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 한 권의 책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 북트리거 펴냄)

친구와 고객들을 가스실로 보낸 ‘소시민’ 혹은 악마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평시라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정도 했으면 딱 알맞을 것 같은 인간이었다. 법정에 선 그를 관찰한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악(惡)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 빅토르 카페시우스 역시 그런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독일계 루마니아인인 그는 약학대학을 나오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지식인이었다. 트란실바니아의 고향 마을에서 약사 생활을 했던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고객의 불만이 있을 때는 성심껏 애프터서비스(A/S)를 해주었고, 때로는 고객의 가족들과 휴가를 즐기기도 했다.
 
  카페시우스는 1943년 나치 친위대에 입대해, 그해 12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소령 계급장을 달고 아우슈비츠의 ‘주임 약사’가 된 그는 유대인 학살에 사용하는 치클론B 가스나 생체실험에 사용한 약품들을 관리했다. 그리고 수용소에 새로 유대인들이 들어올 때 승강장에 나가 그들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그의 손가락질 하나로 유대인들의 생사(生死)가 갈렸다. 끔찍한 것은 카페시우스가 전쟁 전 그의 고객이나 친구였던 사람들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가스실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나에게서 악마를 보게 될 것”이라고 외치곤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카페시우스는 다시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갔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에게서 뽑아낸 금니를 녹여 만든 금괴를 빼돌린 그는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약국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59년 체포되어 6년여의 긴 재판 끝에 징역 9년 형을 선고받고 2년여 동안 복역한 후 석방됐다. 그는 자신을 전쟁에 휩쓸리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고난을 평생 겪어야 했던 소시민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법과 정의(正義),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한 마성(魔性)에 대해 생각하는 묵직한 이야기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