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제9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 국가주도인가, 시장주도인가

“‘박정희가 아니라도 경제발전 했으리라’는 주장, 아무 근거 없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박정희식 수출 지향 공업화 전략, 후진국 경제개발의 새 길”
⊙ “한국의 근대화 혁명의 성공은 박정희의 과학·실용·합리 정신으로 가능했다”
⊙ “박정희식 경제발전 폄훼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만’”
  박정희(朴正熙) 정부 18년 동안 한국경제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에 이견은 없다. 성장률, 수출증가율, 산업구조의 고도화,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등에서 발군의 성적을 기록했고 수출 제조업은 급성장했다. ‘제조업 강국’ 한국은 박정희 시대에 주조(鑄造)됐다.
 
  그러나 좌파인사들은 이런 논리로 박정희를 공격한다. ▲“조립 가공업이라서 별것 아니다”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민주당이 집권해도 할 수 있었다” ▲“양극화, 정경유착, 권위주의 등 나쁜 유산을 남겼다”는 주장이다.
 
  박정희에 대한 이 같은 저평가는 불가피하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악의적 중상(中傷)이자 오독(誤讀)일까.
 
  지난 7월 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9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공과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주제발표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와 청년박정희연구회 이승수 회장이 토론에 참여했다.
 
  주익종 실장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965년경”이라고 밝혔다. 그해에 박정희는 증산(增産), 수출, 건설을 3대 국정 목표로 제시하여 수출 제일주의를 분명히 했고, 제조업은 20% 전후의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62년 투자 확대를 시도했다가 인플레 심화, 외환 고갈을 겪어야 했다. 투자를 위해 막대한 외화가 필요했으나 외화 수입원조차 없었다. 재정안정 계획(예산 적자 감축 및 통화 증가 억제)을 시행하면서 각종 투자 프로젝트를 취소(1964년)하고 목표 성장률을 5%로 낮춘 5개년계획의 보완계획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은 당시의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없어”
 

  박정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내디뎠다. 그간의 공산품 수출증가에 주목해 1964년 하반기부터 수출 제일주의와 수출 입국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해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한 기념으로 ‘수출의날’을 제정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65년 1월 16일 새해 연두교서에서 “나는 이해에 있어서의 3대 목표를 증산, 수출, 건설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수출 증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관련 산업을 건설했으며 수출산업을 확대했다. 수출지향 공업화가 개시된 셈이다. 주익종 실장의 말이다.
 
  “이 개발전략은 한국경제의 낡은 패러다임과의 완전한 결별을 뜻했습니다. 과거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미국이 지원원조(SA)로 한국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했고, 따라서 우리나라는 필수적 수입품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수출을 통해 외화를 획득할 유인이 없었어요. 그때 한국 경제는 ‘희망 없는 무능력자’(a basket case without hope)였지요. 미국이 1950년대에 넉넉한 원조를 제공한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크나큰 잠재력, 인력자원의 잠재력을 억누른 셈이었습니다.”
 
  1960년대 전반에 미국이 원조를 줄인 것이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자립적인 새 외화 수입원을 절박하게 찾도록 내몰았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이 ‘수출’이었다. 주 실장의 주장이다.
 
  “이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은 당시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없었습니다. 1차 5개년계획 원안에도, 보완계획에도 없었어요. 또 미국이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죠. 미국은 투자능력도 없는 한국의 무모한 투자계획을 비판했지만, 공산품의 수출에 주력하라고 권고한 바는 없었어요. 필사적으로 경제개발 돌파구를 찾으려는 박정희 정부가 발견한 후진국 경제개발의 새 길이었습니다.”
 
  훗날 한국과 타이완 등이 성공하자 개발경제학자들이 그를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이라 이름 붙였다. 이것은 당시의 세계경제의 추이와 한국경제의 위치에 비추어 딱 들어맞는 개발전략이었다.
 
 
  한국 현실에 맞는 개발체제의 확립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박정희식 수출 지향 공업화 전략은 필사적으로 경제개발 돌파구를 찾으려는 박정희 정부가 발견한 후진국 경제개발의 새 길”이었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초등교육 이상을 마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로 넘쳤다. 10대 후반의 나이 어린 여성들이 가장 먼저 섬유, 의류, 가발 등의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가 경공업품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개발 전략을 짠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새 개발전략을 밀고 나간 것은 1964년 5월 성립한 장기영 부총리 휘하의 경제팀이었다. 당시 경제개발계획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1961년 7월 경제기획원 발족 이래 불과 2년 10개월 동안 7명의 장관이 바뀌었다. 평균 재임기간은 5개월도 안 된 셈이었다. 주익종 실장은 “장기영은 ‘왕초’와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강한 보스 기질과 탁월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그에게 여타 경제장관에 대한 비토(veto)권을 줄 정도로 신임했고, 장기영은 그를 바탕으로 3년 5개월간 재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박정희는 미국,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일환으로 1964년 초 한일 국교정상화의 조기 타결을 추진했다. 긴축 정책 및 외환 부족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미국도 강력히 한일 수교를 권했다. 하지만 야당과 대학생 발(發)의 강력한 역풍(3·24데모, 6·3사태) 때문에 국교 정상화는 1년 넘게 지연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8월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안이 통과됐다. 그 사이 박정희는 비상계엄(1964년 6월)과 위수령(1965년 8월)을 발동하면서 반대를 억눌러야 했다. 주 실장의 말이다.
 
  “야당의 논리는 ‘일본이 무서워서 교류할 수 없다’, ‘일본과 교류하면 잡아먹힌다’는 것인데 이런 인식을 갖고서는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비굴한 생각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반대자들을 논박했어요. 따라서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도 경제개발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려워요. ‘한일 국교정상화의 결과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는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그 후 역사가 웅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10년간 무상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를 제공받게 됐다. 금액보다도 물자와 인력의 교류 통로가 열렸다는 게 중요했다. 단기적으로는 일본산 자본재와 부품을 들여와 한국에서 조립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3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 ‘조립 가공형’ 무역과 산업의 탄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한미 관계는 매우 좋아졌다. 1965년 5월 박정희는 미국을 국빈방문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은 1억5000만 달러의 공공차관(AID차관)을 제공키로 결정했고, 가외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건립도 지원했다. 1966년 10월 말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다. 주 실장은 “당시 한미 우호는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은 이듬해(1967년)부터 시작하는 한국의 2차 5개년계획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화
 
  1950년대의 이승만 정부도 제철, 비료, 시멘트, 기계 등 중화학공업화를 지향했다. 주한 미 외교관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 경험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본이 생산하는 것과 같은 제품을 국내 생산하려고 시도한다”고 논평한 바 있었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추겠다는 열망은 제1차 5개년계획에도 표현됐다.
 
  하지만 외환부족 탓에 실제 성사된 것은 정유(대한석유공사의 울산정유공장)와 비료(제3비와 제4비)에 불과했다. 그 후 1966년 제2차 5개년계획이 수립될 당시 종합제철소와 석유화학이 포함됐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불안한 상태였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이 갈수록 격해졌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동해안의 경북 울진, 강원도 삼척 지구에 북한 무장공비 120여 명이 침투했다. 1969년과 1970년에도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었다. 주익종 실장의 말이다.
 
  “이제 한국은 새 전략, 우방인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전략을 짜야 했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바로 자립(自立), 자위(自衛), 자조(自助)의 기치 아래서 자주국방을 제창했고, 1970년 ‘4대 핵(심) 공장 사업’과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등 방위산업 육성 계획을 세웠어요.”
 
  1970년대 초 박정희의 머릿속은 국가안보와 그를 위한 방위산업, 중화학공업의 육성 계획으로 꽉 차 있었다. 자신의 구상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10년이 걸린다. 하지만 3선 임기가 1975년 7월로 끝이 난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로 국력을 키워 안보 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집권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새 헌법을 11월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바로 유신(維新)체제의 출발이었다. 주익종 실장의 주장이다.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이듬해(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그해 6월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했죠.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공업이 6대 전략 업종이었어요. 차후 8년간 총 88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해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을 51%로 늘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이 계획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물론 박정희 정부의 경제기획원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과 경제제2수석 오원철 등으로 중화학공업화팀을 구성하여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주 실장은 “중화학 투자가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비록 1974년 오일쇼크로 인해 일시 타격을 받기도 했으나 ‘중동 건설 특수’ 등으로 한국경제는 1970년대 후반에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고 말했다. 그 기간 제조업은 연평균 16.6%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1980년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54%가 되었으며, 그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88%에 달했다. 주 실장은 “공업구조의 이 같은 변화는 선진국에서는 100년 이상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달성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채 10년도 안 되어 성취했다”고 했다. 수출 100억 달러도 애초 목표보다 4년을 앞당겨 1977년 말에 달성했다.
 
 
  산업의 고도화와 성장과실의 분배
 

  박정희 경제개발기에 대중의 일자리 확대와 소득 향상은 소득분배로 이어졌다. 이는 ‘낙숫물이 계속 흘러내려’(trickle down) 어느덧 몸이 흠뻑 젖는 것과 같았다.
 
  우선, 1963~1979년에 비농업 부문 취업이 연평균 7.5%씩 증가했다. 16년 사이에 3.1배가 되었다. 섬유봉제공장, 전자부품공장, 염색공장, 조선소, 베트남의 밀림과 중동 사막에 많은 일자리가 계속 생겼다. 그중 15~19세의 ‘연소 노동자’가 한동안 상당한 비중과 역할을 했다. 연소 노동자 수는 1963년 92만명에서 1973년 148만명으로 피크에 달했다가 1994년 43만명으로 감소했다. 취업자 중 연소 노동자 비중은 1963~1970년대 후반까지 10~13%였으나 1990년대 초에는 2%대로 낮아졌다. 1970년대 초까지 초기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 단계에서 연소 노동자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주익종 실장의 말이다.
 
  “흔히 박정희 경제개발기의 근로자라 하면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자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이었어요. 선진국은 물론 동남아 국가까지도 노동시간이 주당 45시간 정도였던 반면, 한국은 그보다 10시간 많은 55시간을 넘나들었어요.”
 
  당시 열악했던 근로조건을 보여준 곳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공장이었다. 영세 봉제업자에 고용된 재단사와 여공 재봉사들은 닭장처럼 좁고 더러운 작업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고된 노동에 종사하였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봉제업체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2세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겪는 과도적 현상이다. 근로자의 저임은 경제개발과 더불어 시장의 힘에 의해 해소되기 마련이다. 제조업 실질임금은 1961~1979년에 3.86배로 상승했는데, 초기인 1966년까지는 노동생산성 상승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이 정체되었다가 그 후부터 개선됐다. 공업화 초기에 실질임금이 정체된 것은 아직 농촌 잉여인구가 많아서 도시 공업부문이 임금상승을 유발하지 않고도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7년부터 실질임금이 빠르게 상승했는데, 1967~1970년의 4년간에는 연평균 13%나 되었다. 주 실장은 “1970년의 실질임금은 1961년에 비해 60% 상승했다. 1970년의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실상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이미 빠른 상승의 궤도를 타고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실질임금은 1970년대에 연평균 10%로 상승했고, 특히 1976~1978년의 3년간에는 연간 상승률이 22%에 달했다. 또 이 시기 엄청난 고임금의 일자리도 있었다. 바로 파월 근로자였다. 파월 기술자는 1965년 105명이었으나 이듬해 ‘월남 붐’이 일어 1만명이 넘었고, 1968년에는 1만 5000여 명으로 최고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크레인 하역기사, 트럭 운전사, 건설 근로자였다. 군인과 기술자의 송금은 위험하지만 고소득의 일자리가 하층민에게 생긴 것을 뜻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저임금 단계를 빠르게 통과했다. 주 실장의 말이다.
 
  “박정희 정부는 원조를 제외하곤 외화 수입원이 없는 한국의 특수사정에 맞는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을 고안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원조를 줄이면서 재정안정화와 자유시장화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찾아낸 돌파구였죠.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없던 아이디어로서 민주당 정부의 계획안에도 없었고, 미국이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일본, 타이완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고도성장을 했으니, 한국에서 누가 지도자가 됐더라도 같은 성적을 냈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어요. 이 전략을 실행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견고한 한·미·일 국제협력 관계를 구축했고, 그에 힘입어 제2차 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말 전쟁 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와 다른 국제 냉전의 해빙은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동맹 관계 속의 홀로서기를 하게 만들었다. 이는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의 개시로써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고, 이후 그 내실을 갖추어 제조업 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후대의 몫이었다. 주 실장의 말이다.
 
  “박정희 시대의 근로자는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했지만, 이는 고작 의류·합판·가발을 만들다가 좀 나아져서 전자부품을 조립하고 신발을 만드는 경제발전의 첫 사다리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어요. 한국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됐던 거죠. 하지만 한국은 그 단계를 빠르게 통과했어요. 박정희는 조립가공형 산업을 일으키고 중화학공업화를 시작,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을 다했습니다.”
 
 
  박정희, 경제발전 계획 수립 집행 당시 놀라운 ‘과학정신’ 발휘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경제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혁명의 성공은 박정희의 과학정신, 실용정신, 합리정신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조갑제 대표는 “경제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혁명의 성공은 박정희의 과학정신, 실용정신, 합리정신으로 가능했다”는 주장을 폈다.
 
  조 대표는 1970년대에 과학기술처 기획실장으로서 국가 과학기술 정책 수립과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전상근(全相根) 회장(LC종합건설)이 1982년에 쓴 《한국의 과학기술정책-한 정책입안자의 증언》(正宇社)을 예로 들었다.
 
  이 책은 경제개발 계획과 과학기술진흥 계획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박 대통령의 관심과 격려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애국적인 관료들이 어떤 고심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 군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감수성이 좋아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진흥 정책을 뒷받침하였다는 증언을 담았다. 일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 1962년 5월 21일, 봄은 어느새 가 버리고 산뜻한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세종로 관청 거리는 푸른 가로수로 뒤덮여 싱싱한 생기가 온누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날 오랜 산고 끝에 낳은 ‘산물’을 소중하게 들고 중앙청 건너 자리한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뒤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된 이 건물 8층 회의실에서는 그날 제39차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최고회의는 국가의 입법권은 물론 정부의 모든 예산과 계획에 대한 심의권을 갖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그동안 경제기획원이 입안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다루게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각수반 겸 기획원 장관이던 송요찬(宋堯讚) 장관 대리로 참석한 송정범 차관을 수행하여 기술진흥 계획의 입안자로서 이 회의에서 브리핑을 하게 된 것이다.
 
  회의실에 들어선 나는 기라성 같은 장성들의 엄숙한 표정과 무거운 분위기에 금방 압도되어 버렸다. 두 어깨에 번쩍이는 별들을 단 최고위원(最高委員)들의 위엄당당한 모습에 비하면 민간인 옷차림의 한 서기관(書記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대조적이었다.
 
  마침내 별 셋을 단 육중한 체구의 이주일(李周一) 부의장은 사회봉을 들고 개회를 선언했다. 나는 새삼 마음을 가다듬고 회의장 앞으로 나가 이들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나는 현대국가에 있어서의 과학기술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로 말문을 열고 인력개발, 산업기술 개발전략, 연구개발 등으로 이어지는 계획의 주요한 내용을 차분하고 요령 있게 설명해 나간 다음, 결론적으로 기술진흥 5개년계획은 국가의 장기 사업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같은 격으로 투자와 정부지원 등 모든 면에서 우대해 줄 것을 힘주어 요청했다.
 
  브리핑 도중에 나는 여러 번 실수를 했다. 더듬거리거나 뛰어넘은 것이다. 그때마다 옆에서 송 차관이 보충 설명을 해 주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회의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도 많은 예행연습을 했으나 막상 현장에 나오니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굳어 버렸던 것이다.
 
  브리핑은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이 브리핑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반응은 뜻밖에도 너무나 좋았다. 위원들은 차례로 의견을 말하고 질문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계획’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위원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
 
  “… 5·16혁명의 목적은 바로 지금 소개된 기술개발 계획과 같은 국가계획을 만들어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 계획을 혁명정부의 최우선 사업으로 설정하고 추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
 
  사회자인 이주일 부의장은 토의가 끝난 뒤 가부를 묻기 바쁘게 방망이를 내려쳤다. 만장일치로 이 계획은 통과된 것이다.
 
  나는 이 순간 온몸이 저리듯한 커다란 감격의 물결 속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4개월 반 전 기획원 연두순시 때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고 집권자의 뜻밖의 질문과 관심은 과학기술의 진흥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터전을 마침내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은 국가의 장기 개발계획 사업의 하나로 역사적인 출범을 하게 되었다.
 
  누를 길 없는 감격에 휩싸인 채 브리핑 차트를 접어 들고 최고회의 문을 나선 나는 싱싱하고 푸른 가로수 위로 한없이 뻗은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
 
  조 대표는 “경제 전문가도, 정치 전문가도 아닌 박 대통령은 일단 정권을 잡은 다음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놀라운 과학정신과 합리성을 발휘했다”며 “남북통일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전략과 생각을 유지해 갔다”고 말했다. 조 대표의 이어진 말이다.
 
  “1966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은 감정 아닌 이성의 판단과, 단순한 기원이 아닌 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돼야 한다. 통일을 성취하는 데는 방안의 범람보다도 조건의 성숙이 앞서야 한다’고 말했어요. 또 그 조건의 성숙을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북한을 압도할 절대 우위의 주체적 역량을 갖추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청년이 바라보는 박정희
 
이승수 청년박정희연구회장은 “젊은 세대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만’과 ‘일국적(一國的) 세계관’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수 청년박정희연구회장은 ‘젊은 세대가 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업적’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극좌 노선이나 종북에 서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박정희 시대에 경제발전이 이뤄졌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발전 결과를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생각하느냐, 한국사회의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을 만들어 낸 근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는 의견이 엇갈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20대에서는 후자의 생각,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이 공(功)보다는 과(過)가 크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큰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이승수 회장은 박정희식(式) 경제발전을 폄훼하거나 비난하는 이유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첫째, 경제 제일주의로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 대가로 민주주의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소수 재벌과 대기업을 성장시키려 서민과 근로자를 착취했고, 셋째 경제성장의 결과가 소수의 부자에게만 돌아가 불평등을 구조화시켰다는 시각이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이 3가지 논리(?)는 초·중·고교의 좌경화한 수업에서부터 대학 강단에서 이뤄지는 좌익 교수의 강의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가르쳐지는 내용”이라며 “그 결과 젊은 세대는 ‘실로 박정희의 경제발전이란 얼마나 기만적이고,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 하며 분노와 적개심을 키우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냐는 조금만 공부를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박정희 경제발전을 본질적으로 폄훼하는 주장이 ‘경제는 잘했지만, 정치는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정치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영역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어요.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국가가 존재했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한 몸’이며, 고약한 진실이기는 하나 ‘경제성장이 정치발전에 선행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중산층의 성장, 적정한 생활수준의 성취가 이뤄질 때 비로소 제도로서의 민주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좌익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가 공통적으로 겪은 이 사실을 감춘 채, 전교조와 좌익들은 대한민국만 비난하고 있어요.”
 
  그는 “젊은 세대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만’과 ‘일국적(一國的) 세계관’에 갇혀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 민주제도의 정착을 이룬 지금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계 최빈국의 대한민국을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불공정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