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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앙카라 기행

터키는 지금 ‘쿠데타 잔당 청산’ 중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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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15일 불발 쿠데타… 250여 명 사망, 2만9000명 체포, 10만명 해직
⊙ 곳곳에 케말 파샤의 동상과 사진… 다른 한편에서는 모스크 건설 한창
⊙ “미니스커트 입고 버스 타면 눈총받는 분위기가 너무 싫다… 이스탄불로 가고 싶다”
불발 쿠데타 와중이던 2016년 7월 16일 테러가 일어났던 복합문화단지 앞. ‘7·15신화’라는 조형물이 서 있다.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석차 지난 11월 13~17일 터키에 다녀왔다. MIKTA는 2013년 유엔총회 이후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가 만든 협력체이다.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에 드는 중견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자고 만든 모임이다. 해마다 행사 주관국을 정해 언론인, 청소년, 종교인 교류 행사 등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터키가 행사를 주관하게 됐는데, 한국, 멕시코, 인도네시아 기자들이 참석했다.
 
  행사는 이스탄불상공회의소, 터키항공, 민간방송사 방문을 제외하면 주로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진행됐다. 인구 515만명의 앙카라는 한마디로 ‘100년 된 세종시(市)’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이스탄불을 대신해 앙카라가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1923년이다. 앙카라는 그 이전에는 유럽에 ‘앙골라’라고 알려진 도시였다. 앙골라 양모, 앙골라 토끼 할 때의 그 ‘앙골라’다.
 
 
  앙카라 시내로 가는 길
 
앙카라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정치선전물. 7·15 불발 쿠데타를 진압한 대통령과 민중을 예찬하고 있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의 깡촌이던 이곳이 신생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순전히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1881~1938) 덕분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패망한 후 터키공화국을 세운 케말 파샤는 구(舊)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을 떠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벽촌이던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종시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면서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 천도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한 시대와 지배 세력의 변화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세종시’인 셈이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는 515만명에 이르는 대도시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앙카라는 이스탄불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국제공항과 앙카라의 앙카라국제공항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자(前者)가 세계 각국에서 항공기가 몰려드는 명실상부한 허브(hub)공항이라면 후자(後者)는 국내선 위주의 공항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공항에서 앙카라공항으로 향하는 길.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곳곳에서 진행 중인 모스크(이슬람 사원) 공사였다. 다른 하나는 시내로 들어가는 길 도로변에 붙어 있는 정치 선전물이었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2016년 7월 15일 불발 쿠데타 당시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 그리고 쿠데타 당시 희생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슬람원리주의로의 회귀(回歸)와 쿠데타 잔당(殘黨) 청산이라는 터키의 양대(兩大) 관심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테러가 일어났던 복합문화단지
 
복합문화단지 안에 있는 모스크. 에르도안 대통령이 알라에게 바치는 사원인 듯하다.
  터키에 있는 내내 2016년 7월 15일 있었던 불발 쿠데타와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11월 13일 도착 직후 점심 식사를 같이한 외무부 관리들부터 시작해서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단어가 있었다. ‘FETO’, 즉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이었다. 어딜 가나 FETO 얘기가 나왔다. 국회, 경제부, 공보처, 국영방송국, 재난관리처, 민간방송국, 심지어 해외원조기관에서도…. 기(起)-승(承)-전(轉)-FETO였다.
 
  펫훌라흐 귈렌은 에르도안 정권이 2016년 불발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인물. 에르도안 대통령이나 펫훌라흐 귈렌 모두 케말 파샤 이후 터키가 지향해 온 세속주의 노선의 수정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흡사하다. 다만 펫훌라흐 귈렌은 교육, 복지, 사회봉사, 종교 간 대화 등의 문화적 영역에서부터의 의식 개혁을 추구하는 반면, 에르도안은 정치 권력을 통한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지금은 정적(政敵)이 됐다. 귈렌은 에르도안의 부패와 독재를 비난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귈렌을 불발 쿠데타의 배후 조종자라면서 미국에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외무부 관리들과 식사를 마친 후 터키 측이 처음 안내한 곳은 FETO의 테러가 저질러졌다는 현장이었다. 현장은 대통령궁 주변에 조성되고 있는 복합문화단지였다. 모스크, 컨벤션센터, 국립도서관 등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쿠데타 와중이던 2016년 7월 16일 이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17명이 희생됐다는 것이 터키 당국의 설명이었다.
 
  현장에는 당시 상황을 알리는 설명판과 함께 ‘7・15 신화(神話)’라는 붉은색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통령궁에서 신화는 시작된다”는 글귀도 있었다. 이 조형물은 국회의사당, TRT(터키라디오텔레비전・국영방송국) 등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과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났던 곳마다 만날 수 있었다.
 
  복합문화단지 안에는 지은 지 1년밖에 안 되었다는 모스크가 있었다. 오스만튀르크제국 시절 술탄이나 고관(高官)들이 이스탄불에 화려한 모스크를 지어 알라(신)에게 헌납했던 것처럼, 이 모스크는 ‘21세기의 술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알라에게 바치는 헌물(獻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구석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 있는 게 이채로웠다.
 
 
  건국의 산실, 옛 국회의사당
 
터키 건국의 산실인 옛 국회의사당.
  테러 현장을 둘러본 후, 지금은 박물관이 된 공화국 초기의 국회의사당을 구경했다. 작고 평범한 석조 건물이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이 작은 건물에서 터키인들은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서 일어나 ‘근대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이슬람 세계 초유의 실험을 시작했다. 공화정을 도입했고, 여자들에게도 참정권을 주었다. 90여 년 전에 벌써 여성 국회의원들을 배출했다. 아랍어 문자를 폐지하고 프랑스 및 독일의 것과 흡사한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 전통적인 터키 복장을 폐지하고 양복을 입도록 했다.
 
  가장 큰 혁명은 정교(政敎)분리였다. 버나드 루이스 같은 이슬람 전문가들이 이슬람 세계 쇠퇴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은 게 이슬람 특유의 정교일치체제였다. 터키공화국은 정치는 물론 사법과 교육의 영역에서까지 이슬람의 영향력을 몰아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슬람신학교는 정부의 엄격한 감독을 받았다.
 
터키 국회의사당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동상.
  이 모든 혁명의 중심에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가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옛 국회의사당 건물 곳곳에 그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그의 집무실, 그의 초상, 그의 흉상, 그가 쓰던 모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가 원래 성(姓)이 없던 터키인들에게 성을 쓰게 했을 때, 터키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헌정(獻呈)했다. 글자 그대로 그는 ‘국부(國父)’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튀르크제국이 패망한 이후 영국·프랑스 등 열강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을 해체하려 들었다. 이들은 그리스를 사주해 빈사(瀕死)지경에 이른 오스만튀르크를 침공하게 했다. 그리스는 350여 년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원한을 씻고 고대(古代) 그리스의 식민도시국가들이 번성했던 고토(古土) 소아시아를 회복해 ‘신(新)헬레니즘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 꿈을 산산조각낸 사람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전투에서 호주·뉴질랜드군을 격멸한 명장(名將)이었다. 그는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저항군을 결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결국 그는 그리스군을 격퇴하고 이스탄불 주변과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 민족이 근대국민국가로 존속할 수 있는 영역을 획득한 것이다.
 
  앙카라에서 소집된 터키 대국민회의(국회)는 1922년 12월 1일 술탄(황제)제 폐지를 결의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듬해 7월 24일에는 로잔 조약에서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해 1923년 10월 29일에 정식으로 터키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앙카라는 새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 작은 박물관은 건국의 산실이었다.
 
 
  7·15 불발 쿠데타
 
  당연히 앙카라는 ‘아타튀르크의 도시’였다. 어딜 가나 그의 동상이나 초상이 있었다. 국회의사당에도 국민을 이끄는 아타튀르크의 모습을 형상화한 커다란 석상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흉상 하나 설치하는 것을 두고도 여러 해 동안 인색하게 굴었던 우리의 현실과 대비됐다.
 
  국회 사무총장과 만나기로 한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왜 MIKTA 저널리스트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만나자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기자들 자리마다 《터키 7・15쿠데타 시도와 민중의 승리(July coup attempt in Turkey and people's victory)》라는 책자와 ‘Stop to the coup attempt’라고 적힌 USB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 사무총장은 열정적으로 불발 쿠데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쿠데타 세력, 즉 ‘FETO’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럴 만도 했다. 불과 하루 만에 진압된 불발 쿠데타였지만, 그 양상은 격렬하고 참혹했다. 쿠데타군은 공군 전폭기와 육군 헬리콥터를 동원, 국회의사당을 폭격했다. 당시 부서진 건물 부위는 유리로 덮여 보존되고 있다. 하루 사이에 250여 명이 사망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군부 숙청을 단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군부가 입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요 부대 지휘관들을 비롯한 군 상층부가 가담했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병(身柄)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자신은 안전하다면서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나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들은 국기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쿠데타군의 발포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결국 하루 만에 쿠데타는 진압됐다. 공화국 건국의 주역이자, 케말 파샤의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의 수호자’로 1960년, 1971년, 1980년 세 차례 쿠데타를 감행했던 터키 군부는 처참하게 침몰했다. 시민들은 포로가 된 쿠데타군에게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가히 ‘민중의 승리’라고 할 만했다.
 
 
  2만9000명 체포, 10만명 해직
 
  그 이후가 문제였다.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해직됐다. 넘쳐나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들을 풀어주는 바람에 치안이 나빠졌다는 얘기마저 돌 정도였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안이 통과됐고, 사형제도가 부활했다. 한국에서는 ‘촛불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적폐청산’이 한창이라면, 터키에서는 ‘7・15신화’라는 이름 아래 ‘쿠데타 세력 청산’이 한창이다. 그러면서 터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국민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독재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면,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
 
  국회 사무총장에게 물어보았다.
 
  “불발 쿠데타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체포됐느냐?” “많은 장교, 교사, 교수, 언론인, 공무원들이 해직됐다고 들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체포된 사람은 2만9000여 명, 해직된 사람은 10만명에 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함께 갔던 이상현 연합뉴스 기자는 “쿠데타 이후 터키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국회 사무총장은 “정부와 의회가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이렇게 기자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통역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 질문을 통역하면서 진땀이 났다”고 말했다. 그 말에 오늘날 터키 사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15 스튜디오
 
  FETO,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11월 14일 아침 공보처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나왔다. 청사 1층에는 7・15 불발 쿠데타 당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사진을 배경으로 악수를 나누는 처장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인도네시아 기자들이 터키 내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위협에 대해 물었다. 알 카에다나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기자들로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도 FETO가 튀어나왔다. “FETO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파워풀한 테러 조직” 운운하는 얘기였다.
 
  국영방송국 TRT 관계자들과의 만남도 쿠데타 얘기로 시작됐다. 메인 스튜디오 입구에는 ‘7・15 스튜디오’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보도국장은 “쿠데타 당시 군인들이 ‘군이 전국을 장악했다’는 방송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아나운서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를 기념해 이 방을 ‘7・15 스튜디오’라고 명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방송국 메인 스튜디오를 그렇게 명명하는 것 자체가 벌써 정치적 편향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발 쿠데타 이후 ‘언론의 자유’가 잘 보장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문제 없다”고 말했다.
 
  이스탄불의 민간방송국 국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표현하는 언론도 있다”면서 “언론자유에 관한 한, 터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중 하나”라고 단언했다. 다만 그는 “언론인이라고 해도 범죄를 저질렀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발 쿠데타 이후 발행부수가 가장 많던 《자만》 등의 신문들이 쿠데타 연루 혐의로 폐간된 것을 감안하면,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아타튀르크 영묘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영묘.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었던 곳은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영묘(靈廟)’였다.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케말 파샤’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이후 그는 내가 줄곧 존경해 온 이였다. 아타튀르크의 묘소이자 기념관인 이곳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장엄했다. 엄숙한 표정의 위병(衛兵)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묘소를 지키고 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참배객들이었다. 국기를 흔들면서 영묘로 향하는 ‘사자(獅子)의 길’을 걸어오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해맑았다.
 
  어딜 가나 거리 곳곳에는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아타튀르크 주간(週間)’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초등학교 건물 벽에는 독립전쟁 당시 케말 파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터키는 누가 자기 조국을 세웠는지는 제대로 가르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다.
 
아타튀르크 영묘에서 근무 교대를 위해 이동하는 위병들.
  하지만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숭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 회귀 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 출신인 그는 섣부르게 세속주의에 도전하다가 군부의 반격을 받았던 일부 전임자들과는 달리 2003년 총리로 취임한 이래, 경제발전, 인프라 확충, 복지 확대 등의 정책을 펴서 인기를 얻었다. 몇 번의 정치적 음모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군부・사법부・행정부 등에 포진한 세속주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2014년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2016년 불발 쿠데타 이후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을 강화했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만제국을 혐오하고 터키인의 근대국민국가를 창출하고 싶어 했던 케말 아타튀르크와는 달리, 에르도안은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다. 터키의 대외원조기관인 TIKA의 홍보영상에는 에르도안이 “이 모든 재앙은 오스만제국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에르도안이 옛 오스만제국의 강역이었던 외국의 재해지역을 돌아보고 터키의 지원을 약속하는 대목인 듯했다. 이슬람교와 거리를 두려 했던 아타튀르크와는 달리 에르도안은 2071년까지 터키를 완전한 이슬람국가로 되돌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변화하는 터키
 
국기를 흔들면서 아타튀르크 영묘를 참배하러 오는 어린이들.
  앙카라는 아타튀르크의 도시였지만, 지금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아타튀르크의 동상들은 여전히 거리 곳곳을 지키고 서 있고, 공무원부터 어린이들까지 그를 기리고 있지만, 터키의 내면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송국에서는 셔츠나 민소매 차림의 젊은 여직원들 옆에서 히잡을 단정하게 두른 여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도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많이 보였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페인트 공격을 받는 일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앙카라 거리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버스를 타면, 눈총을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아닌가? 한쪽이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다.” 그는 “이스탄불로 떠나고 싶다”면서 “앙카라를 떠나 이스탄불로 가는 것은 이곳 젊은이들의 로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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