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우리 땅 우리 풍수

노무현 등 대권 주자들과 풍수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안철수, 선영 알려달라고 하자 “전통문화는 잘 모른다”며 거절
⊙ 노무현의 봉하마을 사저 지을 때 ‘황천살(黃泉煞)’ 보여 만류했지만 결국 그곳에 집 지어
⊙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자연환경과 역사성 중시”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2002년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최근 경상남도 거제시 명진마을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 생가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다. 생가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 주인이 극성스러운 탐방객 때문에 사생활이 침해받는다는 이유로 집 앞을 트랙터로 막았다는 기사였다.
 
  이곳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금년 5월 10일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부터였다.
 
  필자도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다음 날 그곳을 찾았다. 그 터를 살피기 위함이 아니라 방문객과 마을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이미 생가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최측은 민주당의 그곳 ‘면당조직책들’이었다. 어디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그저 “구경하러 왔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솔직한 대답이 화근이었다. “직업은 교수이고, 목적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국운풍수’ 글을 쓰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대뜸 한 사람이 “《조선일보》와 상대하지 않으니 나가세요!” 한다. 무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멀리서 온 손님에게 무슨 예의입니까?”라고 받아쳤다. 중간에 말리는 이가 있어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생가에 거주한다는 배영철씨도 다시 만났다. 5년 전에 이곳을 답사하였고 그때도 만났다. 5년 전 인터뷰를 하였을 때 필자가 들은 기억과 기록이 있었다.
 
  “이곳이 문재인 후보(2012년 당시) 생가라 하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아니다. 어머니(추경순)가 그때 임신을 하고 있었기에, 한집에서 동시에 출산하면 안 된다 하여 문재인 모친은 이웃에 가서 출산했다. 물론 우리 집에서 여섯 살까지 살았던 것은 맞다.”
 
  이번에 갔을 때는 그 집이 태어난 곳이 맞다고 했다. 거제시도 생가복원을 추진한다. 관광객 유치를 위함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생가복원에 난색을 표한다. 6살까지 이곳에서 자랐으니 고향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셋방살이하였던 이곳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떤 잔영을 남겼을까? 오히려 대통령이 되기 전 집을 짓고 살았던 양산 매곡 사저가 문 대통령의 풍수관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 ‘용’들은 서울에만 거주하려 하는가?
 
경상남도 거제시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생가 (흰 자동차 앞 집). 문재인 대통령이 어렸을 때 셋방살이를 했던 집이다.
  왜 사람들은 ‘용(龍)’들의 거주지에 관심이 많을까? 태어난 터와 그 사람과의 동기감응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풍수관념 때문이다.
 
  풍수학인으로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의 대지관과 건축관이다. 잠룡(潛龍・대선후보)과 비룡(飛龍・대권을 거머쥔 자)들의 풍수관 추적하기를 20년 넘게 했다. 조금씩은 달랐으나 크게 보면 다르지 않았다. ‘진부’했다. ‘진부’함이란 선영(先塋)이 좋지 않다 하여 이장(移葬)을 한 잠룡과 비룡들의 행태였다. 김대중·이회창·이인제·김종필·한화갑·정동영·김무성 등 거물들이 풍수설을 좇아 대선(大選) 전후로 선영을 옮겼다. 이 가운데 J씨는 조상묘를 이장했다가 다시 ‘원위치’시키기도 했다. 수년 전 일이다. 그들의 대지관과 풍수관은 한마디로 ‘천박’했다.
 
  그들의 건축관은 어떠한가? 현행 헌법상 5년마다 새로운 비룡이 나타나고 더불어 은룡(隱龍・퇴임한 대통령)이 생기게 된다. 잠룡이 비룡 되었다가 은룡이 되면 그들이 머물 곳은 어디가 마땅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전 내곡동 사저를 지으려다 대통령답지 못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최순실은 퇴임 후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평창에 ‘기획부동산’을 도모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파면당한 후 삼성동에 머물다가 구속 중에 뜬금없이 내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큰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산 아래 막다른 골목집이다. 파면을 당했다지만 한때는 대통령이었다. 왜 갑자기 그곳으로 갔는지 궁금하다.
 
  퇴임 후 전직 대통령들은 대개 서울에 사무실을 내고 출근하며 ‘상왕(上王)’노릇을 하다가 죽어서는 대전 현충원이 아닌 서울 현충원 비좁은 곳으로 ‘끼어들려’ 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답지 못하다. 은룡들이라면 그들이 머물고자 하는 땅과 사저 건축에 대해 최소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특히 보수를 자처하는 ‘용’들일수록 전통문화를 품격 있게 체화(體化)시켜야 했다. 애당초 진보를 자처하는 용들은 전통사상으로서 풍수를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은룡들에게 귀향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향을 떠나지 않는 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촌놈’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도 ‘군자(君子)’라 할 수 없다. 외국 대통령과 총리들이 퇴임 후 지역사회로 내려가 사회봉사를 하며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후 워싱턴을 배회하지 않았다. 그들이 죽어 묻히는 곳도 국립묘지보다는 생전에 인연이 깊었던 곳이나 고향에 안장된다.
 
  ‘은룡’들이 저마다의 연못[淵]으로 되돌아간다면 권력분산과 지방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 귀향하지 않고 서울을 배회하는 은룡들이나 퇴직 후 귀향하지 않고 탑골공원 앞으로 ‘출근’하여 서성이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손학규, 선영 알려달라고 하자 가족회의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저.
  금년 3월 하순경의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확정하자 잠룡(대선후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당시 유력한 잠룡 가운데 하나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풍수관을 알아보고 싶었다. 국민의당 중진을 통해 본가나 처가의 고향과 선영 소개 혹은 안 의원과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지인은 안철수 의원(당시)에게 의견을 전달했으니 직접 연락을 해 보라며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하였으나 받지 않아 메모를 남겼다. 아무 연락이 없었다. 얼마 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 의원에게 필자의 부탁을 거듭 전하였더니 특유의 무표정으로 “전통문화는 잘 모른다!”라는 무색한 답변을 주더란다.
 
  수년 전 당시 유력한 잠룡으로 부상하던 손학규(당시 경기도지사) 측에 안 대표에게 했던 것과 같은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 “가족회의 결과 선영을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게 무슨 가족회의를 할 만한 일인가? 고향과 선영조차 세상에 알리기 싫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룡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에 이미 고인이 된 김근태 의원 사무실로 연락을 취한 적이 있었다. 바로 답변이 왔다.
 
  “고향과 생가는 부천인데 이미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선영은 어찌어찌하여 현재 찾을 수 없다.”
 
  솔직한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한 비룡 노무현
 
필자(왼쪽)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을 앞둔 2006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오른쪽 끝), 친구 이재우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을 만나 노 전 대통령 생가의 풍수를 살펴보았다.
  또 하나의 솔직한 비룡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2년 초에 모(某) 월간지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그해 12월 대선을 준비하는 잠룡들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잠룡들의 고향과 생가는 어떻게 찾을 수 있으나 선영 찾기는 매우 어렵다. 고향 뒷산에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찾아가기도 하지만, 문자 그대로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잠룡들의 지인이나 친척이 알려주지 않으면 답사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노무현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만은 달랐다. 빠르고 간결한 답변이 왔다. “고향에 가서 ○○○를 만나면 안내해 줄 것이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여 만난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이재우 당시 진영조합장과 형인 노건평씨였다. 선영과 생가 그리고 봉하산 정상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답사 안내가 끝나자 멀리서 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인연은 그것이 전부인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당시 “퇴임 후 임대주택에 살다가 귀촌하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에 민감하게 움직인 곳이 주택공사(현재 LH로 통합됨)였다. 당시(2005년) 주택공사 한행수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였기에 책임감이 강했던 것 같다. 기존의 임대주택으로 입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공사가 가지고 있던 땅 위에 새로 임대주택을 지어서 입주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주택공사가 가지고 있던 땅들 가운데 임대주택을 지을 만한 곳은 판교·청계산·수유리·연희동·일산 등 다섯 곳이었다. 주택공사에서 풍수 강연을 하였던 인연으로 위 후보지들을 둘러보고 자문을 하게 되었다. 다섯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그런데 얼마 후 대통령은 퇴임 후 바로 귀향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가 귀향하여 집을 짓고 살고자 한 곳은 생가 터였다. 그러나 그때 생가는 남의 소유였다. 집 주인이 팔려 하지 않았다(나중에 매입). 하는 수 없이 생가 뒤에 있는 단감나무 밭을 사저(私邸) 부지로 계획하고 있었다.
 
 
  봉하마을 노무현 사저의 풍수
 
  2006년 6월 어느 토요일 필자는 청와대 관계자 10여 명 및 건축설계를 맡은 정기용 선생과 현장답사를 했다(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그리고 봉하마을로 움직였다). 당시 총괄책임은 정상문 총무비서관이었다. 그날은 마침 노건평씨의 자녀 결혼식이 있는 날이어서 오전에는 노건평씨가 현장에 동행하지 못했다. 사저 예정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 개진이 있었다. 필자의 차례가 되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① 고총(古塚·주인 잃은 무덤)이 있는 곳이라서 집터로서 부적합하다.
  ② 봉하산 쪽 바위가 지나치게 강하다.
  ③ 사저 예정지 바로 옆(봉하산 쪽)으로 냇물이 흐르는데 그쪽으로 골바람이 분다. 방위상 북동쪽으로 풍수에서는 황천살(黃泉煞)이라 하여 꺼린다.

 
  ‘③’항의 말을 듣던 경호실 담당자가 “이곳은 경호상에도 문제가 있다”라고 거든다. 이에 또 다른 행정관이 “여사님(영부인)께서도 ‘여기가 왠지 무섭다’고 하셨어요”라고 덧붙인다.
 
  필자는 속설(俗說) 하나를 더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것은 풍수설이 아니었기에 꺼내지 않았다. 다름 아닌 “집 뒤로 이사 가지 않는다”는 속설이다. “집을 물려 앉히지도 않는다” “굴뚝 뒤로 이사 가면 안 된다” “부엌 뒤로 이사 가면 안 된다” 등과 같은 뜻의 속설인데 사저 예정지가 바로 이에 해당되었다.
 
  총무비서관은 “그럼 어디가 좋겠는가?”라고 대안을 물었다. 일행은 사저 예정지에서 내려와 생가와 마을을 지나 마을 입구(진영읍 방향) 산자락 부근으로 움직였고, 근처의 단감나무 밭을 지목했다. 마을과 조금 떨어져 진입이나 경호도 좋을 뿐만 아니라 멀리 봉하산도 덜 위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들판 건너 앞산인 ‘뱀산’이 유정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삼병일약설(三病一藥說)’
 
  정상문 총무비서관과 다른 일행은 먼저 떠나고 건축가 정기용 선생과 행정관 한 명이 남았다. 정기용 선생이 점심을 산다 하여 택시를 타고 인근의 어느 횟집으로 이동했다. 정기용 선생은 그날 처음 만났다. 프랑스 유학 출신으로 파리에서 건축 사무실을 운영한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건강이 안 좋은지 얼굴이 수척했다. 그럼에도 소주 한잔을 나누며 필자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했다(2011년 지병으로 작고). 다음 날(일요일)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께 사저 건축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면서 필자의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건축과 풍수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전통 집짓기 예술’로서 풍수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대주의에 경도된 한국 건축계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삼병일약설(三病一藥說)’을 말했다. “한국 건축계에 세 가지 병[三病], 즉 건축과에 들어오면 막연하게 문화인이 된 듯 착각하는 문화병, 서양 대가의 건축만을 건축으로 아는 대가병, 자신의 프로젝트만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유토피아병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치유하기 위해 ‘한 가지 약[一藥]’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 현실의 구체성 속에 우리들의 문제와 해법’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건축사에 가장 오래된 고전 《건축십서(建築十書》를 남긴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건축가는 기후·공기·토지의 적합도, 물의 이용과 관련된 의학 지식을 구비할 필요가 있는바, 이것들을 도외시하면 쾌적한 주택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비슷한 건축관이다. 정기용 선생은 ‘지금 여기 현실의 구체성’의 하나로 전통 풍수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보았다.
 
  흔히 한국의 풍수술사들은 풍수(風水)를 정의할 때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이는 구체성이 결여된 개념이다. 이 문장은 풍수고전 《청오경》이 출전으로 풍수이론이 형성되던 초창기의 부실한 내용일 뿐이다. 풍수서적의 많음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사자성어로 대변한다.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는다’는 뜻이다. 그 수많은 풍수서적들이 공통적으로 정의하는 풍수 개념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살 만한 터를 잡고(卜之), 건물을 짓고(營之),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補之・조경행위), 그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주고(名之), 거주하기(居之)까지의 일련의 행위들이 길한가 흉한가를 사전에 점쳐 보는 것(占之)을 포괄하는 행위”가 풍수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들의 주체는 그곳에 살게 될 주인이다. 건축가는 의뢰를 해 온 고객(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함이 중요하다. 전통사상으로서 풍수가 당당하게 서양철학과도 만날 수 있음은 바로 이 부분이다. 서구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집짓기에 관한 성찰은 동양의 풍수와 유사한 관념구조를 갖는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풍수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집 문제에 본질적 질문을 던진 것은 2차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부흥하는 과정에서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이다.
 
  “우리의 거주(wohnen)는 주택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거주는 상황이 좀 다를지언정 노동에 의해 휘둘리고, 이익과 성공만을 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동요하고, 또한 오락과 레저산업에 매료되어 있다.”
 
  부동산, 특히 아파트를 축재의 수단으로 여겨 아파트 가격관리가 국토교통부의 핵심과제가 되고, 강변과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지어 성공의 상징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대한민국 졸부들의 천민성(賤民性)에 그대로 적용되는 발언이다.
 
  하이데거는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한다.
 
  집짓기 행위의 본질을 하이데거는 〈집을 지음 살아봄 생각함(BAUEN WOHNEN DENKEN)〉(1951년)이란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생각은 동양의 풍수관과 흡사하다. 하이데거는 대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본질적으로 동양의 풍수관과 친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BAUEN WOHNEN DENKEN〉이란 논문 제목은 기존의 독일어 문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이데거 특유의 문장이다. 제목을 보면 명사처럼 쓰였지만 3개의 동사를 쉼표(,)를 찍지 않고 이어서 표기하여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다. ‘집을 짓고 거기에 살아보고 사유하는 것’, 이 셋이 각자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것이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는 말한다.
 
  “땅을 구원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그 땅 위에 살 수 있다. 땅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 땅을 파괴나 폭력적 개발 위험으로부터 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고유한 본질에 자유롭게 존재케 하는 것이다.”
 
  땅 자신의 재능과 본질을 드러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케 하는 것이다. 아무 데나 터를 잡지 않고, 아무렇게나 집을 짓지 아니하고, 조경에는 자연이 요구하는 일정한 원칙이 있고, 집의 이름을 짓는 데는 그 땅과 건축주의 철학이 반영되어야 비로소 그 땅과 건물이 길(吉)하다는 점(占)이 나온다. 풍수에서는 ‘점’이라 하였고, 하이데거는 이를 ‘구원’과 ‘자유’로 표현했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풍수관’과 집짓기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사진=안도 다다오 사무소 제공
  건축주는 자신이 터잡기와 집짓기에 정확한 지식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용’들의 경우 국격(國格)을 대변하기에 더욱더 그렇다. 그렇지 못함이 문제이다.
 
  흔히 건축가는 자신이 전문가라는 이유로 건축주를 무시하려 든다. 잘못된 관행이다.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주장에 건축가들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필자는 2016년 2월 일본 오사카 그의 사무실에서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인터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안 들면 인터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최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준비하여 갔다. 인터뷰는 1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한국의 건축계와 풍수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핵심 질문과 답변이다.
 
  〈필자 : 클라이언트(건축주)에게 의뢰를 받고 건물을 지으려 할 때 그 지어질 땅을 보게 될 터인데, 땅을 볼 때 어떤 원칙을 갖고 보십니까?
 
  안도 다다오 : 클라이언트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나에게 전달하는 마음과 생각을 제일 우선시합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건축하고자 하는지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건축은 개인 작업이 아니라 공동으로 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지은 뒤 그냥 두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물은 앞으로 계속 남아 이용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변 자연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건물 자체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장소에 대한 역사성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지역 풍토나 그 지역의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책도 많이 읽으면서 건물을 완성해 나갑니다.〉
 
  앞서 정기용 선생과 점심을 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거의 비슷한 대지관이자 건축관이었다.
 
 
  노무현, 결국 생가 뒤에 사저 지어
 
2006년 무렵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앞에 있는 초가)와 사저(뒤의 양옥 건물).
  정기용 선생과 점심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앞으로 가끔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때 동석했던 청와대 행정관에게도 풍수적 의견을 써 주었다. 행정관은 “앞으로 자문 받을 것이 많겠다”고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필자는 다시 봉하마을로 왔다. 자녀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한 노건평씨와 이재우씨를 만났다. 수년 전(2002년) 월간지 취재 때 만난 인연과 월간지 기사 그리고 그 사이 간간이 통화를 하였던 기억을 되살려 내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생가 뒤 예정지와 마을 입구 쪽 산자락 두 곳을 다시 살폈다. 후자는 지금 단감 밭이 되어 있지만 일제 때 일본인이 살았던 곳이며, 이재우씨가 아는 사람의 소유이기에 구입에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며칠 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통령은 ‘봉하산 바위가 보이는 곳에 거실과 안방이 있는 사저를 짓기를 원한다’ 하니 원안대로 생가 뒤밖에는 대안이 없을 것 같소.”
 
  노 전 대통령에게 생가와 봉하산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인용한 하이데거는 집짓기와 관련하여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Dichterisch wohnet der Mensch)”고 했다. 시적인 태도란 사물들(산·바위·들판·다리 등)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 사물의 성스러운 신비를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집을 짓은 것은 생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건물을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살아가게 될 땅과 바위 그리고 그 존재이유를 환히 드러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고향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여러 용들 가운데 노 전 대통령만이 생가터·봉하산·부엉이바위가 갖는 사물의 존재이유를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분명 풍수설을 믿지 않았다. 속설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철학을 극대화하여 관철하고자 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봉하마을 그 이후
 
  그 후 봉하마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1년 즈음 권양숙 여사가 사저를 떠난다는 짤막한 언론보도가 있었다. ‘권 여사가 무섬증을 타시는구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이후 여사는 이곳을 나와 인근 다른 곳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이 흘러 금년 9월 다시 봉하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은 완전 ‘도깨비시장’이 되어 있었다. 식당·가게·장터 등등이 마을을 덧칠하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 늘어선 각종 음식점과 술집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이것이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었던 농촌 마을 모습이었을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가 여러 용들 가운데 이 땅에 태어나 ‘집을 짓고 거주하고 사유함’을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잠룡·비룡·은룡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나 안도 다다오와 같은 건축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이 되려면 전통 대지관과 건축관에 나름의 확고한 철학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최동범    (2017-11-1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집을 짓는 다 라는 것을 한번도 심도있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비싼 집이 좋은 집이 겠거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내가 살아갈 집에 나만의 철학과 가치관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동안 부동산으로만 보였던 집에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봉화마을의 모습이 변했다고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네요.

2017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