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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황토의식(黃土意識)’과 풍수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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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15세 때 산시성 량자허(梁家河)에 하방(下放)되어 7년간 농민들 속에서 생활
⊙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革命公墓)에 안장되었다가 3년 만에 정치적 고향인 시안(西安)으로 이장(移葬)
⊙ 시중쉰의 묘는 비보 숲 조성, 명당 만들기 등 고도의 풍수행위 엿보여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 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시안에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의 묘. 풍수의 원리에 따라 조성됐다.
  2012년 말~2013년 초 동양 3국에 새 지도자들이 등극했다.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다. 이들은 집권시기가 몇 개월 차이로 비슷했고 나이도 한두 살 차이다(1952년·53년·54년생). 모두 과거 정치 명문가의 자녀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물러났지만, 아베는 일본 총리로서는 드물게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노자키 미쓰히코(野崎充彦) 오사카 시립대 교수는 “경제정책 덕으로 대학생들 취직이 잘돼 한국인 유학생들까지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서 취업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직접 본 바로는 대체로 일본인들은 아베에게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시진핑 주석은 2017년 말 집권 2기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천자(天子)’ 체제를 굳히면서 세계 강국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 필자가 시진핑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말하는 ‘황토의식(黃土意識)’과 풍수관과의 관계 때문이다. ‘황토의식’이란 무슨 뜻인가?
 
 
  시진핑의 ‘황토의식’
 
시진핑이 7년간 생활했던 량자허로 가는 길은 ‘황토’가 계속되는 곳이다.
  시진핑이 주석에 오르기 전인 2002년 그는 《전국신서목(全國新書目)》이란 잡지에 〈나는 황토땅의 아들이다(我是黃土地的儿子)〉라는 회고문을 발표했다. 중국 개국공신인 시중쉰(習仲勛) 전 부총리의 아들로서 부족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15세 때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상산하향(上山下鄕)을 당한다.
 
  상산하향이란 1968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지식청년[知靑]은 농촌에 내려가 가난한 농민의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시한 후 1600만명의 중・고등생이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에 종사했던 것을 말한다. 15세 소년 시진핑도 1969년 1월 산시성(陝西省) 북부 량자허(梁家河)라는 오지에서 7년 동안 토굴[야오둥·窑洞]에서 생활하며 농민과 일체화가 된다.
 
  〈나는 황토땅의 아들이다〉는 이 7년 동안의 생활을 5000여 자로 서술한 회고문이다. 처음 그곳에 내려갔을 때 득실거리는 이[蝨]·조악한 음식·힘든 노동 등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시진핑은 7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농민과 그것을 키워주는 황토와 하나가 되어 간다.
 
  “나는 농민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배웠고… 그들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들 속에서 노동을 하여 그들과 나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다… 20세 때 그들은 나를 서기로 뽑아주어 그들과 함께 우물과 방죽을 팠고 도로를 수리했다… 그곳은 나의 제2고향이 됐다… 15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에 왔을 때 나는 미망(迷妄)에 빠져 방황했으나 22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을 떠날 때 나는 이미 견고한 인생목표를 가졌고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어서 그는 옛 시인 정판교(郑板桥 ·1693~1765)의 시 “청산은 소나무를 꽉 물어 놓아주지 않으니 본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네[咬定青山不放松,立根原在破岩中]”를 인용, 22세 자신의 의식 상태를 표현했다. 민중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 확고한 인생관과 국가관을 세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황토땅이 자신의 뿌리이고 영혼이며 인생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 시 주석의 ‘황토의식’이다.
 
 
  풍수의 동기감응론
 
  필자가 여기서 ‘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풍수의 동기감응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 시진핑과 량자허라는 황토땅과 그곳에 사는 농민은 전혀 별개의 대립적 관계였다. 베이징(北京)이라는 도시와 황토땅 량자허와도 대립적 관계로 설정된다. 그러나 7년 동안의 그곳 생활에서 시진핑은 이전의 자아(自我)와 베이징을 버리고 농민화(農民化)・황토화(黃土化)된다.
 
  헤겔(Hegel)의 “타자(他者・여기서는 황토땅과 농민)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자각되는 과정”이다. 타자화(他者化)된다 하여 자기 자신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 농민들은 처음에 경원시하던 그에게 다가와 베이징이라는 세계와 새로운 지식을 구한다. 상호 교호작용 속에 농민 역시 계몽되어 새로운 의식세계로 진입한다.
 
  풍수는 태어난 생가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양택(陽宅) 풍수와 조상의 무덤이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음택(陰宅) 풍수로 대별된다. 현재 시중의 술사(術士)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좋은 땅(주택과 무덤)에 살면 무조건 잘되고 나쁜 땅에 살면 재앙을 받는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풍수의 동기감응론과 비슷한 관념은 서구 철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드러난다. 말파스(J. Malpas) 호주 태즈메이니아 대학 철학과 교수는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은 장소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면서 “(땅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연이며 인간화되고 인간화하는(humanized and humanizing) 것”이라고 파악한다. 인간 스스로가 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감수성(affectivity)’을 대지에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땅과 인간 서로 간의 대화와 감응을 전제한다.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땅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함을 전제한다. 어린 시진핑은 처음에는 ‘황토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석 달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쳤다가 반 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처음에 시진핑과 량자허에 온 지식청년은 모두 15명이었지만 그들은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모두 떠나고 시진핑 혼자 남았다. 시진핑에게 그가 태어난 베이징보다 이곳 ‘황토땅’이 그의 심령(心靈)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시진핑 주석의 ‘황토땅’은 풍수상 어떤 곳일까? 풍수고전 《탁옥부》는 “1년 현장 답사가 풍수서적 10년 읽은 것보다 낫다[遍觀一年勝讀十年]”라고 현장 답사를 중시한다. 그에 따라 필자는 시진핑의 ‘제2의 고향’ 량자허·부친 시중쉰의 생가와 초장지(初葬地)·이장지(移葬地) 등을 답사했다.
 
 
  황토땅과 풍수
 
시진핑이 하방되어 7년간 생활했던 량자허의 토굴집. 시진핑은 ‘황토의 아들’이라고 자부한다.
  시안(西安)에서 옌촨현(延川縣) 량자허를 향해 출발했다. 시안에서 400km. 가는 길이 협곡과 시골길이어서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침 6시30분에 자동차로 출발해 오후 2시 넘어서 도착했다. 황토고원으로 끝없이 일자문성(一字文星・산정상이 아주 길게 일자 모양으로 이루어짐)의 산들만 보였다. 일자문성의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어 ‘산평선(山平線)’이란 단어를 연상케 했다. ‘저런 산 아래 협곡에 사람이 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로 옆 곳곳에 “토양 수분을 보존함이 국가와 인민에게 이익[水土保持 利國利民]”이라는 표어가 보였다.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하기에 생겨난 표어이다. 황토고원은 물이 귀하여 이곳 사람들은 평생 딱 두 번, 즉 태어나서 그리고 결혼하기 전날 목욕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량자허도 황토협곡에 자리하고 있다. 집들은 황토협곡의 절벽에 굴을 판 동굴 집[窯洞・야오둥]들이다. 황토는 본디 진흙에서 모래까지 골고루 포함된 양토(良土)로서 물과 섞이면 비옥해져 경작에 좋은 땅이 된다. 반면 물이 없는 황토땅은 단단하고 척박해져 만물의 서식이 불가능한 황량한 땅이 된다. 바람 또한 드세다. 나무는 흙을 얻어야 뿌리를 내리고, 흙은 물을 얻어야 만물을 키울 수 있는데 이곳은 물도 부족하고 바람 또한 드셌다.
 
  15세 시진핑은 이곳에서 ‘샘과 방죽을 파야 하는’ 실존적 이유를 터득했다. 사람 하나가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환경요소가 필요한지를 알았고, “자기 위주가 아닌 사람들과의 단결만이 생존의 유일한 수단”임을 몸으로 터득한다. 드센 바람[風]을 잠재워 갈무리[藏]하고 부족한 물[水]을 얻는[得]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풍수행위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체득한다. 풍수지리가 말하는 동기감응의 핵심 내용이다.
 
  풍수상 이것만으로 시진핑을 주석의 자리에 오르게 한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시진핑 말고도 수많은 지식청년이 상산하향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 풍수 요인이 있었다.
 
 
  시진핑, 부친 묘 이장
 
  2002년 5월 24일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향년 89세로 사망한다.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개국 원로였다. 5월 30일 베이징 서쪽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革命公墓)에 안장된다. 바바오산은 ‘여덟 가지 보물이 나는 산’이란 지명이 암시하듯 명·청(明・淸) 두 왕조 이래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다. 평지돌출(平地突出)의 낮은 언덕으로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다 조망된다. 죽은 자도 그 후손들도 이곳에 안장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곳은 혁명열사와 고급 간부들의 묘원으로 지정되었다. 주더(朱德)·취추바이(瞿秋白)·둥비우(董必武)·천이(陈毅)·천윈(陈云)·리셴녠(李先念)·런비스(任弼時)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뿐만 아니라, 6·25 때 중국군 지원군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참전하였던 펑더화이(彭德懷)와 양융(楊勇)의 무덤도 보인다. 한때 ‘중국천자’ 자리를 두고 시진핑과 라이벌 관계였던 보시라이(薄熙來)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 부부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혁명 과정에 주요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의 무덤을 볼 수가 있어 마치 한 권의 ‘중국혁명사’가 페이지를 펼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에서 드문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천하의 길지를 버리고 시진핑은 아버지 시중쉰 묘를 이장한다. 정확하게 세 번째 기일인 2005년 5월 24일 아침 유족들이 시중쉰의 유골을 들고 시안역에 도착한다. 미리 와 있던 아들 시진핑이 아버지의 유골을 푸핑(富平)현 타오이촌(陶藝村)에 안장했다. 푸핑현은 시안에서 약 75km 떨어진 거리이다. 이날 이장식에서 시중쉰 부인 치신(齊心)은 다음과 같은 유족대표 인사말을 한다.
 
  “시중쉰 동지가 마침내 광활한 황토땅(黃土地)인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각자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혁명 후손을 양성할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이 ‘황토땅’과 ‘혁명 후손 양성’이란 단어이다. ‘황토땅’은 시진핑 주석이 자주 언급했던 말이다. ‘혁명 후손 양성’에서 그 ‘후손’은 누구를 지칭할까?
 
 
  “장안(시안)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바바오산혁명열사릉. 중국 공산정권 수립의 공신들이 묻힌 곳이다.
  왜 시안으로 이장을 했을까? 시중쉰 부총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기도 하지만, 1926년 13세의 나이로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1952년 베이징 중앙정부로 가기 전까지 활동하던 정치적 고향이다. 그는 이곳에서 ‘서북왕(西北王)’으로 불렸다. 죽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시안은 그의 고향이자 정치적 근거라는 물리적 공간 그 이상의 장소성(場所性)을 갖는다.
 
  ‘장안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得長安得天下]’는 말이 전해진다. 장안은 시안(西安)의 옛 이름으로, 풍수고전 《감룡경》은 “시안(장안) 일대가 태미원(太微垣)의 정기가 서려 있기에 천자의 도읍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태미원이란 자미원·태미원·천시원의 삼원(三垣) 가운데 하나로서 천제(天帝)가 정치를 펼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가장 선호하였던 도읍지 3개가 있다. 베이징과 난징(南京) 그리고 시안(장안)이다. 난징은 이곳에 도읍을 세운 왕조마다 망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홍무제)이 난징에 도읍을 정했지만 후계자이자 손자인 주윤문(건문제)은 재위 4년 만에 삼촌인 주체(영락제)에게 천자 자리를 빼앗긴다. 난징에서 망한 것이다. 3대 천자 영락제는 도읍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겨 버린다. 진시황이 천자의 기운이 난징에 서린 것을 보고 맥을 잘라 버렸기에 그렇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시안에 부친 묘를 이장한 뒤 8년 후 시진핑은 ‘중국의 천자’로 등극했다. 풍수상 시중쉰의 이장된 묘는 어떠할까? 시 주석 부친 묘는 푸핑현 중심지에서 2km쯤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는데 가는 길목마다 ‘산시성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시중쉰 묘역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시진핑 부친 묘 풍수 독법(讀法)
 
  평지에 자리하기에 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후덕한 내룡(內龍・지맥)이 어슴푸레 평원 위에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이나 언덕조차 없는 허허벌판에 숨어 있던 용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현룡재전(見龍在田)’의 땅이다. ‘나타난[見] 용(龍)이 밭에 있음[在田]’이란 ‘지도자[龍] 자격을 인정해 주는 세력이 있어 나타났지만[見], 아직 전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낮은 단계에 있으므로(밭에 있음) 자기를 후원해 줄 큰 어른[大人]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역》 건괘는 이어서 말한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見龍在田]은 덕의 베풂을 널리 하는 것이다[德施普也].”
 
  ‘널리 덕을 베풀어 대중을 제도하겠다[博施濟衆]’는 뜻과 ‘자신의 소문을 듣고 함께 일어나주기를[聞風與起]’ 염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덕[君德]인데,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통치자를 말한다.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다.
 
  묘역 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장된 시중쉰 동지들의 무덤과는 규모와 질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시중쉰의 묘는 단순 조경 작업이 아니라 고도의 풍수 행위가 드러난다.
 
  우선 시중쉰의 유골과 석상이 안치된 뒤쪽에 나무를 겹겹이 심어 주산을 돋우었다. 일종의 비보(裨補) 숲이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山主人水主財]’는 풍수 격언이 있다. 중국인들이 풍수에서 선호하는 물은 보이지 않는다. 재물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리임을 말해준다. 주산 뒤로는 용이 머리를 들이민 입수(入首)의 흔적을 뚜렷하게 살린다. 주산 좌우로 또 숲을 조성하여 청룡·백호를 만들었다.
 
  안치된 유골과 석상 앞은 평평한 공간, 즉 명당(明堂)을 만들었다. 본디 명당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공간인데, 지금은 수많은 방문객이 이곳에서 참배를 한다. 필자가 이곳을 답사하던 날도 수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명당 앞으로 주작대로(朱雀大路)가 길게 펼쳐진다.
 
  조성된 비보 숲에 식재된 수종을 살펴보면 묘 주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곳은 소나무·향나무·측백나무 등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란 밭이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는 뭇나무의 어른[宗老]이다. 거북 등처럼 뚝뚝 갈라지는 소나무 껍질은 현무(玄武)를 상징한다. 향나무는 예부터 사당이나 왕릉에 한두 그루씩 심는 나무이다. 측백나무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신선의 나무이고, 모란은 꽃의 왕[花中之王]이다. 묘역의 공간 구성이 역대 황릉의 작은 축소판이다(참고로 2013년 5월 이곳을 답사하였을 때는 묘역 안을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었고, 사진 촬영도 자유로웠으나 2년 후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외국인에게는 참관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울러 중국인에게조차 묘역 촬영이 금지되었다).
 
  시진핑이 부친 묘를 이장할 때 몇 년 후 중국의 천자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2005년 저장성 서기 →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 2008년 부주석 → 2012년 11월 주석).
 
 
  운명인가, 풍수인가?
 
시안에 있는 시중쉰의 생가. 시안은 시중쉰이 태어난 곳이자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한 사람의 흥망성쇠에는 다섯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그 다섯 가지를 중요도에 따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일명(一命)·이운(二運)·삼풍수(三風水)·사적음덕(四積陰德)·오독서(五讀書).
 
  첫째는 명(命)이다. 필자처럼 산촌에서 태어난 것도, 여자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도 명이다. 금수저·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명이다. 시진핑이 1953년 베이징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중앙선전부장이었고 시진핑이 여섯 살이었을 때는 부총리였다. 권력의 핵심층이었다. 시진핑의 명은 참으로 좋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것은 그의 명이었다.
 
  둘째는 운(運)이다. 같은 명으로 태어났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좋고 나쁨이 달라진다. 가는 길이 다르면 훗날 삶의 결과는 달라진다. 1965년 아버지 시중쉰이 부총리에서 뤄양(洛陽)의 기계공장으로 내쳐졌을 때 시진핑의 운은 험난한 길을 예고한다. 1969년 15세의 시진핑이 량자허로 하방되고 부모형제와 뿔뿔이 흩어져 가난한 농민들과 힘든 노동을 해야 했을 때 그의 운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하나의 반전이었다.
 
  한 개인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는 세 번째 요인이 풍수(風水)이다. 어느 곳에 터를 잡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시진핑이 ‘지식청년’으로 량자허로 갔을 때 그의 운은 최악이자 가장 나쁜 터에 처해졌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농민과 함께하면서 ‘황토의 아들’로 거듭난다. 함께 왔던 다른 14명이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남아 ‘황토땅의 아들’이 된다. 중국전문가 정영록(서울대 국제대학원·전 주중공사) 교수는 “7년 동안 량자허에서 최후의 1인으로 견뎌낸 점, 바로 이 부분에서 시진핑이 주석이 되는 데 다른 라이벌들, 특히 보시라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 강점을 확보했다”고 말한다.
 
  시진핑은 다른 라이벌과 달리 아버지의 무덤을 베이징에서 시안으로 이장을 하는데 이 점 역시 사회주의 중국에서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음을 앞에서 소개했다. 시진핑의 부친 묘소는 풍수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한 곳에 자리했다.
 
  인간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는 네 번째 요소는 음덕 쌓기이다[積陰德]. 인맥 쌓기의 다른 말이다. 이 부분은 시진핑의 다른 라이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성공에 영향을 주는 마지막 다섯 번째 요인은 공부이다[讀書]. 공부를 잘하면 인생 초반에는 분명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나이 50쯤 되면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나 못했던 사람 모두 평준화되거나 역전되기도 한다.
 
  시진핑은 15세 이후 공부할 기회를 놓쳤다. 22세인 1975년 칭화(淸華)대학에 농민 자격으로 입학을 하지만 공부에 애를 먹었다. 그에게 있어 학교 공부는 그리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칭화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농민자격’ 덕분이었다. 그가 량자허라는 오지에서 농민으로 거듭난 덕분이었다. 따라서 이 역시 세 번째 요인, 즉 풍수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G2의 첫 번째 지도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실용적 풍수를 통해서 세계적인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음을 지난달 《월간조선》에서 소개했다. 시진핑 주석은 전통적 풍수를 통해 그 음덕으로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정녕 풍수는 제왕지술(帝王之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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