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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으로

댄스가수 양준일의 부활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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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 화제 모았다가 ‘오렌지族’으로 몰려 퇴출됐던 양준일, 17년 만에 방송 등장
⊙ 1990년대 중반 중산층 등장에 부적응하면서 문화예술계에 ‘중산층 때리기’ 만연…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등장
⊙ SNS 등 통해 ‘부유층’에 대한 분노 확산은 더 쉬워져… 가수 전소미 람보르기니 몰다가 비난받아
⊙ 대중의 위화감과 열등감 자극하는 연예인은 양준일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1990년대 초 댄스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양준일. 사진=조선DB
  새해가 밝으면 언론미디어는 일제히 지난 한 해 주요 사건에 대한 회고와 새해 전망을 내놓기 바쁘다. 대중문화계 관련으로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쏟아지는 언론미디어의 2020~2021년 대중문화계 회고와 전망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지난해 대중문화계 ‘뉴트로(newtro)’, 즉 신(新)복고 열풍의 주역이자 그를 둘러싼 ‘신드롬’의 주인공, 가수 양준일이다.
 
  양준일은 1990~1993년 활동하던 댄스가수다. 9세 때 가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移民) 간 재미교포(在美僑胞) 출신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대학까지 다니다 1990년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 당시 빼어난 외모와 파격적인 무대 매너, 최신 유행 서구(西歐) 댄스음악 등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불과 3년여 만에 활동을 중단하고 공백기(空白期)를 맞이했다. 그러다 2001년 예명(藝名)으로 다시 등장해 그룹 활동을 했지만 큰 인기를 못 얻어 곧 그룹이 해체되고 만다. 이후 그는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양준일은 유튜브를 통해 한국 1020세대에 다시 발견됐다. 그 시대에 지금 활동해도 무방(無妨)할 만큼 세련된 댄스가수가 존재했다는 점에 신세대들이 감명(感銘)을 받은 것이다. 세간(世間)의 화젯거리가 되자 이런저런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양준일을 섭외하려 애썼지만 모두 그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는데, 2019년 12월 JTBC 예능 프로그램 〈투유프로젝트: 슈가맨 3〉에서 결국 그를 찾아내 17년 만에 방송에 복귀시키면서 비로소 신드롬이 시작됐다.
 
  이후 2020년 내내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다 한 해를 마감한 지금, 양준일의 이름은 대중문화계 결산(決算) 보도 어디서건 등장하고 있다. 각종 CF 출연이나 온라인 콘서트 활동은 물론이고, 지난해 에세이 서적이 예약판매 4시간 만에 무려 1만5000부 팔려나갔다. 그의 에세이집 《양준일 Maybe 너와 나의 암호말》이 거론되고, 디지털 음원 시대에 갑자기 LP 수집 붐이 일어 양준일이 1990년대에 낸 LP들이 지난 한 해 불티나게 팔렸다. 양준일은 2020년 대중문화계 ‘뉴트로’ 현상의 상징(象徵)적 존재가 됐다. 2021년 전망에서도 지속되는 뉴트로 열풍과 함께 그의 인기 역시 계속되리라는 예상을 한다.
 
 
  양준일이 퇴출된 사연
 
1990년대 초 화제를 모았다가 사라져 근래 다시 주목받고 있는 가수 양준일. 사진=조선DB
  여기까지만 보면 여러모로 참 흐뭇한 광경이다. ‘비운(悲運)의 천재’처럼 여겨지는 인물이 다시 각광(脚光)받아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모습은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을 선사해준다. 그런데 ‘양준일 신드롬’은 그 속사정을 들여다볼수록 좀 다른 생각으로도 이끈다. 양준일의 배경과 면면(面面)을 알수록, 지금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는 빈부격차(貧富格差) 갈등도 알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참 뿌리 깊은 난제(難題)에 속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게 되는지는 ‘양준일 신드롬’이 시작된 예능 프로그램 〈투유프로젝트: 슈가맨 3〉 방송 내용만 봐도 간단히 알 수 있다.
 
  당시 프로그램에 출연한 양준일은 과거 히트곡 무대를 다시 선보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그간 사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털어놓았다. 1990년대 초반 당시 한국의 문화 분위기와는 다른 면면으로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그 탓에 대중의 반발(反撥)과 혐오(嫌惡)도 함께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야외무대에서 공연할 때 그를 지켜보던 관중(觀衆)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욕설을 퍼붓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 나아가 불과 3년여 만에 활동을 중단하게 된 것도 실제론 그런 반발과 혐오 탓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적인 탓에 때 되면 비자를 연장해줘야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니 담당직원이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게 싫다”며 연장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년짜리 비자가 있었음에도 미국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고, 한국에서의 가수활동도 100% 타의(他意)에 의해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이다.
 
  사실 이는 ‘양준일 신드롬’이 일어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연이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보수성(保守性)이 거론되면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 이미지가 그에게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양준일의 억울한 사연들도 엄밀히 당시 한국 사회의 보수성 차원에서 해석될 일은 아니다. 예컨대 그보다 앞선 1980년대에도 ‘아이스크림 사랑’을 부른 볼리비아 교포 출신 가수 임병수 등 한국말이 아직 서툰 연예인들도 한국 사회에서 잘만 받아들여졌다. 초기(初期)형 댄스그룹 소방차 등 다소 낯선 해외 문화를 선보인 가수들 역시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입 오렌지族’ 양준일
 
  정확히 설명하면, 딱 양준일이 활동하던 1990년대 초중반에만 ‘양준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면 ‘양준일 같은’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하다. 당시 양준일은 사실상 ‘오렌지족(族)’의 전형(典型)처럼 여겼다.
 
  ‘오렌지족’. 지금 신세대들에겐 다소 낯설겠지만 1990년대 초중반 당시에는 누구라도 그 뜻을 알 만큼 흔히 쓰이던 용어(用語)다. 대략 서울 강남 일대 유흥가에서 파격적인 행각(行脚)들을 벌이며 소비하던 부유층 자녀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오렌지족’은 당시 ‘압구정 오렌지’ ‘수입 오렌지’ 등으로도 불렸다. 전자(前者)는 이들이 자주 드나들던 장소가 강남 최대 유흥가 압구정동 일대였기 때문이고, 후자(後者)는 이들 상당수가 해외 유학생(留學生) 또는 그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왜 이들을 ‘오렌지족’이라 부르게 됐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로선 오렌지가 값비싼 수입(輸入) 과일이어서 부유층만 먹는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그렇게 붙였다는 의견도 있고, 이들이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웠던 금발 염색(染色) 머리를 많이 하고 다녀 마치 오렌지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 됐건 양준일은 당시 이런 ‘오렌지족’ 인식에 들어맞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해외에 살며 해외 학교를 다니다 한국에 돌아왔으니 ‘수입 오렌지’였고, 성별(性別)을 가리기 힘든 낯선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으니 외모상으로도 이질성(異質性)이 돋보였다. 그리고 당시 이들 ‘오렌지족’에 대한 대중의 증오(憎惡)는 마치 하늘을 찌를 듯 거셌다.
 
  지금도 그 사진이 인터넷상에서 돌고 있는 당시 서울랜드 안내문을 들어볼 수 있다. 제대로 안내 게시판에 붙여놓은 공식 게시물 제목이 “서울랜드는 수입 오렌지족의 입장을 사양합니다”였다. 이 ‘수입 오렌지족’에 해당되는 경우를 적어놓은 그 아래 설명은 더욱 당혹스럽다.
 
  ▲말꼬랑지 머리를 한 남자
  ▲외귀걸이만 한 남자
  ▲일부러 우리말을 서툴게 하는 남자
  ▲뒷주머니에 미국 여권을 찔러 넣고 다니는 사람
  ▲영어 반 우리말 반 섞어 쓰는 사람
  ▲20대면서 외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유하의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순원의 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고작 20대 초반 교포 가수에게 ‘오렌지족 같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던지고, 공무원이 비자 연장을 거부하는 직권남용(職權濫用) 행태를 보일 만도 했던 셈이다.
 
  ‘오렌지족’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1990년대 초반 ‘오렌지족’의 존재는 그야말로 장안(長安)의 화제였다. 모든 미디어에서 이들을 콕 집어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방송미디어 측에서 관련 특별보도가 많았고, 이들이 국내 유흥가에서 벌이는 각종 비행(卑行)과 성적(性的) 문란(紊亂) 등을 조명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그러자 곧 문화계에서도 이들을 소재로 삼은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91년 출간된 유하의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들 수 있다. 여기 실린 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를 보자.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중략)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사회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1992년에는 이순원의 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가 출간된다. 그 내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 땅의 졸부들에 분노한 어느 테러리스트가 매주 금요일 신흥(新興) 부촌(富村)으로 떠오른 압구정동 일대에서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는 주민들을 마치 사회악(社會惡)에 대한 정의(正義)의 심판인 양 하나씩 살해하고 다닌다는 내용이다. 지금 같으면 과연 출판 자체가 가능할지 의문일 정도.
 
  그런데 위 두 서적은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자 유사한 서적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다른 대중문화 미디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영화화까지 됐다. 이어 TV드라마도 가세해 1995년 방영된 SBS 드라마 〈째즈〉에서도 ‘오렌지족’을 소재로 이들의 방탕한 삶과 물 쓰듯 돈 쓰는 소비행태 등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묘사들을 가했다.
 
  이 외에도 ‘오렌지족’은 여기저기서 끝도 없이 거론되고 등장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대중문화 소재, 미디어 보도 소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디서건’ 두들겨 맞았다. 이러니 딱 그 시점에 등장한, 마치 ‘오렌지족’의 전형처럼 보인 양준일이 연예인 활동은커녕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중산층의 등장과 반발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왜 하필 1990년대 초반에 ‘오렌지족’을 둘러싸고 빈부격차 갈등이 심화됐느냐는 점이다. 상황을 하나하나 따지면 매우 복합적이지만, 근본적으로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에 중산층(中産層)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부유층이 존재하던 시절과 달리, 나와 가깝다고 여겨지던 주변인들이 하나둘 사업 등에 성공해 집을 사고 더 나은 생활을 영위(營爲)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서민(庶民)들의 위화감(違和感)과 열등감(劣等感)이 극대화됐다는 논리다.
 
  이를 단순히 일종의 논리로서만 받아들일 일도 아닌 게, 당대 대중심리를 반영하는 문화상품에서도 이 같은 ‘중산층 형성’에 부적응(不適應)하며 그들의 존재 자체를 힐난(詰難)하는 대목을 다수 엿볼 수 있었다. 1990년 출간된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 속 주인공 R은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한국의 쁘띠부르주아지만큼 귀족행세 하려 드는 족속들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라고. 그 족속들은 별것도 아닌 것들이 사람 깔보기가 이를 데 없어.”
 
  한편, 미디어 차원에서 ‘오렌지족’ 보도에 시동이 걸린 건 그 바로 직전, 과소비(過消費) 비판 보도 열풍에서 이어진 현상이라는 의견이 많다. ‘과소비’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언론미디어 보도의 단골소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발화(發火) 지점도 다소 명확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에서 1989년 9월21일자로 내놓은 기사 ‘논란 속의 소비주의(消費主義)’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을 통해 이제 막 먹고살 만해진 한국 국민들이 사실상 분에 넘치는 과도한 소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며 강한 비판을 가한 기사다. 특히 기사에 등장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문구가 당시 수많은 국내 언론미디어로 옮겨지며 강한 경각심(警覺心)을 불러일으켰다. 선진국 미국에서 내놓은 이 같은 촌평(寸評)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해당 문구는 지금까지도 언론미디어에서 널리 애용하는 수사(修辭) 중 하나로 남게 됐다.
 
 
  ‘도피성 유학’과 ‘지존파 사건’
 
1994년 9월 발생한 지존파 사건은 ‘부유층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이 충격은 그저 ‘과소비를 지양(止揚)하자’는 차원의 캠페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에의 위화감과 맞물려 그들의 소비 범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선 ‘눈꼴 시린’ 이들에 대한 비판의 명분(名分)으로 사용됐다고도 볼 수 있다. 충분히 여유가 있어 소비하는 품목(品目)들에 있어서도 하나같이 비판의 칼날이 세워졌고, 곧 그들의 자녀가 해외유학을 떠나는 상황까지 물고 늘어졌다.
 
  ‘도피성(逃避性) 유학’이라는 말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지금으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개념이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이것이 통했다. 모두가 평등(平等)하게 학력고사(學力考査)를 보고 대학에 입학해야지 돈 좀 있다고 자녀를 일찍 해외로 유학 보내 해외 대학에 입학시키는 건 그저 돈으로 학력(學力)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 곧 모두가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으로부터 도피한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아무리 주변 중산층 존재가 못마땅했더라도 어쩌다 상황이 ‘여기까지’ 기형적(奇形的)으로 번지게 된 걸까. 어쩔 수 없이 미디어 탓을 할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과 함께 미디어의 상업화(商業化)도 박차를 가하던 시점, 온갖 종류 미디어들은 한창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 개발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주간지들은 이미 일종의 도색(塗色) 잡지처럼 변모(變貌)하기 시작했고, 주류 미디어인 지상파 방송들도 이에 동참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상실감・열등감 등을 자극하는 소재들도 사실상 불필요할 정도로 빈번히 다뤄졌다. 이른바 사회파(社會派)적 명분을 뒤집어쓴 흥미 위주 선정주의 콘텐츠들인 셈이다.
 
  미디어가 이런 식으로 나와 대중을 자극하니 빈부갈등도 전에 없이 심화되기 일쑤였다. 잘 알지 못하던 세계, 엄밀히 자신과는 별 상관없어 관심을 두지 않던 세계의 면면들이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 자극적으로 노출되니 그도 별수 없었다. 과소비 비판은 중산층 비판으로, 다시 ‘오렌지족’ 비판으로 넘어갔고, 부자(富者)를 미워하는 건 마치 사회적 정당성(正當性)이 부여되는 입장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 같은 당시 분위기를 단박에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94년 벌어진 이른바 ‘지존파 사건’이다. ‘지존파’라 불리는 범죄조직 일당 7명이 1993~1994년에 걸쳐 언뜻 부유해 보이는 이들을 골라 금품(金品)을 빼앗은 뒤 살해 및 암매장한 사건이다. 이들의 범행 동기는 ‘부유층에 대한 원한과 증오’로 밝혀졌으며, 실제로 체포 직후 그런 발언들을 수없이 늘어놓았다. 나아가 이들은 방송카메라 앞에서 “압구정 야타족, 오렌지족, 내 손으로 다 못 죽여서 한”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대중으로부터 ‘일정 부분 그들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끌어냈다.
 
  이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열된 사회 분위기 배경에는 엄밀히 ‘오렌지족’ 같은 이들이 족(族)으로 여겨질 만큼 다수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시되는 상황을 놓고 마치 사실인 양 상세히 보도하며 빈부격차 문제에 과도하게 몰입돼 있던 당시 미디어 상업주의 흐름이 분명 존재했다는 얘기다.
 
 
  전소미 사건
 
  그럼 지금 상황은 어떨까. 양준일이 미국으로 쫓겨 가야 했던 1990년대 초반 분위기와는 과연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없다. 분위기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대중은 부유층에 대한 분노를 키우는 데 이런저런 언론미디어를 필요로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부터, 특히 개개인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나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SNS)가 유행처럼 번지면서부터다. 언론미디어가 따로 보도하지 않아도 대중은 이제 인터넷 일상 속에서 이런저런 격차(格差)들을 이전 이상으로 생생하게 목격한다. 계층 갈등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그에 따른 분노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연예인을 놓고서도 상황은 더 악화됐다. 예컨대 2020년 4월에는 가수 전소미 관련 해프닝이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전소미가 한 유튜브 콘텐츠에서 약 2억5600만원 상당의 외제 자동차 람보르기니를 모는 장면이 소개되자 인터넷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관련 기사들이 수없이 쏟아졌고, 각 기사에는 ‘싫어요’가 수천 단위로 달렸다. ‘전소미’라는 이름 자체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라갔다. 위 1990년대 서울랜드 안내문 내용, ‘20대면서 외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비판이 30년 뒤에도 그대로 적용된 광경이다. 그리고 물론 그 비판 이유도 같다. 위화감을 조장(助長)하고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대중의 호응으로 먹고사는 대다수 연예인은 이처럼 일촉즉발(一觸卽發)로 민감해진 사회 분위기에 꽤 예전부터 적응해오고 있었다. 전소미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그런 모습을 공개하는 일이 가져올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지금 연예인들은 어떤 식으로건 소위 ‘있는 티’를 못 낸다. 그 정도가 아니라 돈을 많이 벌었으면 그만큼 이런저런 자선단체 등에 일정 수준 이상 금액을 기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마찬가지로 공격당하기 쉽다. 물론 자선행위 자체는 칭찬받을 일이 맞지만, 그를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그렇다.
 
 
  ‘제2의 양준일’
 
  대중문화 콘텐츠 차원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다. 여전히 빈부격차, 계층갈등은 가장 인기 있는 소재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이나 TV드라마 〈보통사람들〉 〈간난이〉 등 소시민(小市民)들 삶도 많이 조명되던 1980~90년대보다 오히려 더하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빈부격차 소재가 소위 ‘신데렐라’ 차원에서 판타지를 선사해주는 방향으로 가면 이제 바로 논란이 일고, 어디까지나 부유층의 잘못된 행각들을 비판하는 요소가 들어가야 그나마 각종 논란을 피해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취할수록 흥행(興行)도 더 잘 된다. 2015년 개봉해 무려 13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베테랑〉이 한 예다. 각종 불법과 비행을 저지르는 부유층 재벌 2세를 청렴(淸廉)한 형사들이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이처럼 한층 살벌해진 분위기에서 양준일이 다시금 부각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흐름도 찬찬히 살펴보면 꽤나 흥미로운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그는 사실 ‘오렌지족’ 같은 게 아니었고, 현재는 미국의 한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는 점이 〈투유프로젝트: 슈가맨 3〉를 통해 알려지면서 갑자기 ‘재조명돼야 할 인물’로 거듭난 측면이 있다. 만약 그가 1990년대 당시 인상처럼 부유층이 맞았고 지금도 미국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더라면 절대 지금처럼 ‘뉴트로’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여러 측면에서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하다못해 유튜브 ‘먹방’ 콘텐츠까지도 너무 비싼 음식만 먹으면 똑같이 위화감을 조장한다며 비판받기 일쑤니 말 다 했다.
 
  그러니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언제라도 ‘제2의 양준일’이 탄생할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건 대중의 위화감과 열등감을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연예인이 등장한다면, 딱 양준일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 오히려 1990년대 당시보다도 지금이 더 그렇게 되기 쉽다.
 
  대중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지점들 역시 이전보다 훨씬 넓게 분포돼 있다. 말 한 마디만 삐끗해도 사실상 퇴출(退出) 위기로 몰리게 된다. 그렇게 2020년대 ‘뉴트로’ 버전으로 ‘제2, 제3의 양준일’이 줄줄이 탄생된다면 또 어떻게 될까. 이번에도 양준일처럼 수십 년 만에 다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은 사실 부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연이라도 밝혀야 대중의 용서(?)를 받아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걸까.
 
  2021년 새해를 맞아 양준일 관련 각종 보도들을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을 자아내게 한다. 기쁘고 대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둘러싼 환경과 대중심리 차원에선 우려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단순히 씁쓸한 기분을 넘어 무척이나 위험한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는 위협감(威脅感)이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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