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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역사

역사 속 일본 천황(天皇) 이야기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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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皇이라는 호칭은 道敎의 ‘天皇大帝’에서 유래… 日本이라는 국호와 함께 7세기 말부터 사용
⊙ 14세기 고다이고 천황 이후 60년간 南北朝 분열… 現 천황가는 北朝 계통이면서 南朝를 정통으로 삼아
⊙ 무로마치 막부 시절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돈이 없어 즉위식도 못 올려
⊙ 메이지유신 初만 해도 “천황이 쇼군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가 누구일까?”라고 할 정도로 존재감 없어
⊙ 제2차 세계대전 후 나고야의 잡화상, 고다이고 천황의 후손으로 진짜 천황이라고 주장하며 천황부적격확인소송 제기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지난 3월 12일 고쿄(皇居) 내 규추산덴(宮中三殿)에서 한 달 반 동안 진행되는 퇴위 의식을 시작했다. 규추산덴은 일본 황실의 선조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셔놓은 곳이다. 사진=뉴시스/AP
  지난 4월 1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官房)장관이 5월 1일에 즉위하는 나루히토(德仁) 새 천황(天皇·덴노)의 연호(年號·일본에서는 ‘元號’라고 함)를 발표했다. 새 연호는 ‘레이와(令和)’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오는 12월에 만 86세가 되는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지난 2016년 8월 고령(高齡)을 이유로 퇴위(退位)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에서 천황이 생전에 퇴위하는 것은 202년 전 제119대 고카쿠(光格·재위 1779~1817) 천황 이후 없었던 일이라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에 과중한 일들을 해야 하는[그것이 의례적(儀禮的)인 일이라고 해도] 천황의 호소가 역시 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결국 2017년 6월 일본 참의원(상원)은 ‘천황의 퇴위 등에 대한 황실전범(皇室典範) 특례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2017년 12월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 천황이 2019년 4월 30일 퇴위한다”고 발표했다.
 
  나루히토 새 천황은 제126대 천황이다. 일본인들은 태양신(太陽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예로 기원전 660년 즉위했다고 하는 초대(初代) 진무(神武) 천황 이래 2679년 동안 단 한 번도 왕조 교체 없이 하나의 왕조가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메이지(明治) 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 언론에서는 천황을 ‘일왕(日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인들의 천황제에 대해 품고 있는 이런 특별한 감정을 모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679년 동안 단 한 번의 왕조 교체도 없이 한 핏줄로 임금의 자리가 이어져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일본 학자들도 고대(古代)에 적어도 두세 번의 왕조 교체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大惡천황’ 雄略
 
  사서(史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본 지역의 군주는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나타나는 야마타이(邪馬台)국의 히미코(卑彌呼)라는 여왕이다. 야마타이국은 규슈(九州) 혹은 기나이[畿內·나라(奈良)]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히미코는 239년 위 명제(明帝)에게 조공(朝貢)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히미코는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조에도 등장한다.
 
  150년 후 《송서(宋書)》 ‘왜국전’에 다시 왜왕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가 그들이다. 이들 중 무는 478년 송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사지절·도독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辰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으로 제수(除授)됐다. 이런 칭호는 무가 스스로 요청한 것인데, 마치 왜가 신라·백제·가야 등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왜왕 무는 제21대 유랴쿠(雄略·재위 456~479) 천황으로 추정된다. 유랴쿠 천황의 이름은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 등에 오하쓰세-와카타케루-미코토(大長谷-若建-命/大泊瀬-幼武-尊)로 기록되어 있다. 1873년 구마모토(雄本), 1968년 사이타마(埼玉)에서 ‘와카타케루(獲加多支鹵) 대왕(大王)’이라고 새겨진 철검(鐵劍)이 발견되면서 그가 실존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유랴쿠 천황은 왕권을 강화하고, 한반도에서 백제를 도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南下)정책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대에 야마토 국가는 종래의 부족연맹체에서 벗어나 고대(古代)국가를 향해 전진했다. 임금의 호칭도 ‘왕(王·기미)’에서 ‘대왕(大王·오기미)’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으로 격상됐다. 그의 왕권강화 정책은 다른 지방 세력의 반발을 샀다. 그 때문에 그는 역사에 ‘다이아쿠(大悪) 천황’으로 기록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천황이라는 호칭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사이메이 천황은 의자왕의 여동생?
 
덴지 천황.
  《일본서기》에 의하면, 5세기 제25대 부레쓰(武烈·재위 498~506) 천황이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자 신하들이 제15대 오진(應神·재위 200~310. 재위기간이 110년이나 된다!) 천황의 5대손을 천황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가 제26대 게이타이(繼體·재위 507~531) 천황이다. 역사학자들은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를 새로운 왕조의 성립으로 간주한다. 지금의 일본 황실은 게이타이 천황의 후예라는 것이다.
 
  6세기 말 일본은 친(親)백제-친불교 노선을 주장하는 소가(蘇我) 씨와 그에 반대하는 모노노베(物部) 씨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모노노베 씨를 숙청하고 권력을 잡은 소가 씨는 황실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제34대 조메이(舒明·재위 629~641) 천황의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는 645년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씨를 멸망시켰다. 나카노오에는 어머니인 고교쿠(皇極·재위 642~645) 천황 면전에서 소가 씨의 핵심 인물인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斬殺)해버렸다. 충격을 받은 고교쿠 천황은 퇴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당연히 나카노오에가 계승해야 했으나, 그는 황위를 사양했다. 결국 고교쿠의 동생 고토쿠(孝德·재위 645~654) 천황이 즉위했다.
 
  실권자인 나카노오에는 다이카(大化)라는 일본 최초의 연호를 제정하고, 관제를 개혁하는 등 중국식 율령(律令)국가체제를 도입했다. 고토쿠 천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고토쿠 천황은 기성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중국 및 한반도와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아스카(飛鳥)에서 항구도시인 나니와(難波·오사카 중심부)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천도(遷都)한 지 6년 만에 나카노오에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고토쿠 천황만 남겨놓고 아스카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고토쿠 천황의 황후마저 나카노오에와 눈이 맞아 남편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녀는 나카노오에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고토쿠 천황은 화병으로 죽었다.
 
  숙부의 아내이자 누이동생과의 사련(邪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나카노오에는 자기가 즉위하는 대신 어머니인 고교쿠 천황을 다시 한 번 천황으로 앉혔다. 제37대 사이메이(濟明·655~661) 천황이다.
 
  사이메이 천황은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멸망하자,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병(派兵)을 결정했다. 사이메이 천황은 직접 규슈까지 가서 파병 작업을 지휘하다가 661년 사망했다. 국내 일각에서는 사이메이 천황이 원병(援兵) 파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백제 의자왕의 누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수양대군’ 덴무 천황
 
‘일본의 수양대군’ 덴무 천황.
  나카노오에 황자는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한반도로 출병했으나, 663년 백강(白江)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백제 유민(遺民)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 서부 해안의 요충지에 성곽을 세우는 등 방위태세를 정비했다. 사이메이 천황이 죽은 지 7년이 지나서야 나카노오에 황자는 덴지(天智·668~671·제38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덴지 천황의 사업을 도운 이는 동생 오아마(大海人) 황자였다. 덴지 천황은 오아마를 황태제(皇太弟)로 세우고, 두 딸을 주었다. 누가 봐도 다음 천황은 오아마였다.
 
  그런데 덴지 천황은 말년에 오토모(大友)라는 아들을 얻었다. 병약하지만 영특한 아들이었다. 덴지 천황은 태정대신(太政大臣)이라는 관직을 신설, 어린 오토모를 그 자리에 앉혔다. 후계자 수업이었다. 덴지는 동생 오아마와 중신들에게 오토모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다. 형의 뜻이 조카에게 있다는 걸 안 오아마는 출가(出家)하겠다고 선언한 후 요시노(吉野·나라)로 가 은둔했다. 덴지 천황은 안심했지만,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호랑이를 풀어준 것”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아마는 형 덴지 천황이 죽기 무섭게 반란을 일으켰다[임신(壬申)의 난]. 패배한 오토모 황자는 672년 자결했다.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고분(弘文·제39대) 천황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오아마가 등극하니, 그가 제40대 덴무(天武·재위 673~686) 천황이다. 일본 고대판 수양대군과 단종이었다.
 
  덴무 천황은 백제 멸망 후 적대관계던 신라 및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호족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입시켰다. 686년 덴무 천황이 죽은 후, 그의 황후가 지토(持統·690~697) 천황으로 즉위해 덴무의 사업을 계승했다.
 
 
 
日本과 天皇의 등장

 
  덴지-덴무-지토로 이어지는 이 시기가 바로 일본 고대 율령국가의 완성기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와 천황이라는 칭호가 확립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이미 607년 호류지(法隆寺) ‘금동약사불조상기(造像記)’에 등장하지만, 확실히 입증된 것은 668년의 후나노 오고의 묘지(墓誌)라고 한다. 이때가 덴지 천황 때였다. 이때만 해도 궁정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천황이라는 칭호는, 덴무-지토 천황 대에 이르면 확실하게 정착된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중국 도교(道敎)에서 최고의 신(神)으로 여겼던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나온 것으로, 당(唐)에 유학한 이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천황을 지금처럼 ‘덴노’라고 하지 않고 ‘스메라미코토(皇尊天皇)’라고 했다.
 
  일본의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680~720)와 《고사기》(712)가 편찬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면서 고대의 황실계보가 1차로 정리됐다. 그러다 보니 제6대 고안(孝安·재위 BC 392~291) 천황이나 제12대 게이코(景行·BC 71~AD 130) 천황처럼 100년 넘게 즉위한 천황들이 있는가 하면 제2대 스이제이(綏靖·재위 BC 581~549)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開化·BC 158~98) 천황처럼 사서에 이름과 재위 연도만 나오고 구체적 행적은 보이지 않는 천황들도 있다.
 
  이번에 레이와라는 연호의 출전(出典)이 된 《만요슈》가 편찬된 것도 이 시기(7세기 후반~8세기 후반)였다. 여기에는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시가(詩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천황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에 천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
 
  황권(皇權)이 약화된 것은 후지와라(藤原) 씨의 외척 세도 때문이었다. 제57대 세이와(淸和·재위 858~876) 천황 시절인 866년, 천황의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섭정(攝政·어린 천황을 대신해서 국사를 총괄하는 직책)이 됐다. 이때부터 후지와라 씨는 섭정 또는 관백(關白·성인이 된 천황을 대신해서 국사를 총괄하는 직책)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는 이후 11세기 말까지 150년 이상 계속됐다. 조선 말 안동 김씨-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생각하면 된다. 이들의 세도정치 기간은 60여 년에 불과했다.
 
  후지와라 씨는 황실과 겹겹이 혼인하는 한편, 어린 천황을 즉위시켰다가 청년기에 들어서면 퇴위시키고 다른 어린 천황을 즉위시키기도 했다. 후지와라 씨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술수를 쓰기도 했다.
 
  984년 즉위한 가잔(花山) 천황은 1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총명하여 국정에 의욕을 보였다. 후지와라 씨의 입장에서는 성가신 일이었다. 그런데 가잔 천황이 즉위한 지 2년 후 그가 사랑하는 황후가 죽었다. 비탄에 잠긴 천황을 후지와라 씨의 미치가네(道兼)가 함께 출가하자고 유혹했다. 미치가네는 망설이는 천황을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의 가잔지(花山寺)로 데리고 갔다. 천황이 삭발하는 동안, 미치가네는 궁궐로 돌아왔다. 가잔 천황은 뒤늦게 속임수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후지와라 일족은 가잔 천황의 네 살짜리 어린 동생을 천황[제66대 이치조(一條)]으로 즉위시켰다.
 
  후지와라 세도정치의 전성기던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966~ 1028)는 “이 세상을 내 것이라 여기면 그믐달도 기울지 않는 법”이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리미치(賴通) 대에 이르러 이 집안 출신의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는 1067년 끝나버리고 말았다.
 
 
 
퇴위한 천황의 막후통치-上皇과 法皇

 
上皇·法皇으로 물러나 院政을 행한 시라카와 천황.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가 끝날 무렵 천황은 제71대 고산조(後三條·재위 1068~1072) 천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후지와라가 출신이 아니었다. 외척 세도에서 벗어난 그는 황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시라카와(白河·재위 1072~1086) 천황(제72대)은 원정(院政)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시라카와 천황은 1086년 갑자기 여덟 살 된 아들 호리카와(堀河·재위 1086~1107) 천황에게 양위(讓位)하고 상황(上皇)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다고 정치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상황의 거처인 시라카와원(院)에 비서기관인 원청(院廳)을 두고 원선(院宣)이라는 명령을 내려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재벌기업 창업주들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아들인 현직 회장을 제쳐두고 그룹을 이끌면서 ‘왕(王)회장’ 소리를 듣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시라카와 상황은 제73대 호리카와 천황부터 제75대 스토쿠(崇德·재위 1123~1141) 천황에 이르기까지 3대 43년 동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후일 출가해 법황(法皇)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권력은 놓지 않았다. 그는 비 때문에 사찰 낙성식이 세 번이나 연기되자 빗물을 그릇에 담아 하옥(下獄)시키기도 했다.
 
 
  사무라이의 등장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고 했다.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원정을 지탱하는 힘으로 무사집단을 끌어들였다.
 
  무사집단은 원래 귀족들의 장원(莊園)을 관리·경비하는 사병(私兵)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천황가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가들을 지도자로 옹립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간무(桓武) 천황의 후예라는 다이라(平·헤이) 씨와 세이와 천황의 후예라는 미나모토(源·겐) 씨가 특히 유명했다. 9세기 후반 이후 정쟁(政爭)이 치열해지자 교토(京都)의 귀족들은 이들을 불러들여 경호를 맡겼다. 이들을 ‘사무라이(侍)’라고 불렀는데, ‘귀족 주위에 대기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늬만 은퇴’ 식으로 물러난 후 공식적인 제도정치의 밖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는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러난 상황·법황과 천황 간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메이지유신 이후 황실전범을 제정하면서 천황의 생전 퇴위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는 이번에만 적용하는 특례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결국 이런 모순은 도바(鳥羽·재위 1107~1123) 법황 사후(死後) ‘호겐(保元)의 난’(1156)으로 폭발했다.
 
  원인은 도바 법황이 아들 스토쿠 천황을 냉대한 데서 비롯됐다. 도바 법황은 장남인 스토쿠 천황을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황후와 아버지 시라카와 법황이 간통해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도바 법황은 스토쿠 천황에게 퇴위를 강요한 후, 스토쿠의 동생인 고시라카와(後白河·재위 1155~1158) 천황 계통으로 황위를 계승하려 했다. 결국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의 무사집단을 경쟁적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이 승리했다.
 
  하지만 ‘호겐의 난’을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확인한 무사들은 이제 더 이상 천황이나 귀족들의 도구로 쓰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막부 군사정권의 출현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
  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섰던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義)는 1179년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는 쿠데타를 감행, 정권을 잡았다. 다이라 기요모리는 “다이라 씨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혈연(血緣)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 부귀영화를 독점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기반이었던 무사집단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은 소홀히 했다.
 
  민심, 아니 무사집단의 마음이 다이라 씨를 떠나기 시작하자, ‘호겐의 난’에서 패한 후 절치부심하던 미나모토 씨가 봉기했다.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벌인 전쟁을 ‘겐페이(源平) 전쟁’이라고 한다.
 
  다이라 씨는 1185년 시모노세키(馬關) 앞 단노우라(壇ノ浦) 해전에서 패해 멸망했다. 다이라 기요모리의 아내인 니이노아마(二位尼)는 외손자인 안토쿠(安德·재위 1180~1185) 천황(제81대)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때 천황을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청동 거울, 청동 칼, 곡옥)도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3종 신기는 후일 다시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고 하지만, 믿기 어려운 얘기다. 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 근처에 있는 아카마(赤間) 신궁은 안도쿠 천황을 기리는 신사다.
 
  다이라 씨는 간사이(關西) 지방, 미나모토 씨는 간토(關東) 지방을 대표하는 무사집단이었다.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처럼 일본에서는 간사이 지방과 간토 지방 간 지역감정이 만만치 않다. 후일 오사카를 기반으로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이라 씨의 후예를, 에도 지방을 기반으로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처했다.
 
  1189년까지 일본 열도 내의 반대세력들을 진압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는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타이쇼군·약칭 ‘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바쿠후)를 개설했다. 이후 메이지유신 때까지 676년간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다이고 천황과 南北朝시대
 
막부에 저항하다 南朝를 연 고다이고 천황.
  제96대 고다이고(後醍醐·재위 1318~1339) 천황은 즉위 초부터 여러 차례 막부 타도 음모를 꾸몄다. 그는 막부에 체포되어 이키섬·시마네(島根) 등으로 유배됐지만, 틈만 나면 재기를 노렸다. 여기에 호응한 사람이 가와치(河內·오사카)의 악당(惡黨·막부에 복종하지 않는 지방의 신흥 무사세력) 구스노기 마사시게(楠木正成·?~1336)였다.
 
고다이고 천황을 돕다 전사한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에도시대 이후 충신으로 재조명됐다.
  1333년 막부의 장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1358)가 고다이고 천황의 밀지(密旨)를 받고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막부 타도의 오랜 꿈을 이룬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겐무(建武)로 바꾸고 친정(親政)에 나섰다. 하지만 고대 천황 중심의 통치체제를 복원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미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았다. 그는 무사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이 틈을 타서 야심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서 싸웠지만 전사(戰死)했다. 그는 후일 에도시대 이후 ‘천황을 위해 죽은 충신(忠臣) 중의 충신’으로 추앙받으면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교토를 점령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光明)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탈출해 자신이 정통 천황이라고 주장했다. 막부가 옹립한 황실을 북조(北朝), 고다이고 천황 이후 이어진 황실을 남조(南朝)라고 한다. 60년 가까이 이어진 남북조의 대립은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이 무로마치 막부의 중재 아래 북조의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에게 3종 신기를 넘기고 양위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남북조시대라고는 하지만, 남조는 지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잇던 망명정권에 불과했다. 무로마치 막부에 얹혀 지내기는 했지만 수도 교토를 지킨 북조의 천황이 정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황실도 북조의 후예이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정권 시대를 싸잡아 ‘적폐(積弊)’로 몰면서 천황의 계보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1911년 국회에서 제기됐다. 결국 고묘 천황부터 고엔유(後圓融) 천황까지 4명의 북조 천황이 계보에서 퇴출(退出)되고, 대신 고무라카미(後村上) 천황과 조케이(長慶) 천황 등 두 사람의 남조 천황이 계보에 들어오게 됐다. 현재의 천황 계보는 이러한 남조 정통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가난한 천황들
 
  무로마치 막부는 1467~1477년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내전인 ‘오닌(應仁)의 난’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이후 일본에서는 100년 가까이 지방 군벌(軍閥)들이 할거하는 전국(戰國)시대가 펼쳐졌다.
 
  막부정권과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천황의 삶은 고달파졌다. 15세기 중엽부터 120여 년 동안은 신상제(新嘗祭·추수감사제)를 올리지 못했다. 원래 천황은 고대부터 농경사회의 제사장(祭司長)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 직무 중 하나였다. 그걸 못 하게 된 것이다. 교황이 돈이 없어서 120년 동안이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미사를 거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비견할 만한 일이다.
 
  제104대 고카시와바라(後柏原·재위 1500~1526) 천황은 아예 즉위식도 올리지 못했다. 천황은 막부에 손을 벌렸으나, ‘오닌의 난’ 이후 제 코가 석 자였던 무로마치 막부는 “즉위식 같은 거 올리거나 말거나 마찬가지니, 그냥 넘어가라”고 면박을 줬다.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즉위 22년이 되어서야 한 사찰의 도움으로 뒤늦은 즉위식을 올릴 수 있었다. 휘호나 그림을 내다 팔아 연명한 천황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던 형편은 전국시대 말이 되면서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천하의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기 시작한 다이묘(大名·영주)들이 자신을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천황의 조정으로부터 명목상의 관작(官爵)을 구하게 된 것이다. 천황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다이묘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 1583)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의 옛 영지를 회복시켜주고 거기에 더해 새 영지를 바쳤다. 그 대가로 오다 노부나가는 우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태정대신 등의 벼슬을 받았다.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러 막부는 천황에게 연간 3만 석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입이 230만 석, 사쓰마번이 77만 석, 센다이번이 62만 석이었다. 10만 석 이상은 되어야 다이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3만 석이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내대신(內大臣)·우대신·태정대신·정이대장군 같은 벼슬을 내렸다.
 
 
  고코묘 천황, 아버지 문병도 못 해
 
  그렇다고 해서 천황의 정치 권력이 부활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공생(共生)을 도모하던 제107대 고요제이(後陽成·1586~1611)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의 패권을 잡은 후 양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요제이 천황은 12년 후에야 퇴위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알량한 원조의 대가로 천황 및 교토 조정의 공가(公家·귀족)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대표적인 것이 1615년 제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라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 제1조에서는 “천자의 예능은 첫째가 학문이다”라고 선언했다. 딴마음 먹지 말고 고전이나 열심히 읽으면서 조상 제사나 잘 받들라는 얘기였다. 이에 따라 막부는 1687년에는 대상제(大嘗祭·천황 즉위 시 신에 햇곡식을 바치는 의식), 1740년에는 신상제를 부활시켜줬다.
 
  다른 한편으로 막부는 교토에 쇼시다이(所司代)라는 기구를 두어 황실과 귀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예컨대 제110대 고코묘(後光明·재위 1643~1654) 천황은 아버지인 고미즈노 상황의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막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아래서도 에도시대 중기 이후 물밑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황의 위상에 대한 이념적 탐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국학(國學)과 미토(水戶)학, 주자학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이야말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라고 하는 ‘천황숭배론’에 기반을 둔 국수주의(國粹主義) 사상을 발전시키는가 하면, “쇼군의 통치권은 천황이 위임한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막부 권력의 정통성의 근거를 천황에게서 찾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은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다. 천하가 태평하고 막부 권력이 강할 때에는 막부에 정통성을 부여해주지만, 막부가 천황에게서 위임받은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천하가 어지러워질 경우에는 그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는 논리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開國 이후 천황의 정치적 가치 급상승
 
병적인 양이주의자였던 고메이 천황.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1853년 6월,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양함대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개국 통상을 요구한 것이다. 막부의 다이로(大老·총리)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19~1857)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아 이 사실을 교토의 천황에게 상주(上奏)하는 한편, 널리 다이묘들의 의견을 구했다. 요즘 말로 하면 소통(疏通)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천황과 다이묘들의 정치 참여를 철저하게 봉쇄해왔던 막부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막부의 취약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조슈(長州)·사쓰마(薩摩)·도사(土佐)·히젠(肥前) 등지에서 올라온 존왕양이파 지사(志士)들이 교토로 몰려들었다. 천황의 정치적 주가(株價)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황은 제121대 고메이(孝明·1846~1866) 천황이었다. 병적(病的)인 양이론자던 그는 막부에 기회만 있으면 조약을 폐기하고 서양 오랑캐들을 축출하라고 촉구했다. 존왕양이파는 “천황의 뜻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지 못하는 정이대장군이라면, 차라리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압박했다. 종전의 대정위임론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고메이 천황은 ‘존왕양이’ 가운데 ‘양이’에만 관심이 있었다. ‘존왕’은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자는 주장인데, 고메이 천황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설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막부와 공생하기를 바라는 보신주의자였다.
 
  이때 이미 많은 유신 지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새 정권을 세워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자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고메이 천황은 역사의 걸림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고메이 천황이 덜컥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고메이 천황이 죽은 직후부터 독살설(毒殺說) 등이 끊이지 않았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이런 음모설을 믿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상 가운데 하나로 ‘고메이 천황을 암살한 죄’를 꼽았다.
 
  비록 피동적이기는 했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고메이 천황의 재위 중에 천황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메이지(明治·1867~1912) 천황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東武 천황
 
코소네가 그린 메이지 천황 초상.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는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메이지 천황은 다음 해인 1868년 3월 13일 공경(귀족)과 다이묘들을 거느리고 교토 황궁 안에 있는 자신전(紫宸殿)으로 나아가 신(神)에 제사를 지냈다.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1837~1891)가 ‘5개조 서약문’을 읽었다. 메이지유신의 시작이었다.
 
  사쓰마와 조슈가 중심이 된 신정부는 서양 열강의 사절들에게 유신을 ‘왕정복고(王政復古·restoration)’라고 설명했다. 천황이 막부로부터 통치권을 환수해서 친정에 나섰다는 의미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은 천황과 쇼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이중권력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타이쿤(Tykoon·大君에서 유래)’으로 알려진 쇼군을 일본 국왕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고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조선도 비슷했다. 천황이라는 제사장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에도의 쇼군을 ‘일본 국왕’ 혹은 ‘일본 국주(國主)’로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한때 남북조시대처럼 두 천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삿초(사쓰마-조슈)가 주도하는 신정부에 반발하는 도호쿠(東北) 지방의 여러 번이 오우에쓰열번동맹(奧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하고 출가한 황족인 린노지노미야(輪王寺宮)를 도부(東武) 천황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는 도후쿠 지방의 반란이 평정된 후 한동안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황족 신분을 회복했다. 그는 1895년 근위사단장으로 타이완(臺灣)으로 출정했다가 병사(病死)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를 접수한 후 1868년 7월 도쿄(東京)로 개칭했다. 글자 그대로 ‘동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메이지 천황은 그해 10~12월 도쿄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한다는 명분으로 순행(巡幸)했다가 교토로 돌아왔다. 교토 주민들은 천황이 도쿄로 천도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긴장했다. 정부는 천도는 없다고 다짐했다. 1869년 2월 메이지 천황은 다시 도쿄로 순행했다. 그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도 함께 도쿄로 이전했다. 공식적인 선언 없이 슬그머니 이루어진 천도였다. 정부는 교토 사람들의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지역개발자금을 풀었다. 교세라를 비롯한 교토의 많은 기업들은 그때 생겨난 회사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神이 된 천황
 
  에도시대 내내 천황은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막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전혀 새로운 군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우선 그때까지 자기가 속해 있는 번을 나라(國·쿠니)로, 번주를 임금으로 알아 온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1876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가 일으킨 서남(西南·세이난)전쟁 때만 해도 시골 아낙들은 “천황이 쇼군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가 누구일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천황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천황은 일본 곳곳을 여러 차례 순행했다. 천황이 순행에 나서기 전,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천황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천황이 지나간 후, 백성들은 천황이 밟고 간 길의 흙이나 자갈을 가져가 집 안에 고이 모셨다. 뭔가 영험한 신물(神物)인 것처럼….
 
  메이지 천황의 모습도 널리 알려야 했다. 하지만 메이지 천황은 사진 찍는 걸 싫어했다. 일본 정부는 1875년 이탈리아인 조폐기술자 에도아르도 코소네에게 의뢰해 메이지 천황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연륜과 위엄이 묻어나는 코소네의 초상화에 천황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 초상은 진영(眞影)이라 해서 각급 부대와 학교에 배포되었다. 해당 기관에서는 봉안전(奉安殿)이라는 시설을 지어 천황의 진영을 모셨다. 불이 났을 때 봉안전에서 천황의 진영을 구해내고 순직한 교장은 국가적 영웅이 됐다.
 
  천황의 신격화(神格化)는 종교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종래의 신토(神道)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신토가 됐다. 천황은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떠받들어졌다.
 
  에도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강건한 ‘군인왕(軍人王)’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육·해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서양식 군복 차림을 하고 군대를 열병하곤 했다.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元兇)이지만, 메이지 천황은 성실한 군주였다. 즉위했을 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군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自覺)하고,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신하들에게 국정을 위임했지만,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 논쟁 등 중요한 고비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다. 신하들도 천황이 결정을 내리면 군말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천황은 검소하고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메이지유신 초기만 해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일본은,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 세계 7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섰다. 메이지 천황이 죽은 후 일본인들은 그를 ‘대제(大帝)’라고 추앙했다. 반면에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나 3년 먼저 즉위한 조선의 고종(高宗)은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그의 번신(藩臣)이 되어 있었다.
 
  메이지시대 이전에는 한 천황의 치세 동안에도 천재지변이 있거나 국정을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연호를 바꾸었다. 메이지 천황 때부터는 한 천황의 치세 동안에는 하나의 연호만 사용한다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이 확립됐다. 이때부터 연호를 가지고 천황을 호칭하는 관례가 성립했다.
 
 
  다이쇼 천황의 奇行
 
  메이지 천황의 뒤를 이은 다이쇼(大正·1912~1926) 천황은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었다. 생후 3개월 무렵 앓은 뇌막염의 후유증이었다. 1915년 국회 개원식에 참석했을 때에는 개회사를 적은 종이를 둥글게 말아 망원경처럼 눈에 대고 단상 아래 의원들을 내려다보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1922년부터 황태자 히로히토(裕仁)가 섭정을 맡아 사실상 국사를 처결하게 됐다. 측실(側室) 태생인 그는 즉위 후, 후궁제도를 폐지했다. 다이쇼 천황의 치세는 ‘다이쇼데모크라시’라고 해서 일본이 의회민주주의와 국제평화주의에 근접한 시기였다.
 
  다이쇼 천황이 1926년 세상을 떠난 후 황태자 히로히토가 정식으로 즉위했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러일전쟁의 두 영웅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39~1912) 육군대장과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2) 해군 원수였다.
 
  히로히토는 황태자 시절인 1921년 유럽을 순방했다.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주영일본대사관 서기관으로 그의 수발을 든 사람이 후일 총리가 되어 전후(戰後) 부흥을 이끌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였다.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유럽 순방까지 하고 온데다가 일찍부터 섭정으로 국정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히로히토에 대한 기대는 컸다. 1926년 천황으로 즉위했을 때 그가 채택한 연호는 ‘쇼와(昭和)’였다. 쇼와라는 연호는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백성소명 협화만방(百姓昭明 協和萬邦·백성이 밝고 똑똑해져 만방을 화평하게 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731부대, 천황 칙령으로 설립
 
  한편 아름다운 연호와는 달리 쇼와 시대 첫 19년간은 전란(戰亂)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이 이어졌다.
 
  전후 일본 정부나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히로히토 천황은 군부(軍部)의 폭주에 휘둘린 로봇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의 추이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군부도 통제하고 있었다. 그는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때에는 이력과 장점과 약점을 들어 특정 육군사단의 배치 문제에까지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 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악명 높은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는 천황의 칙령으로 설립됐다. 한 황족은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의 저자 에드워드 베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황은 옥새를 찍기 전에 모든 문서를 반드시 다 읽습니다. 옥새를 절대로 우편 스탬프처럼 찍지 않지요.”
 
  1936년 청년 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켜 중신들을 살상했을 때, 히로히토 천황은 진압을 망설이는 군 수뇌부에게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겠다”고 호령했다. 결국 쿠데타는 사흘 만에 진압됐다. 그는 1945년 8월에도 군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종전(終戰)의 성단(聖斷)’을 내렸다. 쿠데타를 진압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천황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 전 총리는 극동전범재판에서 “일본인 중 감히 어느 누구도 천황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천황은 여왕벌 같은 존재”
 
패전 후 駐日미국대사관에서 만난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황. 일본인들은 이 사진을 보고 패전을 실감했다.
  미국 상·하 양원은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국·호주·소련 등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 책임을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천황을 퇴위시킬 경우 게릴라전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100만명의 병력이 일본에 주둔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뿐이 아니었다. 주일대사를 지냈던 조셉 그루 국무차관은 일본과 전쟁 중이던 1944년 12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천황은 여왕벌과 같은 존재로서 일본 사회의 안정적 요소이다. 만일 벌떼로부터 여왕벌을 끄집어내 버린다면 그 벌집은 붕괴하고 만다”고 역설했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대사관으로 맥아더를 방문했다. 양복 정장 차림을 한 그를 맥아더는 근무복 차림으로 맞았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천황은 부동자세를 취한 반면 맥아더는 뒷호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불량한 포즈를 취했다. 이 사진을 보고 일본인들은 패전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이 이 자리에서 ‘국민이 전쟁을 수행할 때 정치·군사 모든 면에서 내렸던 결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전부 제가 지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공·사석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 책임을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패전을 앞두고 고노에(近衛·1891~ 1945) 전 총리는 천황제를 보존하기 위해 히로히토 천황을 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황태자 아키히토를 즉위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육군과 해군의 일부 군인은 점령군이 천황제를 폐지할 경우에 대비해서 황실의 소년 하나를 시골에 숨겨두고 보호하면서 양육하려는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 책임을 지지도, 퇴위하지도 않았다. 전쟁 책임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총리나 육군대신·외무대신 등을 지낸 이들에게만 돌아가고 말았다.
 
 
  “이젠 내가 좀 인간다워 보이오?”
 
  히로히토 천황은 1946년 1월 1일 〈인간선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짐(朕)과 너희 신민과의 사이의 유대는 시종(始終) 상호 신뢰와 경의에 의지하여 맺어진 것이지 단순히 신화나 전설에 의지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인신으로 삼고, 또한 일본 국민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졌다는 가공(架空)의 관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인간선언〉을 하고 난 후, 그는 황후에게 “뭐 좀 달라진 것이 있소? 이젠 내가 좀 인간다워 보이오?”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1947년 5월부터 시행된 현행 일본국헌법은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이 소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總意)에 기초한다”고 규정했다. 돌고 돌아서 가마쿠라 막부 시절 이후처럼 천황은 정치적 실권은 없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정치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황실이 1000년 넘게 존속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패전 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불경(不敬)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1946년 1월에는 나고야에서 잡화상을 하는 구마자와 히로미치(熊澤寬道)라는 사람이 자신이 제96대 고다이고 천황의 후손으로 진짜 천황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1951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천황부적격확인소송을 제기했으나 각하(却下)됐다. 1946년 5월 일본공산당이 조직한 식량획득인민대회에는 “짐은 배 터지게 먹고 있다. 너희 인민은 굶어 죽어라”라는 피켓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국민들은 점차 ‘상징천황’에 익숙해져 갔다. 전쟁 전에는 백마를 타고 군대를 사열하곤 했던 히로히토 천황은 젊은 시절부터의 도락(道樂)이던 해양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학자군주’의 이미지를 구축해나갔다. 1919년 그가 발견한 붉은 새우에는, 그를 기념해 ‘심파시페 임페리아리스(Sympathiphe Imperialis)’라는 학명(學名)이 붙었다. 평소 지방 순방을 할 때에도 “아, 그렇습니까?”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소련의 해양생물학자들과 만났을 때에는 서툰 라틴어까지 동원해가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TV시청도 좋아했는데, 가장 즐겨본 드라마는 〈오싱〉이었다고 한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그 시대 여성들의 고난이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미’라고 불린 천황
 
나루히토 새 천황은 외교관 출신 황후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사진=뉴시스/AP
  4월 30일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재위 1989~2019) 천황은 12세 때 패전을 맞았다. 전쟁 후 그의 교육을 맡은 사람은 미국 여성 엘리자베스 그레이 바이닝이었다. 바이닝은 절대평화주의를 강조하는 퀘이커교도였다. 바이닝은 아키히토를 ‘지미(Jimmy)’라는 애칭으로 불러, 보수적인 황실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아키히토는 1959년 4월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했다. 당시 언론은 ‘현대의 신데렐라’ ‘평민 출신 황태자비’ ‘세기의 로맨스’ ‘테니스코트에서 싹튼 사랑’이라며 법석을 떨었다. 말이 ‘평민’이지 쇼다 미치코는 닛신(日淸)제분이라는 일본 유수의 대기업 회장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미 궁내청 관리들의 간택을 거친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여튼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신(新)미일안보조약 문제로 어수선하던 사회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상징천황제’에 대한 국민들의 친근감을 제고(提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계기로 일본의 TV 보급률은 두 배로 늘었다.
 
  패전의 경험과 바이닝의 교육은 아키히토에게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아키히토 천황은 아베 정부가 추진해온 평화헌법 개정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새로 즉위하는 나루히토 천황은 1960년생이다. 그의 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황자를 외부 중신들에게 맡겨 기르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미국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먼의 《육아》 책을 보면서 그를 길렀다.
 
  전전(戰前) 황족들의 교육기관이던 가쿠슈인(學習院)의 후신(後身)인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했다. 1993년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와 결혼, 슬하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남자만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황실전범 개정을 고민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가 공표된 후 담화를 내고 “봄의 도래를 알리는 멋지게 핀 매화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의 희망과 함께 각각의 꽃을 크게 피울 수 있고, 그런 일본이 되기 바란다는 소원을 담아 결정했다”고 밝혔다. 전란으로 얼룩졌던 할아버지 히로히토 천황의 ‘쇼와’ 시대와는 달리 나루히토 새 천황의 시대에 그런 희망과 평화가 이웃나라들과 함께하는 시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여성 천황과 승려의 邪戀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 황실이지만, 황위가 다른 핏줄에게 넘어갈 뻔한 적도 있다. 제48대 쇼토쿠(稱德·재위 764~770) 천황은 여성이었다. 그는 도쿄(道鏡)는 중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도쿄는 커다란 남근(男根)의 소유자였고, 두 사람이 서로 정(情)을 통하는 사이였다는 설도 있었다. 쇼토쿠 천황은 도쿄에게 법황(法皇) 칭호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황위까지 넘겨주려 했다. 규슈의 우사하치만(宇佐八幡) 신궁에서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는 신탁(神託)이 있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황통이 바뀔 위기에 처하자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의 압박에 쇼토쿠 천황은 우사하치만 신궁으로 다시 칙사를 보냈다. 이번에는 “황실의 혈통이 아닌 자를 황위에 올려선 안 된다”는 신탁이 나왔다. 천황의 뜻에 반하는 신탁을 가져온 칙사는 귀양을 갔지만, 황통은 보존될 수 있었다. 도쿄는 제정(帝政)러시아의 괴승(怪僧) 라스푸틴에 비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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