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서울 종로 장안빌딩 : 월간조선

대한민국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현장이 많다. 서울 종로2가 YMCA 옆에 있는 4층짜리 빌딩도 그런 곳 중 하나다. 휴대폰점, 어학원, 맥줏집, 노래방 등이 입주해 있는 이 건물은 겉보기에는 오래된 낡은 건물에 불과하다. 건물 앞에는 ‘김상옥 의사 의거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김원봉(金元鳳)이 이끈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가 1923년 1월 12일 여기 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건물에는 또 다른 역사가 숨어 있다. 해방 직후 ‘장안파 공산당’이 똬리를 틀었던 곳이 이 건물이다. ‘장안파’라는 말도 건물의 이름에서 나왔다.

일제하의 공산주의운동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한국진보세력연구》에서 ‘장안파 공산당은 해방 직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결성된 정당’이라고 말한다. 그는 장안파 공산당이 결성된 장안빌딩이 종로2가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장안파 공산당을 이해하려면 일제(日帝)하 국내 공산주의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땅에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단 조직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5년 4월 17일이다. 이날 서울의 유명 음식점 아서원에 모인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 비밀발기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김재봉, 조동호, 김찬, 조봉암(초대 농림부 장관), 김약수(제헌국회 부의장) 등 17명이었다(15명, 16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책임비서로는 김재봉이 선출되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이다. 그 다음날에는 서울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발기모임이 열렸다. 공청회 의장으로는 박헌영이 선출됐다. 세계공산주의운동을 조종하던 코민테른은 1926년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그해 11월 공산당원 및 공청회 회원들을 모스크바로 보내려다가 일제 경찰에게 적발되는 통에 김재봉 등 조직원 다수가 체포됐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의해 번번이 와해됐다. 1929년 2월 제5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끝으로 공산당이라는 정치결사체는 사라졌다.

공산당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일제의 탄압 탓도 있지만, 공산주의자들 간에 벌어진 파벌싸움의 영향도 컸다. 조선 공산주의운동은 그 초기부터 서울파(상해파), 화요회(이르쿠츠크파), 북풍회(일본유학생 출신) 간의 알력이 심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분파성에 실망한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것이 국내에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제명했다’고 알려졌다. 그 바람에 조선공산당의 와해가 촉진됐다.

이후에도 조선 내의 공산주의운동은 계속됐다. 그중 경성콤그룹이라는 조직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후일 남부군 사령관) 등이 그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1940년 12월~1941년 12월 3차례에 걸쳐 김삼룡 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무너졌다. 박헌영은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광주(光州)의 벽돌공장 노동자가 되어 지하로 잠복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전향하거나 공산주의 활동을 접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변신했다.

‘장안당’ ‘15일당’이라고도 불려

장안빌딩 앞에는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날 밤, 한 무리의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 모였다. 주동자는 서울청년회(서울파) 소속이던 이영, 정백, 경성제대그룹의 최용달이었다. 화요계의 이승엽, 조동호, 조두원, 홍남표, 최원택, 상해파 고려공산당계의 서중석 등도 참석했다. 이들은 밤새도록 조선공산당을 다시 건설하는 문제를 토의했다.

이튿날 이들은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책임비서에는 이영이 선출됐다. 그는 일제하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시절 당내 파벌싸움에서 패한 후인 1927년 12월 별도의 조선공산당(춘경원이라는 곳에서 만들었다 해서 ‘춘경원(공산)당’이라고 한다)을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조선공산당 제2비서에는 이승엽이 선출됐는데, 얼마 후 이승엽은 사임하고 최익한이 제2비서가 됐다. 장안빌딩에 근거지를 두었다 하여 ‘장안파 공산당’ 혹은 ‘장안당’이라고도 불렸고 8월 15일에 당을 만들었다고 해서 ‘15일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8월 18일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 23일에는 좌익계 준(準)군사조직인 학병동맹을 결성하는 등 외곽조직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발 빠르게 창당을 선언하고 나섰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전향을 하거나 당활동을 중단했던 ‘청산파’ ‘좌절파’였던 것이다. 이영은 일찌감치 공산주의 활동을 접고 고향 함북 북청에서 유휴(遊休)하였고, 정백은 광산 브로커, 최익한은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승엽은 전향서를 쓰고 인천에서 식량배급조합 이사를 지냈다.

1945년 8월 18일 박헌영이 광주에서 상경했다. 그는 상경 당일 서울 계동에 있는 홍증식의 집에서 경성콤그룹의 옛 동지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만났다. 이들은 일제 말에도 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다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순결파’라고 불렸다.

이들은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는 사이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시내 곳곳에 “박헌영 동지 만세!”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이여 나오시라”는 등의 벽보를 붙였다. 많은 시민은 들어본 적도 없는 박헌영을 추어올리는 벽보에 어안이 벙벙했다.

박헌영은 상경 당일인 8월 18일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을 방문했다. 그는 부영사 A.I.샤브신과 만나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샤브신은 박헌영의 투쟁경력과 투철한 이론을 인정하고 그의 후견자가 되었다. 박헌영은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고 행세할 수 있었다.

박헌영의 공격

1946년 2월 좌익 연합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시 여운형(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는 박헌영.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는 즉시 ‘장안파 공산당’을 정조준했다. 재건준비위는 발족과 동시에 채택한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에서 ‘전시하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탄압이 두려워서 계급운동을 청산한 변절자 일파(전향파)’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와 같이 탄압시대에는 주의를 포기하고 투기업자나 금광 브로커가 되고, 합법적 시대에 와서는 하등의 준비활동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를 내세우고, 조선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고 나서는 그 교묘한 수법은 과거 파벌주의자들의 전통적 과오를 또 한 번 범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장안파’라고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장안파 공산당’의 지도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산주의운동의 명분에서 장안파는 박헌영을 따를 수 없었다. 결국 그해 8월 24일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산을 결의했다. 그러면서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이나 경성지구당 조직은 그대로 존속시켰다.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와의 통합 논의 과정에서 자파(自派)의 지분을 더 챙기기 위한 지렛대로 삼기 위해서였다.

장안파 측에서는 9월 8일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계동의 홍증식의 집에서 열성분자대회를 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와의 통합 논의에 내놓을 자파의 주장(특히 인사 관련)을 점검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자리에는 박헌영도 참석했다. 박헌영으로서는 대담하게도 적진에 뛰어든 셈이다.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이 자리에서 박헌영이 “지하운동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그룹들과 출감한 전투적 동지들이 중심이 되고서 당이 재건되는 것”이라면서 “과거의 파벌두령이나 운동을 휴식한 분자는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해도 이번 중앙에는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다고 전했다. 결국 이 자리에 참석한 자들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로의 통합을 결의했다. ‘해방 이후 최초의 정당’은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9월 11일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이 발족했다. 이영·최익한 등 장안파는 그해 11월 전비(前非)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한 후에야 조선공산당 입당이 허용됐다. 장안파는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박헌영의 리더십에 도전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조선공산당의 그 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유일한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 샤브신은 평양의 소련 군정(軍政)에 미래 조선의 통치자로 박헌영을 추천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낙점한 지도자는 따로 있었다.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었다.

191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인민당(여운형), 남조선신민당(백남운) 등 좌익계 정당들과 합당, 남조선노동당이 되었다. 박헌영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련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장으로는 변호사 출신 허헌(후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선출됐다. 이때 이미 월북해 있던 박헌영은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의 남로당 당수였다.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이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위원장으로는 김일성이 선출됐다. 장안파를 누르고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1인자로 군림했던 박헌영은 이제 ‘2인자’로 내려앉아야 했다. 그는 소련파인 허가이와 함께 부위원장이 됐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됐을 때 박헌영은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됐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2인자’ 노릇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55년 12월 15일 그는 반역죄,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는 혐의로 북한 정권의 재판정에 섰다. 이승엽 등 다른 남로당 간부들은 이미 2년여 전에 반역죄로 기소되어 숙청당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직후 박헌영은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