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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에 관해 우리가 몰랐던 ‘한국환상곡’의 진실들

‘한국환상곡’의 작곡·초연 연도는 ‘1937~38년’ 아닌 ‘1934년’

글 :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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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환상곡’은 ‘일본광시곡’ 아닌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영감 받아
⊙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 발견…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 작곡 동기 드러나
⊙ 안익태의 교향시 ‘降天聲樂’도 일본 궁중음악(에텐라쿠)이 아닌 통일신라 옥보고의 ‘降天聲曲’ 영향

金勝烈
1976년 출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 파리8대학 석사(공연예술학), 파리7대학 박사과정(동양학) 수학 / 유럽 50여개 도시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세계적인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 900여회 관람 / 저서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 투티)
2011년 5월 14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기원 국민대합창’ 행사 모습이다. ‘한국환상곡’중 애국가 부분과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서울광장의 합창단 2018명, 평창 알펜시아의 합창단 2018명, 뉴욕의 교포 합창단 50여명, 시민 등 1만2000여명이 함께 노래했다.
  2018년 12월 20일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결정한 지 78주년 되는 날이다. 1940년 12월 2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일제치하 한국의 공식 국가로 승인받았다. 그로부터 석 달 전인 9월 27일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베를린에서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는 3국동맹을 맺었다. 당시 독일의 수중에 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거점으로 지휘활동을 하던 안익태는 이런 삼엄한 시대조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3국동맹 체결 직전까지 안익태는 그의 주요작품들인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유럽무대에서 수시로 지휘했다.
 
  그러나 3국동맹 직후부터 안익태의 지휘목록에 ‘한국환상곡’이 사라지고 ‘교쿠토(極東)’와 ‘만주국’, ‘도아(東亞)’가 등장한다. 또 ‘야상곡과 에텐라쿠’는 ‘에텐라쿠’로 대신한다. 에텐라쿠(越天樂)는 일본의 궁중음악을 뜻한다. 이로 인해 안익태를 둘러싼 친일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일부 음악학자들은 ‘한국환상곡’이 이부쿠베 아키라(伊福部昭)의 ‘일본광시곡’에 자극받아 작곡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한국환상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영향 받아 작곡되었다. 그 직접 증거를 최근 발굴했다.
 
  이와 함께 안익태가 1959년 작곡한 교향시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의 전통 가가쿠(雅樂)의 음악 선율과 모티브로 작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송병욱과 이경분은 지난 2006년과 2007년에 안익태의 대표작 ‘강천성악’이 ‘에텐라쿠’라고 처음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강천성악’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名人) 옥보고(서기 742년에서 765년 사이 경덕왕 때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거문고곡인 ‘강천성곡(降天聲曲)’을 모르고서는 붙일 수 없는 제목으로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작곡했다.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이 담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
 
수필가 한흑구의 산문집 《인생산문》(1974).
  필자는 최근 한흑구(韓黑鷗· 1909~ 1979)의 수필집 《인생산문》(1974)을 입수했다. 1933년 2월 3일 미국 신시내티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고학생 안익태를 받아 준 인물은 한흑구였다. 안익태와 동향(평양)인 한흑구는 당시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신문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안익태는 두 달여를 그에게 얹혀살았다. 한흑구의 《인생산문》 부록에 실린 ‘안익태 교우록’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안익태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1933년 2월 9일 안익태는 7명을 선발하는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 첼로장학생 선발시험에서 9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낙방한 안익태를 한흑구는 템플대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에게 얘기해서 템플대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안익태 교우록’에 등장한다. ‘안(安)은 나보다 세 살이 더 많고’라는 언급 또한 그간 논란이 된 안익태의 정확한 생년도가 1906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사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바로 ‘한국환상곡’의 작곡 동기다.
 
  후원자로 나선 윌리 부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안익태를 한흑구는 라일락 피는 5월의 어느 토요일에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그날 안익태는 전날 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필자는 1933년 이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 목록을 조사해 보았다. 1933년 4월 7일(금)에 필라델피아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있었던 스토코프스키 지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이날 안익태가 언급한 음악회로 추정된다. 한흑구는 ‘4월’을 ‘5월’로 혼돈한 것으로 보인다. 라일락은 4월에도 핀다.
 
  이날 콘서트에서는 3곡이 연주되었는데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등이었다.
 
  교우록에는 안익태가 이 연주회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커티스 음악원 첼로장학생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낙방 직후 안익태는 한흑구와 함께 커티스 음악원 바이올린과 교수였던 에프렘 짐발리스트(1889~1985)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안익태를 동정한 짐발리스트는 일주일에 1시간씩 무료 레슨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매주 한 시간씩 레슨을 해 주던 고마운 스승 짐발리스트가 협연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대를 보기 위해 안익태는 이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찾은 것이었다.
 
  특히 안익태는 이날 연주회에 25세의 러시아계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러시아 환상곡’에 영감 받아 ‘한국환상곡’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대목이 실려 있다.
 
  여기서 ‘25세 러시아계 작곡가’가 스트라빈스키의 투영이다. 또 ‘러시아 환상곡’은 ‘러시아 부활제 서곡’의 투영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한흑구가 설명하는 ‘러시아 환상곡’의 해설이 바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과 흐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날 연주된 ‘봄의 제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한흑구의 기억 속에 ‘러시아 부활제 서곡’의 작곡가로 둔갑한 것이다.
 
  심지어 1957년 11월 10일 자 미국 《찰스턴 가제트》 지와의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환상곡’의 작곡 동기는 명확해진다. 이날 연주회에서 들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직접 영향 받아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다.
 
  그리고 안익태는 덧붙인다. “스토코프스키의 강렬한 지휘에 자극받아 이제부터는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라고. 이것이 ‘첼리스트’ 안익태에서 ‘작곡가·지휘자’ 안익태로 전향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터닝포인트다.
 
 
  ‘한국환상곡’의 작곡·初演 연도와 안익태의 첫 유럽행은 수정돼야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 선생과 그의 유품. 그가 이끌었던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연주회 안내장이다.
  이 책을 쓴 한흑구는 모친의 위독 전보를 받고 1934년 3월 19일 5년 만에 미국을 떠난다. 이는 당시 Korea National Association이 발행한 《The New Korea》 1934년 3월 22일 자 기사가 전한다. ‘안익태 교우록’에 의하면 1933년 겨울방학이 되자 안익태는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응시하기 위해 한흑구와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뉴욕 유니온 정거장에서 두 사람은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이후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한흑구에게 안익태는 총 4번의 편지를 보낸다. 3번은 뉴욕에서, 한 번은 런던에서다. 그중 첫 번째 편지는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2등으로 입상한 안익태가 뉴욕 제2심포니의 제1첼리스트로 채용됐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뉴욕 제2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내셔널 오케스트라로 불린 NBC 하우스 오케스트라일 공산이 크다. 이 악단은 1937년 11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영입으로 탄생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이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에서 안익태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안익태에게 그가 얼마 전 완성한 ‘한국환상곡’을 직접 지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지휘자는 당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던 프랭크 J. 블랙(1894~1968) 아니면, 에르노 래피(1891~1945) 중 한 명일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안익태는 카네기홀에서 “어제 저녁 자신의 지휘로 직접 ‘한국환상곡’을 초연했다”고 전한다. 뉴욕의 여러 신문들의 평도 좋았다고 덧붙인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한 달이 지나도록 안익태로부터의 소식이 끊겼다고 한흑구는 적고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런던에서 안익태로부터 편지와 소포가 도착했다. “어떤 음악비평가의 소개로 런던 제1심포니의 제1첼리스트로 1년 간 계약을 하고 3주 전 런던으로 왔다”는 내용이었다. “소포에는 런던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던 사진과 프로그램, 신문비평문들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성공하면 빈에 꼭 가 볼 생각이라고 안익태가 적었다”고 했다.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안익태가 광주 카리타스 수녀원 합창단을 지휘한 성가 네 곡이 담긴 LP 초판.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1937년에 작곡되어 1938년 2월에 더블린에서 ‘한국환상곡’이 초연되었다는 그간의 통설보다 3~4년 앞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흑구는 1934년 3월까지만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 의하면 안익태의 첫 유럽행이 그간 알려진 1936년보다 2년 앞서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함께 일본 도시바공업주식회사에서 발매된,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음반과 유일한 저서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기》 초판(235쪽 분량)을 입수했다.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안익태가 광주 카리타스 수녀원 합창단을 지휘한 성가 네 곡과 1960~70년대 일본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이토 교코(1927~)가 부른 안익태의 가곡 ‘흰 백합화’를 수록한 작은 사이즈의 LP음반은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귀물이다.
 
 
  안익태의 교향시 ‘강천성악’ 논란
 
안익태의 ‘쾌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4년 2월 15일자 지면. 사진은 뉴욕서 열린 안의 첼로 연주회 포스터와 연주 모습이다.
  이제, 친일논란을 일으킨 안익태의 교향시 ‘강천성악’으로 돌아가 보자. 몇몇 학자들은 ‘강천성악’이 일본의 전통음악(에텐라쿠)에 영향받아 작곡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필자는 ‘강천성악’이 ‘에텐라쿠’가 아니라, ‘야상곡과 에텐라쿠’라고 반박한다.
 
  그 근거를 제시하면 이렇다. 이 작품이 초연된 1940년 4월 30일 안익태 지휘 로마 방송 교향악단의 연주회를 보도하는 그해 4월 24일 자 《조선일보》에 ‘야악(아악에 의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3국동맹 체결 전의 마지막 지휘무대인 1940년 9월 4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과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을 정확히 ‘야상곡과 에텐라쿠’라고 표기하고 있다. 즉 안익태는 처음부터 ‘에텐라쿠’를 작곡한 것이 아니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작곡한 것이다. 3국동맹 체결 직후의 연주회부터 ‘야상곡’이 사라진 ‘에텐라쿠’만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제 압박으로 일본 편향 연주회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훗날 ‘강천성악’으로 곡명이 바뀌었다.
 
  유일한 ‘강천성악’ CD인 KBS 교향악단(김만복 지휘)의 음반을 들어 보면, 처음부터 ‘에텐라쿠’ 선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로 연주되는 ‘야상곡’의 선율이 3분 이상 연주된 후에 ‘에텐라쿠’의 선율이 등장한다. 이 야상곡은 ‘강천성악’의 도입부와 피날레를 책임지고 있다. 즉, 안익태는 ‘야상곡과 에텐라쿠’=’강천성악’이라는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에텐라쿠’의 상위개념으로서 ‘강천성악’을 작곡했던 것이다.
 
  또한 ‘강천성악’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名人) 옥보고(서기 742년에서 765년 사이 경덕왕 때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거문고곡인 ‘강천성곡(降天聲曲)’을 모르고서는 붙일 수 없는 제목이다. ‘강천성곡’과 ‘강천성악’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다.
 
  그러나 ‘에텐라쿠’의 한자음 표기인 ‘월천악’은 ‘하늘을 넘어온(혹은 초월한) 음악’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 아니다. 그럼에도 ‘에텐라쿠’의 뜻풀이가 ‘강천성곡’ 혹은 ’강천성악’과 똑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Music coming from heaven)’으로 통용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서기 794년 출범한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유행했다고 하는 ‘에텐라쿠’가 옥보고의 ‘강천성곡’이 일본에 전달되어 음은 바뀌었으되, 뜻은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헤이안 시대를 연 일본 50대 간무천황(서기 781~806년 재위)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다. 즉, 그의 모친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무령왕의 직계 10대손이다.
 
  안익태는 전해지지 않는 ‘강천성곡’이 일본에 건너가 지금껏 전해지는 ‘에텐라쿠’로 탈바꿈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1936년 6월 힌데미트와의 베를린 면담에서 ‘강천성악’을 두고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 운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옥보고의 ‘강천성곡’과 ‘에텐라쿠’ 모두 거문고 곡임을 잊지 말자. 핵심은 안익태가 염두에 둔 ‘강천성악’은 ‘야상곡과 에텐라쿠’로서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에텐라쿠’의 상위개념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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