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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

“이것이 코리아 환타지의 프롤로그(서곡)야!”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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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커티스 음악원 낙방하자 템플대 기악과 외국인 장학생이 돼
⊙ ‘러시아 환상곡’에 영향받아 ‘한국환상곡’을 쓰기로 결심
⊙ ‘러시아 환상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으로 추정
1962년 2월 스페인에서 일시 귀국한 안익태 선생이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교향악단 지휘를 하고 있다.
  수필가이자 번역문학가인 한흑구(韓黑鷗·1909~1979) 선생은 수필집 《인생산문》(1974)에서 안익태와의 인연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책은 음악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음악칼럼니스트인 김승열씨가 발견해 《월간조선》에 소개했다.
 
  한흑구는 책에 실린 ‘예술가 안익태-젊은 시절의 교우록’에서 고학(苦學)을 하던 미국 유학 시절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이 교우록은 픽션적 소설이 아니고 나의 죽마고우인 안익태 군과 미국에서 같이 고학하던 젊은 시절을 사실대로 기록해 두려는 것이다. 이 시절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음악학도로서의 가장 중요한 20대의 청춘기였던 것이다. 나의 기억에서 상실된 것은 아쉽게도 잃어버린 사실이 있을지언정, 픽션적인 이야기는 한 오라기도 첨가하지 않고, 다만 옛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이야기체로 기억해 두려는 것이다. …〉(p172, 《인생산문》)
 
  ‘안익태 교우록’에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의 작곡 동기가 등장한다. 1933년 어느 봄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본 뒤 안익태는 “나도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야. 또한 한국광상곡(韓國狂想曲·‘한국환상곡’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도 하나 작곡하고”라고 한흑구에게 말한다.
 
  일부 음악학자들은 이부쿠베 아키라(伊福部昭)의 1935년 작품 ‘일본광시곡’이 ‘한국환상곡’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으나 한흑구의 《인생산문》을 통해 볼 때 ‘친일 추론’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익태는 ‘한국환상곡’ 작곡을 위해 피아노로 도라지타령, 아리랑, 수심가 등을 치고 한흑구에게 양산도를 부르게 하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로 ‘한국환상곡’ 1부에 한국 민속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이 플루트와 금관악기를 통해 연주된다.
 
  《월간조선》은 ‘안익태 교우록’에 실린 ‘노부부의 온정’ 편을 소개한다. 일부 표기를 현대어로 고쳤음을 밝혀 둔다.
 

 
한흑구 선생이 쓴 수필집 《인생산문》(1974)에 실린 ‘안익태 교우록’ 지면이다.
  안(안익태)은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장학생 시험을 보았으나 아깝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일곱 명을 뽑는데 아홉째가 되었고, 응시한 사람은 서른 명이나 되었다.
 
  첫째로 뽑힌 사람은 첼로를 하는 17세의 소녀였다. 참으로 놀랄 만한 천재 소녀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열째로 떨어진 사람도 캐나다에서 온 서른이 넘은 청년으로 캐나다에서 삼십 회 이상의 연주회를 가졌고,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그의 스크랩북을 보여 주었다.
 
  “이것들을 보시오! 이렇게 연주를 많이 했는데도 나를 떨어뜨렸으니.”
 
  그의 스크랩북에는 그가 연주했던 곡과 각 신문에 실렸던 기사들과 음악 평론가들의 평문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안은 울지는 않았다. 안도 동경에서 음악학교를 나왔고, 개인 연주회도 여러 번 가졌으며 또 고국에서도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가졌었다.
 
  서울 장곡천공회당(長谷川公會堂·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의 이름을 붙인 오늘의 소공동. 공회당은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다-편집자)에서 연주회를 가진 것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인 첼리스트의 연주회였다.
 
  또한 고향인 평양의 모교 숭실대학 강당에서 열렸던 연주회에는 평양의 전 시민이 모여서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였다.
 
  백여 명의 미국 선교사들도 참여했었지만, 안을 처음부터 지도해 오시던 모의리(牟義理·미국 출신의 선교사 E. M. Mowry. 항일 독립운동가. 숭실학교 교장으로 민족주의 사상, 항일의식을 고취했다-편집자) 교수도 감격한 나머지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나의 눈으로도 목격했던 것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안은 아깝게도 일곱 명을 뽑는데 아홉째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한흑구) 군! 자네 학교 음악과에 잘 말해서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 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
 
  안은 침착한 태도로 말하였다.
 
  안의 말대로 나는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만나 안을 소개해서 내가 다니고 있던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무난히 넣을 수 있었다.
 
  안은 입학한 후 며칠 되지 않아 나에게 다시 이런 제안을 하였다.
 
  “여보게, 커티스 음악학교에 가서 짐발리스트 씨를 찾아보고,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지도해 달라고 애원을 해 보세나. 아무래도 그런 대가(大家)에게 가서 배우지 않으면 내가 이곳까지 온 목적이 서지 않는 것이야.”
 
  “글세,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겠나!”
 
  나는 주저했다.
 
  커티스 음악학교는 필리(필라델피아-편집자)에서 제일 오래된 신문인 퍼블릭 레저(Public Ledger)의 사장이 자기의 이름을 따서 음악학교를 세우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채용해서 음악 학도들을 학비 없이 교육시키는 유명한 학교였다.
 
  “한! 내 스크랩북을 보았나? 내가 동경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마침 짐발리스트 씨가 동경에서 연주회를 갖기 위해서 내방하셨는데, 그때 그가 내 연주회에 왔었어. 그때 그가 내 연주를 신문기사를 통해서 호평한 것이 아사히신문에 났었는데, 그걸 갖고 한번 찾아가서 부탁해 보세나!”
 
  안은 스크랩북을 꺼내서 신문 기사를 오려 붙인 것을 펼쳐놓았다.
 
  “그렇군! 그럼, 한번 가 보세나. 되든 안 되든 해 봐야지,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가야 해.”
 
  그의 스크랩을 보고는 나도 이렇게 말하고 그의 제안을 승낙하였다.
 
  약속한 날, 안과 나는 커티스 음악학교로 가게 되었다. 캠퍼스에 들어서자 바이올린의 고운 멜로디가 이층에서 흘러나왔다. ‘미뉴에트’ 곡이었다.
 
  “한! 아마 저건 짐발리스트가 켜나 봐. 참 고운데!”
 
  안은 이렇게 감탄하면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여비서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계시는 이가 짐발리스트 씨입니까?”
 
  “아니요, 우리 학생입니다.”
 
  비서의 대답을 듣고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린 한국에서 온 학생들인데 짐발리스트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비서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로 연락을 하였다.
 
  “자, 이리로 들어가세요.”
 
  친절한 여비서는 옆방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반가이 맞아주는 짐발리스트의 손을 잡고 인사를 드렸다.
 
  그는 우리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자기도 소파에 앉으며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국에서 언제 오셨소?”
 
  이렇게 묻고 있는 그의 입도 컸지만 코도 컸으며 넓은 이마는 앞이 다 벗어졌다.
 
  그는 성자(聖者)와 같은 표정을 하고 친절한 눈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저는 약 4년 전에 왔고, 미스터 안은 일 년 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안은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한 주일 전에 이리로 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무엇을 전공하시지요?”
 
  “전공은 첼로입니다. 일전에 이 학교에서 장학생 시험을 보았는데 아깝게도 아홉째가 되어서 떨어졌습니다.”
 
  “아하, 그랬군요! 참 서운한 일이군요. 시험관들은 우리보다도 더 정확합니다.”
 
  그는 잠깐 동안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엇인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부탁은 다름 아니오라, 선생님께 미스터 안이 한 주일에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 교수를 받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본래 우린 둘이 다 고학생이지만 배움에 주려서 이곳 미국에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말에 힘을 줄 수 있는 대로 주어서 분명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난색을 하고 한참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먼저 내 생활을 이야기하지요. 나는 이 학교 외에 세 학교에 나가는데 그 학교들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보스턴과 뉴욕과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비행기로 왕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늘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이번 학기만이라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자습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다. 지금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가 거절하기 전에 이렇게 덧붙여서 애걸하였다. 그는 한 손가락을 볼 위에 대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이것을 좀 보십시오.”
 
  안은 가지고 온 스크랩북을 펴 놓았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본에 오셨을 때, 그리고 미스터 안의 연주회에 오셨을 때의 아사히신문 기사입니다. 일본글이 되어서 모르시겠지만, 그때 선생님이 이런 평을 하신 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 安君의 첼로의 音色은 東洋的인 특색을 가진 哀愁的인 멜로디다.
 
  앞으로 세계적인 대가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기대된다. …〉
 
  “선생님께서 이렇게 극구 칭찬하신 것을 잊으셨나요?”
 
  나는 신이 나서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신문 기사와 함께 실려 있는 자기의 사진과 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군, 그렇지! 내가 그때 안군의 연주회에 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나의 기억력이 감퇴되었으니….”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안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미안하오. 잘 알아보지 못해서. 그럼, 내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한 시에 오셔서 한 시간만 배우도록 합시다.”
 
  그는 안의 손을 그대로 쥐고 흔들면서 이렇게 쾌히 승낙하였다.
 
  “댕큐 서어! 댕큐 베리머치 서어!”
 
  안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나도 일어서면서 악수를 청하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는 우리와 함께 현관까지 나왔다.
 
  “나라도 없는 한국 학생이기 때문에 나는 안군을 잘 지도해 주려는 것이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안의 어깨를 여러 번 두들겨 주었다.
 
  안과 나는 한없이 감격하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러 번 절을 하였다.
 
  우리 둘은 그의 마지막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안익태 선생의 유품들. 연미복과 초상화, 훈장 등이다.
  안은 템플대학에도 잘 다녔고, 짐발리스트 씨의 지도도 잘 받았다.
 
  특히 짐발리스트에게서는 연주할 때 숨을 쉬는 방법과 음색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곡을 따라서 무겁게 혹은 가볍게 또는 고상하게, 작곡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연주가의 생명이라는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도 여러 번 설명하였다.
 
  안은 이렇게 해서 가장 좋은 스승들로부터 마음껏 배울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돈을 벌 기회도 없었고, 벌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동생과 같이 믿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김블 형제백화점(Gimble Brothers Department Store)의 동양물품부의 점원이었으나, 학교 때문에 반나절의 시간일(part time work)을 했기 때문에 안의 생활비까지 대기에는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사 먹던 식사를 집에서 자취하며 해 먹기로 하였다.
 
  빨래도 우리 손으로 하고 다림질도 우리 손으로 하기로 하였다.
 
  우리 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거의 다 내 손으로 한 셈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첼로에 열중했기 때문에 잔심부름을 할 정신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 반하우스 박사(Dr. Barnhouse)를 찾아갔다.
 
  미국에서 3대 교회당의 하나라는 그의 제십장로회당(第十長老敎會堂·The 10th Presbytarian Church)에 다니게 된 것은 그 교회에서 우리나라 경북 안동에 선교사를 보냈고 교회를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한국과 한국사람들을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것이 고마워서 나는 그의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내가 갈 때마다 아버님같이 나를 대해 주었다.
 
  그날도 그는 혼자서 서실(書室) 안에 앉아서 연구를 하다가 내가 온 것을 알고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쿡에게 나의 저녁을 청해 주었다.
 
  자기는 식사를 했다고 커피만 들면서 나에겐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자꾸 권했다. 나는 많이 먹기도 하였다.
 
  “그래, 한군은 여전히 공부도 잘하고, 또 잘 지내나?”
 
  목사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이 염려해 주시는 덕택으로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기 한 덩어리를 더 집으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도 다 무고하겠지?”
 
  “네, 일 주일에 한 번씩 서신 왕래를 합니다.”
 
  “그래야지. 한국이 빨리 독립을 해야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그는 늘 한국의 독립을 마음으로 성원하였다. 다른 미국의 지성인들도 그렇지만, 이 목사님은 더욱 진실하게 성원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을 통해서 일본 통치하의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 좀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나는 식사를 끝내고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게!”
 
  “안익태라는 나의 고향 친구인 죽마지우가 얼마 전에 저의 집에 와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반갑겠나? 나도 만나게 해 주게.”
 
  “물론이지요. 요새 학교 관계도 있고 해서 너무 분주해서 못 데리고 왔습니다. 그도 평양에서 미션스쿨을 나왔으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에 같이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안과 내가 지내 온 모든 처지를 이야기하였다.
 
  내가 혼자서 벌어서 두 사람의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 자취도 하고 빨래까지 우리의 손으로 해서 지낸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말했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서야 어디 오래 참아 가겠나! 우선 안이 직업을 가지도록 내가 좀 주선해 보지.”
 
  목사님은 엄지손가락을 턱에 대었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일마다 연보를 받을 때 성가 독창을 시키시는데 늘 독창만 시키지 마시고 첼로를 시키시면 어떻겠습니까?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나는 안이 첼로를 잘하고, 짐발리스트 씨에게 사숙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중략) 수요일 저녁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애들이 예배를 볼 때 음악예배를 보기로 했으면 좋겠네. 학생들에게 한국 청년도 이렇게 서양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한국을 한번 자랑해 보세나! 미국에선 무보수라는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얼마씩 생활비에 보태어 나가면 좋은 아이디어가 또 생기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는 목사의 얼굴은 무척 명랑해 보였다.
 
  한 손을 다른 손 위에 올려놓고 그가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될 만한 일이라는 것과, 앞으로 우리 둘을 위해서 성의껏 도와주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이 보였다. (중략)
 
  ‘내일을 위하여 결코 걱정하지 말라! 오늘에 성심껏 일한 것으로서 충분하다!’
 
  이 명언(名言)은 이곳 필리 출신인 외교관이요 발명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었다.
 
  안군과 나는 약속한 수요일 저녁 교회에 가서 오백여 명의 미국 어린애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음악예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머리털이 검고 눈동자가 검은 동양사람이 어떻게 서양음악을 그렇게 잘하나 하고 그들은 커다란 눈들을 더욱 크게 굴리면서 열광적인 박수로 환호하면서 음악예배를 끝마쳤던 것이다.
 
  반하우스 목사님도 매우 만족해하셨으며 우리 두 사람의 한 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보수를 내주셨다.
 
  프랭클린의 말과 같이 우리는 내일을 위하여 조금도 비관하지 않고 그날그날 성실히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뿐인가, 그다음 주일엔 목사님께서 윌리(Willey)라는 늙은 부부에게 안군을 소개해 주었다.
 
  윌리 부부는 어떤 회사에서 삼십 년이나 중역으로 일을 하다가 은퇴하고 넉넉한 재산과 보너스로 한가하게 지내는 부부였다.
 
  슬하의 자식들도 다 분가해 살고 있었고, 두 늙은이만이 한적한 곳에 좋은 집을 가지고 여생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윌리 부인은 스미드 대학(Smith College)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그래서 이 늙은 부부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 대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안군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목사님 덕분으로 넌 이제부턴 걱정 없게 되었어. 자, 빨리 가 보게!”
 
  이렇게 전송하는 나에게 그는 쓸쓸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마음에 없는 곳에 시집을 가는 처녀의 심정과 같네.”
 
  안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사람이, 뭐 먼 데로 가는 건가? 무슨 말을 하나? 내일이라도 만날 게 아닌가? 이젠 마음 놓고 공부나 열심히 하게. 나도 이젠 기쁘게 공부를 하겠네.”
 
  이렇게 나는 안을 위로해 주었다.
 
  사실 나도 그와 헤어지는 것이 한없이 쓸쓸했으나 우리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그후 안과 나는 학교에서 만나기도 하고 주말에는 안이 있는 집으로 놀러가서 밤을 새우면서 놀기도 하였다. (중략)
 
1955년 4월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으로 귀국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이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 최초의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퍽 부드럽고 맑았다. 라일락꽃이 피어 나는 5월이었던 것이다.
 
  안을 찾아 경치 좋은 교외로 버스를 타고 윌리 부부의 집을 찾은 것은 점심 시각이 지나서였다. 윌리 부부와 안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점심을 먹고 왔다고 해도 맛있는 케이크와 과일, 커피를 잔뜩 갖다 놓고, 안과 둘이서 이야기하며 실컷 놀라고 하였다.
 
  “이 사람, 한! 나는 어제 저녁 스토코브스키의 심포니에 가 보았네. 참으로 귀신같애! 작품은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는 러시아계의 청년이 작곡하였다는 것인데, 곡명이 러시아 광상곡(狂想曲)이야! 처음엔 러시아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한가로운 시대를 그렸는데, 느릿한 템포로 시작하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노래 같은 것도 나오고, 구루마 바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오고, 이러다가 제정이 부패해 가는 음탕한 음조로 차차 변해 가. 그러고는 러시아의 혁명가인 듯, 트럼펫 소리, 슬라이 트럼퍼가 마치 만세라도 외치는 듯이 굉장히 우렁찬 소리로 변해 가네.
 
  이때 지휘자 스토코브스키의 팔이 얼마나 빨리 휘도는지 열두어 개나 되는 것같이 쉴 새 없이 막 휘돌아가는 거야! 나도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야. 또한 한국광상곡(韓國狂想曲·‘한국환상곡’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 한흑구는 아래에 ‘코리아 환타지’ 옆에 ‘한국광상곡’이라 적었다-편집자)도 하나 작곡하고.”
 
  안은 쉴 새 없이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 갔다.
 
  상대자인 내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알 바 없다는 듯이 마치 중학생처럼 감상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나를 끌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이 바통(지휘봉)도 어제 저녁에 사 왔어.”
 
  그는 때 하나 묻지 않은 바통을 피아노 위에서 들어서 내게 보이고는 다시 피아노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를 꽝꽝 치기 시작하였다.
 
  한참 치다가 피아노에서 두 손을 떼어 올리면서,
 
  “이것이 ‘코리아환타지(Korea Phantasy, 韓國狂想曲)’의 프롤로그(서곡)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 좋네. 훌륭하이. 꼭 하나 작곡해 보게.”
 
  음악을 모르는 나이지만 어쨌든 그의 앰비션과 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춘향전에 나오는 것 같은 노래와 도라지타령, 천안삼거리, 노들강변, 아리랑, 또는 수심가 같은 멜로디가 섞인 곡을 피아노가 깨어져라 치고 있었다.
 
  “대체로 아우트라인이 잡히기는 했는데, 한국 민요를 몰라서 큰 야단이야. 이건 모두 내가 들은 한국 민요를 내 멋대로 편곡한 것인데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어도 그 줄거리는 잘 알아야 해! 한군! 자, 아무 곡이나 하나 해 봐, 응? 도라지타령을 한번 불러봐.”
 
  그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청을 한다기보다도 강요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몰라. 노랠 내가 해 봤어야지.”
 
  나는 어느 주석(酒席)에서 노래 차례에 걸린 사람 같이 서먹서먹했다.
 
  “어서! 아무 곡이나 좋아!”
 
  “그럼 양산도를 한번 해 보지.”
 
  잘할 줄 모르는 노래지만 그의 작곡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양산도를 숨이 차게 불렀다.
 
  그는 머리를 끄떡끄떡하면서, 한 손으로는 피아노의 키를 짚어 가면서 멜로디의 피치를 암송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약 한 시간 동안, 술 한 잔도 없는 피아노 앞에서 잘 부르거나 말거나 아는 노래는 모두 핏대를 올려서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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