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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화제의 右派서적

《치명적 자만》 |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신중섭 번역

“사회주의자는 운명적으로 치명적 자만에 빠진다”

글 : 신중섭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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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존재하는 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치명적 자만’에 빠져 있어
⊙ 連帶와 利他性에 기초한 도덕을 原始도덕… 현대 자본주의 거대사회에서는 통용 안 돼
⊙ 동창회를 움직이는 도덕으로 시장경제를 지배하려고 해

申重燮
1956년생.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철학박사 / 한국과학철학회 회장·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사회통합위원회 이념분과위원·국민대통합위원회 포럼위원 역임. 現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 저서 《포퍼의 현대의 과학철학》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샌델의 정의론 바로읽기》, 역서 《치명적 자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등 다수
  우리는 지금 남북관계를 비롯해 국방, 외교, 경제, 사회 등의 대부분 중요한 분야에서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전통의 지혜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과감하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단 망설임 없이 실행하고, 그 결과는 미리 살필 필요 없다는 풍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의도가 좋으면 결과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기 마련이다. 지향하는 가치(價値)나 이념(理念)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집권세력은 이전 정부와 다른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특히 역사나 현실에 대해 극명하게 다른 가치 기준을 가진 정당이 정권을 획득하면 사회의 모든 국면이 바뀐다. 선악(善惡)의 기준이 바뀌고, 역사에 대한 평가가 변한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매일 체험하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혁명이 일어난 것 같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 쿤의 용어를 빌린다면 패러다임 전환을 체험하고 있다. 이런 경우 옳고 그름에 대한 중립적 기준을 찾기란 어렵다. 과거에 좋은 것으로 통용되던 것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뀐다고 헌법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헌법은 추상적 가치로 구성되어 있어 국가의 중요 사안에 대한 서로 다른 결정을 포용한다. 특히 남북관계나 외교관계, 경제정책에 대해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
 
  이런 풍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과나 가치에서 초라했던 우파(右派) 정권이 헌법이 보장한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헌법적 절차에 따라 철거당했으니 혁명 아닌 혁명을 겪은 것이다. 건국 70년 역사에서 좌파(左派)가 10년밖에 정권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현(現) 정부가 출현했으니, 나머지 60년 가까운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것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듭되는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높은,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에 비해 초라한 야당 지지율을 보면 아직도 국민 다수(多數)가 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 상황을 현 정부의 정치공학이나 정치적 이익 추구로만 볼 수 없다. 이념적으로 좀 더 깊은 곳에서 살펴야 한다.
 
 
  “사회주의는 거짓 전제에 기초”
 
  현 상황을 이념적으로 성찰하는 데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1899~1992)의 마지막 저서인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이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우리와 다른 시대, 문화에서 살면서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하기 위한 정치·경제·철학 사상을 전개했지만, 그가 포착한 개념은 우리 현실을 설명하는 데도 적합하다. 위대한 사상가인 그의 생각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치명적 자만》의 집필 목적에 대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운동인 사회주의가 명백히 거짓 전제(前提)에 기초하며, 그것이 선(善)한 의도에서 고무되었고,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그 운동을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수준과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개인의 도덕 및 자유와 책임의 기초를 파괴하고, 부(富)의 생산을 방해하고 빈곤의 원인이 되며, 마침내 전체주의 정부로 귀착되는 반면, 시장경제는 도덕 및 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기초를 북돋우고, 부를 생산하고 빈곤을 추방하며, 자유주의 정부를 산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보이지 않는 자생적(自生的) 질서에 의존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선을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치명적 자만》의 부제(副題)인 ‘사회주의의 오류’에도 나타나 있듯이 하이에크는 인류가 살아남아 문명을 발전시키려면 사회주의가 사실적으로 잘못됐음을 밝혀야 한다고 확신하고, 이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치명적 자만’
 
러시아혁명 당시 군중을 선동하는 레닌. 구성주의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는 ‘치명적 자만’에 빠져 실패하고 말았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철학은 1989년과 1990년대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사회주의가 번성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했다고 해서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곳에서는 버젓이 살아남아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고 있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는 더하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를 ‘치명적 자만’의 소산이라고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치명적 자만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사고(思考)에서 나왔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대표가 바로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자는 운명적으로 치명적 자만에 빠진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제도와 문명을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바람과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회제도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사회의 제도는 인간의 이성(理性)에 의한 면밀한 디자인의 산물(産物)이거나 산물이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훌륭한 법을 원하면 가지고 있는 법을 불살라버리고 새로운 법을 만들라”는 볼테르의 말을 신봉한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치명적 자만에 빠져 있다. 치명적 자만에 빠진 사람들은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갖가지 명분을 내세워 과거와 현재를 부정한다. 과거를 적폐(積弊)의 유산으로만 보는 것이다.
 
 
  連帶·利他性에 기초한 도덕은 原始도덕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서 나온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내세우는 도덕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사회’ ‘사람이 먼저’ ‘이기주의(利己主義)는 나쁜 것이고 이타주의(利他主義)는 좋은 것인데 자본주의는 이기주의에 기초해 있고, 사회주의는 이타주의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타주의’와 ‘연대성(連帶性)’의 도덕을 앞세운다.
 
  하이에크는 연대와 이타성에 기초한 도덕을 원시(原始)도덕이라 부른다. 원시도덕은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온 원시사회를 유지하게 한 도덕이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수렵채취를 하면서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 우리의 본능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전에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된 도덕이 바로 연대와 이타성이다. 원시사회의 도덕으로서 연대와 이타성은 무리를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동을 이끌어냈다. 원시사회에서 협동은 서로 알고 신뢰하는 동료 사이에서만 일어난 상호작용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원시사회는 공산(共産)사회로 사유(私有)재산이 없었다. 공동으로 노동하고 그 결과를 나누었다. 사냥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참여한 사람과 같이 사냥한 짐승을 나누어 먹었다. 마르크스가 원시공산사회를 공산사회의 모형으로 삼은 이유도 원시공산사회는 공동으로 생산·소비하는 사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도덕은 연대와 이타성의 도덕으로 원시공산사회의 도덕이다. 연대와 이타성을 강조하면 당연히 사회주의로 빠져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함께 잘사는 공산사회를 꿈꾼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원시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연대와 이타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동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오늘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협동하면서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같은 거대사회에서는 연대와 이타성에 기초한 원시사회의 도덕이 통용될 수 없다. 우리는 커피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것을 생산한 농부가 누구이고, 운반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면서 커피를 마신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협동이 일어난다. 이것이 가능하게 한 것은 연대와 이타성이 아니라 사유재산에 대한 존중, 정직과 같은 시장경제의 도덕이고, 문명의 도덕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착각
 
  물론 오늘날과 같은 거대사회,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연대와 이타성은 필요하다. 가족, 친족, 동창회, 향우회 같은 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이 바로 연대와 이타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대와 이타성을 이런 작은 모임을 넘어 정치와 경제에 적용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연대와 이타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러한 원시도덕이 가능하지 않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협동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와 같은 거대사회를 연대와 이타주의로 작동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연대와 이타성으로 현대사회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거대사회·시장경제는 사유재산 존중, 정직, 가격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동창회를 움직이는 도덕으로 시장경제를 지배하려고 한다. 공정경제, 공정한 분배, 평등, 모두가 잘사는 사회, 소득주도 성장, 최저임금제, 분양가 상한제 같은 이상과 제도는 모두 원시도덕에 기초해 있다. 원시도덕을 넘어서지 못한 현대 문명사회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에 박수를 보내면서 시장경제를 국가가 관리하고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의 가격 시스템이 우리를 잘살게 하고, 세계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장을 통제하고 개입한다. 시장 대신에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우리 정부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시장경제를 존중하지 않고 끊임없이 간섭하는 이유는 연대와 이타성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상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원시사회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연대와 이타성이 아니라 사유재산의 존중과 정직 같은 거대사회의 도덕을 지지하는 세력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들의 의식이 먼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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