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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기행

마키아벨리와 단테의 발자취를 찾아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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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키오 다리 근처 마키아벨리의 생가는 2차대전 때 파괴되고 들보만 남아
⊙ ‘단테의 집’ 앞에는 단테처럼 꾸민 사내가 《신곡》 낭송
⊙ 마키아벨리의 묘가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도
    함께 묻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왼쪽 탑이 있는 건물이 베키오궁,
가운데가 두오모(산타마리아델피오레 성당), 오른쪽에 탑이 있는 건물이 산타크로체 성당이다.
  15세기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는 《피렌체 찬가》에서 이렇게 피렌체를 찬양했다.
 
  “피렌체는 산악지대의 해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평원지대의 위험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두 곳의 환경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곳의 기후는 온화하고 상쾌합니다. 피에솔레 지역에 자리 잡은 산맥이 마치 이 도시의 성채처럼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차갑고 저돌적이며 매서운 북녘 바람의 어마어마한 힘을 막아 냅니다. 한편 바람의 힘이 약한 동쪽 지역에는 좀 더 낮은 언덕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방향으로는, 넓은 평야가 태양과 남녘의 미풍을 받으며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렌체에는 늘 평온함과 상쾌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그의 말 그대로다. 아르노강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 시가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붉은 지붕의 건물들 사이로 피렌체의 상징 베키오 다리와 두오모,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재회했던 트리니티 다리, 베키오궁전, 산타크로체 성당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는 그리 높지 않은 산과 언덕, 초장(草場)들이 이어지고 있다.
 
  브루니의 피렌체 예찬은 끝이 없다. 이런 천혜의 지리에 걸맞게 “피렌체야말로 최고의 원리에 따라 창조된 도시”이며 “피렌체인이 지닌 천부적인 능력, 사리 분별력, 우아함, 고귀함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 브루니는 노래한다.
 
  브루니의 말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린다.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 등 르네상스를 이끈 천재들을 배출하거나, 그들에게 활동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피렌체의 실권자 코시모 데 메디치(1380~1464), 로렌초 데 메디치(1339~1492) 등은 치자(治者)의 사리 분별력, 우아함, 고귀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하지만 피렌체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브루니의 예찬과는 달리 피렌체에도 그늘이 있었다. 정치적 음모와 억압, 당파와 계층 간의 갈등, 선동에 흔들리는 우중(愚衆)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피렌체는 자유로운 시민(길드를 중심으로 한 ‘가진 자’들이기는 했지만)들의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예들이 세습군주로 군림하는 토스카나대공국으로 변모했다. 단테 알레기에리(1265~1321)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이러한 현실을 처절하게 고민했던 지식인이었다.
 
 
  들보만 남은 마키아벨리 생가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생가. 위의 들보에는 마키아벨리의 생가에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벨베데레(Belvedere)요새를 지나면 토스카나대공국시대에 대공(大公)들의 거성(居城)이었던 피티궁전이 나온다.
 
  피티궁전 앞 거리 이름은 구이차르디니 거리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1483~1540)의 이름에서 따온 거리다. 피티궁전 바로 옆에 구이차르디니의 저택이 있다. 구이차르디니도 마키아벨리처럼 냉철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당대에는 귀족 출신 고관이었던 구이차르디니쪽이 훨씬 명성이 높았지만, 오늘날에는 일부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를 제외하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구이차르디니의 저택 앞에는 젤라토(이탈리아 아이스크림), 가죽 제품,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지다가 문이 없이 뻥 뚫린 입구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있다. 이곳이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 바로 마키아벨리의 생가 자리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작가 주세페 프레촐리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한다. 후일 도덕과 종교라는 잣대를 떠나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인간의 본성을 적확(的確)하게 들여다본 사람답다.
 
  입구 위쪽에 얹혀 있는 오래된 들보에는 “이 들보는 1944년의 파괴 직후에 발견된 것으로서 마키아벨리의 집에 사용되었던 것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4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 와중에 파괴되었다. 이곳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달성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마키아벨리의 집에서 1분 정도 걸으면 베키오 다리가 나온다. 2층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다리로 피렌체의 상징 중 하나다. 마키아벨리의 시대에는 푸줏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지만, 오늘날에는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금은방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 다리에서 서쪽으로 산타트리니타 다리가 보인다. 단테가 그의 영원한 연인(戀人) 베아트리체와 재회했던 다리다.
 
 
  사보나롤라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사보나롤라가 화형된 곳에 설치된 표지. 사보나롤라는 1494년부터 4년간 신정정치를 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뇨리아 광장이다. 광장 한쪽에는 중세 이래 피렌체의 정부청사였던 베키오궁전이 있다.
 
  광장 한복판에는 표지석이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가 화형(火刑)을 당한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정권 치하에서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으면서 신(神)으로부터 멀어진 피렌체인들에게 ‘신의 징벌’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던 인물이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사보나롤라는 이를 ‘신의 채찍’이라면서 자신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주장했다.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후 리더십의 공백을 겪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이 ‘예언자’에게 맥없이 투항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 정권이 무너지고 사보나롤라가 조종하는 신정(神政) 체제가 수립됐다. ‘피렌체의 호메이니’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면서 ‘적폐(積弊)청산’을 부르짖었다. 화려한 사치품들과 르네상스의 정신을 담은 예술품들이 불에 탔다. 화가 보티첼리도 자신이 그린 비(非)기독교적 주제의 작품들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던졌다.
 
베키오궁과 시뇨리아 광장. 중세 이래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인간은 회개하고 절제하는 경건한 삶을 그리 오래 이어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1498년 4월 사보나롤라 정권은 민중들의 봉기로 무너졌다. 사보나롤라는 그해 5월 23일 한때 그에게 열광했던 군중들의 조롱 속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국가안보실장’ 마키아벨리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의 벽감(壁龕)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상.
  사보나롤라의 몰락과 마키아벨리의 등장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보나롤라 사후(死後) 피에로 소델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정부가 들어섰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죽은 다음 달인 1498년 6월 피렌체공화국의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안보실장쯤 되는 자리였을 것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소장한 우피치(Uffizi)미술관은 베키오궁전과 이어져 있다. 원래 우피치미술관은 베키오궁전에 부속된 정부청사 건물이었다. 우피치라는 말 자체가 사무실(office)이라는 뜻이다.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의 벽감(壁龕)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 단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페트라르카,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 피렌체가 낳은 위인들의 상(像)이 늘어서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상도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턱에 손을 대고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한 젊은이의 모습이다.
 
  피렌체공화국 제2서기장으로 일하던 30대의 마키아벨리는 이런 모습으로 베키오궁의 자기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곤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프랑스, 독일(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 강력한 외세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자레 보르자가 중부 이탈리아에 교황령(敎皇領)을 건설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피렌체의 외교·안보책임자이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루이 12세, 체자레 보르자, 교황청,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들의 군주들과 용병대장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고, 외교 교섭을 하고, 용병료 관련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통치자의 자질, 국가간의 역학 관계, 인간과 역사를 보는 눈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군주론》은 이 시기 마키아벨리의 체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박물관이 된 감옥, 바르젤로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조각품들을 소장한 바르젤로 박물관.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이곳에 투옥됐었다.
  1512년 8월 스페인군이 메디치가의 복귀를 요구하며 피렌체로 쳐들어왔다. 메디치가 출신인 지오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그 뒤에 있었다. 적의 포위 속에서 메디치가 지지자들이 베키오궁전에 들어가 소델리니에게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우유부단했던 소델리니는 두말 없이 망명을 떠났다.
 
  18년 만에 권좌에 복귀한 메디치가의 눈에 소델리니 정권에서 활약했던 마키아벨리는 ‘부역자(附逆者)’였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정권을 위해서 일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해 11월 자리에서 쫓겨났다.
 
  마키아벨리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반(反)메디치가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바르젤로성에 투옥된 것이다. 베키오궁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바르젤로성은 지금으로 치면 검찰청 내지 경찰청에 해당하는 기관이 있던 곳이었다. 오늘날 바르젤로는 도나텔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각품을 주로 전시하는 국립미술관으로 유명하다.
 
  모진 고문을 받으며 죽음을 기다리던 마키아벨리를 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델리니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지오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었다. 1512년 3월 지오반니 추기경은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됐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짓는 등 르네상스의 후원자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 때문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바로 그 사람이다. 피렌체 정부는 자국 출신 교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마키아벨리도 석방됐다.
 
 
  《군주론》과 《로마사논고》
 
  43살의 한창 나이에 공직에서 축출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외곽에 있는 산탄드레아의 산장으로 은퇴했다. 《군주론》(1513년), 《로마사논고(정략론)》 (1518년 혹은 1519년)는 이 시기에 저술한 것이다. 흔히 마키아벨리라고 하면 ‘통치자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계를 가져야 한다’고 한 《군주론》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로마사논고》까지 읽어야 마키아벨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종교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몇 번이고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세월은 당초에 있었던 장점도 마멸시켜 버리기 마련이다. 마멸되는 대로 방치해 두면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서 체제 유지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런 지적 활동을 하는 한편 마키아벨리는 끊임없이 메디치 가문에 선을 대서 재기를 도모했다. 사실 《군주론》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가끔 마키아벨리를 비공식 외교자문역으로 쓰면서 용돈이나 주었을 뿐, 그를 등용하지는 않았다.
 
  1518년에 지은 희곡 〈만드라골라〉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푸념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막혀 있죠. 다른 일로 새로운 능력을 보여줄 길이. 흘린 땀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1527년 5월 독일-스페인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침공, 로마를 약탈했다. 그 여파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축출되고 다시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그해 6월 10일 마키아벨리는 전에 맡았던 제2서기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참패했다. 혁명을 일으킨 신세대 정치인들이 보기에 메디치 가문에도 한 발 걸치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이미 구(舊)시대의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반대자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낙선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열흘 후인 6월 20일 병으로 쓰러진 마키아벨리는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3년 후 스페인군을 등에 업은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로 복귀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증손자인 코시모 데 메디치(1519~1574) 치하에서 피렌체공화국은 토스카나대공국으로 바뀌었다. 메디치가의 지배는 1737년까지 계속되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난 산타마르게리타 성당
 
‘단테의 집’ 앞에서는 단테처럼 차려 입고 《신곡》을 낭송하는 사내를 만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수감생활을 했던 바르젤로성에서 대각선 방향에 단테 알레기에리 거리가 있다. 말이 ‘거리(Via)’지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작은 골목이다. 이 골목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다. 산타마르게리타 성당—아홉 살 소년 단테가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던 곳이다.
 
  후일 성인이 된 단테는 18살 꽃다운 처녀로 성장한 베아트리체와 산타트리니타 다리 앞에서 조우(遭遇)한다. 이때 단테는 이미 젬마 도나티라는 여인과 결혼한 후였다.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베아트리체는 25살의 나이에 요절, 산타마르게리타 성당 묘지에 묻혔다 (단테의 아내 젬마의 묘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았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방황하는 단테에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버질)를 가이드로 보내서 지옥을 여행하게 하고, 천국에 온 단테를 안내하는 ‘천상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산타마르게리타 성당에서 ‘단테의 집(카사 디 단테)’은 지척간이다. ‘단테의 집’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던 곳을 피렌체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이던 1865년에 ‘단테의 집’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고 한다. 건물은 1911년에 지어진 것인데 단테기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건물 옆의 작은 광장에서는 단테처럼 붉은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낭랑한 음성으로 《신곡》을 낭송하고 있다. 이탈리아어는 모르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울림이 있다. 책에서와는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한창 흥이 오를 즈음, 사내는 낭송을 중단하고 청중들(관광객들)을 한번 돌아본다. 청중들이 사내 앞에 놓인 모금함에 돈을 넣으면 낭송이 다시 시작된다.
 
 
  전사·정치인 단테
 
‘단테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단테의 칼’. 단테가 쓰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단테의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전시내용은 알차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히 《신곡》을 비롯한 단테의 작품세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당시의 무구(武具)와 무사의 복장을 한 단테의 초상이었다.
 
  단테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베아트리체와의 못 이룬 사랑에 넋을 놓고 살았던 창백한 얼굴의 시인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흔들었던 기벨린당(신성로마제국 황제파)과 겔프당(교황파) 사이의 내전에 몸을 던졌던 전사(戰士)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아레초전투에서는 겔프당의 선봉으로 전투를 치렀고 기벨린당을 물리친 후에는 피렌체 정부의 최고위층 중 하나로 활약했다.
 
  기벨린당을 물리친 후 피렌체의 겔프당은 교황으로부터의 자립과 신흥상인계급의 권익을 추구하는 백당(白黨)과 교황 및 귀족계급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흑당(黑黨)으로 분열됐다. 단테는 백당이었다. 1301년 단테가 교황청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동안 피렌체에서 프랑스군을 등에 업은 흑당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단테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2년의 유배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단테는 유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피렌체 정부는 단테가 벌금을 내지 않고 피렌체로 돌아올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21년간에 걸친 단테의 망명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곡》의 첫머리에서 단테는 이렇게 노래한다. ‘한평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던 나 컴컴한 숲속에 서 있었노라.’
 
  후일 흑당 정권이 무너진 후 피렌체 정부와 시민들은 단테에게 귀환을 호소했다. 그러나 자신을 추방했던 조국에 대한 단테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단테는 귀국을 거부하고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1321년 라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끝내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한 단테의 모습은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있는 도메니코 디 미첼리노의 그림 〈단테와 신곡〉에 잘 나타나 있다. 단테 탄생 200주년인 1465년 피렌체 시민들이 주문해서 그린 이 그림 속에서 단테는 《신곡》을 들고 성벽 밖에서 피렌체시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탈리아의 판테옹’ 산타크로체 성당
 
‘피렌체의 판테옹’ 산타크로체 성당 앞에 있는 단테상(像).
이 성당에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의 무덤이 있다.
  베키오궁전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 산타크로체 성당이 있다. 마키아벨리와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단테의 실제 무덤은 라벤나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단테의 무덤은 빈 무덤이다. 피렌체인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단테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당 입구에는 단테의 입상(立像)이 있다. 얼굴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지식인의 결연한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산타크로체 성당 안에는 마키아벨리와 단테 외에도 글 앞머리에서 인용했던 레오나르도 브루니,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파르티,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음악가 조아키노 로시니, 무선전신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 등 이탈리아가 배출한 위인들의 무덤이 있다. 가히 ‘이탈리아의 판테옹(萬神殿·국가적 영웅들의 묘소)’이라고 할 만하다.
 
산타크로체 성당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묘.
  마키아벨리의 무덤 벽에는 그의 얼굴을 새긴 원판을 붙잡고 있는 여신(女神)상이 있다. 그 여신은 누구일까? 혹시 마키아벨리를 외면했던 ‘포루투나(운명의 여신)’는 아닐까? 그의 무덤 앞에서 가만히 마키아벨리의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내 영혼보다 더 내 조국을 사랑하노라”라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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