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훈 출생지는 서울. 충남 당진에 내려와 傑作 남겨… 당진의 문화자산
⊙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전국 역사박물관서 심훈 유품 대여 쇄도
⊙ 소설 《상록수》 영향으로 당진에서 민간 주도 새마을운동 왕성
⊙ 《상록수》 주인공 모델 두고 논란… “심재영은 인자하신 방축골 아저씨”
⊙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전국 역사박물관서 심훈 유품 대여 쇄도
⊙ 소설 《상록수》 영향으로 당진에서 민간 주도 새마을운동 왕성
⊙ 《상록수》 주인공 모델 두고 논란… “심재영은 인자하신 방축골 아저씨”
- 전방위 예술가였던 심훈 선생.
심훈(沈熏·본명 沈大燮·1901~1936)의 소설 《상록수》 무대인 충남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와 한진리를 찾았다.
《상록수》를 집필했다는 ‘필경사(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07호)’. 볏짚 지붕은 밀짚처럼 보이고 심훈의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모던보이’ 심훈이, 《상록수》의 한 대목처럼 세수도 안 한 쑥방석 같은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아 필경(筆耕)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기자는 당진에 내려가기 몇 주 전에 심훈가(家) 종손인 심천보(沈天輔·79)씨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심훈문학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기자, 3·1운동 100주년인데 당진에 와보세요. 심훈 문학의 출발점이 바로 3·1절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경성고보 3학년이던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의 문학은 지금과 달랐을지 몰라요.”
― 심훈이 3·1운동에 참여한지도 몰랐네요.
“3·1운동 직후인 3월 5일 덕수궁 앞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니 단순 가담자가 아닌 주모자급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그때 감옥에서 쓴 편지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올린 글월〉입니다. 편지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詩)죠.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진 심훈의 첫 글이고, 서른여섯 살 짧은 생애를 지배하고 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기자는 심훈이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에 어머니에게 부쳤다는 〈감옥에서…〉를 읽었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고 주황빛의 벽돌 담은 화로 속에서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중략)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중략)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번 분이요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중략)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하략)’
심훈은 3월부터 11월까지 8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다. 만약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졸업장을 받았을 것이다.
경성고보 출신이니 식민 지배 엘리트의 산실인 경성제대에 진학했거나 어쩌면 조선총독부에 채용됐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록수》에도 〈감옥에서…〉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입을 통해서다.
“나는 물론 어머니가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의 딸이지만 어머니 한 분의 딸 노릇만은 헐 수가 없다우. 알아들으시겠수? 어머니 한 분한테 불효하지만, 내 딴에 수천 수만이나 되는 장래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일을 하려구 이 한 몸을 바쳤으니까요.”
〈감옥에서…〉는 심훈이 죽기 1년 전에 쓴 《상록수》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기자는 심천보 선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당진행을 약속했다.
심훈과 3·1운동
4년 전 기자는 심훈의 문학적 흔적을 더듬기 위해 심천보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이후 우리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가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 만난 일도 있다. 한번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액자를 기자에게 선물한 일이 있는데, ‘불요파 불요회(不要怕 不要悔·두려워 말고 후회하지도 마라)’라고 써 있었다.
2월 25일 오전 당진행 버스를 탔다. 서울강남터미널에서 1시간20분이 채 안 걸렸다.
당진의 하늘은 흐렸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몰라도 어둑했다. 《상록수》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펄펄 뛰어다니던 맹수가 별안간 철책 속에 갇힌 것 같다’고 할까. 퀭한 날씨였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심 선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진)시청에서 몇 분을 만나 심훈의 3·1운동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요.”
오래전부터 당진시는 심훈에게 공을 들여왔다. 출생지는 서울 흑석동이지만 당진에 내려와 여러 편의 걸작을 남긴 심훈은 당진의, 충남의 문화자산이 되었다.
또 당진은 《상록수》의 배경이자 소설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로 알려진 장조카 심재영(沈載英·1912~1995·심훈의 큰형인 심우섭의 장남)이 살던 곳이다. 심재영의 장남이 바로 심천보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 심재영은 일제강점기 경농(경성농업학교)을 나와 할아버지 심우섭(沈友燮·1890~1948)을 배경으로 서울에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착하고 여리셔서 ‘브나로드 운동’을 빌미로 당진에 오신 것입니다. 모두 시골서 서울 가기를 원하던 때 서울서 시골에 오셨으니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는 없지요. 여기는 그때 정말 ‘깡촌’이었습니다.”
심천보 선생의 차를 타고 당진시청을 찾았다. 5분여 만에 청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경제환경국장실로 올라갔다. 이해선 국장과 문화관광과 남광현 팀장, 장승률 학예연구사가 기자를 반겼다.
― 당진에 세워진 ‘심훈문학관’의 연혁이 궁금합니다.
이해선(이하 이): “당진시는 1993년 심훈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했어요. 하지만 다양한 업적과 활동을 담아내기에 협소하다고 생각해 2014년 총 25억원을 들여 ‘심훈기념관’을 세웠죠. 심훈기념관에는 《상록수》 육필원고 일부를 비롯해 심훈의 학교 성적표와 상장, 그가 즐겨 읽던 농업과 사회과학 서적 등 2780점이 전시·보관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심훈문학관으로 정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심훈이란 이름을 문학으로 한정해선 곤란하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심훈 사상의 저변에는 독립정신이 뿌리박혀 있거든요. 그래서 심훈기념관으로 정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심훈문학관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상록수》와 새마을운동
― 3·1운동이 심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남광현(이하 남): “3·1운동에 실패하고 심훈이 중국으로 떠났을 때 선생은 ‘왜 우리는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패배감, 조국을 잃은 슬픔이 많았던 것 같아요. 시 ‘북경의 걸인’을 보면, 거지를 불쌍해하다가도 ‘거지라도 행복하겠다. 너네는 조국이 있어서’라고 썼거든요.”
이: “전체적으로 작품 하나하나가 순수문학으로 보기에는….”
남: “참여시죠. ‘야구’라는 시를 보면 야구공이 일본놈들을 때려 부수는 도구로 사용됐죠.”
1929년에 쓴 ‘야구’의 4연은 ‘피처의 꽂아 넣는 스트라이크는 수척의 폭탄/ 배트로 갈겨 내친 히트는 수뢰의 포환’이라 표현되어 있다.
남: “조국이 강탈당했는데 순수시만 쓴다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닐까요? 순수문학 쪽에서는 참여시를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해요. 그런데 과연….”
― 카프(KAPF)문학 중에는 문학성이 떨어진 작품도 있죠.
남: “(순수문학을 하는 분들이) 자기 위안으로 하는 얘기겠죠.”
남 팀장은 이 대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답답한 게 《상록수》는 계몽소설이고, 당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밝혀낸 소설인데, 박정희 시절 새마을운동에 (소설이) 이용되다 보니 심훈을 보수적 이미지로 색칠한 부분을 벗겨내야 해요.”
기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여러 차례 취재한 적이 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발언을 하는 공무원은 처음이었다. 듣기에 따라 민감한 발언이었다. 심천보 선생이 말을 받았다.
“심훈 후손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 이후 20~30년에 걸쳐 한국 정신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농촌계몽운동과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과거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상록수》가 지난 100년 동안 발표된 우리나라 소설 중에서 한국의 정신문화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소설로 뽑힌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남 팀장은 잠시 후 이런 말도 했다.
“심훈을 자꾸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어요. 진보 쪽에서는 ‘그날이 오면’, 보수 쪽에서는 《상록수》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정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더군요.”
이념에 따라 심훈의 문학을 대하는 시선이 둘로 갈라진다는 그의 말이 안타까웠다.
― 심훈기념관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이: “매년 평균적으로 4만명이 찾아옵니다. 작년에는 4만982명이 찾아왔어요. 매년 조금씩 늘고 있어요. 현재 38번 국도에서 필경사로 이어지는 212번 농어촌도로인 한복선(한진리~복운리)을 확장하면 연말쯤 대형 관광버스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겁니다.”
장승률 학예사는 “당진시가 심훈을 알리는 데 올해가 좋은 본보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나 《상록수》는 알아도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한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교육청 등지에 심훈 유품이 대여 중이에요.
심훈은 저항시를 썼지만, 3·1운동에 직접 참여했기에 이번 3·1운동 100주년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3·1절을 계기로 전국에서 많은 이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100년 전 이런 엔터테이너가 있었다니…”
당진시청을 걸어 나오며 심천보 선생이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심훈기념관에 소장된 총 2780점의 기증·기탁된 유물 대부분이 우리 집(심재영 고택)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는 이 말을 더 보탰다.
“심훈의 장조카인 아버지(심재영)는 1936년 심훈이 돌아가시자 모든 유품을 거두어 보관해오셨지요. 당신은 삼촌 심훈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신 분이죠. 80년이 지난 지금 심훈의 유물이 전시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심천보 선생은 미국 피츠버그대학에 정착해 성공한 건축가로 46년을 살았다. 그 후 고향을 찾아 2011년 영구 귀국했다. 선생은 “당진을 심훈 문학의 고향으로 널리 알리는 일이 생(生)의 과업”이라고 했다.
― 심훈은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심훈의 장자는 10년 전 작고했고, 둘째와 셋째는 86세, 84세로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에 온다면 심훈 사업이 더 활기를 띠겠지요. 장남과 차남은 학창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큰집인 부곡리를 찾았죠. 삼남은 필경사가 있는 부곡리에서 함께 살았고요.”
시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면도로는 승용차가 빽빽이 주차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모든 간판이 건축 관련 회사들이었다. 당진에 건설 붐이 인 것일까.
이번에는 심훈을 기리는 행사를 솔선해서 주도해온 이들을 만났다.
심훈상록문화제집행위원회 이철수 집행위원장과 한기흥 전 위원장, 라동수 새마을금고당진시지부 회장, 김형환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 회장 등과 명함을 주고받았다. 심훈을 당진에 뿌리내리게 한 ‘전령사’들이었다. 조금 지나자 당진예총 임세광 지회장이 합석했다.
먼저 라동수 회장이 새마을운동 얘기부터 꺼냈다.
“당진 하면 새마을운동이에요. 봉사활동이 전국 일등이에요. 이장이나 새마을부녀회장 같은 분들이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전국 규모의 새마을상을 계속 탔어요. 이른바 《상록수》 정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해요.”
이철수 집행위원장은 당진시의원을 두 차례나 지냈다. 현재 당진시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그 역시 새마을운동 얘기를 먼저 했다.
“지자체마다 (새마을) 흔적을 지우려 해요. 각 구군청에 ‘새마을과’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고, 당진시도 과장 한 분이 새마을 업무를 맡고 있어요. 하지만 《상록수》 영향으로 새마을운동이 지금도 왕성해요. 한번 행사하면 700~800명씩 모입니다. 읍면동마다 새마을 지회장이 있는데, 근원을 따지면 심훈의 농촌계몽 활동이 모체가 아닐까요.”
작년까지 7년간 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를 이끌었던 한기흥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영농조합 법인 명칭이 ‘상록수 농산’이다. 한 전 위원장은 “심훈이 당진의 로컬문화로 확장되는 데 문화제가 일조했다”고 귀띔했다. 상록문화제는 당진시 14개 읍면동을 통합한 경연대회, 시민과 함께하는 노래자랑, 청소년들의 끼를 엿볼 수 있는 동아리 축제 같은 행사를 포함하고 있다.
“당진이 심훈 문학의 거점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심훈문학대상, 문학상 신인상, 당진문화예술상, 중앙대문학상, 어린이청소년상 등 문학상만 5개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중앙대문학상이 눈길을 끈다. 심훈이 태어난 서울 흑석동에 중앙대가 있다. 심훈과 중앙대가 당진에서 의기투합한 셈이다.
이날 저녁 기자는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방현석 중앙대 부총장(안성캠퍼스)을 만났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심훈을 이야기했다. 취기가 올라 그의 이야기를 다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이 말은 기억에 남았다.
방 부총장은 “21세기 종합예술가의 모델이 바로 심훈”이라고 말했다.
“심훈이 남긴 작품은 대중성과 예술성이 대립되지 않아요. 단순히 그의 문학이 일제에 저항한 게 아니라 시인이자 소설가, 배우, 영화감독, 영상소설(시나리오) 등 종합적으로 잘한, 21세기 미래형 모델이 아닐까요? 100년 전 이런 엔터테이너가 있었다니…. 게다가 그땐 식민지 시절이었잖아요.
서구문화 장르가 수입된 지 10년밖에 안 된 때였는데, 단순히 꿈꾸지 않고 실행했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세계 문화 역사로 볼 때도 전무후무한, 한국인의 문화 역량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부각되고 있는데, 심훈은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큰 자산을 갖고 있어요. ”
그는 “지금의 한류(韓流)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와 ‘상록학원’ 보도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 김형환(83) 회장은 스크랩한 1962년 7월31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기자에게 건네며 “57년 전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일이 있는데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기사를 요약하면 심훈의 《상록수》 당선금 일부와 부곡리 ‘공동경작회’가 낸 돈을 모아 세운 ‘야학당’(부곡리 산 46번지)이 ‘상록학원’이란 이름으로 1962년 재건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 같은 해 7월26일자 3면에도 ‘다시 움튼 상록수의 얼. 심훈의 상록학원 30년 만에 문 열어’ 제하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충남 당진에서 본사 특파원 신동호 發] 늙은 상록수에 새싹이 접목되어 그 푸르름을 새롭게 했다. 고 심훈 씨의 유작소설 《상록수》의 모델이었던 마을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의 ‘상록학원’이 창설 30년 만에 재건되었다. 작자의 조카이며 소설 속에는 남주인공 ‘박동혁’으로 묘사되었던 심재영(51)씨가 다시 이 학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 옛날의 젊은 얼을 본받은 청년지도자 김형환(25)군이 상록학원을 재건하는 밑거름이 됐다.
김 회장이 건넨 1962년 7월31일자 기사는, 7월26일자 기사의 후속편인 셈이다.
《조선일보》는 왜 상록학원에 주목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이른바 ‘문자보급운동’을 1929년 여름부터 6년간 펼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문예 현상모집’ 당선작이지만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러니 당진으로 특파원을 보내 비중 있게 다뤘다.
김 회장은 아직도 자신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날이 오면〉이란 영화를 남북 합작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제작비가 50억원 드는데 남북한 공동사업으로 심훈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이날 기자와 만난 몇몇 인사는 최근 당진에서 일어난 ‘《상록수》 모델 논란’에 안타까워했다. 내용인즉,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이 심재영이 아니라는 것이 논란의 일단이다. 지역신문 《당진시대》(2018년 12월31일자)는 ‘심재영 모델론은 자신이 주장하며 불거졌다’ 제하의 기사에서 ‘심재영 아버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상록수 정신과 멀어’ ‘일각에선 소설을 현실과 지나치게 동일시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다.
이 신문은 익명의 A씨 말을 인용하며 “심재영의 삶은 농촌계몽운동과는 큰 관련이 없다. 심훈의 집안은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층 지주계급으로, 심훈과 달리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다”고 주장했다.
문득 심재영의 아들인 심천보 선생이 왜 기자에게 당진행을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당진에서 있은 논란을 기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다.
“아버지 심재영은 1930년 5월, 열아홉 살 때 당진 부곡리에 낙향해 84세로 돌아가시기까지 부곡리를 지키신 분입니다. 평생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심재영을 박동혁이 되기 위한 사기꾼처럼 묘사했어요. 심재영을 아는 당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심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 심재영이 부곡리에 집을 지은 후 심훈 선생을 모셔다 《직녀성》 《영원의 미소》, 그리고 《상록수》를 쓰도록 발판을 마련한 점이 우선 평생의 큰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선친은 자신을 박동혁의 모델이라 주장한 일이 없어요. 오히려 많은 이가그렇게 말했고, 또 《상록수》에 관한 많은 글에서 남주인공은 심재영, 여주인공은 최용신이라고 썼습니다.
아버지는 1985년 KBS와 가진 대담에서 ‘당신을 《상록수》 주인공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소설과 전기는 다릅니다. 내가 하던 농촌운동과 《상록수》에 표현된 것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지요. 다만 내 삶의 일부가 《상록수》에 반영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고 하셨죠.
심재영은 《상록수》의 박동혁처럼 보이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 일은 없습니다. 심재영이 삼촌 심훈을 부곡리로 모셨으며, 심재영이 야학당과 농촌운동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모티브가 심훈의 농촌사랑,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 최용신(소설 인물은 채영신)의 헌신적 삶과 죽음으로 연결돼 《상록수》가 탄생했다는 큰 그림을 왜곡해선 안 됩니다.”
방축골 아저씨의 주례
기자는 이틀 동안 부곡리 주민 여러 명을 만났다. 부곡리는 누가 뭐래도 1930년대 농촌계몽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상록수》를 잉태한 곳이자 소설의 고향이다. 20세기 한국에 미친 《상록수》의 영향을 감안하면 부곡리는 신화(神話)의 땅이라고 불러야 한다. 새마을운동을 창시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상록수》를 읽었으리라.
기자는 부곡리 주민들에게 심훈과 《상록수》, 심재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심재영 이야기가 중심이었는데, 생전 심재영과 만났거나 인간적 면모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송악농협 방우진(70) 전 이사는 “1975년 결혼할 때 심재영 아저씨가 직접 주례를 서주셨다. 내 동생도 마찬가지다”라고 기억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심재영을 ‘방축골 아저씨’라고 불렀어요. 사시던 곳이 방축골이거든요. 선친보다 여덟 살이 위여서 항상 형님이라 불렀고, 저는 아저씨라고 불렀죠. 지금은 앞바다(한진항)의 어족이 고갈됐지만, 당시만 해도 민어·농어가 많이 잡히고 준치·삼치도 그물에 가득했어요.
큰 생선을 잡으면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셨죠. ‘방축골 아저씨께 갖다 드리고 오라’고요. 방축골 아저씨는 그때 과수원을 했는데 가을에 햇과일이 영글면 우리 집에 보내주셨지요. 참 인자한 분이셨어요. 큰아버지 말씀이 ‘이런 벽지에서 썩을 분이 아니시다. 충분히 도백(道伯)을 하실 분’이라고 하셨고, 인물도 출중하셨죠.”
― 결혼 주례는 어떻게 부탁하게 되셨어요.
“평소 아저씨를 잘 따랐으니까요. 적어도 당진에선 웬만한 사람은 주례 부탁을 할 수 없었어요. 제가 26세 때 첫 테이프를 끊고 나서 많은 청년이 아저씨에게 주례를 부탁할 수 있게 됐죠.”
방 전 이사는 “인근 마을 중에서 부곡리의 향학열이 높다. 재산을 다 팔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서울대 출신 자제들이 제일 많다. 모두 《상록수》 영향이다”라고 했다.
소설 《상록수》에는 배움과 공부를 강조하는 구절이 많다. 박동혁이 채영신에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겠다”면서 “나 하나 공부를 시키려고 아버지는 올봄까지 대대루 내려오던 집 앞 논까지 거의 다 팔었다”고 하자, 영신이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어머니는 육십 노인이 딸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고 입때 생선 광주리를 이구 다니세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유난히 큰 별을 쳐다보며 “어쨌든 우리는 명색이 전문학교까지 다녔으니 여간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은 부곡리 사람들은 누구나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자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명색 전문학교까지 당겨보니까 여간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 《상록수》 영향으로 마을은 잘살았나요.
“시골에선 으레 구정물에서 돼지를 한두 마리씩 키웠잖아요. 근데 심재영 아저씨는 사료로 돼지를 키우셨어요. 그 영향으로 얼마 후 대부분이 사료로 돼지를 키웠고, 농가소득도 늘어났어요.”
부곡1리 이장인 박철희(朴哲熙·64)씨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심재영 어른을 뵈었다. 상록초등학교 육성회장을 오래하셔서 당시 주민들은 ‘심 회장님’으로 불렀다”고 했다.
“상록초등 육성회장을 수년간 하셨고, 이 지역에 그분 도움 없이 산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내 나이 예순넷인데 유·청·장년기를 부곡리에서 보내며 그분을 뵈었지만 늘 한결같았어요.
조금 전 주례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쩌면 심재영 어른에게 주례를 부탁한 청년이 부탁 안 한 청년보다 많을걸요. 사례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분이 주례를 서면 좋은 것이 다른 분들보다 중후하셔서 결혼사진도 더 빛난 기억이 납니다. 제 동생 주례도 서주셨죠.
지금은 그런 인자한 모습을 우리네 사는 마을에서 찾을 수 없게 됐어요.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졌으니까….”
상록초등 21회 졸업생인 김진만(54)씨도 부곡리 출신이다. 그 역시 할아버지 심재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뵈면 어렵고 위엄 있어 쉽게 대할 수 없는 어른이셨어요. 지극히 높게 바라보던 분입니다. 특이했던 게 그 시절 한복을 자주 입으셨고, 흰 눈썹이 휘날리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미 할아버지셨으니까요.”
소설 《상록수》에 등장하는 마을 한곡리는, 송악읍 부곡리와 한진리 두 마을을 합쳐 이름 지은 가상의 공간이다. 부곡리와 한진리는 주인공 박동혁이 열정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펼친 곳으로 묘사돼 있다. 또 소설 속 채영신이 바닷길을 통해 부두(한진포구)로 오는 길은 심훈이 바다를 통해 서울로 가던 길이다.
특히 한진리의 한진나루터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 아산만 일대의 주요 기항지의 하나였고, 일제 때는 당진의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으로 반출하던 곳이다.
이튿날 기자가 찾은 부곡리는 작고 아담한 여느 농촌과 다름없었다. 인근 상록초등학교에 갔더니 심훈의 시비(詩碑)가 있었다. 시비에는 ‘그날이 오면’이 새겨져 있었다. 이 학교는 1958년 한진국민학교로 개교했으나 주민들의 열망으로 1962년 상록국민학교로 개명했다.
이 학교 교가는 심재영 선생이 지었다. 비석에 새겨진 교가를 눈으로 읽었다.
‘우뚝 솟은 송악산이 뒤서 지키고/ 아산만이 안고 도는 우리의 고장/ 그 이름도 길이 빛낼 상록이라네…’
‘거지와 얘기할 때는 거지처럼, 학자와 얘기할 때면 학자처럼’
부곡1리 이장을 지낸 이성종(李聖鐘·63)씨 집을 찾았다. 그는 이장을 30대 때 했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만큼 부곡리가 깨어 있었다. 이성종·이복술 내외는 “학창 시절, 《상록수》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이장의 말이다.
“외할아버지께서 ‘공동경작회’ 회원이셨는데 소설 《상록수》에선 ‘농우회’로 나옵니다. 외할아버지는 평생 《상록수》 정신으로 사셨죠. 우리 마을은 공동경작회가 모티브가 되어 지금의 작목반이 만들어졌는데, 쌀 작목반, 감자 작목반, 채소 작목반 등이 어느 지역보다 잘 운영되고 있어요.”
부곡리는 과거 75가구 주민 300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47가구 80명으로 줄어들었다. 근처에 부곡공단이 조성되면서 가구의 3분의 1이 분할되었다고 한다. 남은 주민은 대개 어르신들이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 마을이 달랐어요. 필경사라는 농촌운동의 진원지가 이곳이어서인지 잘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의 의지가 대단했어요. 《상록수》 고향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도 크고요.
그러나 과거 공동경작회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한 분 한 분 다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장이 없던 과거엔 마을 청년들이 모두 장례를 모셨습니다. 심재영 어른의 상여도 직접 멨죠.”
그는 심재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늘 우러러보는 분인데도 대화가 통했어요. 마을 주민들과도 마찬가지고요. 한번은 레벨이 안 되는 분과 친하게 지내시기에 ‘어떻게 저런 분과 대화하시냐’고 물으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거지와 얘기할 때는 거지처럼, 학자와 얘기할 때면 학자처럼 얘기하면 되네.’ 몇십 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생생해요.”
그는 당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록수》 모델’ 논란에 대해 한마디 했다.
“천지가 변하고 미세먼지가 온 땅을 뒤덮어도 사람들마저 변하면 안 되는데… 사람이 변해서 슬프더군요. 소설이 잉태된 공간이어서 모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는데, 곁에서 같이 살지도 않은 분들 사이에서 이런 발상이 나와서 슬퍼요.”
취재를 모두 마치고 소설 속 박동혁과 채영신이 바닷가에서 미래를 약속했다는 한진항이 멀리 보이는 어느 카페에서 심천보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 거대한 서해대교와 천지개벽한 아산만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소설 속 박동혁이 그랬던 것처럼 밤이면 수평선을 따라 늘어선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을 지금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영신은 그 등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라 했다.
심 선생이 말했다.
“소설 속 한진항과 부곡리 인근 바닷가 모래사장은 모두 매립되어 발전소와 공장지대로 변했어요.
세월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심훈상록문화제, 심훈문학대상, 필경사, 심훈기념관을 통해 심훈과 동혁·영신을 기억할 수 있잖아요. 많은 이가 당진을 찾아와 축제를 즐기고 기념관을 찾으면 세월이 흘러도 《상록수》는 잊히지 않을 겁니다.”⊙
《상록수》를 집필했다는 ‘필경사(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07호)’. 볏짚 지붕은 밀짚처럼 보이고 심훈의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모던보이’ 심훈이, 《상록수》의 한 대목처럼 세수도 안 한 쑥방석 같은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아 필경(筆耕)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기자는 당진에 내려가기 몇 주 전에 심훈가(家) 종손인 심천보(沈天輔·79)씨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심훈문학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기자, 3·1운동 100주년인데 당진에 와보세요. 심훈 문학의 출발점이 바로 3·1절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경성고보 3학년이던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의 문학은 지금과 달랐을지 몰라요.”
― 심훈이 3·1운동에 참여한지도 몰랐네요.
“3·1운동 직후인 3월 5일 덕수궁 앞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니 단순 가담자가 아닌 주모자급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그때 감옥에서 쓴 편지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올린 글월〉입니다. 편지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詩)죠.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진 심훈의 첫 글이고, 서른여섯 살 짧은 생애를 지배하고 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기자는 심훈이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에 어머니에게 부쳤다는 〈감옥에서…〉를 읽었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고 주황빛의 벽돌 담은 화로 속에서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중략)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중략)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번 분이요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중략)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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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를 집필했다는 ‘필경사(충청남도 지정기념물 107호)’. |
경성고보 출신이니 식민 지배 엘리트의 산실인 경성제대에 진학했거나 어쩌면 조선총독부에 채용됐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록수》에도 〈감옥에서…〉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입을 통해서다.
“나는 물론 어머니가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의 딸이지만 어머니 한 분의 딸 노릇만은 헐 수가 없다우. 알아들으시겠수? 어머니 한 분한테 불효하지만, 내 딴에 수천 수만이나 되는 장래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일을 하려구 이 한 몸을 바쳤으니까요.”
〈감옥에서…〉는 심훈이 죽기 1년 전에 쓴 《상록수》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기자는 심천보 선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당진행을 약속했다.
심훈과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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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로 알려진 심재영의 흉상. |
2월 25일 오전 당진행 버스를 탔다. 서울강남터미널에서 1시간20분이 채 안 걸렸다.
당진의 하늘은 흐렸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몰라도 어둑했다. 《상록수》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펄펄 뛰어다니던 맹수가 별안간 철책 속에 갇힌 것 같다’고 할까. 퀭한 날씨였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심 선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진)시청에서 몇 분을 만나 심훈의 3·1운동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요.”
오래전부터 당진시는 심훈에게 공을 들여왔다. 출생지는 서울 흑석동이지만 당진에 내려와 여러 편의 걸작을 남긴 심훈은 당진의, 충남의 문화자산이 되었다.
또 당진은 《상록수》의 배경이자 소설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로 알려진 장조카 심재영(沈載英·1912~1995·심훈의 큰형인 심우섭의 장남)이 살던 곳이다. 심재영의 장남이 바로 심천보다. 그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 심재영은 일제강점기 경농(경성농업학교)을 나와 할아버지 심우섭(沈友燮·1890~1948)을 배경으로 서울에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착하고 여리셔서 ‘브나로드 운동’을 빌미로 당진에 오신 것입니다. 모두 시골서 서울 가기를 원하던 때 서울서 시골에 오셨으니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는 없지요. 여기는 그때 정말 ‘깡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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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문학의 출발점이 바로 3·1운동이다.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떠난다. 심훈기념관에 마련된 감옥체험 시설. |
― 당진에 세워진 ‘심훈문학관’의 연혁이 궁금합니다.
이해선(이하 이): “당진시는 1993년 심훈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했어요. 하지만 다양한 업적과 활동을 담아내기에 협소하다고 생각해 2014년 총 25억원을 들여 ‘심훈기념관’을 세웠죠. 심훈기념관에는 《상록수》 육필원고 일부를 비롯해 심훈의 학교 성적표와 상장, 그가 즐겨 읽던 농업과 사회과학 서적 등 2780점이 전시·보관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심훈문학관으로 정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심훈이란 이름을 문학으로 한정해선 곤란하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심훈 사상의 저변에는 독립정신이 뿌리박혀 있거든요. 그래서 심훈기념관으로 정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심훈문학관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상록수》와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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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당진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심훈상록문화제 모습이다. 당진 14개 읍면동 경진대회와 심훈 시낭송 대회, 노래자랑, 청소년들의 장기자랑 등이 펼쳐진다. |
남광현(이하 남): “3·1운동에 실패하고 심훈이 중국으로 떠났을 때 선생은 ‘왜 우리는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패배감, 조국을 잃은 슬픔이 많았던 것 같아요. 시 ‘북경의 걸인’을 보면, 거지를 불쌍해하다가도 ‘거지라도 행복하겠다. 너네는 조국이 있어서’라고 썼거든요.”
이: “전체적으로 작품 하나하나가 순수문학으로 보기에는….”
남: “참여시죠. ‘야구’라는 시를 보면 야구공이 일본놈들을 때려 부수는 도구로 사용됐죠.”
1929년에 쓴 ‘야구’의 4연은 ‘피처의 꽂아 넣는 스트라이크는 수척의 폭탄/ 배트로 갈겨 내친 히트는 수뢰의 포환’이라 표현되어 있다.
남: “조국이 강탈당했는데 순수시만 쓴다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닐까요? 순수문학 쪽에서는 참여시를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해요. 그런데 과연….”
― 카프(KAPF)문학 중에는 문학성이 떨어진 작품도 있죠.
남: “(순수문학을 하는 분들이) 자기 위안으로 하는 얘기겠죠.”
남 팀장은 이 대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답답한 게 《상록수》는 계몽소설이고, 당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밝혀낸 소설인데, 박정희 시절 새마을운동에 (소설이) 이용되다 보니 심훈을 보수적 이미지로 색칠한 부분을 벗겨내야 해요.”
기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여러 차례 취재한 적이 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찾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발언을 하는 공무원은 처음이었다. 듣기에 따라 민감한 발언이었다. 심천보 선생이 말을 받았다.
“심훈 후손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 이후 20~30년에 걸쳐 한국 정신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농촌계몽운동과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과거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상록수》가 지난 100년 동안 발표된 우리나라 소설 중에서 한국의 정신문화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소설로 뽑힌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남 팀장은 잠시 후 이런 말도 했다.
“심훈을 자꾸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어요. 진보 쪽에서는 ‘그날이 오면’, 보수 쪽에서는 《상록수》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정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더군요.”
이념에 따라 심훈의 문학을 대하는 시선이 둘로 갈라진다는 그의 말이 안타까웠다.
― 심훈기념관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이: “매년 평균적으로 4만명이 찾아옵니다. 작년에는 4만982명이 찾아왔어요. 매년 조금씩 늘고 있어요. 현재 38번 국도에서 필경사로 이어지는 212번 농어촌도로인 한복선(한진리~복운리)을 확장하면 연말쯤 대형 관광버스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겁니다.”
장승률 학예사는 “당진시가 심훈을 알리는 데 올해가 좋은 본보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나 《상록수》는 알아도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한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교육청 등지에 심훈 유품이 대여 중이에요.
심훈은 저항시를 썼지만, 3·1운동에 직접 참여했기에 이번 3·1운동 100주년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3·1절을 계기로 전국에서 많은 이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100년 전 이런 엔터테이너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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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정신을 기리는 민관 행사를 솔선해서 주도해온 이들이다. 왼쪽부터 한기흥, 심천보, 이철수, 김형환, 라동수씨. |
“심훈기념관에 소장된 총 2780점의 기증·기탁된 유물 대부분이 우리 집(심재영 고택)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는 이 말을 더 보탰다.
“심훈의 장조카인 아버지(심재영)는 1936년 심훈이 돌아가시자 모든 유품을 거두어 보관해오셨지요. 당신은 삼촌 심훈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신 분이죠. 80년이 지난 지금 심훈의 유물이 전시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심천보 선생은 미국 피츠버그대학에 정착해 성공한 건축가로 46년을 살았다. 그 후 고향을 찾아 2011년 영구 귀국했다. 선생은 “당진을 심훈 문학의 고향으로 널리 알리는 일이 생(生)의 과업”이라고 했다.
― 심훈은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심훈의 장자는 10년 전 작고했고, 둘째와 셋째는 86세, 84세로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에 온다면 심훈 사업이 더 활기를 띠겠지요. 장남과 차남은 학창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큰집인 부곡리를 찾았죠. 삼남은 필경사가 있는 부곡리에서 함께 살았고요.”
시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면도로는 승용차가 빽빽이 주차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모든 간판이 건축 관련 회사들이었다. 당진에 건설 붐이 인 것일까.
이번에는 심훈을 기리는 행사를 솔선해서 주도해온 이들을 만났다.
심훈상록문화제집행위원회 이철수 집행위원장과 한기흥 전 위원장, 라동수 새마을금고당진시지부 회장, 김형환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 회장 등과 명함을 주고받았다. 심훈을 당진에 뿌리내리게 한 ‘전령사’들이었다. 조금 지나자 당진예총 임세광 지회장이 합석했다.
먼저 라동수 회장이 새마을운동 얘기부터 꺼냈다.
“당진 하면 새마을운동이에요. 봉사활동이 전국 일등이에요. 이장이나 새마을부녀회장 같은 분들이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전국 규모의 새마을상을 계속 탔어요. 이른바 《상록수》 정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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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기념관에 전시된 심훈이 읽던 책들. |
“지자체마다 (새마을) 흔적을 지우려 해요. 각 구군청에 ‘새마을과’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졌고, 당진시도 과장 한 분이 새마을 업무를 맡고 있어요. 하지만 《상록수》 영향으로 새마을운동이 지금도 왕성해요. 한번 행사하면 700~800명씩 모입니다. 읍면동마다 새마을 지회장이 있는데, 근원을 따지면 심훈의 농촌계몽 활동이 모체가 아닐까요.”
작년까지 7년간 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를 이끌었던 한기흥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영농조합 법인 명칭이 ‘상록수 농산’이다. 한 전 위원장은 “심훈이 당진의 로컬문화로 확장되는 데 문화제가 일조했다”고 귀띔했다. 상록문화제는 당진시 14개 읍면동을 통합한 경연대회, 시민과 함께하는 노래자랑, 청소년들의 끼를 엿볼 수 있는 동아리 축제 같은 행사를 포함하고 있다.
“당진이 심훈 문학의 거점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심훈문학대상, 문학상 신인상, 당진문화예술상, 중앙대문학상, 어린이청소년상 등 문학상만 5개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중앙대문학상이 눈길을 끈다. 심훈이 태어난 서울 흑석동에 중앙대가 있다. 심훈과 중앙대가 당진에서 의기투합한 셈이다.
이날 저녁 기자는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방현석 중앙대 부총장(안성캠퍼스)을 만났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심훈을 이야기했다. 취기가 올라 그의 이야기를 다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이 말은 기억에 남았다.
방 부총장은 “21세기 종합예술가의 모델이 바로 심훈”이라고 말했다.
“심훈이 남긴 작품은 대중성과 예술성이 대립되지 않아요. 단순히 그의 문학이 일제에 저항한 게 아니라 시인이자 소설가, 배우, 영화감독, 영상소설(시나리오) 등 종합적으로 잘한, 21세기 미래형 모델이 아닐까요? 100년 전 이런 엔터테이너가 있었다니…. 게다가 그땐 식민지 시절이었잖아요.
서구문화 장르가 수입된 지 10년밖에 안 된 때였는데, 단순히 꿈꾸지 않고 실행했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세계 문화 역사로 볼 때도 전무후무한, 한국인의 문화 역량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부각되고 있는데, 심훈은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큰 자산을 갖고 있어요. ”
그는 “지금의 한류(韓流)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와 ‘상록학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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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62년 7월25일자에 실린 당진 부곡리의 ‘상록학원’ 창설 모습이다. |
《조선일보》 같은 해 7월26일자 3면에도 ‘다시 움튼 상록수의 얼. 심훈의 상록학원 30년 만에 문 열어’ 제하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충남 당진에서 본사 특파원 신동호 發] 늙은 상록수에 새싹이 접목되어 그 푸르름을 새롭게 했다. 고 심훈 씨의 유작소설 《상록수》의 모델이었던 마을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의 ‘상록학원’이 창설 30년 만에 재건되었다. 작자의 조카이며 소설 속에는 남주인공 ‘박동혁’으로 묘사되었던 심재영(51)씨가 다시 이 학원의 원장이 되었고, 그 옛날의 젊은 얼을 본받은 청년지도자 김형환(25)군이 상록학원을 재건하는 밑거름이 됐다.
김 회장이 건넨 1962년 7월31일자 기사는, 7월26일자 기사의 후속편인 셈이다.
《조선일보》는 왜 상록학원에 주목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는 이른바 ‘문자보급운동’을 1929년 여름부터 6년간 펼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문예 현상모집’ 당선작이지만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러니 당진으로 특파원을 보내 비중 있게 다뤘다.
김 회장은 아직도 자신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날이 오면〉이란 영화를 남북 합작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제작비가 50억원 드는데 남북한 공동사업으로 심훈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이날 기자와 만난 몇몇 인사는 최근 당진에서 일어난 ‘《상록수》 모델 논란’에 안타까워했다. 내용인즉,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이 심재영이 아니라는 것이 논란의 일단이다. 지역신문 《당진시대》(2018년 12월31일자)는 ‘심재영 모델론은 자신이 주장하며 불거졌다’ 제하의 기사에서 ‘심재영 아버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상록수 정신과 멀어’ ‘일각에선 소설을 현실과 지나치게 동일시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다.
이 신문은 익명의 A씨 말을 인용하며 “심재영의 삶은 농촌계몽운동과는 큰 관련이 없다. 심훈의 집안은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층 지주계급으로, 심훈과 달리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다”고 주장했다.
문득 심재영의 아들인 심천보 선생이 왜 기자에게 당진행을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당진에서 있은 논란을 기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다.
“아버지 심재영은 1930년 5월, 열아홉 살 때 당진 부곡리에 낙향해 84세로 돌아가시기까지 부곡리를 지키신 분입니다. 평생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심재영을 박동혁이 되기 위한 사기꾼처럼 묘사했어요. 심재영을 아는 당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심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 심재영이 부곡리에 집을 지은 후 심훈 선생을 모셔다 《직녀성》 《영원의 미소》, 그리고 《상록수》를 쓰도록 발판을 마련한 점이 우선 평생의 큰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선친은 자신을 박동혁의 모델이라 주장한 일이 없어요. 오히려 많은 이가그렇게 말했고, 또 《상록수》에 관한 많은 글에서 남주인공은 심재영, 여주인공은 최용신이라고 썼습니다.
아버지는 1985년 KBS와 가진 대담에서 ‘당신을 《상록수》 주인공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소설과 전기는 다릅니다. 내가 하던 농촌운동과 《상록수》에 표현된 것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지요. 다만 내 삶의 일부가 《상록수》에 반영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고 하셨죠.
심재영은 《상록수》의 박동혁처럼 보이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 일은 없습니다. 심재영이 삼촌 심훈을 부곡리로 모셨으며, 심재영이 야학당과 농촌운동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모티브가 심훈의 농촌사랑,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 최용신(소설 인물은 채영신)의 헌신적 삶과 죽음으로 연결돼 《상록수》가 탄생했다는 큰 그림을 왜곡해선 안 됩니다.”
방축골 아저씨의 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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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정신을 이어받은 부곡리 주민들. 왼쪽부터 방우진, 김진만, 박철희(부곡1리 이장)씨. |
기자는 부곡리 주민들에게 심훈과 《상록수》, 심재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심재영 이야기가 중심이었는데, 생전 심재영과 만났거나 인간적 면모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송악농협 방우진(70) 전 이사는 “1975년 결혼할 때 심재영 아저씨가 직접 주례를 서주셨다. 내 동생도 마찬가지다”라고 기억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심재영을 ‘방축골 아저씨’라고 불렀어요. 사시던 곳이 방축골이거든요. 선친보다 여덟 살이 위여서 항상 형님이라 불렀고, 저는 아저씨라고 불렀죠. 지금은 앞바다(한진항)의 어족이 고갈됐지만, 당시만 해도 민어·농어가 많이 잡히고 준치·삼치도 그물에 가득했어요.
큰 생선을 잡으면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셨죠. ‘방축골 아저씨께 갖다 드리고 오라’고요. 방축골 아저씨는 그때 과수원을 했는데 가을에 햇과일이 영글면 우리 집에 보내주셨지요. 참 인자한 분이셨어요. 큰아버지 말씀이 ‘이런 벽지에서 썩을 분이 아니시다. 충분히 도백(道伯)을 하실 분’이라고 하셨고, 인물도 출중하셨죠.”
― 결혼 주례는 어떻게 부탁하게 되셨어요.
“평소 아저씨를 잘 따랐으니까요. 적어도 당진에선 웬만한 사람은 주례 부탁을 할 수 없었어요. 제가 26세 때 첫 테이프를 끊고 나서 많은 청년이 아저씨에게 주례를 부탁할 수 있게 됐죠.”
방 전 이사는 “인근 마을 중에서 부곡리의 향학열이 높다. 재산을 다 팔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서울대 출신 자제들이 제일 많다. 모두 《상록수》 영향이다”라고 했다.
소설 《상록수》에는 배움과 공부를 강조하는 구절이 많다. 박동혁이 채영신에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겠다”면서 “나 하나 공부를 시키려고 아버지는 올봄까지 대대루 내려오던 집 앞 논까지 거의 다 팔었다”고 하자, 영신이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어머니는 육십 노인이 딸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고 입때 생선 광주리를 이구 다니세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유난히 큰 별을 쳐다보며 “어쨌든 우리는 명색이 전문학교까지 다녔으니 여간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은 부곡리 사람들은 누구나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자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명색 전문학교까지 당겨보니까 여간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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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평택항이 보이는 한진포구 모습이다. 소설 속 채영신이 바닷길을 통해 부두(한진포구)로 오는 길은 심훈이 바다를 통해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 |
“시골에선 으레 구정물에서 돼지를 한두 마리씩 키웠잖아요. 근데 심재영 아저씨는 사료로 돼지를 키우셨어요. 그 영향으로 얼마 후 대부분이 사료로 돼지를 키웠고, 농가소득도 늘어났어요.”
부곡1리 이장인 박철희(朴哲熙·64)씨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심재영 어른을 뵈었다. 상록초등학교 육성회장을 오래하셔서 당시 주민들은 ‘심 회장님’으로 불렀다”고 했다.
“상록초등 육성회장을 수년간 하셨고, 이 지역에 그분 도움 없이 산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내 나이 예순넷인데 유·청·장년기를 부곡리에서 보내며 그분을 뵈었지만 늘 한결같았어요.
조금 전 주례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쩌면 심재영 어른에게 주례를 부탁한 청년이 부탁 안 한 청년보다 많을걸요. 사례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분이 주례를 서면 좋은 것이 다른 분들보다 중후하셔서 결혼사진도 더 빛난 기억이 납니다. 제 동생 주례도 서주셨죠.
지금은 그런 인자한 모습을 우리네 사는 마을에서 찾을 수 없게 됐어요.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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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초등학교 모습이다. 이 학교는 1958년 한진국민학교로 개교하였으나 주민들의 열망으로 1962년 상록국민학교로 바뀌었다. |
“뵈면 어렵고 위엄 있어 쉽게 대할 수 없는 어른이셨어요. 지극히 높게 바라보던 분입니다. 특이했던 게 그 시절 한복을 자주 입으셨고, 흰 눈썹이 휘날리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미 할아버지셨으니까요.”
소설 《상록수》에 등장하는 마을 한곡리는, 송악읍 부곡리와 한진리 두 마을을 합쳐 이름 지은 가상의 공간이다. 부곡리와 한진리는 주인공 박동혁이 열정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펼친 곳으로 묘사돼 있다. 또 소설 속 채영신이 바닷길을 통해 부두(한진포구)로 오는 길은 심훈이 바다를 통해 서울로 가던 길이다.
특히 한진리의 한진나루터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 아산만 일대의 주요 기항지의 하나였고, 일제 때는 당진의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으로 반출하던 곳이다.
이튿날 기자가 찾은 부곡리는 작고 아담한 여느 농촌과 다름없었다. 인근 상록초등학교에 갔더니 심훈의 시비(詩碑)가 있었다. 시비에는 ‘그날이 오면’이 새겨져 있었다. 이 학교는 1958년 한진국민학교로 개교했으나 주민들의 열망으로 1962년 상록국민학교로 개명했다.
이 학교 교가는 심재영 선생이 지었다. 비석에 새겨진 교가를 눈으로 읽었다.
‘우뚝 솟은 송악산이 뒤서 지키고/ 아산만이 안고 도는 우리의 고장/ 그 이름도 길이 빛낼 상록이라네…’
‘거지와 얘기할 때는 거지처럼, 학자와 얘기할 때면 학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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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곡리 주민들. 왼쪽부터 박철희, 심천보, 이성종, 이복술씨. |
“외할아버지께서 ‘공동경작회’ 회원이셨는데 소설 《상록수》에선 ‘농우회’로 나옵니다. 외할아버지는 평생 《상록수》 정신으로 사셨죠. 우리 마을은 공동경작회가 모티브가 되어 지금의 작목반이 만들어졌는데, 쌀 작목반, 감자 작목반, 채소 작목반 등이 어느 지역보다 잘 운영되고 있어요.”
부곡리는 과거 75가구 주민 300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47가구 80명으로 줄어들었다. 근처에 부곡공단이 조성되면서 가구의 3분의 1이 분할되었다고 한다. 남은 주민은 대개 어르신들이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 마을이 달랐어요. 필경사라는 농촌운동의 진원지가 이곳이어서인지 잘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의 의지가 대단했어요. 《상록수》 고향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도 크고요.
그러나 과거 공동경작회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한 분 한 분 다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장이 없던 과거엔 마을 청년들이 모두 장례를 모셨습니다. 심재영 어른의 상여도 직접 멨죠.”
그는 심재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늘 우러러보는 분인데도 대화가 통했어요. 마을 주민들과도 마찬가지고요. 한번은 레벨이 안 되는 분과 친하게 지내시기에 ‘어떻게 저런 분과 대화하시냐’고 물으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거지와 얘기할 때는 거지처럼, 학자와 얘기할 때면 학자처럼 얘기하면 되네.’ 몇십 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생생해요.”
그는 당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록수》 모델’ 논란에 대해 한마디 했다.
“천지가 변하고 미세먼지가 온 땅을 뒤덮어도 사람들마저 변하면 안 되는데… 사람이 변해서 슬프더군요. 소설이 잉태된 공간이어서 모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는데, 곁에서 같이 살지도 않은 분들 사이에서 이런 발상이 나와서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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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소설을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1978년 연출한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최용신(한혜숙 분)이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
멀리 거대한 서해대교와 천지개벽한 아산만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소설 속 박동혁이 그랬던 것처럼 밤이면 수평선을 따라 늘어선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을 지금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영신은 그 등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라 했다.
심 선생이 말했다.
“소설 속 한진항과 부곡리 인근 바닷가 모래사장은 모두 매립되어 발전소와 공장지대로 변했어요.
세월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심훈상록문화제, 심훈문학대상, 필경사, 심훈기념관을 통해 심훈과 동혁·영신을 기억할 수 있잖아요. 많은 이가 당진을 찾아와 축제를 즐기고 기념관을 찾으면 세월이 흘러도 《상록수》는 잊히지 않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