과 함께 출국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은 연설에서 “지금의 10대, 20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아닌 ‘웰컴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며 “가능성과 희망을 믿으면 예상 밖의 상황에서도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선택은 엔딩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다”면서 자신들 노래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퍼포먼스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연설 이후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미국 ABC 방송 아침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문 대통령은 “방탄소년단이 청년층으로부터 아주 널리 공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공감과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유엔 사무총장이나 제가 수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 강조했다. 방탄소년단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아 한국 공예작품을 한국실에 전달하기도 하고, 뉴욕 한국문화원을 깜짝 방문하기도 하는 등 일정을 마치고 9월 24일 귀국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의 이러한 활동이 현 정부의 보여주기 쇼에 불과하다고, 이들이 귀국하기 전부터 국내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었다.
9월 22일 국민의힘 강민국 원내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방탄소년단까지 동원한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 이제 쇼는 그만하고 진정한 국가안보를 챙겨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개최국인 미국이 코로나 변이 확산을 이유로 직접 방문 자제를 요청했지만, 문 대통령은 방탄소년단과 함께 유엔 총회에 참석했다”며 “방미를 달가워하지 않은 의중을 알고도 이를 강행한 탓에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결렬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홀대에도 참석을 강행한 이유는 유엔 총회장에서 연설하는 문 대통령의 모습과 세계적 가수 방탄소년단이 채운 ‘쇼’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대중성을 이용한 쇼는 이 정부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이지 않은가. 지난해 청년층 사이에 공정(公正) 이슈가 논란이 될 때도 정부는 방탄소년단을 청와대에 초청해 공정을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열정 페이’ 논란
한편, 방탄소년단 귀국 후인 9월 30일에는 이른바 ‘열정 페이’ 논란이 불거졌다. 조선닷컴 9월 30일 자 기사 “[단독]BTS 열정 페이 논란… 文 뉴욕 일정 줄곧 동행하고 여비 ‘제로’?”에 따르면, 정부가 유엔 총회 당시 방탄소년단 측에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 등 여비(旅費)를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10월 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돈을 10원짜리도 (하나도) 안 받겠다’고 얘기했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면구스럽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특사인데 정말 우리 법률과 규정이 허가하는 최소한의 비용을, 영수증 처리가 되는 비용을 정산했다. 억지로 준 것”이라 반박하며, 정산 금액에 대해 “7억원대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10월 1일에는 무대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외교부 국정감사장으로 옮겨갔다. 이날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청와대가 (방탄소년단을) 특사로 임명하지 않아도 이미 유엔 총회에 두 차례 등장했다. 대통령 특사 자격은 필요하지 않았다”면서 “대통령과 방탄소년단이 함께하는 무대가 TV로 국내에 송출되는 장면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닌가. 방탄소년단을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강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또 “대통령 해외 순방에 예술인들을 배경 삼아 데려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주의 정권의 구태(舊態) 모습이라고 본다”며 “이런 것 안 하고 세련되게 진짜 외교를 할 수 없겠나. 방탄소년단이 없으면 외교가 안 되나”라고 물었다.
이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7월 유엔 사무국에서 우리 쪽에 그런 희망을 전달해왔다”면서 “방탄소년단이 같이 감으로써 대통령의 유엔 총회 참석 성과가 더 빛난 것은 사실이다. 국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대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대중문화 인사를 ‘너무 자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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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영화 〈기생충〉 제작진과 배우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는 등 대중문화계 인사를 자주 불러냈다. 사진=뉴시스 |
문제는 문재인 정권이 대중문화 인사들을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이다. 한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후 8개월 동안만 해도 각종 정부 주도 행사에 연예인들을 20차례 가깝게 참석시켰다는 조사다. 특히 2017년 중국 국빈(國賓) 방문 당시 K팝 그룹 엑소와 배우 송혜교·추자현 등을 동행한 일이 많이 회자(膾炙)된다. 물론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이번 경우 외에도 봉준호 영화감독,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등 그때그때 화제에 오르는 대중문화 인사들은 빠짐없이 부른다는 인상을 남겼다.
더 중요한 부분은, 그런 대중문화 인사 초청을 통해 현 정권에 불리한 정국(政局)을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인다는 점이다. 2020년 2월 20일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한 뒤 봉준호 감독 등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가진 일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만 그치면 별문제 없었는데, 때맞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2024년까지 2조6774억원을 투입하는 문화예술 공약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4·15총선을 앞두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 선거에 불리한 이슈들을 문화계 훈풍(薰風)으로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이러니 이번 방탄소년단과 유엔 총회 동행 이슈에도 민감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과 대중예술인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불만과 불안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30년간 대중문화인들과 당대 정권 내지 정치권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차례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필자의 기억에도 강하게 남아 있는 사건은 1992년 3월 18일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인기 연예인 50여 명을 한꺼번에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일이다. 가수 김정수·강수지, 배우 이낙훈 등이 총출동해 큰 화제를 모았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한국 대중문화산업 규모에서 50여 명이라면 ‘대중이 얼굴을 아는 연예인은 모조리 다 불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굳이 ‘동원정치(動員政治)’라면 이 이상 가는 이벤트도 없었을 듯한데, 당시 분위기로는 또 그렇게 읽히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생각보다 대중문화에 상당히 관심을 보인 정권이었다. 취임 초기부터 그동안 금지돼왔던 수많은 콘텐츠를 해금(解禁)했고, 정치적 검열(檢閱)을 사실상 완전 중단하다시피 해 창작의 자유를 활짝 열어젖힌 정권이었다. 그만큼 대중도 국산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 대중문화시장이 폭발했고, 산업도 활력을 얻어 한류(韓流)의 기틀을 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50여 명 연예인 청와대 초청 행사는 당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직 연예인을 ‘딴따라’라는 멸칭(蔑稱)으로 폄하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시절, 이들을 국가의 문화예술 창달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이들로 치켜세우면서 연예인들의 사회적 지위 자체를 높이는 퍼포먼스로 받아들여졌다는 평가다.
이후 대중문화산업이 점점 팽창(膨脹)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상황도 함께 잦아졌다. 대통령 취임식에 연예인이 참석하는 상황만 봐도 흐름을 알 수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취임식에는 ‘무려’ 월드스타 마이클 잭슨이 참석해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단순 참석을 넘어 대중가수가 무대를 장식하는 첫 사례가 탄생했다. 당시 17세의 팝페라 가수 임형주와 K팝 그룹 god가 공연을 펼쳤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취임식 때는 가수 김장훈·윤하와 함께 K팝 그룹 SS501이 무대를 장식했고,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돌아온 배우 전도연이 타종(打鐘)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취임식 때는 미국 빌보드 차트 2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강남스타일’ 열풍을 일으킨 가수 싸이가 공연무대를 펼쳤다. 한국 대중문화산업이 세계적으로 성장할수록 초대되는 연예인은 점점 많아졌고, 특히 K팝의 폭발적 인기로 인해 K팝 가수 초청과 동행이 점점 더 잦아지는 추세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동영, “보아가 지지한다면 천만 표는 올라갈 것”
기묘한 분위기는 이제 막 K팝이 세계화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중반 무렵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발상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명박·정동영 대선 후보 초청 문화산업강국 만들기 정책 간담회 풍경이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문세, 박상원, 박진영,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수많은 연예인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는데, 여기서 정동영 후보가 가수 보아를 향해 던진 멘트가 특히 화제가 됐다.
“보아 씨가 이 정동영을 지지한다면 1000만 표는 올라갈 텐데….”
K팝 아티스트가 지닌 거대하고 충성도 높은 팬덤을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이어낼 수 있다는 발상, 지지 선언과 동시에 동반 지지 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가 처음 정치인 입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장면이다. 당연히 정동영 당시 후보가 유난히 특이한 발상을 한 건 아니었고, 그 당시 정계(政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K팝 아이돌에 뒤따르는 열성적 팬덤 현상을 눈여겨보며 비슷한 종류의 발상이 이런저런 언론 지면을 통해 조금씩 소개되던 때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 정치인 입에서, 그것도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대선 후보 입에서 직접 등장하면서부터, 이 같은 발상과 기대는 엄청난 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지지하는 후보, 정당, 정치 성향 등이 매번 언론 지상을 통해 대서특필되고, 그에 따르는 효과 등을 계산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정부의 공식 행사 참여나 동행에까지도 대중과 언론, 정치권 모두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로 옮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방탄소년단 숟가락 얹기’ 논란의 경위다. 실제로 그런 동반 지지 효과가 있는지 현실성 여부와 관련 없이 이런 상황 자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언뜻 보이는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너무 크게 번져버린 이번 논란 역시 이 같은 흐름하에서 점점 눈덩이를 키워나간 경우로 볼 수 있다.
탁현민, “BTS가 불려 다닐 정도의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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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장에서 공연하는 BTS. K팝 소비자들은 아이돌이 국가적 이벤트에 참여하는 걸 반긴다. 사진=유엔 유튜브 |
확실히 방탄소년단 측이 어떤 생각으로 이 같은 정부 이벤트에 동참해왔는지 문제는 거의 다뤄진 적이 없다. 앞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탁현민 비서관이 “사고방식이 참 한심하다. 방탄소년단이 불려 다닐 정도의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나”라고 반박한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로는 상당 부분 설득력 있는 반박이 맞다.
현시점에서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유명 K팝 아티스트들은 청와대 등 정치 권력에 끌려다니는, 꺼림칙해도 일단 협조는 해줘야 한다는 정도의 입지가 아니다. 2000년대 이전의 국내 연예인 입지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예컨대 방탄소년단 소속사 하이브는 시가총액만 10조원대를 넘어서는 회사다. 영향력 차원으로는 회사 규모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정권에 의해 ‘섭섭한 일’을 당했다는 식의 뉘앙스만 내비쳐도 국내에만 수백 만이 존재하는 열렬한 팬덤이 상황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사정은 곧바로 온 미디어를 달구게 된다. 말해두지만, 이들 팬덤은 대통령 등 정치인에 대한 팬덤보다 훨씬 거대하고,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다. 나아가 글로벌화된 K팝 현실에서 그 팬덤은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 규모까지 이른다. 세계적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섭섭한 일’은 당연히 삼가는 게 좋다.
일각에서는 방탄소년단의 활동과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는 군(軍) 병역 문제를 약점(?) 잡아 정권이 특혜(特惠)를 미끼로 이들을 휘두르고 있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사실상 K팝 산업 분위기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발상에 가깝다.
애초 K팝 소비층은 젊은 층 MZ세대가 절대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 MZ세대는 이미 ‘공정(公正)’이라는 가치로 똘똘 뭉쳐 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해외에서 잘나가는 아티스트, 소위 국위선양(國威宣揚)을 하는 아티스트더라도 기존에 없던 특혜를 새로 만들어 이득을 주려 하면 곧바로 공격받고 그만큼 인기가 크게 저하되는 분위기다. 세대 전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해당 아티스트의 열혈 팬덤마저 그런 분위기다. 단순히 자신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공격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공정’에서 벗어나는 특혜가 주어지는 상황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니 각 아티스트의 소속사에서도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상황인데도 수많은 K팝 아티스트는 이번 유엔 총회 상황처럼 자칫 정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데 왜 정부 차원 이벤트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존재한다.
언급했듯 정치와 연관된 스캔들은 K팝 산업에서 가장 꺼리는 일이다. 소속사 차원뿐 아니라 해당 아티스트 팬덤도 극도로 싫어한다. K팝 아이돌을 놓고 벌어지는 각 팬덤끼리의 경쟁도 정치세계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라도 시빗거리가 생기면 그를 놓고 치열한 폄훼와 방어의 전쟁이 인터넷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런 폄훼를 통해 경쟁 아티스트 이미지를 가능한 한 훼손시켜 신규 팬의 유입을 막고 기존 팬의 분열을 꾀함으로써 그 성장을 저해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니 정치 스캔들에 연루되는 상황에 대한 이들의 알레르기 반응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K팝 소비자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즐긴다. 이른바 ‘국뽕’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 즐기는 코드이고, 거기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것은 무척이나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긴다.
지금 방탄소년단이나 여타 K팝 아티스트의 행보는 이 같은 소비층 분위기에 따르는 형태다. 정치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은 철저히 차단하고 나선다. 개개인의 정치 성향을 가볍게라도 밝히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반면 국가주의적 차원에서 국가나 지자체 홍보 관련으로는 가능한 한 성실하게 참여하려 애쓴다. K팝 글로벌화와 함께 유엔 등 해외 기구 행사에 참여하는 것 역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호재(好材)로 여긴다. 그렇게 투트랙 행보로 공적개념과의 관계를 정립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번 스캔들, 즉 ‘문재인 정권의 BTS 숟가락 얹기’ 논란은 이제 영향력 있는 연예인이 특정 정치 세력 내지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해 문제가 되는 차원을 넘어서, 그간은 별문제 없었던, ‘국가’라는 차원에서 홍보에 나서도 당시 정권이 어느 정치 세력에 있느냐에 따라 충분히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런 상황까지 벌어진 일이 없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향후 연예인들은 상황에 따라 국가나 정부 행사까지도 참여를 꺼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상이 걸린 건 사실 정치계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문화계 쪽이다. 정치 갈등이 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차원으로 심화돼갈수록 더 그렇다. 이번 논란 이후 필자가 만나본 어느 연예기획사 임원은 “이러다 회사 내에 정치대응팀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상황까지 올지도 모를 일이다.
트럼프 지지 배우의 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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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만달로리안〉에 출연했던 배우 지나 카라노(오른쪽)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게시물이 문제 되어 작품에서 퇴출되었다. 사진=AP/뉴시스 |
보통 대중문화계와 정치계가 얽혀 논란이 일어나면 국내 언론에서 줄곧 나오는 의견은 “왜 우리는 미국처럼 쿨(cool)하지 못하느냐”는 핀잔이다. 특히 대중문화 언론이나 관련 필자 쪽에서 그런 반응이 많다. 미국에서는 연예인 각자 정치적 성향이나 견해 등의 자유를 대중이 인정하고, 그를 강하게 내비쳐도 그들의 직업적 활동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만큼 ‘쿨’한 개인주의 분위기인데 한국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식이다.
문제는, ‘그랬던’ 미국도 지금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 올해 초 벌어진 디즈니 드라마 〈만달로리안〉 출연배우 지나 카라노 사건을 들 수 있다. 민주당 텃밭으로 불리는 할리우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충성도 높은 공화당 지지자이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이기도 했던 카라노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나치 정권하의 유대인들처럼 민주당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거나, 지난 대선은 사기(詐欺)였다는 등의 내용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래도 보통의 할리우드라면 이런 것쯤은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민주당 텃밭이라 해도 열혈 공화당 지지자인 아널드 슈워제네거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배우들은 그간 자신들 커리어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 같은 분위기도 ‘이제는’ 깨져가고 있다는 점을 카라노가 보여줬다.
〈만달로리안〉을 제작한 디즈니 계열의 루카스필름은 “카라노의 게시물은 끔찍하고 용납할 수 없다”며 그를 드라마에서 바로 하차시켰다. 카라노의 소속사 또한 그와의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정치적 의견을 내비친 탓에 연예인이 출연 중인 콘텐츠에서 하차하는 건 1950년대 매카시즘 열풍 이후 처음 아니냐는 비난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이 같은 결정들은 번복되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를 둘러싼 사회 분열이 대중문화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이미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그 수준은 가히 매카시즘 당시에 버금갈 정도라는 얘기도 된다. 결국 정치나 종교 등 예민한 사안들에 있어 서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존중하던 서구 개인주의 국가 국민들이 각종 소셜미디어(SNS)의 등장으로 서로 간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에 따른 갈등도 극심해지는 추세라는 것이다. 그러니 점점 더 다른 이들의 정치 성향에도 여유와 관용을 갖지 못하는 분위기가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대중문화계 정풍운동(整風運動)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지난 9월 중국 국가광전총국에서 ‘예술, 연예계 및 관련 인력에 대한 추가 규제’를 발표하며 사실상 대중문화계 통제 전략을 펼치는 와중이다. 연예인 팬클럽 활동이나 앨범 구매 등까지도 규제를 가하는 중국의 정책들을 맞이하며, 한국 대중문화계도 깊은 경각심을 갖게 됐다.
중국 대중문화계도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저 각종 정부 시책 관련으로 그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을 연예인 각자가 자신들 SNS에 올리는 방식으로 대중의 국가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였다. 나름 인기 전략의 일부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상황은 점점 악화돼갔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정부 시책에 찬성하는 내용을 SNS에 올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분위기로 옮아갔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된 것이다. 그렇게 대중문화계가 점점 더 정부의 손아귀에 통제되는 흐름이 이어지다 결국 정풍운동까지 맞게 된 순서다.
물론 공산 통제 사회인 중국과 한국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이 같은 모습에 한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정치권은 물론 정부 차원마저도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는 인식이 퍼져나가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번 방탄소년단 논란도 어쩌다 한 번 벌어진 해프닝 정도로 그치지 않고, 보다 큰 흐름의 한 기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이다. ‘그쪽’과는 아예 담을 쌓고 보는 흐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년 대선이 끝나고 새롭게 들어설 정권에서는, 어느 정당의 정권인지를 막론하고, 어쩌면 대통령 취임식에 K팝 아티스트 등 각종 연예인을 섭외하는 데에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상당한 고초(苦楚)를 겪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