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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르포

신라 왕궁은 어디에 있을까

“천년 세월 속에 묻힌 왕궁터 月城, 발굴 中”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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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통일신라 이후 월성엔 사람들이 안 들어왔어요. 여기를 신성한 공간으로 여긴 것인지, 패망한 나라의 터라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산 흔적이 없어요. 그래서 월성이 보존됐던 것입니다.”(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월성 A~D까지 4개 지구와 해자까지 발굴·연구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흐를지 몰라”
⊙ ‘동궁과 월지’ 복원·정비 계획, 유네스코가 반대… 입찰 취소
⊙ 1976년부터 발굴 시작된 황룡사터… 지금도 발굴 중
⊙ 김석기 의원 ‘경주특별법’ 발의, 주낙영 시장 “경주엔 무덤밖에 없어. 유적 복원 필요”
포털 위성지도로 본 경주 문천(지금의 남천)의 모습. 최근 복원한 월정교, 남문지 터, 교촌 한옥마을이 보인다.
  한국 건축을 사랑했던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郎·1899~2002)가 경주 월성(月城)에 관해 쓴 글의 첫 문장은 이랬다.
 
  “월성은 남산의 정북과 남산의 동쪽을 북류해온 문천(蚊川·현재의 남천)이 월성의 구릉에 막다랐으므로, 하는 수 없이 반월 모양의 산기슭을 씻듯이 서쪽으로 흐른다.”(p.194, 《韓의 건축문화》)
 
  이 의인화된 시적(詩的) 문장에 월성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전 처음 했다. 그리고 지난 5월 7일과 8일 월성을 찾았다. 경주시청의 도움으로 왕경1팀 관계자들과 동행하며 허물어진 옛 왕경(王京)의 영화(榮華)를 더듬었다.
 
  사람들은 문천이 ‘활처럼 굽이쳐 생긴 달 모양의 언덕’이라 해서 월성, 때로는 반(半)월성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실지로 보니 월성이 낮은 언덕(구릉)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연못(해자·垓子) 여러 개가 복원 중이었다. 해자를 따라 길게 펜스가 둘러쳐 있었고, 펜스 중간에 내부를 볼 수 있게 플라스틱 창(窓)을 달아놓았다.
 
  위성지도로 월성을 보니, 문천은 정말이지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월성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었다.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신(神)의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월성은 신화(神話)의 공간임이 새삼 느껴졌다.
 
  문천을 사이에 두고 지난해 510억원을 들여 복원한 월정교(月精橋·옛날에는 문천교)와 경주 계림(鷄林), 동궁과 월지(안압지), 선덕대왕 신종(에밀레종), 국립경주박물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첨성대와 1238년 몽고군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된 황룡사 터도 지척에 있었다.
 
  이곳이 그 옛날, 신라 임금이 살던 왕궁이라 추정되는 곳이다. 이 왕궁이 자리한 경주는 신라 1000년의 수도였다. 정확히는 1000년에서 살짝 모자라는 992년이지만,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워 서기 935년까지 이어진 곳이다.
 
  세계적으로 1000년 수도는 5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터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시안(장안), 일본의 교토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경주는 다만, 궁궐이 안 보인다는 게 허전하다. 1000년 수도에 왕궁이 없다니…. 고고학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적 미스터리다.
 
  기자가 경주에 도착해 먼저 찾아간 곳은 황룡사역사문화관(경주시 임해로 64-19)이었다. 경주시 이상영(李相英) 문화관광국장과 손진립(孫晋立) 왕경조성1팀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원래 2035년까지 신라 유적을 복원·정비할 계획이었는데, 2025년으로 앞당겨졌다.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으로 8개 핵심 유적의 복원·정비에 집중해왔다”고 했다.
 
  8개 핵심 유적은 ▲월성 ▲동궁과 월지 ▲월정교 ▲황룡사 ▲대형고분 재발굴 및 전시 ▲신라 왕경 중심 방(坊) 복원 ▲첨성대 주변 ▲쪽샘지구(경주시 황오·황남·인왕동 일대 고분군) 등이다.
 
 
  “발굴에다 연구 기간이 너무 길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황룡사터. 흰 점이 사찰의 주춧돌이다. 1970년대부터 발굴이 시작돼 아직도 조사 중이다.
  경주 8개 핵심 유적 복원·정비에 소요될 사업비는 모두 9450억원. 올해까지 모두 3584억원을 썼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손 팀장의 말이다.
 
  “핵심 유적지 8곳을 골라 2025년까지 끝내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시간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상영 국장이 말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빨리하고 싶은데 경주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문화재청 심의를 하나하나 거쳐야 하기에 너무 어려워요. 발굴에다 유적 연구기간이 너무 길고…, 뭘 하려 해도 역사학자들이 자꾸 반대합니다. 황룡사 발굴은 1976년부터 시작됐고 복원·정비 사업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몰라요. 속이 터집니다.”
 
  게다가 정권 교체 후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가야사 복원사업’이 주목받으면서 경주사업은 동력이 확 떨어진 상태다. 이 국장과 손 팀장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었다.
 
  “국가가 계획했으면 계획대로 진행하면 제일 좋습니다. 중간에 정권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가야 문화 쪽으로 예산도 그렇고… 확 돌아가고 있어요.”
 
  ― 정권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예산을 줄이진 않겠지요.
 
  “파이는 그대론데 자꾸 외부 요인으로 중단되니까, 50억원 나올 예산이 7억원밖에 안 내려오고 그렇지요. 예산이 깎인 것은 아니고….
 
  문화재위원들이 바뀌면서, 바뀐 위원들의 생각이 다르면 (추진 일정이) 확 돌아갑니다. 그런 부분도 너무 답답해요. 처음 계획을 세울 때 참여한 문화재위원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바탕에 추가로 자문하면 좋은데, 이건 뭐 다 돌아가 버리니까….”
 
  이상영 국장은 안압지가 있는 ‘동궁과 월지’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신라 태자가 살았다는 동궁(東宮)과 안압지(雁鴨池)로 불린 월지(月池·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안압지다)를 정비하려는 사업을 말한다.
 
  “2010년부터 세부계획을 세워 문화재청 승인을 일일이 받아 추진해왔어요. 그런데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세계유산의 보편적 가치’에 안 맞다고요. 할 수 없이 입찰공고(서편지 A건물 재현공사)를 부랴부랴 취소하고 말았어요.”
 
 
  경주시와 문화재청,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삼각관계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이 발굴 중인 월성 C지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경주시는 동궁과 월지 인근에 왕이 기거하는 침전, 평상시 거처하던 편전, 나랏일을 보던 정전과 회랑, 중문 등을 복원할 계획이었다. 물론 이 시설의 역사적 고증을 뒷받침할 만한 정확한 사료는 없다. 조선 후기에 이미 궁은 사라지고 호수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임해정(臨海亭)이라는 전각이 세워졌고, 해방 이후 주민들이 간혹 낚시터로 이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1000년 전의 건물 설계도나 관련 도면이 있을 리 없다. 기와, 무늬벽돌, 월지와 동궁이 새겨진 유물 등이 근처에서 나왔을 뿐이다. 손 팀장의 말이다.
 
  “고증 연구와 학자들이 참여한 학술 연구 용역을 맡겨 그 결과를 실시 설계에 반영해 2017년 10월 문화재청 승인을 받았는데, 갑자기 유네스코(세계유산센터)에서 이의를 다는 바람에 입찰공고마저 급히 거둬들이고 말았어요.”
 
  ― 유네스코 권한이 막강하네요.
 
  “‘권고’ 사항이지만 무시할 수 없지요. 직접 프랑스 파리로 찾아가 세계유산센터 사무국장을 만나 충분히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사라진 경관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게 ‘(세계유산의)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경주 입장에서는 최대한 고증에 따라, 텅 빈 역사적 공간에 대표적인 건물이라도 하나씩 만들어놓자는 생각입니다.”
 
  기자는 발굴이 한창인 월성을 찾았다.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5월의 햇살은 초여름답게 뜨거웠다. 성내(城內)는 널찍한 평탄지로, 잔디를 걷어낸 땅의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왕성의 주춧돌로 삼던 크고 작은 돌들이 1000년 왕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남당[南堂·삼국시대 초기의 정청(政廳)]이라든가, 대궁(大宮)이라든가, 조원전(朝元殿) 같은 중요한 건물이 있던 자리가 월성이었다. 진덕왕 5년(656)에 왕이 조원전에 납시어 백관의 하례를 받은 것이 신년하례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도 전한다.
 
  신라 태평성대, 880년 9월 9일 헌강왕 이 월상루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신하들에게 묻는다.
 
  “내가 듣기로 지금 민가에선 모두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을 때 밥을 짓는다고 하는데(覆屋以瓦不以茅) 사실인가?”
 
  신하가 대답한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나라가 평안하니 모두 성덕의 소치옵니다.”
 
  “이는 다 경들이 잘 보좌해준 덕이다. 내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경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월성루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왕이 살던 궁궐과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경주 출신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李鍾勳) 소장을 만났다. 발굴이 한창인 월성 C지구를 돌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라 파사왕 22년(2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또는 재성(在城)이라 불렀는데, 그 둘레가 1023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합니다.
 
  지금은 안압지(월지) 앞에 도로가 생겨 분리되어 보이지만, 원래는 월성과 안압지가 하나입니다. 월성을 ‘대궁’이라 불렀는데, 그 대궁 안에 위치한 연못이 안압지인 것이지요. 8~9세기부터는 주변 전체가 월성을 중심으로 많은 관청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 C지구 토층의 歷史 블랙박스
 
월성 C지구는 약 6400㎡(약 1936평)에 이른다. 이 공간에서 건물지 17개 동이 확인되며 신라 관료들이 문서를 생산하던 관청지로 파악된다.
  ― 관청지로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이종훈 소장은 “월성 C지구에 유독 벼루 조각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200편이 넘어요. 경주시 전체에서 발굴되는 벼루보다 많은데, 벼루가 많다는 것은 글을 많이 썼다는 것이고 지금으로 보면 행정관료가 문서를 생산했다는 의미죠.”
 
  ― 왕이 정사를 보던 정전이나 편전, 혹은 잠을 자던 침전 성격의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네요. 건물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알 수 없어요. 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던 공간이 8세기 때도 여기가 아니면 이 옆이나 저 뒤거나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는 판단할 수 없고요, 다만 신라 궁궐이 (삼국)통일을 즈음해 급격하게 확장됩니다, 외부로…. 이 공간에만 기거했다고 장담할 수 없고 (C지구) 밖으로도 왕이 나갔겠죠.”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확실하게 왕이 월지(안압지) 쪽에서 외국 사신을 맞이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쪽(월성)과 저쪽(월지)이 연결돼 여기가 아니더라도 저 옆이든 어딘가에 왕이 정사를 돌보는 공간이나 잠자는 공간이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연구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소장은 “그럼에도 ‘관료들의 공간’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했다.
 
  “과거 발굴조사나 연구에서는 건물 성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대량의 유물을 모두 분석하는 작업들을 못 했거든요. 지금은 땅속 층위별로 출토된 유물을 전량 조사하고 있어요.”
 
  월성 C지구는 약 6400m2(약 1936평)에 이른다. 이 공간에서 건물지 17개 동이 확인됐다. 서기 8~9세기에 있던 건물들로 추정한다. 그러나 땅속 층위조사(TEST pit·시굴갱)를 하면 층별로 서로 다른 7개의 문화층이 확인이 되고 있다. 1개 층에 수백 년의 세월이 숨어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은 그중 3개 층을 통일신라시대 문화층으로 추정한다.
 
  ― 흥미롭습니다. 땅속 토층을 벗겨내면 다른 시대의 토층이 있고, 그것을 벗겨내면 또다시….
 
  “현재 1차 발굴이 끝났지만 지금 (벼루가 확인되는) 8세기 건물 밑에 또 다른 건물(의 흔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건물 밑에 건물이 또 있겠죠.
 
  고고학적으로 최소한 600년 이상 사용됐던 공간이었기에,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건물을 쓰다가 폐기하고 그 위에 어느 정도 흙을 덮고 다시 (건물을) 짓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봅니다. 50년에서 100년 사이에 건물이 증축되거나 다시 폐기되는 과정이 이뤄진 것이죠.”
 
 
  천년 왕궁의 흔적이 사라진 이유는…
 
  신라 1000년 동안 번성했을 왕궁이 왜 현재에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관련 사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때 쓰인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신라 1000년의 수많은 사료를 토대로 쓰였겠지만 지금은 사료들을 찾을 수 없다. 혹시 고려나 조선 왕조가 신라 궁궐이나 사료를 없앤 것일까. 아니면 외침으로 소실된 것일까. 황룡사 9층 목탑이 1283년 몽고군 침입 때 불탄 것처럼 말이다.
 
  ― 왜 경주에 왕궁이 없나요.
 
  이종훈 소장은 “1000년의 시간을 생각하면 (월성의) 빈 공간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돌로 만든 유럽의 석조문화는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지만 동양의 목재문화는 (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성계가 천도 후 지은 조선의 경복궁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에 왕이 살던 정궁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된 후 대원군이 집권하기까지 300년 동안 폐허가 됩니다. 폐허가 되면 흔적조차 사라집니다. 경복궁 유적을 발굴해보면 일부 구간은 여기(월성)보다 시간이 훨씬 짧기에 기단(基壇·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의 흔적은 보이나 대체로 돌(초석과 주춧돌)만 남았지 건물의 위(지붕, 기와 등)는 모두 사라지고….”
 
  ― 월성은 외침이나 화재로 인해 훼손된 흔적은 없나요.
 
  “외부요인이 있다면, 만약 화재가 일어났다면 불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요. 흔적이 없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세월 속에 사라졌다는 의미죠. 시골에 가보세요. 나무로 지은 집은 20년만 지나도 자연스레 허물어집니다. 세월 속에 기와만 남고 다 썩어 없어지고 (그 기와도) 비가 오면 유실되죠. 물론 누가 와서 인위적으로 (유물을) 빼갔을 수는 있겠죠. 한두 점 정도….”
 
  ― 그래도 1000년이나 지탱해온 왕국의 수도인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도 월성은 폐허가 된 채 내버려둔 것이죠. 나무는 썩어 없어지고 궁궐 기초를 닦았던 돌들은 최근까지도 석재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이런 돌들은 정원석으로도 많이 쓰거든요.”
 
  ― 정말 월성엔 불탄 흔적이 없나요.
 
  “불이 났다면 ‘소토(燒土)’라는 불 맞은 흙이 있어야 합니다. 1000년의 시간은 모든 공간을 소멸시킵니다. 고찰(古刹)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경내 석탑은 남아 있죠. 조선시대에는 신라 석탑을 해체해 성을 쌓았습니다. 경주읍성을 발굴해보니 신라시대 탑의 몸돌이나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이 많이 나왔거든요. ‘경주읍성의 석재를 다 복원하면 신라시대 탑이 10개 이상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 신라가 폐망한 이 터에 누가 살았을까요.
 
  “흔히 사람들이 살던 곳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계속 거주하기 마련이죠. 통일신라 시대 사람의 집터에 고려 사람들이 살고, 조선 시대 사람들이 그 자리를 흙으로 덮고 다시 건물을 짓고 삽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통일신라 이후 월성엔 사람들이 안 들어왔어요. 신성한 공간으로 여긴 것인지, 패망한 나라의 터라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산 흔적이 없어요. 그래서 월성이 보존됐던 것입니다.”
 
  조선 영조 시대 김상정(金相定· 1722~1788)이 쓴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동남으로 해서 반월성 성터에 이르렀다. 성에서 옛날 흙으로 쌓은 것이 지금은 무너져 식별할 수 없고 황량한 언덕과 거친 모래뿐이어서 한번 바라보니 마음이 아팠는데, 이곳에 있는 돌로 쌓은 것은 마치 성문과 같았다.(東南至半月城舊址 城古土築 今漫無識別 而荒阜淺莎 一望傷心 是有石築 呀如城門者)”
 
  조선 시대에 월성은 이미 무너져 내려 황량한 언덕과 거친 모래로 가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려한 1000년의 궁궐은 그렇게 세월의 무덤 속에 갇힌 것이다.
 
 
  月城과 일본 平城宮, 중국 大明宮의 경우
 
최근 완공된 월정교. 경주의 새로운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기자는 월성에서 월정교로 걸음을 옮겼다. 조선 시대 때 지어진 ‘석빙고’를 지나 사적 제19호로 지정된 ‘계림’에 잠시 들렀다.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예스러움을 전해주었다.
 
  동행한 손진립 팀장이 “여기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며 “탈해왕 4년(60)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는데, 궤짝 속 사내아이가 김알지”라고 했다.
 
  그런데 발굴된 문무왕릉비에 김씨 내력이 적혀 있는데, 비문에 ‘김일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흉노(匈奴)의 태자’라고도 하고, 김씨의 조상이라는 설이 한국 고대사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월성 남문지(南門地)를 지나 월성교에 도착했다. 손 팀장은 “성문 터가 모두 12개다. 성터 주변의 씨앗 하나도 버리지 않고 분석한다”고 귀띔했다. 씨앗은 신라의 숲과 초지(草地) 등의 경관, 사람과 식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한다.
 
  월성의 가장자리는 흙으로 쌓은 성벽으로 둘러져 있다. 성벽은 곳곳에 허물어진 것처럼 열린 공간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곳의 일부는 당시 월성을 드나들던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 팀장의 말에 따르면 월성에 성문이 12개나 된다고 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드디어 월정교에 도착했다. 문천이라 부르는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강폭이 생각만큼 넓고 깊지는 않았다.
 
  월정교는 경주 남산으로 가는 도로에 놓인 다리다. 다리는 세월에 허물어지고 동쪽에 일정교(日精橋)와 나란히 다리의 양쪽 강안에 잘 다듬은 돌로 쌓은 교대(橋臺·다리 양쪽을 받치는 기둥)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새로 지은 월정교는 예스러우면서도 인근 교촌의 한옥마을과 함께 세련미를 더하고 있었다.
 
경주시청 손진립 왕경조성1팀장이 가리키는 곳이 복원한 월성해자다.
  월정교 복원정비 공사에 든 비용은 약 510억원. 교량을 복원하고 주변 정비(주차장, 화장실, 조경 등)에 쓰였다. 일각에서는 “고증 자료도 없이 중국 다리를 참고해 상상력으로 지은 무리한 복원”이라는 원성이 나왔다. 이 같은 복원 논란에 대해 이상영 경주시 문화관광국장이 속상해하며 기자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문화재청과 협의해 철저하게 고증을 따랐습니다. 그 시절 설계도면이나 사진이 없지만 1984~87년까지 발굴된 석재(교대·교각·사자상·팔각석주·처마석)와 목재(쇄골방지목), 기와(암막새·수막새·암기와·수키와), 철물(쇠못 등) 등을 분석해 교각 위에 목조누각을 얹은 교량이 있었던 것을 고증했지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두 76차례 자문했습니다.
 
  그런데 다 짓고 나니까 왜 흔드냐 말이에요. 그럼 지금까지 조언해준 학자는 뭐가 됩니까. 화가 나요.”
 
  이 국장의 분노에 이해가 갔다. 그러나 신라의 특색있는 느낌이 나는 다리라는 느낌은 솔직히 안 들었다. 손 팀장이 말했다.
 
  “월정교가 황리단길(경주시 포석로), 교촌 한옥마을과 함께 요즘 경주에서 가장 뜨는 곳입니다.”
 
  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보셔서 알겠지만, 월성 주변엔 여전히 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경주시로서는 발굴이 늦어지고 있어 안타까워요. 10년이고 20년이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지 않나요? 역사적 고증부터 자료연구, 문화재청 심의, 유네스코 권고까지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공무원들이 뛰고 있어요. 관광객들이 (발굴 중인) 텅 빈 들판보다 역사성을 갖춘 상징적인 건물에 감흥을 더 느끼지 않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전 월성 C지구에서 만난 이종훈 연구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월성 조사를 시작한 게 내년 3월이면 딱 5년이 됩니다. 몇 년 안에 끝내겠다는 발굴 계획은 없어요.”
 
  현재 월성 C지구를 발굴 중인데 A~D까지 4개 지구와 월성 바깥쪽의 해자지구까지 연구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흐를지 알 수 없다. 이 소장은 한마디 더 보탰다.
 
  “월성 C지구를 발굴 중인데 A지구까지 10년 내에는 어느 정도 윤곽이 파악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윤곽만 확인하는 것이지 깊이 있게 들어가려면 일본처럼 70년 이상이 걸릴지 알 수 없죠. 일본의 평성궁(平城宮·헤이조궁: 고대 나라[奈良]의 역사기념물)은 아직 발굴 중입니다. 중국 대명궁(大明宮·시안[西安]의 국가유적공원) 역시 거의 50년 동안 발굴 중이죠. 발굴과정에서 나온 자료들을 분석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동궁과 월지, 황룡사터를 찾아가니…
 
경주시청 왕경조성1팀 박종일씨가 최근 복원이 불허된 ‘동궁과 월지’의 서편지를 설명하고 있다.
  기자와 동행한 손 팀장이 문화재 자문회의에 참석하러 가야 했다. 시청 왕경조성 1팀의 박종일(朴鍾壹)씨가 ‘동궁과 월지’를 안내했다. 《삼국사기》에는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조류와 짐승을 기른다’고 기술돼 있다.
 
  월지(안압지) 옆에 동궁터가 있다. 동궁은 신라 태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안압지를 만들고 5년 뒤 지었다는데, 동궁터의 초석이 발굴 보존되어 있다. 조선 초기 문신인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한시 ‘안하지 옛터’가 전한다. 안하지는 안압지의 다른 말이다.
 
  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鑿池爲海長魚螺)
  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引水龍喉勢岌峨)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此是新羅亡國事)
  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而今春水長嘉禾)
 
  조선시대에 안압지는 논농사를 위한 저수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00년 고도(古都)의 왕이 놀던 공간이 세월이 흘러 논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월이 무상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궁과 월지’ 복원도.
  기자는 박종일씨와 ‘동궁과 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곳곳에 철제 펜스가 쳐져 있었고 땅엔 비닐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비가 와서 발굴 유적이 씻겨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박씨는 “이곳(동궁와 월지)에 정전, 편전, 침전 등을 추정해 건물(서편지 A건물)을 재현하려 했지만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서 이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국비는 경주시가 타서 사업승인은 문화재청이 한다. 유물이 나오면 경주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업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시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황룡사지로 향했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 14년(553), 현재의 황룡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로 바꾸어 짓고, 그 이름을 황룡사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황룡사 9층 목탑(건립 643년)이 7세기 당대 전 세계에서 나무로 지어진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이란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보다 앞선 1963년 국가 지정문화재(사적 제6호)로 지정됐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상상도. 탑이 세워졌을 7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나무로 지어진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로 추정된다.
  황룡사 유적은 1976년부터 발굴 조사 중이다. 지금도 조사 중이고, 언제 조사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이 터에서 금동불, 풍탁(처마 끝에 매다는 장식물), 금동 귀고리, 유리 등 유물 5만여 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왕경2팀의 김성현(金成顯)씨는 “1970년대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고, 지금도 부분적인 보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황룡사가 불타고 이후 이곳에 사람이 산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사람이 살면 유구(遺構)가 교란이 되지요. 유구는 옛 건축물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잔존물을 말합니다.”
 
  ― ‘교란’이란 단어가 학술용어로 쓰이네요.
 
  “네. 교란이 되면 연구 진척이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관련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늦어져요.”
 
 
  경주의 미래 먹거리는…
 
주낙영 경주시장.
  《삼국유사》에 실린 〈찰주기(刹柱記)〉에 의하면, ‘철반(鐵盤·철제 노반)부 이상의 높이 32척(약 9.7m), 그 이하로 183척(약 55m), 자장(慈藏)이 당(唐)의 오대산(五臺山) 절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알을 기둥(心柱로 추정) 속, 통도사의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탑에 안치했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는 225척(약 74m)이나 된다.
 
  그러나 황룡사가 불탄 뒤 이곳에 사람이 산 흔적도 있고, 일대가 밭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이 변해버린 유적에 거대한 9층 탑지와 금당지(金堂址)만이 대초석을 지상에 남겨놓았다.
 
  고백하자면, 기자는 이 황룡사터 어느 곳이 불탄 자리인지 몰랐다. 군데군데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었고, 그 주변에 몇몇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 뭔가에 골몰해 있었다. 허허벌판에 덩그렇게 세워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이튿날 아침 일찍 경주시청으로 향했다. 청사는 황성공원 근처에 있었다. 황성동(隍城洞)에서 발견된 제철 유적은 국내 최초로 발견된 유적이라고 한다. 청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영석(李泳錫) 경주 부시장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시간이 나면 잠시 들러달라는 것이었다. 안동이 고향인 이 부시장은 유독 경주와 인연이 깊다. 2006년 캄보디아에서 개최된 ‘앙코르·경주 세계문화엑스포’ 부단장을 맡아 경주와 첫 인연을 맺었고, 2014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 사무처장을 지냈다. 경주엑스포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국제행사다. 지난 1월 초 경주 부시장에 부임했다.
 
  “경주와 떼놓고 공직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엑스포 사무처장 때는 터키 이스탄불과 ‘터키 in 경주’라는 문화축제를 개최했을 정도로 경주의 문화자산을 세계적으로 알리려고 했지요.”
 
  ― 문화자산 외에 경주 미래 먹거리가 뭡니까.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만날 주낙영(朱洛榮) 시장이 말씀하시겠지만, 지속 가능한 신성장 산업을 육성하려 애쓰고 있어요. 경주시는 전기자동차·자율주행차에 관심이 많아요. 지난 3월 중국과 합작으로 600억원대 전기자동차 제조공장을 유치하려고 업무협약(MOU)을 맺었어요.”
 
  경주에는 제조업 중 자동차 부품 관련 기업이 66%나 된다. 주변에 울산·포항 등 항만도시가 있어 자동차 산업 생태변화에 적합하다.
 
  “아무래도 일자리입니다. 시정 방향도 좋은 일자리 창출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경주를 떠나지 않고 정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겠지요.”
 
 
  경주니까 안 된다?
 
김석기 국회의원(가운데)과 주낙영 경주시장이 경주 지역 행사에 참석해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주낙영 경주시장과 인터뷰 자리에 시청 왕경사업 간부들이 모두 배석해 무슨 대책회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 시장의 첫마디는 “어제 많이 돌아보셨대요?”였다. 기자의 동선(?)을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주 시장은 작심하듯 이렇게 말했다.
 
  “고고학 전공자인 문화재위원들은 ‘확실한 고증’ 없이는 복원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경주시는 빨리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요. 절충점을 찾아야 되겠지요.”
 
  ― 시장의 역할이 클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경주 국회의원인 김석기(金碩基) 의원이 ‘신라왕경특별법안’을 추진 중입니다. 여야 의원 181명이 공동 발의했어요. 일부 여당 의원들이 ‘신라왕경특별법’을 박근혜 대통령과 연결시켜 시비를 걸고 있지만 신라는 세계적인 문화적 자산이잖아요. 잘 풀리리라 믿어요.”
 
  ― 경주 유적의 발굴과 복원에 대한 시장의 기본 철학이 궁금합니다.
 
  “천년 고도니까 역사문화 도시의 정체성은 지켜나가야겠죠. 그런데 경주 시민들이 고통을 많이 받으니까, 보존 지역과 개발 지역을 확실히 구분해 개발 지역은 규제를 풀어 경제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보존에 묶여 지역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 안 되잖아요.
 
  경주 시내 쪽샘지구(경주시 황오·황남·인왕동 일대 고분군)에서 유적이 발굴돼 인근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집은 다 뜯어놓았는데 아직도 황량하게 (비닐로 덮여) 있어요. 도심에 그냥 둬서 되겠어요? 빨리 조사해나가되, 발굴이 끝난 지역부터 복원해야지요.
 
  그래야 외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와, 1400~1500년 전 경주가 저렇게 화려했구나’ 할 텐데, 말로만 설명하니 무덤밖에 없는 거야….”
 
  주 시장은 유네스코(세계유산센터)가 경주만 까다롭게 대한다고 했다.
 
  “말로 ‘경주 문화가 최고’라고 하기보다 대표적 유적을 몇 군데 복원하면 더 설득력이 있잖아요. 팔 걷어붙이고 해보려는데, ‘경주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서울 종로를 재개발하면서 옛날 유구들이 많이 발견됐잖아요. 유구를 1층에 전시하고 그 위로 건축물을 올리면서 보존과 개발을 병행할 수 있어요. 경주도 그런 방식으로 추진하겠다고 하니 ‘경주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손혜원 의원이 ‘경주특별법’ 발목 잡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주 오사카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지낸 경주 출신의 김석기 의원(자유한국당)은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한 상태다. 여야 의원 181명이 공동 발의했다.
 
  특별법안의 주요 내용은 ▲신라 핵심유적 복원·정비를 위한 종합계획 및 시행계획 수립·시행 ▲문화재청에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추진단 설치 ▲정부와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 명시 등이다. 정치적 이유로 추진 사업이 미뤄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2017년 5월 발의한 이 법안의 처리가 지금까지 정체된 이유는 뜻밖에도 무소속 손혜원 의원 때문이란다. 김 의원의 말이다.
 
  “경주특별법이 통과하지 못한 데는 손혜원 의원의 반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법안 발의에 동의한 국회의원 181명 중에 손 의원이 포함돼 있어요.”
 
  지난해 9월 11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손 의원은 “이것 솔직하게 박근혜 대통령이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예산 만들어 경주를 뒤집어엎어 새롭게 유적을 복원해서 만들겠다는 게 경주에 하려고 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 손 의원은 전남 목포 근대문화유산거리 투기 의혹이 불거져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빠진 상태다. 특별법의 걸림돌이 사라진 셈이다.
 
  “일본 나라시의 헤이조궁은 100% 고증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실제 모습과 가장 가까운 원형 형태의 모델을 선정해 복원을 완료했어요. 그랬더니 2001년 17만명이던 관광객 수가 2017년에 157만명으로 늘었습니다. 저는 경주의 외국인 관광객을 지금보다도 10배 이상 많이 유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경주에서 1~2시간 내에 위치한 대구·김해·포항·울산 공항 등 4개 공항 인프라를 활용하는 방안이나, 경주 인근 공항에 직항 국제노선을 만들고 인천공항과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요. 또 경주와 1000년 고도인 교토를 묶어 관광상품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경주를 본 후 교토를 볼 수 있고, 반대로 교토를 본 사람들이 경주를 볼 수 있는 관광상품을 개발할 계획입니다.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교토의 연간 관광객 수가 7000만명이고, 경주는 연간 2000만명에 육박하니까요. 시너지 효과가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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