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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서양미술관 기행

국립서양미술관

모네·르누아르·고갱·로댕 작품 소장한 동양의 루브르박물관

글·사진 :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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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사키조선 초대 사장 마쓰가타 고지로, 1920년대에 서양 유명 화가들의 작품 대량 수집
⊙ 2차대전 후 프랑스가 압류했던 마쓰가타 컬렉션 365점을 ‘기증반환’받으면서 국립서양미술관 건립… 르코르뷔지에가 미술관 설계
⊙ 모네 작품 11점, 르누아르 작품 3점, 고갱 작품 3점, 로댕 조각 59점 소장… 인상파를 넘어 중세 이후 서양미술사를 관통하는 미술관으로

최정표
1953년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박사 /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상경대학장 역임. 현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재벌사연구》, 《경영자혁명》 출간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 마쓰가타 컬렉션 등 6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일본 도쿄에 가면 꼭 들르는 곳 중 하나가 우에노(上野) 공원이다. 그곳에 도쿄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도쿄예술대학,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 도쿄도(都)미술관, 도쿄도문화회관, 우에노연주악당, 우에노모리미술관, 국제어린이도서관 등 각양각색의 문화시설이 한꺼번에 몰려 있다. 심지어 동물원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어떤 것보다 ‘국립서양미술관(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 미술관을 접한 후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100년 전에 그 도량을 짐작할 수 없는 미술품 컬렉터가 있었고, 미국이나 서양의 어느 미술관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유럽 명화(名畵)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에노 공원은 1873년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 중 하나다. 봄에는 벚꽃놀이로 유명하며 1년에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 공원은 도쿄대학 후문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도쿄대학 객원교수로 있을 때 수시로 산책하던 곳이기도 하다.
 
  국립서양미술관은 이 공원의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우에노역에 내려 길을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심상치 않아 보이는 조각상들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국립서양미술관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 조각들은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과 〈칼레의 시민(Burghers of Calais)〉 등이다.
 
  건물 내로 들어가면 파리의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중세 이후 서양 작품과 인상파 이후의 모더니즘 작품이 가득하다. 그것도 유명 작가들의 대표 작품이다.
 
  이런 것이 국부(國富)의 차이이고 국력의 차이 아닐까? 중국도 이 점에서는 결코 일본에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미술관은 힘이나 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런 작품은 시장에 나오지도 않고 기증을 받을 수도 없다. 오랜 세월 축적된 컬렉션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서슴없이 자기들을 서양(脫亞入歐)이라고 오만을 떠는지도 모른다.
 
  국립서양미술관은 전설적인 일본인 컬렉터 마쓰가타 고지로(松方幸次郞·1965~1950)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1959년 국가가 만든 미술관이다. 그 이후에도 소장품이 꾸준히 늘어나 지금은 유화, 수채화, 드로잉, 판화, 조각 등 6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서양 작가의 작품만 전시한다는 점과 국립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물론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미술관이다.
 
 
  전설적인 컬렉터 마쓰가타 고지로
 
고흐, 로댕 등의 작품을 수집한 전설적 컬렉터 마쓰가타 고지로.
  마쓰가타 고지로는 그림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업가였다. 1865년 가고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가와사키조선소(지금의 가와사키중공업)의 초대(初代) 사장이었다. 1928년 은퇴할 때까지 32년간 사장을 지냈다.
 
  가와사키조선소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선박 부족 현상을 정확히 예측해 미리 대형 화물선 모델을 개발, 대량 생산했다. 당연히 엄청난 돈을 벌었다. 마쓰가타는 100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한꺼번에 받았고, 여기에 더해 회사가 소유하던 주식의 75%를 특별 보너스로 받았다. 이를 모두 합하면 당시 금액으로 3000만 엔(지금 금액으로는 1000억 엔, 한화로는 1조원)이나 된다.
 
  마쓰가타는 유럽으로 건너가서 이 돈으로 그림과 조각을 사 모았다. 당시 유럽에는 러시아인 부자 세르게이 슈킨(Sergei Schukin·1854~1936)과 미국인 부자 앨버트 C. 반스(Albert C. Barnes・1872~1951)가 최고의 컬렉터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들은 미술시장의 큰손이었고 화가들의 최고 고객이었다. 마쓰가타는 이들과 어깨를 겨루는 컬렉터로 등장했다. 유럽의 부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동양인의 씀씀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슈킨은 마쓰가타보다 선배 컬렉터였지만, 반스는 마쓰가타와 비슷한 나이의 경쟁적 컬렉터였다. 반스는 독특한 예술적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서 수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반면에 마쓰가타는 매우 개방적인 수집가였다. 전문가들의 조언도 많이 구했다. 수십 년 후 도쿄에서 반스 수집품과 마쓰가타 수집품을 비교하는 전시회가 열려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마쓰가타는 일본의 젊은 예술가들이 원작(原作)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품을 수집했다. 작품은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하고 유럽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원본을 직접 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엘리트들도 유럽 여행은 쉽지 않았고 일본 내에서는 서양 작품의 전시회도 매우 드물었다.
 
  마쓰가타는 일본의 예술가와 서양미술의 열성팬들에게 서양 작품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미술관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0년대에 수집품의 일부를 일본으로 운송했다. 작품이 도착하여 일본에서 수차례의 전시회가 열렸고 관람객들은 환호했다.
 
  그런 과정에 1927년 재무장관의 실언이 도화선이 되어 금융 소요가 일어났고 가와사키조선소의 주거래은행이 문을 닫았다. 가와사키조선소는 도산에 직면했다. 마쓰가타는 일본으로 가져온 서양미술품을 되팔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의 도산으로 유럽에 남아 있던 수집품도 일부는 팔려 나갔다. 나머지는 런던과 파리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쓰가타는 유럽에 남아 있던 작품들을 일본으로 들여오려고 계획했으나 운송비 관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런던에 남아 있던 작품은 전쟁 중 화재로 불타 버렸다. 파리에 있던 작품은 패전국의 재산이라며 프랑스 정부가 압류해 버렸다.
 
 
  요시다 총리가 나서서 반환 받아
 
  마쓰가타는 수천 점의 유럽 작품을 수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느 작가의 작품을 구입했고 몇 점을 구입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품 구매 리스트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런던에 남아 있던 작품은 화재로 불타 버렸으니 작품 수와 그 내용은 영원히 미궁에 빠져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마쓰가타는 프랑스에 남아 있던 작품을 일본에 반환해 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거기다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는 프랑스에 남아 있던 작품이 승전국 프랑스의 재산이라고 인정해 버렸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년 전에 마쓰가타까지 사망하고 말았으니 작품 반환은 난망하게 되어 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지인(知人)들로 하여금 반환운동에 나서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에서 반환운동이 일어나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1878~1967) 총리는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마쓰가타 컬렉션을 일본 국민에게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프랑스와 일본 사이에 지루한 협상이 이어져 갔다.
 
  마침내 프랑스 정부가 반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핵심적인 작품은 제외해 버렸다. 예컨대 고흐의 대표작 〈아를의 침실〉은 돌려받지 못했다. 프랑스도 이 작품은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지금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다.
 
  프랑스 정부는 돌려준 작품을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고 규정지었다. 마쓰가타 컬렉션이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의 기증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기증과 반환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이를 ‘기증반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증은 프랑스 외무장관의 행정명령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정부는 국립미술관을 만들어 기증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 미술관을 정부가 만들었고 국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 이름이 ‘국립서양미술관’이 된 것이다. 기증 반환된 작품은 유화 196점, 드로잉 80점, 판화 26점, 조각 63점 등 총 365점이었다.
 
 
  모네의 〈수련〉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네의 〈수련〉.
  일본에 반환된 마쓰가타 컬렉션은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그룹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모더니즘의 주류에 있었던 작가들의 작품이고, 두 번째 그룹은 마쓰가타가 작품을 수집할 당시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시들해졌다가 현대에 와서 재평가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바르비종파, 사실주의, 인상파, 후기인상파, 상징주의, 야수파 등의 작품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다. 두 번째 그룹에는 카롤루스 두랑(Carolus-Duran. 본명 Charles Auguste Émile Durand), 에밀 앙리 베르나르드(Émile Henri Bernard), 샤를 코테(Charles Cottet), 모리스 데니(Maurice Denis), 앙리-장 기욤 마르탱(Henri-Jean Guillaume Martin) 등의 작품이 속해 있다.
 
  마쓰가타 컬렉션에는 밀레의 명작인 4계시리즈 중 한 점인 〈봄: 다프네와 클로에(Spring: Daphnis and Chloe)〉, 모네 작품 11점, 르누아르 작품 3점, 고갱 작품 3점, 로댕 조각 59점 등 유럽 현대 미술사의 핵심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쓰가타는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도 8000점 이상 수집했다. 이들은 지금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되어 있다.
 
  미술관에는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작품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유명 작가의 작품이고 그들의 대표작들이다. 일본인들은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모네, 고흐, 르누아르 등을 각별히 더 좋아한다. 그런 만큼 이들의 대표작이 마쓰가타 컬렉션에 들어 있지 않았을 리 없다.
 
  모네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Giverny)라는 곳에 집을 짓고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브랜드가 된 ‘수련(睡蓮)’을 수없이 그렸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시간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모습을 모두 포착해 가면서 수많은 〈수련〉 연작(連作)을 만들었다. 이 〈수련〉은 지금 전 세계 박물관과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있다. 그런 〈수련〉을 마쓰가타가 놓쳤을 리 없다.
 
  평론가들은 모네의 〈수련〉을 좋은 수련과 그렇지 않은 수련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련〉은 대작(200.5×201cm)이고 좋은 수련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국립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수련〉은 1916년 작인데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대형 연작 수련을 그리기 위해 습작으로 그린 작품 중 하나이다. 오랑주리 작품은 1914년에서 1926년까지 12년에 걸쳐 작업한 작품이다. 마쓰가타는 모네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모네로부터 직접 이 작품을 구입했다. 완성도도 높고 모네의 만년 양식이 잘 표현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고흐의 〈장미〉
 
르누아르의 〈알제리풍의 파리 여인들〉.
  르누아르의 〈알제리풍의 파리 여인들〉은 풍만한 여인들의 반(半) 누드 작품이다. 관능적이면서 르누아르 화풍이 잘 표출된 그의 초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들라크루아의 1834년 걸작 〈알제리 여인들〉에서 모티프를 잡은 작품이다. 〈알제리 여인들〉이 1870년 살롱전에 입선되자 르누아르는 1872년 자기도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 작품을 그렸던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시기는 르누아르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작품은 살롱전에 낙선했고 7년간이나 연인이었던 작품 속의 여인과는 이별했다. 작품의 중앙에 있는 모델이 그 여인이다.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31살일 때 그렸는데 인상파적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기의 작품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반환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다가 일본의 집요한 요구에 마지못해 돌려주었다.
 
  일본인들은 고흐의 작품을 유달리 좋아한다. 고흐가 일본의 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고 우키요에를 그의 그림에 직접 그려 넣기도 해서인지 일본인들은 고흐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고흐인 만큼 마쓰가타 컬렉션도 고흐 작품을 건너뛸 수 없었을 것이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장미(Roses)〉는 1889년 작으로 화폭 전체에 초록이 가득하다. 초록 풀이 가득한 정원에 분홍빛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다.
 
  고흐가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갱과 크게 다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1888년 12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1889년 5월 고흐는 정신분열증으로 아를 인근의 생레미(Saint-Remy) 병원에 입원한다. 이 그림은 입원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1985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고흐전이 열리고 있을 때 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생레미 병원 정원의 한쪽 모퉁이를 그렸다는 주장이다. 입원하자 의사가 고흐의 활동 범위를 병원의 정원 내로만 제한하여 고흐는 정원 내에서만 그림의 모티프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 마침 정원에 피어 있던 장미를 그렸다는 것이다. 장미는 5월에 피고, 고흐가 5월에 입원했으니 입원 직전이나 직후에 그렸다는 두 주장 모두 가능한 얘기이다.
 
 
  미술관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 한정 복제판이다.
  일본 정부가 미술관 건물의 신축을 계획하자 루브르 박물관장은 세계적 명성을 가진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를 설계자로 추천했다. 일본도 기꺼이 이에 응했다. 프랑스는 3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르코르뷔지에는 당시 프랑스의 최고 건축가라는 점, 둘째 르코르뷔지에는 미술관 설계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는 점, 셋째 그가 일본인 제자를 두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의 일본인 제자 3명은 당시 일본 건축계의 선두 주자들이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1930년 귀화) 건축가이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엔(UN)본부 건물을 설계한 사람으로 현대 도시건축의 개척자이다. 2016년에는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전 세계 7개국의 17개 건물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국립서양미술관을 설계하면서 미술관과 함께 그 지역을 종합문화센터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예산 및 공간 제약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미술관 건물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르코르뷔지에의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국립서양미술관을 설계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댕의 〈지옥의 문〉. 한정 복제판이다.
  마쓰가타 컬렉션이 일본에 도착한 1959년 4월 미술관이 공식 개관했다. 그해 6월에는 공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마쓰가타 컬렉션 속의 프랑스 모더니즘 작품과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미술관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개관 이후 10개월 동안 50만명 이상이 미술관을 찾았다.
 
  이 미술관은 패전으로 좌절해 있던 일본인들에게 자존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다시 서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미술관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일본 사회에 여러 가지 큰 변화를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미술관은 르코르뷔지에의 제안을 모두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일부라도 충족시키기 위해 미술관 앞뜰에 공간을 마련하여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등 여러 조각 작품을 설치했다. 그 이후 이곳은 일본의 조각 명소가 되었다.
 
 
  두 차례 증축
 
  서양미술관은 일본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빠른 속도로 성장 발전했다. 새 작품을 꾸준히 구입했을 뿐만 아니라 독지가의 기증도 늘어나 소장품은 계속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전시공간이 부족해졌다. 개관 20주년이 되는 1979년 미술관은 뒤쪽 땅을 사들여 건물을 확장했고 전시공간을 두 배로 늘렸다.
 
  1994년에는 이곳에서 ‘반스 컬렉션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반스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대부호로 마쓰가타와 함께 1920년대 파리에서 쌍벽을 이루는 미술품 수집가였다. 마쓰가타와 반스는 정반대의 기호와 컬렉션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1994년에 와서야 이들의 컬렉션이 서로 비교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1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왔다. 그때까지 최고의 관람객 기록을 세운 행사였다. 반스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컬렉터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수집품은 인상파 시기 주요 작가의 중요 작품 2500점이 넘는다. 반스는 세잔의 작품을 69점이나 수집했다. 이것은 파리의 어떤 박물관보다 많은 숫자이다.
 
  미술관은 소장품이 많아지고 기획전시가 늘어나자 다시 공간 부족이 심각해졌다. 안정적으로 전시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어 특별전시를 위해서는 상설전시품을 철거해야 하는 등의 불편함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술관은 1997년 새롭게 공간을 증축하였다.
 
  아시아에서 서양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많이 소장하는 미술관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립서양미술관은 마쓰가타 컬렉션을 넘어서 중세 이후 서양미술사를 관통하는 소장품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에는 개관 50주년 행사를 가졌다.
 
  일본은 지진 대비에도 철저하다. 1995년 고베의 한신대지진을 겪은 후 대지진에도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때 미술관 전시품은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미술관은 어떤 재난에도 작품을 보호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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