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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권의 책

만공 (옹산(翁山) 스님 지음 | 미래인쇄사 펴냄)

일제에 맞서 조선 혼백을 지킨 만공선사의 항일운동

정리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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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옹산 스님은 지금까지 여러 학술대회를 통해 일제 강점기 때의 고승(高僧) 만공선사(1871~1946)의 독립운동 사례를 발굴해 왔다. 그는 만공선사가 독립유공자로 수훈(受勳)해야 할 위업을 세웠음에도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작가의 말’ 중 핵심 내용을 발췌·정리해 봤다.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37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31본산 주지회의 석상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을 향해 ‘할(喝)’이라는 이름의 폭탄을 투척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운동을 한 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확전을 통해 다케우라 같은 그릇된 우국주의자(憂國主義者)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준동(蠢動)하던 때 발생한 의거였기에 더욱 빛이 난다.
 
  이때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만공을 잡아 가두지 못했었다. 미나미 지로도 가토 기요마사 같은 불자였다. 그리고 그는 만공을 임진왜란 당시의 사명당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여겼었다. 바꾸어 말하면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만공이 있었다는 뜻이다.
 
  만공은 칼도 총도 폭탄도 아닌 오직 선봉(禪鋒)을 휘두른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무기보다도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사명당은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에게 수류탄을 던졌었지만 만공은 미나미 지로에게 원자폭탄을 투척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우선 아무리 설명해도 만공일할(滿空一喝)이 어째서 그처럼 가공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밝혀 둔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4년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만들어 나치들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잔혹상을 널리 세계인들에게 알렸었다. 일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도 정신대 피해여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스필버그의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나치의 잔혹상을 리얼하게 고발하였듯 할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사용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만공의 이야기가 한 치 앞이 분별이 안 되던 깜깜한 암흑 속에서 자행된 일제의 조선인 정신수탈사(精神收奪史)를 제대로 조명하여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만공이 이끌었던 선승 수좌대회와 유교법회(遺敎法會)의 동참 선승들이 바로 조선의 쉰들러리스트였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을 쓴 두 번째 의도다.
 
  사명당은 승병장(僧兵將)이 되어 왜적을 물리치는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종전 후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일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찾아가서 강화(講和)를 맺고, 포로로 잡혀 갔던 3500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한 바 있다.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 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하였다.
 
  선조(宣祖)는 사명당의 공로를 인정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임진왜란 참전 경험을 토대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과 중농정책(重農政策)의 실시, 인물 본위의 관리 채용, 탐관오리 숙청, 민력(民力)의 무장, 산성축조(山城築造), 무기제조, 군량미 비축 등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끝으로 벼슬을 제수 받은 지 3일 만에 사직(辭職)하였다. 당쟁을 앞세운 세도가들의 국정농단을 차단시키고, 사명당의 충정 어린 상소문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면 조선 말기 또 다시 일제에 병합되는 치욕스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을 텐데, 사명당을 승려라고 하시하였던 유림들이 종당에는 나라를 망쳐 놓고 말았다.
 
  수행 본분사(本分事)를 회복한 사명당은 묘향산(妙香山)으로 가서 은사인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영정(影幀)에 참배한 후 원주의 치악산에 머물며 행화하다가, 1610년 8월 해인사에서 원적(圓寂)에 드셨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도 사양했던 사명대사를 제향(祭享)하는 사당을 만들어 추모토록 하였는데, 그 역사를 오늘날의 표충사(表忠寺)에서 찾을 수 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조선인을 개조시켜 속속들이 일본인으로 만들어 나가던 황민화 정책에 맞서 만공이 우리의 얼과 혼(魂)을 지켜 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은 영원히 말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2의 사명당인 만공에 대한 예우(禮遇)가 조선이 독립된 지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양형(量刑) 위주의 독립유공자 서훈제도를 개정하지 않으면 역사왜곡(歷史歪曲)을 바로잡을 수 없고, 잘못된 역사 위에다가 세우는 국가의 대계(大計)는 결국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되고 만다. 사명당이 구해 낸 나라를 망쳐 놓은 유림들의 과오가 종교편향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만공에 대한 몰이해 현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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