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 공개된 남한 노래 1호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10·26 다룬 영화에 삽입되면서 선풍적 인기
⊙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
⊙ 윤이상연구소에서 ‘혁명가요’ ‘통일가요’로 改詞…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은 對南 방송 노래로 알려져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학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파주영어마을 사무총장,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대표 역임 / 저서 《끝나지 않은 축구 이야기》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 《배우란 무엇인가》 등
⊙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
⊙ 윤이상연구소에서 ‘혁명가요’ ‘통일가요’로 改詞…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은 對南 방송 노래로 알려져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학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파주영어마을 사무총장,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사)배우고나누는무지개 대표 역임 / 저서 《끝나지 않은 축구 이야기》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 《배우란 무엇인가》 등
- 이선희와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김옥주가 2018년 4월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 리허설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화는 힘이 세다.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북한에 퍼진 한류(韓流)에 주목하는 이유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은근하게 더 멀리 더 널리 퍼진 한류가 있다. 노래다. 입에서 입으로, 별다른 기계나 장비의 도움 없이 북한 주민들의 삶에 스며든 지 오래다. 노랫말을 수첩에 적고 명구(名句)처럼 암송하는 사람도 많다. 북한에서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불법행위다. 엄밀히 말하면, 당(黨)이 만들어서 배포한 노래,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노래 이외의 어떤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다.
10·26 다룬 영화 통해 알려진 노래 ‘그때 그 사람’
노래 흥얼거리다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 곳이 북한이다. 그런데도 부른다. 흥겹고 재미있고 사람을 울리고 웃기기 때문이다. 북한 선전가요엔 이런 힘이 없다. 누구보다도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느낀다. ‘불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외적이지만, 주민들 사이에 합법적 경로를 통해 널리 퍼진 한국 노래도 여러 곡 있다. 북한 당국이 길을 열어준 한류 고속도로다.
먼저 ‘그때 그 사람’이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출전곡으로, 명지대 심민경(가수 심수봉의 본명)이 작사·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의 북한 내 유통경로는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이다. 〈민족과 운명〉은 1991년 5월 23일 김정일이 노래 ‘내 나라 제일로 좋아’를 가지고 다부작(多部作) 예술영화를 만들라고 지시함으로써 제작을 시작한 시리즈물 영화다. 영화광 김정일이 영화의 주제, 주인공, 캐릭터 설정, 음악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그때 그 사람’도 김정일이 선곡(選曲)했다는 뜻이다.
〈민족과 운명〉은 1992년 문학예술종합출판사를 통해 첫 작품이 나온 이후 2003년까지 62부를 만든 북한 영화계의 대표작이다. 핵심은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북한 주민 이외에 해외동포도 의식하며 제작했다. 최덕신(崔德新)·최홍희(崔泓熙)·윤이상(尹伊桑) 등 해외에서 활동한 친북(親北) 인사들의 전기물이 다수인 배경이다. 월북자(越北者)·비전향 장기수 등을 다루면서 한국의 사회 현실을 비방·풍자하는 내용도 여러 편이다. 처음에는 100부 제작이 목표였다. 수출과 남한 반입을 통해 전방위(全方位) 문화전(文化戰)을 펼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대놓고 정치선전을 반복하는 영화를 자발적으로 소비할 관객이 해외에서나 한국에서나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북한 주민에게는 관람을 강요했다. 그런데 역효과가 생겼다. 영화 주제가 퍼진 것이 아니라 ‘(남한) 노래’가 퍼졌기 때문이다. 1992년 상영한 회차에 ‘심수봉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일교포 출신 배우 김윤홍이 박정희 대통령 배역을 맡았다. 북한 당국이 공식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한국 노래를 들려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북한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수령·충성 등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노래를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구호 없이도 노래를 만들 수 있구나’ ‘저런 노래를 불러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심수봉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북한 전역의 젊은이들이 따라 하는 현상으로 진화했다. 그들은 ‘심수봉처럼 기타를 치며’ 환호했고, ‘그때 그 사람’은 북한에서 신세대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한국에 ‘쎄시봉’이 있다면 북한에는 ‘그때 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영화 주제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한 번 더 듣기 위해서, 그리고 기타 치는 자세와 의상을 눈여겨보기 위해서 북한의 젊은이들은 〈민족과 운명〉을 거듭 관람했다.
결혼식장에서 ‘칠갑산’ 불렀다가 사형선고 받은 사연
유행이 퍼지자 단속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 사람’을 부르다 걸리면 노동단련대가 아니라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처벌의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주연배우 김윤홍도 촬영 후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취중(醉中)에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불러 수감생활을 했다.
보고를 받고 대로(大怒)한 김정일이 김윤홍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고 한다. 김윤홍은 산간벽지 수용소에서 2년 동안 혁명화 교육을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김정일의 분노는 김윤홍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영화 기획자로서 김정일 본인의 실패, 본인의 의도를 벗어나 들불처럼 유행한 ‘그때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과감하게 ‘그때 그 사람’을 선곡한 본인의 실수에 대한 자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터이다.
‘낙화유수’(1942)도 북한에서 공식 경로를 통해 퍼진 한국 노래다. 북한은 2001년 선전가요 일변도의 정책을 다소 완화했다.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한국가요 20곡을 ‘해금(解禁)’한 것이다. ‘홍도야 울지 마라’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타향살이’ 등 해방 전의 노래에는 ‘계몽기 가요’라는 이름을 붙였다. 설운도의 ‘누이’, 태진아의 ‘사모곡’, 주병선의 ‘칠갑산’ 등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아니라 가족 사이의 애틋함을 표현한 곡이라 선택을 받았다. 북한 주민이 모르는 노래를 해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암암리에 널리 불리던 노래를 풀어준 것이다. ‘이 정도는 허용할 테니 다른 노래는 부르지 마라.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해금된 노래를 마음 놓고 아무 곳에서나 부르면 안 된다. 반(半) 공개된 자리에서 ‘칠갑산’을 불렀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다.
“북한 고위층의 딸 결혼식이 있어서 유행하던 노래를 축가(祝歌)로 불렀어요. 그런데 다음 날 감옥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죠. 제가 부른 노래가 ‘칠갑산’이었거든요. 모두 따라 부르고 좋아했는데 그만.”
하객(賀客)들이 노랫말에 감동해 모두 눈물을 흘린 것이 문제였다. 예전에 군중대회 휴식 시간에 해금된 노래 중 한 곡을 신나게 연주했다가 자발적인 춤판이 벌어지자 요주의 위험인물로 찍힌 사정에 겹쳐 상황이 심각해졌다. 주체사상 이외에, ‘사람들을 한꺼번에, 그것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힘’의 존재를 북한 당국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예술가는 북한 당국의 적(敵)이자 박멸 대상이었다. 2004년 탈북(脫北), 소해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장윤정의 ‘첫사랑’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던 박성진씨의 사연이다.
초기에는 ‘연변가요’로 둔갑해 유통
한국가요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중국 옌볜을 통하여 북한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중국 보따리상이나 외국을 드나드는 무역종사원, 외교일꾼들이 한국가요가 수록된 카세트테이프 등을 반입했다. ‘돈이 된다’는 것을 알자 밀수꾼들이 대량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한국 노래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연변가요’라는 이름으로 판매했다.
이때 급속도로 퍼진 노래가 ‘사랑의 미로’ ‘동백 아가씨’ ‘님과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이다.
이 가운데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으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이 측근이 모인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연형묵 총리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연형묵이 ‘사랑의 미로’를 불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양 시민들이 다투어 익혔고, 이후 북한 전역에서 크게 히트했다.
김정일은 원작 가사대로 부르지만, 일반 주민은 그럴 수 없다. 1984년 설립했고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윤이상연구소’에서 발간한 〈통일노래집〉에 나온 가사대로 불러야 한다. 다음은 북한이 원작자의 양해 없이 개사(改詞)한 가사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자주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일부 판본에는 마지막 구절이 ‘아득한 혁명의 미로여’로 나와 있다고 하는데, 소생이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김범용의 ‘바람바람바람’도 ‘주체의 바람바람바람’으로 가사를 바꿔 〈통일노래집〉에 실렸다. 원작자를 표기하지 않거나 ‘연변노래’라고 하며 진실을 가렸다.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도 북한 대학생이 많이 부르는 애창곡 중 하나다. ‘연변노래’가 아니라 다른 장르다. 북한 대학생들은 이 노래를 ‘구국의 소리방송’ 등을 통해 나가는 ‘대남(對南)방송 노래’로 알고 즐겨 부른다. 북한 식당에 있는 북한 노래방 기계의 화면노래 반주곡이 바로 ‘아침이슬’이다. 〈통일노래집〉 ‘대남방송 노래’란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내 나라 내 겨레’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노래도 실려 있다고 한다.
퇴폐문화반입·유포죄
한국가요가 유행하자 북한 당국은 체제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훌륭한 문화상품을 만들 능력은 없지만, 문화가 지닌 선전·선동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역시 정치적이었다. ‘비사회주의 척결’이라는 칼을 빼 들고 단속을 강화했다. ‘이별’ ‘좋은 날’ ‘이등병의 편지’ 등을 부르고, 아이돌 그룹의 춤과 노래를 따라 했다는 이유로 가족 전체가 추방된 평양 시민이 부지기수다. 도매상 중에는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다. 이것이 김정은이 말한 ‘비사회주의 현상 섬멸전’이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자본주의적 요소,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 유포를 뿌리 뽑겠다는 얘기다.
북한은 2000년대 초반 퇴폐문화반입·유포죄를 신설했다. 음악과 춤, 그림, 비디오 등 퇴폐적 표현물에 대한 시청 행위를 처벌하는 근거다. 북한 매체도 ‘반동적인 사상문화 침투 책동을 짓부수자, 부르주아적 문화가 들어설 단 한 치의 틈도 이 땅에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고의 한류팬은 김정일·김정은
하지만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力不足)으로 보인다. 중년층은 구전(口傳)으로, 청년학생층은 첨단기기로 한국 노래를 듣고 즐긴다. 각종 모임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킬 때 한국 노래를 불러야 박수를 받는다. 아이돌 그룹의 춤을 가르쳐주는 사설학원도 성업 중이다. 당연히 팬클럽도 있을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한국에서 공연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은 전통 민요와 클래식, 관현악 연주 외에 이선희의 ‘J에게’,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의 노래를 연주했다. 김정은의 애창곡이다. 북한 내 최고의 한류팬은 한국 영화를 단 한 편도 빠지지 않고 챙겨봤다는 김정일과 집무실에 아예 한국 TV를 켜놓고 드라마에 예능까지 챙겨본다는 김정은이다.
한류는 힘이 세다. ‘정치선전’이 아니라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류를 보고 듣는 ‘재미’에 흠뻑 빠진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재미’를 선물하면 좋겠다. 잡혀갈 걱정을 하지 않고 원 없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목청껏 한국 노래를 부르고 싶어 탈북했다는 사람이 있는 판이다. 북한에 한류를 허(許)하라. 재미가 없으면 안 봐도 되는 ‘자유’와 ‘권리’도 함께.⊙
하지만 은근하게 더 멀리 더 널리 퍼진 한류가 있다. 노래다. 입에서 입으로, 별다른 기계나 장비의 도움 없이 북한 주민들의 삶에 스며든 지 오래다. 노랫말을 수첩에 적고 명구(名句)처럼 암송하는 사람도 많다. 북한에서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불법행위다. 엄밀히 말하면, 당(黨)이 만들어서 배포한 노래,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노래 이외의 어떤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다.
10·26 다룬 영화 통해 알려진 노래 ‘그때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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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최초로 알려진 남한 노래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었다. |
먼저 ‘그때 그 사람’이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출전곡으로, 명지대 심민경(가수 심수봉의 본명)이 작사·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의 북한 내 유통경로는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이다. 〈민족과 운명〉은 1991년 5월 23일 김정일이 노래 ‘내 나라 제일로 좋아’를 가지고 다부작(多部作) 예술영화를 만들라고 지시함으로써 제작을 시작한 시리즈물 영화다. 영화광 김정일이 영화의 주제, 주인공, 캐릭터 설정, 음악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그때 그 사람’도 김정일이 선곡(選曲)했다는 뜻이다.
〈민족과 운명〉은 1992년 문학예술종합출판사를 통해 첫 작품이 나온 이후 2003년까지 62부를 만든 북한 영화계의 대표작이다. 핵심은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북한 주민 이외에 해외동포도 의식하며 제작했다. 최덕신(崔德新)·최홍희(崔泓熙)·윤이상(尹伊桑) 등 해외에서 활동한 친북(親北) 인사들의 전기물이 다수인 배경이다. 월북자(越北者)·비전향 장기수 등을 다루면서 한국의 사회 현실을 비방·풍자하는 내용도 여러 편이다. 처음에는 100부 제작이 목표였다. 수출과 남한 반입을 통해 전방위(全方位) 문화전(文化戰)을 펼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대놓고 정치선전을 반복하는 영화를 자발적으로 소비할 관객이 해외에서나 한국에서나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북한 주민에게는 관람을 강요했다. 그런데 역효과가 생겼다. 영화 주제가 퍼진 것이 아니라 ‘(남한) 노래’가 퍼졌기 때문이다. 1992년 상영한 회차에 ‘심수봉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일교포 출신 배우 김윤홍이 박정희 대통령 배역을 맡았다. 북한 당국이 공식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한국 노래를 들려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북한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수령·충성 등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노래를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구호 없이도 노래를 만들 수 있구나’ ‘저런 노래를 불러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심수봉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북한 전역의 젊은이들이 따라 하는 현상으로 진화했다. 그들은 ‘심수봉처럼 기타를 치며’ 환호했고, ‘그때 그 사람’은 북한에서 신세대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한국에 ‘쎄시봉’이 있다면 북한에는 ‘그때 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영화 주제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한 번 더 듣기 위해서, 그리고 기타 치는 자세와 의상을 눈여겨보기 위해서 북한의 젊은이들은 〈민족과 운명〉을 거듭 관람했다.
결혼식장에서 ‘칠갑산’ 불렀다가 사형선고 받은 사연
유행이 퍼지자 단속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 사람’을 부르다 걸리면 노동단련대가 아니라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처벌의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주연배우 김윤홍도 촬영 후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취중(醉中)에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불러 수감생활을 했다.
보고를 받고 대로(大怒)한 김정일이 김윤홍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고 한다. 김윤홍은 산간벽지 수용소에서 2년 동안 혁명화 교육을 받으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김정일의 분노는 김윤홍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영화 기획자로서 김정일 본인의 실패, 본인의 의도를 벗어나 들불처럼 유행한 ‘그때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과감하게 ‘그때 그 사람’을 선곡한 본인의 실수에 대한 자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터이다.
‘낙화유수’(1942)도 북한에서 공식 경로를 통해 퍼진 한국 노래다. 북한은 2001년 선전가요 일변도의 정책을 다소 완화했다.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한국가요 20곡을 ‘해금(解禁)’한 것이다. ‘홍도야 울지 마라’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타향살이’ 등 해방 전의 노래에는 ‘계몽기 가요’라는 이름을 붙였다. 설운도의 ‘누이’, 태진아의 ‘사모곡’, 주병선의 ‘칠갑산’ 등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아니라 가족 사이의 애틋함을 표현한 곡이라 선택을 받았다. 북한 주민이 모르는 노래를 해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암암리에 널리 불리던 노래를 풀어준 것이다. ‘이 정도는 허용할 테니 다른 노래는 부르지 마라.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해금된 노래를 마음 놓고 아무 곳에서나 부르면 안 된다. 반(半) 공개된 자리에서 ‘칠갑산’을 불렀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다.
“북한 고위층의 딸 결혼식이 있어서 유행하던 노래를 축가(祝歌)로 불렀어요. 그런데 다음 날 감옥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죠. 제가 부른 노래가 ‘칠갑산’이었거든요. 모두 따라 부르고 좋아했는데 그만.”
하객(賀客)들이 노랫말에 감동해 모두 눈물을 흘린 것이 문제였다. 예전에 군중대회 휴식 시간에 해금된 노래 중 한 곡을 신나게 연주했다가 자발적인 춤판이 벌어지자 요주의 위험인물로 찍힌 사정에 겹쳐 상황이 심각해졌다. 주체사상 이외에, ‘사람들을 한꺼번에, 그것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힘’의 존재를 북한 당국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예술가는 북한 당국의 적(敵)이자 박멸 대상이었다. 2004년 탈북(脫北), 소해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장윤정의 ‘첫사랑’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던 박성진씨의 사연이다.
초기에는 ‘연변가요’로 둔갑해 유통
한국가요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중국 옌볜을 통하여 북한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중국 보따리상이나 외국을 드나드는 무역종사원, 외교일꾼들이 한국가요가 수록된 카세트테이프 등을 반입했다. ‘돈이 된다’는 것을 알자 밀수꾼들이 대량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한국 노래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연변가요’라는 이름으로 판매했다.
이때 급속도로 퍼진 노래가 ‘사랑의 미로’ ‘동백 아가씨’ ‘님과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이다.
이 가운데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으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이 측근이 모인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연형묵 총리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연형묵이 ‘사랑의 미로’를 불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양 시민들이 다투어 익혔고, 이후 북한 전역에서 크게 히트했다.
김정일은 원작 가사대로 부르지만, 일반 주민은 그럴 수 없다. 1984년 설립했고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윤이상연구소’에서 발간한 〈통일노래집〉에 나온 가사대로 불러야 한다. 다음은 북한이 원작자의 양해 없이 개사(改詞)한 가사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자주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일부 판본에는 마지막 구절이 ‘아득한 혁명의 미로여’로 나와 있다고 하는데, 소생이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김범용의 ‘바람바람바람’도 ‘주체의 바람바람바람’으로 가사를 바꿔 〈통일노래집〉에 실렸다. 원작자를 표기하지 않거나 ‘연변노래’라고 하며 진실을 가렸다.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도 북한 대학생이 많이 부르는 애창곡 중 하나다. ‘연변노래’가 아니라 다른 장르다. 북한 대학생들은 이 노래를 ‘구국의 소리방송’ 등을 통해 나가는 ‘대남(對南)방송 노래’로 알고 즐겨 부른다. 북한 식당에 있는 북한 노래방 기계의 화면노래 반주곡이 바로 ‘아침이슬’이다. 〈통일노래집〉 ‘대남방송 노래’란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내 나라 내 겨레’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노래도 실려 있다고 한다.
한국가요가 유행하자 북한 당국은 체제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훌륭한 문화상품을 만들 능력은 없지만, 문화가 지닌 선전·선동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역시 정치적이었다. ‘비사회주의 척결’이라는 칼을 빼 들고 단속을 강화했다. ‘이별’ ‘좋은 날’ ‘이등병의 편지’ 등을 부르고, 아이돌 그룹의 춤과 노래를 따라 했다는 이유로 가족 전체가 추방된 평양 시민이 부지기수다. 도매상 중에는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다. 이것이 김정은이 말한 ‘비사회주의 현상 섬멸전’이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자본주의적 요소,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 유포를 뿌리 뽑겠다는 얘기다.
북한은 2000년대 초반 퇴폐문화반입·유포죄를 신설했다. 음악과 춤, 그림, 비디오 등 퇴폐적 표현물에 대한 시청 행위를 처벌하는 근거다. 북한 매체도 ‘반동적인 사상문화 침투 책동을 짓부수자, 부르주아적 문화가 들어설 단 한 치의 틈도 이 땅에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고의 한류팬은 김정일·김정은
하지만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力不足)으로 보인다. 중년층은 구전(口傳)으로, 청년학생층은 첨단기기로 한국 노래를 듣고 즐긴다. 각종 모임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킬 때 한국 노래를 불러야 박수를 받는다. 아이돌 그룹의 춤을 가르쳐주는 사설학원도 성업 중이다. 당연히 팬클럽도 있을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한국에서 공연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은 전통 민요와 클래식, 관현악 연주 외에 이선희의 ‘J에게’,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의 노래를 연주했다. 김정은의 애창곡이다. 북한 내 최고의 한류팬은 한국 영화를 단 한 편도 빠지지 않고 챙겨봤다는 김정일과 집무실에 아예 한국 TV를 켜놓고 드라마에 예능까지 챙겨본다는 김정은이다.
한류는 힘이 세다. ‘정치선전’이 아니라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류를 보고 듣는 ‘재미’에 흠뻑 빠진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재미’를 선물하면 좋겠다. 잡혀갈 걱정을 하지 않고 원 없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목청껏 한국 노래를 부르고 싶어 탈북했다는 사람이 있는 판이다. 북한에 한류를 허(許)하라. 재미가 없으면 안 봐도 되는 ‘자유’와 ‘권리’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