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참하리만큼 날카로운 눈빛과 푸른빛이 도는 이빨’
⊙ 有酒無量이나 보기 싫은 酒酊, 한 번도 부려본 일이 없어
⊙ 땀에 축축한 너무나 진지한 李箱의 이마를 보고 전신이 오싹하게 소름
⊙ 有酒無量이나 보기 싫은 酒酊, 한 번도 부려본 일이 없어
⊙ 땀에 축축한 너무나 진지한 李箱의 이마를 보고 전신이 오싹하게 소름
시인 이상(李箱)이 해괴한 시 〈오감도(烏瞰圖)〉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처음 등장했을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는 겨우 스무 살 문학청년이었다. 미당은 2년 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며 정식 데뷔했다.
미당은 5세 연상의 이상을 ‘박쥐 같은 귀재’라 불렀다. 미당은 이상을 평하기를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시단에 내밀고 당시 이 나라의 가장 유능한 중견 문인들의 회합이었던 구인회의 한 ‘멤버’가 대뜸 돼버렸다”고 했다. 미당은 1971년 《월간중앙》 10월호 〈이상의 일〉이라는 산문에서 ‘당시 우리 민족의 꼬락서니의 가장 처절한 상징’으로 이상을 묘사했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미당의 산문 〈이상 김해경의 추억〉은 지금은 폐간된 《대한일보(大韓日報)》 1970년 1월 15일자에 실렸다. 《월간중앙》에 기고한 〈이상의 일〉보다 내용은 짧지만 1년 앞서 쓴 글로 이상의 연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글이다.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이던 미당은 1935년 가을, 이상을 예고 없이 찾아간다. 최하급 일본식 건물인 이상의 집(을지로 4가 뒷골목)은 오싹하게도 ‘박쥐나 한두 마리 살 만한’ 집이었다. 그러나 처참하리만큼 날카로운 이상의 눈빛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후 미당은 마음속 깊이 이상을 열광했다. 산문 〈이상 김해경의 추억〉의 행간을 통해 미당이 얼마나 이상을 동경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상 김해경의 추억
徐廷柱
내가 1936년의 《동아일보》 신춘현상 문예 시부(詩部)에 당선하기 바로 한 해 전인 1935년 가을, 나는 그때 내가 다니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의 동급(同級)이었던 함형수(咸亨洙)하고 함께 동숭동에 하숙하고 있던 신진 소설가 김동리(金東里)를 찾아가서 같이 ‘이상’이라는 괴짜를 한 번 만나보러 가자고 졸라댔다. 이상은 이보단 한 해 전인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시 〈오감도〉와 연달아 써낸 소설 〈날개〉 등의 작품과 아울러 ‘주야’(晝夜)를 바꾸어서 사방에 작품 발표를 하고 있던 그가 소설을 쓰고 있던 김유정(金裕貞)과 친구이었던 폐병 2기 환자라는 것, 또 건축기수(建築技手) 퇴물(退物)이었다는 것-그런 소문도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해 《조선중앙일보》의 신춘현상문예에 〈화랑(花郞)의 후예(後裔)〉라는 소설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발을 들여놓고 다음 작품들에 골몰(汨沒)해 있던 김동리는 그의 작품의 일이 바빠서 그랬든지, 아니면 그 ‘괴짜 구경하는 취미’라는 것이 영 없는 그의 청소년기의 성미 때문인지, 우리 보고만 가보라고 하고, 자기는 움쩍도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어 할 수 없이 함형수와 나 둘이서만 그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그야 나한테도 구경에 잘 끌리지 않는 성미도 없진 않았지만 이상이 풍기고 있는 작품과 소문의 매력은 나를 그대로 가만히 있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청계천로 4가에서 을지로 4가 쪽으로 가는 어느 질척질척한 골목길의 막바지에 깜장빛 널판자로 엮어 싼 양기와를 이은 집, 문간도 한 뼘의 마당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놓으면 바로 그의 단칸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때마침 그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소설 〈날개〉의 주인공 그대로 깜장 코르덴 양복바지에 깜장 ‘도꾸리 셔츠’ 차림이었는데 세수도 면도도 잘은 않는 듯한 그의 두 손의 깜장 때 든 손톱들과 꺼치시한 수염 난 턱주가리의 인상의 틈에서도 그의 처참하리만큼 날카로운 눈빛과 푸른빛이 더 많은 단단하고 가지런한 흰 이빨들이 유난히 솟아 보였다.
지금 소공동에서 범양사(汎洋社)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성범(李成範)이 그때는 우리와 같은 문학청년이었고 또 이상한테 뭔지 매력을 느낀다 해서 같이 갔었는데 이상은 이때 초대면(初對面)의 우리 세 사람의 말들에 대해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말할 내용들이 정말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배 고아나 병자가 후배 고아나 병자에게 흔히 하는 것 같은 일종의 측은한 느낌을 그 음조(音調)에 어딘가 띠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문득 낯을 붉히고 뜸해지곤 했다.
그러자 여섯 시쯤이나 되었을까, 이상은 자리 속에서 불쑥 일어났는데 아까 이불 속에서 입고 있었던 그대로의 위에다가 낡은 ‘바바리’만 하나 걸치고, 이곳 역시 낡을 대로 낡은 깜장 ‘해트’를 머리에 가벼이 얹고는 드르르 미닫이를 열며 앞장을 섰다.
우리는 문득 낯을 붉히고 뜸해지곤 했다
이상의 이 무렵의 그 밤의 산보(散步)라는 것은 한두 군데 술집에서 몇 시간을 놀다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해 어스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튿날 날이 훤하게 새는 그에게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늙어지면 못 노나니’ 등의 가사를 가진 창부타령을 아주 멋들어지게 썩 잘 불렀고 또 술도 문자 그대로 유주무량(有酒無量)이지만 보기 싫은 주정은 단 한 번도 부려본 일이 없었고 또 무슨 그의 계율(戒律)인 듯이 술값은 어느 새인지 감쪽같이 모두 그의 부담(負擔)으로 해치워내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 우리는 지금의 반도호텔 근방의 어떤 선술집에 서서 있었다. 지금과는 아주 달라서 그때엔 여기도 지금의 계동(桂洞) 비슷한 기와집 마을이어서 새벽 닭 소리가 여기저기서 교교(皎皎)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은 술과 그의 노래를 문득 뚝 끊더니 그의 앞에 있는 주모(酒母)의 ‘스웨터’의 가슴 앞의 어떤 단추에 그의 바른손의 엄지를 갖다대고 꽤 되게, 또 꽤 오래 계속해서 그걸 눌러대기 시작했다.
“히히히히, 이분이 왜 이러셔?”
어쩌고 주모는 처음 웃음으로 씻어 넘기더니 그건 드디어 깨나 되게는 눌려졌는지 상당히 뜨악한 “아얏!” 소리가 나오고 “왜 이래, 이 사람이!”로까지 변했다.
나는 이 교교한 ‘새벽 닭’ 울음 속에 이상의 땀에 축축한 너무나 진지한 이마를 보고 있는 동안 문득 전신이 오싹하게 소름이 끼쳐 옴을 어쩔 길이 없었다. 그의 주모 단추 누르는 열심한 것은 꼭 어느 문 잘 안 열리는 집 앞에 선 방문객의 초인종 눌러대는 모습과 같았고, 또 이건 누구 개인 집의 주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늘과 역사와 영원을 향한 그의 마지막 SOS 신호같이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처=《대한일보》 1970년 1월 15일, ‘나와 詩人部落 前後’ 중에서. 자료제공=金鍾旭)⊙
미당은 5세 연상의 이상을 ‘박쥐 같은 귀재’라 불렀다. 미당은 이상을 평하기를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시단에 내밀고 당시 이 나라의 가장 유능한 중견 문인들의 회합이었던 구인회의 한 ‘멤버’가 대뜸 돼버렸다”고 했다. 미당은 1971년 《월간중앙》 10월호 〈이상의 일〉이라는 산문에서 ‘당시 우리 민족의 꼬락서니의 가장 처절한 상징’으로 이상을 묘사했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미당의 산문 〈이상 김해경의 추억〉은 지금은 폐간된 《대한일보(大韓日報)》 1970년 1월 15일자에 실렸다. 《월간중앙》에 기고한 〈이상의 일〉보다 내용은 짧지만 1년 앞서 쓴 글로 이상의 연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글이다.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이던 미당은 1935년 가을, 이상을 예고 없이 찾아간다. 최하급 일본식 건물인 이상의 집(을지로 4가 뒷골목)은 오싹하게도 ‘박쥐나 한두 마리 살 만한’ 집이었다. 그러나 처참하리만큼 날카로운 이상의 눈빛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후 미당은 마음속 깊이 이상을 열광했다. 산문 〈이상 김해경의 추억〉의 행간을 통해 미당이 얼마나 이상을 동경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상 김해경의 추억
徐廷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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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의 〈이상 김해경의 추억〉을 실은 《대한일보》 1970년 1월 15일자 기사. |
그러나 이해 《조선중앙일보》의 신춘현상문예에 〈화랑(花郞)의 후예(後裔)〉라는 소설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발을 들여놓고 다음 작품들에 골몰(汨沒)해 있던 김동리는 그의 작품의 일이 바빠서 그랬든지, 아니면 그 ‘괴짜 구경하는 취미’라는 것이 영 없는 그의 청소년기의 성미 때문인지, 우리 보고만 가보라고 하고, 자기는 움쩍도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어 할 수 없이 함형수와 나 둘이서만 그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그야 나한테도 구경에 잘 끌리지 않는 성미도 없진 않았지만 이상이 풍기고 있는 작품과 소문의 매력은 나를 그대로 가만히 있겐 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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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이 생애 말기에 그린 자화상. 그림 옆에 일본어로 ‘아주 패가 붙어버린 요시찰 원숭이. 수시로 인생의 감옥을 탈출하기 때문에 원장(園長)님께서는 심려(心慮)한단 말이다’라고 적어놓았다. |
지금 소공동에서 범양사(汎洋社)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성범(李成範)이 그때는 우리와 같은 문학청년이었고 또 이상한테 뭔지 매력을 느낀다 해서 같이 갔었는데 이상은 이때 초대면(初對面)의 우리 세 사람의 말들에 대해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말할 내용들이 정말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배 고아나 병자가 후배 고아나 병자에게 흔히 하는 것 같은 일종의 측은한 느낌을 그 음조(音調)에 어딘가 띠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문득 낯을 붉히고 뜸해지곤 했다.
그러자 여섯 시쯤이나 되었을까, 이상은 자리 속에서 불쑥 일어났는데 아까 이불 속에서 입고 있었던 그대로의 위에다가 낡은 ‘바바리’만 하나 걸치고, 이곳 역시 낡을 대로 낡은 깜장 ‘해트’를 머리에 가벼이 얹고는 드르르 미닫이를 열며 앞장을 섰다.
우리는 문득 낯을 붉히고 뜸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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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서정주. |
그는 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늙어지면 못 노나니’ 등의 가사를 가진 창부타령을 아주 멋들어지게 썩 잘 불렀고 또 술도 문자 그대로 유주무량(有酒無量)이지만 보기 싫은 주정은 단 한 번도 부려본 일이 없었고 또 무슨 그의 계율(戒律)인 듯이 술값은 어느 새인지 감쪽같이 모두 그의 부담(負擔)으로 해치워내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 우리는 지금의 반도호텔 근방의 어떤 선술집에 서서 있었다. 지금과는 아주 달라서 그때엔 여기도 지금의 계동(桂洞) 비슷한 기와집 마을이어서 새벽 닭 소리가 여기저기서 교교(皎皎)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은 술과 그의 노래를 문득 뚝 끊더니 그의 앞에 있는 주모(酒母)의 ‘스웨터’의 가슴 앞의 어떤 단추에 그의 바른손의 엄지를 갖다대고 꽤 되게, 또 꽤 오래 계속해서 그걸 눌러대기 시작했다.
“히히히히, 이분이 왜 이러셔?”
어쩌고 주모는 처음 웃음으로 씻어 넘기더니 그건 드디어 깨나 되게는 눌려졌는지 상당히 뜨악한 “아얏!” 소리가 나오고 “왜 이래, 이 사람이!”로까지 변했다.
나는 이 교교한 ‘새벽 닭’ 울음 속에 이상의 땀에 축축한 너무나 진지한 이마를 보고 있는 동안 문득 전신이 오싹하게 소름이 끼쳐 옴을 어쩔 길이 없었다. 그의 주모 단추 누르는 열심한 것은 꼭 어느 문 잘 안 열리는 집 앞에 선 방문객의 초인종 눌러대는 모습과 같았고, 또 이건 누구 개인 집의 주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늘과 역사와 영원을 향한 그의 마지막 SOS 신호같이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처=《대한일보》 1970년 1월 15일, ‘나와 詩人部落 前後’ 중에서. 자료제공=金鍾旭)⊙
