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와 앨범] 박수근의 〈귀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 월간조선

회색

반세기 만에 돌아온 박수근의 〈귀로〉

화가 박수근(朴壽根·1914〜1965)을 만나러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 갔다. 거기서 〈귀로(歸路)〉가 반세기 만에 고향 땅을 밟고 있었다. 〈귀로〉의 귀향은 화강암 빛깔의 박수근식 표면 질감에 매료된 미국인 건축가가 1965년 산 그림을 미국 ‘USC패시픽아시아뮤지엄’(캘리포니아 소재)에 기증하면서 이뤄졌다. 내년 4월 23일까지 이곳에 머문다.

〈귀로〉는 여느 그림처럼 어두운 잿빛, 회색이 배경이다. 낡은 시멘트 바닥의 느낌에 평면(입체가 아닌) 위의 침잠한 백색과 회색의 굵은 톤, 박수근만이 아는, 그만이 낼 수 있는 색깔에 한국인의 풍경이 담겨 있다.

생전 제도권 밖에서 맴돌던, 평생 이젤 하나 가져 보지 못한, 마흔아홉이 돼서야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화단(畵壇)의 주변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보수적 아카데미즘 옹호자, 일본 유학파가 다수였던 화단의 눈에 비친 그의 그림은 칙칙하고 낯설었다.

〈귀로〉에는 행상을 마치고 귀가하는 3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머리 위 함지에 하얀 것이 소복이 쌓여 있다. 쌀일까 보리쌀일까. 여인의 등에 업힌 아이는 잠이 들었을까. 깨어나 보채면 어쩌나. 세 여인은 무심히 서 있는 듯하면서도 삶을 응시하는 태도는 진지하다. 검정 고무신과 흰 버선이 겨울나무가 단단히 뿌리박은 것 같다. 그의 그림엔 얼굴표정이 없다. 때로 눈, 코, 입이 생략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USC패시픽아시아뮤지엄에 소장된 박수근의 〈귀로〉(42.5 X 52㎝).

1950년부터 1965년 죽기 전까지 박수근이 가장 많이 그린 풍경은 시장이다. 함지를 앞에 두고 쪼그려 앉은 여인, 함지를 이고 선 여인. 모두 흰 무명 저고리와 치마 차림이다. 인물은 황갈색 또는 회갈색 톤이다. 박수근은 생전 자기 그림 속 인물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린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은 몹시 가난했고 전시회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했지만 생전에 존재감이 없거나 세상과 등진 광인(狂人)이 아니었다. 동시대 예술계의 수많은 인물이 그를 벗했고 기억했다. 그는 떠났어도 그림으로 남아 한국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

박수근이 등장하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헐벗은 나무’는 박수근의 삶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285, 《나목-박완서 소설전집》, 세계사 刊)

초록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1955년 4월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초청으로 귀국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이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 최초의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9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한국 환상곡〉이 울려 퍼졌다. 안익태 기념재단은 해마다 주제를 바꿔 가며 기념음악회와 추모식을 여는데 올해 주제는 ‘나의 조국, 나의 노래’였다.

〈한국 환상곡〉 연주를 앞두고 서울오케스트라(지휘 장윤성)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몰다우’,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이집트에 영광을〉을 차례로 들려줬다. 유명한 레퍼토리인 만큼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뭔가 허전했다.

마음은 들뜨고 즐거웠으나 양념이 덜 밴 음식, 식욕을 돋우지 못하는 성찬 같다고 할까. 음악회 팸플릿을 들추고 마지막 레퍼토리인 ‘코리아 판타지’에 자꾸 눈길이 갔다.

자문해 보았다. 〈한국 환상곡〉을 듣고 피가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을까 하고. 핀란드인들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듣고 같은 느낌을 받을까.

연주가 시작됐다. 손목시계는 밤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현(絃)에 실린 선율이 귀에 익숙하다. 편안하다. 가만히 들어 보니 〈도라지타령〉의 멜로디다. 대금과 단소를 대신해 플룻과 오보에가 연주되고 있다. 흥이 난다. 장단도 농악(農樂)처럼 리듬이 빠르고 변화가 심하다.

국악기를 쓰지 않고 서양음악에 국악기 음색을 표현하려 한 ‘식민지 지휘자’ 안익태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변주는 종잡을 수 없고 역동적인 리듬의 합창이 나온다. 풀 오케스트라로 화려하고 장중한 피날레가 완성된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음반.

〈한국 환상곡〉은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게이어티 극장에서 아일랜드 라디오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다. 한국 초연은 1955년 3월 26일 이뤄졌다. 초연을 앞두고 내한한 그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수도 서울을 쓸쓸한 폐허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건물이 다 쓰러지고 영양부족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며 시민들은 헤매고 다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옷도 깨끗이 입고 건강해 보이고 활기가 있으며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씩씩한 의욕이 넘쳐흘렀다. 한국은 희망의 나라다.”

연주회가 끝나고 객석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양념이 고르게 밴 김치 같은 느낌? 값비싼 음식을 먹어도 마지막엔 된장에 밥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오래된 습관이랄까? 이런 느낌을 ‘감동’이라 불러야겠다.

색깔로 표현하면 초록색이 아닐까. 초록색에는 평화, 편안함, 자연, 조화 등의 이미지가 있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은 초록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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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귀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박수근·안익태가 빚어낸 한국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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