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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성의 미발표 산문 2편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만이 참되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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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정(純情)이 있는 곳에 예술이 있어 왔고 구원에의 인류의 이상이 깃들여 왔다
⊙ 소설가란 이 두 개의 모순된 심정을 지닌 인간 양면수(兩面獸)
김내성의 유작 〈단상/ 순정에 대하여〉
  기자는 추리소설가 고 김내성(金來成)의 아들 김세헌(金世憲) 카이스트 명예교수를 통해 미발표 수필 두 편을 받았다. ‘단상(短想)’이란 어깨 제목이 달린 〈순정에 대하여〉는 이른바 ‘순정 예찬론’이다. 순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자 예술의 산실’이라는 것이다. 김내성이 사망하기 3년 전 마흔 다섯에 쓴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수필은 제목이 없다. 훗날 지상(紙上)에 발표하려 글의 전체적 골격만 간단히 메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친구면 친구냐, 친구야 친구지’에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만이 참되다’로 이어지는 글의 구성과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김내성식(式) 논리적 추론이 느껴진다.
 
  생전 김내성은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순문학만을 고수한 문인들과 달리 그는 추리소설에서 대중소설로 유연하게 나아갔다. 순수냐 이념이냐의 어느 한편에 서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문단의 아웃사이더였으나 그는 대중 속에서 자신만의 문학적 성(城)을 쌓았다.
 
 
  단상(短想)/ 순정(純情)에 대하여
  김내성
 
  순정이라는 것을 나는 여태껏 세상에서 제일 어여쁘고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거닐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구(寶具)로 여겨 왔다. 인간의 순정 앞에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자를 나는 그 누구보다도 증오하여 왔고 속물시하여 왔다. 그런 자와 더불어는 청산백운(靑山白雲)을 말할 수 없고 인간이 지닌 지정(至情)의 의(義)를 가상(嘉賞)할 수 없음을 증오의 염(念)을 가지고 깨달아 왔다. 그들의 대다수는 저열한 속물이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권력자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감히 입을 열어 말하기를 주저하고 사피(思避)하여 왔다.
 
  대자연은 들에서 한떨기 아름다운 야국(野菊)의 꽃을 피우게 하였고 인간에게서 한떨기 어여뿐 순정의 꽃을 피워 주었다. 나는 그러한 신비로운 힘의 창조자인 대자연을 극렬히 고마워했고 숭배해 왔다. 인간이 살아 나가는 보람을 오로지 나는 거기서만 발견해 왔고 또한 발견할 것을 염원해 왔다. 과거 45년의 생애의 역사에 있어서 나에게 한 줄기 눈물을 강요하고 지정(至情)의 몸서림을 치게 한 것은 오직 하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순정의 발로였다. 순정이 있는 곳에 예술이 있어 왔고 구원에의 인류의 이상이 깃들여 왔다.
 

  (※편집자 주-김내성이 남긴 메모형식의 이 글은 제목이 없다.)
 
김내성의 제목이 없는 수필. 글의 뼈대만 메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친구면 친구냐, 친구야 친구지.
 
  (2)
  친구가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좀 더 불행한 일이다.
 
  (3)
  세상에 지기(知己)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4)
  진리를 탐구하고 미를 동경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정열을 가지고 나의 반생(半生)은 한 사람 지기(知己)를 찾아 헤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부질없는 노력을 되풀이하기를 45세에 단념하였다. 불혹의 공자(孔子)보다 나는 5년이 더 미욱했다.
 
  (5)
  자연은 위대한 작가다. 인생에 “주검”이라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참사, 재앙이란 의미-편집자)를 내릴 줄 안 그 판단은 실로 감탄의 극치다.
 
  (6)
  “주검(‘주검’보다 ‘죽음’이 문맥상 자연스럽다.-편집자)”이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주검” 없는 인간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주검”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김내성이 펴낸 소설집. 윗줄 왼쪽부터 소설 《백가면》, 《청춘극장(제5부)》, 《부부일기》, 《심야의 공포》, 《황금굴》.
  (7)
  나는 나의 존재 밖에 믿는 것이 없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믿지 않는다. 이것도 확실하다.
 
  (8)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러나 백견은 불여일문이기도 하다. 전자(前者)는 철학이요, 후자(後者)는 예술이다. 소설가란 이 두 개의 모순된 심정을 지닌 인간 양면수(兩面獸)다.
 
  (9)
  원경(遠景)은 아름다우나 근경은 추잡하다. 한 작가가 원시안(遠視眼)이냐, 근시안이냐는 주의(主義)나 사조(思潮)에서 기인하는 것이냐보다 훨씬 더 생리적(生理的)에서 온다. ‘로맨티시즘’과 ‘레알리즘(리얼리즘-편집자)’의 차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는 후천적인 광정(匡正·잘못을 바로 잡음-편집자)이 전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안경점으로 달려가서 각각 원시경이나 근시경을 주문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본다.
 
  (10)
  사람은 두 개의 무기(武器)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형식론이요 하나는 본질론이다. 이 두 개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인간처럼 비루한 무뢰한은 없다. 양심의 피안의 존재일 뿐이다.
 
  (11)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만이 참되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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