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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백화점 주차장이 된 조선공산당 본부

해방 후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의 무대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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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에 조선은행권 발행하던 근택인쇄소 자리
⊙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접수, 공산당 본부, 해방일보, 조선정판사 입주
⊙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발간 …, 조선정판사 사건 후 《경향신문》 창간
1953년 1월의 서울 소공동 거리. 오른쪽에 경향신문사가 보인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과 《해방일보》, 조선정판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 사진=조선일보DB
  1946년 5월 15일 제1관구경찰청은 장택상(張澤相) 청장 명의로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폐(僞幣)사건’을 발표했다. 경찰은 “300만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남조선 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되었다”면서 “이 지폐위조단에는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 관련되었다. 이 지폐위조단의 소굴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近澤)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이다”고 발표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해방정국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종래 공산당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하던 미 군정청은 이 사건 이후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에 대해 막연히 호의를 갖고 있던 대중도 지폐를 위조해 경제를 교란하는 민생범죄를 저지른 공산당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 곤경에 처한 공산당은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좌익계 정당들과 통합해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해 화장을 고치는 한편,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 등 극좌폭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근택인쇄소 자리
 
조선정판사 사건 주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관술. ‘부당수’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공산당의 실세였다.
  조선정판사와 조선공산당이 있던 근택빌딩은 서울시 중구 소공동 74번지(옛날 지번)에 있었다. 이곳에 일제(日帝)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인쇄소가 있었다. 한국은행과도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이 근택인쇄소에서는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인쇄소를 접수, ‘조선정판사’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정판(精版)’이라는 말에서, 이 인쇄소가 당시로서는 최고급의 시설을 갖춘 인쇄소였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 본부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도 이 건물로 들어왔다.
 
  《해방일보》는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됐다. 사장 권오직은 일제시대에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13년간 복역했던 거물 공산주의자였다. 후일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駐中)대사 등을 지내다가 숙청당했다. 《해방일보》는 ‘만국 무산자는 단결하라!’는 구호를 1면에 내건 철저한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였다. 이승만·김구·한국민주당 등을 공격하는 게 일이었다.
 
  언론사학자인 정진석 전 한국외국어대 교수에 의하면 판권상 《해방일보》가 이곳에서 발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3월 20일(제92호)부터라고 한다. 판권대로라면 《해방일보》가 이곳에서 인쇄를 한 것은 두 달이 채 못 되는 셈이다. 1946년 5월 18일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판사 사건 당시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위조지폐 발행을 지시한 자는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과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일제시대에 경성콤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골수 공산주의자로 당시에는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조선정판사 사건
 
  조선정판사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100원권 지폐원판 10개와 지폐인쇄용 잉크, 종이들이 남아 있었다. 권오직과 이관술은 1945년 10월 20일 조선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에게 지시, 그해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1200만원(처음에는 300만원으로 발표했으나, 이후 1200만원으로 늘어남)의 위조지폐를 발행해서 공산당 활동자금 등으로 사용했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은 1945년 9월 근택인쇄소가 갖고 있던 지폐원판들을 조선도서출판주식회사에 넘기라고 했지만, 그중 100원권 인쇄원판 10개가 행방불명됐고, 그 인쇄원판들이 조선정판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지폐는 조선은행권을 만들 때 사용하던 인쇄원판과 종이, 잉크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진짜 지폐와 차이가 없었다. 위조지폐를 만든 주범 김창선은 자신에게 충분한 반대급부가 돌아오지 않자 지폐원판 가운데 하나를 빼돌려 위조지폐를 만들려다가 여의치 않자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겼다가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1946년 5월 15일 사건을 발표하면서 증거로 100원권 원판 9개, 인쇄용 잉크, 소각 아연판 잔해 등을 제시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 군정청은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등을 구속, 재판에 회부했다. 권오직은 월북해서 체포를 면했다. 5월 18일에는 미군을 동원, 조선공산당이 사용하는 부분을 제외한 근택빌딩 나머지 부분을 폐쇄했다. 《해방일보》도 폐간됐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5월 15일 즉각 성명을 내고 권오직·이관술 두 사람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美蘇)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외에 걸쳐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공산당은 1946년 7월 26일 이른바 ‘신전술’을 발표했다. ‘신전술’은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써, 피는 피로써 갚자”면서 극좌폭력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정판사 사건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1946년 6월 27일~7월 12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등과 만났다. 이때 허가이·김책·주영하 등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관계자들은 박헌영에게 “미군정이 정판사사건을 만들 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 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 “일제 때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에서 총독부가 지폐를 찍어 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계 같은 것들은 미리 다 치워 버렸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좌익의 재판투쟁
 
조선정판사 사건 재판. 피고인들은 고문 조작 주장 등을 하면서 재판정을 정치투쟁이 장으로 만들었다. 사진=조선일보DB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재판은 1946년 7월 29일~10월 31일 33차례 열렸다. 공산당은 재판을 투쟁의 장(場)으로 활용했다. 재판정 내외에서의 구호 및 투쟁가요 외치기, 범죄 혐의 부인, 고문 주장, 재판 지연전술, 대규모 변호인단 구성 등 1980년대 이후 좌익사범 재판에서 흔히 보게 되는 풍경들이 이때 이미 등장했다.
 
  재판 첫날에는 수천 명의 공산당원과 좌익세력들이 법원을 둘러싸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조선공산당 만세!” “판·검사를 때려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쳐 댔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 헌병까지 출동해야 했다. 진압 과정에서 총격이 발생, 3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47명이 체포되었다.
 
  김창선은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문당한 증거를 보이겠다면서 옷을 벗어던지기도 했다. 박낙종 등 피고인들은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고, 피고회의를 열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변호인단의 진용은 막강했다. 일제시대에 항일변호사로 이름을 떨쳤던 허헌이 변호인단의 좌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후일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위원장(당수)을 맡았고, 북한 정권에 참여해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다.
 
  이에 맞서는 검사는 조재천과 김홍섭이었다. 조재천은 후일 민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다가 장면 정권하에서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홍섭은 대법원판사,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사도법관(司徒法官)’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김홍섭은 피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피고인들이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자 당대 최고의 안과의였던 공병우 박사, 외과수술의 1인자였던 백인제 박사(백병원 창립자)가 나와 그들을 검진했다. 이들은 피고인들의 신체에서 고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감정했다. 두 사람은 6·25 때 서울이 적치하(赤治下)에 들어가자 체포되었다. 공병우 박사, 백인제 박사와 친했던 장기려 박사는 이들이 체포되었던 이유를 조선정판사 사건 때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감정을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진술했다. 한글타자기 발명가이기도 했던 공병우 박사는 납북되어 가다가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백인제 박사는 결국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1946년 11월 28일 서울재판소는 이관술, 박낙종, 김창선 등 4인에게 무기(無期)징역을, 신광범(조선정판사 인쇄과장), 정명환(인쇄공) 등 3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이 “남조선 사법권은 이로써 자살하였다. 우리는 조상(弔喪)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은 대성통곡하면서, 적기가를 불렀다. 이관술과 박낙종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가 발발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처단할 때 죽었다. 이관술의 유족은 노무현 정권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는 한편,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15년 3월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국내 좌파세력은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돈을 싸 들고 올 정도로 자금이 풍족했던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찍어 낼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면서 “정판사 위폐 사건은 미군정과 우익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지폐 인쇄 시설이 있는 것을 알고 건물을 손에 넣은 것”이라는 취지의 회고를 남겼다.
 
 
  천주교, 《경향신문》 발간
 

  이후 근택빌딩과 그 안에 있던 인쇄시설은 천주교 서울교구유지재단이 인수, 1946년 10월 6일부터 《경향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이라는 제호는 1906년 프랑스 신부 플로리안 드망주가 창간한 주간지 《경향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초대 사장은 양기섭 신부였다. 주간은 시인 정지용,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이 맡았다.
 
  《경향신문》은 중도우파 성향이었다. 경향신문사는 창간 11개월 만에 6만2000부를 기록, 시중 신문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자랑한다.
 
  1950년대는 《경향신문》의 전성기였다. 이승만 정권의 비정(秕政)을 가차없이 비판해 인기를 끌었다. 결국 《경향신문》은 1959년 2월 4일 자 ‘여적(餘滴)’ 난에 실린 논설위원 주요한의 칼럼이 문제가 되어 그해 4월 30일 폐간당했다.
 
  《경향신문》이 당시 ‘야당지’로 처신한 데에는 민주당 신파(新派)의 지도자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 부통령과의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경향신문》과 함께 양대 야당지였던 《동아일보》는 민주당 구파(舊派)의 대변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지 이틀 후인 1960년 4월 28일 복간했다. 장면 정권 시절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은 정권의 숨은 실세(實勢)로 꼽혔다. 좋은 시절은 이듬해 5·16군사혁명으로 끝났다. 12년간 재직했던 한창우 사장이 물러났고, 1962년 2월 천주교유지재단은 신문사를 매각했다. 주식회사로 다시 출발한 《경향신문》은 1965년 5월 이준구 사장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다시 주인 잃은 신문이 되었다. 기아산업, 신진자동차 등으로 주인이 바뀌다가 5·16장학회(정수장학회)가 신문의 대주주가 되었다. 1974년 11월에는 문화방송(MBC)과 합쳐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되었다. 이와 함께 《경향신문》은 소공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중구 정동의 현 사옥(社屋)으로 옮겨갔다.
 
 
  롯데백화점 주차빌딩 들어서
 
옛 조선정판사 자리는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타워가 되어 있다.
사진=배진영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본부와 조선정판사가 있던 곳, 《경향신문》 기자들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필봉을 휘두르던 소공동 74번지는 지금 번지수 자체가 사라졌다. 그 일대에 있던 3~5층짜리 낮은 건물들은 지난 몇 년 사이에 하나둘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옛 소공동 74번지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빌딩이 들어서 있다. 무산(無産)대중 혁명을 외치던 공산당의 본부는 상업자본주의의 상징인 재벌계열 백화점의 부속건물이 된 셈이다.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어 내던 자리에는 자본주의화한 공산국가 중국에서 온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들이 돈을 뿌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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