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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의 山이야기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에 표범은 없었지만…

글 : 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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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리만자로’는 현지 언어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의미
⊙ 일행 중 한 명, 갑자기 뒤로 쓰러지며 혀가 말려… 1년간 준비해 온 등정 포기
⊙ “절벽에서 살고 있는 표범들이 간혹 캠프장으로 내려와 먹을 것을 찾는다”(가이드 조셉)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만년설과 함께 일출을 맞는 트레커들.
  ‘…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다 …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킬리만자로 /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어떠리’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킬리만자로(Kilimanzaro·6895m)는 아마추어 등산인들이 버킷리스트로 꼽는 고봉(高峰)이다. 가수 조용필의 노래 속 가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한몫 기여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거대한 평원에 원추형으로 치솟은 고봉의 모습이 인상 깊기 때문이리라.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이면서도 특별한 등반 기술 없이 오를 수 있다는 게 아마추어 등산인들에게 무엇보다 매력적인 산이다. 하지만 해발 7000m에 육박하는 고봉이기에 고산증(高山症)은 기본이요, 산행(山行) 시작 이후 매일매일 하루에 1000m 안팎의 고도를 높일 수 있는 체력, 고소적응력, 강한 정신력을 갖춰야 한다. 특히 마지막 캠프지에서 표고(標高) 1200m 안팎 고도를 극복하며 정상 우후루(Uhuru) 피크에 오르는 마지막 날엔 이 모든 상황이 극에 다다르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려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킬리만자로의 등로(登路)는 여러 가닥이다. 그중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등산인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산길은 투어리스트(Tourist) 루트 혹은 코카콜라(Coca Cola) 루트라 일컫는 호롬보(Horombo) 노멀 루트다. 만다라산장(Mandara Hut·2700m), 호롬보산장(Horombo Hut·3720m), 키보산장(Kibo Hut·4703m) 등 여러 산장에서 묵으면서 오르는 루트다.
 
  필자는 2007년 11월 편안한 길 대신 텐트에서 지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킬리만자로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멋들어진 조망을 더욱 즐길 수 있는 마차메(Machame) 루트를 따라 아프리카 최고봉 정상에 올랐다. 일행 중 한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풍토병으로 도중에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4000m 전후 고도의 허릿길을 따르다가 마지막 캠프지인 바라푸(Barafu·4600m)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기대 이상의 풍광은 일행 모두를 감동케 했다. 하지만 가수 조용필의 노래속 표범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정상 분화구의 만년빙하가 급속도로 녹아내리는 모습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그 빙하 물에 어디엔가 쓰러져 있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쓸려 내려가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생겼다.
 
 
  갑자기 뒤로 넘어간 동료
 
열대우림 경계선에 위치한 마차메 캠프. 키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몽환적 분위기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아침 10시를 넘어서면서 따뜻해진 대기에 피어오른 구름이 온 산을 덮어 버렸다. 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오후도 내내 구름안개 속에 갇혀 지냈다. 밤이 되자 세상이 바뀌었다. 새카만 밤하늘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 찼다. 그 빛을 받은 키보(킬리만자로 정상)는 빛났다. 아프리카 최고봉이자 세계 최대의 분화구(噴火口)다운 위용이었다. 새날이 밝아올 때면 신비로움은 한층 더해 갔고, 다시 구름안개가 몰려오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는 또 구름 속으로 들어섰다.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는 그렇게 하루 24시간 동안 색깔을 달리하며 타(他) 대륙의 이방인들을 맞아 주었다.
 
  첫날 마차메 게이트(Machame Gate·1800m) 출발 이후 한동안 산을 볼 수 없었다. 원숭이가 튀어나와 덤벼들 것처럼 우거지고 후텁지근한 열대우림을 가로지르는 산길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게다가 첫날 캠프지인 마차메 캠프(3000m) 도착 직전 송신영(당시 46세)씨에게 황당한 일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송씨는 나무등걸에 앉아 조정옥(50), 이기열(49)씨와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뒤로 넘어갔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혀가 말려들어가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막내 김영미가 송씨의 혀를 붙잡아 기도(氣道)가 막히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지만, 이 일로 인해 송씨는 1년간 별러 온 킬리만자로 등정 계획을 접어야 했다, 이튿날 후배 간병을 자청한 조정옥씨와 함께 마차메 캠프에서 하산한 송신영씨는 이후에도 심한 오한과 탈진 증세를 보였다. 현지 병원에서 진찰 받은 결과 말라리아로 판명됐다. 출국 전날부터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었기에 진단결과를 듣는 순간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국 후 국내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말라리아균은 발견되지 않았다.
 
 
  ‘빛나는 山’ 키보
 
킬리만자로에서 한 축을 이루는 시라 산맥의 조망이 일품인 시라 캠프.
  이튿날, 이렇게 우리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킬리만자로는 첫날과 다른 환상적인 풍광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한밤중 달빛에 반짝이던 설사면(雪斜面)과 설릉(雪稜)은 푸르른 열대우림 위로 솟구쳐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우리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찼다. 마차메 캠프를 지나자 나무의 키가 점차 낮아지면서 산 안팎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걷는다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산을 반쯤 가려 버리자 미로(迷路)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야생화들은 순간 순간 활짝 핀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는 가이드 조셉을 붙잡고 꽃의 이름을 묻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캠프 출발 3시간쯤 지나 널찍한 산마루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포터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프리카 현지인들은 삶을 즐겼고 활기가 넘쳤다.
 
  해발 3700m를 넘어 사면을 가로지르다 턱을 넘어서자 시라 캠프(Shira Camp·3830m)와 거대한 시라(Shira·3962m) 산군(山群)이 바라보였다. 세계 최대 분화구 키보(Kibo·6895m)를 중심으로 동쪽에 마웬지(Mawenzi·5149m), 서쪽에 시라가 솟아 있다. 킬리만자로를 이루는 세 개의 화산들이다.
 
  캠프 정리를 끝낸 뒤 가이드 조셉이 ‘킬리만자로’의 어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킬리만자로 기슭에 사는 차가(Chaga)족은 ‘산’이란 뜻의 ‘킬레마(Kilema)’와 ‘오르기 어렵다’는 의미인 ‘캬로(Kyaro・‘추위를 만드는 악마’라는 뜻도 있음)’를 합쳐 ‘킬레마캬로’라 불러 왔는데, 이를 19세기 들어 독일 사람들이 ‘킬리만샤로(Kilimansharo)’로 불렀고, 이후 아랍어와 스와힐리어(아프리카 남동부 지역 공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이름인 ‘킬리만자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고 한다. 또한 조셉은 “정상 키보는 ‘빛나는 산(Shinning Mountain)’이란 뜻으로 ‘키포(Kipo)’가 맞는 명칭”이라 강조했다.
 
  킬리만자로를 초등(初登)한 사람은 1889년 10월 5일 이 산을 오른 독일인 한스 마이어(Hans Meyer)와 루드비히 푸르셀러(Ludwig Purscheller)였다. 한스 마이어의 초등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지명이 키보산장과 길만스포인트 사이의 동굴에 붙은 한스 마이어 동굴이다.
 
 
  겨울 한라산 연상케 해
 
라바타워로 향하는 일행. 키보 화구벽에 붙은 만년설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시라 캠프에 도착, 김영미씨가 만들어 낸 골뱅이 안주에 매실주를 한 잔 하는 사이 빗방울이 후드득이더니 곧 멈추었다. 그러곤 하루 종일 메루산(Mount Meru·4566m·아프리카 제5위 고봉)을 짓누를 듯 무겁게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갈라지면서 햇살이 쏟아졌다.
 
  “와~, 킬리만자로다.”
 
  키보도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하얀 만년설 덮인 키보는 순수함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만큼은 아무도 밟지 못한 처녀봉이다.
 
  “정말 겨울 한라산 같아요. 모시(Moshi)의 불빛은 한라산 장구목에서 제주시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에요.”
 
  어둠이 밀려오자 산마을은 많은 불빛으로 밝아졌고, 달빛 받은 키보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바랑코 캠프(Barranco Camp· 3950m) 가는 길은 라바타워(Lava Tower·4600m)까지 오르막 일색. 조셉은 “폴레 폴레(pole pole·slow slow)” 반복하며 천천히 가라고 당부했다. 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기열씨와 김영미씨는 평원에 솟구친 메루산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하느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셉은 우리에게 운이 좋다고 한다. 이렇게 아침에 출발할 때와 저녁에 야영지에서는 조망을 즐길 수 있고, 기온이 올라갈 무렵이면 구름이 몰려와 더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구름이 몰려와 키보는 모습을 감추고, 우리도 곧 구름 속으로 들어섰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희귀한 형상의 식물인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군락지. 바랑코 캠프 위쪽에 있다.
  “선배님들이 7대륙 최고봉 가운데 가장 멋없는 산이 킬리만자로라고 하던데 그게 아니네요. 이 길을 따랐다면 가장 멋있는 산으로 꼽았을 텐데 말이에요.”
 
  이미 5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고, 에베레스트도 두 차례나 등정을 시도해 봤던 김영미씨는 순간 순간 색다른 풍광으로 변신하는 킬리만자로에 흠뻑 반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킬리만자로를 다녀간 등산인들 대부분 변화가 적고 삭막한 분위기의 마랑구 루트를 따랐기에 그런 평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밤중 달빛에 반짝이는 키보 만년설(萬年雪)과 산 아래 마을 불빛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잠이 들고 깨어난 이튿날은 절벽길을 올려쳐야 하는 날이다. 어제 오후 조셉은 “키 작은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는 절벽에서 살고 있는 표범들 가운데 배고픈 놈들은 간혹 캠프장으로 내려와 먹을 것을 찾는다”며 “자다가 텐트 밖으로 팔이나 다리를 내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겁을 준다. 키가 180cm 훨씬 넘고 체격이 당당한 조셉은 외모답지 않게 간혹 농담을 해대 즐거움을 주었다.
 
  오늘 트레킹 중 지나칠 최고 높이는 라바타워(Lava Tower·4600m) 안부. 외국 트레커들은 20여 분 아래 라바타워 캠프장에서 점심을 먹고 올랐지만 우리는 고소적응을 위해 안부에서 충분히 쉬면서 도시락을 까먹기로 했다. 그러나 을씨년스런 날씨에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랑코 캠프장으로 내려서야 했다.
 
  “야, 이건 완전히 키네시오 농장이네요.”
 
  라바타워 안부에서 바랑코 캠프장까지는 표고차 약 700m의 쏟아질 듯한 내리막. 그래도 삭막한 사막에서 파랗게 빛나는 오아시스로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숲 때문이었다. 킬리만자로에서 자생하는 키네시오 킬리만자리가 유일하게 군락(群落)을 이룬 곳이다.
 
  400년 넘게 산다는 키네시오 킬리만자리는 묘하게 생긴 식물이다. 어떤 것은 외가닥으로 5~6m 높이로 자라고, 또 어떤 것은 선인장처럼 서너 가닥 가지를 치며 자랐다. 꼭대기 잎이 말라붙으면 밑으로 처져 나무를 덮었다. 고산에서 추위를 견뎌내기 위한 생존법인 듯싶었다. 그 키네시오 킬리만자리를 지나칠 때면 신비롭고 원시적인 아프리카로 들어선 기분이 들어 흐뭇했다.
 
 
  폭포
 
카랑가로 향하다 내려다본 바랑코 캠프. 폭포와 계곡을 끼고 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시라 캠프 출발 5시간 반 만에 도착한 바랑코 캠프는 뒤편으로 라바타워가 절벽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200여 m 높이의 거대한 절벽이 돌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캠프장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바위병풍이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낭떠러지를 이룬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물에 발 담근 채 피로를 풀고 있는 트레커가 있는가 하면 절벽 끄트머리에 앉아 조망을 즐기거나 사색에 잠긴 트레커들도 보였다.
 
  밑에서는 틈이 전혀 보이지 않던 거대한 절벽에 산길이 잘 나 있었다. 표범들이 어슬렁거리며 다닐 만한 길처럼 느껴졌다. 절벽을 오르는 사이 바랑코 캠프장은 또 다른 풍광으로 우리를 흥분시킨다.
 
  “우와~, 폭포다.”
 
  삭막하게 느껴진 킬리만자로에 물이 퀄퀄 흘러내리는 계곡뿐만 아니라 폭포가 있다니-. 캠프장 아래로 아름다운 3단 폭포가 물을 퍼붓고 있었다. 절벽 위에 올라서자 능선마루의 바라푸 캠프(Barafu Camp·4600m)가 멀찌감치 바라보였다. 서부 영화 속의 인디안 주거지를 보는 듯한 지형이다.
 
  오늘 묵을 카랑가 캠프(Karanga Camp·3930m)까지는 2시간30분 거리이고, 내일 지낼 바라푸 캠프까지도 대여섯 시간 거리다 보니 하루에 밀어붙인들 별 무리 없겠다 싶었으나 일행 모두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고소적응 시간을 넉넉히 갖자는 데 네 사람 모두 합의를 보았다.
 
  마지막 물줄기에서 친구인 석상명(49)씨와 함께 발을 씻을 생각에 신발 끈을 풀자 조셉은 아래쪽에서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에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이 물줄기는 음브웨(Umbwe) 루트 캠프지로 흘러내린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
 
바랑코 캠프를 출발, 절벽을 올라선 다음 환하게 웃고 있는 일행.
  마지막 물줄기에서 가파른 사면을 10여 분 올라서자 카랑가 캠프. 바랑코 캠프와 달리 경사진 사면을 깎아 만들었지만 제법 널찍하다. 마차메 루트와 음브웨 루트가 만나는 지점이고, 두 트레일을 따르는 트레커들이 만나는 캠프장이다 보니 넓을 수밖에 없다.
 
  또다시 밤을 맞는다. 구름이 벗겨지자 메루산이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듯 솟구쳐 올랐다. 키보는 다시 달빛과 별빛에 반짝이고, 산 아래 마을은 불빛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다. 어제와 달리 살짝 흥분이 일었다. 내일 밤 출정에 나서기 때문인가 보다.
 
  새벽 1시경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조용하다. 비슷한 높이의 설산이라면 크고 작은 눈사태나 크레바스 갈라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나기 마련이건만 킬리만자로는 너무도 조용했다. 그렇지만 산 아래 마을 불빛과 교교히 흐르는 달빛에 맑은 빛을 띠는 키보는 너무도 아름답다. 캠프 위쪽으로 랜턴 불빛이 보인다. 정상을 향하는 이들의 움직임이다. 24시간 뒤면 나도 저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카랑가 캠프의 아침. 하루쯤 더 쉬었다 가고픈 유혹을 받는 곳이다.
  11월 29일. 메루봉이 아침을 맞아 불쑥 솟구친다. 우리에게 힘내라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다. 카랑가에서 바라푸까지는 2시간 조금 넘는 거리다. 1시간쯤 오르자 캐나다 모녀와 오스트리아 청년이 쉬고 있다. 킬리만자로에서 만나 함께 트레킹하는 중이라고 한다. 방학을 맞아 중학생 딸을 데리고 킬리만자로를 찾았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말에 모녀 모두 즐거워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오스트리아 청년은 조금만 더워도 웃옷을 벗어 버리는 등 건강미를 자랑해 일행에게 부러움을 샀다.
 
  바라푸 캠프가 보이자 일행 모두 힘이 솟는가 보다. 조셉을 제치고 쭉 뽑는다. 그러자 조셉은 “킬리만자로 가이드를 기죽이려 하느냐”며 엄살 부리고, 반면 이기열씨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더욱 힘차게 오른다.
 
  키보에서 뻗어내린 능선상의 캠프인 바라푸에 올라서는 순간 열댓 살 나이의 소년이 내려섰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이었다. 어린 소년의 얼굴과 눈빛에서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역시 아프리카 최고봉을 올랐다는 자부심 때문이리라.
 
  능선에 올라서자 불꽃 같은 기세로 솟구쳐 오른 마웬지가 보이고 마랑구 루트가 가로지르는 고원사막이 내려다보였다. 시라에서 키보 남사면을 바라보고, 동단의 마웬지까지 보게 되었으니 킬리만자로의 반은 보았다 싶다. 제주도 면적의 두 배에 이를 만한 큰 산답게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 킬리만자로였다.
 
 
  “내가 드디어 해냈다!”
 
우후루피크에 올라선 이기열, 석상명, 김영미씨(왼쪽부터). 이기열씨는 일출 장관에 넋을 잃고 있다.
  잠시 풍광을 즐기는 사이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오더니 키보를 감춰 버린다. 주방장 겸 리더인 김영미씨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사이 하늘이 어수선해진다. 눈보라가 치고, 싸락눈이 내리고, 강풍이 몰아쳤다. 그런데 조셉은 우리에게 운이 정말 좋다고 한다. 이런 날 밤에는 바람도 거의 없고, 기온도 포근하다고 했다.
 
  대낮에 잠을 청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머리는 맑기만 하다. 까마귀는 깍깍대다 텐트 옆 바위에 앉는다. 현지인들이 던져 주는 먹을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람쥐처럼 생긴 쥐들은 어디서 나왔는지 이곳저곳 다니면서 부스럭거린다. 그렇게 신경이 곤두섰다 몽롱해졌다 하는 사이 밤 10시가 되었다. 김영미씨가 끓여준 누룽지 한 공기씩 먹고 키보의 정점 우후루피크로 향했다. 별을 따러, 꿈을 찾아-.
 
  능선길 두어 시간, 급사면 길 두어 시간-. 분화구상의 바위인 스텔라포인트(Stella Point·약 5750m) 아래 안부에 올라선 것은 오전 4시30분, 바라푸 출발 5시간 만이었다. 일행 중 체력과 고소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석상명씨는 변비 치료를 위해 먹은 설사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툭하면 설사를 하는 등 곤욕을 치렀는데도 끝내 스텔라포인트에 올라섰다. 이제 150m만 오르면 아프리카 최고봉의 정점이다.
 
  마랑구 루트 마지막 산장인 키보산장에서 출발한 트레커가 가이드와 함께 우후루피크로 향한다. 한쪽은 빙하, 한쪽은 분화구를 이룬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사이 등뒤로 구름바다를 뚫고 햇살이 올라오고 마웬지도 창끝 같은 정수리를 슬며시 드러냈다.
 
  “정옥아, 신영아~, 내가 해냈다.”
 
  오전 5시30분, 우후루피크 정점 앞에 다가서자 이기열씨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등정의 기쁨을 쏟아낸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자 분화구가 전모(全貌)를 드러내고, 외곽으로 거대하게 형성된 빙하가 반짝인다. 기상학자들이 몇십 년 안에 다 녹아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빙하는 키보를 감싼 채 반짝이기 시작했다.
 
  조셉은 너무 오래 머물면 고소증세가 나타나고 지치므로 어서 내려가자고 재촉해댄다. 하지만 일행은 일출 풍광에 넋을 잃고, 조망에 감탄하고, 사진 촬영에 열중하느라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키보는 구름을 뚫고 솟구친 아침해와 더불어 다시 새날을 맞고, 수많은 트레커들이 우후루피크를 향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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