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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 추억

5월에 특별한 윤석중 방우영 두 분, 화첩에서 다시 만나다

글 : 김정  원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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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면 누구나 읽어 봤을 윤석중의 동요·동시… 정신적 고향을 느끼게 키워 주신 위대한 분”
⊙ “(방우영은) 오늘의 《조선일보》를 일등신문으로 만들고 언론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목”

김정
1940년 출생. 경희대 및 동대학원 졸업. 독일 아우스부르크대학원 석박사 복합4년 마침(prof.H. Sandtner) / 아리랑그림테마 50년 작업해 옴, 개인전 국내외 24회, 전공관련 학술등재 논문 27편 / 숭의여대 명예교수, 한국조형교육학회 고문, 한독미술협회 전 고문
  매년 새봄이 오는 5월이지만, 금년 5월은 한국 문화의 거목, 두 분의 역사가 숨어 있다. 워낙 거대한 문화 업적을 일궈 놓으셨기에, 이달은 필자 보관의 45년여 전 수첩과 스케치북을 통해 당시의 윤석중 방우영, 방우영 윤석중 두 분을 기억하는 특별한 5월이다. 윤석중님은 1911년 5월 25일 태어나셨고, 방우영님은 2016년 5월 8일 타계하셨다. 따라서 두 분은 생과 사를 같은 달에 맞추신 묘한 인연이셨고, 생전에도 아주 가까운 사이셨다. 푸른 5월의 꽃길 속에 승천하신 방우영님과 윤석중님께 예의를 갖춰 지난날의 문화적인 추억을 만난다. 두 분의 생전 모습을 당시의 필자 현장 스케치로 생생한 모습으로 되살려 보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평소 두 분을 존경해 오던 필자가 수첩이나 작은 스케치북에 담아 온 순수한 예술적 입장에서 보는 ‘역사의 숨소리’다.
 
 
  윤석중, ‘어린이날’ ‘새나라의 어린이’ 등 어린이 노래 1000여 편 창작
 
1979년 윤석중 선생.
  윤석중님(1911년 5월 25일 ~ 2003년 12월 4일) 하면 바로 어린이날이 저절로 떠오르는 분이다. 2018년 5월 현재 ‘어린이날’ 노래도 72년 전 부를 때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에겐 즐겁고 희망을 주는 활기찬 메시지다. 이 노래 가사 시를 쓰신 윤석중님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어린이를 지극정성 사랑해 온 분이다. 어린이날 노래는 1946년 3월초 서울 서대문의 춘수정(春水亭) 음식점에서 김억(시인, 6·25납북), 정홍교, 윤석중 3인이 만나서 ‘어린이날’ 논의를 했고 윤석중님이 시를 썼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노래 작곡은 안기영이 했으나 월북해서, 현재의 작곡은 월남한 윤극영이 1948년 봄에 새로 다시한 것이다. 〈윤석중전집, 어린이와 한평생, 웅진출판주식회사, 1988. p15.〉
 
  초등학교 졸업식 때 어김없이 부르는 노래도 윤석중님 작품이다. 처음 시를 써서 1946년 경기도 학무국과 문교부에 보냈더니, 문교부에서 수정사항이 왔더라는 것이다. 예컨대 형님을 언니로, 동생을 아우로, 걸머지고를 짊어지고로 다듬었던 것. 그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였다. 학자였던 최현배 국장이 교정을 본 것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이하 생략.
 
  노래의 첫째 연은 재학생이 부르고 둘째 연은 졸업생이, 셋째 연은 다함께 부르는 감동의 합창이었다. 졸업식 노래는 해방의 광복 직후부터 바로 첫 졸업식에 모두가 부른 감격스런 노래였다.
 
  이와 더불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동요 ‘새나라의 어린이’도 광복 후 우리나라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큰 영양제였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하생략. 〈윤석중전집, 어린이와 한평생, 1988. p17.〉
 
  이 동요 가사는 윤 선생이 해방된 그날 밤 감격에 젖어 잠을 못 이루면서 밤새도록 앉았다 섰다 하면서 짓고 고치고 작시한 것이라고 1986년 사무실에서 필자에게 언급하시기도 했다. 해방의 감격은 윤석중 선생의 가슴을 다스릴 수 없을 만큼의 큰 요동과 자극, 설렘과 기쁨 등이 뒤섞여 뭔가 마음을 진정시킬 만한 차분한 자세가 요구된 뒤에 이 노래 가사를 쓰신 듯하다.
 
  우리가 잘 아는 ‘책상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의 동시는 윤 선생이 서울 교동초등학교 5학년 때인 14살에 지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해 1925년 《어린이》지 4월호에 발표했던 것이다. 이렇듯 윤 선생이 평생 창작한 동요와 동시의 어린이 노래만도 1000여 편이라는 이하석 시인의 연구도 있다. 이 시인은 윤석중을 〈한국인의 영원한 어린세계〉란 글에서 70평생에 1000여 편의 동요를 써 온 이 지구상 아주 드문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래의 짧은 동시 ‘먼길 1’을 제시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일상적 모습이지만 창작을 통한 느낌은 커다란 애정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이면 누구나 몇 번씩은 윤석중 선생의 동요 동시를 안 읽어 본 국민이 없으리라 본다. 어린 시절 아무리 음치라 하더라도 100여 노래는 부르면서 한국인 정서를 익혀 왔던 것이다. 이런 우리의 정신적 고향을 느끼게 키워 주신 위대한 분이 바로 윤석중님이다.
 
필자가 그린 계간 《새싹문학》 표지와 윤석중 작가 마지막 출간서적.
  필자가 윤 선생을 처음 뵌 것은 60년대 중반. 군복무 3년을 마치고 3학년 복학 후 등록금 부담에 힘이 들 때다. 그래서 월간 《새벗》 《학원》 《여원》 등에 삽화도 그렸다. 박고석 선생의 코치를 받고 조금씩 헤쳐 갔다.
 
  당시 월간지 《새벗》과 《학원》 《여원》 《주부생활》 잡지는 인기가 좋아 많이 팔렸다. 《새벗》에 이원수 창작동화 그림을 필자가 그리기도 했다. 그 당시엔 화가 박고석 장욱진 우경희 천경자 백영수 이승만 이일녕 김영주 송영방 김영덕 김정 등이 주로 참여, 필자가 막내였다. 《학원》과 《새벗》 등 아동잡지에 실린 동시, 소년소설 등에서 필자 그림을 보신 윤 선생님은 나를 기억해 주셨다.
 
  1967년 국립공보관에서 문인들 시화전 하실 때, 윤 선생이 나에게 시화전 그림을 의뢰하셨다. 그 후 몇 차례 또 소년잡지에 윤 선생 글에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가까이 자주 뵙게 됐다. 당시 윤 선생의 새싹회 사무실은 광화문 조선일보 구건물 1층에 있었고, 50대 후반이셨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윤석중 선생은 정기적으로 계간 《새싹문학》을 발행하셨고 문학상을 비롯한 글짓기 행사로 매우 바쁘셨다. 《새싹문학》지 표지를 비롯해 필자도 유명인사 인터뷰 기사 등 봉사 참여하며 한 식구처럼 도와 드렸다.
 
1978년 윤석중 작가의 막사이사이상 수상 국내 축하장에서. 왼쪽부터 김정, 유경환, 윤석중 작가 내외분. 오른쪽 사진은 1979년 세계아동의해 기념 새싹회 주최로 출판문화회관 전시장에서 열린 ‘김정초대전’에서 사인하는 모습.
  1979년은 국제적 ‘세계아동의 해’였다. 새싹회 주최 ‘세계아동의 해 기념’ 어린이 테마 그림만 모아 출판문화회관에서 ‘김정초대전’을 마련해 주셨다. 그 기간 사간동 거리엔 처음으로 어린이와 엄마가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다. 윤 선생께서 전시기간에 두 번이나 들러 보실 정도로 관심을 주셨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건강 때문에 가끔 불편한 모습을 보이셨다. 1986년 어느 날 나를 서울역 앞 대우빌딩의 새싹회 사무실로 부르셨다. 인생을 정리하시려는 듯 문집 출판을 의논하셨다. 창작집 100여 권을 10여 권으로 압축하시면서 표지와 내용 그림을 필자 그림으로 꼭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다. 내가 부담을 느끼자, 윤 선생은 ‘내 평생의 출판 정리를 김 교수에게 꼭 도움을 받고 싶네…’ 나는 너무나도 힘에 부쳤다. 독일에서 공부하느라 지쳐 왔고, 연구 논문도 써야 할 일이 많았으나, 그동안 어린 나를 아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해 봉사기부로 정성껏 도와 드렸다. 평생 애쓰신 어른에게, 작지만 마지막 소원을 들어 드린 것이 늘 행복한 마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어린이 사랑에 평생을 사셔 온 분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5월을 맞아 그립고 존경스런 마음에 옛날의 수첩에서 스케치 몇 장을 다시 꺼내 본다.
 
 
  방우영, 일등신문의 경영인이자 언론문화 발전시킨 활동가
 
2010년 조우회 송년회에서 ‘청춘고백’ 노래를 즉석에서 부르는 방우영 회장 모습.
  방우영님(1928년 1월 22일 ~ 2016년 5월 8일)은 웃는 모습이 특이하시다. 작은 눈매와 웃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분이다.
 
  한국의 언론문화에서 방우영 선생은 또 다른 경영문화를 창조해 내신 분으로 표현하고 싶다. 방우영 선생은 오로지 신문만을 위해 사셨고 온몸을 던지신 분으로 기억된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의 언론을 세계적으로 이끌어 낸 장본인’으로 평가받는 분이다. 언론학계의 원로이자 관련 논문 저서를 쓰신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님이 본 방우영에 관한 최근의 글(《주간조선》 제2407호, 2016년 5월 16일)에 따르면 “방우영은 최고경영진의 독서열이 언론인의 수준을 높여 결국은 신문의 질이 향상되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철학을 스스로 실천했던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사업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경영을 병합해 가는 문화적 의식도 중요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1950~1960년대 《조선일보》의 엄청난 회사 부채를 몸으로 부딪치며 노력해 온 주인공이 바로 방우영 선생이셨다. 그런 고통을 이겨 가며 꾸준히 노력해서 “오늘의 《조선일보》를 일등신문으로 만들고 언론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목이다”라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나는 방우영님을 신문의 경영인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언론문화를 발전시킨 활동가로도 본다. 그건 신문 운영과 더불어 저서와 글쓰기와 기록을 남기시는 인문학적 안목을 말하고 싶다. 기업 또는 사업가는 보통 사업에만 정열을 다해도 힘든 비즈니스가 많다. 그러나 사업을 문화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수용하려는 안목은 쉽지 않다. 자칫 한눈팔다가 사업이 폐할 수가 있기에 아무나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화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방 회장님이 그걸 갖추신 분이다.
 
  2008년 팔순을 앞두고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출판하셨다. 내용을 보면 아주 섬세한 작가적 문장표현이나 기질도 엿보인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신생의 감격과 아픔, 역동과 혼돈을 《조선일보》라는 창을 통해 목도하고 체험했다. 나의 신문 만들기 55년은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밤을 새워 전쟁 치르듯 신문 만들고… 독자에게 배달되는 아침은 두려운 순간” 등등의 회고는 문장마다 시인이나 작가다운 맵시를 느끼게 한다. 회고록의 제1장 선배님들 물러나 주십시오, 제2장 신문전쟁이 시작됐다, … 제8장 나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기도, 제9장 신문 밖의 인생 등 40여 년을 쓴 일기는 바로 현대사의 기록이었다. 어려운 경지를 헤치시며 정상 신문에 오르기까지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1970년 조선일보 사옥(코리아나 호텔) 신축공사 모습.
  50년 전 1968년 방우영님을 처음 뵌 건 내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면서다. 입사 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풍부한 인생 공부와 함께 사회 문화를 폭넓게 공부하는 눈을 뜨게 됐고 결혼까지 했다. 69년 결혼할 때 주례도 유봉영 부사장님이, 청첩인엔 박고석님, 신부집 가는 함진아비엔 유경환, 배우성님이 맡아 주셨다. 당시 회사는 신축건물 공사, 컬러인쇄 시설 도입 설치 등등 재정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월급은 적었지만 모두 행복한 삶이었다. 당시 역촌동 이웃에 살던 이현구님도 지금까지 평생 가깝게 지낸다. 짧은 재직 기간이었지만, 1977년 퇴사 후 대학으로 옮겨 갔고, 다시 서독으로 공부하러 갔다온 뒤 교수로 일하다 정년퇴직했다. 1960~1970년대 젊은 시절 《조선일보》에서 폭넓게 많은 걸 배웠고, 나는 평생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냈다. 그 세월 속엔 방 회장님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본다.
 
  2016년 5월 세브란스병원 방 회장님 장례 빈소를 찾아뵀다. 정규만씨 등 몇 분도 만나 추억담을 나눴다. 나오면서도 방 회장님에 대한 아쉬움을 잊지 못해 건너편 길에 서서 병원 주변 풍경 몇 점을 스케치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방 회장님이 송년회 때 오셔서 일일이 악수하시곤, 필자에겐 “김 교수 수염이 이젠 하얗구먼” 한마디 하신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개인적 만남은 없지만, 모든 이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계신다는 온정의 마음을 느낀 순간이었었다. 별세하신 그해 12월 조우회 송년회 때 방 회장님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고, 쓸쓸했다. 성공회 언덕길을 지나면서 뭔가 허전한 송년회가 마음에 걸렸다. 그날 따라 성공회 불빛마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 기분을 나 혼자 불빛 풍경을 끄적이며 그렸다. 허전한 심정을 교회 앞에서 주님께 의지하고픈 본능인 듯했다. 평소엔 아무 일 없이 지나쳤던 성공회 언덕길이었는데…. 세브란스병원 풍경과 성공회 스케치는 나의 속마음에 깔려 있는 어떤 아쉬움으로 끄적인 흔적이었다. 분명 나의 마음 한구석에 기록된 것이리라.
 
2016년 12월 광화문 성공회 성당, 조우회 송년회 가는 길에.
  오늘 인물 드로잉들은 필자 개인 보관이지만 사회적 문화 공개념으로 처음 공개한 것이다. 10여년 전 한국인물전기학회(회장 최종고 서울법대 명예교수)가 출범하면서 인물자료도 인문학적 학술연구로 발전했다. 드로잉도 학술적으로 소중하게 평가하는 국제적 흐름이다.
 
  윤석중 선생과 방우영 선생 두 분은 5월에 오셨고, 떠나신 특별한 운명이셨다. 각기 전공과 업무는 다르셨지만, 어린이를 깊이 사랑하신 마음은 똑같으셨다. 윤 선생은 문학을 통한 ‘어린이날’ 노래 등을, 방 선생은 언론을 통한 어린이신문 《소년조선일보》 발행과 전국 최대 어린이 미술대회를 통한 정서교육에 기여를 하셨다. 어린이날에 두 분의 인연과 정성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아이들에 각별한 사랑을 주신 건 나라의 장래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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