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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우리 풍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대통령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이자 마지막으로 가는 곳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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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제1묘역) →
    혈(창빈 안씨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
⊙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혈(穴)은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의 묘
⊙ 이승만 묘는 약하지만 내룡 있어… 자식의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
⊙ 박정희 묘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冷穴)…, 자손들에게 안 좋아
⊙ 김대중 묘는 창빈 안씨 묘 범장(犯葬)한 것
⊙ 김영삼 묘에서 돌 나온 것은 ‘봉황 알’이 아니라 돌산에 장사 지냈기 때문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1959년 현충일에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를 참배하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
이곳에 국군묘지를 잡은 그는 6년 후 이곳에 묻혔다.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음날인 5월 10일 오전 10시 문 대통령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뒤 국회로 가서 취임식을 하였다. 이렇듯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1956년 문을 연 이후 순국선열들의 영면처였다.
 
  그런데 최근 국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반면, 전직 대통령이나 정부 요인들이 간간이 이곳에 묻히면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들의 무덤이 풍수상 명당이라는 식의 비본질적인 것이 뉴스가 되고 있다. 앞으로 퇴임할 대통령들도 대전현충원이 아닌 이곳에 안장될 것인가? 그것도 풍수적인 이유에서? 그렇다면 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는가?
 
  또 하나,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이곳을 참배할 정도로 이곳은 국가의 상징이다. 그런데 ‘국립현충원’이 공식 명칭이다. 전통적으로 임금과 그 부인 무덤을 능(陵), 태자(세자)와 태자빈(세자빈) 무덤을 원(園), 그리고 일반인 무덤을 묘(墓)라 부른다. 따라서 순국선열의 무덤을 중국과 북한은 ‘혁명열사릉’이라 부르고, 일본도 임금 무덤을 ‘능’이라 표기한다. 우리도 마땅히 ‘능’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창빈 안씨의 묘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창빈 안씨의 묘.
이곳의 원주인인 창빈 안씨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의 혈(穴)에 해당된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원래 주인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安氏)다. 창빈 안씨는 연산군 5년(1499년)에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덕흥군·정신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는 창빈과 자녀들을 가까이 챙겼다. 그 후광으로 명종이 죽고 자식이 없자 창빈의 손자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선조다. 선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로서 임금이 된 경우이다. 안씨가 창빈으로 추존(追尊)된 것도 선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였다. 이후 조선의 왕족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었다.
 
  원래 이곳은 ‘동작릉’이라 불릴 수 없다. 왕과 왕비의 무덤만이 능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능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선조의 할머니 무덤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칭하여 후세인들이 ‘동작릉’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창빈 안씨와 이곳 국립현충원은 풍수상 무슨 관련이 있는가?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선조의 아버지)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한다. 당시 이곳은 과천의 작은 마을이었다. 안장된 지 1년이면 육탈(肉脫)이 거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길지(吉地)를 찾아 과감하게 이장을 한 것이다. 지금은 이장하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그 당시에 이장을 한다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재물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기에 웬만한 가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상주(喪主) 입장에서 새로 옮기게 될 터가 분명 명당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명당발복(明堂發福)을 이루고자 한다면 풍수행위와 풍수신앙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풍수상 길지를 찾아 그곳에 터를 잡는 것이 풍수행위이며, 그렇게 했을 때 집안과 후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풍수신앙이다. 창빈 무덤 이장 사유가 풍수라는 것은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난다.
 
  〈양주 서쪽 장흥리에 예장하였으나 후에 택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 동작리 곤좌원(북동향)으로 이장하였다(禮葬于楊州治西長興里. 後以宅兆不利. 移葬于果川銅雀里坐坤之原).〉
 
 
  중국 풍수사들에게 매달렸던 선조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선조가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임금이 되었다. 길지를 찾아 이장한 지 20년이 채 안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할머니묘 명당발복 덕분에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조선의 호사가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 ‘풍수붐’이 불었다. 겸재 정선의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이곳을 그린 것이다.
 
  훗날 선조와 그 아들 광해군이 풍수를 맹신하였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특히 선조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와중에서도 풍수에 집착하여 당시 명나라 군대를 동행한 중국 풍수사들을 우대하였다. 선조는 풍수사 섭정국(葉靖國)을 지나치게 우대해 많은 폐해를 낳기도 했다. 명나라조차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 섭정국을 강제 소환시킬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선조가 중국인 풍수들에게 쩔쩔매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위(선조임금)에서도 또한 이치로 결단하지 못하고 섭정국과 이문통 등에게 와서 살펴주시기를 간청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上亦不能以理決斷, 懇請葉靖國·李文通等, 往來看審而莫適所從).〉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무덤 자리를 찾는 데 중국인 풍수 섭정국과 이문통이 협조를 하지 않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당황했다는 말이다.
 
  창빈묘(세칭 ‘동작릉’)를 찾아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립현충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좌측에 있는 주차장에 ‘창빈 안씨 묘역’이란 안내표지가 보인다. 조금 올라가면 창빈의 신도비가 나온다. 20m쯤 더 올라가면 창빈 무덤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창빈 안씨 묘가 혈(穴)에 해당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풍수상 어떤 곳일까? ‘동작릉’ 주산(主山)은 서달산이다. 서달산이 좌우로 두 팔을 벌려 현충원을 감싸면서 흑석동 쪽의 산이 좌청룡(左靑龍)이 되며, 사당동 쪽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서달산은 이곳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달산 능선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역을 살짝 비켜 내려오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장군봉이다. 현재 장군들의 묘(장군1묘역)가 조성된 장군봉은 풍수상 현무정이라 부른다. 주산의 강한 기운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조금씩 흘려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장군봉에서 다시 중심 산줄기[來龍]가 내려와 창빈이 안장된 곳에서 멈춘다. 땅기운이 오롯이 뭉친 곳인데 이를 혈(穴)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곳의 전체적인 산세 흐름은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제1묘역) → 혈(창빈 안씨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루어진다.
 
  창빈 묘역 우측(정면에서 볼 때) 가까운 곳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이 있다. 이곳은 장군봉에서 하나의 작은 곁가지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창빈 묘역을 보호해 주는 내청룡(內靑龍)에 해당된다. 창빈 안씨 묘역은 안온하면서도 조용하다. 창빈 묘역 좌측으로(정면에서 볼 때) 불과 10여 미터 지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장되어 있다. 즉 이승만・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은 창빈 묘역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중심지는 창빈 묘역이다. 이곳이 길지였음은 그 손자가 임금이 되었다는 것 말고도 후손의 번창이 말해준다. 창빈 사후 130년 만에 그녀의 후손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역대 임금들은 모두 창빈의 후손들이었다. ‘창빈의 조선’이었다.
 
 
  이승만 묘소에는 약하지만 내룡(來龍) 있어
 
  창빈 무덤 우측(정면에서 보아)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가 있다. 장군봉(장군묘역)에서 희미하게 능선(내룡)이 내려와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에서 작은 흙덩어리[토괴·土塊]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희미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약룡(弱龍)이라 부른다. 내룡은 자손의 번창을 주관한다.
 
  서달산에서 장군봉(장군묘역)을 거쳐 창빈 묘역에 이르는 산줄기가 중심이 된 중심룡(정룡)이라면, 이승만 대통령 묘역으로 이르는 산줄기는 곁가지인 방룡(傍龍)에 해당된다. 다른 전직 대통령인 박정희·김대중 묘역은 내룡 자체가 없음에 반해 이곳은 약하기는 하지만 내룡이 있다. 자식의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아들이 없는데 무슨 자식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이라고 하는가?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은 박씨 부인과 사이에 아들 태산이 있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버리자 훗날 부인 박씨가 인편을 통해 미국으로 보냈다. 태산이 일곱 살 때였다. 그때 이승만은 아들을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동보육시설에 맡겨진 태산은 이듬해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4・19 때 독재자라고 쫓겨났으나 최근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은 이 터 덕분이라고 술사들은 풀이한다.
 
  과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소는 풍수에 입각해서 잡힌 자리일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승만 장례식 때 읽은 ‘조사(弔辭)’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또 박사(이승만)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幽宅)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잡았을까? 술사 지창룡(1922~ 1999)씨였다. 지씨는 또 다른 풍수사 손석우씨와 풍수계의 쌍벽이었다. 1965년 이 전 대통령이 위독해지자, 정부는 그의 장지(葬地)를 동작동 국군묘지로 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곳이 국군묘지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군인이 아닌 이상 묻힐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군묘지를 국립묘지로 바꾸는 법안을 올려 국회 승인을 얻어낸다. 대통령과 국가유공자들도 여기에 안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해 7월 이 전 대통령은 이곳에 안장된다.
 
편집자 주
 
  1)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1965년 3월 30일이고, 이승만 박사가 서거한 것은 그해 7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7월 26일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죽기 전 이승만 박사가 입국하는 것을 막을 정도로 이승만 박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승만 박사가 위독해지자 그를 국립묘지에 모시기 위해 미리 관련 법령을 개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2) 국군묘지는 군묘지령(대통령령 1144호)에 의해 설치되었고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국립묘지령(대통령령 2092호)에 의한 것으로 국회 승인이 필요 없다. 2016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자리를 잡은 지씨의 생전 평이다.
 
  “한강물을 눈앞에 굽어보는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았다. 국립묘지의 많은 묘역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랄 수 있는 자리이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으로 목마른 거북이 한강물을 바라보고 내려가는 길지였다.”
 
  지씨의 평가와 현장은 대체로 부합한다. ‘양지바른 언덕’은 혈이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전직 대통령 묘역도 모두 길지인가? 모두들 풍수설을 근거로 하여 잡았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풍수에서 말하는 혈이 동작동 현충원 곳곳에 많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 혹은 두 개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능선이 천 리를 뻗어가도 혈이 맺히는 곳은 겨우 하나 있다(千里來龍僅有一席之地)”라는 풍수 격언이 말해주듯, 한 곳에 여러 혈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박정희·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는 풍수와 무관한 것인가? 아니다. 모두 풍수설을 믿어 정해진 자리이다.
 
 
  ‘범장(犯葬)’한 김대중 묘역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억지로 조성하다 보니 자리가 매우 옹색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많은 역경과 거듭된 대선(大選) 실패의 원인을 주변에서는 풍수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전남 하의도에 있는 선영(先塋)을 경기도 용인 이동면 묘봉리로 옮겼다. 김 전 대통령이 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거주지를 동교동에서 일산 정발산 아래 단독주택으로 옮긴 것도 동교동에 거주하면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측근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생전에 그는 용인 선영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만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사후(死後) 선영으로 가지 않고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왜 그랬을까? 유가족들은 참배의 편의성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풍수술사 황모씨가 소점한 자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심지어 수년 전 영남대에서 ‘이 자리가 왜 명당인가?’에 대한 학술대회까지 개최되었다. 그만큼 풍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문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가 창빈 묘역을 침탈한다는 점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품계(品階)에 따라 묘역 간의 거리를 정하고 있다. 왕실 종친의 경우 100보, 6품 이하의 경우 50보 안을 침탈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이 조선왕조가 아니기에 창빈 묘역으로부터 100보를 떨어져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창빈 무덤에서 불과 10여 보 떨어진 곳에 무덤을 쓴 것은 명백한 ‘범장(犯葬)’이다. 남의 묘역을 침탈하다 보니 자리가 매우 옹색하다. 입구도 정면으로 낼 수 없어 묘역 좌측 위를 한참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묘 앞이 협소하다 보니 큰 암석들로 석축을 쌓아 억지로 묘역을 만들어 놓았다. 옹색하고 불편한 터가 되어 버렸다.
 
  대안(代案)은 무엇일까? 용인 선영 아래 신후지지 혹은 대전현충원 대통령 묘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용인 선영의 산세는 웅장하며 전망 또한 아름답다. 대전현충원도 국세(局勢)나 땅의 아름다움이 이곳보다 훨씬 좋다.
 
 
  장군봉에 안장된 장군들
 
채병덕 전 육군참모총장 등의 묘가 있는 제1장군묘역은 원래 장군봉으로 불렸다.
  김대중 묘역을 나와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샛길이 있다. 그 길을 조금 걸으면 국가유공자 제1묘역이 나온다. 정일형·이태영 부부, 역사학자 이선근, 시인 이은상, 백두진·장택상 전 국무총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장군봉 꼭대기에 이른다.
 
  우뚝 솟은 봉우리인 장군봉은 전망이 좋다. 장군들과 그 배우자들이 매장되어 있다. 일반 사병들 묘역보다 훨씬 넓다. 살아서 계급이 죽어서도 그대로 반영된 불평등이다. 대통령 → 장군 → 사병묘역 순으로 위치와 규모가 달라진다.
 
  장군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채병덕 장군 묘’이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6·25 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북한의 남침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남침 다음날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했다. 또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러다가 서울을 빼앗겼다. 거듭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7월 하동전투에서 전사(戰死)했다. 일설에 의하면 적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아군에 의해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적탄을 맞으면 가슴에서 등으로 탄환이 통과하면서 등 쪽이 더 크게 뚫리는데, 가슴 쪽에 더 큰 구멍이 났다는 것이다. 전사할 때 그는 35세였다.
 
 
  박정희 묘역은 냉혈(冷穴)인가?
 
삼우제 당시에 본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 오른쪽에 제1장군묘역이 보인다.
  장군봉에서 주산 서달산을 바라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가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에 대해서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冷穴)의 땅”이란 소문이 오래전부터 전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 소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냉혈 소문의 근원지는 어디였을까? 한때 ‘육관도사’로 유명했던 손석우(작고)씨였다. 이 땅에 대한 그의 평이다.
 
  “여기 이 자리는 음양의 교구(交媾)가 안 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 되니 자손이 끊어집니다. 딸이라도 시집을 가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터》)
 
  왜 이런 냉혈 논쟁이 나왔을까? 사건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격되었을 때의 일이다. 청와대는 지창룡씨와 손석우 두 사람에게 장지 자문을 구했다. 이 둘은 라이벌이었다. 다음은 손씨의 증언이다.
 
  “청와대의 부탁으로 현장에 도착해 보니, 지창룡씨가 먼저 와서 육 여사(그리고 훗날 박정희) 자리를 현재의 이곳으로 정해놓았다. 동행한 청와대 관계자가 나(손석우)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이라고 답변했다. 반면에 지창룡씨는 ‘이곳에 영부인(육 여사)을 묻으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남북통일을 이루고, 그 아드님은 만주까지 지배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터》)
 
  물론 손씨의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지씨의 주장은 다르다.
 
  “내가 묘역 조성에 관여를 하긴 하였으나 직접 잡은 자리는 아니다. 육 여사가 저격을 당했을 때 고향집에 있었다. 한밤중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 육 여사 유택을 봐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현장을 갔더니 묘지 관리소장 이주호씨가 안내를 하였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최 풍수와 남 풍수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광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청와대 관계자는 내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현장 작업을 내가 지휘하고 육 여사를 안장했다. 그리고 나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을 때는 무덤 뒤 약한 용세가 마음에 걸려 수백 트럭의 흙을 날라서 비보(裨補)를 했다.”(《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결국은 당대 최고의 술사로 알려진 손씨와 지씨 모두 이곳이 길지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 이곳은 누가 잡았을까? 손씨는 지씨가 잡았다 하고, 지씨는 최 풍수와 남 풍수가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런데 최 풍수와 남 풍수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원한 미스터리가 될 듯하다.
 
 
  김영삼 묏자리에서 나온 바위는 ‘봉황 알’?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조성 중에는 7개의 ‘봉황 알’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201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한 뒤 큰 뉴스가 되었던 것은 그의 무덤 풍수였다. 묘지 조성 과정에 광중에서 7개의 바위가 나왔는데 그것이 봉황의 알이라는 것이었다. 봉황이 알을 품는 길지, 즉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결정적 증거로 내세우면서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를 소개했다. 이에 대해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는 “봉황이 알을 낳다가 항문 파열이 될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고, 안영배 《동아일보》 기자는 “전형적인 뻥풍수”라고 비난하였다.
 
  동작동 현충원을 봉황에 비유한 것은 술사들이 이곳 지명 동작(銅雀)을 오해한 데서 비롯한다. 본디 동작의 어원은 조조(曹操)가 업(鄴)의 북서쪽에 누각을 짓고 그 위를 ‘구리로 만든 봉황[銅雀]’으로 장식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곳 현충원의 본래 지명은 ‘동재기’이다. 주변에 검붉은 구릿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은 데서 유래한다. 봉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 훗날 문자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작(銅雀)’이란 한자로 바꾸었다. 토질이 ‘구릿빛 색깔을 띤 돌’이 많았음은 동작동 옆의 지역 흑석동에서도 알 수 있다. 흑석동의 옛 땅이름은 ‘검은돌 마을’이었다. 구릿빛 돌(동작)이나 검은 돌(흑석)이란 지명은 이곳에 돌이 많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곳에서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봉황’ 운운은 술사들의 말장난이다.
 
  그런데 광중을 파는 과정에서 큰 돌이 7개가 나왔다. 조선조 지관선발 필수서인 《금낭경(장서)》은 “기는 흙을 의지하여 다니므로, 돌산에 장사 지내서는 안 된다(石山不可葬也)”고 하였다. 이곳을 소점한 술사는 당황하였으리라. 변명을 해야 한다. ‘봉황포란형’으로 풀이하면 그럴듯하다. 봉황이 알을 낳았으니 이 후손 가운데 또 대통령이 된다고 풀이하면 얼마나 좋은가? 마치 1970년대 지창룡씨가 육 여사 묘를 두고 “그 아드님(지만)이 만주까지 지배할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혹자는 말할 것이다.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풍수설을 믿지 않았고, 자택이 근처 상도동에 살고 있기 때문에 후손들의 참배 편의를 생각해서 그곳에 무덤을 쓴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풍수사에게 길지를 찾아줄 것을 직접 부탁을 했다.
 
 
  국립현충원의 ‘리모델링’이 필요한 때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풍수설에 따라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국립현충원의 공간 배치가 어그러졌다. 또한 그들의 소원대로 길지에 안장된 것도 아니었다. 창빈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술사들의 말장난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안이 무엇일까?
 
  첫째, 대전현충원에 국가 원수 묘역이 마련되어 있다. 최규하 대통령만이 현재 이곳에 안장되었다. 아름답고 편안한 땅이다.
 
  둘째, 풍수상 길지를 원한다면 그들의 고향과 선영만큼 좋은 땅이 없다.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풍수상 길지로 알려진 선영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에 안장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향과 선영에 안장한다면 그곳은 새로운 명소가 된다. 대통령을 위한 묘지 풍수 대안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사후 자기 고향이나 생전에 인연이 깊은 곳에 안장된다. 그러면 그곳은 관광명소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범사례이다. 봉하마을은 이제 관광명소가 되었다. 지역분권화가 절로 된다.
 
  셋째, 현재 현충원의 묘역 공간 배치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애국열사·장군·일반사병 등 생전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묘역의 넓이와 위치, 그리고 화장과 매장 등 장법이 다르다. 일원화해야 한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사병 곁에 안장된 것이 모범이 될 수 있다. 봉분의 양식도 대통령과 장군 그리고 사병의 것이 각각 다르다. 이 또한 좀 더 깔끔하게 일원화해서 디자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충원’을 ‘원’ 아닌 ‘능(陵)’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중국과 일본 심지어 북한조차도 ‘원’이 아닌 ‘능’이란 명칭을 쓴다. ‘원’은 국가 스스로가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순국선열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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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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