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수집》에는 1940~1953년 사이 쓰인 31편의 한시 실려
⊙ 원본 분실 이후 《유수집》 실체 잊혔다가 복사본 발견
⊙ “조지훈의 초기 자유시는 한시적 발상과 한시적 시형 뚜렷해”(김종균)
⊙ 원본 분실 이후 《유수집》 실체 잊혔다가 복사본 발견
⊙ “조지훈의 초기 자유시는 한시적 발상과 한시적 시형 뚜렷해”(김종균)
- 조지훈 선생 내외. 1967년 서가에서.
〈고풍의상〉 〈승무〉 〈낙화〉를 쓴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본명 동탁・東卓)의 한시집(漢詩集) 《유수집(流水集)》의 실체가 처음 공개됐다. 일종의 한시 습작노트로, 일제 말기인 1940년에서 1953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평생 한시를 문단에 발표한 적이 없었다.
《유수집》을 공개한 한국외대 김종균(金鍾均·80) 명예교수는 “선생은 초등교육 3년을 끝으로 한학에 전념해 〈대학(大學)〉까지 마친 뒤 상경해 자기 의지대로 혜화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 불교공부를 했다”며 “선생은 ‘삼불차(三不借·사람·재물·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집안에서 자라나 한학과 한시에 능했다”고 밝혔다.
《유수집》에는 5언시와 7언시를 포함 31편의 한시가 실렸다.
김 교수는 “조지훈이 1939년 《문장》지 추천을 받았을 무렵, 자유시에서 자연정서를 노래하거나 불교적 선미(禪美), 고전적 한국정서를 나타내는 데에는 한시적 정취와 시형 및 운율을 가미해 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며 “조지훈 초기 시는 그 한시적 발상과 한시적 시형의 영향이 뚜렷하다”고 했다.
《유수집》의 실체는 김 교수가 1982년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 논문에 소개된 한시가 나중 《조지훈 전집1》(나남출판, 1997년간)에 실렸으나 인용 출처인 《유수집》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일부 누락된 채 31편 중 17편만 실렸다. 제목이 잘못 표기됐거나 원문과 비교해 틀린 한자도 발견된다. 김 교수 논문의 오자로 인해 잘못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유수집》을 둘러싼 에피소드
김 교수와 조지훈 선생은 사제지간이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선생은 고려대 국문과 은사셨고 그분 연구실에서 공부를 했어요. 1968년 49세로 별세하셨는데 선생은 봄이면 흙바람 속에서 생각을 키우셨죠. 흙바람이 불던 4월을 지나 5월 중순에 돌아가셨어요. 시인이신 선생은 전아(典雅)하셨고 학자이신 선생은 치밀하셨으며 지사(志士)로서 선생은 과감하셨습니다.”
김 교수가 《월간조선》을 통해 《유수집》을 공개한 이유는 뭘까.
“1968년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던 중 친필 한시집 《유수집》을 찾았습니다. 당시 조교이던 고려대 한문학과 이동환(李東歡) 교수와 상의해 1부씩 복사해 나눠 갖고 그 원본은 선생님 댁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들으니 선생님 댁에 전했던 원본이 분실됐고 이동환 교수도 복사본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유수집》 원본에 대해 묻는 이가 여럿 있었으나 집안 서재 한쪽에 둔 것을 찾지 못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발견했어요. ‘조지훈 기념관’에 보내기 앞서 《유수집》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김 교수가 소장한 낡은 복사본 한시집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본’인 셈이다.
《유수집》에는 총 31편의 한시가 필사(筆寫)돼 있다. 모든 작품이 형식(5언시, 7언시)과 관계없이 창작 순서대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작품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인데 제작 연대는 경진(庚辰·1940)이고 쓴 곳은 수원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작품은 〈술회(述懷)〉인데 1953년 쓰인 것이다. 선생이 6·25 사변 중 쓴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회고적인 허탈한 마음을 노래한다. 부분 인용하면 이렇다.
〈回顧生平恨益新 (일생을 돌아보니 한이 더욱 새롭다.) / 浮沈滄海一葦身 (푸른 바다에 부침하는 한 갈대의 몸이네.) / 萬古興亡何日始 (만고의 흥망은 언제 비롯되었나.) / 百年風雨到今頻 (백년 바람비 지금도 잦네.) 후략〉
시집 전체로 볼 때 소재는 자연, 벗, 술, 기생, 고적(古蹟) 등과 구름, 산, 물소리, 사립문, 정자 등이 많이 등장한다. 주제는 자연에 의탁해 시국을 걱정하는 지사의 심정을 술회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통해 인간성의 경각(警覺)을 보이거나 친구나 술을 통해 한가한 생활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내용이다. 김종균 교수의 말이다.
“이 시편들은 당시의 전통적 한시의 풍을 그대로 본받고 있지만 심상(心象)의 참신성을 통해 기교적이고도 전아한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어요. 시어들이 평이하고 비유 또한 소박해 읽고 감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청록집》의 조지훈과 《유수집》의 한시
《유수집》의 한시는 크게 4시기로 구별된다. 첫째 오대산 월정사 시기, 둘째 수원과 경주 등지를 여행하던 방랑시기, 셋째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양 일월 주곡(注谷)마을에서 일제 말기를 보내던 귀향시기, 넷째 6·25 직후 시기 등이다. 김 교수는 “선생의 한시 제작 시기는 민족적 수난기에 비롯된다. 자연과 옛 고적을 소재로 한 시가 많지만 당시 어두운 사회에서의 울분과 우울, 비분강개하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유수집》은 생전 지상(紙上)에 발표된 적이 없는 미발표 시고(詩稿)이긴 하지만 초기 조지훈 자유시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1946년 간행된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3인 시집 《청록집》에 실린 조지훈의 12편의 시 중에서 그 시적 소재나 내용, 표현, 형식이 모두 한시적 영향하에서 형성되는데, 특히 2행시는 한시 1구(句)를 2줄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2행으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시가 한시적 시형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조지훈의 한시를 이해할 때만, 조지훈의 모든 시에서 드러난 한시적 영향을 이해하게 됩니다. 한시적 영향 관계가 그의 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시로서의 완숙을 지향하면서 개성으로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지훈 시는 한시적 영향과 서구시적 영향, 그리고 우리 시가인 향가와 시조, 가사의 영향을 받아 이룩된 것이긴 해도 초기 시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한시입니다.”
《월간조선》은 《유수집》에 실린 한시 31편 중 《조지훈전집1》에 없는 14편의 한시를 싣는다. 원문엔 한시 번역이 없다. 김 교수가 독자들을 위해 번역해 주었다.
〈訪花隨柳亭(방화수류정)〉
僧踏閑雲去 (스님이 한가로운 구름을 밟고 가네.)
中空一嶽晴 (공중의 멧부리 맑기도 하구나.)
寒鴉啼古木 (찬 까마귀 고목에서 우는)
九月訪花亭 (9월의 방화정이여.)
〈訪禪僧不遇(방선승불우)〉
松扉人跡少 (소나무 사립에는 인적이 드물고)
石逕落花多 (돌길에는 낙화가 지천이네.)
岩下泉聲細 (바위 아래는 샘물이 졸졸 소리 내고)
時聞採藥歌 (때로 채약가가 들려오누나.)
〈山居(산거)〉
山深晝日靜 (깊은 산에 낮은 조용하고)
扉掩洛花迷 (닫힌 사립에는 낙화만 어지럽구나.)
地僻人來少 (땅이 궁벽하니 찾아오는 사람 드물고)
寒堂午睡遲 (집이 차니 낮잠 늦게 드네.)
〈謁漢岩大禪師(알한암대선사)〉
雲霞深處泉聲咽 (구름 안개 깊은 곳 샘물 소리 졸졸)
時聞山禽路更迷 (산새 소리 듣다가 길을 잃었다.)
無事老僧岩下睡 (노스님은 태평스레 바위 아래에서 조는데)
靑天白日落花飛 (청천백일에 낙화만 날린다.)
〈與枕處上人拈韻共賦(여침처상인념운공부)〉
庬睡碧山廬 (삽살개 조는 푸른 산 집)
南風抑卷舒 (남풍은 서책 펴기를 말리네.)
尋雲兼採藥 (구름도 찾고 약초도 캐면서)
帶月或看書 (달밤에는 혹 책도 보네.)
鱖肥携兒釣 (쏘가리가 살찌니 아이는 낚시하고)
麥長共婦鋤 (보리가 자라니 부부가 함께 김매네.)
拙計還成樂 (작은 계획도 즐거움 되니)
遺氓意有餘 (가난한 농부의 뜻도 여유로워라.)
〈訪柳一壽君 次三山詩會韻(방유일수군 차삼산시회운)〉
此地煙霞罕於今 (이 땅의 연하(안개와 노을. 조용한 산수의 경치)는 이제 보다 드문데)
有樓有月白雲尋 (누・樓 있고 달 있어 흰 구름 찾았더니)
逝矣長江遊子意 (장강에 가서 마음대로 노니니)
屹然靑嶂古人心 (우뚝 솟은 푸른 산은 옛 사람의 마음)
數莖翠葛迂幽石 (여러 줄기 푸른 칡넝쿨 먼 그윽한 돌)
一曲寒泉酒暮林 (한 굽이 찬 샘물은 저녁 숲에 술이로다.)
閑談轉入昇平事 (한가로운 이야기는 일상사로 옮겨지고)
遙聽樵歌百感深 (멀리서 들려오는 나무꾼 노래에 여러 감회 깊어지네.)
〈東都行(동도행)〉
來時故國路 (옛 고향 돌아오는 길에)
白雲正紛繽 (흰 구름만 정히 흩어지누나.)
茅屋三更雨 (띠 집에는 밤비 내리고)
今朝一朶春 (아침이 되니 한떨기 봄꽃 피네.)
〈旅懷(여회)〉
千里春光燕子歸 (천리 봄빛에 제비 돌아오고)
雲心水性動柴扉 (구름 마음 물 성품에 사립문 움직인다.)
苔封路石寒山雨 (이끼 돋은 돌길에 찬 산비 내리고)
酒熟江村暖夕暈 (술 익는 마을에 따뜻한 석양 노을)
客窓殘燭思今古 (여관 촛불 밑에서 어제 오늘 생각하네.)
故國遺墟論是非 (옛 나라 성터에서 시비를 논하니)
多恨多情仍爲病 (다정다한은 병이 되어)
惜花愛月拂征衣 (꽃을 아끼고 달을 사랑해 옷 떨치고 가네.)
〈東都竹枝(동도죽지)〉
杜鵑花發滿山中 (진달래 꽃 피어 산에 가득하여)
菜女衣裳綠映紅 (나물 캐는 처녀 푸른 치마 붉게 비추네.)
胸裏多懷歌半淚 (가슴속 그리움에 노래는 반이 눈물일레라.)
此心空虛此筐空 (이 마음도 텅 비었듯이 광주리도 비었네.)
〈戱吟(희음)〉
舊郞來到夕陽門 (지아비 석양 무렵 문에 이르니)
老婦含凝半避門 (늙은 아내는 말없이 반쯤 문을 피하네.)
可憐紅顔何處遇 (가련한 홍안은 어디서 만나랴.)
蕭蕭白髮映柴門 (쓸쓸한 백발이 사립문에 비친다.)
〈待人(대인)〉
地僻相逢少 (땅이 궁벽하니 서로 만날 사람 적고)
半生夢裏交 (반생 동안 꿈 속에서만 만나는구나.)
花下醪浮蟻 (꽃은 지고 술잔에 개미만 뜨네.)
無情落日郊 (무정하게 들에는 해가 지누나.)
〈送人(송인)〉
送子靑山路 (그대를 청산길에서 보내노니)
滿山花政飛 (꽃만이 산 가득하게 나네.)
行行白日暮 (가고 가 날이 저물면)
應悔振衣非 (의당 옷 떨치고 간 걸 후회하리니.)
〈贈(증)〉
落日長歌客到山 (저녁에 긴 노래 부르며 객이 산에 도착하니)
彈琴人在古松間 (고송 사이에 가야금 타는 이 있네.)
歸雲萬壑淸風動 (골짜기 가득 구름인데 맑은 바람 분다.)
漉酒○泉鏡月寒 (샘에서 술 거르니 거울 같은 달이 차다)(○은 판독불가-편집자 주)
騎牛我夢煙霞界 (소 타고 나는 연하 속에서 꿈꾸네.)
友鶴君心氷玉班 (친구 학군의 마음은 얼음과 옥일레라.)
俛仰千秋流水裡 (흐르는 물 속에서 천추를 우러르니)
一宵歡勝十年顔 (처음 기쁨이 10년의 얼굴이로라.)
〈龍化洞天聽杜鵑(용화동천청두견)〉
我何窮谷緊孤鞍 (나는 어째서 궁곡에서 홀로 안장을 감았나.)
曉日三更寄欄干 (새벽 삼경에 난간에 의지해)
宇宙茫茫人共醉 (우주는 망망해 사람이 함께 취하고)
乾坤寂寂鵑同歎 (건곤은 적적해 두견이 함께 탄식하네.)
雲光雲影和心潔 (구름 빛 구름 그림자 화하니 마음도 깨끗하네.)
花雨花風入淚丹 (꽃비 꽃바람에 눈물 붉게 든다.)
落魄江湖多少恨 (강호에 낙백하니 적은 한이 많다.)
倚樓長笛一星殘 (누각에 의지해 피리 부니 별 하나 남았네.)⊙
《유수집》을 공개한 한국외대 김종균(金鍾均·80) 명예교수는 “선생은 초등교육 3년을 끝으로 한학에 전념해 〈대학(大學)〉까지 마친 뒤 상경해 자기 의지대로 혜화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 불교공부를 했다”며 “선생은 ‘삼불차(三不借·사람·재물·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집안에서 자라나 한학과 한시에 능했다”고 밝혔다.
《유수집》에는 5언시와 7언시를 포함 31편의 한시가 실렸다.
김 교수는 “조지훈이 1939년 《문장》지 추천을 받았을 무렵, 자유시에서 자연정서를 노래하거나 불교적 선미(禪美), 고전적 한국정서를 나타내는 데에는 한시적 정취와 시형 및 운율을 가미해 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며 “조지훈 초기 시는 그 한시적 발상과 한시적 시형의 영향이 뚜렷하다”고 했다.
《유수집》의 실체는 김 교수가 1982년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 논문에 소개된 한시가 나중 《조지훈 전집1》(나남출판, 1997년간)에 실렸으나 인용 출처인 《유수집》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일부 누락된 채 31편 중 17편만 실렸다. 제목이 잘못 표기됐거나 원문과 비교해 틀린 한자도 발견된다. 김 교수 논문의 오자로 인해 잘못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유수집》을 둘러싼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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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의 한시집 《유수집(流水集)》 표지. 1968년 무렵에 복사된 것이어서 색이 바래 희미하다. 겉장에 ‘유수집·습작·경진(庚辰)·갑신(甲申)·남리(南里)’로 적혀 있다. 남리는 조지훈의 또 다른 아호다. |
“선생은 고려대 국문과 은사셨고 그분 연구실에서 공부를 했어요. 1968년 49세로 별세하셨는데 선생은 봄이면 흙바람 속에서 생각을 키우셨죠. 흙바람이 불던 4월을 지나 5월 중순에 돌아가셨어요. 시인이신 선생은 전아(典雅)하셨고 학자이신 선생은 치밀하셨으며 지사(志士)로서 선생은 과감하셨습니다.”
김 교수가 《월간조선》을 통해 《유수집》을 공개한 이유는 뭘까.
“1968년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던 중 친필 한시집 《유수집》을 찾았습니다. 당시 조교이던 고려대 한문학과 이동환(李東歡) 교수와 상의해 1부씩 복사해 나눠 갖고 그 원본은 선생님 댁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들으니 선생님 댁에 전했던 원본이 분실됐고 이동환 교수도 복사본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유수집》 원본에 대해 묻는 이가 여럿 있었으나 집안 서재 한쪽에 둔 것을 찾지 못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발견했어요. ‘조지훈 기념관’에 보내기 앞서 《유수집》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김 교수가 소장한 낡은 복사본 한시집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본’인 셈이다.
《유수집》에는 총 31편의 한시가 필사(筆寫)돼 있다. 모든 작품이 형식(5언시, 7언시)과 관계없이 창작 순서대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작품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인데 제작 연대는 경진(庚辰·1940)이고 쓴 곳은 수원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작품은 〈술회(述懷)〉인데 1953년 쓰인 것이다. 선생이 6·25 사변 중 쓴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회고적인 허탈한 마음을 노래한다. 부분 인용하면 이렇다.
〈回顧生平恨益新 (일생을 돌아보니 한이 더욱 새롭다.) / 浮沈滄海一葦身 (푸른 바다에 부침하는 한 갈대의 몸이네.) / 萬古興亡何日始 (만고의 흥망은 언제 비롯되었나.) / 百年風雨到今頻 (백년 바람비 지금도 잦네.) 후략〉
시집 전체로 볼 때 소재는 자연, 벗, 술, 기생, 고적(古蹟) 등과 구름, 산, 물소리, 사립문, 정자 등이 많이 등장한다. 주제는 자연에 의탁해 시국을 걱정하는 지사의 심정을 술회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통해 인간성의 경각(警覺)을 보이거나 친구나 술을 통해 한가한 생활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내용이다. 김종균 교수의 말이다.
“이 시편들은 당시의 전통적 한시의 풍을 그대로 본받고 있지만 심상(心象)의 참신성을 통해 기교적이고도 전아한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어요. 시어들이 평이하고 비유 또한 소박해 읽고 감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청록집》의 조지훈과 《유수집》의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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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집(流水集)》에 실린 조지훈 선생의 필사 한시들. 원본은 분실해 복사본만 있다. |
《유수집》은 생전 지상(紙上)에 발표된 적이 없는 미발표 시고(詩稿)이긴 하지만 초기 조지훈 자유시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1946년 간행된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3인 시집 《청록집》에 실린 조지훈의 12편의 시 중에서 그 시적 소재나 내용, 표현, 형식이 모두 한시적 영향하에서 형성되는데, 특히 2행시는 한시 1구(句)를 2줄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2행으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시가 한시적 시형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조지훈의 한시를 이해할 때만, 조지훈의 모든 시에서 드러난 한시적 영향을 이해하게 됩니다. 한시적 영향 관계가 그의 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시로서의 완숙을 지향하면서 개성으로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지훈 시는 한시적 영향과 서구시적 영향, 그리고 우리 시가인 향가와 시조, 가사의 영향을 받아 이룩된 것이긴 해도 초기 시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한시입니다.”
《월간조선》은 《유수집》에 실린 한시 31편 중 《조지훈전집1》에 없는 14편의 한시를 싣는다. 원문엔 한시 번역이 없다. 김 교수가 독자들을 위해 번역해 주었다.
〈訪花隨柳亭(방화수류정)〉
僧踏閑雲去 (스님이 한가로운 구름을 밟고 가네.)
中空一嶽晴 (공중의 멧부리 맑기도 하구나.)
寒鴉啼古木 (찬 까마귀 고목에서 우는)
九月訪花亭 (9월의 방화정이여.)
〈訪禪僧不遇(방선승불우)〉
松扉人跡少 (소나무 사립에는 인적이 드물고)
石逕落花多 (돌길에는 낙화가 지천이네.)
岩下泉聲細 (바위 아래는 샘물이 졸졸 소리 내고)
時聞採藥歌 (때로 채약가가 들려오누나.)
〈山居(산거)〉
山深晝日靜 (깊은 산에 낮은 조용하고)
扉掩洛花迷 (닫힌 사립에는 낙화만 어지럽구나.)
地僻人來少 (땅이 궁벽하니 찾아오는 사람 드물고)
寒堂午睡遲 (집이 차니 낮잠 늦게 드네.)
〈謁漢岩大禪師(알한암대선사)〉
雲霞深處泉聲咽 (구름 안개 깊은 곳 샘물 소리 졸졸)
時聞山禽路更迷 (산새 소리 듣다가 길을 잃었다.)
無事老僧岩下睡 (노스님은 태평스레 바위 아래에서 조는데)
靑天白日落花飛 (청천백일에 낙화만 날린다.)
〈與枕處上人拈韻共賦(여침처상인념운공부)〉
庬睡碧山廬 (삽살개 조는 푸른 산 집)
南風抑卷舒 (남풍은 서책 펴기를 말리네.)
尋雲兼採藥 (구름도 찾고 약초도 캐면서)
帶月或看書 (달밤에는 혹 책도 보네.)
鱖肥携兒釣 (쏘가리가 살찌니 아이는 낚시하고)
麥長共婦鋤 (보리가 자라니 부부가 함께 김매네.)
拙計還成樂 (작은 계획도 즐거움 되니)
遺氓意有餘 (가난한 농부의 뜻도 여유로워라.)
〈訪柳一壽君 次三山詩會韻(방유일수군 차삼산시회운)〉
此地煙霞罕於今 (이 땅의 연하(안개와 노을. 조용한 산수의 경치)는 이제 보다 드문데)
有樓有月白雲尋 (누・樓 있고 달 있어 흰 구름 찾았더니)
逝矣長江遊子意 (장강에 가서 마음대로 노니니)
屹然靑嶂古人心 (우뚝 솟은 푸른 산은 옛 사람의 마음)
數莖翠葛迂幽石 (여러 줄기 푸른 칡넝쿨 먼 그윽한 돌)
一曲寒泉酒暮林 (한 굽이 찬 샘물은 저녁 숲에 술이로다.)
閑談轉入昇平事 (한가로운 이야기는 일상사로 옮겨지고)
遙聽樵歌百感深 (멀리서 들려오는 나무꾼 노래에 여러 감회 깊어지네.)
〈東都行(동도행)〉
來時故國路 (옛 고향 돌아오는 길에)
白雲正紛繽 (흰 구름만 정히 흩어지누나.)
茅屋三更雨 (띠 집에는 밤비 내리고)
今朝一朶春 (아침이 되니 한떨기 봄꽃 피네.)
〈旅懷(여회)〉
千里春光燕子歸 (천리 봄빛에 제비 돌아오고)
雲心水性動柴扉 (구름 마음 물 성품에 사립문 움직인다.)
苔封路石寒山雨 (이끼 돋은 돌길에 찬 산비 내리고)
酒熟江村暖夕暈 (술 익는 마을에 따뜻한 석양 노을)
客窓殘燭思今古 (여관 촛불 밑에서 어제 오늘 생각하네.)
故國遺墟論是非 (옛 나라 성터에서 시비를 논하니)
多恨多情仍爲病 (다정다한은 병이 되어)
惜花愛月拂征衣 (꽃을 아끼고 달을 사랑해 옷 떨치고 가네.)
〈東都竹枝(동도죽지)〉
杜鵑花發滿山中 (진달래 꽃 피어 산에 가득하여)
菜女衣裳綠映紅 (나물 캐는 처녀 푸른 치마 붉게 비추네.)
胸裏多懷歌半淚 (가슴속 그리움에 노래는 반이 눈물일레라.)
此心空虛此筐空 (이 마음도 텅 비었듯이 광주리도 비었네.)
〈戱吟(희음)〉
舊郞來到夕陽門 (지아비 석양 무렵 문에 이르니)
老婦含凝半避門 (늙은 아내는 말없이 반쯤 문을 피하네.)
可憐紅顔何處遇 (가련한 홍안은 어디서 만나랴.)
蕭蕭白髮映柴門 (쓸쓸한 백발이 사립문에 비친다.)
〈待人(대인)〉
地僻相逢少 (땅이 궁벽하니 서로 만날 사람 적고)
半生夢裏交 (반생 동안 꿈 속에서만 만나는구나.)
花下醪浮蟻 (꽃은 지고 술잔에 개미만 뜨네.)
無情落日郊 (무정하게 들에는 해가 지누나.)
〈送人(송인)〉
送子靑山路 (그대를 청산길에서 보내노니)
滿山花政飛 (꽃만이 산 가득하게 나네.)
行行白日暮 (가고 가 날이 저물면)
應悔振衣非 (의당 옷 떨치고 간 걸 후회하리니.)
〈贈(증)〉
落日長歌客到山 (저녁에 긴 노래 부르며 객이 산에 도착하니)
彈琴人在古松間 (고송 사이에 가야금 타는 이 있네.)
歸雲萬壑淸風動 (골짜기 가득 구름인데 맑은 바람 분다.)
漉酒○泉鏡月寒 (샘에서 술 거르니 거울 같은 달이 차다)(○은 판독불가-편집자 주)
騎牛我夢煙霞界 (소 타고 나는 연하 속에서 꿈꾸네.)
友鶴君心氷玉班 (친구 학군의 마음은 얼음과 옥일레라.)
俛仰千秋流水裡 (흐르는 물 속에서 천추를 우러르니)
一宵歡勝十年顔 (처음 기쁨이 10년의 얼굴이로라.)
〈龍化洞天聽杜鵑(용화동천청두견)〉
我何窮谷緊孤鞍 (나는 어째서 궁곡에서 홀로 안장을 감았나.)
曉日三更寄欄干 (새벽 삼경에 난간에 의지해)
宇宙茫茫人共醉 (우주는 망망해 사람이 함께 취하고)
乾坤寂寂鵑同歎 (건곤은 적적해 두견이 함께 탄식하네.)
雲光雲影和心潔 (구름 빛 구름 그림자 화하니 마음도 깨끗하네.)
花雨花風入淚丹 (꽃비 꽃바람에 눈물 붉게 든다.)
落魄江湖多少恨 (강호에 낙백하니 적은 한이 많다.)
倚樓長笛一星殘 (누각에 의지해 피리 부니 별 하나 남았네.)⊙
| 6·25 당시 조지훈 선생 일화 “인(仁)과 지(智) 겸비한 산 같고 물 같은 분”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조지훈 선생은 《시론》 책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조국은 침략을 당했습니다. 저 포성을 들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선생은 “이 조국을 위하여 그 슬기와 힘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며 “또 다시 약해져서 남의 눌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포성이 창문을 더 세차게 흔들었다. 요동하는 유리창 소리가 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조지훈 선생은 담담히 낮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하느니라. 우리 함께 이 마음으로 나가 싸웁시다. 적은 지금 우리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때 다시 한 번 창문이 크게 흔들렸다. 선생은 그 특유의 몸짓으로 일어나서 강의실 문을 나갔다. 선생은 6·25 당시 전시 종군기자단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공군 기자단에 참여했다.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은 조지훈이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선생의 제자 사랑 또한 남다른 바 있습니다. 선생은 권력자 앞에서는 한 번도 고개 숙인 적 없지만 제자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시지 않고 일어나셨어요. 이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인자여산(仁者如山)이요 지자여수(智者如水)’라더니 선생은 인과 지를 겸비한 산 같고 물 같은 분이셨습니다. 선생이야말로 ‘죽는 그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가신 분이 아닌가 싶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