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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우리 풍수

청와대가 흉지(凶地)라고?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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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부터 경복궁이 길지(吉地) 아니라는 주장 있어
⊙ 세종, 백악산에 올라본 후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
⊙ 조선왕조 500년 지속, 대한민국의 발전 등을 보면 경복궁·청와대는 길지
⊙ 대통령 집무실 이전시 정부과천청사나 경희궁 등이 좋을 듯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청와대 전경. 조선 초부터 경복궁과 지금의 청와대 자리가 풍수상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사진=조선일보DB
  올해 10월 25일 승효상 건축가가 청와대 공부모임인 상춘포럼에서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 내용 중에는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2013년 3월 《조선일보》 ‘국운풍수’에서 필자는 갓 취임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을 주제로 ‘덕담’ 삼아 다음 글을 썼다.
 
  〈금강산·설악산·삼각산·팔공산·계룡산·모악산 등등의 산봉우리들은 북악산처럼 화강암으로 양명(陽明)하면서도 ‘웅(雄)’하고 ‘장(壯)’하다. 산 높고 물 곱고[山高水麗], 그 위를 비추는 아침 해는 선명하다[朝日鮮明]. 이런 터에 큰무당들이 몰려들고 큰 종교들이 자리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큰무당은 여성들이며, 이와 같은 터에 쉽게 감응하는 것은 문화예술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우리나라 인물들 가운데 문화·예술·체육계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류는 우리 국토가 갖는 화기가 환희용약(歡喜踊躍·기뻐 날뜀)하는 현상이다. … 청와대 터는 문화융성과 더 궁합이 맞는다. 괴테(Goethe)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고양한다’고 했다. 물론 여성적인 것이 여성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은 여성이기에 그 여성성과 문화를 통해서 세계대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이 글을 쓴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계기로 ‘청와대 흉지설’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운하게 될 때마다, 그리고 측근 비리가 터질 때마다 ‘청와대 터가 문제’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시해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나라를 흔들어 놓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은 감옥에 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살했다.
 
  집권 초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 유우익 당시 대통령실장과 김종구 《한겨레》 편집국장 사이에서 뜻하지 않은 ‘청와대 풍수 논쟁’이 붙었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다스’ 관련하여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못하고 파면당했다. 청와대 흉지설이 힘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세종로청사)로 옮기겠다고 공약했었다.
사진=김두규
  2017년 3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이 확정되자, 대선주자들의 공약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었다. 문재인·안철수·안희정·유승민 후보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19대 대선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이전의 대선 주자들 김영삼·이회창 후보도 대통령 집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했다. 공약은 실현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가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세종로)로 이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집무실 이전을 구체화한다는 뉴스가 간헐적으로 나오지만 언제 어디로 이전할 것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고교 동창 건축가 S씨와 전 문화재청장을 지낸 Y씨 등이 주도하고 있다는 소문뿐이다. 대통령 집무실뿐만 아니라 비서실과 경호실 등 부속기관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서울청사나 별관의 경우 공간의 협소함과 보안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정부서울청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하고 다른 부속기관은 길 건너 고궁박물관을 쓰게 한다는 소문도 들린다.”(이창환 한국전통조경학회장·상지대 교수).
 
  정부서울청사 및 별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길 경우 그들의 집무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이미 행정안전부는 세종시 이전이 확정되었지만, 그 밖의 광화문청사 내 부처도 연쇄이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역대 대선 후보자들의 공약이 되었는가? 몇 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첫째, 청와대 본관의 협소함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측근이었던 정재문 전 외교통상위원장은 당시 대통령에게 청와대 본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고층건물을 지어 근무공간을 확대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둘째, 본관·비서실·관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여민관으로 집무실을 옮겼기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셋째, 청와대가 경복궁 뒤쪽에 푹 박혀 있어 ‘소통부족’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논의되는 것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탈(脫)권위주의의 문제이지 터의 문제는 아니다.
 
 
  청와대 흉지설
 
  이러한 이유보다는 ‘청와대 흉지설(凶地說)’이란 찜찜한 소문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청와대 흉지설을 처음 주장한 이는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다. 1993년에 최 교수는 “청와대 터의 풍수적 상징성은 그곳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한국의 풍수지리》)라면서 조선총독들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살다가 뒤끝이 안 좋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에 풍수술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성찰 없이 그 내용을 확대시키면서 청와대 흉지설이 굳어진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 역시 비판 없이 그 내용을 수용했었다. 그 당시 즉 1990년대에는 청와대를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주변 답사도 제대로 못했던 필자의 미숙함이 원인이었다.
 
  ‘신의 거처’, 즉 큰 사찰이나 성당이 들어서려면 풍수상 2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첫째는 흙산[肉山]이 아닌 돌산[骨山]이어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은 터를 감싸는 좌우 산들이 완벽하게 감싸 주어야 한다. 즉 경복궁과 청와대의 내백호와 내청룡에 해당되는 경향신문사에서 조선일보사에 이르는 지맥(내백호)과 감사원에서 한국일보사로 이어지는 지맥(내청룡)이 좀 더 높고 길게 뻗어 나와 교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두 지맥이 낮은데다가 서로 교차하지 못하여 내수구(內水口)가 벌어져 있다. 이곳이 신들의 거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종, “이곳은 물이 없는 땅”
 
  이 일대가 왕궁 터로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000년 전 인 고려왕조 때다. 1101년 당시 숙종의 명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던 윤관과 최사추가 이곳을 추천한다.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받고 노원역(노원구 상계동), 용산(지금의 용산) 등 여러 곳을 살폈습니다. 모두 적당하지 아니하고 삼각산 북악 남쪽이 산 모양과 수세가 옛 문헌과 부합됩니다. 남향으로 하되 지형을 살려 도읍을 건설할 것을 청합니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개경을 버리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곳을 정궁(正宮)으로 삼았다. 흉지설은 조선 초기에 잠시 대두됐다. 1404년 당시 임금 태종은 조준·하륜 등 대신들과 당대 최고의 풍수사 이양달·윤신달 등을 불러 이곳 터를 잘못 잡았음을 질책한다.
 
  “내가 풍수책을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고 했더라. 만약 풍수책을 참고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참고한다면 이곳은 물이 없는 땅이니 도읍이 불가함이 분명하다. 너희가 모두 풍수지리를 아는데, 처음 태상왕(이성계)을 따라 도읍을 정할 때 어찌 이 까닭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 당시 원로 풍수관료들(이양달·고중안)은 길지(吉地)임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또한 경복궁 터에 회의적이었던 태종도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려 그의 재위 시절에 조선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이곳이 흉지라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어 논쟁이 된 것은 1433년(세종 15년)이다. 당시 풍수관리 최양선은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목멱산(남산)에서 바라보면 향교동(현재의 운니동 부근)과 이어지는 지금의 승문원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했을까요”라면서 경복궁 흉지설을 제기한다.
 
  여기에 청주 목사 이진도 가세를 한다. 이진은 박학다식에 정치적 능력도 탁월하여 조정에서 신임을 받은 유신(儒臣)이었다.
 
  “대체로 궁궐을 짓는 데 먼저 사신(四神)의 단정 여부를 살펴야 합니다. 이제 현무인 백악산(북악산)은 웅장하고 빼어난 것 같으나 감싸 주지 않고 고개를 돌린 모양이며, 주작인 남산은 낮고 평평하여 약하며, 청룡인 낙산은 등을 돌려 땅 기운이 새어 나가며, 백호인 인왕산은 높고 뻣뻣하여 험합니다.”
 
 
  세종, 직접 북악산에 올라 판단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의 동상. 세종은 경복궁이 길지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러다 보니 세종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승정원에 지시하여 풍수에 능한 자를 찾아 논의하라고 한다. 임금의 명을 받은 도승지 안숭선은 황희·신상 등과 함께 직접 남산에 올라가 경복궁 뒷산인 백악산 산줄기를 살핌과 동시에 풍수관리 최양선·이양달·고중안·정앙 그리고 풍수에 능한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를 하도록 한다. 이때 이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이양달·고중안·정앙과 같은 풍수관리들은 경복궁 길지설을 견지했고, 최양선 등은 흉지설을 주장한다. 경복궁 길지설을 주장하는 측의 의견이다.
 
  “백악산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리가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북악이다.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같이 되어서 1만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다.”
 
  결론이 도출되지 않자 세종이 직접 백악산에 올라가 지세를 살피면서 동시에 양측의 주장을 청취하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 백악산에 올라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또 이양달과 최양선 등의 양측 말을 들으면서 여러 번 되풀이로 살펴보니,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이다.”
 
  이어서 최양선을 “미치고 망령된 사람으로 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狂妄之人, 固不足信)”고 혹평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과 단종 역시 최양선을 싫어하자, 최양선은 고향 서산으로 은퇴한다.
 
  세조가 집권하자 최양선은 다시 경복궁 흉지설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세조와 대면할 기회를 갖는다. 1464년(세조 10년)의 일로 그때 최양선 나이 80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후배 풍수관리 최연원에게 여지없이 논박당한다. 세조는 나이 많은 최양선을 벌하지 않고 웃으면서 의복을 주어 내보낸다. 이때 장면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질이 우활하고 기괴하며 험악하여 자기 소견만이 옳다 하고 … 술법을 잘못 풀면서 음양·지리에 정통하다고 하니 천하의 미친놈(天下之妄人)이다.〉
 
 
  “그곳에 살았던 3대를 보라”
 
  결국 경복궁 흉지설은 최양선 한 사람에 의해 집요하게 주장된 셈이다. ‘터의 좋고 나쁨을 보려거든 그곳에 살았던 3대를 보라[欲知其吉凶, 先看三代主]’고 했다.
 
  경복궁에서 통치했던 조선의 임금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에 이어 세종도 이곳 경복궁에서 집무하면서 우리 영토를 백두산까지 확장시켰다. 지금의 한반도 모습이 갖추어진 것도 이때였다. 또 세종 때 한글이 만들어졌다. 우리 문자를 만듦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갖게 했다. 우리 민족사의 큰 업적이다. 광화문광장에 세종상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아들 세조는 왕권확립과 함께 문화를 크게 융성시켰다. 그의 손자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했다. 조선의 전성기는 바로 이때였고 그 활동무대는 경복궁이었다.
 
  조선왕조가 이곳 때문에 망했다는 풍수술사들의 말도 있으나 세계 역사상 한 왕조가 500년이 지속된 것도 드문 일이다. 왕조 평균 수명이 200년 안팎이니 그보다 두 배 이상의 수명을 누린 셈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으면서 절대빈곤을 해결했고, 산업화에 성공하여 경제대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올림픽을 치러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월드컵 4강 신화가 만들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켰다. 근대화에서 민주화로 그리고 세계화로 우리나라는 진보해 왔다.
 
  대통령들의 말로가 불행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불행이었지 국가의 불행은 아니었다. 그들은 본래 ‘역사의 하수인’이었다. 이성(Vernunft)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공물로 삼지 않고 정열과 야망을 지닌 개인을 활용한다’는 것이 헤겔(Hegel)이 말하는 ‘역사의 하수인’론이다. 그들은 때가 되면 용도 폐기되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알렉산더·카이사르·나폴레옹 등 세계적 영웅들도 결국 ‘역사의 하수인’일 뿐이다.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할 대통령들의 운명이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정열과 야망을 가진 이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땅이 두려워 집무실을 옮긴다면 지도자의 운명을 회피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행정수도 건설계획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 ‘광화문 집무’를 이행한다 하더라도 일러야 2019년에나 가능하다. 임기의 절반을 보낸 뒤의 일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지금의 여당이 재집권한다면 문제가 없으나 야당이 집권한다면 광화문 집무실을 활용할지 의문이다. 다시 청와대로 복귀할 것인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고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수도를 옮기고자 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국운을 생각할 때 청와대를 옮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도 입지에 대한 고민은 진지했다. 그는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그 자신이 대덕 연구단지를 만들 때 그곳을 행정수도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한 고민 끝에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발표했다. 그가 새로이 행정수도를 옮기고자 한 까닭은 인구집중, 국토의 불균형발전 등 복합적이었지만 북한의 사정거리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기획단(단장 오원철)이 구성됐고, ‘백지계획’이란 암호 아래 준비가 진행되었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 일대로서 그 진산은 국사봉이고 안산은 장군봉이었다. 국사봉 아래 김종서(세종 때 인물) 장군의 무덤이 있어 그 현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백지계획’은 문자 그대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2002년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는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을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단장 이춘희)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행정수도 이전은 좌절되었다. 대신에 행정부처만 옮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안’으로 축소·변경되어 지금의 세종시가 탄생하게 된다. 만약 박정희·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도론이 실행되었더라면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의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과천으로의 이전 생각해 볼 수도
 
세종시의 주산인 원수산 아래.
세종시로 수도가 이전되었다면 대통령 집무실이 지어졌을 자리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으나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간단하지 않다. 굳이 해야 한다면 몇 가지 전제하에서 그리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이다. 한류는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이에 걸맞게 대통령 집무실도 국격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남북통일 후의 수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셋째, 현재 과천·대전·세종 등으로 분산된 각 부처들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옮기는 방안이다. 세종시에는 원래 대통령 집무실을 위한 공간이 지금도 빈터로 남아 있다. 세종시의 주산인 원수산 지맥을 받은 혈처(穴處)를 그대로 비워 두고 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 단장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세종시 건설의 책임을 맡았던 이춘희 현 세종시장의 일관된 철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수도이전이 위헌’이란 판결이 난 만큼 개헌에 가까운 큰 변화가 있어야 세종시로 옮길 수 있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둘째, 정부과천청사를 대통령관저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하는 안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도읍이 될 만한 곳으로 묘사한 곳이기도 하다. 웅장한 관악산을 주산으로 그 아래에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이 들어선다면 경제대국에 걸맞은 공간배치가 될 것이다. 특히 정부과천청사 옆의 ‘중앙공무원교육원’은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활용할 수 있다. 원래 대통령 집무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정구역이 경기도이기에 ‘천도론’ 논쟁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곳을 서울로 편입시킨다면 별 어려움이 없다.
 
 
  4대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찾는다면 …
 
  셋째, 4대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경우이다. 이 경우 몇 가지 후보지가 등장한다.
 
  경복궁 동쪽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10여 년 전까지 국군기무사령부가 자리하던 곳이다. 군사시설이었기에 지하시설도 완비되어 보안상 어려움이 없다. 이곳은 경복궁 내청룡에 해당되는 자리이다. 백호가 예술과 재물을 주관한다면, 청룡이 명예와 벼슬을 주관하는 기운을 갖고 있다.
 
  이곳이 불가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금 내려와 대한항공이 소유하고 있는 송현동 빈터(덕성여자중학교와 종로문화원 사이의 빈터)이다. 원래 국방부 소유에서 미국 대사관 숙소 부지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대한항공이 사들인 곳이다. 7성급 호텔을 지으려다 허가를 받지 못한 곳이다. 이곳에 대통령 집무처가 새로이 들어선다면 경복궁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줄 수 있는 입지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기존 궁궐을 활용하는 방안이다. 경복궁을 대통령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광화문을 통해 당당하게 대통령과 관료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가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대통령과 사절들도 여기서 맞게 한다. 품격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그에 걸맞게 사람들이 채워진다.
 
 
  경희궁을 대통령궁으로
 
풍수적으로 논란이 된 적이 없는 경희궁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면 좋을 곳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 경희궁 활용이다. 경복궁·창덕궁·덕수궁에 비해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고, 인근의 주요 공공건물들(서울역사박물관·서울시교육청·기상청서울관측소)을 부속 건물로 활용할 수 있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년) 풍수술사 김일룡이 새문동에 새로 궁궐을 지을 것을 청하면서 시작한다.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곳은 원래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였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의 집터를 빼앗아 궁궐을 지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고 원래의 주인(정원군과 그 아들 인조) 차지가 된다.
 
  조선이 망한 뒤 일본인 중학교로, 그리고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 터로 활용되다가 최근에 일부가 복원되었다. 풍수적으로 흉지라는 소문이 한 번도 없던 곳이다. 경희궁을 추가 복원하되 내부를 현대식으로 하여 대통령 집무실로 활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북한이 대치하기에 보안이 중요하다. 경희궁 동쪽 담장과 인접한 곳에 거대한 지하벙커(280평 규모)가 있다. 일제가 미군의 폭격을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피란시설로서 조금만 손보면 지금도 집무가 가능한 완벽한 지하 벙커이다.
 
  경희궁 뒤쪽의 나지막한 언덕은 대통령과 참모 그리고 행정관들의 산책공간으로도 좋다. 광해군이 이 터에 유난히 눈독 들였던 것은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거처의 이상 조건, 즉 “거처는 반드시 밝고 넓게 트인 땅이어야 한다[居處必取疏明開豁之地]”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앞에 서 보면 ‘밝고 넓게 트인 땅’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의 근원지로서 대통령의 집무실이 전통 궁궐양식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세계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에 걸맞은 새로운 대통령궁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청와대 흉지론도 더 이상 풍수라는 이유로 언급되지 않기를 바란다. 땅이 무슨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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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오    (2017-12-11)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이 글이 유용하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며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며 주관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었고, 풍수지리학은 유용한 학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용탁    (2017-12-11)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풍수지리를 공부하고있는데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공부해보려고합니다.
  최유정    (2017-12-09)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0
풍수지리는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더 알아가고싶은 영역의 공부인 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김민상    (2017-12-08)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0
풍수지리에 관심이 없고 잘 모르지만 배우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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