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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生의 마지막 기록’ 墓碑銘을 찾아서

눈물은 끝났을까. 고요만 있는 묘지, 당신들은 죽음 뒤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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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편케만 해주던 당신… 존경하며 살아왔소, 곁에 묻히리다“
(양화진 묘역의 어느 碑銘)

⊙ “뜻은 창생을 구함에 있을 뿐, 이름 얻으려 함이 아니라”(애국지사 채원개)
⊙ “최고의 권력·재력·학식…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공공을 위해 올바로 쓰여야 한다”(애국지사 서상교)
⊙ 서울시립묘지 4곳, 성묘객은 10분의 1로 줄고 埋葬 아닌 火葬·移葬 추세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충열대 옆 애국지사 묘역. 묘비 아래 기단에는 고인 기리는 충심 어린 묘비명이 적혀 있다. 사진=신승민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있거늘 / 의기 남아로서 어찌 망할 때를 기다리랴 / 진충갈력 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요 / 이름 얻으렴(얻으려 함)이 아니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애국지사 고(故) 채원개씨의 묘비명(墓碑銘)이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고인의 큰 뜻이 담겼다. 기단을 놓지 않고,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 사병들 곁에 묻힌 채명신 장군의 묘비명도 인상 깊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채 장군의 묘지 양옆에는 붉고 하얀 꽃들이 놓여 있었다.
 
  묘비명은 고인의 일생을 기념하거나 업적을 갈무리한 글이다. 지인·가족들이 사후(死後) 지어주거나 고인 스스로 생전에 미리 써놓는다. 비석에는 보통 고인의 이름, 생몰연대, 출신 성분, 후손 명단 등을 새긴다. 그 밖에 시·유언 같은 글귀 형태로 아쉬움·뿌듯함·초연함 등 여러 감정을 담아 ‘생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 것이 묘비명이다. 기자는 국립서울현충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서울시립공동묘지 4곳(벽제리·내곡리·망우리·용미리 묘지)에 남겨진 선인(先人)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鬪士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묘역의 전경. 애국지사 묘역에는 한시·애도시·사자성어부터 성경 구절까지 다양한 형식의 묘비명들이 있었다.
  현충원 정문에서 뒤편 끝까지 걸어가면 참전용사,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할 수 있는 충열대가 나온다. 충열대를 기준으로 양옆, 정면에 애국지사 묘역이 있다. 묘지마다 잘 닦인 제상(祭床)과 알록달록한 꽃병들이 보였다. 날이 더웠다. 태풍이 남해안에서 올라오던 때였다. 참배객은 없었고 매미들이 울었다. 잠자리가 낮게 날았다. 땀을 닦으며 걷다가 순국선열 김천성씨의 묘비에서 멈춰 섰다.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곳곳에 한시·애도시·사자성어부터 성경 구절까지 다양한 형식의 묘비명들이 있었다. 그중 기자에게 가장 와 닿는 글귀는 이 한 문장이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독립운동에 나선 고인의 호국 의지가 느껴졌다.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글귀는 여럿이었다. ‘天下爲公 -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공공을 위해 올바로 쓰여야 한다. 최고의 권력, 최고의 재력, 최고의 학식 그 무엇이든’(애국지사 서상교),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시키려고 하였더니 /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가게 됨이 원통한즉 /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기 바란다. /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순국선열 이수흥)
 
  60대 여성 해설사는 “최근 70대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부친의 묘역을 처음 찾아온 적이 있었다. (6·25 참전용사) 일병 ‘누구’라고 해서, 그 이름 하나만 가지고 물어물어 오셨더라”며 한 사연을 들려줬다. 그의 말이다. “아들 두 명, 며느리 한 명, 손자 두 명이랑 오셨어요. 태어나서 처음, 70년 만에 자기 아버지가 여기 묻혀 있는 걸 알고 오신 거예요. 시신도 못 찾은 채, 아버지 이름 하나만 갖고 대전(현충원)에도 물어보고, 그렇게 여기 현충탑에 온 거죠. 말씀을 하면서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셨어요. 본인이 딸인데, 서너 살 때 아버지가 참전을 해서 헤어졌대요. 자신을 큰아버지 밑에 양녀로 보낸 어머니는 재가(再嫁)를 해서 떠났고요. 친아버지 계신 곳을 모르니, 그동안 ‘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 묘역은 선교사들의 묘지답게 십자가 문양과 성경 구절이 자주 보였다.
  다음날 서울 합정동 양화진 묘역에 갔다. 조선 개화기 당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안장하기 위해 1890년 조성된 곳이다. 2005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교회와 행정 건물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안장된 외국인들 중에는 선교사 외에도 군인·교육자·간호사 등 다른 직업인도 있다.
 
  합정역에서 양화대교 쪽으로 걷다 사잇골목으로 들어갔다. 묘역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자 참배객 한 무리가 보였다. 교회에서 나온 노인 신도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신도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봉분과 묘비를 바라봤다.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청하는 등, 조선의 독립과 교육에 힘쓴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Hullbert) 박사의 무덤이었다.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듬해인 1949년 7월 말, 국빈으로 초청돼 가는 배 위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음달 5일 별세했다.
 
  당초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묘비명을 적어주려 했지만, 건국 초기의 어려움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비명 없이 50년이 흐른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일곱 글자가 새겨졌다. 성명 옆에는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親友)’라는 찬사와 한국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유언이 적혀 있었다.
 
  양화진 묘역은 선교사들의 묘지답게 십자가 문양과 성경 구절이 자주 보였다. 기와를 입힌 전통 형태의 비석 말고도 십자가 자체를 비석으로 쓴 무덤도 있었다. 날은 후덥지근했고 하늘엔 먹구름이 꼈다. 마른 플라타너스 잎이 봉분 위로 굴러갔다. 반대편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완만한 비탈에도 작은 비석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검은 대리석에 쓴 묘비명이 눈에 들어왔다. ‘인류발전사에 공헌할 수 있었던 / 너희들이었는데… / 아깝다! 억울하다! / 명복을 빈다 - 아빠가.’ 14·16세에 세상을 떠난 어린 두 자녀를 보고파 하는 아버지의 통곡이었다.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토록 나를 편케만 하여 주던 당신! / 참으로 존경하며 살아왔었는데… / 당신 곁에 묻히겠소 / 명복을 비오 - 夫가.’
 
  묘역을 둘러보던 20대 여대생 두 명은 “저희가 교회를 다니는데, 아펜젤러·언더우드 (가문) 등 말로만 듣던 유명한 선교사님들이 묻혀 계신 곳이라고 들어서 오게 됐다”며 “묘지라서 그런지 기분이 다르다. 우리가 아직 어린 대학생들이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소회다. “선교사분들이 복음 전파뿐 아니라 교육 봉사로도 유명하시잖아요. 그분들이 남긴 업적이 실제적으로 와 닿는 느낌을 받아요. 그분들이 남기고 가신 게 지금 우리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 전체를 도와주고 가신 거나 다름없으니까…. 무엇을 남기고 가는 게 진짜 옳은 삶인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드네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通俗하거늘”
 
서울 망우리 묘지에 세워진 박인환 시인의 시비(詩碑)와 양화진 묘역 내 헐버트 박사의 묘비명.
  기자가 다음주에 들른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는 산중(山中) 묘지였다. 망우동·면목동과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산에 무덤 7425기가 있었다. 망우리 묘지는 일반인은 물론, 문학·미술·음악 등 문화인과 독립운동가 등 유명 인사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서울시에서 둘레길을 조성해 등산하듯 올라갈 수 있었다. 산자락은 물론 오르내리는 길목마다 봉분이 보였다. 대리석 재질의 검은 비석과 제상, 분향(焚香) 그릇에 빗물이 흘러내렸다. 풀잎 사이로 개구리가 튀어 올랐다. 산 밑에서 기자를 뒤따라 무덤으로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지나자 산책·운동하는 인근 주민들이 몇 명 있었다. 빗속을 뚫고 달리는 등산객과 자전거가 무덤가를 스쳐 갔다. 한 60대 등산객은 “망우리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공동묘지라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산책할 수 있다”고 했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흔히 생각하듯 ‘공동묘지에 대한 두려움’은 다들 없어 보였다.
 
  아스팔트로 덮인 둘레길 옆에 샛길이 나 있었다. 유명인 묘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화살표를 따라 내려가자 제일 먼저 박인환 시인의 묘지가 보였다. 봉분과 묘비 모두 아담했다. 풀들 가운데 손마디만 한 흰 꽃이 보였다. 묘비명은 그가 남긴 유명한 시구(詩句)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유명인 묘소 초입마다 고인의 생전 명언을 새겨놓은 바위가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박인환 시인 〈목마와 숙녀〉’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 공리요 철칙이다. - 문일평 선생 〈애원서(哀願書)〉’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 희망을 위하여. /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 방정환 선생 〈어린이날의 약속〉’
 
 
  그림 새긴 이중섭, 단출한 碑銘 조봉암
 
서울 망우리 묘지에 조성된 조봉암 선생의 묘소(좌)와 같은 곳 이중섭 화가의 묘소. 이중섭의 검은 비석에는 글귀 대신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묘비에 글 대신 그림을 새긴 화가 이중섭, 봉분 옆에 태극기가 꽂혀 있는 승려 겸 독립운동가 한용운을 거쳐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의 묘소로 왔다. 망우산에서 본 단일 묘지 중 가장 넓었다. 봉분에 두른 석재 기단에 비둘기로 보이는 새가 조각돼 있었다. 큼지막한 비석에는 특별한 글귀 없이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巖先生之墓)’만 새겨져 있었다. 내려갈 때 바위에 적힌 그의 어록을 읽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서울 망우리 묘지에 조성된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소. 부인과 함께 안장돼 있고, 묘비 앞에는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50대 행인은 “등산을 목적으로 와서 (묘소를) 잘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분들이 가까운 산책로에 계시는 건 좋다. 독립운동가분들을 더 자주 기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면목동에 사는 40대 주민 2명은 “망우산에 산책하러 자주 온다. ‘비 오는 공동묘지’ 무섭다고 하지만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며 “물론 먼저 살다 간 분들의 묘소를 바라볼 때면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이다. “운동하러 오는 분들이 많은데, 다들 저희와 같은 마음이겠죠. 경건하고 숙연하고 감사하고…. (산) 위로 올라가 보면 비석마다 총알 자국들도 있어요. 아이들 데리고 오면 역사 교육도 될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의 묘지는 확 드러나게 부각시켜 줬으면 좋겠어요. 일반인들과 (부지를) 평등하게 조성한 것도 좋지만, 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게 해줬으면 하네요.”
 
  망우산을 내려온 그날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내곡리 묘지로 갔다. 호우특보 문자가 휴대폰을 울렸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버스에서 내리자 빗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내곡2리 마을회관에서 묘지로 가는 길을 물었다. 노인회장은 “차로는 저기 (묘지 부근) 집까지밖에 못 가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며 “요즘은 예전처럼 찾는 사람도 많지 않다. 명절 직전에만 벌초하러 잠깐 온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벌초 때라도 열몇 명 오면 많이 오는 편이죠. 살아 있는 부모도 잘 모셔야 되지만, 또 조상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되죠. 벌초도 좀 깨끗하게 하고 성묘도 많이 왔으면 좋겠네요.”
 
 
  봉분 위에 남은 ‘자전거 바퀴 자국’
 
  빗속의 내곡리 묘지는 쓸쓸해 보였다. 봉분도 비석도 이전에 본 묘지들보다 작았다. 등산로가 있다지만 풀들이 무릎까지 올라와 길을 찾기 어려웠다. 잎이 우거진 과수원 나무들, 폭우에 쓰러진 소나무 묘목, 벌건 토사(土砂)가 진입로를 막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조상과 부모·형제를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남아 있다. 먼저 간 선인을 추모하는 게 산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묘비명을 지어 고인의 뜻을 기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동묘지 지역 주민들은 “과거에 비해 세태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내곡리 묘지 인근에서 공사를 하는 60대 노인은 “설날·추석 앞두고 오는 사람들이 성묘객의 전부인데, 그마저도 (후손들이 벌초를 의뢰한) 전문 업자들로 보인다”며 “성묘객들이 내려오는 길에 술병 등 각종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묘지 내 관리사무소가 플래카드를 붙여서 경고하지만 소용없으니, 주민들은 그거 치우느라 짜증이 난다”고 했다.
 
  50대 토목업체 사장은 “내곡리에서 토박이로 산 지 반세기가 넘었다. 1990년대에 비해 성묘객이 10~20%로 줄었다”며 “성묘객도 명절 전에 미리 벌초하고 당일에는 해외여행을 떠난다. 최소한 내 나이 밑의 세대들은 조상 모시는 문화를 더 배우고, 명절만큼은 당일에 와서 참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앞서 들른 망우리 묘지 관리사무소 직원은 “등산객들, 특히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묘소를 마구 헤집어놓는 경우도 있다”며 “자전거가 오갈 수 있는 길이 묘지 근처다 보니, 봉분을 그대로 타고 넘어서 바퀴 자국이 날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튿날 들른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묘지는 초입부터 잘 정돈돼 있었다. 도로를 크게 뚫어 묘역 전체를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비석이 가지런하게 세워져 있었고, 무덤 크기도 일정했다. 이미 벌초를 끝낸 묘지도 보였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 본, 옹기종기 모인 작은 묘지들에는 묘비명이 없었다. 대신 장례업체 광고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산 아래 공장의 50대 직원은 “비석에 본인과 자식 이름 말고, 따로 비명을 새긴 경우는 보질 못했다”며 “이제 무덤을 찾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고 했다.
 
 
  이미 묻힌 조상까지 파내 火葬하는 세태
 
경기 파주시 용미리 묘지(우)는 작은 무덤들이 운집해 있었고, 경기 고양시 벽제리 묘지는 초입부터 험한 산길이었다.
  ‘용미리 토박이’ 60대 주민은 “요즘은 단독 매장은 거의 없고, 부부 합장(合葬)만 간혹 들어온다. 그것도 (관이 아닌) 대부분 화장(火葬)을 마친 유골함을 두 개씩 묻는다”며 “지금은 이장(移葬)도 많다. (관리하기가) 번거로우니까 이미 매장한 걸 도로 파서 화장한 다음, 아무 데나 뿌리는 것”이라고 했다. 유족들 대신 묘지 관리를 해준다는 50대 슈퍼마켓 주인은 “자손들이 자주 들를 수 없으니까, 대신 벌초해 주거나 (벌레·잡초를 막는) 약을 쳐준다. (기단의) 돌이 깨지면 보수도 한다”며 “예전에는 매장이 90%, 화장이 10%였는데 지금은 거꾸로 됐다. 이 일을 하는 나조차도 그렇지만, 사실 묘지 관리가 쉬운 게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용미리를 떠나 버스를 타고 경기도 고양시 벽제리 묘지로 갔다. 입구 양옆에 세워진 컨테이너 건물 외벽에는 ‘장묘(葬墓)’ 업체들의 광고성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시립묘지 4곳 중 가장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수로를 따라 가는 길, 묘역 중앙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둘 다 험했다. 60대 관리소장은 “이곳은 조성된 묘지가 아닌, 임시로 만든 야산 묘지였다. 1963년 매장을 시작, 1992년 1만5000기로 만장(滿葬)이 됐다”며 “1998년 폭우로 묘지가 훼손된 뒤부터 매장이 금지됐다. 화장 문화가 들어오고 이장이 많아져 지금은 9800기가 남았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작년에는 300기 정도가 이장됐습니다. 평일 하루 성묘객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습니다. 세상이 변해서 묘지 문화도 다 사라지는 추세죠. 이제는 납골당에도 추모 공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다 끝내는 거죠.”
 
  60대 편의점 주인은 “8월에 폭염 꺾인 뒤 성묘객이 조금 왔다. 얼마 전에는 한 아주머니가 충청도에서 올라왔다”며 “벽제에 모신 친정아버지 성묘하러 왔다더라. 북어포 등 간단한 제사용품을 사 갔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제가 바로 제사를 오래 모신 세대 아닙니까. 힘들죠. 요즘은 한 집안에 모실 조상이 많으면 합동 차례를 지내던데. 세상이 예전 같지 않음은 알지만, 그래도 먼 길 온 성묘객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호감이 갑니다. ‘쉽고 편한 걸’ 찾는 사람들보다는 더 인간미가 느껴져요.”
 
 
  “어르신들 떠나면 누가 이 묘지를 돌볼지…”
 
  서울역부터 벽제리를 왕복하는 790번 버스의 40대 기사는 “예전에는 성묘객들로 길이 다 막힐 정도였다”며 “지금은 벽제까지 성묘하러 오는 사람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다. 그분들 돌아가시면 누가 이 묘지를 돌볼지 걱정”이라고 했다. 벽제리 묘지가 종점인 85번 버스의 60대 기사도 곁에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랄 때만 해도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할 줄 알고, ‘안 되는 것’ ‘되는 것’ 가릴 줄을 아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게 없어요. 인성 교육이 안 돼 있어요. 자기 위주죠.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거예요. 여기 벽제 묘지도 그래요. 자꾸 (묻힌 고인을) 파 가는 게 뭐냐면, 자기 편하자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화장을 해서 (흔적을) 없애버리는 경우가 태반이고…. (묘지를) 안 돌볼 거면, 놔두라 이겁니다. 벌초나 성묘 안 할 거면 ‘차라리 묵히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연 그대로, 시간 지나면 산으로 다시 돌아갈 테니까요.”
 
  각자 삶에 대한 의욕은 그토록 강하면서, 어째서 우리는 주변의 죽음에는 소홀했던 걸까. 삶은 아직 푸르고 젊으니, 죽음은 먼 일로 여기는 걸까.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양화진 묘역을 돌아보던 20대 여대생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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