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한국엔 ‘낯선 유럽’ 발트 3국 : 월간조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럽’이 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다. 이들 세 나라를 ‘발트 3국’이라고 한다. 발트 3국은 북쪽으로 핀란드,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발트해, 남쪽으로는 폴란드에 둘러싸인 곳이다.

발트 3국의 규모는 작다. 세 나라의 인구를 모두 합쳐도 700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국토 면적도 한반도 넓이의 4/5에 불과하다. 대신 발트 3국의 수도엔 유럽의 중세와 근대를 느낄 수 있는 구시가지가 있다. 유네스코는 옛 건물과 거리가 잘 보존된 이들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8월 27일 발트 3국에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핀란드 헬싱키행 비행기를 탔다. 10시간 동안 날아가 핀란드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다. 반타 공항에서 헬싱키 도심인 중앙역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걸린다. 이튿날 오전 발트 3국 여행을 위해 헬싱키항에서 탈린행 여객선을 탔다.

200만명이 인간 사슬 만들어 소련에 저항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외세에 의해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 지역에 도시가 건설된 13세기부터 줄곧 외세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독일·덴마크·스웨덴·폴란드·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40년 8월 이후엔 소련에 합병됐다.

리투아니아는 14~15세기에 동유럽의 강자로 군림한 적이 있지만, 이후엔 독일·폴란드·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앞선 두 나라와 같은 시기에 소련에 편입됐다.

발트 3국은 숱한 외침을 당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저항했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는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30만명이 독립을 요구하는 음악제를 개최했다. 발트 3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노래 혁명’의 시작이었다.

발트 3국 국민은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잇는 ‘발트의 길’에 ‘인간 사슬’을 만들고 15분 동안 자유와 독립을 외쳤다. 발트 3국의 모든 교회와 성당은 종을 울렸다.

인간 사슬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400km)의 1.5배인 620km나 이어졌다. 당시 인간 사슬에 참여한 인원은 약 200만명이다. 발트 3국 전체 인구의 약 1/3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셈이다.

이후에도 발트 3국에선 ‘노래 혁명’이 계속됐다. 소련 당국은 탱크를 앞세워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1991년 8월 끝내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탈린 구시가지에서 만난 중세 유럽

탈린 구시가지의 거리다. 탈린 구시가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탈린엔 에스토니아 인구 127만명의 30%인 40만명이 산다. 이들의 주거·생활 지역은 소위 신시가지, 외국인들이 찾는 ‘탈린’은 구시가지다. 800년 역사를 간직한 탈린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통로는 1345~1355년에 지어진 ‘비루 성문’이다. 성문을 통과했더니 중세 유럽이 펼쳐졌다. 박석이 깔린 ‘비루 거리’엔 빨간 지붕과 분홍, 노랑, 파랑 등 파스텔톤 색으로 칠한 벽체로 이뤄진 중세풍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루 거리를 따라 5분 정도 걸었다. 라에코야 광장이 나왔다. 라에코야 광장은 탈린 구시가지 한복판에 있다. 탈린 구시가지 안에서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 유동인구가 많다. 이런 이유로 라에코야 광장에선 장이 열렸었다. 과거 중세 상공업자 동업자 조합 ‘길드’들도 이곳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라에코야 광장의 대표 건물은 구 탈린 시청이다. 2층으로 이뤄진 시청사 우측 지붕 위에는 교회처럼 첨탑이 있다. 1322년 최초 준공 후 1402~1404년에 재건축된 옛 탈린 시청사는 현존하는 북유럽 최고(最古)의 고딕 양식 건물이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422년에 문을 연 라에코야 광장의 약국은 지금도 영업을 한다.

시청사 맞은편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다. 1422년에 문을 연 이 약국은 중세 시대엔 유니콘 뿔 가루, 고양이 피, 생선 눈으로 만든 정력제를 팔았다. 약국 구석에는 개업 당시부터 쓰던 약병과 조제 도구, 약재 모조품을 전시해 놨다. 약국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중세 시대 에는 한자동맹의 중심으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지금 그 흔적을 찾긴 어렵다.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의 연이은 침략과 수탈 과정에 소실·파괴됐기 때문이다.

리가는 19세기 들어 해외무역을 통해 다시 한 번 전성기를 구가한다.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리가는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7%를 차지하는 대도시가 됐다. 이 시기 리가 구시가지엔 1890~1910년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리가가 ‘동유럽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다.

유네스코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리가 역사 지구(구시가지)’ 소재 건물의 40%는 아르누보 양식이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덩굴 식물, 구불구불한 선으로 장식한 철제 난간, 섬세한 꽃무늬와 반복적인 패턴 등이 아르누보 양식의 특징이다.

라트비아인의 민족정신 담긴 ‘자유의 기념탑’

리가에 있는 ‘자유의 기념탑’은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조형물이다.

8월 29일 오후 3시 리가 터미널에 닿았다. 리가 구시가지 동쪽 끝자락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밖에 나갔다. 터미널 쪽으로 2분 정도 걸었더니 ‘자유의 기념탑’이 나왔다. 높이 42m인 자유의 기념탑은 1차대전 후 잠시 독립했던 1935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리가 대표 조형물이다.

라트비아인들은 자유의 기념탑 정면에 ‘조국과 자유를 위해’란 문구를 새겼다. 상단에는 고개를 약간 숙인 한 여성이 황금빛 별 3개를 떠받친 형상의 푸른색 석상을 올렸다.

탈린 라에코야 광장과 옛 시청사다.

이 여성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여신 ‘밀다’라고 한다. 밀다가 든 별 3개는 라트비아를 구성하는 쿠르제메, 비제메, 라트갈레주를 상징한다. 소련 시절엔 자유의 기념탑 앞에 꽃을 놓기만 해도 시베리아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 탑이 라트비아인들의 민족정신, 자유와 독립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리가 구시가지 중심엔 돔 성당이 있다. 돔 성당은 1201년 리가를 건설한 독일 브레멘 출신 주교 알베르트가 만든 성당이다. 돔 성당 좌측 뒤편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다. 1209년에 준공된 이곳의 첨탑 높이는 123m다. 첨탑 중간에는 리가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검은 머리 전당’은 독일과 소련에 의해 파괴됐다가 2001년 리가 건설 800주년을 기념해 복원됐다.

성 베드로 성당 인근엔 ‘검은 머리 전당’이 있다. 이 건물은 과거 리가를 중심으로 한자동맹 도시들과 교역하던 상인 조합 ‘검은 머리 길드’의 본부였다. ‘검은 머리 전당’은 1344년 건축됐다. ‘검은 머리 길드’는 건물을 임차해 이용하다가 1713년 매입해 개축했지만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80%가량 파괴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은 소련 시절 ‘독일의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됐다. 지금 건물은 2001년 리가 건설 800년을 기념해 복원된 것이다.

‘검은 머리 전당’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문 우측에 있는 피부가 까만 남성의 부조상이다. 이 남성은 모리스다. 모리스는 룩소르 유적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테베에서 태어난 로마군 지휘관이다. 그는 287년 지금의 스위스 생모리츠 지역의 기독교인을 색출해 처형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처형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오토 1세(912~973년)는 모리스를 수호성인으로 받들었다. 이에 따라 독일계 상인들의 조합인 ‘검은 머리 길드’도 수호성인으로 모리스를 섬기고, 이름을 ‘검은 머리’라고 한 듯하다.

그리스·로마 신전 형태의 ‘빌뉴스 대성당’

빌뉴스 대성당은 그리스ㆍ로마 신전과 같은 ‘열주식 장방형’ 건물이다.

8월 31일 오후 2시,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도착했다. 빌뉴스는 13세기부터 지금까지 리투아니아의 수도다. 빌뉴스엔 15세기 유럽 최대 판도를 자랑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제정 러시아 지배 당시 흔적을 간직한 구시가지가 있다. 유네스코는 1994년 빌뉴스 구시가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빌뉴스 구시가지로 나갔다. 이미 탈린과 리가에서 구시가지를 경험한 탓인지 빌뉴스에선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구시가지에서 나와 ‘빌뉴스 대성당’에 갔다. 리투아니아 관광 당국은 빌뉴스 대성당을 “리투아니아에 있는 기독교 관련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표현한다. 빌뉴스 대성당은 서울의 광화문과 같은 의미를 갖는 국가 상징이다.

원래 빌뉴스 대성당 자리엔 리투아니아 토속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리투아니아를 통일해 첫 리투아니아 대공에 오른 민다우가스(1203~1263년)는 1251년 이곳에 성당을 건축하려 했지만, 1263년에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빌뉴스 대성당을 완공한 건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1351~1434년)다. 그는 1387년 폴란드 여왕과 결혼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 최초로 성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건물은 1419년 불에 타 버렸고, 이후 재건한 건물은 1769년 폭풍에 파괴됐다. 현재 빌뉴스 대성당의 그리스·로마 신전과 같은 ‘열주식 장방형’ 건물은 18세기 후반에 신축됐다.

대성당 뒤편 언덕에는 게디미나스성이 있다. 이 성은 민다우가스 사후 사분오열한 리투아니아를 재통일한 게디미나스(1275~1341년)가 빌뉴스로 천도하고 처음으로 지은 곳으로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빌뉴스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게디미나스성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빌뉴스의 전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디미나스성으로 가려면 걸어 오르거나 밧줄로 끌어올리는 궤도차를 타야 한다.

갈베 호수 위에 자리한 트라카이성

트라카이성은 빌뉴스에서 30km 떨어진 트라카이 갈베 호수 가운데에 있다.

9월 1일 오후, 빌뉴스 근교 트라카이에 갔다.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트라카이에 가려면 30분가량 버스를 타야 한다. 한때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트라카이는 현재 인구 5000명에 불과한 시골이지만, 매년 50만명 이상이 찾는다. 현지인들은 트라카이의 갈베 호수에서 수상 활동을 즐기기 위해, 외국인들은 트라카이성을 보려고 방문한다. 트라카이성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1350~1430년)가 1430년에 지은 성으로 현재 중세 유물을 전시한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9월 2일 오후 1시 리투아니아 북서부 샤울레이에 도착했다. 발트 3국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샤울레이는 ‘십자가의 언덕’으로 유명하다. 샤울레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십자가의 언덕’이 있는 도만타이로 갔다. 도만타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20분쯤 걷자 십자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언덕이 나타났다.

‘십자가의 언덕’엔 사람 손가락 정도 되는 십자가, 높이가 4~5m에 달하는 대형 십자가 등 다양한 크기의 십자가가 있었다.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십자가에 적힌 글귀도 여러 가지였다. 그중엔 한글이 적힌 십자가도 종종 눈에 띄었다.

리투아니아 북서부 샤울레이 도만타이 소재 ‘십자가의 언덕’이다. 이곳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에 저항하다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 가족들이 하나둘씩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조성됐다.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31년과 1863년 농민 봉기에 참여했다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간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 가족들은 도만타이 언덕에 하나둘씩 십자가를 세웠다.

소련 시절, 독립을 갈망하는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십자가는 더욱 늘었다. 소련은 ‘십자가의 언덕’을 ‘반체제’의 상징으로 여겼다. 불도저를 동원해 세 차례나 십자가를 밀어냈지만, 십자가는 철거 전보다 더 늘었다.

1993년 9월 7일,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가의 언덕’을 찾아 ‘희망과 평화, 사랑, 희생정신의 상징’이라고 선포했다. 이후 ‘십자가의 언덕’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 오거나 관광안내소 앞 상점에서 산 십자가에 소원을 적어 ‘십자가의 언덕’에 세웠다. 매년 수만 개씩 십자가가 늘고 있는 셈이다. 기자도 1유로에 구입한 20cm 길이의 십자가에 소원을 적은 뒤 언덕 중간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