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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다

홍위병시대

선동정치인, 기생(寄生)지식인, 선동언론이 홍위병 만들어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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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좌 복귀하려는 마오쩌둥이 ‘증오의 교육’ 받으며 성장한 학생세대 선동해 문화대혁명이라는 참극 빚어(중국)
⊙ 민주화 요구에 직면한 집권세력 내 후투족 강경파가 소수 종족인 투치족에 대한 학살 선동… 사이비 언론인, 지식인, 대중가수, 방송, 종교인 등 가담(르완다)
⊙ 내전 발생 20년 전부터 지식인들이 민족 간 갈등 조장… 공산정권 붕괴 후 정치인들이 민족주의 내세워 내전 야기(유고슬라비아)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반혁명분자’들에게 ‘바보모자’를 씌워 대중 앞에서 모욕을 주고 폭행했다.
  바야흐로 ‘홍위병(紅衛兵)’ 시대다. 방송사 노조원들이 자사(自社)나 자사 관리기관 이사들이 일하는 사무실이나 학교로 몰려가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홍위병’이라는 비판에도 그들은 ‘국민의 홍위병’이니 ‘정의의 홍위병’이니 하며 꿈쩍도 않는다. 홍위병들만으로는 힘이 부치자 검찰, 경찰, 고용노동부, 감사원 등이 힘을 보태주었다. 그렇게 해서 공중파 방송에 입성한 해직 PD 출신 사장은 ‘선배들에게 잘못 배운 기자들’에 대한 ‘재(再)교육’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어째 중국의 노동개조수용소나 문화대혁명 시기의 하방(下放), 혹은 베트남 적화(赤化) 후의 재교육수용소가 연상되어 으스스하다.
 
  현 정권에 대해 걱정하고 비판하는 소리는 들리지만 방송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다. 신문에서도 정권에 대한 날 선 비판의 소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언론이나 SNS에선 정권에 대한 박수 소리, ‘적폐청산’에 대한 응원가만 요란하다. ‘적폐’로 찍힌 이들에 대해서는 온갖 공격이 다 들어간다.
 
  정권과 언론과 ‘홍위병’들이 하나가 되어 여론을 끌고 가고, ‘적대세력’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런 공격은 때로는 정치적 공격을 넘어 끔찍한 대량 학살이나 내전(內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 중국
  늙은 독재자의 야욕과 ‘증오의 교육’이 홍위병이란 괴물을 만들어내다

 
  〈역사적 배경〉
 
  1958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4500만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낸 뒤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대한 당내 비판이 분출한 1962년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 일선에서 점차 밀려났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와 당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및 일부 지방 지도자들은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농업 집단화를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보면서 스탈린이 죽은 후 흐루쇼프에 의해 격하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부정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 사회, 심지어 공산당 내에 남아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뜻을 받들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사회주의교육운동’을 벌였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사상투쟁의 일환이었다. 공산화 이후 계속 고통을 당해 온 ‘반혁명분자’들이 다시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일반 국민들이나 중・하급 당원들이 아니라 국가와 당의 지도부들을 공격하고 판갈이 하기를 원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1966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을 제창했다. 그가 문화대혁명의 동력으로 주목한 것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홍위병’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대혁명의 선봉이 되어 온갖 패악질을 다 저질렀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지식인, 음모가, 아첨꾼들이 여기에 합세했다. 10년 동안의 대동란으로 150만~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괴물과 악마들을 척결하라!’
 
마오쩌둥은 1966년 8월 18일 100만명의 홍위병들을 사열하고 격려했다.
  1966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선동적인 논설이 실렸다. 이 논설은 “모든 괴물과 악마들을 척결하라!”고 부르짖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
 
  글을 쓴 사람은 중국공산당의 이론가로 사흘 전 구성된 중앙문화혁명소조(小組)의 멤버였던 천보다(陳伯達)였다. 같은 날 중앙인민방송국은 일주일 전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서기 녜위안쯔(聶元梓)가 내걸었던 대자보(大字報) 전문을 보도했다. 녜위안쯔의 대자보는 ‘부르주아 세력이 베이징대를 장악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다음날 《인민일보》도 녜위안쯔의 대자보 전문을 보도했다.
 
  이후 10년간 중국 대륙을 동란으로 몰아넣었던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칭화대학교 부설중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이 만들어진 지 두 달 후인 8월 1일 마오쩌둥은 이들에게 친전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저항은 정당하다”고 격려했다. 문화대혁명을 지지해 각급 학교에서 생기기 시작한 학생 조직들도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8월 18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광장에 나와 100만명의 홍위병을 사열했다. 마오쩌둥은 그해 말까지 4차례에 걸쳐 1200만명의 홍위병을 사열했다.
 
 
  홍위병의 만행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사람은 팻말을 목에 걸고 이 거리 저 거리 끌려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의 인정을 받은 홍위병들은 광란(狂亂)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든 기성질서는 ‘문화대혁명’의 이름으로 부정당하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의 첫 번째 타깃은 ‘꼰대’로 찍힌 선생들이었다. 칭화대 부설중학교 학생들은 곤봉과 버클이 달린 허리띠로 교장과 교감을 구타하고, 교감의 머리에 불을 놓았다. 당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베이징 제101중학교에서는 10여 명의 교사들이 무릎과 손바닥이 까맣게 탈 때까지 뜨거운 석탄재를 깔아놓은 길을 기어가야 했다. 베이징의 한 중학교에서는 홍위병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교장을 끌어내 교정에 세워놓고 그에게 끓는 물을 들이부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13세도 안 된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못과 배설물을 삼키게 했다. 상하이 화둥사범학교 학생들은 150명이 넘는 교수들을 집에서 ‘체포’해 학교로 끌고 간 후 ‘바보모자’를 씌우고 ‘반동적 학교 관계자’라고 적힌 무거운 팻말을 목에 매달았다.
 
  홍위병들은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착취 계급의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라는 요구에 부응해 수백 수천 년 된 문화유산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었다.
 
  마오쩌둥이 했던 ‘조반유리’라는 말은 이들에게 ‘면책특권(免責特權)’을 부여했다. 급기야 홍위병들은 지방정부나 군대에까지 도전하고 나섰다. 우한, 상하이, 충칭, 광저우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군대와 홍위병, 혹은 저마다 자기들이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고 있다고 자부하는 홍위병들 파벌 간에 내전(內戰)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전투에는 수제 칼이나 창은 물론, 소총, 기관총, 박격포, 심지어 포함(砲艦)까지 동원되었다. 이런 전투의 와중에서 수천 명씩 죽거나 전투 후 학살됐다.
 
  인륜에 반하는 일도 일어났다. 장홍빙이라는 15세짜리 소년은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불에 던진 어머니를 당에 고발하면서 “반혁명적인 범죄를 저질렀으니 총살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 어머니는 총살당했다.
 
  홍위병들에 의한 소요를 종식시키기로 결심한 마오쩌둥이 파견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사상선전대가 1968년 7월 27일 칭화대를 접수하는 것으로 홍위병들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 계속됐다. 150만~2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생(寄生) 지식인들
 
  도대체 누가 홍위병이라는 괴물을, 문화대혁명이라는 참극을 만들어냈을까?
 
  가장 큰 책임자는 중국공산당 주석이던 마오쩌둥이었다. 그가 중국을 문화대혁명이라는 ‘천하대란(天下大亂)’으로 몰아넣은 것은 순전히 권력욕 때문이었다. 그는 1958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450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실패한 후, 1962년부터 권력에서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총서기 덩샤오핑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인민공사(집단농장)에 속해 있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자율적으로 경작할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사회주의에서 후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가 살아 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죽기라도 하면 소련의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중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된 류사오치는 ‘중국의 흐루쇼프’였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은 중국을 자본주의 사회로 회귀시키려는 ‘주자파(走資派)’였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타도하고 권력 1선으로 복귀하고자 했다. 하지만 공산당과 군부, 정부는 현직 국가주석인 류사오치, 당의 실무책임자인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에게 있는 것은 ‘당 주석’이라는 지위와 공산혁명을 이룩한 최고지도자라는 ‘정치적 권위’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치밀하게 권력 복귀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그 결과가 문화대혁명이었다.
 
  둘째, 권력 복귀를 노리는 마오쩌둥에게 줄을 서서 권력을 잡으려는 일단의 기생(寄生) 지식인·언론인들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천보다, 녜위안쯔 등도 그런 자들이었다.
 
  사실 권력을 강화하거나 탈환하려 할 때 마오쩌둥이 썼던 수법들을 대개 비슷했다. 먼저 문학평론이나 역사해석에 관한 논란을 조장한 후, 어용 지식인들과 언론을 동원해 이를 정치 이슈화하고, 대중을 선동해 유혈사태를 일으킨 후 권력을 잡는 방식이었다. 그때마다 문화예술인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야오원위안(姚文元)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1965년 11월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吳晗)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만들었다. 야오원위안은 이를 대약진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선동했다. 사실 야오원위안의 글은 마오쩌둥이 여러 차례 수정하고 교열한 것이었다. 이를 기화로 마오쩌둥은 베이징시장으로 베이징시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펑전(彭眞)을 숙청할 수 있었다. 다음 차례는 펑전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고 있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었지만, 이들은 펑전의 숙청을 수수방관했다.
 
  후일 사인방(四人幇)의 수괴로 꼽힌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靑)도 비슷한 부류였다. 배우 출신인 그녀는 마오쩌둥과 결혼한 후 끊임없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기를 원했지만, 당 간부들에 의해 저지당해 왔다. 그는 문화대혁명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그토록 원하던 ‘문화권력’ 더 나아가 ‘정치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유혈의 정치교육
 
선동대회에 나선 홍위병 소녀들. 홍위병들 중에는 중학생,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셋째,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계속되어 온 ‘정치캠페인’ 내지 ‘정치교육’을 꼽을 수 있다. 중국 사회에서 문화대혁명과 같은 ‘사람 잡는 캠페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계속 되풀이되어 왔기 때문이다.
 
  1947~1952년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마오쩌둥은 1000명당 1명꼴로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지주나 반동분자라서가 아니었다. 공포를 확산시켜 농촌을 장악하고, 그런 살육을 통해 농민들을 공산당의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주’로 지목된 사람들(그들 대부분은 이웃 농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은 창에 찔리거나 산 채로 불에 태워지거나 사지를 잘리거나 생매장됐다. ‘어린 지주’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이 도륙되거나 6세짜리 아이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런 식으로 1951년 말까지 200만명이 죽었다.
 
  1951년부터는 3반(反)운동-반탐오(反貪汚)・반낭비・반관료주의-이 전개됐다. 이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자리를 보전하고 있던 옛 관료들이 추방됐다. 1952년에는 5반운동이 실시됐다. ‘뇌물 행위 반대, 탈세와 세금 누락 반대, 국가 자재 빼내기 반대, 부실공사 반대, 국가 정보 빼내기 반대’라는 명목 아래 민간 상공업자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1955년에는 작가 후펑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 77만명 이상을 체포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 때에는 당총서기 덩샤오핑이 책임자가 되어 50만명 이상의 지식인과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했다.
 
  1962년부터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이라는 것이 시작됐다. 당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고 끊임없이 선동했다. 중국에서도 소련의 흐루쇼프같이 공산주의자로 위장했다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수정주의자’가 나올 수 있으니, 대중에게 올바른 사회주의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도 ‘계급투쟁’을 계속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말이 ‘교육’이지 이는 공산정권 수립 이래 계속되어 온 ‘반동분자’ 숙청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류사오치는 자기 아내 왕광메이에게 공작대를 이끌고 농촌에 내려가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왕광메이는 무릎을 구부리고 양팔을 뒤로 쭉 뻗은 채 몇 시간씩 서 있게 하는 ‘제트기 자세’라는 고문법을 창안해 냈다. 류사오치가 이끈 사회주의교육운동 기간 중 500만명 이상의 당원이 처벌되고 7만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대중 앞에 세워 핍박하고 죽이는 등 ‘사회주의교육운동’은 여러모로 문화대혁명의 예고편이었다.
 
  마오쩌둥은 중·하급 간부나 일반 대중, 몰락한 반동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주의교육운동’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공격하고 싶은 것은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실권파(實權派)’였기 때문이다.
 
  홍위병 세대들은 바로 공산중국이 수립된 이래 계속되어 온 이런 ‘유혈의 정치교육’ ‘증오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과는 끊임없이 무자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교육받으면서 자라났다. ‘반동분자’들에 대한 잔인한 핍박은 그들에게는 어려서부터 흔히 보던 풍경이었다. 이들은 언제든 그런 ‘계급투쟁’의 선봉으로 나서겠노라는 꿈을 꾸면서 성장했다. 프랑크 드쾨터는 《문화대혁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주석(마오쩌둥)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반란을, 혁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들 악마와 괴물을 굴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털어놓았다.〉
 
 
  인과응보
 
  마지막으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당시 권력자들의 비겁과 방관이다. 사인방의 폭거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걸로 알려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마오쩌둥에게 영합하는 데 급급해했다.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로 알려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그 이전에 있었던 반우파투쟁이나 사회주의교육운동 등의 유혈 정치 캠페인에서는 가해자였다. 문화대혁명으로 가는 길에 우한, 펑전, 양상쿤(楊尙昆), 뤄루이칭(羅瑞卿) 등이 무고하게 숙청됐지만,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이를 수수방관했다. 아니 오히려 이들을 규탄하고 조롱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문화대혁명이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이들은 자신들이 타격 대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사회주의교육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줄 알고 이에 동참하려 공작대를 각 기관·학교에 파견해 ‘반혁명분자’들을 다스리려고 했다.
 
  후일 류사오치는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과 폭행을 당하던 끝에 가택연금 상태에서 병사(病死)했다. 그의 아내 왕광메이도 그에 못지않은 고초를 겪었다. 덩샤오핑은 숙청되어 지방 공장의 노동자로 내쳐졌고, 그의 아들은 건물 2층에서 내던져져 반신불수가 됐다. 이 모든 일은 어쩌면 인과응보(因果應報)였다. 그들의 비겁과 방관에 대한….
 

  2. 르완다
  쇠락해 가는 권력 내 강경파와 사이비 언론이 만들어낸 ‘제노사이드’

 
  〈역사적 배경〉
 
  1994년 4월 중순부터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는 후투족과 투치족 간에 인종분규가 일어났다. 100일 동안에 80만~100만명이 학살됐다. 전 인구의 10%가 넘는 숫자였다.
 
  사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인종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곳을 식민지배했던 독일과 벨기에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이비 인종주의를 도입해 소수 종족인 투치족을 우대하는 ‘분할통치’ 전략을 폈다. 독립이 되면서 다수 종족인 후투족이 권력을 장악했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과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독재국가들에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나섰다. 20년 가까이 장기 집권했던 르완다의 하비아리마나 정권은 마지못해 다당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정권 주위의 기득권 세력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990년 우간다에 근거지를 둔 투치족 중심의 르완다애국전선이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도전해 왔다. 후투족 기득권 세력은 이를 빌미로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선동하고 나섰다.
 
  1994년 4월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후투족 정권은 조직적으로 투치족 및 온건파 후투족 학살에 나섰다. 국영방송은 학살 선동의 선봉에 섰다.

 
 
  후투족과 투치족
 
후투족들은 벌목용 마체테로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을 학살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인종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후투족은 주로 농경을 하고 투치족은 목축에 종사했다. 후투족은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키가 작고 투치족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키가 크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목축을 하는 투치족이 농경을 하는 후투족보다 일반적으로 부유했고, 식민지 시대 이전에 지배층은 대개 투치족이었다. 때문에 19세기 말 이후 이곳을 식민지배했던 독일이나 벨기에의 식민주의자들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이비 인종과학을 적용, 투치족을 후투족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았다. 식민주의자들은 공직에서는 물론 학교교육에서도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으로 삼았다. 벨기에인들은 투치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채찍질을 해라. 안 그러면 네가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 종족갈등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그래 봤자 권력의 단맛을 즐긴 투치족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가난한 민중에게 투치니 후투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서로 이웃으로 살았다. 투치족 추장 밑에 사는 후투족도 있었고, 후투족 추장 밑에 사는 투치족도 있었다. 서로 결혼도 했다. 투치족보다 더 많이 교육받고 부(富)와 권력을 누리는 후투족 엘리트도 있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다수 종족인 후투족과 소수인 투치족 간의 갈등이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독립과 함께 인종갈등 격화
 
  1962년 독립과 함께 다수파 후투족이 정권을 잡았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 온’ 투치족에 대한 학대가 시작됐다. 이를 지켜본 유엔은 “어느 한 종족의 독재를 야기해 하나의 압제정권을 또 하나의 압제정권으로 대체하는 데 그쳤다”면서 “언젠가 우리는 투치족을 상대로 폭력이 행사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레구아르 카이반다가 이끄는 후투족 정권하에서 1963~1964년 기콩고로 남부 지역에서만 1만4000여 명의 투치족이 학살됐다. 버트런트 러셀은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 이후로 가장 끔찍하고 조직적인 대량 학살”이라고 규탄했다. 하지만 카이반다 정권은 이를 ‘혁명’이라고 포장했다. 구(舊)지배층인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 민중의 혁명, 봉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주장이었다. 1964년, 1966년, 1973년 등에도 투치족에 대한 학대와 학살이 자행됐다.
 
  1973년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장군이 정권을 잡았다. 군사령관으로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주도했던 그는 집권한 후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겉보기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하비아리마나 시절이 투치족에게는 그나마 평온한 시절이었다.
 
  이웃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하층민 출신인 하비아리마나는 르완다 상류층 출신인 아내 아가트에게 꽉 쥐여살았다. 일국의 대통령인 그가 처가 사람들 앞에서는 부동자세를 취한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하비아리마나의 처가 사람들은 권력실세로 군림했다. 이들을 ‘아카주(작은집)’라고 불렀다.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과 유럽은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 6월 하비아리마나는 마지못해 다당제(多黨制) 도입을 선언했다. 르완다에서도 민주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비아리마나는 물론 그의 주위에서 권력의 단맛을 보아온 ‘아카주’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마침 그해 10월 우간다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애국전선 게릴라들이 국경을 넘어와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하비아리마나는 이를 기화로 민주화 과정을 늦추려 들었다. 이후 하비아리마나는 이웃 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르완다애국전선과 평화협상을 맺었다가 번복하는 등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다.
 
  그러자 ‘아카주’가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미 하비아리마나의 통제를 벗어나 정부와 군부, 언론을 장악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카주’를 중심으로 ‘후투파워’라는 후투족 극단주의자 그룹이 형성됐다.
 
 
  ‘증오를 파는 언론인’ 하산 은게제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학살기념관에 있는 희생자들의 사진.
  이들의 앞잡이가 된 자가 하산 은게제라는 사이비 언론인이었다. 그는 버스 차장으로 일하다가 주유소 밖에서 신문과 음료수를 팔던 인물이었다. 그는 1987년 《캉구카》라는 야당지가 창간되자 이 신문의 ‘길거리 통신원’이 되어 인기를 끌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시민기자’였던 셈이다.
 
  《캉구카》의 정권 비판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카주’는 그 대항마로 어용신문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그를 낙점한 사람은 대통령 부인 아가트였다. 그들은 은게제에게 돈을 대주면서 신문을 창간하라고 했다. 은게제는 1990년 초 《캉구라》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캉구카’는 르완다어로 ‘깨어나라’, ‘캉구라’는 ‘깨우라’는 뜻이었다. 이름에서부터 《캉구카》의 ‘짝퉁’이라는 것이 역력했다.
 
  투치족에 대한 ‘십자군전쟁’을 부추기는 것이 은게제의 일이었다. 1990년 12월 그는 〈후투10계명〉이라는 글을 썼다. 제일 자주 인용된 것은 8번째 계명이었다. ‘후투족은 더 이상 투치족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
 
  국영방송도 증오심을 조장하는 데 가담했다. 1992년 3월 부게세라에서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영방송은 후투족과 투치족을 ‘우리와 저들’로 구분해 학살을 선동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르완다애국전선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직후인 1993년 8월, ‘아카주’는 RTLM이라는 새로운 방송국을 만들었다. 이 방송국은 오로지 투치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선동하는 데 목적을 둔, 방송판 《캉구라》였다.
 
  지식인들도 인종 간 증오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의사이자 집권당 부의장인 레옹 무게세라는 “우리 민족은 책임감을 갖고 이 쓰레기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면서 “바퀴벌레들과 그 가족을 죽여 없애는 일을 망설일 필요가 무엇이냐”고 선동했다.
 
 
  ‘홍위병’ 인테라함웨
 
  연예인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인기 가수 시몬 비칸디는 ‘나는 이런 후투족이 싫어요’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나는 이런 후투족, 즉 자신이 후투족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는 후투족이 싫어요”라고 노래했다. 온건파 후투족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후투족이라면 마땅히 투치족을 증오하고 학살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이후 제노사이드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부르는 ‘성가(聖歌)’가 됐다.
 
  이런 증오를 실천에 옮길 ‘홍위병’도 등장했다. ‘인테라함웨’를 비롯한 후투족 민병대였다. ‘인테라함웨’는 ‘함께 공격하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집권당인 국가개발혁명운동당(MRND)과 ‘아카주’가 후원하는 축구팬클럽의 이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넘쳐나는 실업자들이 이런 종족주의적 무장집단으로 충원되었다. ‘제로네트워크(Zero Network)’니 ‘블리츠(Bullets)’니 하는 살인부대도 등장했다. 이들을 후원한 것은 정치개혁으로 자기들의 기득권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대통령 친인척들의 기득권 그룹 ‘아카주’였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 마을에서 학살행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후투족을 자극하고 ‘의식화’하기 위한 선동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마을의 지도자는 물론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의 고위 관리까지 참석했다. 이들은 투치족을 ‘악마’로 몰아붙이며 대중을 선동했다. 살해된 투치족의 재산은 학살을 선동한 관리들의 차지가 됐다. 그들은 ‘학살실적’에 따라 승진도 했다. ‘법과 질서의 수호자’여야 할 공무원, 군인, 경찰, 법조인들이 출세를 위해 학살을 방조하거나 조장했다. 물론 학살의 하수인 노릇을 한 대중에게도 쏠쏠한 떡고물이 떨어졌다.
 
 
  학살의 시작
 
  이렇게 해서 ‘제노사이드’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 대학살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암살이었다. 이날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수도 키갈리 상공에서 누군가가 쏜 미사일에 맞아 추락했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이웃 부룬디의 후투족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이 있기 전부터 대통령의 암살과 학살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아카주’가 후원하는 방송 RTML은 4월 3일부터 사흘간 “이곳 키갈리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며, 4월 7일과 8일에는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가 중심이 되어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피살된 다음날 RTML은 대통령의 암살 책임을 르완다애국전선과, 르완다 평화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들어와 있던 유엔평화유지군(UNAMIR)에게 돌렸다. 이와 함께 방송들은 “바퀴벌레들을 죽여라”라는 선동방송을 시작했다. 투치족은 물론,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화해를 주장하던 온건파 후투족들, 투치족 배우자를 둔 후투족들, 그리고 하비아리마나 정권과 ‘아카주’에 비판적이었던 후투족 야당 인사들도 학살 대상이 됐다.
 
  나라 전체에 살육의 광풍이 불었다. ‘후투파워’는 대량 학살에 꼭 나치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 절멸수용소를 건설하고 화학가스를 사용하는 등 선진과학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한 도구는 마체테라는 벌목용 칼과 마수라는 못이 박힌 몽둥이, 창과 같은 원시적 무기들이었다. 총이나 수류탄이 동원되기도 했다.
 
  폭도들은 희생자들에게 돈을 받기도 했다. 돈을 건네준 희생자들은 그 대가로 목숨을 건진 게 아니라, 마체테나 마수에 맞아 죽는 대신 총에 맞아 죽을 수 있었다. 어느 투치족 젊은 가장은 집에 들이닥친 폭도들에게 “제발 아이들이 토막 나 죽는 일은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폭도들은 자비를 베풀었다. 부모에게 어린 자녀들을 직접 변소에 집어 던져 죽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도들은 부모를 변소에 처박았다.
 
 
  목사와 신부도 학살 가담
 
르완다 학살 당시 폭도들에 의해 파괴된 교회.
  르완다는 국민의 65%가 가톨릭, 15%가 개신교도인 나라였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도 학살의 광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목사나 신부가 학살에 동참하기까지 했다.
 
  키부예라는 곳에서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목사 엘리자팡 은타키루티마나(‘은타키루티마나’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는 뜻)와 그의 아들 제라르 박사가 학살에 앞장섰다. 이들은 피란처를 구하는 투치족과 후투족 사람들에게 교회로 피신하라고 한 후, 후투족 민병대와 대통령친위대를 교회로 보냈다. 은타키루티마나 목사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교회에 갇힌 목사 7명이 피란자들의 구명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렇게 답했다. “너희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더 이상 너희를 원하지 않으신다.”
 
  수도 키갈리의 성가족성당의 벤체슬라스 신부는 성당으로 피신한 투치족의 명단을 학살자들에게 넘겨주었고, 그들을 은신처에서 끌어내 학살되도록 했으며, 피란민 소녀들을 강간했다. 기콩고로 지역의 몬시뇰 위구스탱 미사고 주교는 학살 위기에 처한 투치족 어린이 90명을 경찰의 손에 넘겨주었다. 경찰은 그들 중 82명을 학살했다.
 
  방송은 “여자와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말라” “절반만 채운 무덤을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거나 “어느 지역이 일손이 부족하니 가서 힘을 보태라”고 선동했다. 수도 키갈리의 한 여성 시의원은 투치족 머리를 잘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미화 30센트를 지급했다.
 
  영웅도 있었다. 밀 콜린스 호텔과 디플로마트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호텔로 피신한 1000여 명의 후투족 및 투치족 피란민들을 구출했다. 그의 이야기는 후일 영화 〈호텔 르완다〉로 만들어졌다.
 
  100일 동안 80만~100만명이 살해됐다. 분당 7명, 시간당 400명, 하루에 1만명이 피살됐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였다고 한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열강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학살 사태를 일단락지은 것은 투치족이 주도하는 르완다애국군이었다. 여기에는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반대해 온 온건파 후투족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7월 초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고, ‘후투파워’ 정권을 전복(顚覆)시켰다.
 
  학살에만 열중하고 있던 르완다 정부군과 민병대, 인테라함웨 등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웃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등으로 도주했다. 약자(弱者) 앞에서만 강했던 이들은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철저히 의식화되고 전투경험이 풍부하며 군기(軍紀)가 엄정한 르완다애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르완다애국군이 수도 키갈리에 들어왔을 때, 수도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정부에는 글자 그대로 단 한 푼의 달러도, 한 푼의 르완다프랑도 없었다.
 
  이후 들어선 카가메 정권은 주민등록증에서 인종별 구별을 철폐하고, 말단에서 학살에 가담했던 자들을 사면하는 등 화합정책을 펴는 한편,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국내 언론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르완다는 지금 1960~1970년대의 한국처럼 ‘잘살아보자’는 의욕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르완다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후투족은 자기들이 다시 투치족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앙앙불락(怏怏不樂)하고 있고, 투치족은 언제 다시 후투족 강경세력이 부활해서 학살이 되풀이될지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 유고슬라비아
  지식인들이 내전의 씨앗을 뿌리다

 
  〈역사적 배경〉
 
  1991년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공화국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내전이 일어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언어·문자·종교 등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과거 오스트리아 가톨릭-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서구문명권의 일부였던 반면, 세르비아 등은 그리스정교-오스만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은 동구문명권의 일부였다는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이들은 같은 ‘남(南)슬라브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고, 70년 가까이 한 나라로 살았다. 이런 유대를 깨뜨린 것은 공산주의 정권 시절부터 민족 간 갈등을 부채질해 온 지식인들과 동구 공산체제 붕괴 이후 권력을 탐하던 정치인들이었다.

 
 
  분열이 예정되어 있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지.
  유고슬라비아는 어쩌면 분열이 예정되어 있는 나라였다. 세르비아 등은 14세기 후반 오스만튀르크에 복속됐다. 반면 서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13세기 이후 헝가리 혹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여기서 이들의 운명이 갈렸다. 같은 남슬라브 민족이면서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을 믿고 라틴문자를 쓰면서 근대 서구문명의 정치·경제·문화적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반면에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 있던 세르비아 등은 전(前)근대의 단계에 머물렀다.
 
  근대 민족주의가 발흥한 19세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즘’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등이 손잡고 ‘남(南·유고)슬라브인’들의 통일민족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이미 독립을 쟁취한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가 발칸반도의 패권(覇權)을 장악했던 14세기 초 스테판 두산 시절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大)세르비아주의’가 등장했다. 그 주역 중 하나가 세르비아 군부의 실력자 그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었다.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크루나 루카(‘검은 손’이라는 뜻)’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크루나 루카’의 주적(主敵)은 19세기 후반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진출해 오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바로 이 ‘크루나 루카’의 하수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에서 벗어난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왕국과 함께 새로운 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새 나라의 이름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의 왕국’으로 정해졌다.
 
  1931년 알렉산더 국왕은 나라 이름을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개칭했다.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권력을 휘두르면서 그것이 마치 새로운 국가체제를 창출해 내기 위한 것인 양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인들이 패권을 잡고 있었다. 다른 민족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유고슬라비아왕국이 독립국가로 온전하게 존속한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1941년 4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국왕과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에 파시스트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우스타샤 정권은 35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요시프 티토.
  1945년 11월 전쟁 중 빨치산을 이끌었던 요시프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수립했다. ‘탈(脫)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공산주의자답게 티토는 특정 민족의 패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는 세르비아인이라는 티토의 개인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몬테네그로 등 6개의 공화국과 보이보디나(헝가리인 거주 지역), 코소보(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의 2개 자치주로 구성됐다.
 
  그럼에도 티토 치하에서 민족 간 갈등은 내연하고 있었다. 갈등의 주축은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이었다. 낙후 지역 개발을 위한 예산 배정을 놓고 다투는가 하면, 사전 편찬의 주도권을 놓고도 싸웠다.
 
  1970년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크로아티아의 이익에 입각한 정책을 수립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사회주의와 민족문제’라는 학술회의를 후원, 공산체제 수립 후 금기시되던 민족주의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영웅’들을 재발굴하는 작업에 나섰다.
 
  크로아티아문화협회 기관지 《흐르바츠키 티예드니크》는 이러한 민족주의 고취에 앞장섰다. 1971년 9~11월 이 매체는 세르비아인들이 얼마나 크로아티아인들을 착취하고 있는가를 고발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급기야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1971년 여름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 민족이 주권을 가진 민족국가”라면서 크로아티아가 연방탈퇴권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결국 티토는 크로아티아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크로아티아 공산당 지도부를 숙청했다.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투옥됐다. 후일 독립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프라뇨 투지만도 그중 하나였다.
 
  이어 티토는 1974년 유고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 연방을 사실상 국가연합 수준으로 개조하는 신헌법을 제정했다. 티토는 한편으로는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를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르비아의 패권을 견제함으로써 유고연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1980년 5월 티토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74년 신헌법 아래서 불이익을 받아왔다고 여기던 세르비아인들이 반격을 하고 나섰다. 1981년 세르비아 시인 고이코 됴고는 티토를 ‘늙은 쥐’라고 비난하는 시를 썼다. 세르비아과학예술아카데미가 만든 특별위원회는 1985년 “다른 공화국들에서는 교육을 통해 세르비아 혐오 사상을 전파하는 동시에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면서 “세르비아는 반(反)세르비아연합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지식인들이 뿌린 내전의 씨앗
 
보스니아 학살의 주역들. 왼쪽부터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세르비아과학예술아카데미 소속 역사학자 바실리예 크레스티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우스타샤 정권의 세르비아인 학살을 들고나와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학살은 크로아티아인의 천성”이라고 주장했다.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들이 믿는 가톨릭까지 비난하고 나섰다. 드라룩류브 지노이비치는 1988년 “바티칸은 1930년대에 세르비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고, 우스타샤 체제를 후원했으며, 유고슬라비아를 파괴하려 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이 가톨릭에 대해 품고 있는 오랜 의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유고 내전이 일어난 것은 1991년이었지만, 내전의 씨앗은 이미 20년 전부터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뿌린 것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할 것 없이 한 무리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한 것이 냉전 해체 이후 설 땅을 잃어가던 정치지도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87년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이 잇달아 붕괴하는 가운데 1990년 4~5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다당제(多黨制)에 바탕을 둔 자유선거가 실시됐다. 슬로베니아에서는 개혁적 공산주의자 밀란 쿠찬이, 크로아티아에서는 극단적 민족주의자 프라뇨 투지만이 집권했다.
 
  이에 자극받아 세르비아 내 민주세력들도 밀로셰비치에게 다당제 도입과 자유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1991년 3월에는 베오그라드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밀로셰비치는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우며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려 했다.
 
  밀로셰비치의 앞잡이가 된 것은 세르비아과학예술아카데미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조장하는 한편, 야당 세력을 ‘배신자’로 몰아붙였다. 작가 부크 드라스코비치 등 반밀로셰비치 인사들은 암살당했다.
 
  그해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 내전이 벌어졌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결국 독립을 쟁취한 후, 전쟁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옮겨졌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모두 이곳에 사는 자국계(自國系) 주민들을 내세워 괴뢰정부와 민병대를 조직하고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을 학살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유고의 ‘홍위병’들이었다.
 
 
  어느 학살자의 고백
 
  여기에 언론까지 가세해 ‘민족청소’를 선동했다. 이들의 선동에 평범하게 살던 이들이 총을 들고 이웃을 살해했다. 노점상을 하던 보스니아 태생의 세르비아 청년 보리슬라프 헤라크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8차례나 아녀자를 강간한 후 살해했고, 29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을 학살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르비아방송은 이슬람 교도들이 보스니아를 이슬람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세르비아인을 말살하려 한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할 것이고,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비아민병대에게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난 민병대원들은 이 같은 얘기들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이슬람 교도들로부터는 어떤 것이든 탈취해도 좋고, 이슬람 여자들을 강간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아이들도 세르비아인이 되어 결국은 세르비아인의 수를 늘려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종청소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전의 불길은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다시 코소보로 번졌다. 내전은 2002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등 내전과 학살을 주도한 자들은 유고국제전범재판소의 법정에 섰다. 밀로셰비치는 재판 중 자살했다.
 
 
  ‘국민을 전쟁으로 이끈 지도자들’
 
  유고 내전 수습을 위해 활동했던 미국 특사 리처드 홀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비극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인종적 갈등을 부추긴 범죄적인 정치지도자들의 산물이었다. 이 지도자들은 티토 이후 구체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국민을 전쟁으로 이끄는 길을 택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뿐이 아니었다. 르완다에서도, 중국에서도 ‘개인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인종적 갈등을 부추긴 범죄적인 정치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개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거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이론적으로 그들을 뒷받침하거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악한 지식인이나 언론, 혹은 교육시스템이 있었다. 그들이 ‘홍위병’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려는 정치꾼들, 어떤 정치적 폭풍이 몰아쳐도 나만 비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얍삽한 정치인과 관료들, 권력에 영합해 있는 일 없는 일 꾸며대면서 대중을 선동하는 언론들, 싸구려 민족주의를 파는 지식인들,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증오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어린 세대들, 사랑과 자비보다는 미움과 갈등을 더 열심히 설파하는 종교인들이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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